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빈총을 쏘는 朴正熙 대통령.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육군경비사관학교 등 사관학교를 세 번이나 다녔던 그의 사격 자세가 일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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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核개발의 실무 책임자는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건설의 사령탑이었던 吳源哲(오원철) 제2경제 수석비서관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이 추진한 核폭탄 개발은 증언자에 따라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 마치 朴대통령이 核폭탄을 만들기 직전에 피살된 것처럼 소설을 쓰기도 한다. 이 비밀 核개발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문서는 月刊朝鮮이 2년 전에 발굴했던, 吳源哲 당시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작성한 「原子核연료 개발계획」이란 9페이지짜리 보고서다. 이 문서는 核彈 개발의 방향과 전략을 쓴 것인데, 그 뒤의 추진과정과 맞추어 보면 朴대통령이 이 문서대로 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문서는 2급 비밀로 분류되었다가 해제된 것으로서 정부기록보존소에 있었다. 吳수석은 자신이 이 문서를 작성했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일체의 설명을 거부했다. 그는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 그리고 무기개발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核개발에 있어서도 실무 책임자였다. 이 보고서에서 吳수석은 플루토늄 核彈을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우라늄 核彈을 만들 경우에는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기술이 든다는 것이었다.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투자액은 약 9억 달러, 건설기간은 8년이 들고 이를 가동하는 데는 200만kw가 소요된다. 플루토늄彈의 경우에는 재처리 시설에 3900만 달러, 건설기간 6년이 소요되고 대규모 電力이 필요하지 않으며 『약간의 기술도입으로 국내 개발이 가능하다』고 했다. 吳수석은 재처리 시설에 공급할 사용후 핵연료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도 검토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만드는 重水爐 원자로를 이용하면 연간 200kg의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플루토늄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로를 도입할 경우에는 플루토늄 생산량이 적다는 단점이 있다. 吳수석은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로 지을 때 캐나다 「CANDU형」 중수로를 도입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1980년대 초에 가면 플루토늄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吳수석은 결론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과 재정 능력으로 보아 플루토늄彈을 개발한다. ▲1973년부터 과학기술처(원자력연구소)로 하여금 상공부(한국전력)와 합동으로 核연료 기본기술 개발에 착수한다.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해외 한국인 원자력 기술자를 채용하여 인원을 보강한다> 프랑스에서 再처리 시설 도입 추진 | 캐나다에서 도입한 월성 원자력발전소의 중수로는 미국 측으로부터 核개발用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
1972년 5월 崔亨燮(최형섭) 과기처 장관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원자력기술 협력과 재처리 시절 도입에 관해 논의했다. 1973년 3월엔 프랑스원자력청과 그 산하 재처리 회사인 SGN(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 대표단이 한국에 와서 원자력연구소와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했다. SGN社는 프랑스 국영회사였는데 파키스탄 등 핵무기 개발을 꾀하는 나라들에 재처리 시설을 수출하여 외교분쟁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우리 원자력연구소는 일단 SGN社에 대해서 시험용 재처리 시설의 개념설계를 요청했다. 그해 9월 尹容九(윤용구) 원자력연구소장이 이 회사를 찾아가 정부 간 차관교섭이 매듭지어지는 대로 공장건설 계약을 맺자는 합의를 보았다. 1975년 4월 원자력연구소와 SGN 사이에 재처리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기자는 지금 某 연구기관에 보관되어 있는 SGN社의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 개념설계도를 볼 수 있었다. 1974년 10월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설계도에 나타난 재처리 시설은 연간 약 20kg의 플루토늄을 뽑아낸다. 이는 작은 핵폭탄을 네 개 만들 수 있는 양이다. 건설비는 3900만 달러, 건설기간은 5년. 건물은 약 50m 사방의 높이 27.5m, 공장운영에는 책임자급 기술자 15명과 165명의 기술요원 및 74명의 노동자가 소요된다. 핵폭탄용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한 재처리 시설 도입건은 崔亨燮 과기처 장관-朱載陽 원자력연구소 副소장-金哲 원자력연구소 대덕분소 공정개발실장을 축으로 하여 추진되었다. 재처리 시설 도입의 실무책임자인 朱박사는 美 MIT 工大에서 화공분야를 전공하고 핵연료관계 연구를 했다. 그는 吳源哲 수석이 건의한 해외 인력 유치사업에 따라 1973년 3월에 원자력연구소 특수사업담당 부소장으로 영입되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人材확보였다. 국내에서는 재처리 시설에 관계했던 기술자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1973년 5월23일부터 7월12일까지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하여 젊은 한국학자들을 이 사업에 끌어들이는 일을 했다. 金哲 박사는 매사추세츠州의 나티크 육군연구소에서 폐기문서 완전 분해과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가 朱박사에게 설득당해 원자력연구소로 온 경우이다. 원자력연구소가 이 특수사업을 위해 해외에서 모셔온 한국 과학자들은 약 20명. 거의가 화공·화학 전공자들이었다. 인도 核실험으로 지장 초래 朱載陽 부소장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에 들어갈 원료인 사용후 핵연료를 생산하기 위한 NRX형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는 일도 맡았다. 朴正熙 정부는 캐나다로부터 중수로와 NRX 연구로를 함께 도입한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朱박사는 1973년 11월에 대만과 인도를 방문한다. 「원자력연구소 20년사」는 이 출장목적을 「NRX 원자로 도입에 따른 기술문제 협의차」라고 적고 있다. 이때 대만과 인도는 이 연구로를 가동하여 핵폭탄 제조를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관한 정보수집차 간 것으로 보인다. 1974년 3월 드디어 朱박사는 캐나다를 방문하여 NRX 도입을 논의하고 왔다. 한편 대량의 플루토늄 원료물질을 만들어 내는 중수로형 원자로 도입계획도 동시에 추진되었다. 吳수석이 이 방향으로 추진할 것을 朴대통령에게 건의한 두 달 뒤인 1972년 11월 이스라엘人으로서 한국이 외자를 도입할 때 수많은 중개를 해주었던 사울 아이젠버그가 캐나다 원자력공사와 대리인 계약을 맺고 한국전력 측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973년 4월 캐나다 원자력공사 사장 존 그레이가 訪韓하여 월성에 세워질 60만kW짜리 원자력발전소 건설사업에 중수로를 팔고 싶다는 뜻을 한국정부 측에 전했다. 당시 韓電 사장은 閔忠植. 그는 朴대통령의 뜻을 읽고서 반대를 무릅쓰고 캐나다 측을 主계약자로 선정하기로 하고 밀고 나갔다. NRX 연구로에 쓸 重水와 천연우라늄을 미국 측에서 얻어올 수는 없으니 캐나다 측에 기대기로 한 것이다. 重水爐에는 중수와 천연 우라늄이 쓰이므로 우리는 미국 측에 의존하지 않고 캐나다를 통해서 NRX 연구로用까지도 도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朴대통령이 1972년부터 입체적으로 진행하던 核개발 계획은 1974년 5월에 인도가 라자스탄 사막에서 核실험을 함으로써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인도 核개발의 중심인물인 호미 바바 박사는 인도 재벌들이 제공한 초기 자금과 네루 수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가 핵폭탄용 플루토늄을 뽑아낸 것이 바로 朴대통령이 도입하려고 했던 캐나다 NRX 연구로였다. 캐나다가 이 연구로를 기술원조의 일환으로 제공했던 것이다. 이 연구로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봉을 재처리하여 플루토늄을 추출했던 시설은 미국이 비밀을 해제하여 기술이 공개되었던 휴렉스 방식이었다. 이것도 미국회사의 기술적 도움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미국, 核개발 저지 결심 인도가 核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등 기존 核보유국들은 핵탄제조에 쓰일 기술과 장비의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세계에 뻗어 있는 정보망을 동원하여 核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가 「항공공업계획」이란 위장명칭下에서 地對地 미사일 개발에 착수한 사실과 함께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움직임과 캐나다와의 수상한 거래를 주시하게 되었다. 1974년 10월28일, 駐韓 미국대사관은 국무부로 보낸 電文에서 『대사관은 현재 한국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분석 중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地對地 미사일 개발에 대해서도 주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미국 측은 한국이 개발에 착수한 地對地 미사일이 핵탄 운반용이라고 판단했다는 이야기이다. 1975년 2월4일 美 국무부는 백악관의 대통령 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우그로프트 중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단정한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는 미사일뿐 아니라 핵무기의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이는 한반도 정세에 대단히 심각한 전략적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그해 3월4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서울·오타와·파리·도쿄·빈 주재 미국대사관으로 긴급발송한 電文에서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의 정보기관들은 한국이 향후 10년 안에 제한된 범위의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한국의 핵무기 보유는 일본·소련·중국, 그리고 미국까지 직접 관련되는 이 지역의 가장 큰 불안정 요인이 될 것이다. 이는 분쟁이 생길 경우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대해 核무기를 지원토록 만들 것이다. 韓美동맹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개발계획은 미국의 對韓 안보공약에 대해서 한국 측의 신뢰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朴대통령은 對美 군사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우리의 근본적 목표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그 계획을 포기하도록 하거나, 핵무기 또는 그 운반능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多者間 협력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최근 프랑스에 대해 한국에 재처리 시설을 제공할 것인지의 여부를 묻고 있는 상태이다. 가까운 시일內에 한국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한 정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1974년 8·15 사건으로 아내를 잃은 朴대통령에게 찾아온 것은 국민들의 위로이기도 했지만 야당과 지식인층이 주도한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도전이었다. 朴대통령이 이 시기 어디에 신경을 가장 많이 쓰고 있었는지를 대통령 면담일지로 분석해 보면 의외로 국내정치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은 『朴대통령이 1970년대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안보(국방 외교)부문이었다. 다음이 경제, 마지막이 국내정치였다』고 말했다. 대통령 면담일지에 나타난 시간배분도 金 前 실장의 증언과 거의 일치한다. 朴正熙의 정보정치
| 1974년 8월22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金泳三(당시 47세). |
면담일지를 보면 이 무렵 朴대통령이 느긋하게 시간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밀려오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여러 형태의 국가적 위기가 닥쳐오는 데도 그 한복판의 사령탑에 앉아 있었던 朴대통령의 시간관리는 여유가 있었다. 허둥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한가로운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이는 朴대통령의 경이로운 조직관리 행태 덕분이다. 그는 有備無患(유비무환)이란 말을 자신에게도 적용하여 어떤 사건·사고가 일어나도 대비할 수 있는 체제를 평소에 유지하고 있었다. 지휘관으로서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되는 일이 기습을 당하는 것이란 생각에 철저했다. 그는 또 아랫사람들에게 권한을 크게 위임해 놓았고 국가의 조직을 유기적·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자동적인 대응이 되도록 시스템을 짜놓았기 때문에 당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사회가 가장 바쁘게 굴러갈 때 정작 대통령이 한가했다는 것은 그가 시간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1974년 10월1일부터 15일까지 보름간 朴대통령의 면담일지를 분석해 보니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면담자 수가 1960년대의 1일 평균보다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이 기간에 朴대통령이 가장 자주 만난 사람은 申稙秀(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대통령은 보름 사이 정보부장을 11회에 걸쳐 16시간52분간을 만났다. 국회의원을 만난 횟수는 6회에 3시간30분이었다. 朴대통령의 「정치 輕視·정보부 重視」 자세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대화 輕視·정보공작 重視」의 정치행태이다. 당시 정보부는 對北 기능과 함께 학생 동향과 야당공작 등 시국대책에 주력하고 있었다. 정보부를 앞세운 朴대통령의 국내통치는 국회를 중심으로 한 與野대화를 형해화하고 있었다. 정보부의 對野공작은 논리적 설득이 아닌 협박과 회유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金泳三·金大中의 선명투쟁파에 대한 탄압과 중도온건파에 대한 회유로 나타났다. 정보부의 정치 개입은 야당을 이간질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강경파를 거리로 내몰아 在野세력과 손잡도록 했고, 야당의 온건파를 어용화시킴으로써 與野대치를 더욱 살벌하게 만들었다. 1974년 가을에 朴대통령이 중점적으로 챙기고 있었던 國政은 대략 이런 항목들이었다. 1. 북한이 판 땅굴에 대한 대책수립 2. 한국군 현대화 계획인 율곡사업 3. 핵무기 개발을 위한 재처리 시설 도입 및 유도탄 개발사업 4.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 5. 석유쇼크 후유증을 앓고 있던 경제의 회복과 수출진흥책 6. 中東 건설시장 진출 지원책 7. 새마을운동의 전국적인 확산 8. 악화되는 월남정세 점검 및 새로 등장한 미국 포드 행정부 대책 9. 공무원 기강잡기 10. 야당과 언론 및 在野운동 대책 이들 가운데 朴대통령은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상공부 장관 및 재무 장관을 역임했던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권한을 크게 위임했다. 金실장은 경제기획원 장관을 중심으로 한 경제팀을 사실상 조정했다. 그는 뒤에서 조용히 일했기 때문에 오히려 실력자로서의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朴대통령은 金실장에게 경제를 거의 전담시키다시피 해 놓고 자신은 국방·외교 등 안보에 집중했다. 일반 행정은 金鍾泌 국무총리에게 맡겼다. 李厚洛 정보부장이 물러난 1973년 12월부터 약 2년간 金鍾泌 국무총리는 역대 어느 총리보다도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金총리는 申정보부장과도 관계가 좋았다. 이 시기 핵심적은 역할을 한 또 한 사람은 吳源哲 제2경제수석비서관이다.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 그리고 무기 개발 및 도입 사업이기도 한 율곡사업을 책임졌던 그는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金실장과 호흡을 잘 맞추었다. 47세 金泳三 총재의 등장 1972년 10월17일부터 1979년 10월26일까지 계속된 朴正熙 대통령下의 유신통치기에 언론이 권력에 굴종하여 침묵했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의 신문철을 읽어 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시기 언론과 야당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중단하지 않았다. 학생들과 종교계(특히 천주교·신교)가 對정권 투쟁을 했던 것 이상으로 기자들은 직무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는 기자들의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자유 언론의 생리이자 선비의 바른말하기 전통이 강한 한국적 풍토의 발로이기도 했다. 유신시대 언론의 정권비판은 야당의 투쟁 강도와 정비례했다. 야당이 정부 비판에 앞장서면 언론은 반 보쯤 뒤에서 따라갔다. 야당은 치열하고 적나라한 黨內투쟁으로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도 했으나 全黨대회 같은 큰 집회에서는 대의원들이 놀라운 大義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들은 계보나 금전적 유혹을 초월하여 일반 국민들의 여망을 따르는 역사적 선택을 했다. 그 예가 1974년 8월22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조직력과 금력이 가장 약한 47세의 金泳三씨를 총재로 뽑은 사건이다. 이 선택은 그 뒤 약 10개월간 계속된, 朴정권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거센 도전기를 연 단초가 되었다. 8월23일자 거의 모든 신문은 이 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했다. 朝鮮日報는 1면 해설기사를 통해서 金泳三 총재의 등장은 「표로 표현된 야당성 회복」이라고 분석했다. 조선일보뿐 아니라 동아일보 등 주요 신문의 논조는 강경투쟁노선을 내건 金泳三 총재의 등장을 반기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 8월24일자 「횡설수설」난은 金泳三 총재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능변으로써 만인의 심금을 흔들게 했던 것도 아니요, 권력과 술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요, 금전과 권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가 불퇴전의 기개로써 그의 궤도를 그대로 밀고 나갈 경우 그의 앞날에는 오직 큰 희망과 大成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련다> 신문이 이런 찬사를 여당의 권력자에게 보냈더라면 그 기자와 신문은 독자들의 비판으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민심의 물줄기는 다른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조선일보 1면 해설기사의 일부. 〈金泳三씨의 당선 확정은 신민당 대의원들이 系譜를 초월하여 그들이 평소 품고 있던 野黨性 회복이라는 열망을 票로써 표현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야당식 민주주의의 현장 朝鮮日報는 8월23일자의 한 면을 다 내어 金泳三 총재를 탄생시킨 신민당 전당대회를 소개했다. 야당內의 무질서와 담합과 민주주의의 현장을 실감나게 보여 주는 기사이다. 〈제1야당 신민당의 전당대회가 열리는 明洞 한복판의 예술극장 부근은 대회시작 1시간 전인 아침 8시부터 붐비기 시작했다. 냉방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식장 안은 대회의 熱氣와 후보의 角逐戰으로 찌는 듯이 더웠고 1층과 2층에 지역별로 자리를 잡아 앉은 代議員은 웃옷을 벗은 채 中央黨에서 나눠 준 부채로 열심히 더위를 쫓고 있었다. 오전 11시 25분 黨首선출 안건이 상정되자 대회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전당대회 의장의 의안 상정이 선포되자 웃옷까지 벗고 나선 金應柱 대의원과 朴永祿 의원이 壇上으로 올라가 발언권을 요구했고 좌석에서는 『발언을 주라』, 『주지 말라』는 고함이 함께 나왔다. 의장의 『黨首 선출은 黨憲에 따라 발언없이 無記名투표로 들어간다』는 선언과 함께 壇上에는 투표함과 記票所가 차려지고 투표요령과 유·무효 판정기준 등이 설명되었다. 투표는 金義澤 당수권한대행, 權仲敦 前 전당대회 의장을 비롯, 총재단, 지도위원, 정무의원, 국회의원, 지구당 의원장 순으로 진행되었다. 壇上 오른쪽과 왼쪽에 마련된 등록소에서 대의원증과 주민증을 제시한 뒤 투표용지를 교부받아 했다. 호명되는 대의원 중에는 金大中씨의 이름도 들어 있었으며, 安養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趙尹衡·金相賢·趙淵夏·金漢洙·李鍾南씨 등의 이름은 빠르게 불려 지나갔다. 투표하는 대의원 중에는 政界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李相喆 고문과 10月維新 후 政治에서 손을 뗀 朴鍾律씨의 얼굴도 보였다.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후보들은 사방을 살피면서 분위기 파악에 분망했고 그들의 조직 참모들은 투표하기 위해 단상으로 나가는 대의원들을 붙들고 귀엣말을 주고 받는 등 최후의 호소를 하는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빵 봉투 뜯는 소리 낮 12시가 되자 미리 배부된 대의원들의 식권이 빵과 우유를 넣은 점심식사 봉지와 교환됐으며 회의장은 후보들의 초조감, 담배연기, 빵 봉투 뜯는 소음 등으로 사막에서의 전쟁을 방불하는 더위가 짓눌렀다. 오후 1시에 呼名이 끝나자 곧이어 투표종료가 선언되고 개표가 선언됐다. 투표자 729명, 투표용지 교부 729장이라는 대조 결과가 발표되고 후보 이름 밑에 붓 뚜껑으로 기표된 투표용지가 개표 책상에 쏟아졌다. 보도진들과 개표 종사원들로 40여 평의 壇上은 완전히 메워졌다. 투표용지를 점검한 결과 투표자보다 2장이 많아 관계자들을 긴장케 했으나 사무착오임이 곧 밝혀졌다.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후보들은 초조한 빛으로 신문을 보거나 대회장을 거닐었다. 후보참모들은 개표의 중간중간 결과를 후보들에게 보고하여 혼잡을 빚기도 했다. 투표용지 중에는 白紙 투표와 「金大中」이라고 쓰인 것도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개표가 반 이상 진행되자 金泳三씨의 우세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기쁨에 넘친 金후보 지지자들은 壇上과 壇下에서 손으로 V字와 동그라미 표시를 지으며 승리를 기뻐했다. 그와 동시에 각 후보참모들은 2차 決選 투표준비를 위해 이곳 저곳에서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傳統野黨의 새 旗手를 정하는 幕後의 密談이 펼쳐진 것이다. 오후 2시25분 1차 투표결과가 발표되자 회의는 停會된 가운데 각 후보 간의 제휴협상이 본격화했다. 金泳三씨는 高興門 부총재와 같이 기자석 부근에 와 귀엣말을 주고 받았다. 이때 주고 받은 얘기는 3일 전에 있었던 합의사항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1차 투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鄭海永씨와 자리를 같이한 金씨는 鄭씨가 안 포켓에서 제휴에 관한 서류를 내놓으면서 제휴문제를 거론했으나 金씨는 『우리끼리 잘해 보자』면서 구체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다. 金씨는 이때만 해도 鄭씨의 표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아래 이 같은 태도를 취한 것 같다. 1차 투표가 끝나자 辛道煥 사무총장과 李敏雨 원내총무는 鄭海永씨와 小道具室 에서 만나 제휴를 요청했으나 鄭씨는 『일단 2차 투표에 임하겠다』고 거절했다. 1차 투표 결과를 보고 李哲承씨는 겉보기에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李씨의 측근들은 「鄭一亨씨의 金泳三씨 지지 선언으로 뒤집혔다」고 화를 냈고, 宋元英 의원은 『鄭씨 선언이 대세에 영향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李씨는 곧 참모 모임을 열어 金義澤씨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오후 3시 회의는 막후협상에서 사퇴를 결정한 高興門씨와 李哲承씨의 신상발언으로 속개됐다. 高씨와 李씨는 각각 金泳三, 金義澤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여 대의원들로부터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신상발언을 끝낸 高씨는 金씨와 두 손을 움켜잡고 높이들었고, 李哲承씨도 金義澤씨와 마찬가지의 포즈를 취해 敗者의 쓰라림을 딛고 깨끗하게 협조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투표는 1차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돼 오후 4시 30분에 끝났다. 『역사를 밤에 이루어 보자』 2차 투표의 집계가 계속되고 金泳三 후보가 當選圈엔 미달되는 優勢로 나타나자 회의장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黨憲에 따라 응당 뒤따를 3차의 決選투표가 있는 대신 회의를 23일로 연기하려는 세력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회의가 하룻밤 연기되면 資金 등 여러 면에서 열세인 金泳三 후보가 불리하리라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역사를 밤에 이루어 보자』는 책략이 꼬리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李忠煥 대회의장이 2차 투표 결과를 선포하자 金후보 지지자들의 함성이 터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李의장이 『최다득점자인 金泳三 후보와 차점자인 金義澤 후보를 놓고 決選투표를 하겠다』고 선포하자 폭력배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평소 辛道煥 사무총장을 따른 것으로 알려진 崔某, 金某 등 청년당원들이 壇上으로 뛰어올랐다. 이들은 李의장과 盧承煥 부의장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주먹 세례를 할 듯한 협박적 자세를 취했다. 일부는 사회석을 발로 차고 의자를 뒤엎었다. 연기하자는 것은, 점심에 빵 한 조각 먹어 배가 고프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때가 오후 5시25분. 暴力 등살에 밀려 李의장도 壇下로 내려와 버렸다. 이와 때를 맞추어 예술극장長 金會九씨가 辛道煥 사무총장을 찾아와 장소를 비워 달라고 요구했다. 저녁 스케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金泳三 후보계의 黃洛周 의원이 극장 사무처에 가서 확인해 보니 저녁 스케줄은 하나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辛총장이 대의원들에게 『장소를 내달라는 요청이 있다』고 마이크로 말하다가 야유만 받았다. 어떤 대의원은 『스케줄도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극장 측과 金義澤, 辛道煥씨의 손발이 어떻게 그렇게 잘 맞아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폭력사태로 회의가 중단되자 대의원석에서 『빨리 속개하라』는 요구가 터져 나왔고 『내일 하자』는 요청도 간간이 들렸다. 『나는 죽어도 野黨 살아야』 오후 6시10분, 李대회 의장이 속개를 선언한 뒤 『조금 전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선 안 된다. 내게 物理的 작용이 있었다고 해서 방망이 친 것을 철회하지 않는다』면서 決選 투표에 들어간 두 후보가 협상을 하라고 제의했다. 이에 따라 金泳三씨는 金義澤씨 자리로 찾아가 『표 결과에 승복하기로 서약하지 않았느냐, 이것은 누구 당수 못 되게 하는 장난이 아니냐』면서 결선투표에 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金義澤씨는 『내일 해도 표 변동은 없는 것이 아니냐, 지금 장내가 소란하니 내일 하자』고 맞섰다. 이 같은 대화가 끝난 뒤 金泳三씨는 李대회 의장에게 올라가 눈물을 머금고 내일 대회를 감수할 테니 신상발언을 달라고 얘기했다. 壇下에서 이 기미를 본 高興門, 李重載씨는 『무슨 얘기냐, 오늘 해야 된다』면서 黃洛周, 文富植 의원에게 신상발언을 못 하도록 말리라고 했다. 高씨는 『내일하면 다 틀리는 것』이라면서 『밤을 대회장에서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결선투표를 해야 한다』면서 黃洛周 의원의 등을 壇上으로 밀어 黃의원이 金泳三씨의 신상발언을 못 하게 막았다. 兩派의 팽팽한 대결로 시간만 끈 채 결선투표에 들어가지 못하자 金씨는 黃의원과 崔炯佑 의원과 숙의 끝에 신상발언을 하기로 결심했다. 장내를 진동하는 박수가 터졌다. 그가 『나 金泳三이는 죽어도 신민당은 죽을 수 없다는 결심으로 눈물을 머금고 대회 연기에 합의했다』고 외쳤을 때, 특히 많은 박수가 나왔다. 그의 말은 차라리 절규와 울음이었다. 이무렵 장내 분위기는 완전히 기울어 연기를 책동했던 세력은 그 분위기에 짓눌려 버린 듯했다. 金후보의 발언이 계속되는 동안 金義澤씨의 후보 사퇴 소문이 갑자기 장내에 퍼졌다. 辛道煥·柳致松 의원과 申東準 前 柳珍山 총재 비서실장이 막후에서 숙의를 한 뒤 申실장이 대의원석에 앉아 있는 金義澤씨에게 급히 뛰어 간 뒤 사퇴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金후보가 이들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대의원들과 보도기관은 이 놀라운 소문 확인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金義澤씨가 신상발언에 나섰다. 정말 사퇴표시가 나올 것인지 가득한 의문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약 10분간 계속된 金후보의 말은 『黨職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과 『소요가 본의가 아니었다』 는 해명이었다. 말미에 가서 본론이 나왔다. 『나는 次點者 자격을 포기한다. 이것으로 대회가 끝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일 대회에서 이에 따른 의사 절차를 밟아 달라』고 말했다. 金泳三 후보 지지자들은 당선 선포만을 남긴 金씨를 둘러싸고 대회장을 떠났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궐기 1974년 10월19일 李源京 문공부 장관은 중앙일간지와 방송국의 편집 및 보도국장들에게 「학원문제(대학생들의 시위), 연탄문제(연탄이 귀하고 질이 떨어져 발생하는 불만사태), 월남사태(월남에서 발생하는 反정부 시위 등)에 대해서는 기사화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보부도 같은 지시성 부탁을 했다. 학생시위는 1단 기사로도 실리지 못하게 되었다. 1974년 10월5일 한국기자협회 운영위원회는 내무부 대변인으로 轉職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기자협회장 金仁洙씨에 대한 징계문제를 논의한 끝에 사과를 받고 사표를 수리하기로 했다. 10월19일 기자협회는 동아일보 문화부 金炳翼 기자를 제12대 회장에 선출했다. 기자협회장이 官界로 진출한다는 소문 자체가 징계사유가 될 정도로 당시의 기자사회는 反정부적이었다. 이 사건은 기자들의 언론자유투쟁으로 확대되는 한 계기가 된다. 10월24일 한국언론사와 민주투쟁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동아일보에서 일어났다.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은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 주최로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 집회를 갖고 선언문을 채택했다. 역사적 문건이므로 全文을 소개한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未曾有의 難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自由國家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기능인 自由言論은 어떠한 구실로도 抑壓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宣言한다. 