김은부 가계도
원성왕후 및 원혜왕후는 태후로 추존됨 * 원성태후 : 덕종, 정종, 인평왕후(문종 왕비), 경숙공주 * 원혜태후 : 문종, 평양공 왕기, 효사왕후(덕종 왕비) * 원평왕후 : 효경공주
원성태후(元成太后) 시대 고려 생몰년 ?-1028(현종19) 본관 안산김(安山金) 시호 광선(廣宣) 활동분야 왕비 원성태후(元成太后)에 대하여 원성태후(元成太后) ?∼1028(현종 19). 고려 제8대왕인 현종의 제3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시중을 지낸 은부(殷傅)의 딸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1010년(현종 1)에 거란병이 내침하자 왕은 나주로 피난하였다가 적병이 물러가자 왕궁으로 귀환하던 중 공주에 묵게 되었다. 이때 절도사인 은부는 왕을 영접하고, 그 딸로 하여금 어의를 지어드리게 하고,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왕은 이를 맞아들여 연경원주(延慶院主)로 삼았다. 정종을 낳은 뒤 궁주(宮主)가 되고 얼마 뒤에 왕비로 봉하여졌다. 한편, 왕비의 두 자매도 함께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세 자매가 함께 한 왕의 왕비가 된 예는 이것이 처음이며, 광종 때 왕실족내혼이 이루어진 이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이다. 현종과의 사이에 덕종·정종의 두 아들과 인평왕후(仁平王后)와 경숙공주(景肅公主)를 두었다. 시호는 원성왕후이고 명릉(明陵)에 장사하였으며 현종 묘실에 합장하였다. 덕종 즉위 후에 왕태후로 추존하였고, 뒤에 용의(容懿)·공혜(恭惠), 1056년(문종 10)에 영목(英穆), 뒤에 양덕(良德)·신절(信節)·순성(順聖), 1140 년(인종 18)에 자성(慈聖), 1253년(고종 40)에 광선(廣宣)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 閥族에 관한 硏究(黃雲龍, 親學社, 1978). 〈鄭容淑〉
--------------------------------------------------- 원성(元城) 태후(太后) 김(金)씨는 안산 사람이니 시중 김은부(殷傅)의 딸이다. 덕종(德宗), 정종(靖宗), 인평(仁平) 왕후, 경숙(景肅) 공주를 낳았다.
시초에 현종이 남녘으로 피난갔다가(거란) 침략군이 퇴각한 후 돌아오는 도중에 공주(公州)에 이르렀을 때 김은부는 절도사로 있었는데 그의 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드리게 하였더니 이로 인하여 그를 맞아 들여 연경원주(延慶院主)라고 불렀다.
그가 현종 9년 7월에 정종(靖宗)을 낳으니 왕이 연경원을 연경궁으로 고치고 사절을 보내 예물을 주었다. 현종 13년 9월에 김은부에게 추충(推忠) 수절(守節) 창국(昌國) 공신(功臣) 칭호와 개부의동삼사 수 사공 관직과 상주국의 훈위를 주고 안산군(安山郡) 개국후(開國侯)의 작위와 식읍(食邑) 1천 호를 주었으며 죽은 모친에게는 안산군(安山郡) 대부인(大夫人)을 추증하였다.
또 이내 후(后)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정종 15년에는 또 조부 김긍필(肯弼)에게 상서(尙書), 우복야(右僕射) 벼슬과 상주국(上柱國) 훈위를 주고 안산현(安山縣) 개국후(開國侯)를 봉하고 식읍(食邑) 1천5백 호를 추증하였으며 죽은 조모에게 안산군 대부인을 추증하였고 외조부 이허겸(李許謙)에게 상서 우복야 벼슬과 상주국 훈위를 주고 소성현(邵城縣) 개국후를 봉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다.
정종 18년 9월에 왕후가 살던 옛집의 택호를 장경궁이라고 하였다. 그가 정종 19년(1028) 7월에 죽으니 시호를 원성 왕후라고 하였으며 명릉(明陵)에 매장하였고 현종의 사당에 합사하였다.
덕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태후로 추존하고 후에 용의 공혜(容懿恭惠)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문종 10년 10월에 영목(英穆)이라는 시호를 주고 후에 또 양덕(良德) 신절(信節) 순성(順聖)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인종 18년 4월에는 자성(慈聖)이라는 시호를, 고종 10년 10월에는 광선(廣宣)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고려사 제88권 열전1 후비1 ===================================================
원혜태후(元惠太后) 간략정보 시대 고려 생몰년 미상 본관 안산김(安山金) 활동분야 왕비
원혜태후(元惠太后)에 대하여 원혜태후(元惠太后) 생몰년 미상. 고려 현종의 제4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아버지는 시중이었던 은부(殷傅)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원성태후(元成太后)와 원평왕후(元平王后)와는 자매간이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난하였던 현종이 왕궁으로 귀환도중 공주에 들렀을 때 납비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왕실내에서만 이루어지던 혼인이 귀족가문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 문종·평양공 기(平壤公基)·효사왕후(孝思王后)를 낳았다. 문종은 고려 제11대왕이 되고, 그뒤 고려왕통은 문종의 후손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리고 평양공 기의 후손은 대대로 왕실 공주와 계속적인 혼인관계를 맺는 집안으로 고정되었다. 처음에 안복궁주(安福宮主)라 칭하였다가 연덕(延德)으로 개칭하였고 사후에 원혜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능호는 회릉(懷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閥族에 관한 硏究(黃雲龍, 親學社, 1978). 〈鄭容淑〉 1025년에 왕비로 추봉되고 1027년에 평경(平敬)의 시호를 내렸으며 문종이 즉위한 뒤에 태후로 추존되었다. 원평왕후 김씨(元平王后 金氏) 생몰년 미상. 고려 현종의 제7비. 안산김씨(安山金氏)로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은부(殷傅)이며, 어머니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이허겸(李許謙)의 딸이다. 현종의 제3비 원성태후(元成太后)와 제4비 원혜태후(元惠太后)와는 자매간이다.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까지 피난하였던 현종이 왕궁으로 귀환하던 도중 공주지방에 들렀을 때 납비(納?)된 언니들을 따라 왕비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 효경공주(孝敬公主)를낳았다. 1028년(현종 19)에 원평왕후로 추증되었으며, 능호는 의릉(宜陵)이다.
================================================ 효사왕후 (孝思王后)
생몰년 미상. 고려 제9대 덕종의 제3비. 현종의 딸이며, 어머니는 현종의 제4비 원혜태후 김씨(元惠太后金氏)이고,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씨로 칭하였다.
