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시작의 계절’이다. 이들이라면 새 학기, 새 분기를 맞는 이들에게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건축사 사무소 ‘Society Of Architecture’의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강예린, 이치훈 부부는 여러 가지 공모전, 프로젝트 업무로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보였다. 잠시 이들의 시간을 빌려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예린 소장은 어려서부터 못 말리는 책벌레였다고 한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재미난 책들이 책장 가득 꽂혀 있었고, 친구의 부모님도 항상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부터 독서의 재미에 푹 빠진 그는 자연스레 세상만사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모든 것이 태동하는 땅을 공부하는 지리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러다 땅 위에 구축되는 건축물에 관심이 생긴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다시 건축을 전공했다.
핀란드 헬싱키 라이브러리 - 공모전 제출안 |
이치훈 소장은 달랐다. 어릴 때부터 책읽기보다는 밖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하고, 사고도 많이 치는 장난꾸러기였다. 하지만 동네 책방에서 꺼내 든 책 속 한 장의 사진이 그의 인생 경로를 대폭 수정해놓았다. 바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언젠간 꼭 내 손으로 지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그는 일편단심 건축가의 꿈을 놓지 않고 살았다. 독서의 묘미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알았다.
시험기간에 찾은 도서관에서 시험공부가 아니라 책에 빠져들면서였다.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두 남녀는, 한 건축설계 공모전을 준비하며 한 팀이 되었다.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 책 이야기를 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들은 함께 건축사 사무소를 만들고 부부가 되었다. ‘책벌레 건축가 부부’는 국내 유수의 도서관을 여행하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내달라는 제안을 받고 《도서관 산책자》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국립디지털도서관 서고 없는 도서관. 방대한 양의 도서 자료들이 전산화 작업을 거쳐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사석화를 막기 위해 종이로 만들어진 도서는 소지가 금지된다. ‘도서관의 도서관’으로서, 전국 공공도서관의 소장자료 등을 검색할 수도 있다. |
“처음에는 막막하더라고요. 저희는 책과 도서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지만, 건축가이기도 하잖아요. 모든 도서관을 막연히 건축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비판적인 글만 쓰게 될 것 같았어요. 하지만 광진도서관 조사를 계기로 ‘사람 냄새 나는 도서관’ ‘유기체로서의 도서관’을 관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치훈)
“광진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이 도서관의 사회적 역할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열정적인 관장을 비롯해 도서관 행정 전반에 도움을 주는 봉사모임 ‘도서관 친구들’까지, 도서관을 건축적 요소로만 평가하던 저희의 인식을 이분들이 바꿔주었습니다.”(강예린)
광진정보도서관 강변 옆에 자리한 도서관. 강변 풍경을 감상하며 독서를 즐길 수 있다. 도서관과 독서실 공간이 구름다리로 나뉘어 있어 공간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양질의 강좌와 시민들의 재능 기부로 이루어지는 시민 교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
대학교 재학시절, 미국 유학시절, 또 《도서관 산책자》를 집필하던 과정에서 이들은 국내외 수많은 도서관을 체험했다. 독서광이자 건축가인 이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도서관’은 어떤 곳일까.
“공간 활용의 유연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도서관의 역할은 계속 바뀌거든요. 딱딱하고 고정된 형식의 도서관은 그 요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시애틀 공공도서관이 이상적인 도서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이치훈)
우포자연도서관 |
이들은 여러 도서관을 체험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직접 ‘이상적인 도서관 만들기’에 도전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생태체험이 가능한 우포에 짓는 ‘우포자연도서관’ 프로젝트와 서촌에 위치한 교회가 쓰던 한옥을 ‘공동체 북카페’로 리모델링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우포자연도서관은 아이들에게 생태교육을 하고 있는 한 퇴직교사의 부탁을 받아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예요. 이분이 빌려 쓰고 있던 창고를 매입해서 게스트하우스가 딸린 도서관으로 다시 짓고 있습니다. 우포의 생태는 새벽, 낮, 밤 시간대별로 관찰해야 제대로 체험했다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주변에 마땅히 묵을 곳이 없으니 이곳을 숙소로 쓰면서 작은 도서관으로도 활용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로 시작했습니다.”(강예린)
이탈리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공원에서 책 읽는 장치 디자인 |
“지금 뼈대까지는 다 올라간 상황인데, 자금 문제가 여의치 않아서 잠시 중단하고 후원처를 알아보고 있어요. 건축주가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없는 자금이라도 털어서 사명감으로 진행하고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작업은 이렇게 어려움도 겪으며 차근차근 진행되어야 더 보람 있고 뿌듯할 것 같아요.”(이치훈)
이처럼 쉽지 않은 길을 택하면서까지 더 많은 이들에게 독서의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꼽는 ‘내 인생의 책’이 궁금했다.
서강대 로욜라도서관 내부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요. 사회의 규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형적으로 살고 있는 현실을 이 책으로 달래요. 현실과 ‘밀당’한다고 해야 하나요?(웃음) 조르바처럼 ‘지금’ ‘현재’에만 집중하는 솔직한 삶을 꿈꾸게 해주는 책입니다.”(강예린)
“저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요.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입니다. 건축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어떤 대상을 본질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선물해준 책이에요.”(이치훈)
정독도서관 내부 |
《도서관 산책자》에서도 이들은 도서관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누군가가 추려놓은 지식을 달달 암기하는 ‘독서실’이 아닌, 정리되지 않은 지식을 스스로 습득하고 사색하는 진정한 독서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에 치여 ‘스펙’만을 갈구하는 젊은 사람들이 도서관을 진정한 독서의 공간으로 활용하기란 쉽지 않다. 자유로운 도서관이 아닌 숨 막히는 독서실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이들 부부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도서관을 이끌어 가시는 분들이 해주신 말씀을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이 모든 상황은 ‘본인의 책임이 아니다’는 거예요. 사회가 단순히 도서관이라는 공간만 제공할 일이 아니라, 독서와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시간과 여유도 함께 제공했어야 하는 거죠. 하지만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 시간에 쫓길 때 도서관으로 가보길 권합니다. 틈새시간을 일부러 만들지 않으면 도서관을 이용하기 힘들잖아요. 저처럼 시험기간에 도서관에 가보는 것도 좋아요. 시험은 다 잊어버리고 어느새 책을 탐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웃음)”(이치훈)
“대학시절 담당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독서는 내 몸에 하는 공양’이라는 말씀이었어요. 책을 읽어서 얻는 지식과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라는 아주 조용하고 느린 행위 자체가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이완시키죠. 젊은이들이 독서를 통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풍요로움을 많이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강예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