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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7404] 《道德經도덕경》제3장--為無為則無不治[위무위즉무불치]
不尚賢,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使民不為盜;
不見可欲,使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實其腹,弱其志,強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1知者不敢為也。
為無為,則無不治。
도올비평에 대신하는 쇠귀신영복 선생의 3장 해설 원문
不尚賢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使民不為盜
不見可欲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虚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失智者不敢為也
為無為則無不治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루지 않게 해야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
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면 혼란이 있을 리 없다.
번역이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전체의 뜻은 짐작되리라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노자의 정치론》이라 할 만합니다.
노자가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는 매우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질서입니다.
우선 현賢을 숭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참으로 노자답다고 하겠습니다.
현이란 무엇입니까? 지혜라고 해도 좋고 지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우리가 습득하려고 하는 지식이나 지혜란 한마디로 자연에 대한
2차적인 해석입니다. 자연에 대한 부분적 지식이거나
그 부분적 지식을 재구성한 언어와 논리들입니다.
당연히 자연으로부터 일정하게 괴리된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이러한 것을 숭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오직 농부만이 일찍 도를 따르게 된다고 합니다
(夫惟語 是以早服: 제59장), 자연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貨)을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화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화는 자기가 만든 농산물이 아니라
공산품工品이라고 해야 합니다. 당시의 공산품은 직접적 생산품이 아니고,
또 1차적인 필수품도 아니었다고 해야 합니다.
화란 경제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상품입니다.
그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속성인 물건이 화입니다.
현賢이 2차적인 재구성이듯이 화도 자연산이나 농산물이 아니라
2차 생산품인 공산품입니다.
노자의 이러한 주장은 마치 오늘날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구하기 어려운 화貨를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오늘날은 농산물에 비해 공산품의 가격이 훨씬 비쌉니다.
사람이 만든 것보다 기계가 만든 것이 훨씬 더 비쌉니다.
네팔에서 느낀 것입니다만 수입 전자 제품은 네팔 사람들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고가인 반면에,
엄청난 수고가 담겨 있는 수공예품은 그 값이 거저나 다름없었습니다.
볕바른 좌판에 놓여 있는 수공예품 앞에 앉아서 너무나
낮은 가격에 당사자가 아닌 내가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외환제도나 시장가격이란 고도의 수탈 메커니즘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노자가 물론 오늘날의 외환 제도나 가격 메커니즘을 전제로
이야기한 것일리는 없지만 화貨의 가격이 등귀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언급되는 심心과 복, 지法와 골댁의 대비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과 골을 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심과 지는 비우고 낮추어야 하며 복과 골은 채우고 튼튼하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자가 대비시키고 있는 심지와 복골이라는
두그룹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위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골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심지가 타율신경계인 데 비하여 복골은 자율신경계이기도 합니다.
'불견가욕'不見可欲의 욕이 이를테면 심지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학입니다. 》
한 사회의 물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근간임은 물론입니다.
IMF 사태 때 우리 사회의 허약한 토대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경제학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만
IMF 사태는 한마디로 자립적
토대가 허약하기 때문에 겪은 환란이었지요. 복과 골이 튼튼하지 못하
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MF 극복 방식이 복과 골의 강화를 외면하고
임시 미봉책으로 일관되었다는사실입니다.
IMF 사태 이후에 자주 듣고 있는 구조 개혁이나 구조 조정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조에 관한 것이 아니지요. 토대의 개혁이 아닌
미봉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미봉책으로는 같은 돌에 두 번
세번 넘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 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합니다. CF 광고나
쇼윈도 앞에서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구매 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부단한 갈증에
목마른 상태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 생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해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것이 지식 상품의 CF라고
생각합니다. 지식도 상품입니다. 상품으로 생산되고 상품으로
유통됩니다. 상품의 운동 원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비가 미덕이 되고 부단히 새로운 상품이 생산됩니다.
그리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형태로 진행됩니다.
상품 이외의 소통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상품 형태를 취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언어도 상품이 됩니다. 지식의 도구인 언어 그 자체가 가장 이윤 폭이
큰 첨단 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 도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도무지 무욕無欲할 수도 없고 무지無知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현대적 재조명이라고 생각하지요.