우리는 敎會와 大學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自由回復이 주장되고 언론인의 覺醒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언론자유는 바로 우리 언론종사자들 자신의 實踐과제일 뿐 當局에서 許容받거나 國民大衆이 찾아다 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逆行하는 어떤 壓力에도 굴하지 않고 自由民主社會存立의 基本要件인 自由言論實踐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決議한다. 1. 新聞·放送·雜誌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一致된 團結로 강력히 排除한다. 2. 機關員의 出入을 엄격히 拒否한다. 3. 言論人의 不法連行을 一切 拒否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不法連行을 자행하는 경우 그가 歸社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年 10月24日 東亞日報社 記者一同> 그 전날인 10월23일 동아일보 宋建鎬 편집국장과 방송뉴스부 부장대우 朴重吉씨가 정보부에 연행되었다. 이 날짜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서울농대생 300명 데모」란 제목의 1단짜리 기사 때문이었다. 이 기사는 제2판 신문에서부터는 빠졌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편집국에서 농성에 들어갔고 연행되었던 두 사람은 밤늦게 돌아왔다. 그 다음날 아침에 역사적인 自由言論實踐宣言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정보부는 학생들 시위 기사를 일절 보도하지 못하게 하고 있을 때였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이 선언 직후 전국적으로 자유언론수호선언이 잇따랐다. 일주일 사이에 전국의 27개 언론사 기자들과 4개 記協지부가 이 선언에 동참했다. 기자협회가 이런 확산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기자협회는 10월26일 긴급 분회장 회의를 열고 언론자유수호특별대책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기자가 몸담고 있던 부산의 국제신보 기협분회도 10월25일 오전 결의문을 채택했다. <1. 우리는 그동안 알릴 權利와 의무를 다하지 못했던 점을 통감하고 진실한 보도로써 言論人의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2. 우리는 言論人이 連行되고 있는 최근의 사태를 중시하고 즉각적인 시정을 요구한다. 3. 우리는 사실을 보도한 이유 때문에 人權을 침해당한 동료에게 성원을 보내며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編輯간섭도 배격할 것을 결의한다> 기자들은 선언으로 끝내지 않고 행동으로 들어갔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신들이 채택한 결의문을 신문에 게재해 줄 것을 회사 측에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제작거부에 들어가 10월24일자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다. 회사 측에서 기사게재를 허용함으로써 25일 오전에 24일자 신문이 배달되었다. 한국일보에서도 기자들이 결의문을 싣기 위해 3일간 윤전기를 점거하고 철야농성했다. 〈일그러진 얼굴을 펴게 하는 것…〉 한국일보 10월22일자 신문에 실린 월남사태 관련 기사 때문에 張康在 사장, 金庚煥 편집국장, 李祥雨 편집부장이 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날 정보부 요원 두 명이 편집국장실로 찾아와 金국장을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리고 갔다. 국장의 歸社를 기다리던 기자들은 연행사실과 기자들의 결의문을 기사화해야 한다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날 돌아온 金국장이 『나는 고생이 없었으나 여러분들이 고생이 많았다』면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했으나 기자들은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기사화를 요구했다. 10월24일엔 기자들이 윤전기 앞에서 농성하면서 기사를 싣지 않으면 신문 인쇄를 못 하게 하겠다고 버티었다. 인쇄팀에서 윤전기를 돌리면 지키고 있던 기자들이 인쇄 중지 버튼을 눌렀다. 25일 새벽에 한국일보 경영층이 기사 게재를 결심하여 농성이 풀렸다. 이날 이화女大와 연세大 치과대학에서 反정부 시위가 있었다. 한국일보는 이 시위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사회부 기자들과 대책위원회가 편집국장에게 항의하여 5판부터 기사가 실렸다. 이런 식으로 反정부적 기사를 1단이나마 지면에 확보하려는 언론 내부의 싸움이 전국적으로 번졌다. 이런 줄다리기는, 정부의 압력을 직접 받는 편집국장과 경영층을 상대로 기자들이 항의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정권과의 투쟁 이전에 社內갈등으로 악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움직임이 신속하게 전국 언론기관으로 확산되는 데는 기자협회와 기자협회보(주간)의 역할이 컸다. 1974년 11월8일자 기자협회보는 「우리의 주장」이란 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3000 기자들이 공감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강력한가. 「1단의 벽」을 깨는 것이 왜 어려운가. 우리의 이성이 조금씩은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이 들어가야 할 기사, 큰 단수로 취급되어야 할 기사가 他意에 의해서 우표딱지처럼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 마치 紙面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自畵像이다. 일그러진 얼굴을 펴게 하는 것, 그것이 문제이다> 언론의 암흑기는 없었다. 일선 기자들이 시작한 언론자유운동은 反정부적 목표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언론의 正道, 민주주의의 원칙을 내세운 것이었기 때문에 좀더 넓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민주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었으므로 이를 막으려는 朴정권의 시도는 논리가 서지 않았다. 당시 정보부가 언론사에 대해서 압력을 행사할 때도 결국은 부탁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의 언론감시가 법적인 뒷받침도 없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논리는 「남북분단 상황에서 이런 보도는 안보에 危害가 된다」는 정도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가톨릭 주교회의, 그리고 신부들과 수녀들도 기자들의 언론자유투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金泳三 총재가 취임한 이후 투쟁성을 회복한 신민당도 국회에서 朴정권의 언론규제를 猛攻했다. 1974년 후반기의 反정부 투쟁은 언론, 특히 신문기자들이 앞장서고 야당·학생·기독교(신·구교)가 뒤를 따르는 형국으로 넓은 前線을 형성했다. 이 운동은 곧 「유신헌법 철폐」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오늘의 관점에서 31년 전의 이 상황을 돌이켜 보면 朴정권이나 기자들이나 한국의 진로를 놓고 진지하고도 근원적인 고민과 대결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불과 수개월 전에 북한정권이 파견한 암살자가 대통령의 부인을 살해하는 한국에서, 또 對南武力赤化 노선을 추구하는 북한정권을 지척에 두고 안보를 유지하면서, 석유쇼크 이후에 어려워진 경제를 발전시켜야 했던 朴正熙 정권이 과연 어느 정도의 언론의 자유를 허용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의 국민과 언론 수준에 비추어 이 자유는 충분했던가 부족했던가? 기자들과 야당·학생·종교계의 도전은 1972년 10월17일의 비상계엄에 의한 유신조치 이후 2년 만에 처음으로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저항운동이었다. 광복 이후 언론자유가 가장 크게 억제되었던 시기는 1961~1963년의 군사혁명정부 시절, 1972~1974년, 그리고 1975년 월남 패망 후 긴급조치 9호가 공포된 이후 1979년 10월26일 朴대통령이 피살되기까지이다. 여기에다가 제5공화국 시절을 보탠다면 1980년 5월 親군부 집권 이후 1985년 2·12 총선까지가 된다. 한국 현대사 60년 가운데 15년 정도가 언론자유의 큰 침해가 있었던 시기인 셈이다. 이 기간 중에도 정권적 차원의 비판을 못 했을 뿐이지 정책적·행정적 비판은 허용되었다. 이 시기조차도 「언론자유의 암흑기」라고 표현하면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朝鮮朝의 전제정치 전통밖에 없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시작했고, 그것도 북한정권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던 시기에 이 정도의 언론통제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어떤 국제적 비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한국의 언론은 결코 낮은 점수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한국의 언론 발전을 평가하는 가장 유효한 기준은 똑같은 역사적 조건에서 출발했던 북한과 비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란 말로써 경제발전만 높게 평가한다. 경제 발전은 정치 발전, 언론 발전 없이 홀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발전도 한강의 기적에 못지않은 발전을 했다고 평가될 날이 올 것이다. 한국의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어 간 이유 몇 가지를 꼽아 본다. 첫째, 朝鮮朝의 정치풍토가 선비 양반층의 활발한 言路를 보장했다. 말과 글로 무장한 지식인들이 정권을 잡았고, 在野 지식인인 士林의 영향력이 강대했던 조선조에선 활발한 언론활동이 항상 이어졌다. 조선조의 선비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의 기자들은 아주 높은 영향력과 사회적 평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李承晩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간판으로 내걸고 국민국가 건설에 나섬으로써 언론자유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當爲의 대명제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하는 한 언론자유는 부인할 수 없다는 거대한 大義名分을 그 어떤 권력자도 무효화시킬 수 없었다. 셋째,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미국式 자유민주주의의 기계적 적용은 국가의 안보와 경제발전에 위해가 된다고 확신했던 朴正熙 대통령조차도 언론자유 규제는 한시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그 부하들에 의한 언론탄압엔 한계가 있었다. 넷째, 1980년대 이전에는 기자들도 좌경화되지 않아 反정부 활동을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의 원칙下에서 온건하게 했기 때문에 정권 측의 탄압도 상대적으로 덜 무자비했다. 朴正熙를 미워했던 기자의 이야기 나는 1971년 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 親朴노선에서 反朴노선으로 전환했다. 부산에서 일선 기자를 하면서 나는 정부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좋은 기사의 제1조건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언론의 일반적 분위기이기도 했다. 경찰 출입기자를 할 때는 매일 아침에 즉결심판자 대기실로 찾아간다. 밤에 통행금지 위반·노상방뇨·無錢取食·소란 등의 경범죄 혐의로 연행되어 온 사람들의 서류를 읽다가 공화당이나 새마을 운동 단체의 간부 이름이 나오면 꼭 꼬집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특종에 눈이 먼 나에게는 새마을 운동이 가진 역사성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1974년에 「중금속 오염의 추적」이란 기사로 제7회 기자협회 취재보도 부문 상을 받았다. 내가 다녔던 부산수산대학교의 교수가 조사한 어패류의 중금속 함유 상황을 기사화했더니, 이 교수는 문교부의 압력으로 징계를 당했고 학장은 물러났다. 이런 일도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정의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어둡고 썩었으며 협잡이 있는 곳만 찾아다니던 젊은 기자의 눈에는 朴대통령의 위대한 국가발전 전략이란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민주주의와 서구 수준의 저널리즘 원칙이 세상 만물을 평가하는 나의 기준이 되어 있었으니 유신통치기의 朴대통령이 하는 일들 중 곱게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74년 8월15일에 陸英修 여사가 피살되었을 때도 나의 가슴속에선 별다른 애통심이 생기지 않았다.
| 1974년 10월24일「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는 동아일보 기자들. |
한 미국인의 朴正熙 평가 1974년 가을 동아일보 기자들이 시작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계기로 전국의 기자들이 朴정권 비판을 위한 조직에 나섰다. 기자협회가 그런 운동의 중심이었다. 국제신보 기자협회 분회는 「밝힘」이란 소식지를 내면서 외부압력으로 기사가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을 감시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여기에 끼었던 나는 마치 독립운동하듯이 정권비판과 진실보도란 대명제에 보람을 느끼면서 일했다. 그 과정에서 기자들이 외부압력에 흔들린다고 편집국장을 몰아세우는 일에 동참하기도 했다. 金泳三·金大中이란 이름은 나에게 희망이고 용기의 근원이었다. 한 편집기자는 1978년 12월에 金大中씨가 감옥에서 나와 병원에 입원하는 기사를 1면 옆구리 기사로 크게 취급했다가 정보부의 압력을 받은 회사에 의해 3개월 정직을 당했다. 우리는 그를 순교자처럼 우러러 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시대를 다른 눈으로 되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1996~1997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국제기자 연수 프로그램인 「니만 펠로」 과정에 수학하면서 朴正熙식 개발에 대해서 외국기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때 나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한 미국인을 援軍(원군)으로 삼아 東아시아의 국가발전 전략을 옹호하곤 했다. 그는 「중국의 浮上(부상)」이란 책을 쓴 윌리엄 오버홀트였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朴正熙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 한때 카터 대통령의 선거참모였던 자신이 왜 朴正熙식 개발전략의 정당성에 설득당하게 되었나를 흥미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중국의 浮上」(The Rise of China. Norton. 1993) 집필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던 오버홀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민권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 문화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연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毛澤東 신봉자들이 강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고 했다. 예일 대학원을 졸업한 오버홀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칸 소장은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트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홀트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朴正熙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式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 학자·정치인·기자들의 위선적이고 도식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式 오만 1976년에 오버홀트는 카터 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對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들은 철없는 사람들로 비쳤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駐韓미군의 철수를 공약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인권외교의 챔피언으로서 카터의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했는데 이게 오버홀트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오버홀트는 미국식 인권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으로 보았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년 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인권문제와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의 사기성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先行(선행)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사기성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적 자유화가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후진국가가 민주화를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서구의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며 교육받은 중산층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민주화를 먼저 하면 반드시 실패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민영화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셋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서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이라고 이름지었다.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朴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이 있음에도 집권하자마자 군사비를 삭감했다. 이런 일은 민간 정치인들이 절대로 할 수 없다. 그는 적대관계에 있던 일본과 수교했다. 이것도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한 군중심리를 누르고 외자유치와 무역을 장려했다. 그는 수출을 지원하기 위하여 환율을 인하했다. 이는 南美의 정부라면 할 수 없는 조치이다. 그 나라들의 지배층은 과대평가된 환율을 이용하여 사치품을 수입하고 외국에서 부동산을 사재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은 외국인의 투자를 환영하고 원자재와 기계류에 대한 관세를 내려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런 개혁은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과 과보호에 안주하는 기업인으로부터 동시에 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라 민주주의를 채용하는 開途國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朴대통령은 현대식 국가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은 미군보다도 더 효율적인 집단이 되었다. 그는 무능하고 부패한 장관과 은행가들을 추방하고 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이들이 고위 관료가 되도록 하여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날씬한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해 미국式 민주화를 추진한 필리핀의 아키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청탁을 받아 공무원들을 임명하다 보니 정부는 커지고 효율성은 떨어졌으며, 유능한 장관들은 집단이기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다. 朴대통령의 개혁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민주화의 조건들을 만들어 놓았다> 朴대통령의 자유·민주觀 朴正熙 대통령은 야당·학생·신문·기독교계가 유신체제 반대운동에 대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인 1974년 12월5일에 국민교육헌장선포 제6주년 기념식 치사를 통해서 자유와 인권觀을 이렇게 피력했다. 〈민족의 생존권은 국가존립의 기본전제일 뿐 아니라 모든 개인적 기본권의 바탕인 것입니다. 우선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민주주의와 자유 등 기본권을 수호해야 합니다. 그들과의 경쟁에 이겨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국력이 우세해져야 합니다. 국력 배양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나가는 길입니다. 사대의존적인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을 외면한 무책임한 언동으로 국론분열과 사회혼란을 조성하려는 인사들의 시대착오적인 존재는 역사 속에서 기록조차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해둡니다〉 朴대통령은 그해 12월1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통일안보보고회 치사를 통해서는 『자유와 민주가 자라날 수 있는 바탕이 국력배양』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는 야당과 在野세력이 주장하는 유신헌법의 개헌요구에 대해서는 『헌법만 고치면 만사가 하루아침에 다 저절로 해결되는 것처럼 국민을 속이고 오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신체제는 자주적이고 자립을 위한 창의적인 체제』라고 강조하면서 『유신체제의 정신적 기조는 주체의식과 애국심이다』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처럼 유신체제를 신념화하여 반대자들과 맞서고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여권에서조차도 의외로 적었다.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이 체육관에서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식인데 어떻게 민주주의의 경험을 20여 년 한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그들을 약하게 만들었다. 朴대통령조차도 민주주의의 당위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더욱 설명이 어렵게 되었다. 1960년대에 朴대통령은 야당과 언론의 공격에 대해 격정을 토로하면서 논리로써 대결하려고 했으나, 유신시대에는 정보부 등을 동원한 강압적 방법을 썼기 때문에 지식인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朴대통령을 편들기도 어려워졌다. 자발적 지지조차도 어용으로 몰리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경멸당하고 여권에서도 진심 어린 지원을 받지 못했던 朴대통령의 유신이념은 그러나 朴대통령의 순수함과 실적을 인정한 생활인의 양해로 하여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유신이 만든 권력기생 체질의 보수당 1972년 유신선포 이후 여당은 정권을 만들어 내는 産母가 아니라 대통령의 노리개로 전락했다. 朴대통령은 政局운영에서도 공화당과 「유정회」보다는 정보부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정치참모는 공화당 의장이나 유정회 회장이 아니라 정보부장, 나중엔 경호실장이 되어 버렸다. 최근 許和平 미래한국재단 소장은 『신념 없는 한국의 右派는 과거에 보안법·정권·反共구호로써 체제를 지키려고 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풍토가 정착된 것이 유신기간 때였다. 朴대통령이 정보부라는 채찍으로써 나라를 끌고 가고 있으니 여당은 정권의 주인의식을 잃고서 체제유지의 구경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권력자에 빌붙어 안주하면서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공세를 펴고 안으로는 투항해 버린, 일종의 권력기생적 정치세력이 유신기간에 만들어졌다. 그 맥을 잇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나라당이다. 유신체제는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국가운영 체제를 탄생시켰으나 그 代價로 투쟁성이 강한 야당과 자생력이 없는 寄生체질의 「살찐 돼지」 같은 右派정당을 파생시켰다. 두 정치세력 간의 승부는 그로부터 20년 뒤에 난다. 유정회 같은 寄生체질의 민자당은 투쟁성이 강한 金泳三에게, 민자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은 金大中과 盧武鉉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다. 이것이 유신통치의 代價였다. 朴대통령을 그래도 가장 충직하게 뒷받침했던 것은 全斗煥이 리드하던 정규 육사 출신 장교단이었다. 이 그룹은 朴대통령의 총애를 받았고, 대통령이 추진하던 자주국방 건설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은 육사 때 「문민통치下의 군대」를 배운 이들이었다. 민주주의 체제下의 장교의 역할을 배운 이들이 朴대통령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무조건 지지할 수도 없었다. 다만 이들은 朴대통령의 富國强兵(부국강병)을 위한 순수한 열정을 믿었으므로 逆心을 품을 입장은 아니었다. 이들이 10·26 뒤 김재규를 단죄했다고 해서 유신통치를 지지했다고 보는 것은 속단이다. 정규 육사장교단 출신들이 5共 탄생 때 대통령 7년 단임을 선언하고 나섰고, 이를 실천한 것도 평소 소신의 반영이었다. 『지팡이로 때리는 시늉만 하라』 유신시대의 朴正熙 통치철학에 대해서 이를 자신의 신념으로 만들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설득해 간 드문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은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이었다가 문공부 장관으로 옮겨갔던 金聖鎭씨이다.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을 지낸 그는 朴대통령이 서양문명에 대한 더욱 넓은 지식과 견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金聖鎭이 보기에 朴대통령은 미국 군사학교 유학 중 얻은 단편적 지식의 틀 속에서 미국을 이해하는 듯했다. 미국 사람들과 서양 사람들의 문물과 제도를 이해하려면 철학적 내지는 종교적 정신세계에 대한 문명론적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金씨는 생각했다. 그는 미국의 미래학자 허먼 칸(허드슨 연구소장)과 영국의 전략가 로버트 톰슨 卿을 朴대통령에게 소개해 주어 깊은 대화를 나누도록 했다.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을 만난 톰슨 卿은 자신이 말레이시아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전임자가 가르쳐 준 지혜를 이야기했다. 『전임자가 이야기하기를 「자네가 任地에 도착하거든 크건 작건 간에 우선 모든 권한을 한손에 움켜쥐게. 그러나 그 권력을 사용하려 들지 말게. 그저 장악하고 있으면서 고등판무관의 위엄과 위력을 과시하게」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렇게 응수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되는 집안에선 家長이 지팡이를 들고 새벽 일찍부터 집안을 둘러보며 집안일을 보살폈답니다. 그는 말을 듣지 않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식구가 있으면 뒷짐을 진 채 지팡이를 흔들어 보이면서 호통을 치고 훈계합니다. 그러나 지팡이로 때리는 일은 없지요. 그저 때리는 시늉을 할 뿐이지요』 두 사람은 권력의 상징성에 의견의 일치를 본 데 대하여 유쾌하게 웃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자신에 반대한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에 대해서 「지팡이로 때리는 시늉만 하는」 식의 응수를 하려고 애썼다.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구속하여 중형을 선고받게 한 뒤 곧 석방시켜 주는 방식이 되풀이되었다. 다만, 反국가사범이나 政敵에 대해서는 형량을 엄격히 적용했다. 사범학교 출신으로서 교사와 軍 지휘관을 오랫동안 지낸 그는 반대자들에 대해서도 훈계조의 채찍을 들려고 했다. 金炯孝 교수(당시 서강大)는 공개적으로 새마을 운동을 지지한 소수의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벨기에 루벵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서양 철학에 젖어 있었다. 그는 박사 논문의 대상이었던 가브리엘 마르셀에 심취해 있었다. 마르셀은 인격공동체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혁명과 같은 열광성이 가진 사기성을 비판했다. 金씨는 인간의 불행한 면을 강조하는 사르트르가 싫었고 진실된 카뮈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귀국하여 장교 신분으로 공군사관학교 조교수로 일했다. 사관학교의 분위기는 딱딱했지만 부정과 협잡을 배척하는 학생들의 정의감에는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한다. 金씨는 이즈음 고민을 많이 했다. 서양철학과 한국 현실의 너무 큰 괴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柳承國 교수(당시 성균관大 동양철학과·前 정신문화연구원 원장)를 찾아가 동양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율곡과 원효를 좋아하게 됐다. 이율곡의 「氣發理乘」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氣와 理, 즉 이상과 현실의 힘을 다 중시하고 조화시키려는 현실적인 학문 자세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金교수는 조선왕조 시대 지식인의 정신사를 이렇게 이해했다. 〈개국 초기 두 가지 타입의 지식인이 있었다. 정도전은 현실, 정몽주는 이상을 중시했다. 조선조 시대에는 이 두 흐름이 줄곧 대치·교차하면서 갈등하는 바람에 지식사회의 에너지가 탕진돼 갔다. 정도전을 계승한 학자들은 官學이라 하여 권력에 봉사하는 바 되었다. 정몽주의 맥을 잇는 학자들은 급진 이상론을 펴기 시작했으니 조광조가 그 대표다. 조광조의 실패 이후 이상파들은 현실에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만 힘썼다. 이율곡은 이 두 흐름을 종합하려 하나 당쟁에 휘말려 실패하고 만다. 官學은 이념이 없는 출세주의로 흘러 타락해 버린다. 말기에 實學이 나왔지만 實學의 이상은 현실 권력의 뒷받침을 못 받아 실험으로만 그친다. 정몽주에서 시작된 순수주의는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으로 나타났고, 해방 뒤에는 지식인의 비판적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이 순수주의는 현실을 이상 속에서 증발시켜 버리고 흑백논리를 몰고 올 위험성을 늘 갖고 있다. 순수주의·저항주의는 무엇을 창조하고 책임지는 자리에 서면 공허해진다〉 국민의 평균 수준 만큼만 발전 이러한 생각에서 그는 朴대통령의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자세나 새마을 운동을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朴대통령을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어용」이란 비난을 학생들로부터 많이 받았는데, 『나는 학자로서 양심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라고 했다. 『당시 대학가는 朴대통령을 완전히 부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떤 현상에도 양면이 있는 법인데, 그러한 완전부정은 非과학적이며, 그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유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였습니다. 朴대통령을 비판할 자유는 물리적 폭력에 의해, 지지할 자유는 여론이란 폭력에 의해 억압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협박 전화도 많이 왔어요. 이런 흑백논리는 양쪽에 다 책임이 있어요. 저는 저항과 과학적 비판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朴대통령이 아무리 나빠도 0.001%쯤은 좋은 점이 있을 테고, 저는 그 0.001%의 좋은 점을 대변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朴대통령의 단점은 통치철학이 그 개인에게 종속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이념에 종속되어야 하는 데 말입니다』 그는 10·26 뒤에도 朴대통령을 계속 옹호했다. 『國葬(국장) 때 TBC TV에서 좌담회를 하는데 저를 불러요. 주변에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렸지만 나갔습니다. 