문종 및 종실 평양공 기(平壤公基)와 친남매간이고, 외할아버지는 현종에게 3명의 딸을 왕비로 들여보낸 김은부(金殷傅)이다.
덕종을 낳은 현종의 제3비 원성태후(元成太后)와 원혜태후는 자매간이므로 덕종과 효사왕후는 모계로도 이종사촌에 해당된다. 친가뿐 아니라 외가까지 이처럼 지친관계의 혼인은 고려왕실에서도 아주 드문 사례에 속한다.
태조는 나라를 건국한 뒤 자신의 왕자와 공주를 서로 혼인시켰는데, 이는 왕족의 순수혈통을 보호하고 왕실의 단결을 강화하며, 소수 혈족을 중심으로 왕실의 특권을 향유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현종대에 와서 다시 나타난 남매간 혼인도 태조와 비슷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정변을 통하여 목종이 축출되고 현종이 즉위하는 정치적 격동을 거쳤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여 왕족의 위치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인평왕후
생몰년 미상. 고려 제11대 문종의 제1비. 고려 제8대왕인 현종의 딸로 어머니는 현종비인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문종의 모후인 원혜태후(元惠太后)와는 자매간이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씨로 하였다. 이 혼인은 친계로는 남매간 혼인이며, 모계로는 이종4촌간이 된다. 고려시대에 이와같은 근친혼은 태조가 어머니를 달리하는 그의 자녀를 혼인시키면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왕실혼의 한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복남매간의 극단적 근친혼은 광종·덕종·문종의 사례가 있을 뿐 그다지 많지는 않다. 왕자들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근친혼의 사례가 있으며, 그런 경우 왕실 내부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문종과 인평왕후와의 혼인은 모계 4촌이라는 면에서 종래의 혼인보다도 특이한 경우이다. 이는 현종이 김은부(金殷傅)의 세 자매를 모두 왕비로 맞고 거기에서 낳은 자녀를 서로 결혼시킨 결과 나타난 현상이다. 왕실내의 단결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高麗史 ≪참고문헌≫ 高麗初期 婚姻政策의 추이와 王室 族內婚의 성립(鄭容淑, 韓國學報 37, 1984)
고려 8대 임금 현종의 선릉 고려 11대 문종(재위 1046~1083)의 경릉
고려 초기 계보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전국을 다스리기 위해 지방 호족 세력들과 무차별적으로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정실 부인이 무려 29명이나 됩니다. 그 자손대에서 혜종-정종-광종이 왕위를 받게 되고 손자대에서 경종-성종-현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당 여기까지 대략적인 것만 머리에 넣으시고 다음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그림은 왕후별로 자손들 계보를 정리한 것입니다. 자손이 없는 왕후들도 많고 타살된 왕자들도 많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중복된 왕후의 이름들이 많이 보이지요?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근친혼을 따라서 왕족간 (이복 형제간)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는 왕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외척의 정권 탐욕을 방지하여 왕실을 튼실히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입니다. 그럼 근친혼이 어느 정도였는지, 어떤 식으로 혼인이 이뤄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혜종-정종은 호족 세력과 결혼을 했고 광종때부터는 왕족만을 왕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후 효종때부터는 그 양상이 줄어들게 됩니다. 이제 전반적인 고려 초기 왕들의 계보나 혼인 체계 같은 거시적인 그림이 정리된 것으로 보고
왕조별로 세부적인 상황을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1. 태조 (왕건, 25년) 왕건은 전국의 호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많이 해서 부인들이 29명이나 됩니다.
(1) 신혜왕후 : 정주 출신 호족 유천궁의 딸로, 태조가 궁예의 휘하 장군으로 있을때 아내로 맞았다.
궁예 말년에 정사가 포악해지자 홍유, 배현경 등이 왕건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왕건이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 때 신혜왕후가 나와 "의로써 탐학을 물리치는 것은 예로부터 해온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녀자도 분발하겠거늘 하물며 대장부께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갑옷을 입혀 의거에 참여하도록 권하였다.
(2) 장화왕후 : 궁예의 부장으로 나주에 출전했을때 오씨와 혼인하였고 왕건이 즉위후 왕후가 되었다. (3) 신명순성왕후 : 태사 내사령에 추증된 추우 유긍달의 딸이다. 고려 창건 직후에 왕비로 맞았고 충주는 후백제와 신라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충지이며 신라 귀족이 많이 사는
신라 5소경의 하나이다.
(4) 신정왕후 : 태조 즉위후 두번째 왕비로 황주는 신라시대 패강진 지역에 속하며 신라 국경수비의 육군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요충지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음으로써 자신의
지원세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선의왕후가 25세에 죽자 성종을 길렀다.
(5) 신성왕후 : 경주 김씨로 잡간이었던 김억렴의 딸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신라왕실과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6) 정덕왕후 : 정주 유씨로 시중 정덕영의 딸이다. 신혜왕후에게서 소생이 없자 같은 집안의 딸을 다시 맞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 헌목대부인 : 7번째 부인, 경주 출신으로 좌윤 평준의 딸이다. 수명태자의 어머니고 흥덕원군의 할머니이다. 태조의 여러 후비들 중 유일하게 대부인 칭호를 가지고 있다.
평씨 성은 신라 육두품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신분적 위치는 높지 않았다.
2. 혜종 (왕무, 2년) 태조가 나주를 정벌할 때 지역 호족 딸인 오씨와 혼인하였으나 나주의 권력 기반이 약해 혜종은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됩니다.
태조의 장남으로 박술희가 도와 태자가 되었고 태조 사후에 왕이 되었으나 이복동생 왕요, 왕소가 충주 지역 세력을 등에 없고 왕위에 도전합니다. 왕규(태조와 사돈지간)가 이를 혜종에게 알렸으나 힘이 약한 혜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왕규는 왕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인지 재위 2년만에 병에 걸려 죽게 된다. 이어 이복동생 왕요가 군신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도 확실하지만은 않다. (1) 의화왕후 : 진주 임씨로, 병부령 대광 임희의 딸이다. 태조가 태자비로 선택한 데는 진천의 지역적
위치와 임희가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군사실력자로서의 위치 때문이었다. 흥화군은
광종 때 역모죄로 참사당하였고, 경화군부인은 광종의 제2비로 들어간다. 이는 당시
혜종의 외가 세력이 약했으므로 충주 호족 세력의 역모를 잠재우기 위한 고육지책
이었을 것이다.
