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유물론과 관념론
유물론과 관념론의 차이를 봅시다. 유물론 하면 무시무시한(?) 칼 마르크스를 떠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소아병적 레드콤플렉스는 이제 떨쳐 버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유물론 역시 오래 전부터 철학하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유물론으로 유명한 마르크스는 물질과 정신 중 어느 게 더 먼저 존재하는가에 대해 말하면서 물질이 먼저이고 정신은 물질의 반영(反影)이라 말했습니다. 가령 내 앞에 핸드폰이 있다고 합시다. 그때 핸드폰이 먼저일까요 핸드폰에 대한 나의 생각이 먼저일까요? 핸드폰이 내 앞에 있기 때문에 내가 핸드폰을 보면서 핸드폰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핸드폰이라는 개념을 이미 갖고 있기에 실제 어떤 물체를 보고 ‘아 저것은 핸드폰’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건 닭과 계란처럼 쉽지 않습니다. 경험과 이성은 뒤섞여있습니다. 경험을 토대로 이성이 작동하고 이성의 힘으로 경험을 확대 변화시키거나 경험을 규정(規程)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곳으로 경도되지 않는 것입니다. 경험과 이성은 서로의 외연이며 내포입니다.
가령 조선시대 사람이라면 핸드폰을 앞에 두고도 그게 핸드폰인지 모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핸드폰과 관련된 경험이 없어 그의 의식 속에는 ‘핸드폰’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죠. 그에게 핸드폰이라는 개념이 생기려면 핸드폰과 관련된 어떤 경험이 필요할 겁니다. 그런데 경험이란 어떤 것입니까? 직접이든 간접이든 그 경험이 ‘핸드폰’이라는 어떤 구체성을 얻으려면 실제 핸드폰과 관련된 경험이라야 하지 않을까요. 이처럼 유물론과 관념론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다만 유물론이란 나의 외부에 나와는 독립된 어떤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을 사유하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나무, 태양, 친구, 부모, 책 등이 이와 같은 것인데요, 이런 생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이게 중요하다고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와 함께 존재하지만 나와는 분명 다른 실체라는 것이고, 그 실체를 통해 나라는 주체가 생겨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들은 나의 정신이 만들어낸 가상(假想)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는 상관없이 따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도 내가 쓰던 핸드폰은 얼마동안 존재할 것입니다. 여기서 핸드폰이란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나와는 본래 상관이 없었으므로.
<그런데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모두 본질과 관련된 철학임에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관념론이든 유물론이든 선차성(先次性)의 문제를 따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주체와 주체의 외부가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도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정신의 외부에 어떤 실재들이 있고 그들을 통해 주체의 정신(개념)이 생긴다는 것이나, 주체의 정신이 먼저 있고 그 정신이 어떤 것을 구성하여 외부의 실재를 상정하는 것(혹은 정신이 구성하는 것 자체가 사물이라는)이나 결정론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건 물질이든 정신이든 ‘시초(始初)’를 찾는 작업인 것이죠. 시초는 ‘본질’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외부의 어떤 물질을 정신이 어떻게 만나느냐를 유물론은 설명해낼 수 없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정신이 외부의 물질과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설명해 내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끌고 가야 해결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원론은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 되겠지만 모두 ‘공간화’된 존재론입니다. 그런데 공간화 되었다는 말은 모든 게 무한하게 나누어질 수 있으며 그 나누어진 것들이 ‘동일(同一)’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공간이 동일한 것으로 무한하게 나누어졌다는 말은 무한하지만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단절은 ‘공간화 된 어떤 것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채울 수 없습니다. 공간은 무한하게 동일한 것으로 나눌 수 있을지언정 그걸 채울 순 없습니다. 반면 질적인 그 무엇들을 이으려면 ‘시간’이라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때의 시간 역시 공간화 된 시간이 아니라 ‘지속(持續)’으로서의 질적인 시간입니다. 그때 세계 아니 우주는 ‘지속으로서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됩니다. 일원론의 세계죠.>
정신과 물질이 있느냐, 없느냐 보다는 정신과 물질 중 무엇이 더 선차적이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것으로 취급된다고 했습니다. 유물론의 입장에서 볼 때 물질이 먼저이고, 그 물질에 대한 반영(反影)으로서 정신이 존재하는데 그 순서가 바뀌면 삶이 뒤죽박죽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의자와 환자 그리고 처방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환자의 증세가 있고 그 증세를 보고 의사가 진단을 하게 됩니다. 진단에 맞추어 치료가 이루어지겠죠. 여기서 그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머리가 아프다 했을 때 머리 아픈 증상의 내면을 의사가 잘 판단하여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머리 아픈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머리가 아픈데, 혈액 순환이 잘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거나, 그냥 머리가 아프다니까 대증요법으로 진통제를 먹으라 한다면 제대로 된 진료가 아니죠.
이것은 경험과 판단의 선차문제입니다. 경험이 이루어진고 난 이후에 판단을 할 수 있겠죠. 경험도 없는데 판단이 먼저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경험을 다 하고 난 이후에야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도 실제 생활에선 가능하지 않습니다. ‘바닷물은 짜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봅시다. ‘바닷물은 짜다’ 같은 명제가 참이냐 거짓이냐는 누구도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모든 바닷물을 맛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태양은 매일 뜬다.’도 그와 같습니다. 내일의 태양을 오늘 경험해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될 건지 안 될 건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는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비록 바닷물의 다 먹어보고 난 뒤에서 진정한 명제 ‘바닷물은 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몇 군데에서 밖에 먹어 보진 못했다고 해서 경험이 아닌 것은 아니죠. 그런 부분 경험으로라도 ‘바닷물은 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땐 부분 경험을 일반화하는 정신작용, 즉 이성이 작동할 겁니다. 하지만 그걸 보편화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걸 보편화하는 게 이성이 쏘아 올린 ‘본질’이라는 꺼지지 않은 ‘불’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인간들은 이성이 쏘아 올린 불을 ‘진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어 버리죠. 잘 몰라서 믿기도 하고, 너무 멀어서 혹은 너무 강렬해서 남들이 그러니까 믿기도 하는 것이죠. 이성주의든 경험주의든 모두 ‘믿음’이라는 중독성 강한 향신료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원론자들은 처음, 혹은 마지막 그리고 길의 도중에 필요에 따라 ‘신념체계’를 만들어 놓고 그것들에게 ‘특권적 시각’을 부여합니다. 그게 고대, 중세, 근대까지의 철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특권적 시각은 모두 ‘동일성’이라고 하는 영원성에서 발화되어 이곳까지 날아온 겁니다. 그건 초월적 그 무엇이죠. 마치 몇 억 광년 떨어져 있는 ‘별의 뜨거움’처럼 말이죠. 그걸 의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시를 보겠습니다.
<별빛-최희철>
사람들과 헤어져
길을 걷다가 별을 본다.
저 은빛의 차가움이
별의 뜨거운 심장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정말 그럴까?
별들이 뜨겁다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