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명문 아리타(有田)와 이삼평(李參平) 日本 3대 도자기명문의 하나로 꼽히는 아리타야키(有田燒)는 조선도공(朝鮮陶工) 이삼평(李參平)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리타시에서 이삼평은 아리타야키의 조상수준을 넘어 도신(陶神)으로 숭배 받을 정도이다. 그에 관한 각종 기록이나 유적, 사당, 무덤, 비석 등은 지금도 소중하게 관리되고 있다. 도자기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다 간단한 정보만을 알고 찾아 간 처지라 우선 아리타시 초입에 있는 사가현립규슈도자문화관(佐賀縣立九州陶磁文化館)엘 들렀다. 자그마한 키에 조용한 말씨의 지성미를 풍기는 후지와라 토모코(藤原友子) 학예원이 반갑게 맞아주어 고마웠다. 아리타의 도자기역사와 이삼평에 대한 얘기를 알고싶다는 요청에 30여분간에 걸쳐 이런저런 설명을 자세하게 들려 주었다. 아리타야키는 아이치(愛知)현의 세도야키(瀨戶燒)와 기후(岐阜)현의 미노야키(美濃燒)와 더불어 일본의 3대 도자기명문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인구가 2만2천 여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도시 아리타시에 현재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150개를 넘어서고 있고 도자기를 근대산업으로도 성공시켜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응신천황(應新天皇)을 주축으로 이삼평의 후원자였던 나베시마(鎬島)장수와 이삼평을 모시는 아리타의 도산신사(陶山神社)에는 1m 크기의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삼평의 도자기좌상이 별도로 모셔져 있고 신사 뒤 산 중턱에는 아리타시를 굽어보는 그의 큰 비석이 우뚝 서 있다. 비석은 아리타시의 자기탄생 30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최초로 백자광(白磁鑛)을 발견하고 자기소성(磁器燒成)에 성공한 이삼평의 공적을 기려 일본도조송덕회(日本陶祖頌德會)가 1917년에 건립한 것으로 그를 도조(陶祖)로 받든다는 의미로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參平碑)” 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도자기의 본고장답게 신사정문의 도리이(鳥居)와 신사를 지키는 고려견(高麗犬), 그리고 물을 채우는 항아리 등이 모두 도자기로 만들어져 있다. 아리타에 있어 도조(陶祖)라는 말은 단순히 요업(窯業)의 창시자라는 의미를 넘어 오늘날 명문요업산지로 성장한 아리타의 기반을 구축한 시의 조상이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후지와라(藤原) 학예원의 설명이다. 이삼평은 정유재란 때인 1616년 일본으로 끌려가 다른 조선인 도공 18명과 함께 왜장 나베시마(鎬島)의 중신(重臣)인 다규(多久)가에 의탁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언어소통이 어려운데다 이렇다 할 일거리가 없어 생활이 몹시 어려웠다. 다행이 다규가 이삼평을 단순한 일꾼이 아닌 대화의 상대로 예우해 주어 그나마 어려움을 견뎌내는데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다규의 양해로 도자기제작에 대한 꿈을 다시 이룰 기회를 얻게 된 이삼평은 하급도공 10명을 데리고 지금의 아리타에 가마를 열었다. 이삼평과 함께 다규가에 배속되었던 다른 18명의 도공들도 요(窯)를 개설하게 되어 비로소 조선도공 들의 아리타 도기제작이 시작되었다. 나베시마번(藩)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도기생산계획을 세우고 도기의 원료인 흙과 물을 찾아 나선 이삼평은 당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산골 아리타 동쪽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바라던 흙을 발견하고 그 흙으로 지금의 아리타 시내 한 곳에 조선식 가마인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창설, 본격적인 도기생산에 들어갔다. 이삼평이 요(窯)를 열기 전, 구슈 지역의 도기생산 중심지는 아리타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이마리(伊馬里)라는 어촌이었으나 아리타가 도기생산의 거점이 되고부터 이마리는 아리타에서 생산된 도기를 일본 전역으로 출하하는 수송기지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지금도 아리타 도기를 이마리 도기라고도 부른다. 아리타야키의 토대를 구축한 이삼평은 일본으로 건너 간 얼마 후 일본으로 귀화, 이름을 가네가에 삼페에(金江三平衛)로 바꾸었으며 일본으로 간지 39년 만인 1655년 아리타에서 생을 마감했다. 