저와 상대하게 돼 있었던 어느 원로는 朴대통령의 총애를 많이 받은 분인데 그 자리를 피하더군요. 人心 무상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공자가 齊(제)나라의 관중을 평가한 말을 빌려 朴대통령과 같은 현실주의자의 역사적인 역할을 긍정적으로 말했습니다. 1980년 봄에 저에 대한 중상과 비방이 쏟아져 저는 교수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끼고 차라리 行商이나 하겠다는 각오로 사표까지 썼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모든 목표를 한꺼번에 이루겠다는 동시적 이상주의의 환상이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그 국민의 평균 실력만큼만 발전하는 것이지, 만병통치약은 역사엔 절대 없습니다』 유신시대에 대한 솔직한 증언 유신시대에 기자와 판사로 근무했던 50代 두 분과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은 『유신시대에 언론과 법조계가 朴대통령의 독재권력에 굴종했다느니, 인권의 암흑시대였다느니 하는 것은 한참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그런 과장은 자신의 비겁을 은폐하기 위한 핑계이다』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했던 金聲翊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기자들은 매일 진실을 전하려고 싸웠다. 부장·국장과 싸우고 정보부 직원들과 싸웠다. 아침마다 편집부에선 「야, 이 ××야, 그러면 니가 와서 편집해」 하는 고성이 들렸다. 기사를 삭제 또는 축소해 달라는 정보부 직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었다. 문제성 기사를 실어 주지 않는다고 기자가 부장·국장들에게 대드는 일들이 잦았다. 언론사 社主와 국장과 기자들이 고민하면서 최선을 다해 진실을 전하려고 애썼다. 정치부에선 야당 정치인들에게 더 호의적이었다. 기자들은 대통령이 지명한 유정회 의원들을 홀대했다. 金泳三·金大中씨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야당이 전투적이었기 때문에 언론이 야당에 의지하여 쓰고 싶은 정권 비판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요사이 한나라당과 朴槿惠 대표는 민주주의 시대에 활동하면서도 권위주의 정부 시절 그때의 兩金보다도 더 용기가 없다. 언론이 군대와 정보부·대통령 비판을 제대로 못 했다 뿐이지 그 이외의 행정부에 대한 비판은 가혹하게 했다. 유신시대에 언론자유가 제약된 것은 사실이지만 봉쇄되었다고 보는 것은 과장이다. 당시 기자들이 권력에 굴종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언론자유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 기자들이 싸워서 얻은 것이다』 한 전직 판사도 같은 말을 했다. 『정보부 조정관이 법원을 출입하면서 시국사건에 대해서 판사들에게 간섭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판사들이 소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배석판사 시절에 사형이 구형된 간첩혐의 피고인에 대해서 징역 8년에 간첩혐의는 무죄, 보안법 위반혐의만 유죄를 선고해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시국사건 이외의 재판에 대해서는 정권으로부터의 압력이 없었다』 위의 두 사람의 증언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 미국 프리덤 하우스의 분류법에 의하면 유신시대에도 한국의 정치적 자유는 「부분적 자유」 등급에 속했다는 것이다. 유신시대에도 「부분적 자유」 평가 미국의 세계 인권 감시 관찰 기구인 「프리덤 하우스(www.freedomhouse.org)」는 매년 세계 192개국의 인권상황을 세 등급으로 나눠 발표한다. 기준은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자유의 합산이다. 평균 점수가 1~2.5점이면 「자유」, 3~5.5점 사이는 「부분적으로 자유」, 5.5~7점 사이는 「자유롭지 못함」으로 분류한다. 2003년 보고서에 따르면 34개국이 「자유」 국가 중에서도 1등급인 1점 국가였다. 대부분이 유럽 국가와 北美 국가들이다. 우루과이(南美)·투발루(남태평양)·마셜군도·키리바시(남태평양의 영연방 소속 島嶼 국가)·도미니카·사이프러스·바베이도스(南美)·호주·산마리노(이탈리아 반도의 小國)의 이름이 보인다. 자유 국가들 중 2등급인 1.5점 국가로는 불가리아·체코·그리스·파나마·南아프리카·폴란드·헝가리 등 28개국이 여기에 포함된다. 일본과 칠레도 이 그룹이다. 한국은 자유 국가 중 3등급인 2점 국가인데 보츠와나·크로아티아·멕시코·몽골·루마니아·사모아·대만·이스라엘·도미니카 공화국 등 11개국이다. 무장대치상황下에 있는 세 나라, 이스라엘·대만·한국이 같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세 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있는 나라란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무장대치 상황에선 인권을 제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에선 대단한 것이다. 북한은 이 조사가 실시되기 시작한 1972년 이후 한 번도 「자유롭지 못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유롭지 못한 국가」들도 4등급이 있는데 북한은 최악 중의 최악인 7점 국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한국은 1972~1973년과 1976~1977년 사이 두 번 「자유롭지 못한 국가」로 분류되었다. 朴正熙 대통령의 유신통치기였다. 이 두 번을 뺀 朴正熙·全斗煥 통치기간 내내 한국은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분류되었다. 한국은 盧泰愚 정권이 들어선 1988년에 처음 「자유로운 국가」로 승격했는데 점수는 정치적 자유에서 2점, 시민적 자유에선 3점이었다. 점수는 작을수록 자유롭다는 이야기이다. 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는 자유 국가 중 한 등급이 올라 2점 국가로 되었다. 朴正熙·全斗煥 정권을 비난하는 이들은 파시즘이니 전체주의니 스탈린 체제와 같다느니 하는 비교법을 쓴다. 프리덤 하우스의 통계는 이런 비난이 과장된 것이며 「권위적 정부」라고 표현하는 정도가 맞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유신시대가 깨끗했던 이유 金正濂 비서실장(朴대통령 시절)은 유신시대에 정치·공무원 사회가 깨끗해졌다고 주장한다. 정치자금을 거두는 창구가 청와대로 단일화되었고 액수도 줄었으며 代價性이 없었다는 것이다. 『제가 1972년부터 1978년 12월에 그만둘 때까지 年 20억원 정도의 정치자금을 모아서 대통령께 드렸습니다. 그전에는 공화당에서 도맡아했는데 정치가 행정에 간여하게 되어 말썽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지시로 제가 일반 獻金(헌금)식으로 받기 시작한 후로는 불미스런 일이 없었습니다. 돈을 낸 분들에게는 아무런 반대급부도 없었습니다. 대통령 덕분에 경제발전이 되어서 사업이 잘 되니까 예의상 얼마씩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대기업체 회장 20여 명에게 국한해서 부탁했습니다. 제일 큰 것이 2억원 정도였는데 3~4명이었고, 기타는 5000만원 또는 3000만원 어떤 분은 2000만원 정도였습니다. 공화당에 매월 1억원, 유정회에 2000만~3000만원, 추석·연말연시 비용으로 1억~2억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서 대통령의 승인下에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대통령께서는 절대로 헌금을 직접 받으신 적이 없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농민하고 관련된 사업을 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대통령께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화당의 기구축소를 지시하셨습니다』 朴대통령이 유신을 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정치 코스트를 줄이는 것이었다. 1971년 金大中 후보와 싸울 때 朴대통령 캠프에서 쓴 大選자금은 약 700억원이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이런 낭비와 함께 정치논리가 행정에 강제되어 쓸데없는 사업에 예산이 낭비되는 것을 싫어했다. 아울러 정치인들이 행정관료들의 인사에 개입하는 것도 차단했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유신 전에는 검사 인사에 국회의원, 특히 법사위원들의 청탁이 많았습니다. 청와대 쪽에서 법사위원들에겐 한 건씩의 인사청탁 이권을 주라고 권할 지경이었습니다. 유신 이후 이런 것이 사라지니 실력 있는 검사들이 요직에 앉게 되었습니다』 朴대통령이 엘리트 행정관료들을 정치인들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해 주니 오직 국가적 차원의 필요성·효율성·생산성을 기준으로 행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 자유를 제한한 代價가 경제·행정의 생산성 향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1970년대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게 된 요인 중의 하나이다. 金正濂씨는 이렇게 말했다. 『朴대통령은 특정 집단이나 계층을 위해 산업정책을 쓰지 않고, 농민·근로자 전체를 위해서 정책을 썼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세계은행 부총재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南美의 경우에는 大지주와 도시의 수입대체공업家 위주로 정책을 썼기 때문에 小農들의 불만이 있어 정치가 불안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朴대통령이 정경유착을 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경제가 커지니까 대기업이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잘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신상필벌式으로 정부가 지원해 주었으니까 재벌이 생긴 것입니다. 방위산업을 80여 개 분야로 나눠 건설할 때, 기술적으로 어렵고 투자도 많이 드는 분야는 자연히 대기업에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몇몇 대기업은 끝끝내 소극적이었습니다. 돈이 많이 드는 중화학 공업을 시장경제에 맡기고 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다고 인권 운운하나』 1974년 가을 이후 朴대통령은 3面이 적대적 세력으로 둘러싸인 형세에 처한다. 북쪽엔 金日成, 국내엔 목소리가 커지는 민주화 세력,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선 포드·카터 대통령 정부와 언론이 국내 민주화 운동을 엄호하는 형국이었다. 고독감과 함께 고립감을 느끼게 된 朴대통령은 미국의 간섭에 대해서는 특히 강하게 반발했다. 1974년 10월2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도 그랬다.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곧 내한할 텐데 訪韓 전에 구속인사를 석방한다는 설이 나도는 모양이지요. 가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포드가 오는 데 무슨 사전 조건이 필요합니까』 朴대통령은 『그런 일은 국제관례에도 없는 일이다』고 말했다. 곧바로 미국에 대한 감정표현이 이어졌다. 『미국이 군사원조를 가지고 우리에게 압력을 가한다는 보도가 나도는데, 사실상 미국의 원조는 별것이 아닙니다. 내가 닉슨 대통령과 약속했었던 「軍장비 현대화」 정도가 고작입니다. 작년만 하더라도 미국의 원조가 480만 달러에 불과했는데 이런 액수는 주니까 받을 뿐이지 안 주어도 지장이 없습니다』 이어서 그는 진행 중인 율곡사업을 암시하듯이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 무기를 생산하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사 들여올 계획입니다』 그는 일본에 대해서도 직설적인 표현을 했다. 『우리의 당면과제는 金日成인데, 그거야 1년이면 족하지 않겠어요. 진짜 문제는 일본입니다. 우리보다 경제가 조금 앞섰다고 해서 지금 까부는데, 그럴 때마다 일본과의 경제싸움에선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지더군요』 『미국과 일본의 일부 지도자들이 우리의 인권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심히 마땅치 않습니다. 일본의 경우, 안보파동 때 그들이 취한 좋지 않은 행동이 있었으면서도 남의 나라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이상한 일 아닙니까.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州방위군을 동원해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대체 어떻다고 인권 운운해요!』 이 대목에서 대통령의 목소리가 커졌다. 朴正熙와의 車中 대화 한 토막 5·16 군사혁명의 참여자이자 공화당 원내총무 출신인 金龍泰 의원은 朴대통령이 매우 아끼는 이였다. 1975년, 포항종합제철 확장공사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항으로 내려가는 車中에서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金龍泰 자서록」에서 인용). 〈『金총무! 자네가 처음 당선돼서 국방위원을 하던 때가 1963년이었던가? 그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던 때라 나라살림이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 국군의 살림도 말이 아니었지. 이제는 3군 사령부까지 신설되어 우리 예산으로 운용하게 됐단 말이야…』 『……』 『자네가 국방위원으로 처음 국정감사를 나갔을 때 원주·대구·광주 등지에서 지휘관들에게 술대접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대견스럽게 생각했네. 5·16 전에는 국정감사에 나온 의견들이 격려는 고사하고 심한 사람은 욕지거리까지 했단 말야! … 내가 그때 자네에게 술값을 단단히 변상한 것으로 아는데…』 『네! 제가 군인들에게 대접한 술값의 세 곱절은 받았습니다. 국정감사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부르시어 청와대에 갔을 때 「자네는 무엇 때문에 軍지휘관들에게 술을 사주고 다니는 거야」 하시며 나무라실 때는 크게 잘못된 줄 알고 간이 콩알만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돈을 주시어 그 뒤로는 군인들과 더욱 자주 어울렸습니다』 『오늘의 우리 국군은 세계 어느 나라 군대보다도 자랑스러운 강군이 됐어! 자유진영 군대로선 실전경험도 했고, 다만 장비가 현대화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야. 방위산업을 일으켜서 최신무기들을 우리 손으로 모두 만들어야 하는데 미국이 찬성을 하지 않는단 말야!』 대통령께서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여보게, 신발 벗게나. 장거리를 뛸 때는 신발을 벗는 것이 편하이』 대통령은 껌을 까서 건네줬다. 백발이 성성한 金씨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며 무엇인가 솟구치는 고민을 억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용태! 벌써 대전이구먼! 자네 고향이 大德郡 杞城面 山直里(대덕군 기성면 산직리)라고 했지? 자네 출생지 말이야! 安平山(안평산)이란 높은 산이 있고 용바위라는 물 맑은 곳도 있다고 그랬지』 『각하! 어떻게 저의 고향을 그처럼 소상히 알고 계십니까? 정치인들의 신상명세서에 고향까지 조사를 하십니까?』 『자네가 말해 주지 않았나! 5代 대통령 선거 때 기차를 타고 호남선을 오르내릴 때 대전역을 떠나 黑石里(흑석리)역이든가 그곳만 지나면서 자기 입으로 고향 자랑을 해 놓고서… 조사는 무슨 조사!』 『각하! 죄송합니다. 각하의 기억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나는 정치 부적격자』 대전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다가 점점 사라져 갔다. 멀리 普門山(보문산)이 우뚝 솟아 하늘을 떠받치고 대전을 지키고 있는 것만 같다. 『자네는 5·16 혁명 후에 정치인은 결코 되지 않겠다고 했지? 민병도씨와 조림사업이나 하겠다고 고집부릴 때 내가 공연히 자네 앞길을 꺾어 놓은 것 같아. 내가 그때 자네를 왜 그렇게 야단까지 치면서 자네 전도를 막았는지 모르겠단 말야. 정치인이 되지 않겠다는 자네의 생각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몰라!』 이렇게 말하며 차창 밖을 바라보는 대통령은 「정치무상」, 「무정세월」을 되씹고 있는 듯싶었다. 자동차는 어느덧 추풍령 마루턱을 달리고 있었다. 『용태! 용태! 너무 달리지 말고 천천히 가!』 하고 말하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鄭仁永(정인영) 경호처장이 뒤를 돌아본다. 『이 사람아! 자네만 용탠 줄 아나! 저 운전기사도 金容太(김용태)란 말야!』 그래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그날 관1호차에 탔던 朴正熙 대통령, 鄭仁永 경호처장, 金容太 운전기사는 모두 10·26 사건 때 궁정동에서 피살했다. 대통령 일행은 추풍령 휴게소에서 잠시 머물러 이상국 장군의 영접을 받았다. 차 한 잔을 마시고 다시 南으로 달린다. 『용태! 피곤하지 않은가? 졸리거든 기대서 한숨 자게』 『저는 괜찮습니다. 각하께서 좀 쉬시지요』 『가을이 다가와서 그런지 자꾸만 옛일들이 머리에 떠오르는구먼!』 『각하! 종일 차만 타고 가시면서 詩想(시상)이라도 떠 오르시는지요』 『자네나 나는 정치 不適格者(부적격자)인지도 몰라』 『……』 『자네는 경성사범이고 나는 대구사범이니까 훈장 노릇이나 할 것을…』 『각하! 지금의 막중한 책무를 후회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후회한다기보다 항상 자신의 운명이 타율에 의해서 假飾(가식)이 될 때가 있어서…』 『각하! 사람은 누구나 지난 일을 후회할 때 가장 아름다운 때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1980년에는 나도 대구로 내려가 훈장 노릇이나 해야겠어. 그때가 되면 누가 정권을 맡아도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겠어?』 『……』 『한국의 정치풍토가 개선되기에는 너무나 큰 응어리들이 있어. 超科學(초과학)으로도 어렵고 도덕·윤리로도 고치지 못할 고질병 같아. 불신과 아집, 黑白論理(흑백논리)와 극한투쟁으로만 치닫고 있으니 朝鮮黨爭史(조선당쟁사)와 무엇이 다른가. 조국을 근대화하고 새마을 운동으로 가난을 없애 놔도 국민총화가 잘 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자네도 정치에 증오를 느끼고 있겠지? 공화당 창당 때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기도 하고, 부인은 낙태까지 당하고,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항명사건·불충사건·복지회사건 등으로 공화당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각하! 왜 하필이면 오늘따라 저의 불명예스러운 상처를 한꺼번에 털어놓으십니까. 저에게 人生無常(인생무상)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아니면 政治無常(정치무상)을 일깨워 주시렵니까?』 자동차는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경주를 거쳐 포항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용태! 사람이란 내일을 모르고 산다고 하지 않는가? 지난 15년을 되돌아보면 난들 정치를 알아서 했나? 좀 쓸 만한 人材가 나타나면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죽여야 한다느니, 제거해야 한다느니 하는 보고만 올라오니 내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처리를 해야만 했겠나』 『……』〉(계속)●
『절간 같은 데 오래 살 생각 없다』
| | 1975년 10월14일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 환영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례하는 朴대통령. 뒤로 車智澈 경호실장과 金載圭 건설부 장관이 보인다. 대통령 왼쪽에 박상범 경호관이 보이고 안경 낀 金載圭 뒤로는 全斗煥 前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경호관이 보인다. 이들은 1979년 10월26일 밤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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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21일 오전 10시30분부터 두 시간 동안 金泳三 신민당 총재와 朴대통령의 회담이 있었다. 金총재는 李宅敦 대변인을 데리고 청와대로 왔다. 朴·金 회담에는 아무도 배석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요담이 끝난 뒤 청와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점심을 함께 했다. 金正濂 비서실장에 따르면 두 사람은 표정이 아주 밝았으며, 화제도 발랄했다고 한다. 식사 후 朴대통령은 金실장과 수석비서관들에게 회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金총재에게 한국과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한 북한의 남침 준비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만약 북한이 남침하면 韓美 양국 대통령이 승인한 「서울 死守 7일 작전」, 또는 「9일 격퇴작전」을 시행할 것이라고 했다. 월남의 멸망 원인이 국론분열에 있었음을 지적하고 초당적 총력안보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했고, 金총재도 약속했다. 金총재는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했다. 나는 이미 국민투표에 의해 투표자의 73%가 유신헌법 존속을 지지했음을 상기시켰다. 金총재는 계속하여 유신헌법 개정을 주장하기에 나는 『북한으로부터 남침 위협이 현저히 줄어들면 헌법도 개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영수회담을 마쳤다> 金泳三 당시 총재가 나중에 필자 등에게 설명한 회담 내용은 약간 다르다. <朴대통령은 커피를 내어 왔다. 창 밖을 보니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있었다. 나는 작년에 陸여사가 당한 사고에 대해 조의를 표했다. 朴正熙는 창 밖의 새를 가리키면서 『金총재,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인간적으로 참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朴대통령은 아시아 지도를 꺼내 놓고 한반도와 그 주변정세를 내게 들려주었다. 설명이 끝나자 나는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대화가 길어졌다. 내가 거듭 『민주주의 하자』고 요구하니 朴正熙는 『金총재』하고 불러 놓고는 한동안 말을 끊었다. 『金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한테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살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朴正熙가 눈물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럼 언제 할 거냐』고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그의 눈물 때문에 그를 몰아세우려던 내 마음도 다소 풀렸다. 『꼭 민주주의 하겠다』는 그의 말은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朴正熙는 뒤이어 『金총재,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하며 말을 꺼냈다. 『조선 사람들은 문제가 있어요.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미리 알려지면 금방 이상한 일들이 생겨날 겁니다.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나는 金大中씨 문제를 제기했다. 朴正熙는 金大中이 해외에서 비겁하게 反韓운동을 벌였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나는 金大中이 납치되어 왔으므로 원상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 문제도 심각하게 제기했다. 회담이 있기 며칠 전 金相万 동아일보 회장이 나를 만나자고 하더니 朴대통령에게 광고탄압건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朴正熙는 『동아일보 광고사태를 풀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金총재뿐이다』고 하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동아일보를 비난했다. 그는 『金총재의 뜻을 잘 알겠으니 나에게 맡겨 주시오』라고 했다. 광고사태가 풀릴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金大中이는 끝났어』 金泳三 총재는 그날 신민당으로 돌아와서는 당직자들에게 회담내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아 오해를 많이 샀다. 金총재는 회담 뒤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친밀한 언론인을 만나자 『이제 金大中이는 끝났어』라고 좋아하더라고 한다. 그는 朴대통령이 1978년에 임기를 끝내기 전에 유신헌법을 개정할 것이며, 다음 대통령 直選에서는 金大中씨가 출마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朴대통령이 金大中씨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오판을 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 영수회담 이후 신민당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을 포기한 듯했다. 긴급조치 9호로 해서 일체의 改憲운동이 불법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金泳三씨는 회고록에서 속았다고 고백했다. 金泳三 총재가 朴대통령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說에 대해서 당시 정치자금을 관리하던 金正濂 비서실장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朴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 선포에 이은 金泳三 총재와의 회담을 통해서 야당을 온순하게 만들어 놓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 해에는 朴대통령과 인간적으로나 이념적으로 가까웠던 李哲承씨가 신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朴정권은 야당과는 일종의 밀월기에 들어갔다. 1975년 5월부터 金총재가 再등장하는 1979년 5월까지의 4년간 朴대통령은 국내의 민주화운동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기간 朴대통령이 고심한 것은 韓美관계의 악화였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 미국에서 駐韓미군 철수론의 대두, 카터의 철군 추진에 이어 朴東宣의 對美로비 내막이 미국 언론에 의하여 폭로되어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으로 달아난 金炯旭 前 정보부장이 美 의회 증언대에 서서 대통령과 관계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폭로하고, 워싱턴 政街에서 反朴여론이 드세졌다. 1979년에 들어가면 韓美관계의 파탄이 국내정치로 돌아 들어와서 결국 10·26 사건으로 연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침묵의 4년간은 1979년의 대폭발을 향해 발화온도가 상승해 간 기간이기도 했다. 무력한 야당, 권력기생적 여당 이 4년간 한국은 中東 건설 시장에 진출하고 중화학공업 건설과 새마을 운동에 성공하여 1960년대의 輕量級 국가에서 中量級 국가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이 기간에 朴대통령이 정력적으로 밀고 나간 자주국방력 강화 정책도 결실을 보기 시작하여 연간 국방비 지출 면에서 한국은 1976년부터 북한을 앞서기 시작한다. 1977년부터는 의료보험이 직장에서부터 도입되었다. 朴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면서 노렸던, 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에 의한 富國强兵(부국강병)이란 목표는 달성했으나 권력구조의 심층부에서는 자기파괴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야당이 정권도전 세력으로서는 무력화되고, 여당은 擧手機 역할로 전락했다. 정치로부터 오는 낭비요인은 거의 사라졌으나, 朴대통령의 통치이념인 한국식 민주주의를 신념화하여 대중 속에 뿌리 내릴 수 있는 이념적 보수정당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지식인 층과 국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통령과 정보부의 명령만 수행하는 권력기생 조직이 되어 버렸다. 朴대통령은 야당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결국은 여당도 약화시켰다. 유신의 심장이던 朴대통령이 죽자 自生力이 결여되었던 권력기생적 체질의 공화당과 유정회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朴대통령이 全斗煥, 盧泰愚로 대표되는 정규육사-하나회 출신 將校들을 총애하여 이들을 軍內의 엘리트 집단으로 키운 것이, 결국은 10·26 이후 권력공백기 때 이들이 진공상태를 메우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朴대통령은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예비한 셈이었다. 특히 그가 1979년 초에 정규육사 출신의 대표인 全斗煥 소장을, 비상시 국군의 신경망을 장악할 수 있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결정적 선택이었다. 1975년 3월4일 헨리 키신저 美 국무장관은 망해 가는 월남 대책에 바쁜 가운데서도 서울·캐나다·프랑스·일본·오스트리아 주재 미국대사 앞으로 電文을 보내 한국 정부의 비밀 핵무기 개발계획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지시한다. 이 훈령은 구체적으로 이런 정책들을 제시했다. 〈1. 미국은 국제적 공급 국가들과의 공조 속에서, 한국이 민감한 기술과 장비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한국에 대한 원자로 판매에 완전한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물론, 한국이 자체적 핵무기 개발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민감한 기술과 장비들의 판매를 제한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이 (캐나다에서) 캔두(CANDU)형 원자로를 획득하는 것이 再처리 기술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 2. 한국으로 하여금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토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캐나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3. 한국의 핵시설에 대한 우리의 첩보 및 감시능력을 높이고, 관련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적 상태에 대한 정보를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핵에너지 관련 기관들에 대한 정기적 방문조사를 더 자주 할 계획이며 훈련된 기술자들로 하여금 사찰 횟수를 늘리도록 할 생각이다〉 駐韓 美대사관도 1975년 3월12일 국무부에 보낸 다음의 電文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하는 데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는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10년이 훨씬 안 될 것으로 판단한다. 우리가 확보한 여러 정보들에 따르면, 한국의 지도부는 핵무기 개발에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있으며 1980년대 초에 그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저돌적 추진력과 그들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높은 기술 수준, 그리고 외국의 전문 인력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상부로부터의 강한 독려 등을 감안할 때,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제3국으로부터 핵무기 관련 장비와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한국의 구매력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핵무기 개발에 따른 정치적·경제적 부담이 한국의 움직임을 저지할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우리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한국이 제3국으로부터 (관련 물질과 기계) 구입을 선택할 경우, 한국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은 크게 약화될 것이다. 이 분야에 관한 한 한국은 아주 위험한 목적을 가진, 끈질기고 거친 고객이다. 우리가 早期에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만이 최상의 성공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던 韓美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스나이더 駐韓 美대사였다. 그는 朴대통령과 직접 면담하여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는 위치에 있었고, 본부에 대해서 한국의 의도를 적극 개진하고 자신의 대안을 설명했음이 최근 공개된 미국의 외교문서에서 나타난다. 다음 電文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사일과 핵무기 등을 개발해야겠다는 朴대통령의 의지가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스나이더 대사의 지적이다. 바로 하루 전 사이공으로 월맹군이 진주하여 베트남戰이 공산진영의 승리로 끝나 서울이 위기감에 휩싸여 있을 때인 1975년 5월1일, 스나이더 駐韓 美대사는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우리는 비 오는 날에 대비해야』 | 核개발저지 工作의 현장 책임자였던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 |