노자는 또 지자들로 하여금 함부로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합니다.
지자들이 벌이는 일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일들을 지자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현賢을 숭상하고, 난득지화難得之貨를 귀하게 여기게 하고,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해내고, 심지心志를 날카롭게 하는 등
작위적인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지자들이지요.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자들은 특히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노자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작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옷처럼 만물을 감싸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衣養萬物而不爲土: 제34장), 그렇게 할때에 비로소 혼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爲無爲 則無不治).
나아가 천하는 무사無事로써 얻을 수 있으며(以無事取天下: 제57장),
감히 천하를 앞지르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제67장)고 합니다.
이 장의 지자智者는 오늘날 정치 지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사람이며, 무언가를 하겠다고 공약하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노자적老子的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서예를 사사받은 정향靜香 선생님은 해방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투표하신 적이 없다고 실도하신 적이 있습니다.
투표하시지 않은 이유가 매우 특이합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찍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더라도 선뜻 나서지 않아야 옳다는 것이지요.
하물며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서 남을 낮추어 말하고
자기를 높여서 말하는 사람을 찍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지역의 어른이시고 자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투표일에는
투표소를 한 바퀴 휘익 돌고 오신다는 것이었어요.
아마 노자에게 선거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투표하러 가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노자의 정치학이 이와 같습니다.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
(治大國小: 제10장)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생선의 비유는 일상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소위 국가와 사회를 경영하는 방식을
반성할 수 있는 정문일침門一鍼의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가에서는 이 제3장을 들어 노자 사상은 우민 사상愚民思想이며
도피 사상逃避思想이라고 비판합니다.
무지無知, 무욕無欲 그리고 무위無爲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전체의 의미를 읽고, 전체적 연관 속에서 부분을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구와 부분을 도려내어 확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지요.
《미운 사람을 험담하는 경우에 그렇게 하지요.
부분의 집합이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부분의 확대는
전체의 본질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노자』 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無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 (無不治)입니다.
혼란(不)이 없는(無)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은 은둔과 피세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적극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세改世의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 방식이 유원하고 근본을
경영하는 것이란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하=
노자 『도덕경』 3장은
2장이 관계적 생성의 원리를 밝혔다면,
3장은 그 원리가 사회, 욕망, 교육, 통치,
인간 형성의 문제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두고 서로 다투게 만드는 비교와 욕망의 구조다.
1. 노자 『도덕경』 3장 한글 옮김
不尚賢,使民不爭
어진 이를 높여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된다.
不貴難得之貨,使民不為盜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게 된다.
不見可欲,使心不亂