현재 그의 위업을 전해 줄 유형의 유물은 도자기 조각 하나 남아있지 않지만 일본의 3대 도자기 명문인 아리타야키라는 소중한 무형의 이름을 유산으로 남겼다.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살아 숨쉬고 있어 아리타시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후지와라 학예관의 설명이었다. 후지와라 학예관과 헤어진 후 이삼평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후쿠오카(福岡)에서 남쪽으로 90여km 거리인 아리타는 시라고는 하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길고 좁은 모양을 한 자그맣고 조용한 시골 마을 풍의 분지이다. 후쿠오카공항에서 나를 태운 60대 초반의 택시기사는 사진촬영여행이라는 말에 좋겠다며 몇 번이고 부럽다고 한다. 전 날 내린 비로 파란 하늘이 한결 높아졌고 공기 또한 코를 시리게 할 정도로 맑다. 아리타시 거리에는 도자기에 관한 간판뿐인 듯 하다. 아리타 시내에 위치한 300여 평 크기의 공동묘지에 이삼평의 작은 묘가 있다. 그의 이름에 비해 무덤이 너무 작고 초라하다. 1m도 안 되는 비석이 그나마 반쯤 깨져 나가고 없다. 꽃 몇 송이와 그가 살아생전 술을 좋아했던가 작은 술 병과 잔이 비석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몇 백 년 전에 귀화했는데도 도래인(渡來人)을 경원(敬遠)하는 어느 속 좁은 섬나라 사람이 저지른 짓이 아닐까 싶어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무덤에 비해 도산신사에 있는 도자기좌상과 신사 뒤 산 위의 비석은 이삼평의 위대한 업적을 유감없이 잘 나타내주고 있다. 세상을 떠날 당시에는 아직 그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한 가난한 도공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 무덤이 초라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었다. 비석으로 올라가는 길과 비석 주변이 넓고 전망이 시원한데다 성역처럼 잘 꾸며져 있다. 일본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있는 그의 흙 채취장인 이즈미야마(泉山) 자석장(磁石場)은 야구장 반은 됨직한 넓은 면적으로 지금은 백자구공원(白磁丘公園)이란 이름의 공원이 되어있다. 아리타에 있는 이삼평의 옛 가마인 상향식 요(窯)인 덴구다니(天狗谷)요적도 현재 일본국가사적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다른 조선 도공인 가고시마(鹿兒島)현 사쓰마야키(薩摩燒)의 심수관가(沈壽官家)가 15대째인 지금도 도자기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데 반해 이삼평 후예들의 가업 전수는 다소 초라한 편이다. 12대째는 아예 완전히 폐업했으며 13대에 다시 부활시켜 지금 14대에 이르고 있으나 가네가에 삼페에라는 이름으로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갔던 날이 월요일인데다 그 전 주 4월29일부터 5일까지 1년에 한 번 있는 아리타 도기시장(有田陶器市)가 열린 뒤였다. 이 때문에 150여 곳이나 되는 요(窯)가 대부분 휴무로 문을 닫는 바람에 계획했던 이삼평의 14대손과의 면담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신 귀국 당일 도쿄에서 전화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부인과 둘이서 주로 식기류와 화병 등을 소규모로 굽고 있고 아직 46세의 젊은 나이니까 조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 생각이지만 15대는 지금 4살박이 딸 하나만을 두고 있어서, 하면서 말 끝을 흐렸다. -휴가(日向) 남향촌 백제마을 백제가 고대일본문화의 인프라 구축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도읍을 나라(奈良)에서 교토(京都)로 옮긴 일본의 50대 천황,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후예일 정도로 고대 일본과 백제와는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이러한 특수상황에서 천황의 특별한 배려로 백제 후예들이 가끔 중앙과 지방정부의 높은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다. 일본 안의 백제관련유적은 가히 일본 전역에 걸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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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일본에게 학문과 당시의 선진기술 등을 많이 전수했다. 규슈(九州) 동쪽 미야자키(宮崎)현의 태평양에 접해있는 휴가(日向)시에서 내륙으로 산길을 따라 50여km 들어가면 깊은 산 속에 작은 마을이 나온다. 