〈요지: 어제 스나이더와의 면담에서 朴대통령은 한국형 미사일을 개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朴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미사일 기술에 대한) 한국과 록히드社의 계약을 승인해 주지 않은 문제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나는 미국 정부가 그동안 한국의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여러 차례의 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이는 미국 정부가 일본이나 西유럽 국가들 같은 선진국에도 개방을 통제하는 첨단 기술의 수출 문제이며, 미국은 이 분야에서 강력한 독점적 경쟁력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의 요청에 대해서는 우리가 韓美 양국 간 상호 협력의 기반이 되는 한국의 장기적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며, 분명히 알려 준다면 개별 항목들에 대해서는 수출허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향후 수년간의 계획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고 하면서, 국방과학연구소 장을 나와 접촉토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향후 3~5년 이내에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지시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미국이 도와줄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한국으로서는 제3국으로부터라도 지원을 받아야 할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朴대통령은 그로 인한 한국의 재정적 부담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비 오는 날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駐韓미군의 철수 계획을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통보할 때까지 미사일 개발을 늦춘다면 그것은 너무 늦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有備無患」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朴대통령에게 미사일 개발비가 결코 낮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바람직한 방법은 미국과 협력하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朴대통령은 결론적으로 한국 정부는 군수품 조달에서 自立을 목표로 하기로 결심했다며, 특히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사일 개발을 중시하고 있으니 미국이 이 분야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미군 철수에 관한 朴대통령의 우려를 다시 한 번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의 미사일 전략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그처럼 중차대한 전략적 결정은 상호 합의가 따라야 하니 향후 안보협의회에서 다루자고 제안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의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내가 워싱턴에 신속히 보고할 수 있도록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상세히 브리핑하도록 지시하겠다고 말했다. 의견: 지금까지 수차에 걸친 면담에서 朴대통령은 미군 철수에 대비한 한국의 자주국방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혀 왔다. 이번 면담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미군 철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그래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는 동안 자립적인 군수산업을 신속히 건설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朴대통령의 국방 정책에 대해 충분하고도 조속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현재 美 의원들의 태도를 감안할 때, 미군 철수에 대한 朴대통령의 우려도 무시할 수 없으며,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그의 계획도 무시할 수 없다〉 駐韓미군 철수를 내다본 결단 이 電文에서 보듯이, 朴대통령은 이날 3~5년 이내에 地對地 미사일을 개발하겠다고 스나이더 대사에게 밝혔는데, 그 3년4개월 뒤인 1978년 9월, 사정거리 180km의 국산 地對地 미사일인 「백곰」의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朴대통령이 목표달성의 시기를 밝힌 계획들은 거의 이뤄진다. 그는 말을 아꼈지만 公言한 것은 지켰다. 駐韓 미국대사 스나이더에게 朴대통령이 직설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예상하고 있다고 밝힌 점은 인상적이다. 朴대통령은 월남이 망해 가는 과정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미군이 파리 휴전협정에 따라 월남에서 철수한 뒤엔 對월남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고 월맹의 명백한 협정위반을 방치한 사실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을 휩쓸고 있는 反戰여론에 휘둘리는 美 의회가 미국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한 대통령의 對韓 방위공약도 믿을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닉슨의 對월남 방어공약을 무력화시킨 것이 美 의회의 「인도지나 반도 무력사용不可 결의」가 아니었던가. 駐韓미군이 수년 내 철수할 것이라는 朴대통령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 다음 해(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 후보는 駐韓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하여 철군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朴대통령이 월남 패망과 駐韓미군 철수의 예감 속에서 추진한 핵무기 개발은 그러나 再처리 시설 도입 교섭 단계에서부터 미국의 정보망에 걸려 외교적 압력을 받게 된다. 朴대통령도 굳이 핵무기 개발의지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거의 半공개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물론 당시 한국은 核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아 국제법적으로는 핵무기 개발을 막을 명분이 미국엔 없었다. 그렇더라도 1974년에 인도가 핵실험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란 미국이 작심하고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로 결심한 것을 모를 리 없는 朴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아주 비싼 값에 포기하는 代案도 생각한다. 프랑스製 사용後 핵연료 再처리 시설 도입계획을 둘러싼 韓美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朴대통령은 1975년 6월7일 오전 10시30분부터 두 시간 동안 미국의 시사평론가 로버트 D 노박과 인터뷰했다. 朴대통령은 『우리는 핵무기 개발능력을 갖고 있으나 개발계획에는 착수하지 않았다』면서도 『만약 미국의 핵우산이 철수된다면 자구책으로서 핵무기 개발에 들어갈 것이다』고 말했다. 朴대통령의 이 발언이 미국 언론에서 보도된 직후 작성된 美 국무부의 정책건의서는 최근 공개되었다. 이 문서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는 물론 프랑스(재처리 시설 도입 대상국)와 캐나다(NRX연구로 도입관련)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古里 2호기 차관을 인질로 잡다 1975년 7월2일,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대통령 안보보좌관에게 보낸 로버트 잉거솔 국무장관 代行의 정책 건의서 요지. 〈한국의 핵무기 획득은 극도로 위험하며 미국의 주요한 이해관계에 대해 직접적 타격을 줄 것이다. 이같은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이 再처리 시설 및 플루토늄을 보유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두 번째 원자로인 고리 2호기를 도입하기 위해 미국 수출입은행에 1억3200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고, 추가적으로 1억1700만 달러의 신용을 요구했다. 수출입은행의 케이시 총재는, 한국內 사용後 핵연료들의 문제에 우리가 안심해도 좋다고 통보할 때까지 이 차관에 대한 청문회를 연기하기로 의회와 합의했다. 우리가 의회에 대해, 한국이 再처리 시설 계획을 포기했다고 확인해 주지 않는 한 이 차관을 집행할 수 없게 되었다. 캐나다와 프랑스의 태도: 지난 3월의 정책 지침에 따라 우리는 캐나다 정부와 접촉했다. 캐나다는 향후 한국에 대한 원자력 지원 문제에서 우리와 긴밀히 협의키로 했다. 우리는 또 최근 런던에서 열린 (핵 관련 기술 및 장비) 공급자 회의에 앞서 프랑스와 접촉했다. 우리는 프랑스에 대해서,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알려 주었다. 프랑스는 우리의 관심에 이해를 표시했고, 再처리 시설 판매는 큰 상업적 이해가 걸린 것은 아니며, 만약 프랑스 회사가 계약 종결에 따른 비용을 보상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계약 포기 요구에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암시했다. 한국에 대한 접근: 우리는 현재 진행 중인 한국 측 원자력 분야 인사들과의 협의에서 미국이 제공한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後 핵연료의 再처리 계획에 대해서는 미국이 거부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그들의 확인을 다시 요청했으며, 그들의 확인을 들은 후에라야 (짓고 있는) 고리 1호 원자로에 대한 美 핵통제위원회의 수출 허가를 요청할 것이다〉 禪문답 같았던 朴·슐레진저 회담
| 朴대통령에게 核개발 포기를 우회적으로 설득한 제임스 슐레진저 美 국방장관. |
위의 문서는 미국이 국가적인 의지를 실어 한국에 대해서 핵포기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우선 고리 2호 원자로 건설계획과 관련하여 한국 측이 신청한 약 2억5000만 달러의 미국 차관 및 신용대출을 약점으로 잡아 묶어 두기로 한 것이다. 미국은 이와 함께 프랑스와 캐나다에 압력을 넣어 핵무기 개발에 이용될 것이 뻔한 再처리 시설과 연구용 원자로 판매를 중지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미국 측은 또 韓美 원자로 협정에 의거하여, 한국에서 미국 회사가 지은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後 핵연료를 再처리할 경우의 모든 계획에 대해서는 미국이 최종결정권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런 법적 권한에 대해서 한국 측의 확인을 받고 나서야 당시 건설 중이던 고리 원자력 1호기에 대한 미국 측의 사용승인이 떨어질 것이라고 협박했다. 미국은 2중 3중으로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는 朴대통령에게 직접 압력을 넣으면 오기가 센 대통령의 반발을 부를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래로부터 계통을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원자력 기술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과기처 장관·외무 장관을 만나고, 金正濂 실장에게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청와대의 관례에 따라 스나이더 대사를 주로 상대한 사람은 金正濂 실장이었다. 金실장은 정기적으로 스나이더 대사의 관저에 가서 점심을 들면서 韓美 간의 공통관심사에 대해서 의견을 나눴다. 스나이더 대사는 核개발 포기를 위한 설득의 창구로 金正濂 실장을 활용했다. 金실장은 『스나이더 대사로부터 핵폭탄이란 말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다만 프랑스로부터 사용後 핵연료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는 것을 취소해 달라는 요구만 했다고 한다. 再처리 시설이 없으면 아무리 원자력 발전소가 많아도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뽑아낼 수 없다. 그래서 스나이더 대사는 「핵개발」이란 직설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再처리 시설 포기만 요구했던 것이다. 스나이더 대사의 핵개발 포기 설득 작전을 지원하러 나선 것은 포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1975년 8월26일, 27일 양일 간 서울에서 열린 韓美 연례안보협의회에 참석했다. 美 국방장관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1971년 이후 처음이었다. 슐레진저 장관은 8월27일 徐鐘喆 국방장관과 함께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중요한 언급을 했다. 『駐韓미군의 地上軍이 막강하므로 핵무기를 쓸 기회가 없겠지만 핵무기를 최후 수단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朴대통령이 걱정하는 미국의 핵우산이 건재함을 밝히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언명이었다. 8월2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42분까지 거의 네 시간 동안 슐레진저 장관은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은 처음 1시간 20분 동안은 소접견실에서 슐레진저 장관, 스나이더 대사, 브라운 美 합참의장, 스틸웰 駐韓유엔군사령관, 위컴 군사보좌관, 徐鐘喆 국방부 장관, 盧載鉉 합참의장, 金正濂 비서실장, 崔侊洙 의전수석과 환담했다. 이들은 점심을 함께 했다. 그 직후 슐레진저 장관과 스나이더 대사는 朴대통령과 40분간 만나 심각한 이야기를 나눴다. 슐레진저는 朴대통령과 일종의 禪문답을 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비밀 핵개발계획을 인정하지 않았고, 슐레진저는 한국의 핵개발계획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슐레진저는 그러나 『朴대통령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듯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슐레진저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한 것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강행할 경우 韓美관계가 와해될 수 있다」는 암시였다. 朴대통령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해 가을과 겨울에 걸쳐서 워싱턴에서는 필립 하비브 東아시아·태평양담당 국무차관보가 咸秉春 駐美 한국대사를 통해서 압력을 넣었다. 하비브는 스나이더의 전임 한국대사였다. 하비브는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취소해 줄 것을 요구했다. 咸대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국가적 신의에 관한 문제」라면서 미국 측의 요구를 거절했다. 다음은 1975년 10월31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駐韓 美대사관의 電文. 〈한국 정부는 프랑스로부터 실험용 再처리 시설의 구입을 취소하라는 우리의 요구를 두 번째로 거절했고, 현재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곤경에 처해 있다. 한국의 이 같은 거절은 朴대통령의 주관下에서 심사숙고 끝에 결정된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로 하여금 계약이 최종적으로 체결되기 전에 판매 계획을 중단토록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1) 더 이상 추가적인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정부로 하여금 核(원자력 발전 등) 분야에서는 미국의 지원 없이는 일 추진이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방안. (2) 재처리 시설의 판매 문제는 묵인하고, 국제적 사찰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쌍무적 사찰을 받아들이겠다는 한국의 방안을 허용하는 방안. (3) 再처리 시설 구입 계약의 일시 중단이라는 중재안을 가지고 다시 한 번 朴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방안. (4) 非타협적 태도로 계속 朴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방안. (1)案과 (2)案의 경우, 계산된 부담을 감수하면서 상황을 방치하면, 그 결과 미국에서는 한국에 적대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美 의회는 군사원조의 삭감은 물론 고리 2호기 건설을 위한 차관도 부결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압력을 받게 되면 한국은 결국 굴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역시 그런 여론에 시달릴 것이며, 그것은 한국에서 우리의 이해관계에 적대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再처리 시설 확보가 기정사실화됨으로써 그것을 다시 뒤집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워질 것이다. (2)案은 한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용도 변경을 막기 위해 査察을 굳혀 나가는 방안이다. 그러나 (2)案의 약점은 한국이 NPT 또는 IAEA의 사찰이나 제3국의 사찰을 거부하려 들 경우 확실한 대응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韓美 양국 사이에 심리적으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장차 이곳에서 우리의 이해관계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3)案과 (4)案, 즉 朴대통령을 직접 접촉하는 방안만이 성공의 전망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카드가 있으며, 朴대통령도 결국은 현실주의자다. 따라서 우선은 朴대통령을 접촉하는 경우가 가장 바람직하다. 문제는 그에게 도전장을 던질 것이냐, 아니면 중재안을 갖고 그를 만날 것이냐이다〉 포기의 代價는 무엇인가 고리 2호기 차관 중단, 군사원조 지원 중단 등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던 한국 정부는 1975년 12월부터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소개되는 駐韓 美대사관의 電文들은 한국 정부가 물러서는 명분으로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관련 협력을 받는다는 代價를 선택, 미국의 요구에 응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1975년 12월10일, 국무부로 보내는 스나이더 駐韓 美대사의 電文. 〈워싱턴에 있는 咸秉春 駐韓 한국대사를 가급적 빨리 우리 측의 고위급 인사가 만나 우리의 관심 사항을 전달해 주기 바란다. 그 만남의 내용이 朴대통령에게 충분히 전달된 후 나는 다음주에 朴대통령을 만날 것이다. 나는 한국의 金鍾泌 국무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만약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강행할 경우 韓美 관계에 미칠 엄청난 악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따라서 咸대사와의 면담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단지 원자력 분야에서의 협력만이 아니라, 美 의회의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에 대해서도 부정적 행동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는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방향과 목표도 함께 제시함으로써 韓美 양국의 관계를 유지, 강화시키기 위해 협력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같은 날, 국무부로 보내는 駐韓 美대사의 또 하나의 電文. 〈12월10일 南悳祐 부총리는, 12월9일 이 문제와 관련하여 총리 주재의 고위 대책회의가 있었으나, 자신은 국회 출석 관계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제안에 대한 반응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한국이 우리의 요청을 거부할 경우 초래될 부정적 영향들에 대해 언급했고, 그는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총리와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金鍾泌씨는 최근 『朴대통령은 이때 핵개발을 강행하면 韓美관계가 결딴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처럼 핵무기를 당장 만들지 않되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연구, 비축해두는 쪽으로 방향 선회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1975년 12월16일, 국무부로 보내는 駐韓 美대사관의 電文. 〈국무총리의 지시로 과기처 장관 대신 과기처 차관 등이 스나이더 대사를 면담했다. 이들은 만약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再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할 경우 미국이 원자력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협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는가를 문의했다. 그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생략) 스나이더 대사가 『한국의 이런 질문에 대한 미국의 구체적 답변이 있을 때까지 한국은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 문제에 대해 결정을 미룰 것이냐』고 묻자, 과기처 차관은 『한국은 공식적으로 再처리 시설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과기처 차관은, 미국의 기술적 지원이 아주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기술적 지원을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며, 한국 정부가 앞으로는 그 기술 제공자를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원 내용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좀더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해 나는 金正濂 대통령 비서실장을 접촉했는데, 현안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은 우리 측 답변이 도착할 때까지 연기되리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는 또한 우리를 접촉한 사람들의 보고를 받았다며 朴대통령도 이 사안의 정치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답변이 도착하면 朴대통령의 주관下에 문제를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내가 朴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것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책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작은 희망의 빛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나는 물론 이 문제를 놓고 金東祚 외무 장관과도 접촉해 왔다. 그는 이 문제의 정치적 중요성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 『미국이 한다면 된다』 프랑스로부터의 再처리 시설 도입 계획이 취소되는 쪽으로 대세가 굳혀짐에 따라 駐韓 美대사관은 비교적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976년 1월 우리 정부는 프랑스의 SGN社와 맺었던 再처리 시설 건설 계약의 파기를 프랑스에 요청했으며 프랑스도 이를 받아들여 핵개발 계획은 외형상 좌절하게 된다. 1976년 1월5일, 국무부로 보낸 駐韓 美대사의 電文. 〈요지: 한국의 프랑스 再처리 시설 도입을 취소시킴으로써 核 확산을 막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목표는 朴대통령과의 정면 대립을 불사하거나 또는 그의 체면과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달성될 수 있다. (중간 부분이 대거 삭제됨) 따라서 나는 본부의 훈령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 줄 것을 제안한다. (A) 미국 정부는 한국이 프랑스와 맺은 계약에서 再처리 시설 도입을 再검토키로 한 결정을 높이 평가하며 환영한다. (B) 우리는 한국이 미국의 깊은 우려감을 인식하고, 이 문제가 향후 韓美관계 전반에 갖고 있는 중대한 의미를 인식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한다. (C) 미국의 희망은 바로 이 시점에서 再처리 시설 계약의 완전한 취소이다. (D) 이 계약이 완전히 취소되지 않을 경우 美 의회와 미국인들의 의혹은 더욱 더 증폭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고리 2호기의 차관 문제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E)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우리의 합의 도출 능력을 신뢰한다면 미국은 상호 협력의 범위에 대해 조속히 합의한다는 목표 아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의 협력에 관한 협의를 진행시킬 태세가 되어 있다. (F) 따라서 우리는 한국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韓美 양국의 상호 협력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미국의 대표단을 파견할 태세가 되어 있다. 또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서 한국·프랑스·캐나다 사이의 협력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출신인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이란 책에서 『이 에피소드는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남한 정부가 아무리 완강한 의지력으로 추진하는 일이라도 능히 저지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고 평했다. 사태가 일단락된 후 스나이더 대사는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안보보좌관에게 보낸 電文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여 독자적인 생존을 추구하고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朴대통령의 열망과 의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朴대통령이 이런 모험을 하게 된 데는 미국 측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1975년 6월 미국 정부에 대해서 韓美관계를 전면적으로 再검토하여 새로운 관계 정립을 할 필요가 있다는 12페이지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미국의 불확실한 태도 때문에 朴대통령은 언젠가 닥쳐올 미군철수에 대비하고 있고, 그 대책으로서 남한內에서 반대자 탄압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었다. 柳炳賢 당시 합참본부장은 『朴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 깔끔하게 했다. 관련 서류나 시설을 숨겨놓고 비밀개발을 계속하라는 식의 지저분한 지시가 아닌 깨끗한 단념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그 뒤 朴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의 기술 사이클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핵무기 개발에도 쓰일 수 있는 관련기술을 개발하고 미사일 발사에도 성공하지만, 핵폭탄을 직접 제조한다든지 플루토늄을 밀수입하는 식의 시도는 해본 적이 없다. 미국 측도 플루토늄 再처리 시설이 없다면 핵무기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핵개발 문제는 이로써 종결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지휘봉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M. 스티어즈가 쓴 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자 전기 「메이드 인 코리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기업인들에게 朴正熙 정권은 경제개발에 대해서 실현성이 있는 계획을 명확히 제시했다. 규칙과 원칙은 투명했고, 기업은 합리성과 자신감을 갖고 투자할 수 있었다. 朴정권의 권위주의적인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체로 부정부패하지 않았다. 朴대통령이 자신이 아니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기업인은 그를 신뢰했다. 그들은 동시에 朴대통령을 겁냈다. 기업에 대한 朴대통령의 요구조건은 오직 하나였다. 무조건 納期를 맞추라는 것이었다. 이에 실패하면 朴대통령의 눈 밖에 나고 정부 차관이나 공사를 얻을 수 없게 된다> 스티어즈는 京釜고속도로를 닦을 때 朴 대통령을 보좌했던 한 기술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朴대통령은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다. 나는 그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지휘봉은 타고 다니던 헬리콥터였다. 그는 헬리콥터를 타고 올랐다 내렸다를 되풀이했다. 어느 날은 지질학자들을 태우고 현장에 와서 왜 터널공사를 하는 데 산사태가 났는가를 묻고, 다른 날엔 유엔의 水理학자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왜 우리 기술진이 수량자료를 잘못 계산했는지 따졌다. 화요일에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는 목요일에 또 나타났다> 1973년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 건설은 그 규모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호주국립대학의 김형아 교수는 朴正熙의 근대화 전략을 연구한 책에서 朴대통령은 정보수사기관을 국가운영의 지휘봉처럼 이용했다고 썼다. 朴대통령이 유신체제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지휘봉 또는 채찍으로 사용한 기관은 비서실 이외에 중앙정보부·감사원·국군보안사·검찰·경찰·경호실이었다. 대통령은 이들 기관들을 직접 지휘했고 이 기관들끼리 서로 감시, 견제하도록 독려했다. 경제부통령 金正濂 비서실장
| 朴대통령과 金正濂 비서실장. |