(2) 후광주원부인 :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 왕규의 딸이다. 왕규는 태조와도 혼인관계에 있는데 왕규의 학문적 능력과 군사적 지원으로 혜종의 왕위가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다.
혜종이 즉위한 뒤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로 추대하기 위하여 혜종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되고 혜종이 죽은뒤 정종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왕규와 일당 수백명이 같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후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 의문이다. 살았더라도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3) 청주원부인 : 청주 김금률의 딸로 청주남원부인 (정종의 부인)과 자매지간이다. 청주는 신라 5소경 중 서원경이 있던 곳으로 독자적 지방세력이 구축되었던 곳이다. 고려 건국 직후부터
반란이 여러차례 시도되었을 정도로 반고려적 성향을 띄었고 태조가 민심수습의 노력
결과로 혼인이 성사되었다. 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처제를 정종과 혼인시켜
왕위계승 경쟁을 무마시키고자 하였다.
3. 정종 (왕요, 4년)
이복동생 왕요가 혜종의 측근 박술희를 제거하고 혜종이 즉위 2년만에 병사(독살?)하자
군신들의 추대로 재위에 오르게 되고 왕식렴(왕건의 사촌동생)의 도움으로 외척 왕규를 제거합니다. 정종의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았다. 딸인 낙랑공주는 신라 경순왕의 부인으로 들여 신라 세력을 어울렀다. (1) 문공왕후 :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 (언니)로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 차원인 듯 하다. 박영규의 3자매는 모두 고려 왕실과 혼인하였는데 첫째는 태조의 17비이다.
(2) 문성왕후 :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 (동생)로 경춘원군은 광종 때 역모죄로 참사되었다. 성명 미상의 공주는 태조의 아들인 효성태자와 혼인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3) 청주남원부인 : 혜종의 제3비인 청주원부인의 친동생이다 4. 광종 (왕소, 26년) 정종이 재위 4년만에 병석에 누워 사망하자 정종의 선위를 받아 동복동생인 광종이 25세 나이로 득위한다.
왕권강화를 위해 무고한 살육이 많았다 (박승위, 김긍률과, 박영규, 효은태자, 흥화군, 경춘원군). 노비안검법 제정으로 노비를 해방하였다 (호족세력 약화, 세금 늘림). 과거제도 시행 (쌍기)으로 인재 등용하였다.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근친결혼을 장려하고 외척의 폐를 없애려 했다. (1) 대목왕후 : 신정왕후의 딸로 광종의 사촌동생이다. 고려시대 첫 근친혼이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려 하자 노비들이 그 주인을 배반하는 풍조가 성행하였으므로 이 법의 실시를
중지하도록 건의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종의 어머니이고 천추공주는 문원대왕
과 문혜왕후의 아들인 천추전군과 혼인하였다. 문혜왕후는 태조의 6번째 왕후인
정덕왕후 유씨의 딸로서 신혜왕후 슬하에 자식이 없자 동일한 호족인 정주에서 혼인한
여인이다.
문덕왕후는 수명태자의 아내가 되어 선정왕후를 출산하게 되나 수명태자가 죽게 되자 성종의 재가하게 된다. 이후 선정왕후는 목종의 왕비가 된다.
(2) 경화군부인 : 혜종 집권 당시 왕규가 정종과 광종이 반역 혐의가 있다고 참소하자 혜종은 아우에 대한 신뢰의 표시 및 동생들의 실력을 강화시켜주기 위한 조취로 자신의 딸을 광종에게
출가시켰다. 반대로, 왕족내혼을 통해 왕실에서 입지가 확고하게 된 동생 광종에게
자신의 딸을 출가시킴으로써 혜종 자신의 신변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빈약한 혜종의 왕권이었기 때문에 경화군부인은 왕의 공주였지만 왕후가 아닌 부인에
머무른 것이 아닌가 한다.
5. 경종 (왕유, 6년)
광종의 무고한 살육의 원한을 풀어주고자 경종은 복수법을 시행해서 복수를 허용하게 되는데,
이때 왕족인 원녕태자, 효성태자까지 복수를 당해 사망하는 일이 생기게 되자 복수법을 금지하게 된다. 관리의 봉급제도인 전시과(토지의 차등분배)를 제정하였고, 후반에는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성종의 동생인 헌애왕후(천추태후), 헌정왕후를 왕비로 맞아 들인다. 재위 6년만에 병석에 누워 성종에게 양위하고 사망하였다. (1) 헌숙왕후 : 경순왕의 딸로 태조의 외손녀일 가능성이 크다 (낙랑공주?). (2) 헌의왕후 : 문원대왕의 딸. 근친간의 혈족혼을 통해 왕실의 순수 혈통을 유지함으로써 귀족과 다른 초월적 존재임을 과시하고 왕실내의 단결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신라시대 왕실의 혼인제도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계가 같더라도 모계만 다르면 생활권을 달리하는 방처혼적(訪妻婚的)인 가족구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과의 동성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의 유씨 성을 칭하였다. (3) 헌애왕후(천추태후) : 성종의 누이 동생으로 목종의 어머니이다. 경종이 죽자 2살인 목종 대신에 왕후의 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에서 머무른다.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을 천추태후라 부르게 하였다. 경종이 죽은후 외가 친척인 김치양을 만나 통정하게 되어 분란을 일으키자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냈다. 천추태후가 섭정하게 되면서 김치양을 다시 불렀고 아이가 생기자 병든 목종을 대신해서 목종의 후사를 잇고자 했다. 이 즉위에 걸림돌이던 현종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한다. 결국 강조의 변이 일어나 김치양은 죽게 되고 태후는 유배를 갔으며 목종은 폐위되어 유폐지로 가는 도중 강조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한다. 강조는 현종을 왕으로 추대하고 태후는 유배에서
풀려나 66세에 사망했다. (4) 헌정왕후 : 성종의 누이동생이자 헌애왕후의 친동생. 6. 성종 (왕치, 16년)
성종은 22세로 득위하였고 (이 때 목종은 2살이었고 경종의 사위라는 장점도 있음),
숭유억불 정책, 문물제도 정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 확립 (유교) - 최승로 시무 28조, 지방제도 정비를 통해 고려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거란을 물리쳐 강동6주 (서희)를 획득함.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성종의 할머니는 신정왕후 황보씨로 황주 출신 호족이며 어머니는 선의태후이다. (1) 문덕왕후 : 광종의 딸로 경종의 여동생이다. 처음에는 수명태자와 혼인하여 선정왕후를 출산
하였으나 수명태자가 일찍 죽자 성종에게 재가한다. 선정왕후는 이후 목종의 아내가 된다. 성종은 광종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2) 문화왕후 : 선산 출신으로 신라 호족인 김원숭의 딸. 광종 이후에 족내혼을 하지 않은 첫 사례이나 어머니가 왕씨인 것으로 보아 왕실 외손일 가능성도 있다. 7. 목종 (왕송, 12년) 성종의 병세가 깊어지게 되어 성종의 선위로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득위하게 된다.