욕심낼 만한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是以聖人之治,虛其心,實其腹,弱其志,強其骨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은 비우고, 배는 채우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강하게 한다.
常使民無知無欲
늘 백성들로 하여금
분별로 영악해지지 않게 하고 욕망이 치솟지 않게 하며,
使夫知者不敢為也
저 영리한 자들조차
함부로 꾸며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為無為,則無不治
무위로써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2. 문학적 해석
― 다투지 않는 세계에 대하여
세상은
가진 것이 적어서 어지러운 것이 아니다
서로 우러러보게 만드는 구조 때문에 어지럽다
누군가를 높이 세우는 순간
다른 누군가는
그 아래에 놓인다
높임은
곧 비교를 낳고
비교는
다툼을 낳는다
사람이 본래부터
서로 싸우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가 더 낫다고 자꾸 말해 주면
마음은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 훌륭하고
나는 부족하다고 여기는 순간
세상은 이미
고요한 들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경기장이 된다
얻기 어려운 것을 귀히 여기는 세상에서는
손보다 눈이 먼저 굶주린다
손은
한 끼 밥이면 되는데
눈은
남이 가진 것을 보고
끝없이 배고파진다
금빛 물건 하나가
사람의 마음속에
도둑 하나를 키운다
도둑은
밤에 남의 집 담을 넘는 사람만이 아니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자기 마음의 담을 넘는 자도
이미 도둑이다
욕망은
밖의 물건이 아니라
비교가 만들어내는 안쪽의 불길이다
세상이 자꾸 보여 준다
이것을 가져야 한다
저렇게 되어야 한다
저만큼 올라가야 한다
저것이 성공이다
저것이 아름다움이다
저것이 가치다
그러면
마음은 제 자리에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간다
마음이 어지럽다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잃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깊은 사람은
사람을 다스린다고 하지 않고
마음을 소란케 하는 구조를 걷어낸다
그는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지 않고
배를 굶기지 않는다
관념은 비우고
삶은 채운다
허기를 이용해 사람을 몰아세우지 않고
욕망을 부추겨 세상을 굴리지 않는다
뜻을 약하게 한다는 것은
기개를 꺾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세상을 붙들려는 힘을 풀어 준다는 뜻이다
뼈를 강하게 한다는 것은
권력으로 군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견디는 근본의 힘을 길러 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참된 다스림은
사람을 똑똑하게 만들어
서로를 더 교묘히 이기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덜 흔들리게 하고
욕망을
덜 끓어오르게 하며
몸을
더 단단히 살아가게 하는 데 있다
세상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할 때
사람은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교활해질 때가 많다
분별은 늘어나고
비교는 정교해지고
욕망은 더 치밀해진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삶이 더 맑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 분주해질 수도 있다
깊은 사람은
그래서
아예 세상을 비워 버리는 쪽을 택한다
더 높이 오르라고 등을 떠미는 대신
서로 다투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만든다
더 많이 가지라고 부추기는 대신
지금 있는 것으로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 자리를 만든다
더 화려한 꿈을 팔기보다
잠들 수 있는 밤을 돌려준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다
넘치게 하지 않는 것이다
부추기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자기 바깥으로 몰아내지 않는 것이다
꽃이 피라고 소리친다고
봄이 빨리 오는 것은 아니다
강물이 흐르라고 채찍질한다고
물이 더 맑아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지나치게 북돋우고
지나치게 평가하고
지나치게 욕망하게 만들수록
사람은
본래의 결을 잃는다
그러니
참된 다스림은
무언가를 더 얹는 일이 아니라
이미 쌓여 있는 소란을 덜어내는 일이다
골방에 들어가 보면 안다
그 작은 방 안에는
남과 겨룰 일도 적고
값비싼 것을 자랑할 일도 적고
사람 마음을 흔드는 광고판도 없다
거기서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눕고
문득 떠오른 생각을 적고
창밖 바람 소리를 들으며
저녁이 오는 것을 지켜본다
그 방은
세상이 버린 가난한 자리가 아니라
욕망의 진열장을 치운 자리다
그래서 골방은
비로소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방이다
관념은 적고
숨은 길고
사물은 작고
밤은 깊다
그곳에서는
크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저 살아 있구나 하는 감각이 먼저 온다
그것이
성인이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운다는 말의
가장 가난하고도 풍요로운 번역이다
무시공 학교도
이와 같은 곳이어야 한다
거기서는
누가 더 뛰어난가를 먼저 묻지 않는다
무엇이 더 비싼가를 가르치지 않는다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가를 주입하지 않는다