朴대통령을 가장 오래 모신 金正濂 비서실장은 『나·중앙정보부장·경호실장은 비서실의 사전허가 없이 언제든지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었으나, 나의 재임 중에는 경호실장의 보고는 극히 드물었다. 법무 장관과 검찰총장의 중요한 수사보고 및 보안사령관의 긴급보고도 당일 청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정보부장과 경호실장은 비서실장이 보고한 뒤에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정보부장·보안사령관·검찰총장이 보고할 때는 비서실에서 배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신 시절에 여당은 사실상 정보부에 종속되어 있었다. 朴대통령은 정당·군대·치안·정보기관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면서 경제는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거의 전담시켰다. 1969~1978년까지 9년3개월간 金실장은 사실상 경제담당 부통령이었다. 그는 청와대 경제 비서관들과 경제장관(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포함) 및 금융기관과 경제연구소들을 총괄적으로 지휘했다. 全斗煥 정부 시절 金在益 경제수석 비서관이 全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경제정책 수립 집행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金正濂 실장의 역할은 그보다 훨씬 컸고 오래였으며, 범위가 넓었다. 다만, 金실장은 자신을 「도승지」라고 부르면서 철저하게 드러내지 않고 일했고, 朴대통령이 죽은 이후에도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의 막강했던 역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金실장은 특히 정부고위직 人事에 대해서 대통령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改閣 때 朴대통령은 국방·법무·내무장관, 무임소 장관을 제외한 全부처의 장관에 대해서는 金실장에게 후보자를 복수로 건의할 것을 지시하곤 했다. 金실장이 명단을 올리면 대통령은 이를 기초로 하여 총리와 상의에 들어갔다. 총리의 건의로 명단에 없는 사람이 임명되기도 했지만 거의 명단에 오른 사람들 중에서 임명되었다고 한다. 공화당과 유정회 의장에게는 사전 통보를 하는 정도였다. 朴대통령은 차관 인선은 대체로 장관에게 맡겼으나 국세청장·관세청장·철도청장·항만청장을 직접 지명했다. 軍 인사의 경우엔 장성급 이상에 한하여 국방장관이 각군 참모총장을 데리고 와서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재가를 받았다. 이 자리엔 비서실장도 배석하지 않았다. 법무부와 검찰 고위간부에 대한 인사도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과 함께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았다. 金正濂 실장은 한국은행 조사부 출신이었다. 금융계를 잘 아는 그는 자연히 은행권 인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재무장관이 금융기관의 인사에 대해서 대통령에게 품신할 때는 꼭 한국은행 총재의 의견을 묻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큰 금융사고나 부실기업이 발생했을 때 대통령은 최종 수습책으로서 후임자를 결정하는데 이때 金실장의 의견을 반드시 물었다. 金실장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금융인은 한국은행에서 같이 근무한 선배나 동료들뿐이었기 때문에 그들 중에서 천거했고 그대로 결정이 났다』고 말했다. 外柔內剛(외유내강)한 金正濂 비서실장은 朴대통령에게 지시받을 때는 항상 不動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아주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그는 公的인 일에 대해서는 차가울 정도로 냉정하고 엄격했다. 金실장은 점심은 항상 청와대 식당에서 들었다. 朴대통령의 취향 때문에 청와대의 점심은 국수일 경우가 많았다. 그는 청와대 참모들을 군대식으로 지휘했다. 金실장은 유신의 통치철학을 청와대 비서실의 운영에서부터 실천했다. 유신의 모토였던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대통령 이상으로 실천한 것이 金실장이었다. 그는 금융인 출신 경제관료로 유명했지만 日帝시대엔 일본군 장교 생활도 짧게 했다. 강경상업을 졸업한 그는 규슈(九州)의 오이다 高商에 들어갔다. 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구마모토 예비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장교교육을 받았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회고록 「한국경제정책30年史」 (중앙일보)에서 이렇게 썼다. <이왕 징집된 이상 인간답게, 남아답게, 씩씩하게 그리고 한국 출신 아무개는 일본인보다 더 훌륭했다는 평을 듣고 죽어 가겠다고 생각했다. 이왕 죽을 바에는 조국의 독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값있게 죽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훈련·작업·내무반 생활 등 모든 생활 및 행동 면에서 「조센징이지만 돼먹었다」는 소리를 듣고자 노력했다. 朝夕의 완전군장 軍歌구보 때는 나도 힘이 드나 낙오하려는 동료의 소총을 대신 메고 뛰었고, 숙제와 시험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늘 기꺼이 사역에 자원했으며, 동료의 몫까지 거들었다. 육체적 고통은 격심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홀가분한 나날을 보냈다> 원자폭탄 맞은 사람 1970년대 유신체제의 사령탑에 앉아 있었던 朴대통령과 金실장은 일제 때 장교생활을 하면서 국가주의적인 정신력을 단련했던 사람이고, 이런 자세가 체제의 운영 면에 반영되었다.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한국 지도층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일제 시대의 교육과 체험을 통해서 독립정신·鬪志·국가관·公人의식의 소양을 갖춘 이들이 많았다. 지금 일부 左派세력들이 이런 사람들을 親日派로 매도하는 것은 위선적인 형식논리이다. 식민지 시대에 宗主國이 제공하는 선진문물을 배워서 기필코 독립을 쟁취하고 되찾은 조국을 위해서 배운 지식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제3세계의 독립과 건국의 지도자가 된 것은 戰後 세계적인 추세였다. 인도의 네루와 간디, 아프리카 대부분의 독립·혁명 지도자들, 그리고 싱가포르의 李光耀(이광요)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같은 이들이다. 유신체제의 참모장 역할을 했던 「군인적 민간인」 金正濂은 1945년 8월6일 아침 히로시마에 있었다. 그의 생생한 증언은 역사적 가치가 있다. <히로시마 軍管區 교육대에서 견습사관으로서 再교육을 받고 있던 우리는 그날 아침 교육대 교정에 모이고 있었다. 열중의 누군가가 『저기 B29가 간다』고 소리치기에 상공을 쳐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하얀 飛行雲을 끌면서 거의 30도 각도로 상승하는 B29 한 대가 보였다. 아침의 강한 햇살을 받아 그 B29는 반짝반짝 빛났다. 그 전날 하루 종일 파상내습으로 공습경보가 계속 발령 중에 있었으므로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으며, 폭음도 들리지 않았다. 정찰비행이겠지 하는 순간 사진 찍을 때 터지는 마그네슘의 광선보다 더 강한 황백 광선이 번쩍 하더니 갑자기 천지가 암흑으로 변했다(그때가 오전 8시15분이었다). 새카만 밤이 된 것이다. 동시에 불덩어리가 등에 붙은 듯하더니 몸이 공중에 떴다가 땅에 떨어졌다. 이 순간 나는 소이탄의 집중공격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암흑 속에서 『소이탄이다! 대피, 대피!』 소리치면서 지면을 구르며 옷에 붙은 불을 끄고 방공호로 뛰어갔다. 그러나 폭탄은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지평선에서부터 암흑이 걷히기 시작했다. 아침이 다시 오는 것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교육대 바로 뒤의 거대한 히로시마城이 돌과 흙과 목재의 더미로 변해 있었다. 교육대 교사는 廢목재를 쌓아 놓은 모양으로 변해 있었고, 해안 방면을 보니 큰 연돌 몇 개와 철근 콘크리트組 고층건물의 골조가 몇 개 보일 뿐 히로시마 시내의 건물은 모두 파괴되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등에 화상을 입었다. 눈·코·입만 남겨 놓고 얼굴 후두부와 목에 화상을 입어 피부가 떨어져 나갔으며, 좌우의 손에도 화상을 입었다. 새끼 손가락 부분은 살점이 날아가 뼈만 앙상하게 보였다. 그래도 나는 中정도의 상처에 속했다. (중략) 한참 걸으니 강둑에 다다랐다. 人山人海인데 화상과 부상을 당한 시민과 군인들이었다. 이때 기차가 철교를 지나가는 것과 같은 굉음이 들리기에 사방을 살펴보았더니 불덩어리의 회오리바람이 선풍을 일으키면서 돌진해 오는 것이었다. 나는 둑 아래로 뛰어내렸다. 불덩어리의 회오리바람은 방향을 바꾸었다> 日帝시대 때 단련되었던 정신력 金소위와 원자폭탄을 맞은 교육대는 폭탄이 터진 爆心에서 2km 이내에 있었다. 金소위는 오카야마 연대에서 50명의 견습사관을 인솔하여 교육대에 왔기 때문에 동료들이 피폭당한 뒤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히데히라 마코토라는 동료 견습사관과 함께 아수라장이 된 히로시마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절반 정도를 찾아내 오카야마로 보냈다. 金소위는 인솔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4일간 방사능이 남아 있는 시내를 돌아다닌 것이다. 그는 오카야마 원대에 복귀한 뒤에야 병원에 입원했다. 이 병원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원자병을 앓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지고 열이 40℃까지 올랐다. 옆 병상에서는 환자들이 하나둘씩 죽어 가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한 후 그래도 질서가 유지되던 軍 병원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하나둘씩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때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함께 인솔자의 의무를 다했던 히데히라 사관이 아버지와 함께 金소위를 찾아와 자신의 고향에 함께 가자고 했다. 오카야마 山地에 있는 히데히라의 본가는 양계농장이었다. 이 집에서 金正濂씨는 친구와 함께 치료와 간호를 받았다. 히데히라의 아버지는 의사를 데리고 와서 아들과 金소위를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 주었다. 원자탄 피폭자에 대한 치료법이 알려지지도 않은 상황인 데도 의사는 스스로 개발한 혈청주사 치료를 해주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金소위를 살렸다고 한다. 10월에 金소위의 형이 찾아와 그를 데리고 귀국했다. 히데히라는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1954년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金소위는 히로시마에 들른 길에 거기에 있던 미국의 원자폭탄 희생자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보았다고 한다. 의사들은 金소위가 爆心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존한 사람이란 측면에서 매우 흥미를 가지고 진료했다. 진료 결과 金소위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金실장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일본장교와 함께 뒷수습을 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일본인의 집에서 당시로서는 최선의 치료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이 朴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쳐서 1970년대 격동기에 중화학공업과 자주국방 건설사업을 밀고 나갔다는 점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1970년대 한국의 지도층은 일제 식민지 시대와 6·25 전쟁기를 온몸으로 겪었던 40~50代였다. 이들로부터 단련된 당시의 20~30代도 대단한 투지와 생존력을 갖고 있었다. 식민지와 전쟁기를 통해서 국가의 소중함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북한의 남침위협을 저지하는 「둑」을 빨리 쌓지 않으면 먹힌다는 강박관념도 갖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월남 패망 이후엔 3~5년 이내에 駐韓미군이 철수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전에 자주국방력을 갖추어야 한다면서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고 방위산업을 건설하는 등 시간에 쫓기면서 일했다. 이런 분위기가 결과적으로는 유신시대를 한국 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전환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6·25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심리특성에 대하여 미국의 저명한 동양학자 루시안 파이는 「아시아의 권력과 정치」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죽은 친척과 친지들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죄의식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위험에 처해서도 「나만은 무사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변하고 어떤 모험도 감수하려는 공격적 태도를 갖게 한다. 한국의 공무원들과 민간인들 모두는 항상 자신들은 예외적으로 運(운)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운명지워진 인간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전쟁 체험은 그들에게 어려운 과업은 어떻게 조직적으로 대처하면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의무·희생·책임감에 기초한 군사문화의 효율성에 길들여진 가운데 한국인들은 살아남은 인간답게 무엇이든지 과감하게 생각하고 거창한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하도록 고무되었다> 권력의 관리자들 1975년 5월 일체의 反정부 행위를 금지시킨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이후 야당 언론과 학생·종교인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는 1979년까지의 4년간이 朴대통령 집권기간 중 가장 안정된 시절이었다. 이 기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의 경제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뤄졌다. 朴대통령을 즐겁게 만든 것은 새마을 운동이었고 괴롭힌 것은 韓美관계의 악화였다. 이 4년간은 정치의 침묵 시대이자 경제 개발과 관련된 행정의 전성 시대였다. 이 시기 朴대통령은 총리·비서실장·정보부장 세 사람을 중심으로 國政을 이끌었다. 총리에게는 국내의 시국사건과 행정의 조정, 비서실장에겐 경제조정, 정보부장에겐 정치조정을 맡기고, 자신은 국방외교를 중심으로 한 安保를 직접 챙겼다. 朴대통령은 공화당과 유정회를 정보부의 아래 기관 정도로 인식했다. 1971년에 임명되어 1975년 12월에 사임할 때까지의 4년 반 동안 金鍾泌 국무총리의 역할이 매우 컸다. 金총리는 1973년 12월 李厚洛 정보부장이 물러나고 申稙秀씨가 후임으로 임명된 이후에는 제2인자에 가해지는 질시와 견제로부터 해방되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反정부 시위 등 시국사건에 대한 대책회의를 정기적으로 주재한 것도 金총리였다. 다른 총리였다면 정보부장이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을 터인데 申稙秀 부장은 오래 전부터 金총리와 가까웠다. 이 회의에는 대통령 비서실장(나중엔 정무수석)과 정보부장도 참석하였고, 金총리가 결론을 내렸다. 金正濂씨는 『金총리는 민주적으로 의견을 개진케 하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자신만만한 일처리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金正濂은 1969년 비서실장으로 취임할 때부터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으로부터 거의 全權을 위임받았다. 형식상으로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가 경제팀의 팀장이었으나, 부총리와 경제장관들을 이끌고 조정해 간 것은 金正濂씨였다. 그는 권한을 강제적으로 행사하기보다는 조정하고 유도하는 방향으로 사용했다. 『저는 장관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일하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썼습니다. 대통령에게는 장관들이 잘하는 것을 꼭 보고하여 그 장관들을 칭찬하도록 했습니다. 장관들도 내가 그들을 돕는 사람이지 방해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 주었기 때문에 협조했습니다. 관련 부처의 의견이 다를 때 제가 조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중대 사안은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최종 승인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은 경제에 관해서는 저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해 주셨지만 직접 챙기시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매월 열리는 월간경제동향보고회와 수출진흥확대회의, 그리고 분기별로 한 번씩 열리는 심사분석보고회의와 방위산업진흥회의를 주재했고, 수시로 개발현장을 찾아 확인했습니다. 연두의 각 부처 및 지방순시도 현장확인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適材適所 인사로 자신의 시간 확보 朴대통령은 「경제개발이란 교향악의 지휘자였고, 지휘봉은 헬리콥터였다」는 말도 있듯이 헬기를 많이 이용했다. 朴대통령 전용헬기의 副조종사로 일했던 한 공군장교 출신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의 자리엔 항상 지도와 쌍안경이 있었습니다. 쌍안경으로 내려보다가 공사현장이나 개발현장이 나타나면 수행자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모르면 묻기도 했습니다. 앞자리에 있는 두 조종사는 대통령이 물을 경우에 대비하여 공부를 해두지만 그래도 모를 때는 해당 부서에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한 뒤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헬리콥터에 타면 흔들리는 리듬으로 해서 졸리게 됩니다. 대통령을 수행한 장관들은 꾸벅꾸벅 졸고 가끔은 조종사도 졸음이 와서 멍이 들 정도로 허벅지를 꼬집습니다. 朴대통령은 한 번도 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항상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확인하는 등 깨어 있었습니다』 朴대통령은 자동차나 집무실에서도 토막잠이나 낮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측근들에게 그는 「늘 깨어 있었던 사람」, 「늘 사색하는 超人」이었다. 朴대통령은 「조직운영의 귀재」라는 평을 받고 있다. 복잡하고 긴박한 사건들이 연속해서 터지는 가운데서도 朴대통령은 좀처럼 당황한다거나 낭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有備無患(유비무환)」이란 말은 국정지표이기도 했지만 그의 생활철학이기도 했다. 그는 앞을 내다보면서 만약의 사태에 늘 대비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간이 많았다. 국정의 대강을 국무총리·비서실장·정보부장에게 맡겨놓고 각부의 행정은 장관에게 일임했다. 차관 인사는 장관이 재량껏 하도록 하고 공동책임을 지웠다. 『朴대통령이 자신의 시간을 많이 가지고 굵직한 사안에 대해서 사색에 사색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適材適所(적재적소)의 원칙에 따라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金正濂씨는 말했다. 朴대통령은 유능하게 보이는 관료는 과장 시절부터 눈여겨 보면서 경력관리를 하고 적극적으로 밀어 주었다. 吳源哲·金龍煥 등 장관·수석으로 발탁된 사람들은 朴대통령이 과장·국장 시절부터 그 능력을 인정하고 시험도 해보면서 人材(인재)로 키웠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사람을 適所에 배치했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었고, 자신은 몇 가지 정기점검의 고삐를 장악하여 여유 있게 국가조직을 끌고 갈 수 있었다. 朴대통령에게 있어서 정보부는 야당과 언론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기관일 뿐 아니라 국가조직의 고삐이자 채찍이기도 했다. 정보부는 대통령의 시각에서, 국가적 관점에서 사안을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처이기주의에 함몰된 행정관료들이 놓치기 쉬운 국정의 문제점을 발견하여 이를 시정하도록 조정하곤 했다. 이런 경우엔 국가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 JP 동향 보고서 낡은 청와대 본관 2층의 반은 대통령의 숙소였고, 나머지 반은 비서실장 사무실이었다. 金正濂 실장은 오전 8시에 출근하여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했다. 오전 9시에 대통령이 2층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와 서재로 불리는 집무실에 들어갔다는 연락이 오면 金실장은 곧바로 대통령에게 보고차 들어갔다. 관계 수석비서관을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金실장의 보고는 항상 口頭였다. 경호실장이 보고할 것이 있을 경우에도 비서실장이 한 뒤에 하도록 규율을 잡아 놓았다고 한다. 이런 질서는 金실장이 그만두고 金桂元씨가 실장이 된 뒤로는 문란해졌고, 이것이 10·26 사건의 한 원인이 되었다. 朴대통령은 읽고 난 정보보고서 가운데 주요인사의 부정부패나 스캔들과 관련된 정보철만 뜯어내 보관한 뒤 나머지 보고서를 비서실장에게 주어 관련부처에 통보하도록 했다. 한번은 車智澈 경호실장이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다는 정보가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朴대통령은 金실장에게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車실장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이 老母가 관절염이 심해 2층을 올라가기가 힘들어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것이었다. 보고받은 대통령이 양해했다고 한다. 金실장에게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보고서가 하나 있었다. 金鍾泌(JP)씨에 대한 동향보고였다. 민정수석 비서관이 어떻게 수집했는지 소스를 밝히지 않은 채 주로 JP에 대한 나쁜 정보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 결재란엔 비서실장 난이 없었다. 민정수석이 직접 대통령에게 갖다 바치는 문서였는데, 실장도 알아두라는 뜻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金실장은 이 보고서를 읽고서 의심이 생겼다고 한다. 보고서는 金鍾泌씨 바로 옆에서 그의 一擧手一投足을 지켜본 사람이 쓴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해설하는 식의 보고서인데, 그 眞僞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듯했다. 주로 金鍾泌씨가 朴대통령의 후계를 노리고 있고, 그 주변에 이를 부추기는 인물들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보고서를 대통령이 계속해서 받아 보면 JP를 나쁘게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金실장은 이 「JP 동향보고」를 중단시켰다. 朴대통령도 왜 보고가 올라오지 않느냐고 재촉하지 않았다. 1975년 말 朴대통령 주치의와 金鍾泌 총리 주치의가 같이 金실장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건의했다. 그 요지는 金총리에게 신경마비 증세가 생겼는데 절대적인 요양이 필요하고, 만약 무리하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金실장은 즉시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도 매우 놀라는 것이었다. 즉각 金총리를 들어오라고 했다. 金총리는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더니 대기 중이던 金실장을 향해 싱긋 웃으면서 『실장이 보고했구먼.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요』라고 악수했다. 그해 12월 朴대통령은 崔圭夏 특별보좌관을 총리로 발령하는 등 대폭적인 개각을 했다. 崔太敏이란 골칫거리
| 崔太敏씨는 朴槿惠씨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청와대의 골칫거리를 만들었다. |
1975년부터 金正濂 비서실장의 골칫거리가 하나 생겼다.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던 朴槿惠씨가 구국봉사단 총재 崔太敏에 대한 지원을 金실장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朴씨가 모 건설업자에게 융자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알아보면 崔太敏과 관련 있는 업자였다. 金실장은 박승규 민정수석에게 『큰 영애에 대해서 오점이 생기면 안 되니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시킨 뒤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큰 영애가 필요한 돈이 있다고 하면 각하께서 저한테 이야기해 주십시오. 소리 안 나게 돈을 만들어 각하께 드리겠습니다』 朴대통령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나 崔씨에 대한 정보 보고가 끊이질 않았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자주 거론되었다. 崔씨는 구국봉사단을 이끌고 새마을 사업의 하나로서 새마음갖기 운동을 한다고 했기 때문에 새마을 담당 장관이던 金致烈 장관도 崔씨를 지원했다. 崔太敏이란 이름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5년 12월31일자 조선일보이다. 1975년 送年소감을 밝히는 난에 그는 대한구국선교단 총재로서 이런 글을 썼다. <印支사태를 계기로 더욱 절실해진 국방력 강화를 위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명을 바칠 각오로 구국십자군을 창설한 것, 이와 더불어 기독교인들이 더욱 단합하게 된 것,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의 한 방법으로 야간무료진료센터를 개설한 것들이 뜻 깊은 일이다> 1976년 9월22일 朴槿惠씨는 구국여성봉사단의 수원·화성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격려사를 했다. 수원시민회관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趙炳奎 경기도지사 등 지방유지와 봉사단원 2500명이 참석했다. 대통령 영애의 지원을 받는 이 단체가 準관변단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그때 崔太敏씨를 조사했던 한 경찰고위 간부는 朴槿惠·崔太敏 두 사람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崔太敏은 1975년 1월쯤 朴槿惠씨 앞으로 편지를 썼다. 「어젯밤 꿈에 국모님을 뵈었습니다. 국모님 말씀이 내 딸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槿惠양의 비서실에서 이 편지를 넣어 주었다. 朴槿惠는 편지를 다 읽고는 崔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때 나이 칠십을 바라보던 崔太敏은 늙은 아내와 장성한 여러 자녀를 두고 있었는 데도 얼굴의 피부가 팽팽한 童顔이었다. 몸집은 작으면서도 다부져 보였다. 朴槿惠씨가 최초의 사회활동(구국여성봉사단)을 하게 된 계기는 崔太敏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1975년 2월 朴槿惠씨는 나에게 崔太敏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崔太敏을 만나러 갔더니, 崔씨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내가 槿惠양의 부탁으로 왔다고 했더니 崔씨는 갑자기 거만해졌다. 나는 뒷조사를 시켰다. 崔씨가 자유당 시절에 경찰관을 지냈다는 것, 정규과정을 밟은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 등이 드러났다. 나는 직접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이 정보를 槿惠양에게 알려 주고, 주의를 주었다. 朴대통령은 으레 그러듯 「누가 그러더라」는 식으로 정보의 소스를 밝혔다. 朴槿惠씨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섭섭해했다. 나는 그 뒤로 대통령과 槿惠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金載圭의 주장 崔太敏과 朴槿惠씨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0·26 이후였다. 朴대통령을 죽인 金載圭가 재판과 수사과정에서 朴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1978년 무렵 金載圭 정보부장은 구국여성봉사단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崔太敏의 비행을 검사 출신인 白光鉉 수사국장에게 조사시켰다. 朴升圭 민정수석 비서관이 여러 차례 비행보고를 대통령에게 올렸는 데도 먹혀들지 않아 그가 나섰다는 것이다. 崔씨가, 여러 재벌 총수들이 구국봉사단에 기탁한 수십억원을 변칙적으로 관리한 사실, 여성 관련 스캔들이 드러났다. 金부장이 조사결과를 보고하자 朴대통령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확인작업을 벌였다. 옛 임금의 親鞠(친국)을 연상시키는 방식이었다. 朴대통령은 한쪽에 金부장·白국장, 그 반대편에 朴槿惠를 앉히고 신문하기 시작했다. 딸은 울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판단이 서지 않았는지 대통령은 검찰에 또 수사를 지시했다. 검찰의 조사결과도 金부장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崔太敏은 구국봉사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명예총재로 뒤로 물러난 것 같았지만 총재가 된 朴槿惠에게 계속 영향을 끼쳤다> 10·26 사건 뒤 金載圭는 朴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姜信玉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 『각하, 일본도 보십시오. 큰 영애는 적십자사 같은 데나 관여하도록 해야지 이런 데서는 손을 떼게 해야 합니다』 朴槿惠씨는 金부장에게 『왜 남의 프라이버시 문제까지 조사하느냐』고 항의했다는 것이다. 金부장은 공정하게 조사했고, 『돈이 필요하면 내가 주겠다』면서 제발 손을 떼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金載圭는, 명예총재로 물러나서도 구국여성봉사단에 대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崔太敏에게 집요한 관심을 두었다. 1979년 5월에 『崔목사가 계속해서 대통령 큰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그자는 백해무익한 놈이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할 놈이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5·17 직후 계엄사에서는 崔씨를 붙들어 가 부정사실과 축재사실을 확인했으나, 대통령의 가족과 관련된 사안이라 덮었다는 것이다. 金載圭의 범행 동기를 수사한 한 관계자는 『金부장은 이 사건 처리로 대통령에 대해 실망했고, 존경심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시해 동기의 하나다』라고 했다. 朴槿惠씨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崔씨를 전폭적으로 변호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는 음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증거를 찾아나서야 한다. 鮮于煉 비망록: 대통령의 親鞫
| 1977년 9월12일 오전에 金載圭 정보부장과 白光鉉 수사국장이 朴대통령에게 崔太敏 관련 보고를 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대통령 면담 日誌」. |