전시과를 개선하고 학문을 장려하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어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가 섭정하게 되는데,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기 위해 대량원군(현종)을 승려로 만든 뒤 죽이려고 하였다. 목종이 이를 막고자 강조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했으나 오히려 강조에게 폐위되어 유배 도중 살해되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대량원군(현종)을 추대하였다. (1) 선정왕후 : 수명태자와 문덕왕후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수명태자 사망 후 문덕왕후가 성종에게 재가하였기 때문에 성종의 딸로서 자랐다.
목종은 성종의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8. 현종 (왕순, 22년)
천추태후의 자객에도 여러차례 살아남은 현종은 강조의 옹립으로 18세에 등극하는데,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강감찬-귀주대첩). 현종의 할머니는 신성왕후 김씨로 경순왕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로 경순왕 사촌누이이다. 현종의 어머니는 헌정왕후로 성종과 천추태후의 동생이다. 경종의 왕후였으나 경종이 사망한 뒤 사가에 나가 홀로 지내다가 삼촌인 안종을 만나 정을 통해 임신하게 된다. 이 일로 성종은 안종을 유배보냈고, 헌정왕후는 현종을 출산하고 산고로 사망하였다. (1) 원정왕후 : 성종의 딸로 문화왕후 성을 따라 김씨로 하였다. 1010년 거란이 침입하자 임신한 몸이라 외가가 있는 선산으로 피했고 왕은 나주로 피난했다.
(2) 원화왕후 : 성종의 딸로 낙랑군대부인 성을 따라 최씨로 하였다. 거란 침입시 나주로 피난하였다. (3) 원성태후 : 안산 김씨로 시중을 지낸 김은부의 딸이다. 현종이 나주로 피난하였다가 귀환하던 중 공주에 묵게 되고 원성태후가 어의를 지어 드리고 편안히 모시었다. 김은부의 세자매가
(원혜태후, 원평왕후) 모두 왕비가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광종 때 왕실족내혼이
이루어진 이래 새로운 양상이다.
(4) 원혜태후 : 김은부의 딸로 이것은 왕실내에서만 이루어지던 혼인이 귀족가문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아들 문종은 11대왕이 되고 그 뒤 고려 왕통은 문종의 후손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5) 원용왕후 : 태조의 친손자인 경장태자의 딸로 할머니 선의왕후를 따라 유씨라 하였다. 경장태자는 현종의 생모인 헌정왕후와는 남매간이다.
(6) 원목왕후 : 993년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이를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의 손녀이며 내시령이었던 서눌의 딸이다. 현종은 태조 이래 가장 많은 13인의 비빈을 두었고 그 중에는
귀족가문의 타성도 다수 있었다. 광종 이래 새로운 혼인관계로 귀족과의 연결을 통하여
왕실의 고립을 막고 많은 자녀를 두어 왕족을 번성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7) 원평왕후 : 김은부의 딸 (8) 원순숙비 김씨 : 김인위의 딸로 덕종의 1비가 된 경성왕후를 낳았다.
아래 댓글에 대한 참고자료 입니다. [청암서원]<69강>고려시대(10)
일반학술자료 #112209 고려초 정치세력의 추이 2002년 4월 | 진승훈
왕위계승전에는 당시 재위하고 있는 왕과 왕위계승을 하려는 자, 그리고 이들 왕과 왕위에 도전하려는 자를 지지하는 셰력집단이 존재하였다. 혜종이 재위하고 있을 때 이에 도전한 세력은 요?소의 왕자 및 그와 결탁한 왕식렴 세력, 그리고 광주원군과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왕규세력이 있었으며 혜종은 박술희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에 주목해야 할 것은 왕이나 왕자를 지원하는 세력집단이다. 따라서 여기서 생각할 정치세력집단은 왕과 그의 지지세력, 왕위에 도전하는 자와 그의 지지세력의 존재형태가 될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혜종이 소에게 장공주를 혼인시켜 소의 세력을 강하게 해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규가 ‘기당’을 보내 혜종을 죽이려 한 것과 또 왕규와 함께 죽은 300 여 인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 이 300 여 인은 왕규의 친척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니라 아마도 그 밖에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에 혜종을 지지한 세력은 박술희였고, 광주원군은 왕규가, 요?소는 왕식렴이 도왔음을 알 수 있다.
사료의 기록대로라면 박술희는 혜성군인으로서 혜성군의 호족출신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혜종의 후견인이 된 이유가 단순히 지방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궁예 뿐 아니라 태조 아래에서 군공을 세울 수 있었던 개인의 뛰어난 군사적 실력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왕규와 광주원군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경우에는 광주원군이 왕이 되려했다기보다는 왕규가 정치적 이유로 광주원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었던 것 같다. 왕규는 광주원군의 외조였고, 혜종의 장인도 됐다. 이에 왕의 장인이면서 자기의 외손을 왕으로 삼으려 한 왕규의 예로 사위보다는 외손이 더 가까운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요?소와 왕식렴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왕식렴은 요?소의 종숙이 된다. 또한 혜종과 광주원군과도 같은 관계에 있는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요?소를 지지한 것이 주목된다.
참고문헌 1. 이종욱,<고려초 945년대의 왕위계승전과 그 정치적 성격> 《고려광종연구》 일조각, 1981 2. 황운용,《고려벌족연구》, 1989 3. 황선영,《고려초기 왕권연구》, 동아대학교출판부, 1988 4. 강희웅, <고려혜종기 왕위계승란의 신해석> 《한국학보》 7,1977, 여름 5. 엄성용,<고려초기 왕권과 지방호족의 신분변화> - ‘호족련합정권’설에 대한 검토 - 《고려사의 제문제》,1986 6. 박창희,<고려초기 ‘호족련합정권’설에 대한 검토> -‘귀부’호족의 정치적 성격을 중심으로 - 《한국사의 시각》, 영신문화사, 1984 7. 하현강, 《한국중세사론》, 1989 8. 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아세아문화사
인터넷 스크렙 자료
고려 제 1대 황제 태조
태조황제의 본관은 개성이고 이름은 왕건이다.