먼저
아이의 마음이 덜 흔들리게 한다
먼저
아이의 몸이 덜 굶주리게 한다
먼저
아이의 뼈가 자기 삶을 견딜 수 있게 한다
지식을 쌓기 전에
비교를 줄이고
욕망을 부추기기 전에
존재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한다
그 학교에서 배우는 첫 번째 수업은
남보다 앞서는 법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 법이다
두 번째 수업은
더 많이 갖는 기술이 아니라
덜 흔들리는 마음이다
세 번째 수업은
말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조용히 살아 있는 법이다
지금의 인간은
너무 많이 안다
너무 많이 본다
너무 많이 원한다
그래서
너무 쉽게 흔들린다
세상은
끊임없이 보여 준다
이것이 귀하다
저것이 위대하다
그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저 자리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살기 전에 이미 지친다
비교의 사다리를 오르느라
자기 발밑의 흙을 잊고
욕망의 시장을 떠도느라
자기 방의 적막을 잃는다
그래서 지금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동기부여가 아니다
더 많은 성공학도 아니다
더 날카로운 자기계발도 아니다
오히려
좀 덜 보아야 하고
좀 덜 원해야 하며
좀 덜 다투어야 한다
그때서야
삶은
경쟁이 아니라
머묾이 되고
욕망은
불길이 아니라
따뜻한 체온이 된다
세상을 온통 차지하려 하지 말라
사람을 끝없이 부추기지 말라
값비싼 것을 높이 세워
마음속 도둑을 키우지 말라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고
뜻을 풀어 주고
뼈를 세워 주라
그리하여
사람이
자기 바깥의 화려함보다
자기 안의 고요를 먼저 알게 하라
그것이
노자 3장이 말하는
다투지 않는 세계의 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문은
먼 데 있지 않다
저녁 무렵
골방의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한 줄기 속에도
이미 열려 있다
3. 주석
제1절 숭상은 왜 다툼을 낳는가
不尚賢,使民不爭
이 첫 구절은 얼핏 반지성주의처럼 읽힐 수 있으나,
노자의 뜻은 현명한 사람을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어진 이를 높여 세우는 방식”에 있다.
어떤 이를 특별히 높이는 순간
그 높임은 곧바로 관계의 비대칭을 낳고,
비대칭은 비교를 낳으며,
비교는 다툼으로 이어진다.
즉 노자가 비판하는 것은
덕 있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숭배와 서열화의 구조다.
이 점에서 『관계 존재론』의 관점은 분명하다.
존재는 본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고정된 우열의 표지판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특정 존재를 “높은 존재”로 고정하여 제도적으로 숭상하면
나머지 존재들은 곧바로 낮은 존재로 배치된다.
문제는 개인의 품성보다
그 품성을 둘러싼 관계 배열 방식에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인간은 이 구조 속에 산다.
학교에서는 우등생을, 사회에서는 성공한 자를, 시장에서는 부자를,
미디어에서는 화려한 삶을 높여 세운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존재를 본받기 전에 먼저 비교하게 된다.
비교는 곧 결핍 의식을 낳는다.
결핍 의식은 다툼을 낳는다.
결국 현대 사회는 경쟁을 인간 본성처럼 말하지만,
사실 많은 경쟁은
인위적으로 배열된 숭상 구조의 산물이다.
『무시공 학교』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바로 이 숭상의 장치를 걷어내는 것이다.
누가 더 뛰어난가를 앞세우는 교육이 아니라
각자의 존재가 관계 속에서 어떻게 빛나는가를 보게 하는 교육.
그럴 때 배움은 경쟁이 아니라
공명(共鳴)이 된다.
제2절 귀한 것의 발명과 마음속 도둑
不貴難得之貨,使民不為盜
노자는 여기서 물건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 구조의 문제를 말한다.
“얻기 어려운 것”이 본래 귀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것을 귀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의 욕망이 그쪽으로 몰린다.
도둑은 단순히 사법적 범죄자가 아니다.
노자에게 도둑질은
자기 자리를 잃고 남의 것을 탐하게 되는
욕망의 구조 전체를 가리킨다.
관계 존재론의 시각에서 보면,
어떤 사물이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이 독립적으로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 사물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희소성과 권위와 상징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즉 도둑을 만드는 것은
개인의 타락한 성품이라기보다
희소한 것을 위에 올려놓는 사회의 관계 구조다.
오늘날 이 구절은 더 날카롭게 읽힌다.
명품, 부동산, 학벌, 지위, 팔로워 수, 브랜드, 화려한 이력.
이 모든 것은 “난득지화(難得之貨)”의 현대적 형태다.
얻기 어려운 것이기에 귀한 것이 아니라,
귀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졌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얻으려 자기 삶을 훔치기 시작한다.
지금의 인간은 남의 것을 훔치지 않더라도
자기 시간을 도둑맞고,
자기 평온을 도둑맞고,
자기 존재를 도둑맞는다.
욕망은 타인의 물건을 훔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훔쳐 간다.