鮮于煉 당시 공보비서관은 자신의 업무가 아닌 데도 朴槿惠씨의 일을 돕고 있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비망록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1977년 9월20일. 지난 9월12일 밤, 대통령은 槿惠양과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및 白光鉉 정보부 7국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구국봉사단 崔太敏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親鞫을 했다. 朴대통령은 오늘 나에게 큰 영애인 槿惠양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켰던 崔太敏 구국봉사단 총재를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이 나에게 지시한 내용은 세 가지였다. 『崔太敏을 거세하고, 향후 槿惠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하라.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고』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곧 槿惠양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槿惠양은 얼굴이 하얘지더니 낙담한 표정으로 눈물을 지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각하께 다시 보고드릴 테니 기다려 봐요』 며칠 뒤 다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槿惠양 문제를 여쭈었다. 『각하, 큰 영애가 영부인이 돌아가신 뒤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리하고 있는데, 하고 있던 단체를 모두 해체하면 영애의 체면이 깎입니다. 구국여성봉사단만은 계속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대통령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崔太敏을 가까이 안 하게 할 수 있나? 崔와 槿惠를 접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서 자네에게 허락할 테니, 그건 따로 의논해서 계속 일하도록 하게. 사실 지난번에 내가 특명을 내리고 나서도 槿惠가 엄마도 없는데 일까지 중단시켜서 가엾기도 하고, 나도 마음이 아팠어. 자네가 구국여성봉사단만은 허락해 달라고 하니 나로서도 괴롭지만, 어떤 의미로는 내 마음이 편안해지네. 내 뜻을 알아서 정말 잘해 주기 바라네. 이제는 절대 잡음이 나지 않겠지. 내가 그간 새마음봉사단에 관해 崔太敏과 관련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네. 늘그막에 애들이라도 잘 돼야 내가 마음이라도 편안하지 않겠는가. 나를 좀 도와주게』> 『全斗煥 장군에게 崔太敏 거세 부탁』 조선일보 1977년 12월8일자 사회면에는 「대통령 영애 朴槿惠양이 사단법인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로 취임했다」는 1단짜리 기사가 실렸다. 救國여성봉사단과 救國봉사단은 그동안 임의단체로 활동해왔는데 이번에 구국봉사단은 해체하고 구국여성봉사단은 문공부 장관의 설립인가를 받은 사단법인체로 발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봉사단은 앞으로 忠孝(충효)에 바탕을 둔 새마음갖기 운동과 사회봉사활동 및 문화사업을 추진하게 된다고 했다. 鮮于煉씨는 또 이런 후일담을 비망록에 남겼다.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國葬이 끝난 직후에 槿惠양 등이 신당동 집으로 옮기기 위해 집수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신당동 집에 갔다가 全斗煥 합동수사본부장을 만났다. 그는 신당동 집수리를 직접 감독하고 있었다. 『全장군, 내가 부탁할 것이 있소. 3년 전에 朴대통령이 나에게 崔太敏을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는데, 그게 몇 달 못 가서 흐지부지되고 말았소. 崔太敏이 다시 영애를 따라다니는 것을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깨끗하게 처단해야 했었는데, 영애가 부탁하는 통에 내 마음이 아파 보고를 못 하고 오늘에 이르렀소. 그게 이제는 朴대통령의 언명이 아니라 유언이 되고 말았소. 합수본부장이니 그 힘으로 崔太敏을 영애에게 접근 못 하도록 해주시오. 방법은 全장군이 알아서 해주시고』 그런 부탁을 하고 난 이틀 뒤에 나는 다시 全장군을 만났다. 『鮮于의원, 崔太敏 문제는 나도 해결하지 못하겠습니다. 鮮于의원 얘기를 듣고 영애에게 崔太敏 처리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 말씀을 드렸더니, 영애가 「崔太敏은 내가 처리할 테니 나한테 맡겨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각하도 계시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영애 부탁을 거역하겠습니까』 『여보, 영애가 崔太敏에게 현혹돼 그를 거세하라는 건데 그걸 영애에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소!』 全장군의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면박을 주었다. 몇 달 뒤 확인해 보니 全장군은 결국 崔를 강원도 산골로 쫓아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鮮于煉씨의 비망록을 읽어 보면 朴대통령이 金載圭 주장대로 무턱대고 딸을 감싼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머니를 잃고서 퍼스트 레이디 역할에 재미를 붙인 딸에게 매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비망록의 정확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대통령의 親鞠이 있었다는 1977년 9월12일자 대통령 면담록을 찾아내 확인했다. 이날 오전 10시20분부터 11시25분까지 金載圭 정보부장, 白光鉉 수사국장이 서재에서 朴대통령에게 보고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 이 자리에 朴槿惠씨가 불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면담록에 따르면 오전 11시25분부터 10분간 金載圭 정보부장이 따로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이날 오후 5시35분부터 20분간 또 朴대통령을 만나고 갔다. 이 문서는 문제의 親鞠을 확인해 주는 유일한 증거물일 것이다. 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許和平씨는 5공화국 초기에 새마음봉사단을 해체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朴槿惠씨를 찾아가 『우리는 朴대통령의 명예를 지켜 드려야 하는데 새마음봉사단이 대통령의 명예에 累(누)가 되었다. 그러니 이를 해체시키는 것을 양해해 달라』는 취지로 통보했다고 한다. 崔太敏과 金正日
| 구국여성봉사단 발단식에 참석한 朴槿惠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뒤에 안경낀 사람은 崔太敏으로 보인다. |
朴대통령 시절 정보기관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朴대통령이 정보부의 보고를 왕조시대의 친국式으로 처리한 데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평한다. 朴槿惠씨는 崔씨에 대한 어떤 비판에 대해서도 음해론으로써 그를 철저하게 옹호하는데, 이는 다른 객관적인 증언들과 부합되지 않는다. 우선, 당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朴槿惠씨에 대해서 음해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정보부도 비서실도 대통령과 딸을 아끼는 마음에서 直言을 했다고 봐야 한다. 다만, 崔씨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져 상당히 과장된 정보가 올라갔을 가능성은 있다. 朴槿惠씨는 崔太敏씨가 하려던 게 모두 좋은 일뿐이니 『다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떠들 일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매우 주관적 판단을 했을지 모른다. 구국여성봉사단에 돈을 가져다 주는 기업 쪽에서도 압력을 받아 마지 못해 낸다고 했을 리는 없고, 『제발 받아 달라』는 식으로 자진 기부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朴槿惠씨처럼 정상적 생활인과는 다른 체험에 익숙해 바닥 民心을 잘 모르는 권력의 심장부 사람으로서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권력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은 의외로 그 권력이 보통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위한다면서 惡役을 맡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을 멀리 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오늘날 한나라당 대표가 되어 있는 朴槿惠씨에게 崔太敏 건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崔씨에 대한 그때의 誤判이 金正日에 대한 침묵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다.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한 朴의원은 金正日이 내준 특별기를 타고 가서 그를 만났으며,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파격적인 특별대우였다. 이후 지금까지 朴대표는 金正日에 대한 비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책임자인 金正日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북한정권의 非行도, 盧정권의 굴욕적인 對北정책도 견제할 수 없다. 국민행동본부는 광고를 통해서 「어머니를 죽인 원수와 만나 오누이처럼 사진을 찍고 와서는 한나라당까지 끌고 들어가서 金正日에 대해 침묵하도록 하고 盧정권의 對北정책 비판도 포기했다」고 비판한다. 金正日은 朴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朴대통령을 칭찬했고 『국립묘지에 가서 묘소에 참배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고 전한다. 崔太敏과 金正日에 대한 朴대표의 납득하기 힘든 태도는 20代 처녀의 몸으로 퍼스트 레이디役을 했던 사람의 「인간 본성과 세상 물정에 대한 순진한 오판」 때문인가? 崔씨에 대한 오판이 朴대통령의 운명에 다소간의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국가적인 사안은 아니었다. 체제수호 정당을 자임하는 巨大야당 대표인 朴대표의 현재진행 중인 金正日에 대한 오판과 침묵은 국가적 문제이다. 대한민국 수호세력의 챔피언이 되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민족반역자에게 침묵함으로써 救國운동이 결정적 장애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咸秉春의 자주적 對美觀
| 1973년 咸秉春 駐美 대사가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에게 信任狀을 제정하고 있다. |
유신조치 후 朴대통령이 與野 정치인들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고 정부 쪽 인사들하고만 주로 접촉한 것이 대통령의 민심동향 파악에 지장을 주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특히 1974년 8월15일 文世光의 저격으로 陸英修 여사가 사망한 다음 새로 경호실장이 된 車智澈은 경호를 강화하여 대통령과 일반인들 사이에 장벽을 만들었다. 대통령이 골프장에 나가면 그 앞뒤를 봉쇄하여 거의 혼자서 치도록 한 점이 그러하다. 金正濂 당시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외부접촉이 줄어들었지만 특보 10명이 바깥 민심을 전하고 자신의 전문영역 안에서 直言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민심 파악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대통령 특보로 지명된 사람들은 咸秉春·朴振煥·朴鍾鴻씨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고, 동시에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인맥이 있어 그 네트워크를 통해서 수집한 정보를 대통령에게 아주 편한 입장에서 건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보들은 대통령과 함께 한담을 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金正濂씨는 특히 咸秉春씨의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연세大 교수를 하다가 특보로 임명되었던 咸秉春씨는 미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韓美관계가 나빠져 가는 과정에서 朴대통령을 말리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咸秉春 특보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아무리 압력을 넣고 비난을 해도 절대로 한국을 버릴 수는 없다. 한국은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는 데 꼭 필요한 미국의 不沈航母(불침항모) 역할을 하고 있다』고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이 한국의 인권문제를 트집잡고 있는데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럴 자격이 없다. 서부개척 시대에 인디언들에게 한 짓, 링컨이 남북전쟁 때 영장 없이 사람들을 구속한 것, 제2차 세계대전 때 수십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로 보낸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한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咸秉春씨는 그러나 朴대통령이 미국의 압력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극구 말렸다고 한다. 咸秉春씨는 駐美대사로 가서도 미국의 정치인·언론인들을 상대로 한국의 입장을 설득하는 역할을 열심히 했다. 咸秉春씨는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답지 않게 한국의 입장을 역사적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한국의 역사·민속에 대해서 조예가 깊었다. 조국이 처한 현실과 전통을 이해한 바탕에서 미국식 문물을 주체적으로 흡수한 사람이란 점에서 朴대통령의 철학과 맞았다. 金正濂 실장은 朴대통령의 자주정신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으로서 咸秉春씨와 철학자 朴鍾鴻씨를 꼽았다. 재벌집안 정치인 시켜 재벌규제 朴正熙 대통령은 권력을 잡고도 영혼의 순수성이 오염되지 않은 드문 인물이었다. 그는 집권한 뒤에도 권력과 금력을 남용하는 실력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대했다.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았다. 이런 성향은 그의 출신과 한때 사회주의에 홀렸던 前歷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와 결별한 뒤에도 버리지 않았던 좌파적 성향(반골적·평등지향적·약자보호의식 등)을 우파적 근대화의 동력으로 쓴 사람이었다. 朴대통령 밑에서 공화당 의장과 정책委 의장을 지낸 朴浚圭씨의 증언이다. 〈1977년도 예산안을 확정하기 위한 당정회의가 열렸을 때이다. 南悳祐 부총리가 당시 공화당 정책委 의장이던 朴浚圭에게 부탁했다. 『우리가 아무리 각하께 이야기를 드려도 소용이 없으니 朴의장께서 꼭 진언해 주십시오. 내년에 너무 많은 농가개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인플레가 생깁니다. 줄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朴의장은 회의 도중 주문대로 발언했다. 朴대통령은 『그건 그대로 해』라고 잘라 버렸다. 회의가 끝나고 나오려는데 대통령이 朴의장을 불렀다. 『아까 그 이야기는 공화당 생각이 아니지? 그 관료들에게 맡겨 두었다가는 아무 것도 안 돼!』 朴의장은 『농민들도 부담이 크다고 울상입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이 말했다. 『농민들이 언제 스스로 자기들 생활을 개선하고자 나선 적이 있나요. 당장은 좀 어렵겠지만 일단 해놓으면 이익이 되는 거야』〉 朴대통령이 재벌을 늘 감시하면서 지나치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증거로서 朴浚圭씨는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朴대통령이 불러서 갔더니 「재벌들이 문화재단을 만들어 돈을 많이 빼돌리고 탈세를 하는데 그것 규제 좀 하지」라고 해요. 「그건 정부입법으로 하시죠」라고 대답했더니 「朴의장이 유정회 具泰會 정책委 의장하고 상의해서 법안을 만들어」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종고모의 남편이 李秉喆 회장이고, 具의장은 금성(지금의 LG)그룹 집안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을 시켜 재벌규제법안을 만들게 한 朴대통령은 무서운 분입니다. 종고모가 호암문화재단에 들어가 있는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법이 통과된 이후 그 집을 문화재단에 넘겨 주고 나왔어요. 「하나밖에 없는 종고모를 못살게 하려고 준규가 집까지 빼앗아 내쫓았다」고 원망을 많이 했어요』 朴대통령은 재벌이 너무 비대해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겐 이렇게 말했다. 『알아. 그래도 경제발전에는 이게 가장 빠른 길이야. 이렇게 어느 정도 가고 그때 가서 재벌을 규제하자. 내가 재벌들을 속속들이 다 알아. 내가 거기 안 넘어갈 거야. 걱정하지 마』 『폭탄 피했다가 다시 일해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보고회가 끝나면 꼭 표창받은 새마을 지도자 및 모범 근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실무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1975년 5월8일 경제기획원에서 있었던 대화를 소개한다. 〈朴대통령: (국제화학 梁正模 사장에게) 요즈음 수출이 어떻습니까? 梁사장: 어렵습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朴대통령: 조업단축은 안 하시오? 梁사장: 직공이 많아 오더가 없으면 운영이 곤란합니다. 그러나 조업단축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朴대통령: 손해 볼 때는 적자를 내더라도 조업단축을 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다음 경기가 좋아진 뒤에도 종업원이 열심히 일할 게 아니겠습니까? 梁사장, 金여사 같은 장기근속 사원에겐 아파트 같은 것이나 마련해 주시오. 지금 셋집에서 산다는데 나하고 梁사장하고 반반씩 부담하여 아파트 한 칸 사줍시다. 梁사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朴대통령: 사업가들이 요즈음 공산주의자들이 쳐들어온다고 동요하지 않나요? 梁사장: 그렇지 않습니다. 朴대통령: 우리는 폭탄이 떨어질 땐 잠시 피했다가 다시 공장에 들어가 생산하는 정신으로 일해야 합니다〉 서민 생활과 밀착된 대화 나눠 朴대통령이 이들과 나눈 대화록을 읽어 보면 수치가 많이 들어간 실무적 이야기가 主이다. 대통령이, 관념적인 헛소리가 일체 생략된, 생활과 밀착된 대화를 서민들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은, 지식인들이 본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의 유신시대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1975년 10월6일 월간경제동향보고회 직후의 대화이다. 〈朴대통령: (대한전선 공장기술부) 金松씨는 월소득이 얼마나 됩니까? 金松: 11만7000원입니다. 대통령: 세금 떼고 그렇게 됩니까? 金松: 집에 들여가는 것은 8만원 정도 됩니다. 朴대통령: 11만원이면 정부관리로 어느 급일까? 金龍煥 재무장관: 국장급의 2갑3호봉을 기준으로 할 때 11만700원입니다. 朴대통령: (완도군 새마을 지도자 田宰眞씨에게) 가족은 얼마나 되며 섬에서 생활하는 데 생활비가 얼마 듭니까? 田宰眞: 식비, 부식비 빼고 여섯 식구가 3만원 듭니다. 朴대통령: 田지도자의 연간소득은 얼마입니까? 田宰眞: 200만원 정도입니다. 朴대통령: (완도군수에게) 완도군에 소득이 100만원 넘는 부락이 몇 개며, 140만원은 언제 넘어서겠소? 군수: 100만원 넘는 부락은 네 개이고, 자립마을은 1978년에, 기초마을은 1981년에 가면 140만원이 넘겠습니다〉 朴대통령은 한 농민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뻤을 것이다. 『지금 농촌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100원 있으면 100원을 보태서 200원을 쓰려고 했는데, 요즘은 50원이 있으면 50원을 더 벌어서 100원을 만들려고 합니다』●
| | [연재]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9권10장)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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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전쟁 미치광이 金日成 도당들의 이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저 미련하고도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걸 잊지 말지어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1976년 8월18일 朴正熙 일기) | | | | |
|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트럭을 몰고온 북한군인들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과 노무자들을 습격하고 있다(UN군 측 감시카메라가 찍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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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미치광이 金日成 도당들의 이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저 미련하고도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걸 잊지 말지어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1976년 8월18일 朴正熙 일기) [日記 속의 인간과 권력] 아내와 나 사이엔 24년만 주어져 朴대통령은 유신시대에 일기를 쓰고 있었다. 자신만의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朴正熙 일기는 그의 인간됨을 소박하게 드러낸다. 1975~1976년 무렵의 日記와 발언록을 중심으로 그의 숨결과 육성을 느껴 보자. 1975년 10월3일(금) 맑음 단기 4308년 개천절이다. 단군 聖祖가 이 땅에 나라를 세우신 지 4308년. 弘益인간이란 민족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지난 4천년 동안 우리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생을 영위하면서 가꾸고 건설하고 키워 왔다. 영고성쇠, 민족이 걸어온 역정에는 허다한 굴곡과 기복이 있었으나 민족의 전진은 계속되어 왔다. 앞으로도 영원히 계승될 것이다. 올바른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배달민족이 걸어온 전통과 정통을 우리들이 계승하고 창조적인 발전을 위하여 온 겨레가 가일층 분발하고 정진해야 하겠다. 1975년 11월6일(월) 맑음 서울신문 오늘자 5면을 읽고 조국을 사랑하는 정념이란 것을 새삼 생각해 보았다. 「값진 선물 자신감을 뿌듯이 안고」라는 표제 아래 김모라는 在美(재미) 교포(예비역 대령)가 쓴 글이다. 김씨는 광복 30주년 행사의 하나로 在美 기독교 지도자 친선 모국 방문단의 일원으로 돌아온, 羅聖(로스앤젤레스) 거주 장로직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4년 만에 고국의 발전상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고국 동포들의 진지하고도 활기찬 모습과 입이 딱 벌어지는 고국의 발전상이 눈물겹도록 대견하고 고맙다』고 했다. 이번 고국 방문을 통해서 값진 선물을 가지고 간다면서 그것은 자신감이라고 했다. 『그동안 조국이 초라하다는 데 얼마간 기가 죽어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떳떳이 조국의 모습을 전하고 자랑하겠노라』고 하였다. 얼마 전 조총련계 교포들이 34년 만에 고국땅을 밟고 『이만한 조국이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고 자랑할 수 있다』고 한 기사가 기억 난다. 조국이 부강하고 잘살고 훌륭하면 어디를 가나 어깨가 으쓱하고 자랑스럽고, 그러지 못하고 가난하고 빈약하고 못살면 그와는 반대로 공연히 어깨가 수그러지고 기가 죽어서 움츠리고 다니게 되는 것은 도리가 없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겪고 느낀 일이다. 일제 시대 때가 그러했고 해방 후도 그러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우리 국민들은 이 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 확실하다. 자신감과 긍지가 생기기 시작했고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우리도 당당히 선진 국가로서 어깨를 재고 살 수 있다는 자신이 만만하다. 이것이 국민의 사기다. 이것이 필요하다. 失意(실의), 비굴, 열등의식, 패배의식 이런 것들은 이제부터 과감하게 씻어 버리고 패기, 자신, 긍지를 가지고 대한민국이 나의 조국이란 것을 어디서나 자랑할 수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 이것이 민족의 염원인 조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는 정신적인 원천이요, 원동력이라고 확신한다. 金모라는 在美 동포의 그 정신은 오늘 우리 모든 국민의 가슴속에서 싹트고 있는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1975년 12월12일(금) 맑음 오늘이 아내와 결혼한 지 만 25년이 되는 날이다. 아내가 있었다면 은혼식을 올리고 축배를 올렸을 터인데…. 1950년 12월12일 대구시 모 교회에서 일가친척·친지들의 축배를 받으며 식을 거행하고, 아내와 백년해로를 맹세하였다. 24년 만에 아내는 먼저 가고 말았다. 남은 은혼식·금혼식을 올리며, 일생의 반려로 자손들의 축복을 받으며 老後를 즐기는데 아내와 나의 사이는 어찌 24년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을까. 25년 전 오늘의, 그 착하고 수줍어하던 아내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이번 25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아내와는 幽(유)와 明(명)을 달리하게 되었으니 인생이란 果是(과시) 무상하도다. 봉급을 배만 더 인상해 줄 수 있다면 1976년 1월 20일(목) 맑음 연두 중앙관서 순시 개시. 오전 10시 경제기획원. 오후 1시30분 재무부 방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종사원에게 봉급을 물어보았더니 작년 12월에는 4만4000원이었는데 1월부터 7만7000원 정도이고 상여금을 합치면 월평균 8만여원이 된다고 하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에게 현재 물가 표준으로 倍만 더 보수를 인상하여 줄 수 있다면 극히 만족하겠지,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1976년 2월24일(화) 맑음 금년도 각 대학 입학 시험에 학과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신체부자유라는 이유로 불합격된 학생들의 억울하다는 호소 소리가 작금 보도를 통하여 알려짐으로써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 문교부 장관을 통하여 관계 각 대학 총학장에게 권유하여 이들을 구제해 주도록 지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체 부자유 학생과 학부모들의 기뻐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참으로 흐뭇하기 그지없다. 중국 고사에 漢武帝 때 사마천은 신체 불구가 되어서 더욱 분발하여 「史記 (사기)」 130권을 저술하여 고대중국사를 남겼다고 한다. 손자병법을 후세에 남긴 孫武도 두 다리가 없는 불구였다고 한다.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의 명저를 남긴 공자의 제자 左丘明은 눈이 멀었던 失明者라고도 한다. 신체 일부가 불구라고 하여 사회에서 버림을 받거나 폐인 취급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들 중에 굳은 의지로써 훌륭한 일을 성취하여 후세까지 빛을 남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학이 이들 불구한 사람들을 차등 대우하였다는 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金日成은 남침 시기 놓쳤다』 1976년 4월13일. 朴대통령은 청와대 출입 기자단 및 공보비서관들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朴대통령은 1월15일 연두기자회견 때 발표했던 포항석유 시추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다. 『3월25일 미국에서 기계를 들여와 하루에 20m씩 파고 있습니다. 시추를 할 때 기계에 물을 붓는데 그 물과 합쳐서 기름이 나오고 있어요. 아직까지 경제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시중에 떠도는 얘기는 전부 거짓말이야. 한 번 포항에 같이 가봅시다. 그때 기름이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어』 화제는 미국 하원의원 프레이저가 시작한 朴東宣(박동선)의 對美로비 스캔들, 즉 코리아게이트 사건 조사로 옮아갔다. 『프레이저의 본색이 드러났는데, 즉 한국의 민권을 위해 투쟁했다는 기록을 남겨서 지지표를 더 얻으려는 속셈입니다』 朴대통령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국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미국의 군사 원조는 내년에 완전히 종결됩니다. 유상원조도 8년 상환이고, 이자 8%는 상업차관과 다를 바 없어요. 내 생각 같아서는 차라리 구라파에서 얻어 오는 것이 좋겠어. 그 전에 닉슨이 국군 현대화를 위해서 무상으로 15억 달러를 준다고 했었는데, 이것이 점차 변질되어 유상으로 바뀌었고, 내년에 받게 될 2억3000만 달러로 15억 달러 약속은 다 이루어진 셈이지요. 미국의 군사 원조 실태를 국민에게 전부 다 알려 주시오』 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확고한 방침을 갖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우리 국군만으로 북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도 미군을 쉽게 뽑아 가지는 않을 것이오. 지난번 美 의회에서 딜럼스 수정안이 압도적 다수로 부결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에 지상군을 요청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해군과 공군, 병참 원조만을 適期에 대주면 좋겠어. 걱정되는 것은 이북의 기습이오. 이북에서 일단 기습을 가해 오면 처음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넘어온 敵은 모두 분쇄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즉각 전방에서 막을 수 있어요』 그는 물가에 관해서도 자신감을 보였다. 『현재 추세로 보아 연말까지 도매 물가 인상률을 10%, 소비자 물가는 12% 선에서 억제하겠소. 절대 자신이 있어요. 석유가 안 나와도 우리 경제는 자신 있습니다』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북은 모순이 저렇게 쌓여 가면 반드시 망합니다. 중국도 외세의 압력이 없었던 淸나라는 약 300년 갔지만, 대부분의 통일 중국은 200년 정도밖에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毛澤東(모택동) 死後에는 굉장한 혼란이 있을 겁니다. 金日成도 마찬가지요. 金日成도 초조하겠지만, 이제 남침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봅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에 포항에서 나왔다는 석유를 병에 담아 놓고 방문객들에게 자랑하곤 했었다. 그때 이 석유가 땅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 정유된 기름이 스며든 것이었음을 알고 있던 사람은 吳源哲 경제2수석비서관과 이 석유를 분석했던 석유공사 劉載興 사장 정도였다. 1976년 4월17일(토) 맑음 1년 전 오늘 크메르 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항복하고 프놈펜이 함락된 날이다. 작년 이맘때 국내 정세를 회고하니 감개무량할 뿐이다. 조국을 死守하겠다는 의지가 박약하고 국난을 당하고도 국민이 단결할 줄 모르고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이익보다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위기에 처해서 국론을 통일하고 국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他山之石으로 삼고 우리가 갈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金大中의 군축 이야기 듣고 오싹』 1976년 4월24일. 朴대통령은 기자들을 초청해서 오찬을 하면서 보도금지를 전제로 한 뒤, 크메르(캄보디아) 공산군의 양민 학살에 언급했다. 『우리가 6·25 동란을 겪어 봐서 알겠지만 크메르 사람들 고생하고 있을 겁니다. 공산당은 자기와 같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사람 대접을 하지 않아요. 차라리 소나 말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하더군요. 이럴 때 평화니 인권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합심해서 학살의 마수로부터 크메르 국민들을 건져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세계인권옹호위원회는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만 몇 명 잡아서 법의 절차를 밟아 처리하는 데도 야단법석을 떨면서, 크메르에 관심을 안 보인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기자 양반들 社(사)에 가면 이야기해요. 크메르 국민들을 도와야 한다고. 이런 것이야말로 대서특필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인도차이나 3國은 사서 고생하는 것 같아. 월남에 들렀을 때 들은 얘기인데, 우리 공병대가 다낭인가 어디에다 팔각정을 멋지게 세워 주었으나 월남 국민들이 하도 돌보지 않아서 우리 공병들이 매일 아침 청소해 주었다고 합디다. 그곳 사람들은 멀거니 우리 공병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하니, 이게 될 말입니까. 전투는 미군과 한국군에게 맡겨 놓고, 자기들은 反정부 구호나 부르면서 재미는 볼 대로 보겠다는 겁니다. 심지어 軍 장교가 軍需(군수)를 맡아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미군에게서 원조받은 무기의 일부를 야간에 베트콩에게 슬슬 팔아먹은 예도 있었다고 해요. 그 후 나는 派越(파월) 지휘관들에게 일렀습니다. 큰 전과를 세우려 하지 말고, 희생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내도록 하고, 한국군에 지정된 지역 안의 보호에만 힘쓰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의 지원이 없어도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방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몇 년 전 선거에서 金大中씨가 군축을 선거 구호로 내세웠을 때는 내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모두가 다 위선이었구나 1976년 4월24일(토) 흐림 작금 紙上과 방송을 통하여 공산화된 크메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은 지 1년간에, 크메르 인구의 약 1할에 가까운 50만~60만 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6·25를 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들이기에 크메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천인공노할 이 참상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義憤(의분)을 금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이와 같은 잔인무도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全인류가 특히 툭하면 남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평화니 人道니를 찾던 각국의 인사들, 언론·종교단체, 무슨 무슨 옹호 단체들이 어찌하여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다는 그 자체가 더욱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소위 세계평화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 모양인지? 