918년 궁예의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여 궁예에게 민심이 떠나자 태조왕건은 홍유와 배현경등 군신들의 추대로 고려제1대 황제로 즉위하면서 국호를 고려로 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정하였다. 이듬해에는 도읍지를 개성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935년에는 투항해 온 신라의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936년에는 항복해온 후백제의 황제 견훤과 함께 후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태조황제는 칼과 무력보다는 덕으로 적을 굴복시키고 전쟁보다는 평화로 백성들을 포섭하였다. 이른바 민족융합정책으로서 발해유민을 포섭하고 이름있는 호족들과 혼인하여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왕건의 부인이 29명이나 되고 수많은 왕자들로 후에 황위쟁탈전에 불씨를 남겼으며 혜종황제부터 광종이 즉위하는 949년까지 무려 8천명이 도육을 당하는 원인을 제공한게 바로 태조왕건이라고 할수있을것이다.
그러므로 황실의 권위는 호족들과의 연합체로 이루어졌으며 황제의 권위를 위태로울수박에없었다.
2. 혜종(惠宗, ?~945) 왕무 재위기간 943~945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고려 - 왕규의 난
고려 혜종 때 왕규가 왕위쟁탈을 위해 일으킨 난. 943년에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극도로 불안하였다. 혜종은 태자 때부터 강력한 호족출신인 박술희(朴述熙)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적대세력은 많았고, 더 강력하였다. 왕규(王規)는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요컨대, 혜종대의 정정(政情)불안과 왕위쟁탈전의 원인은 혜종의 세력기반이 미약한 데 있었다.
그는 왜 혜종을 살해하려고 하였을까? 혜종은 4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의화왕후(義和王后) 임(林)씨로서 진주사람 대광 임희(曦)의 딸이다. 태조 4년 12월에 혜종을 왕위 계승자로 책봉하면서 왕비로 삼았는데,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정헌공주(貞憲公主)를 낳았다.
두 번째 부인은 후광주원(後廣州院)이 왕규의 딸이다. 세 번째 부인은 청주원(淸州院) 부인 김(金)씨로서 청주사람 원보(元甫) 긍률(兢律)의 딸이다. 네 번째 부인은 궁인(宮人) 애이주(哀伊主)였다. 경주사람이요 대간(大干) 연예(連乂)의 딸이며 태자 제(濟)와 명혜(明惠) 부인을 낳았다. 이 네 부인 가운데 두 번째 부인이 바로 왕규의 딸인 것이다. 그러므로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 된다. 당시 호족과 왕실간의 혼인이란 혈연을 통한 두 세력간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왕규와 혜종은 서로 통혼을 매개로 굳게 뭉친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과 혼인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제 15비인 광주원부인과 제 16비인 소광주원부인 역시 왕규의 딸이었다. 이중에서 소광주원부인은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낳았다. 그러니까 왕규는 자신의 두 딸을 태조에게, 또 하나의 딸을 태조의 아들인 혜종에게 출가시킨 것이다. 윤리적으로 따지면 복잡하게 보이지만, 당시의 풍습이 그럴 수도 있었다고 설핏 이해 해두는 것이 좋겠다.
지방의 대호족세력들과 태조 왕건과의 혼인관계란 어차피 정실에 의한 정략결혼이었으며, 혜종과의 혼인관계를 맺은 것도 세력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왕규는 혼인을 통하여 태조왕가와 중첩적으로 혈연관계를 맺은 왕실세력인 것이다. 이런 정황을 바탕으로 추측한다면 왕규는 태조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혜종의 측근세력에 해당하는 인물로 상정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규는 혜종을 살해하려 하였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왕규에게 가장 직접적인 라이벌은 요와 소 두 왕자였으며, 이를 옹호하였던 문신 최지몽, 서경의 왕식렴. 그리고 왕규보다는 동생의 입장을 두둔한 혜종과 그 후견인 박술희가 있었다. 그러나 왕규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뼈 아픈 것은 혜종의 동향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사위이며 스스로 후견인으로 자처하였던 왕규는 혜종에게 반란을 경고하였지만, 혜종은 자신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정적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혜종은 요와 소를 제거하기는커녕 소에게 자신의 공주를 시집보내 세력을 키워주었고 보호하려들었던 것이다.
왕규로서는 위기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있으면 결국 자신은 요와 소의 세력에 의해 당하고 말 것이다. 그는 혜종을 제거하고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를 기도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외손자, 태조 16비 소생의 광주원군이 있었다. 이 아이를 왕위에 올리고 권력을 잡아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자. 그것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왕규는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혜종을 시해하려는 첫 번째 거사는 조심스럽게 시작됐다. 밤에 몰래 왕의 침전에 자객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혜종은 이를 알고 일어나 쳐죽이고 말았다. 두 번째는 좀 더 과감했다. 스스로 앞장에 서서 떼거리로 몰려갔다. 그것도 공공연하게 침전의 담벼락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그러나 이미 왕은 피신한 다음이었다. 화가 난 왕규는 최지몽을 향해 네 짓이로구나 하면서 칼을 빼 들고 위협했다. 이상하리 만큼 당당하고 무모한 왕규의 행동이 아닌가. 그것은 그가 이미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었음을 반증한다. 왕규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혜종은 자신을 경원시 하고 있었고 반대세력의 포위망은 압축되어 조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왕규가 헤어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권력의 주인이 되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혜종 살해를 시도하였다. 한번은 혜종의 침실에 자객을 잠입시켜 죽이려 했는데,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자객을 한 주먹에 때려 죽여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또, 한번은 직접 무리를 이끌고 밤에 혜종의 침실을 급습했으나 혜종은 이미 다른 데로 거처를 옮긴 뒤였다. 혜종은 최지몽(崔知夢)이 무슨 변이 있을 테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피한 것이다. 왕규의 세력이 혜종의 왕권을 압도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세력기반이 약한 혜종은 그를 문책하거나 응징하지 못하였다. 당시 혜종의 후견인으로서 왕규와 대립관계에 있던 박술희 역시 자신의 신변보호에 급급하였다. 그리고 왕실 내에서도 혜종의 이복동생 요(堯 : 뒤의 定宗)는 서경(西京)의 왕식렴(王式廉)세력과 결탁,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혜종은 주위에 항상 갑사(甲士)들을 수행시켰고, 암살 위협에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혜종이 즉위 이래 병석에 눕게 된 것도 이러한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결국, 왕규의 모역(謀逆)은 요와 결탁한 왕식렴의 서경 군사력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만다. ≪고려사≫에는 요가 왕식렴 세력과 결탁한 것은 왕규의 모역에 대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혜종의 왕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요의 왕위계승을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요는 945년에 서경 왕식렴의 군사력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왕규를 갑곶(甲串)에 귀양보낸 뒤 사람을 보내어 죽였으며, 그 무리 3백여 명도 죽였다. 한편,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도 살해하고, 그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시켰다. 박술희는 태조의 유명(遺命)까지 받은 중신(重臣)이었으므로 살해의 진상을 은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는 이처럼 왕위계승에 방해가 되는 적대세력을 일소한 뒤 왕위에 올랐다. 왕규의 난은 결과적으로 요의 왕위계승에 명분을 주고, 또 일을 쉽사리 성취시키는 데 기여한 셈이 되었다.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주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고려의 제 5대임금인 경종입니다.