골방 우주론은 이 대목에서
아주 강한 해독제처럼 등장한다.
골방은 난득지화를 치워낸 자리다.
희소한 사물의 박람회가 아니라
적은 것으로도 우주가 성립하는 자리다.
한 권의 책, 한 자루 연필, 한 줄 빛, 한밤의 적막.
이것으로 충분한 세계를 경험하면
희소한 물건이 아니라
존재의 밀도가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3절 보임의 정치와 욕망의 생산
不見可欲,使心不亂
노자는 욕망을 내면의 본능으로만 보지 않는다.
욕망은 보여짐의 체계 속에서 생산된다.
무언가를 계속 보여 주고
그것이 욕망할 만한 것이라고 합의시키면
사람의 마음은 저절로 흔들린다.
이것은 오늘날 광고, 미디어, 플랫폼, 알고리즘 시대에
더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지금의 인간은 끊임없이 “가욕(可欲)”을 본다.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 과시하고 싶은 것.
눈은 잠들 틈이 없고
마음은 쉬지 못한다.
마음이 어지럽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욕망의 표적들이 너무 많이 진열되어
자기 중심을 잃는 상태를 뜻한다.
무시공 학교는
이 보임의 정치를 끊어내야 한다.
아이에게 더 많은 욕망의 목록을 제공하는 학교가 아니라,
덜 보여 주고 더 느끼게 하는 학교.
이미지와 스펙과 상품의 홍수 속에서
자기 감각과 호흡과 관계의 결을 먼저 만나게 하는 학교.
그럴 때 마음은 어지러움에서 벗어나
존재의 자리로 돌아온다.
골방은
바로 이 “불견가욕”의 작은 실험실이다.
덜 보이는 곳,
덜 자극적인 곳,
덜 흔들리는 곳.
욕망의 진열대가 치워진 그 방에서
비로소 인간은
“무엇을 더 가져야 하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떻게 존재하고 있지?”를 묻게 된다.
제4절 성인의 다스림과 존재의 재배치
虛其心,實其腹,弱其志,強其骨
이 대목은 오랫동안 오해되어 왔다.
민중을 우민화하는 통치술로 읽는 해석도 있지만,
노자의 흐름 전체로 보면
그보다는 삶의 기초를 바로 세우는 존재의 재배치로 읽는 편이 더 깊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생각을 없애거나 인간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과도한 관념, 비교, 분별, 욕망, 허영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워
본래의 고요를 되찾게 한다는 뜻이다.
“배를 채운다”는 것은
생존의 바탕을 먼저 보장한다는 뜻이다.
굶주린 존재에게 고상한 이념을 설교하는 것은
노자의 길이 아니다.
삶의 토대가 먼저다.
“뜻을 약하게 한다”는 것은
삶의 의지를 꺾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세상을 장악하려는 과도한 의지,
끝없이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 심리를 느슨하게 한다는 뜻이다.
“뼈를 강하게 한다”는 것은
과시적 성공이 아니라
삶을 견디는 근본의 힘을 길러 준다는 뜻이다.
몸, 리듬, 생활, 생존력, 존재의 골격.
이것이 강해야 한다.
『무시공 학교』의 교육 철학도 바로 여기에 닿는다.
먼저 마음의 소란을 줄이고,
먼저 삶의 바탕을 돌보고,
먼저 몸을 살리고,
먼저 존재의 뼈대를 세워야 한다.
지식의 축적 이전에
삶의 골격이 바로 서야 한다.
지금의 인간은 거꾸로 산다.
마음은 넘치도록 자극받고
배는 때로 텅 비고
뜻은 지나치게 팽창하며
뼈는 약해진다.
관념은 화려한데 몸은 허약하고,
욕망은 거대한데 존재는 빈약하다.
노자 도덕경 3장은 이 역전을 바로잡는 장이다.
제5절 무지무욕의 뜻
常使民無知無欲
이 구절도 자주 오해된다.
여기서 “무지”는 어리석음을 강요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친 분별지,
자기를 뽐내고 남을 이기기 위해 쓰는 영악한 앎을 비워 둔다는 뜻에 가깝다.