모든 것이 다 위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만 한다. 크메르의 참상을 들으면서 나의 머리에서 문득 떠오르고 잊혀지지 않는 일은, 작년 이 무렵 크메르가 적화되자 서울에 와 있던 크메르 대사관 직원들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대사와 기타 몇몇 고급 직원들은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밖의 하급 직원들은 본국이 공산화되었더라도 자기들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우리 정부에서 여비를 도와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그 후 그들이 방콕을 경유, 본국으로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사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이 있을 줄이야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 포악할까? 인류 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主義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용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 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즈와 똑같은 살인 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니 조국의 통일이니 연방제가 어떠니 하고 광적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재니 파쇼니 비방을 하고 돌아가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1976년 4월26일(월) 흐림 초봄을 장식한 개나리·진달래·벚꽃·목련들은 어느새 다 지고 시들고 2陣으로 철쭉·라일락·서부해당화 등이 활짝 피었다. 모든 나뭇가지에 새싹이 푸릇푸릇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게 푸르러 간다. 싱그러운 신록이 무럭무럭 눈에 보이듯 자라만 간다. 1976년 4월30일(금) 맑음 1년 전 자유월남공화국이 패망한 날이다. 작금 우리 사회에서는 印支반도 적화의 이야기가 紙上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연일 보도되고 있다.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우리 이웃의 자유 우방이 어이없게도 패망하고 세계 지도의 색깔이 달라져 가는 것은 참으로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 왜 印支가 적화됐느냐. 그들이 패망한 원인이 무엇이냐. 우리는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3500만 동포들이 제각기 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한 마음으로 깊이 반성하고 크게 각성해야 할 것이다. 자기의 조국을 자기들이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고 국민들의 단결이 없을 때 그 나라는 망하는 법이다. 이는 비단 印支의 예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의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1976년 5월6일(목) 맑음 부처님 오신 날 2520주년 석탄일이다. 금년부터 「초파일」을 공휴일로 제정하여 그 첫해가 된다. 전국 각지와 5000여 사찰에서 석존의 탄신을 경축하고 국태민안과 평화적인 국토 통일을 기원하는 법회와 각종 불교행사가 거행되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지 1600여년이 된다고 한다(고구려 소수림왕 시대). 신라시대에는 國敎로서 정하여 넓게 보급이 되고 護國불교로서 그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우리 민족의 사상과 정신면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승려들이 법복을 벗어 던지고 무기를 들고 일어서서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을 섰다. 그 정신과 전통은 고려를 거쳐서 이조시대까지도 계승되었다. 李氏왕조에 들어와서 소위 崇儒抑佛(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가 다소 쇠약해진 느낌이 없지도 않으나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력은 감퇴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이 되고 해방 후 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사상적 혼란기를 지나오는 과정에서 불교 내부에서 분열이 생기고 타락 현상이 일어남으로써 불교의 과거 찬연한 역사와 전통을 날이 갈수록 퇴색케 하는 경향을 노정하게 된 것을 몹시 아쉬워한 바 있었다. 작금 불교계 내에서 새로운 정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고 화합 단결하는 운동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모쪼록 대동단결 불교 중흥을 위하여 불교계 지도자 여러분들의 분발이 있기를 기대한다. 1976년 5월16일(일) 흐림 5·16혁명 15주년 기념일이다. 15년 전 오늘 새벽에 이 나라의 젊은 군인들이 기울어져 가는 國運을 바로잡기 위하여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고 궐기했다. 오늘 새벽 동녘이 틀 무렵 전차 부대를 선두로 하는 1陣의 혁명군 부대가 결사의 각오를 굳게 간직한 채 새벽바람 찬이슬을 마시며 숙연히 한강대교를 渡江했다. 고요히 잠든 수도 서울은 역사의 새로운 장이 바뀌는 이 순간까지 적막 속에 초여름의 피곤한 잠을 이루고 있다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패와 부정과 무능과 안일, 정체와 무기력으로 氣息(기식)암암하던 이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와 소생의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몽롱한 깊은 잠길에서 잠을 깨고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전 5시 국영 방송을 통해서 혁명 공약이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새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혁명은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줄기차게 진행 중에 있다. 가지가지의 고난과 저항과 毁譽褒貶(훼예포폄)을 들어가면서. 5·16의 완성은 우리나라를 선진 공업국가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자주국방·자립경제를 달성하여 평화적 남북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여야만 한다. 1980년대 초에는 이 목표가 달성될 것으로 확신한다. 1976년 6월25일(금) 흐림 大逆 金日成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 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 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治罪해야 하나. 길은 단 하나뿐이다. 全力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 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원장 사택이 너무 해』 1976년 7월6일에 朴正熙 대통령은 정무, 공보비서관을 데리고 수원 새마을연수원, 경기 도청, 청소년지도자 연수원 등의 신축 공사장을 시찰했다. 새마을연수원 원장실에서 대통령은 金準 원장과 농업진흥청장, 鄭相千 정무2비서관과 환담을 나누었다. 주로 새마을운동의 성과가 화제로 올랐다. 청소년지도자 연수원으로 갈 때는 길을 잘못 들어 고속도로 양지터미널에서 舊도로로 들어가는 바람에 차가 자갈길을 한 시간 이상이나 힘들게 달려야 했다. 도착하고 나서 청소년지도자 연수원을 둘러본 대통령은 趙炳奎 경기지사에게 물었다. 『저 꼭대기에 있는 집이 뭐요?』 『원장 사택입니다』 『교육장을 먼저 짓고 나서 연수원장 집을 짓는 것이 순서인데, 어떻게 원장 관사부터 지었소』 그런 다음에 먼저 도로를 놓지 않은 점, 식당이 중앙에 위치한 점, 원장 관사가 호화롭다는 점, 교관 숙소의 건축 양식이 기이하다는 점 등을 꼼꼼하게 지적했다. 『이것을 재검토하는데, 여기 교통 사정도 나쁘니까 공사 중이지만 더 좋은 곳이 있으면 그쪽으로 옮겨서 순서대로 건물을 짓도록 하시오. 특히 이 청소년연수원은 원장 사택과 교관 숙소를 먼저 지어 놓고, 또 그것도 우리가 보통 보는 건물과 달리 사치스러우니 오히려 청소년들을 연수시키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과 주민들로부터 반발을 사지 않겠소?』 대통령의 못마땅한 반응에 수행했던 鄭相千 정무2비서관과 경기지사는 당황해서 다른 설명은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대통령은 다음 시찰지를 포기하고 곧장 청와대로 돌아왔다. 경제정상화 1976년 7월9일(금) 우천 오랫동안 한발이 계속되어 일부 모내기가 늦어지거나 이미 모내기를 마친 논(旣植畓)의 일부가 말라 들어간다고 농민들은 비를 몹시 기다리는 중에 어젯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다. 이 비는 내일도 계속될 듯하다니 이것으로 완전 해갈이 되고, 금년도 풍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석유 파동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던 우리 경제가 금년 봄부터 서서히 회복을 하기 시작, 이제 완전 정상화되고 생산과 유통, 수출, 모든 부분이 급격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수출도 작년 同期(동기) 대비 약 57%의 신장을 하였고 정부 보유 외화도 20억 달러를 초과, 기초 수지 면에서도 흑자를 시현하기 시작했다. 국민이 단합하고 근면하고 노력하면 국력은 매일매일 자라게 마련이다. 근면·자조·협동은 나 자신을 잘 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길이다. 1976년 7월16일(금) 흐림 7월14일부터 16일까지 을지연습을 실시, 오늘밤 22:00을 기해 종료된다. 1968년부터 이 연습을 매년 1회씩 실시하여 금년으로 9회째가 된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연습 내용이 충실화되고 모든 공무원들도 이제는 숙달이 되어 일단 유사시에는 자신 있게 모든 문제를 처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연습의 주된 목적은 戰時에 소요되는 인적·물적 자원 동원 능력을 정확히 판단하여 전쟁 수행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는 데 있다. 종합 강평은 8월 말경에 있을 예정이나 총평해서 이 정도면 북괴 단독 남침이 있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이 섰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보완해야 할 점이 많으나 이 연습을 처음 시작하던 초기 상황에 비교하면 그간 우리의 국력이 크게 증강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9회에 걸친 을지연습을 통해서 우리의 방위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퍽 흐뭇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결코 우리가 만족해서는 안 된다. 계속 부단히 검토하고 보완하고 내실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이 연습은 절대로 중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재혼 안 해요』 7월 말부터 朴대통령은 진해 휴양지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7월 31일, 대통령은 수행 기자단과 비서진 몇 명과 함께 수영을 하고 나서 환담을 나누던 중, 한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큰영애 근혜 양이 얼마 전 텔레비전 방송국에 나와서 나라 사랑하는 길을 말하면서, 「나에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장미꽃이 피어 있는 아담한 집에서 손님들에게 차를 끓여 대접하는 일」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영애의 결혼 문제에 대해 생각하신 바가 있으십니까? 그리고 국민의 더 큰 관심은 송구스러워 묻지 못하겠습니다』 『근혜도 출가할 나이가 되었으니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출가시켜야지. 내 재혼 문제는 생각해 본 일도 없고, 마음도 내키지 않고…』 이 말을 하고 나서 朴대통령은 한참 동안이나 하늘을 쳐다보았다. 『더군다나 애들이 커서 장가도 보내고 출가도 시켜야 하는데, 아직 한 사람도 출가시키지 못했어요. 우선 근혜부터 시집 보내고 다음에 근영이 차례가 되겠지요. 되풀이하지만 내 문제는 뒤로 미루고 애들 문제를 앞세워야 할 것 아니오. 지만이가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니 예비고사를 위해 지금이 황금 시기라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내년에 대학 시험 치를 때 잘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번 여름 휴가에 애들이 따라오지 않은 것도 지만이 시험 공부를 도와주느라 셋이 같이 있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지만이 엄마가 없으니까 나 혼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어. 말이 그렇지 부모로서 자식을 결혼시킨다는 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오. 우선 내 머리에는 애들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되겠다는 생각뿐이오. 나는 재혼 안 해요』 이 말을 할 때 대통령은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였다. 화제는 안보 문제로 넘어갔다. 『국군 지휘권 문제에 대해 내가 한 마디 하지. 지금껏 韓美 양측이 모두 이 문제를 제기해 본 일이 없어요. 그러나 미군 지상군이 現 수준에서 줄어들면 당연히 지휘권 문제는 제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군의 숫자가 적은데, 별만 넷을 달았다는 것만으로 작전권을 장악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내세우고 있는 자주국방에 대해 미국 측은 그 진의를 명백히 아는 것 같지 않아요. 우리의 자주국방 개념은 북괴가 소련이나 중공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남침할 경우에 이를 우리 힘만으로 막자는 것인데, 미국 측은 우리 국군이 여세를 몰아 이북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는 북괴가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고, 만일 침해당했을 경우에는 북괴를 휴전선 이북으로 쫓아버리겠다는 방어 위주의 전쟁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지, 절대 힘이 넘친다고 북괴를 침범할 생각은 없어요. 설령 중국과 소련이 북괴를 지원한다 해도 美 해군과 공군이 우리를 지원하면 별로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공군도 空對空 미사일을 갖게 되었고, 해군도 미사일을 갖고 있으며, 북괴의 잠수함(현재 14척)에 대해서도 이를 즉각 발견할 수 있는 미군의 초계기가 있어요. 또 우리 해군의 주축이 잠수함을 격파하는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敵이 우리를 침범한다고 해도 막아낼 수 있는 자신감이 이젠 생겼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평화로운 가운데 한반도를 통일하자는 것이 지상 목표입니다. 아무리 통일을 하겠다고 하더라도 동포의 피를 보면서까지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15명의 韓美 경비병과 노무자들이 남측 초소의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북한군 장교 박철이 부하들을 데리고 오더니 가지치기를 중단하라고 했다. 미군 장교 아서 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묵살하고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서 1년 기한의 한국근무를 3일 남겨두고 있었다. 박철이 북한병력을 불렀다. 30여 명의 북한군이 트럭을 타고 왔다. 손에는 쇠몽둥이와 도끼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가지치기를 하던 노무자들을 에워쌌다. 박철은 한국군 장교를 통역삼아 미군 장교에게 다시 작업중단을 요구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이를 무시하고 등을 돌리는 순간 박철은 손목시계를 풀어 손수건으로 싼 뒤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죽여!』라고 고함치면서 보니파스 대위의 목을 손으로 쳐 쓰러뜨렸다. 동시에 북한군인들은 韓美 경비병과 노무자들을 덮쳤다. 보니파스 대위는 몽둥이와 도끼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다른 미군 장교 마크 바렛 중위는 사병을 도우려다가 맞아죽었다. 미군 기동타격대가 도착했을 때는 북한군이 분계선을 넘어가 정렬을 끝낸 뒤였다. 이 뉴스가 워싱턴으로 전해졌을 때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캔자스시티에서 대통령 후보를 뽑는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으로부터 공산당에 대해 너무 무르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대통령이 부재 중인 관계로 키신저 국무장관이 백악관 지하 상황실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미국 CIA 요원은 이런 요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돈 오버도퍼 著 「두 개의 코리아」). <우발적인 사고는 아닐 것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기간에 주한미군에 대한 반대 여론을 조장하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합참을 대표해서 나온 해군참모총장 제임스 I. 할러웨이 제독은 『북한이 남침에 성공하려면 기습을 해야 하는데 이미 우리가 만반의 경계태세에 돌입한 이상 북한의 대규모 군사공격은 없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이 회의에서 키신저 장관은 포드 대통령과 통화한 뒤 『북한놈들이 이번에는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리처드 스틸웰 駐韓 유엔군사령관은 회의 전에 합참으로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어 버리자는 보복案을 냈으나 키신저는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태도였다. 한반도에 병력집중 긴급대책회의는 구체적인 보복방안을 결정하지 않고 먼저 한국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기로 했다. 오키나와 기지로부터 팬텀 편대를 한국으로 이동시키고, 아이다호州에 있던 F-111 전폭기를 한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괌에 있는 B-52 전략폭격기를 휴전선 상공까지 보내 폭탄투하 연습을 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에 있던 미드웨이 항공모함 전대를 대한해협으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소련과 중국을 의식하지 않고 상당히 강경한 보복안들을 쏟아 냈다. 「도끼만행」이 감정적 반응을 부른 점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 선박 나포에 이어 북한 해안선 인근 해역에 核폭탄을 터트리자는 案도 나왔다. 북한 측 휴전선의 동쪽 끝 부분을 폭격하자는 발상도 있었다. 美 합참은 미루나무를 베어 버린 뒤 초정밀 유도병기나 地對地 미사일로 북한의 전략적 기간시설을 파괴하는 응징案도 냈다. 키신저도 미루나무만 자르는 행위는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온건론으로 귀착되었다. 美 국방부와 해군 측에서는 『강경한 조치가 또 하나의 한국전쟁을 부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포드 대통령도 「한반도에서 지나친 무력과시는 자칫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 적정한 수준의 병력 사용으로 미국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북한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의 심각성에 놀라 먼저 전투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평양에선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요인들은 지하 방공호로 들어갔다. 全전선에서 북한군은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도 경계태세를 데프콘(Defcon) 3으로 높이고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유엔군 측은 즉각 군사정전회의를 열자고 제의했다. 북한은 즉시 이에 응했다. 이것을 본 스틸웰 사령관은 『판문점 사건이 북한 측의 우발적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날 朴대통령은 평상시처럼 집무했다. 오전에는 朴東鎭 외무장관의 보고를 받았고, 오후엔 金龍煥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부가가치세제 도입에 관련한 보고가 있었다. 오후 4시20분부터 1시간30분간 朴대통령은 부가가치세제 도입에 대해 소극적이던 南悳祐 부총리를 불러 이 문제를 의논했다. 워싱턴에서는 이 시간 긴박한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戰時는 물론이고 平時 작전통제권도 갖지 못한 朴대통령으로선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을 응징책으로 제안했던 리처드 스틸웰 유엔군사령관. |
이날 밤 朴대통령은 이런 일기를 남겼다. <오전 10시30분경 판문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인 유엔군 장병 11명이 곤봉·갈고리 등 흉기를 든 30여 명의 북괴군의 도전으로 패싸움이 벌어져서 유엔군 장교(미군) 2명이 사망하고, 한국군 장교 1명과 병사 4명이, 미군 병사 4명, 계 9명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전쟁 미치광이 金日成 도당들의 이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목하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개최 중인 비동맹회의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정치 선전에 광분하고 있는 북괴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하나의 계획적인 만행이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의 이 만행을 언제까지 참아야 할 것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이들의 이 만행을 언젠가는 고쳐 주기 위한 철퇴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저 미련하고도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사건 다음날인 8월19일 오전(9시50분부터 45분간) 청와대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徐鐘喆 국방장관, 盧載鉉 합참의장, 스틸웰 유엔군사령관, 金正濂 비서실장, 崔侊洙 의전수석은 통역으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朴대통령은 대화 내내 차분하고 사려 깊었으며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고 스틸웰은 워싱턴에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 합참본부장으로서 스틸웰과 함께 對北 응징책을 계획했던 柳炳賢 중장. |
<북한 측에 사과 배상 재발방지 등 최대한으로 강력한 항의를 전달해야 하겠지만 나 자신도 이것이 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북한에 교훈을 주기 위해 적절한 군사적 대응조치를 하되 화력을 사용하는 것에는 반대이다> 그 다음날(8월20일)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은 청와대로 와서 오전 11시부터 45분간 朴대통령에게 워싱턴에서 결정된 보복계획을 보고했다. 『미군이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가서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 버린다. 만약 이때 북한군이 대응공격을 한다면 우리도 즉각 무력으로 대응하여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이 진격하여 수도에 대한 서부전선의 근접성을 해결한다』고 스틸웰 사령관이 보고했다고 한다(배석했던 金正濂 비서실장 증언). 「두 개의 코리아」를 쓴 돈 오버도퍼가 美 국방부 문서를 인용한 내용은 좀더 구체적이다. 미국 정부가 스틸웰 사령관에게 승인한 보복계획은 「북한군이 소총으로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방해할 경우에는 작업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박격포와 대포를 쏜다. 북한군이 (분계선을 넘는) 지상공격을 해올 경우엔 대기 중인 지원부대가 인근의 북한군 목표물에 대한 집중포격을 개시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후자의 경우는 제2의 한국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뜻했다. 이런 경우에는 유엔군과 한국군이 개성과 연백평야까지 진출하되 더 북쪽으로는 전선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 같다. 스틸웰 유엔사령관의 보고를 들은 朴正熙 대통령은 『군사작전은 미루나무 절단에 한정하고 북한이 확전할 때만 우리도 확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 한국은 중화학공업 건설이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평화만 깨지지 않는다면 체제경쟁에서 金日成에게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도끼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그런 평화가 중단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이해 1월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 년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엔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이날 朴대통령은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에게 주문을 하나 했다. 『공동경비구역이 미군 관할이라고 해서 우리가 가만 있을 수 없다. 미군 지휘관을 제외하고 절단작업, 경호, 근접지원 등 제1선 임무는 한국군이 맡고 미군은 제2선을 맡도록 했으면 한다』(金正濂 비서실장 증언)
| 서울 방문 때의 포드 대통령. 그는 도끼만행 사건에 따른 對北 보복작전을 제지했다. |
수류탄을 가슴에 숨기고 들어가다 1976년 8월21일 오전 4시쯤 美 2사단內 RC4 체육관. 한국 공수부대원으로 구성된 특공대원 64명이 출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朴熙道 여단장은 특공대 장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일단 교전이 붙으면 누가 먼저 발포했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 교전 결과가 중요하다. 일단 우리 편의 피해가 없어야 한다. 敵의 공격이 예상되면 그 즉시 선제 기습이 이뤄지도록 특공대장 이하 간부들이 즉각 조치하라. 내가 현장에서 직접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특공대장의 판단하에 움직여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朴熙道 여단장은 무기를 숨겨 가라고 지시했다. 방탄조끼를 입고 계급이 없는 철모를 쓴 특공대원들은 몽둥이(곡괭이 자루)만을 든 채 트럭 3대에 나눠 탔다. 방탄조끼 안에는 권총과 수류탄이 숨겨져 있었다. 이러한 무장은 공동경비구역內의 규정과 스틸웰 사령관의 「비무장 지시」와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한국 특공대 병력이 공동경비구역으로 가는 전진 기지인 키티호크 캠프(注: 이 캠프는 후에 8·18 도끼만행 사건으로 사망한 미군 대위의 이름을 따 「보니파스 캠프」로 바뀌었다)에 도착한 것은 잠시 후였다. 이날 오전 7시 韓美호송 차량 23대가 북한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미군 공병대원 16명은 전기톱과 도끼로 미루나무를 베어 내기 시작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 북한이 멋대로 설치한 두 개의 바리케이드도 철거했다. 한국군 특공대가 이 작업을 엄호했다. 하늘에는 미군 보병이 탄 20대의 汎用헬기와 7대의 코브라 공격용 헬기가 굉음을 내면서 선회 중이었다. 상공에서는 B-52 전폭기 편대가 韓美 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선회하고 있었다. 오산에는 중무장한 F-111 편대가 대기 중이었다. 해상엔 미드웨이 항공모함 전대, 판문점 가까운 전선에는 韓美 보병, 포병이 방아쇠를 만지고 있었다. 미루나무 절단작업이 시작된 직후 유엔군 측은 당직 장교를 통해 북한 측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유엔사 작업반은 8월21일 JSA(공동경비구역) 안에 들어간다. 그것은 지난 8월18일 당신네 경비병들의 도발로 마무리짓지 못한 작업을 평화적으로 완료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측 작업반은 유엔司 초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나무를 베어 낼 것이다. 작업반은 임무가 끝나는 대로 JSA에서 철수할 것이다. 이 작업반이 아무런 도발을 받지 않는 한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 키신저 국무장관은『이번에는 북한이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했으나 제2의 한국戰을 걱정해야 했다. |