자는 장민이며 21세의 나이로 즉위했습니다. 주가 왕태자로 있을때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뻔 했습니다.
그때는 광종이 호족을 누르는 정책을 폈고, 역모사건으로 혜종의 아들 흥화군과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이 처형당했습니다. 광종은 태자 주도 의심했다.왕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도모하려는 호족이 있기 때문이었는데요. 태자 주에게는 동생 효화 태자가 있었으나 어린나이에 죽었습니다. 광종에게 아들이 태자밖에 없었으므로 주가 목숨을 잃지않았습니다. 주는 이렇듯 11세의 나이로 왕태자가 된 이후 공포와 불안 속에 살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대화합을 시도했습니다.사면령을 내려 귀양 간 신하를 불러들이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으며 관직을 빼앗겼던 이들에게는 관직을 되돌려주었습니다. 또 호족출신인 왕선을 집정에 임명하여 호족들에게 유화 정책을 폈습니다. 그럼으로 써 광종 때 15년 동안 계속 되었던 공포 정치가 막을 내렸는데요. 때를 만난 호족들은 복수전을 펼쳤습니다.
왕선이 건의한 복수법이 그 시초였는데, 이것은 광종대에 피해를 입은자들에게 복수할수있는 권한을 주는 법이었습니다. 경종은 이를 허락했습니다.호족들을 달래기 위함이었으나 정작 복수전이 펼쳐지자 경종의 대화합정책에 금이가고 나라정치는 대결로 치달았습니다.그 바람에 왕선에 의해 태조와 천안부원 부인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효성태자,태조의 열번째 부인인 숙목부인의 아들 원녕태자가 살해되었습니다.
종실 어른이 살해당하자, 경종은 복수법을 페하고 왕선을 귀양 보냈습니다.또 한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위해 좌우 집정제로 바꾸었습니다.
왕승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최지몽이 고하자 경종은 왕승뿐 아니라 여러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경종의 최지몽 등용은 정적(정치적인 적)제거의 속셈이 있었습니다.
피를 많이 본 경종은 정치가 싫어져서 오락과 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1년도 못가서 병이 들더니 한달만에 죽고말았습니다. 그의 나이 27세 였습니다.
3. 정종(定宗, 923~949) 왕요 재위기간 945~949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4. 광종(光宗, 925∼975) 왕소 광종황제는 태조왕건의 넷째아들이고 제3대 정종황제의 친동생이다. 이름은 왕소이다. 비는 태조의 딸 대목황후이다. 정종황제가 병이 들어 광종에게 양위하여 광종이 즉위하였습니다. 이전황제인 혜종은 왕규와 박술희 정종은 왕식렴등 다른 강력한 호족세력을 바탕으로 황권을 부지하려고 하였으나 광종은 황권주의자로 끈기있고 정력적으로 노력하여 고려왕조 역사상 가장큰 성군으로 뽑힐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일단 그가 통치한 시기는 3기로 나눕니다.
즉위년~7년를 안정기
7년~11년를 개혁시기
11년~26년를 숙청기로 구분합니다.
첫번째 시기인 안정기에는 황권강화와 관련되는 시책은 단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의 정치정세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종황제대에 최승로는 상소문에서 “광종의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하,은,주)에 견줄 만하다.”고 격찬할 정도였다. 또한, 중국 왕조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정책을 통해서 새 황제로서의 지위 및 그 정치적 기반을 닦아나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두번째 시기인 개혁시기에는 광종이 호족들을 상대로 전면적인 전쟁을 선포한 시기입니다.이시기에는 황권강화를 위한 조치를 취한 시기입니다. 956년에 노비의 안검법을 시작으로 호족들의 군사기반과 경제기반을 무너틀이고 958년에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호족들의 정계진출을 아예막아버림으로서 광종황제는 전제황권을 확립하고 이후에 무소불위의 황권을 추진하게됩니다.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조처들로 호족세력은 반발하였으나, 이에 대해 철저한 탄압을 강행하였습니다. 956년부터 황권강화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중국 후주의 쌍기의 등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쌍기는 후주에서 겸험을 고려에서 노비안검이라든지 과거제도 시행을 광종에게 권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세번째 시기는 바로 숙청기입니다.
이시기에는 황권강화책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호족세력에 대해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960년에 이름바 권신의참소사건으로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 좌승 왕동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보고하자, 광종이 이들을 귀양보내게 된것부터 발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권신과 준홍,왕동을 벌하는것으로 그첬으나 광종이 순행길에 오르는중에 평주에서 박승위가 난을 일으켜 광종이 목숨을 잃을번하자 광종은 박승위형제를 참형에 김긍률,박영규와 역모에 가담하였던 모든 군사들을 참하고 황권에 위협이 되는 효은태자와 흥화군(혜종의아들),경춘원군(정종의아들)을 제거하였으며 이때 죽은 사람이 천여명이 넘는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숙청은 왕조 초기에 어느 왕조라도 걸치는 작업으로서 광종이 황권을 강화하지 않았으면 성종이나 현종치세가 아마도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광종의 업적은 958년부터 실시된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군사력인 시위군졸은 문무 양면으로 황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기반을 배경으로 정치적 적대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호족을 비롯한 정치적 적대세력의 반발도 거세어 보다 광범위한 세력기반 구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963년에 귀법사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를 설치해 각종 법회와 재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간 것은 이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귀법사의 승려 균여와 탄문 등을 통해 호족세력에 반발하는 일반민중들을 포섭하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황권강화책을 추진한 결과,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황권을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광덕(光德)’ ‘준풍(峻淵)’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개칭하도록 하고 서경을 서도라고 개칭하면서 제국의 기틀을 다져 놓았습니다.