즉 노자가 경계하는 것은
삶을 맑게 하는 지혜가 아니라
욕망을 정교하게 만드는 영리함이다.
관계 존재론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관계를 깊게 보는 앎은 필요하지만,
관계를 서열화하고 이용하는 앎은
도리어 세계를 어지럽힌다.
“무욕” 역시 무기력이나 무감각이 아니다.
삶의 자연스러운 필요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비교와 과시가 부추긴 과잉 욕망을 덜어낸다는 뜻이다.
무시공 학교는
아이들을 정보의 창고로 만드는 곳이 아니라
지혜롭게 덜 흔들리는 존재로 자라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넓게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 아는 힘이 중요하다.
골방은 이 무지무욕의 공간적 비유다.
골방의 앎은
온갖 정보의 홍수가 아니라
사소한 것 하나를 오래 바라보는 깊이에서 온다.
골방의 무욕은
세상을 다 거부하는 금욕이 아니라
작은 것으로 충분한 감각을 회복하는 데서 온다.
제6절 지자(知者)와 꾸밈의 정치
使夫知者不敢為也
여기서 “지자”는 참된 지혜자라기보다
잔꾀 많고 계산 빠른 자,
지식을 이용해 세상을 조작하는 자로 읽는 편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노자는 그런 자들이 함부로 꾸며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좋은 통치의 일부로 본다.
왜냐하면 세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이 아니라
그 흐름 위에 덧씌워지는 과도한 설계, 조작, 책략, 선전, 통제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사회는
정보와 기술과 전략이 넘치지만
그만큼 마음은 더 불안하고 삶은 더 복잡해졌다.
많은 “지자들”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며
끝없이 개입하지만,
그 개입이 오히려 사람을 자기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때가 많다.
노자의 말은 단순하다.
지나친 꾸밈을 멈추어라.
삶을 자연스러운 자리로 돌려놓아라.
그럴 때 비로소 관계는 숨을 쉬고
존재는 자기 결을 회복한다.
제7절 무위의 통치와 무시공의 질서
為無為,則無不治
노자의 결론은 늘 역설적이다.
하지 않음으로써 한다.
무위로써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이 말은 방치나 무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개입의 방식이다.
억지로 꺾지 않고,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고,
지나치게 설계하지 않고,
존재가 저마다의 관계 속에서 제자리를 찾도록
장애를 덜어 주는 방식이다.
관계 존재론의 차원에서 보면
좋은 질서는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이 서로를 억누르지 않고 조응할 수 있을 때
자생적으로 형성된다.
무시공 학교도 바로 그렇다.
좋은 학교는 아이들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학교가 아니라
아이들이 덜 흔들리며
자기 리듬을 찾을 수 있도록
비교와 과시와 과잉 욕망의 장치를 걷어내는 학교다.
골방 우주론 역시 무위의 소우주다.
골방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이 저마다의 리듬으로 존재하게 하는 방이다.
그 방의 질서는 명령으로 서지 않고
고요로 선다.
지금의 인간은
늘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믿는다.
더 관리해야 하고
더 개선해야 하고
더 효율화해야 하고
더 자극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노자는 반대로 말한다.
삶이 무너지는 것은
대개 덜 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처방이 아니라
과잉의 해제다.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지나친 속도의 멈춤이다.
더 화려한 목표가 아니라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단순한 힘이다.
4. 맺음말
노자 3장은
다투지 않게 하는 세계의 설계도다.
그 설계의 핵심은
인간을 억압해서 조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교와 희소성과 과시와 욕망의 구조를 줄여
마음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데 있다
관계를 서열로 바꾸지 말라.
욕망을 진열하지 말라.
마음을 비우고 삶을 채우라.
뼈를 세우고 과잉의 뜻을 풀어 주라.
억지로 몰아가지 말고
스스로 그러한 존재의 질서를 회복하라.
이것이 노자 3장이 현대인에게 『지금의 인간』에게 건네는 핵심 메시지다.
[출처] 노자 도덕경 3장 새김|작성자 정낙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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