金正濂 비서실장과 崔侊洙 의전수석은 이미 오전 6시에 청와대로 출근하여 유엔군 사령부 지하 벙커에 있는 柳炳賢 합참본부장과 전화 통화를 한 뒤 비서실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부와 연결돼 있는 핫라인을 통해 작전 진행 상황을 파악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절단 작전이 시작되었을 즈음 朴正熙 대통령은 본관 2층 거실에서 아래층 집무실로 내려왔다. 金正濂 실장과 崔侊洙 수석은 유엔군 사령부에서 보고가 들어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첫 번째 보고는 「지금 작업반이 들어가 미루나무를 베고 있다」였다. 崔侊洙 수석이 집무실로 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내용을 보고했다. 崔수석은 작전이 끝난 오전 7시55분까지 두 번 더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전 7시22분쯤 「敵 200여 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방향으로 오고 있다」라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敵이 다리를 넘어오지는 않고 사진만 찍고 돌아갔다」라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였다. 이날 전방의 북한군 부대 통신을 감청한 미군은 『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고 평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쪽에서 북한군은 미루나무가 작전 개시 42분 만에 잘려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20분 후 북한 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 한주경 소장이 金日成의 친서를 전달하고자 미국 측 수석대표에게 비밀면담을 요청했다. 金日成이 유엔군 사령부에 편지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내용은 「유감표명」이었다. 미국 측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였다. 절단 작전이 끝난 뒤 金正濂 실장은 최종 보고를 하러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朴正熙 대통령은 서류를 보면서 보고를 다 듣고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래, 끝났다고, 알았어』라고 말했다. 얼마가 지난 뒤 金正濂 실장은 朴正熙 대통령의 인터폰을 받았다. 朴대통령은 『金실장이 국방장관, 합참의장, 참모총장, 그리고 스틸웰 사령관에게 애썼다는 말을 전해 줘』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폭격·봉쇄 등 강경한 보복조치를 생각했다가 온건한 대응으로 물러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북한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1967년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號 납치, 1969년의 미국 전자첩보기 격추 때도 미국은 무력시위에 그쳤다. 북한이 一戰不辭(일전불사)의 자세를 취하니까 미국으로서도 제2의 한국전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강경대응이 어려웠던 것이다. 6·25 전쟁에서 미군이 뼈저리게 느낀 교훈이 하나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군과 절대로 육상전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도끼만행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韓美공동작전을 위한 지휘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때부터 韓美연합사 설치를 위한 협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내가 제일 존경했던 相熙 형님』 1976년 9월7일 오후 3시20분쯤 대변인실을 통해 朴대통령이 직접 鮮于煉 공보비서관을 찾았다. 그는 아침에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나왔기에 당황하더니 金永斗 행정관의 흰 와이셔츠를 빌려 갈아입고 서둘러 본관으로 달려갔다. 안경을 쓰고 책상에서 서류를 읽고 있던 朴대통령은 반가이 그를 맞았다. 朴대통령은 회의용 테이블 쪽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고생 많은 줄 내가 알고 있어. 추석은 지내야지』라는 말과 함께 봉투를 주었다. 朴대통령은 모교인 구미국민학교에 과학실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鮮于씨에게 계획을 추진하라고 얼마 전에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올린 과학실 건립 계획서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朴대통령은 보고서를 일일이 체크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이 계획서 가지고는 충분치 않아. 좀더 면밀한 계획을 세워서 모범이 되는 과학실을 만들어 주도록 하게』 『그러시다면 서울의 성동工高가 우수한 공업고등학교인 만큼 그곳 기술 담당 교사와 협의하여 再검토한 후 빈틈없이 짜도록 하겠습니다』 『성동工高도 좋지…. 그보다 정수직업훈련원 사람들을 불러서 물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 다음 필요한 기계와 부속품은 서울에서 충분히 사서 운반하여 설치해 주고, 李聖祚 교육감과도 의논해서 모범적인 교습장을 만들도록 모든 책임을 지고 완성하도록 해. 현지에 있는 금호工高에서 기술 지원을 받도록 하고. 이왕 구미에 내려가거든 우리 선영을 좀 돌보고 오게. 산 중턱까지 지하수가 많아 지표에 물이 스며 나오는 것이 확인되거든, 땅 밑에 토관을 두 개 정도 묻어서 배수로를 만들면 선영에 물이 배지 않을 거야』 朴대통령은 일일이 지도를 그리면서 설명해 주었다. 朴대통령은 相熙형 묘소로 가는 길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묘소 앞까지 차 진입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래? 누가 했지』 『외아들 준홍씨가 했습니다』 『다음에 고향에 내려가면 한번 들러봐야지. 내가 제일 존경하는 형님이었는데, 그간 차가 들어가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제는 직접 가볼 수 있게 됐구먼』 대통령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구미국민학교 사진 몇 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전에는 이 자리에 보잘것없는 校舍(교사)만 있었는데, 이제는 강당도 세웠구먼. 애들 옷 좀 봐. 내가 다닐 때는 후줄근한 한복들만 입었었는데, 지금은 옷들도 잘 입고 있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여기 좀 봐. 이 사진에서 내가 세어 봐도 선생님들이 36명이나 되지 않아. 참 훌륭하게 발전했구먼』 『제가 알아본 바로는 교사가 47명에 학생은 2700명이었습니다』 『내가 다닐 때는 男선생님 다섯인가 여섯 분에 女선생님은 두 분밖에 안 계셨고, 학급도 한 학년에 하나뿐이었어』 『각하가 최고회의 의장 당시에 구미 상공을 지나면서 쓰신 편지를 보통학교 동창인 당시 면장이 갖고 계시더군요』 『張月相이 말이지, 허허허. 그 친구 큰소리 잘 치지. 참, 그리고 李聖祚 교육감은 내 대구사범 동기생이야』 『난 언제나 가짜 생일 쇠고 있어』 대통령의 얘기는 자신의 생일로 옮아갔다. 대통령의 생일은 그때까지 9월30일로 알려져 있었다. 해마다 이날 대통령은 인사도 받고 선물도 받으면서 그때마다 쑥스러워했다. 『난 언제나 가짜 생일을 쇠고 있어. 일생 동안 진짜 생일을 지내 본 적이 없어. 아버님이 출생 신고를 하실 때 음력 생일을 그대로 적었거든』 鮮于비서관이 말을 꺼냈다. 『2년 전에 각하 생일을 알아보니 양력으로 11월14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발표할 기회를 기다리다가 이번부터는 각하께 욕먹을 각오하고 발표했습니다』 『그래? 사실 내 생일이 정확하지 않았어. 양력 9월30일이면 외국 원수들에게서 축전이 오는데, 그게 거북하단 말이야. 그렇다고 이제 새삼스럽게 모든 나라에 경위를 정식으로 통보하기도 멋쩍고…』 『지시하실 필요 없습니다. 신문에 발표된 것을 보고 외무장관이 알아서 在外공관장들을 통해 조치를 하여 해결할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니 崔侊洙 의전수석을 불렀다. 『생일 바꾸는 문제 말인데 鮮于는 국내를 맡고, 崔비서관은 국외를 담당하되, 공문이나 공식통지는 하지 말도록 해요. 자연스럽게 해 나가도록 하고, 외국에 대해서는 崔비서관이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지나가는 말로 슬쩍 말하라고. 절대 법석 떨지 말고 해야 돼』 朴대통령은 시종 웃는 얼굴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모교의 과학실 건립에 잔신경을 많이 썼던 朴대통령은 陸英修 여사 추모사업회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은 중지시켰다. 이유는 『아직 우리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고 독립운동기념관과 6·25 전쟁기념관도 없는데 비록 국가예산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지을 시기는 아니다』였다. 『퍼스트 레이디로 대접해야』 1976년 9월20일 오후 1시경 朴대통령이 갑자기 鮮于煉 공보비서관을 불렀다. 朴대통령은 鮮于비서관이 짠 구미국민학교 과학실 계획 내용을 그대로 승인하고, 따로 실습용 재료비로 50만원을 더 주었다. 鮮于비서관은 보고를 마친 후 내려가려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대화 상대를 찾는 기분으로 『거기 좀 앉아 봐요. 대통령이 그렇게 무섭습니까』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그 며칠 동안 감기에 걸렸었는데, 몇 가지 우스갯소리를 했다. 『감기에 걸리면 꼭 목감기란 말이야. 바깥 공기가 코를 통해 목으로 들어갈 때 코 속에서 한 번 더 걸러 줘야 하는데, 그대로 직행하니까 목이 상하는 모양이야. 몇 년 전 왼쪽 코 속에 조그만 살점 같은 것이 하나 생겨서 그것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그런지 바람이 그냥 들어가는 것 같아』 朴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면서 코 얘기를 계속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 담당 의사도 조금 많이 잘랐다고 하더구먼. 적당히 자를 일이지, 허허』 朴대통령은 큰딸 근혜양의 儀典(의전)에 대해서 몇 가지 불만을 털어놓았다. 『우리 근혜가 아무리 어려도 퍼스트 레이디인데, 그에 맞는 접대가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부인들은 어떤 한계를 잘 모르는 것 같지?』 朴대통령은 8월26일 오후 경복궁內 경회루에서 있었던 행사에 참석한 근혜 양의 얘기를 소상하게 설명하면서 불경스런 행동을 저지른 몇 사람을 거명했다. 『우리 부인단체 간부들과 세계 여성단체 지도자들 모임에 근혜가 그날 참석했었는데, 행사장 저 끝에 있던 李○○ 여사가 사람들을 비집고 근혜에게 다가와서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내가 이○○이야!」 하더라는 거야. 임자도 잘 알겠지만 신민당의 金○○ 의원은 말이야. 근혜를 보더니 아무런 공식 인사도 없이 곧장 반말로 「어머니도 없는데 고생이 많지」라고 했다는 거야. 그날 근혜가 돌아와서 몹시 불쾌했다고 하면서 울더군. 뭔가 잘못된 것 아니오?』 『그 사람들이 의전을 몰라서 그랬을 것입니다. 수행한 사람들이 적절한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 그게 옳은 말이야』 『누가 따라가서 예의를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멀리하게 하고, 예의 바른 사람을 가까이 하게 하는 등 뭔가 조치가 있어야 될 것 같아. 그것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점진적으로 조용히 할 필요가 있지』 『앞으로 더욱 신경을 쓰겠습니다』 朴대통령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鮮于비서관에게 지시를 했다 『그 일을 임자가 맡아서 하도록 하시오. 청와대 내에서도 소문나지 않도록 주의하게』 朴대통령은 몇 번이고 입조심할 것을 강조했다. 1976년 9월26일 秋夕有感(추석유감) 팔월 한가위 해가 뜨고 달이 지고 지구가 돌고 돌면 해마다 가을이면 이날이 오건만은 올해는 보기 드문 풍년 중에도 대풍년 농민들의 흘린 땀이 방울방울 결실했네 높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들과 산에 단풍이 물들어 가는데 오곡이 풍성하고 백과가 익어 가니 나라는 기름지고 백성은 살쪄 가니 이 어찌 天佑와 조상의 보살핌이 아니랴 국화의 향기 드높은 중천에 팔월 대보름 둥근달 높이 떠서 온누리를 비치니 격앙가도 높더라 이 강산 방방곡곡에 풍년이 왔네 이 강산 좋을시고 풍년이 왔네 1976년 9월30일 지만이가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하기 위하여 오늘 입학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어제 저녁에 원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지만이가 벌써 육사를 지원할 만큼 컸구나 생각하니 세월이 퍽 빠른 것만 같이 느껴진다. 「저희 어머니가 살아 있더라면 얼마나 대견해 할까」하고 아내를 생각한다. 一葉知秋 1976년 10월1일(일) 一葉知秋(일엽지추). 뒤뜰에서 한잎 두잎의 낙엽이 소리 없이 잔디 위에 떨어지고 있다. 청초한 국화들의 그윽한 향기와 맑고 높은 하늘은 가을이 한창이라는 소식을 소슬바람에 실어서 창가에다 전하고 간다. 오곡이 영글어 가고 백과가 익어 가니 모든 것이 풍성하고 가난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는 것만 같다. 옛말에도 秋收冬藏(추수동장)이라고 하였으니 가을에 거두어 들여 차곡차곡 저장을 해두고 추운 겨울에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족끼리 모여 앉아 밤이 늦도록 옛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정경이 아득히 뇌리에 떠오른다. 가을은 역시 지나간 봄과 여름을 뒤돌아보게 되는, 추억과 사색에 잠기게 되는 계절인가 보다. 1976년 10월17일(일) 흐림 10월유신 4주년이 된다. 유신 4년 동안에 우리나라는 과거 10년 내지 20년 정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국력이 그만큼 커졌다. 정부와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그동안 1973년 말부터는 유류 파동으로 시작된 국제 경제의 일대 불황이 있었다. 1975년 초에는 인도지나 반도의 비극이 있었다. 북괴의 남침 땅굴 발견도 이 기간 중에 있었다. 8·18 판문점 만행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꾸준히 국력을 신장시켜 왔고, 주변 정세의 격변과 북한 침략 집단의 집요한 도발과 위협에 미동도 하지 않고 우리의 안보 태세를 훨씬 더 튼튼하게 다져 놓았다. 우리의 방위 산업도 괄목할 만큼 발전 성장하였다. 우리의 경제 발전은 국제 사회에서 경이의 대상이 되고 개발도상국 중의 모범 국가로서 선전이 되고 있다. 그 원인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대 자각과 단결과 땀 흘려 일한 노력의 代價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이 건설의, 성장의 결과는 값진 것이고 보람 있는 것이다. 하늘은 한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개척하겠다는 결의와 노력을 경주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응분한 보상을 준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농촌 사회에서 5천년의 유산인 가난이 하나하나 벗겨져 나가고 새로운 생기 약동하는 농촌모습으로 달라져 가는 것은 새마을 운동의 성과다. 농민들의 의지와 의욕과 노력의 代價가 농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0월유신은 救國의 결단이었다. 우리 국민 전체의 결단이었다. 새 역사의 출범이었다. 근면·자조·협동하는 데에서 새 역사가 하루하루 창조되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단해서는 안 된다. 계속해야 한다. 밝은 내일은 반드시 도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金泳三이는 보기보다 얌전해』
| 1976년 3·1 민주선언으로 金大中씨는 징역 5년刑을 선고받았고, 가족·측근들은 항의 침묵시위를 했다. |
1976년 9월 하순 鮮于煉 비서관이 결재를 받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로 갔다가 짧은 대화가 있었다. 『로비 안 하는 국가가 있나. 송미령씨도 中日전쟁 때 미국을 돌면서 연설도 하고, 돈도 거두고 다니지 않았소. 미국에게 물어보시오, 자기들은 로비 안 하는가. 우리가 로비를 한 것도 철군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 다른 게 있나. 이런 걸로 한국을 이렇게 괴롭힐 수 있어? 내가 존슨 대통령을 만났을 때 6·25 때 도와준 것이 고마워서 즉각 월남 파병을 승낙했는데, 미국이 이렇게 할 수 있냐 말이오. 김형욱이 지금 미국에서 범법을 하고 있잖소. 정보부장으로서 대통령과 한 얘기는 평생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이오. 그럼 미국 정보부장은 그렇게 배신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는 화제를 바꾸어 야당 인사들에 대한 평을 했다. 9월15일에 있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온건한 李哲承씨가 강경한 金泳三씨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당선된 뒤였다. 『야당에 똑바른 정치가가 있다면 아마 유진산하고 李哲承이야. 신민당이 저렇게 됐으니 다행이야. 李哲承씨가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는데 잘해 나갈지…. 金大中과 金泳三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데, 李哲承은 그래도 자기 분수를 아는 것 같아. 그래도 문제는 말이야, 모든 일이 최고위원 회의에서 합의를 보아야 된다는 것 같던데, 李哲承씨가 어떻게 당을 끌고 나갈 것인지. 아무튼 고생이 많을 거야. 鮮于비서관은 어떻게 생각해요?』 『광복 후 학생연맹 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데, 비교적 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자신의 中道統合論(중도통합론)을 실천하려 할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이 괜찮아요. 꿋꿋한 정치를 할 것 같은 인상이더구먼. 얼마 전에 만났던 金泳三씨는 보기보다는 얌전한 것 같던데.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는 것이 그의 태도와 언어에서 비치더군. 그런 사람이 과격한 행동은 안 하겠지?』 金大中과 金泳三의 無力化 이해 3월1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3·1 민주선언」 집회에 참여했다고 하여 金大中씨는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金泳三 신민당 총재도 기자회견에서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요구했다고 하여 불구속 기소된 상태였다. 金씨는 이렇게 썼다(「김영삼 회고록」 2권). <내 주위의 당직자들은 모두 朴正熙와 중앙정보부의 위협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정보부의 국장 한 사람이라도 만날라치면 대단한 벼슬이라도 한 듯 자랑삼아 떠들기도 했다. 야당의 전당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전국 각지 경찰서의 정보과장들이 총동원되었다> 1976년 5월25일의 신민당 전당대회는 「각목대회」라는 별명이 붙었다. 전당대회장에서 폭력이 춤을 추고 당은 쪼개지는 듯했다. 金泳三 총재는 정보부의 지원을 받은 불량배들이 자신의 再당선을 저지했다고 생각했다. 중앙선관委도 金총재의 총재임기는 소멸되었으므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신민당은 넉 달간 분당 상태였다. 9월15~16일의 수습전당대회에서 金泳三은 총재경선 1차 투표에선 1위였으나 과반수 표를 얻지 못했다. 2차 투표에서 鄭一亨 후보가 李哲承 후보를 미는 바람에 25표 차이로 李씨가 당선되었다. 李씨는 국방과 외교 분야에선 정권에 협력한다는 방침을 밀고나갔다. 朴대통령은 두 政敵이 무력화되고 협조적인 사람이 야당을 이끌게 됨으로써 속이 편했겠지만 兩金氏가 3년 뒤 손을 잡고 反정부 선명투쟁의 기치를 내걸 때 그 代價를 치르게 된다. 청와대 망년회의 합창 1976년 12월30일. 청와대에서 망년회가 있었다. 오후 6시에 대통령은 1급 이상 비서관들과 특보들을 불러 소접견실에서 칵테일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한 비서관이 朴대통령이 지은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를 테이프에 담아 가지고 행사장으로 올라갔다. 朴대통령이 행사장에 들어선 순간, 누군가가 즉각 그 테이프를 틀었다. 좁은 접견실에 난데없는 합창단의 노랫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朴대통령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아! 그것 참 듣기 좋군』 하면서 흡족해했다. 朴대통령이 소리 내어 그 노래를 끝까지 따라 부르자, 참석자들 모두가 합창을 하게 되었다. 칵테일 파티가 끝나고 식당에서 서양요리를 먹는데, 金東祚 특보가 샴페인이 든 컵을 들어 보이며 『각하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하며 건배를 제의했다. 그때 鮮于비서관은 『축배 내용을 바꾸자』고 했다. 깜짝 놀란 참석자들이 그를 주시하는 가운데 이런 설명이 나왔다. 『각하께서는 애초부터 장수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시조인 혁거세로부터 59代 손이며, 中興(중흥)의 조상인 숙동공으로부터 29代인데 家系가 모두 장수하셨습니다. 역사 이래로 우리 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추정하면 18.5세인 데 비해, 혁거세로부터 각하에 이르기까지 각하 집안의 평균 수명은 25세입니다』 『저 친구가 나보다 우리 집 족보를 더 잘 알아. 잡아다가 조사를 해봐야겠어』 朴대통령의 이 말에 일제히 폭소가 터져 나왔다. 행사는 저녁 8시40분경에 끝났다. 농촌을 바꾼 시멘트와 철골
| 신민당은「각목대회」라는 별명이 붙은 1976년 5월25일 전당대회 이후 넉 달 동안 사실상 분당상태에 빠져들었다. |
유신시대에 한국인의 삶을 바꿔 놓은 3大 사업은 중화학공업 건설, 새마을 운동, 中東건설 시장 진출이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朴대통령과 吳源哲 경제2수석 비서관이 주도했고, 中東건설은 기업이, 새마을 운동은 농민지도자들이 주도했다. 새마을 운동은 공업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던 농촌을 바꾸어놓았다. 그 힘은 새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였다. 우리 민족사상 농민이 수동적 백성의식을 떨쳐 버리고 역사 창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백성을 국민으로 만든 셈이다. 농촌을 바꾸는 데 기폭제가 된 것은 정부가 새마을 사업을 위해서 전국 농촌마을에 나눠 준 시멘트와 철골이었다. 1971~1978년간 지원된 시멘트는 마을당 2100포대(약 84t)이었고 철골은 마을당 2.6t이었다. 1974년 時價로 환산하면 연간 250만원이다. 그 뒤의 정권이 했던 식으로 정부가 이런 지원을 개별 농가 앞으로 했더라면 국민정신 개혁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지원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협동체제를 만들어 공동작업으로써 농로·하천둑·마을회관 등 마을의 공동재산을 건설하고 개선하는 일에 나섰다. 청와대 새마을 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朴振煥 박사에 따르면 새마을 운동 성공사례를 동남아 국가 지도자들에게 강의했더니 『물자지원에 따른 부정에는 어떻게 대처했나』라고 묻더라고 한다. 『시멘트와 철골은 부피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훔치기 어렵다. 전국적으로 마을마다 같은 양이 지급되었고, 이것을 마을 주민들이 잘 알고 부정을 감시하는 인원이 너무 많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1970년대에 시멘트와 철골은 국내에서 생산되었으므로 이런 지원이 가능했다. 마을 길이 넓어지고 문명이 들어오다 시멘트와 철골은 주로 농촌마을의 길과 둑을 정비하는 데 쓰였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 주는 길을 넓히거나 포장하고 꼬불꼬불한 마을안길을 바로 하고 넓혔다. 동력 경운기가 보급되기 시작했으므로 이런 길 정비는 농촌의 생산성 향상과 직결되었다. 1971년부터 8년간 넓혀지고 바로 된 마을 진입로와 마을안길이 전국적으로 8만5851km였다. 마을당 2601m다. 길을 넓히자니 작은 하천에 놓인 징검다리나 통나무 다리도 콘크리트 교량으로 바꿔야 했다. 1971년부터 5년간 새마을사업으로 건설한 이런 작은 다리들이 전국에 6만5000개, 마을당 두 개였다. 마을주민들 중에는 軍복무 중 다리를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제대장병들이 많아 이들의 지휘下에 공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홍수 때 잘 무너지던 하천의 둑도 보강되거나 물이 잘 흐르도록 직선으로 바꾸어 주었다. 마을안길을 직선화하고 넓히는 과정에서 흙·돌·나뭇가지로 된 담을 헐고 시멘트 담을 쌓는 일이 이어졌다. 길가에 돌출한 農家도 헐어야 했으나 정부가 보상해 주지 않고 마을사람들이 기금을 모아 보상했다. 이렇게 하여 마을안길과 농가 마당까지 자동차와 동력 경운기가 다니게 되니 농업의 기계화가 확산되었다. 1970년엔 두세 마을당 한 대 정도이던 경운기가 1975년에는 마을당 2~3대로 늘어나고, 1980년대엔 마을당 20대로 急增(급증)한다. 이런 농촌개조사업을 정부가 보상해 주면서 주도했더라면 엄청난 재정지출이 따랐을 것이다. 1970년대에 토지소유자가 새마을사업을 위해 자기 땅을 내어놓은 것이 마을당 1700평이었다. 이런 利他的인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마을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일처럼 마을의 공동이익사업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마을의 간접자본을 축적해 간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새마을지도자의 양성과 교육에 운동의 成敗가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의 里長 외에 마을마다 새마을지도자를 두 명씩 추대하되 보수를 주지 않도록 했다. 보수를 받지 않는 지도자라야 좋은 사람이 추대되고 마을사람들도 잘 따라 준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1971년부터 8년간 새마을사업을 위해 투입된 마을주민들의 無보수 노동일수는 매년 평균 8일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마을 일을 놓고 회의를 하는 마을회관도 마을마다 서게 되었다. 주로 밤에 마을사람들이 회관에 모여 전등불 아래서 길을 닦고 다리를 놓으며 둑을 쌓는 일을 의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에 원자력 발전이 시작되면서 농촌 電化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마을 속으로 전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이 마을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이 전국 농촌의 풍경이 되었다. 한국의 농민들은 민주주의를 책에서 배우기보다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더욱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기 위한 自助사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배우게 되었다(朴振煥이 쓴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 경제근대화의 새마을운동」).
| 朴대통령의 새마을 운동 현장 시찰. 시멘트와 철골이 농촌을 바꾸었다. |
풀뿌리 민주주의를 이끈 여성지도자들 이런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에서 여성들의 발언권과 참여가 높아졌다. 농촌근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 여성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성들이 새마을 운동 지도자로 등장하는 곳이 점점 많아졌다. 1960년대부터 女工들이 섬유·신발 공업 쪽으로 진출하더니 1970년대엔 드디어 농촌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커졌다. 새마을 운동은 여성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1970년대에 양성된 농촌의 지도자群은 그 뒤 농협과 지방자치단체의 간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볏짚으로 이어진 초가지붕은 해마다 갈아입혀야 했다. 겨울철이 되면 이 일이 아주 큰 행사였다. 1970년에 전국 250만 농가의 약 80%가 초가집이었다. 마을안길을 정비하여 농가 마당까지 화물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게 되니 시멘트 기와 슬레이트로 草家지붕을 바꾸는 농가들이 늘기 시작했다. 당시 草家지붕을 갈아입히는 작업을 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 늘어 가고 있었다. 농촌지붕개량사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草家지붕들이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의 성과를 가장 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야였다. 농촌 아궁이도 19공탄용으로 개량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 산에서 땔감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朴대통령의 강력한 入山금지 조치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도시에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가정용 연료가 가스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에 19공탄 수요가 줄어 농가로 퍼져 갔다. 1970년대 후반에 가면 농촌에서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가는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또 다른 가시적 변화였다. 우물에 의존하던 농민생활도 개혁되었다.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간이상수도 공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계곡의 맑은 물을 저수탱크로 끌어왔다가 파이프로 이 물을 개별 농가에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비위생적인 食水로 인해 발생하던 전염병이 많이 줄어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늘었다. 朴대통령은 이 무렵 월간경제동향보고회 직후의 새마을 운동 성공사례 발표 때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농촌에서 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농민들은 어디에 있는 어떤 병원으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朴대통령은 읍면단위로 보건진료소를 만들고 여기에 의과대학을 졸업한 견습의사와 간호원 한 사람씩을 배치하도록 했다. 1964년 우리나라 농민들 가운데 전등불 아래 살았던 사람들은 약12%였다. 새마을 운동의 하나로 農村電化사업이 확산되면서 1977년 농민들의 98%가 전등불 아래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를 끌어오는 데 드는 비용의 약 80%는 장기저리의 융자금으로 충당토록 했다. [여성 새마을지도자 手記] 전북 순창군 여성 새마을지도자 서죽자씨 手記에서 일부를 뽑았다. <우리는 다시 10월22일 그 숙원사업 중의 하나인 양수장 기공식을 갖고 남녀 노소 없이 全부락민이 총동원되어 산을 끊고 도수로를 내고 양수장을 설치하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그 엄청난 산허리를 불과 5일 만에 끊고 도수로를 내게 되었습니다. 너나없이 이 엄청난, 상상조차 못 할 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양수장 설치작업을 계속하면서도 주민들에게 천추의 숙원인 섬진강 대교 건설을 한번 해보자고 계속 설득전을 벌였습니다만 총회를 할 때마다 「하기는 해야 하지만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한 길이 넘는 수심, 수천년 동안 못 놓던 다리, 역대 국회의원들이 선거 때마다 내놓은 공약은 거짓으로 끝나 버렸던 다리, 저곳에 다리만 놓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꾸만 마음의 집념은 이 다리로 쏠리게 되고 더구나 3개 마을 회원들은 모두가 저도 모르게 한마음에 도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숙원」 이렇게 표현하기는 너무나 약합니다. 퇴비 한 짐을 지고 나루터에 서 있다가 저 나룻배가 이쪽으로 닿으면 배에 올라 논밭에 놓고 오고 홍수가 지면 건너가지 못해 그렇게 애타게 길러왔던 누에를 굶겨 버렸던 5년 전의 쓰라림. 강 건너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안부만 확인하고 애태우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인 귀여운 자식들. 학교에 가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어린 자식들, 야속하게도 남자들은 하지도 못할 일을 여자들이 무얼 안다고 떠드느냐고까지 했습니다. 나는 부녀회원 3개 마을 총회에서 역설했습니다. 우리 몸이 저 물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완전한 다리가 놓여질 수 있다면 기꺼이 자식들을 위하여 나는 물 속에서 다리발이 되어 주겠다고 말입니다.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남편들의 설득 공작에 돌입하여 그해 겨울 내내 양수장 작업장에서, 밥상머리에서, 심지어 아이들의 호응까지 받으며 남자들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교각 두 개 세운 날의 감동 1974년 1월20일 섬진강 연합 새마을교 가설공사 추진위원 30명을 선출하고, 본 사업의 착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추진위원 30명이 분담하여 1년 동안의 배삯을 사전에 미리 받고, 희사를 받아 준비 작업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부녀회에서도 똑같이 이 사업에 호응하게 되니, 저마다 무리를 해서 내놓았는데 180만원의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2800만원이 드는 공사비에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180만원을 면장님에게 가지고 가 우리 힘의 증거를 보이고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시멘트 1200포, 철근 2t을 확약받았습니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섬진강 대교의 기공식을 1974년 3월13일 군수님과 다수 기관장님을 모시고 강변에서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곳의 새마을 사업에 감동되어 각계 요로에서 45만원의 희사금이 모금되니 부락민은 더욱 더 힘을 얻게 되고 군수님이 현장에서 시멘트 450포대, 철근 5t을 전달하자 모두가 만세로 감사 표시를 했습니다. 온 부락민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우리 회장 3인은 이날 얼마나 기뻤던지 꼬박 밤을 새워 날이 밝기를 기다려 작업장으로 달렸습니다. 그날부터 우리 여자들은 강둑을 막고 남자들은 기초를 파고 우리 부녀회원들은 모래와 자갈을 모았습니다. 3월의 강바람은 차가웠으나 물속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나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추운 줄도 모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손이 부르트고 새 봄이 돌아오자 영세민들의 식량은 떨어져 가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부녀회에서는 구호곡을 거두기로 정하고 집집마다 내놓을 쌀·보리를 확보, 그 영세민들에게 양식을 주면서 일을 했습니다. 자재의 확보도 힘이 들어 면사무소 마루판자를 뜯어다가 거푸집으로 썼습니다. 그 깊은 물속에 기초가 하나둘 만들어져 가고, 착공한 지 25일 만에 교각 「다리발」을 설치하던 날 『야! 만세, 만세!』 강가의 메아리 속에 2개의 교각이 서던 그 감격스러운 순간, 너무도 신기하고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 우람하고 거대한 교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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