아울러 국가체제도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게 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황권의 한계성도 나타났다. 첫째, 중앙정부 중심으로서 황권 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는 침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호족세력을 숙청하고 황권을 강화하였지만, 그것이 호족세력의 완전한 굴복과 황권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광종황제가 승하한 후 즉위한 경종 황제는 화합정책을 표방하여 왕선을 섭정으로 하여 복수법을 만들었다가 태조황제의 아들인 원녕태자와 효성태자를 죽여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광종황제의 황권강화는 한계성을 보이지만 이것은 경종황제가 총명하지 못하였던 까닭도 있습니다.
광종은 황권강화책 이 외에도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밖으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고, 안으로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가지 시책을 펴기도 하였다. 968년에는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음으로써 고려의 국사와 왕사제도의 단서를 열었다. 또한, 국방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영역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의 치적은 뒤에 고려가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질서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여기에 그의 치적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학계에서는 영토를 통일한 것은 태조이며 정신적 통일을 이룬 황제는 광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의화왕후(義和王后) 생몰년 미상. 고려 제2대 왕 혜종의 제1비. 진주임씨(鎭州林氏)로 대광(大匡) 희(曦)의 딸이다. 921년(태조 4) 10세의 혜종이 태자로 책봉될 때 태자비가 되었고, 혜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태조가 어린 혜종의 배필로 비를 간택하게 된 데에는 진천의 지역적 위치와, 비의 아버지가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군사실력자로서의 위치가 참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혜종과의 사이에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정헌공주(貞憲公主)의 두 공주를 두었다. 흥화군은 왕위에 나가지 못한 채 광종 때에 정치적 이유로 생명을 잃었고, 경화궁부인은 혜종 재위중에 광종의 부인이 되었다. 시호는 의화왕후이고, 장지는 순릉(順陵)이며, 혜종묘실에 합장되었다. 1002년(목종 5)에 성의(成懿), 1014년(현종 5)에 경신(景信), 1027년에 회선(懷宣), 1253년(고종 40)에 정순(靖順)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
왕규의 난 추가자료
A. 국왕을 죽여라
'945년 한 여름 밤. 개경의 왕궁,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짙은 어둠을 타
B. 왕규는 어떤 인물인가?
왕규에 대해서는 <고려사> 반역열전에 소개되어 있는 짧은 내용과 몇 개의 단편적인 기
1. 왕규는 경기도 광주의 유력한 지방호족출신이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남아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도성을 수비하는 중
2. 왕규는 대중국사신을 지낸 문신계열의 인물이다.
왕규는 태조 정유 20년(937) 형순(邢順)과 함께 진(晉)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건국을
3. 왕규는 개국공신이며 조정의 실력자였다.
왕규의 관계(官階)는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고려의 관계체계는 모두 16개의 등급으로 구
4. 왕규는 강력한 사병집단을 운용하고 있었다.
통일기의 혼란 속에서 전란을 헤쳐온 장수들과 호족들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병집단을
5. 왕규는 유력한 외척세력이었다
그는 왜 혜종을 살해하려고 하였을까? 우리는 혜종과 왕규의 관계를 알면 더욱 미궁에 빠
C. 왕규와 대립하였던 정치세력들
1. 왕위를 둘러싼 경쟁자 요와 소
혜종의 장인으로서 정계의 막강한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왕규이지만, 그는 늘 불안한 가
2. 왕규에 대항한 책략가 최지몽
왕규가 혜종 및 정종, 광종 형제에 대해 해치려고 했을 때마다 태조의 왕자들을 구원하고
3. 혜종의 후견인 박술희
한편 박술희는 혜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태조는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얻었다. 이들 사이에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
4. 서경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던 왕식렴
혜종이 즉위한 초기까지 왕식렴의 태도가 어떻했는지에 대해 뚜렷하게 밝혀줄 자료는 없
그런데 서경의 군사력에는 또 다른 역할이 있었다. 바로 여러 호족들이 모여들 어 기반이 취약해진 개경의 왕실이 위기에 봉착하면, 배후의 서경에서 지원이 가능하다는
D. 왕규가 혜종을 해치려한 이유는?
지금까지 왕규의 반대세력에 대해 제시해 보았다. 가장 직접적인 라이벌은 요와 소 두 왕
왕규로서는 위기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있으면
E. 왕규의 난을 둘러싼 몇가지 수수께끼
먼저, 혜종은 왜 왕규가 자신을 해치려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었을까? 하는 점이다. 혜
F. 왕규에 대한 평가는 올바른가?
왕규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단지 그가 취했던 행동과 주변정
출처 : http://blog.naver.com/kwjeon2000/120010254949
고려왕조실록 태자 책봉 의아들 경춘군이 역모죄로 죽음 태자 경종도 공포로 떰 원녕태자가 살해됨 망가짐 병상에누워 한달만에 죽음 사촌동생 개령군을 선위함
KBS 대하드라마 제국의 아침
광기 어린 광종은 역모자인 효은태자, 박승위, 승경, 승례는 물론 친인척인 흥화군, 경춘원군 등을 극형에 처한다.
술에 취한 광종은 광평시랑 최행귀가 신라계라는 말을 꺼내자 신라는 이미 망한 나라이니 그 말을 꺼낸 자도 역모자라하여 최행귀 마저 그 자리에서 목을 벤다.
왕규는 태조의 15비,16비의 아버지이자 혜종의 2비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고려사는 혜종이 죽기 직전까지 호위병사를 거느리고 다닌 것에 대해 이 혼란에 대한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시키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몇가지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자객을 시켜서 벽을 뚫고 왕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 혜종을 살해하려 했다거나 자객을 보내 귀양간 박술희를 살해했다는 내용 등이 바로 그것인데요. 당시의 정황으로 봤을때 자객을 보낸 쪽은 왕요(3대정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이 자객에 의해 급히 살해되었을때 왕위를 이을 사람은 왕요였구요, 실제로도 왕요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규의 기반상실을 의미하는 거구요, 왕규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리가 없스니다. 왕규는 본래 함씨였는데 왕건의 신임을 받아 왕씨성을 하사받았습니다. 박술희와 더불어 혜종을 보필하라는 유명을 받든 몸입니다.
태종의 유명을 어긴다면 박술희와 등을 질수 밖에 없습니다. 왕규는 무인 출신이 아니라 군사력을 동원할 능력도 없습니다. 무력동원의 능력이 있는 박술희와 적대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되는 거죠. 혜종이 죽자 왕요일파에 의해 즉각 제거되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왕규는 오히려 혜종과 박술희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입장이죠. 혜종이 왕규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은 왕규가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가장 믿을만한 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왕규가 자신의 외손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면 혜종이 왕규를 끝까지 보호할 까닭이 없습니다. 광주원군을 앞세웠다면 왕규가 제거될때 광주원군도 함께 제거되었겠죠. 하지만 실록에는 광주원군에 대해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역모사건이 일어났을때 역모자들이 추대하고자 했던 인물도 함께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이상한 일입니다. 광주원군은 적통도 아니고 태조에게는 차자 왕요 외에도 여섯명의 적자가 있었는데 광주원군을 왕위에 세우려 한다면 매우 무모한 발상이죠.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에도 어긋나기도 하구요 왕후를 배출한 다른 가문들의 반발에 부딪혔을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기도 세력은 왕규를 추종하고 있었구요 이는 왕규가 그들을 자극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혜종이 죽기 직전에 왕식렴의 서경군대가 개경으로 진입한 것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고려사는 왕규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이었다고 쓰고 있는데요, 이때 왕규를 체포하여 귀양보냈다가 자객을 보내 죽였다고 합니다. 왕규가 반란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 왕식렴의 군대가 개경에 진주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왕규가 반란을 도모했다면 왕식렴의 서경 군대가 오기 전에 도성을 먼저 장악하는 상황이 벌어졌을테고 오히려 먼 곳에 있던 서경군대가 도성을 먼저 장악했고 당시 대광벼슬에 있던 왕규는 저항 한번 못해보고 왕식렴에게 쉽게 붙잡혔습니다. 왕식렴이 반란군이었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왕식렴의 군대는 왕요 일파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는 문무대신들과 개경백성들을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은밀히 개경으로 진입하여 왕성을 에워쌌던 것입니다.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 있어 정종에 의해 유배당했다고 고려사는 쓰고 있는데요, 태조의 유명을 받든 박술희가 반란의 계획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혜종이 아닌 정종에 의해 유배당했다는 건 정종 왕요가 이미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얘기구요 혜종의 아들 흥화군이 있었음에도 정종이 왕위를 계승한 것은 왕위찬탈의 가능성을 시시해주고 있습니다.왕요가 왕규보다 박술희를 먼저 제거한 건 혜종의 무력적 기반을 제거하기 위함이었구요, 왕요가 정권을 장악한 후 왕규의 무리 300명을 처형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개경의 문무대신들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발했다는 것은 왕요의 즉위가 부당한 행위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왕요가 왕위를 계승하자 개경의 문무대신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왕요 일파는 급한 마음에 이들을 역도로 몰아 모두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혜종이 끝까지 왕요를 왕위 계승자로 지목하지 않은 사실과 왕요가 측근들의 추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출처 : 한권으로읽는고려왕조실록 참조
광종 (光宗 ) 자는 일화(日華)이며 휘는 소(昭)이다. 그리고 시호는 대성(大成)이며 태조 왕건(王建)의 셋째 아들이고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大穆皇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한 뒤에 그 영명(英明)한 바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즉위년 8월에는 국초의 공역자(功役者)를 4등급으로 나누고 쌀을 차등있게 하사함으로써 국초 이래의 호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으며,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대내외적으로 자주와 위엄을 보였으며, 2년간 사용하다가 준풍(峻豊)으로 바뀌었다. 또한 각 주·현의 공부(貢賦)를 제정해 경제제도의 정비를 단행했다. 그리고 권호강족(權豪强族)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훈신(勳臣) ·장상(將相), 심지어 골육지친(骨肉之親)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왕권강화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세력을 제거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960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사건이었다. 광종은 이들을 귀양보내고 이어 국초의 대표적 공신인 박수경(朴守卿)·최지몽(崔知夢) 등을 거세했다. 심지어 종실인 혜종과 정종의 아들까지도 죽이는 등의 대숙청을 단행했다. 956년(광종 7)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만들어 노주(奴主) ·노비 간의 분쟁을 재판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다. 이 때 시행과정에서 상당한 동요가 일어났으나, 노비의 안검에 임하는 광종의 태도가 확고하여, 감히 간언조차 하는 자가 없었다. 그의 비인 대목왕후(大穆王后)가 간절히 간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958년에는 중국 후주(後周)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958년에 처음 실시한 과거에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시·부·송·책으로써 진사시 갑과(甲科)에서 최섬(崔暹) 등 2명과 명경과에서 3명, 잡과에서 2명을 선발했다. 그뒤 광종대에만 모두 8차례의 과거를 실시하여 39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것은 사장(詞章) 중심의 제술업을 처음 시행했으며, 국학 출신자만 응시할 수 있었던 신라의 독서삼품과와 달리 응시자격을 전국의 군현에 개방했다. 또한 960년 백관의 복제(服制)를 제정했는데, 당시 제정된 백관의 공복은 자(紫)·단(丹)·비(緋)·녹(綠)의 4색으로 되어 있는데 원윤(元尹) 이상은 자삼(紫衫), 중단경(中壇卿) 이상은 단삼(丹衫), 도항경(都航卿) 이상은 비삼(緋衫), 소주부(小主簿) 이상은 녹삼(綠衫)을 입게 되어 있다. 같은 해에 군제를 크게 개혁하여 병권을 집중시켰다. 국초 공이 있는 호족들의 아성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순군부(徇軍部)를 군부(軍部)로 고쳤으며, 비슷한 시기에 건국 이래 최고의 관부였던 광평성(廣評省)의 지위를 내렸다. 반면 시위군인 내군(內軍)은 장위부(掌衛部)로 고쳐 숫자를 증가시켰으며, 이에 따라 물장성(物藏省)을 보천(寶泉)으로 고쳐 시위군의 증가에 따른 군수(軍需)를 확보하고자 했다. 수도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 즉 평양을 서도(西都)라고 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 ·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 ·위화(威化) ·무주(撫州) ·안삭(安朔) ·습홀(濕忽) ·송성(松城) ·낙릉(樂陵) ·운주(雲州) ·신도(信都) ·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 ·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 ·박평(博平) ·고주(高州) ·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남 지방에 축성하였다. 만년(晩年)에는 참소를 혹신(惑信)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능호(陵號)는 헌릉(憲陵)이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고려 태조 왕건의 부인
제1황후 : 신혜황후 유씨 ## 광주원군 : 고려 태조 적 20남 ##
양진수 & 김란영 - 님의 향기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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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 산 김 씨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