바로 “백제마을.” 2,2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남향촌(南鄕村)의 백제마을”은 일본 속의 옛 조선인가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이색적이다. 깊은 산 속이라 주위환경이 깨끗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처음 찾는 사람에게도 한동안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분명히 일본 땅인데도 마을 앞, 길 옆에 의젓한 모습의 천하대장군과 다소 수줍어하는 얼굴의 지하여장군이 나란히 서서 방문객을 맞는다. 그 옆 3m나 넘을 듯한 삼각모양의 높은 입간판에는 “ 잘 오셨습니다. 백제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일본어와 한글로 크게 쓰여있다. 일본사람이 왔다가는 혹시 한국땅인가, 영락없이 헷갈릴 판이다. 백제마을의 역사는 서기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의 왕족과 귀족의 한 무리가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르는 때로부터 시작된다. 일본 땅에 닿은 그들은 한 동안 교토, 나라 등지에 머물렀으나 672년 야마토(大和)왕조에 내란이 일어나자 왕족들은 재난을 피해 두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기타큐슈(北九州)로 떠났다.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부친인 정가왕(禎嘉王) 일행이 탄 배는 지금의 미야자키(宮崎)현 휴가(日向)시에, 그리고 장남인 복지왕자(福智王子)일행의 배는 조금 남쪽인 다카나베항(高鎬港)에 표착하였고 얼마 뒤 정가왕은 지금의 남향촌에, 복지왕은 목성(木城)마을에 각각 정착하게 되었다. 현재 남향촌의 미카도신사(神門神社)는 정가왕을, 그리고 목성마을의 히키신사(比木神社)는 복지왕자를 받들고 있는데 그 곳 주민들이 해마다 음력 섣달 14일께 왕과 왕자가 재회하는 의식을 열어주고 있다. 두 신사간의 거리가 90km나 돼 지금도 걸어서 2박3일이 소요되며 옛날에는 험한 산 길이라 무려 9박10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축제 때는 현지 주민들이 옛날과 똑같은 모양으로 의식을 치르고 있어 이국의 왕을 받드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718년에 창건된 미카도신사는 현재 일본의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미카도신사에 전해 내려오는 백제왕족의 유품으로 알려진 33개의 구리거울 가운데 나라의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일본국보 당화륙화경(唐花六花鏡)과 똑같은 것이 십 수년 전에 발견되어 이를 보관하기 위해 나라의 정창원과 같은 규모의 정창원을 남향촌에 세우고 서정창원(西正倉院)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창원은 일본의 국보급 보물 등을 보관하는 고상식(高床式) 건물로 지금까지는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에 하나밖에 없었다. 백제유물을 보관하고 백제의 역사와 전설을 소개하는 미카도신사에 어떤 연유로 나라 정창원에 소장되어있는 일본국보와 동일한 동경(銅鏡)이 있었는지 묘한 감정과 함께 무척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미카도신사에는 부여의 궁터에 있었던 옛 국립박물관의 객사를 모델로 복원한 백제관이 또한 눈길을 끈다. 관리를 맡고 있는 70대 후반의 노부부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신나게 설명해 주었다. 한글을 공부하고 있다는 할머니의 우리말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건물에 쓰인 기와, 목재, 건물 밖에 깐 블록 등을 모두 한국에서 수입했으며 적, 녹, 청색의 단청은 한국의 명장이 맡았다고 했다. 내부에는 우리의 각종 민예품과 간단한 자료, 그리고 라면 등 식품도 진열되어있고 정문의 백제관이란 편액에는 김종필(金鍾泌)씨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와 자매관계를 맺고 있는 남향촌은 해마다 그 곳 중학생들로 구성되는 한국연수단을 파견하는 것을 비롯, 마을 중앙공민관이 3년 기간으로 한국에서 강사를 초빙, 한글강좌를 열고 문화제기간 중에는 현지인이 한국요리를 출품하는 등 한일간의 문화교류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히라가타(杖方) 백제 사적공원 오사카와 교토의 중간쯤 지점인 히라가타(杖方)시에 백제사적공원이 있고 공원 안에 규모가 큰 백제신사가 있다. 크기가 동대문운동장 만한 공원이다. 백제이름이 붙은 공원으로는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잎이 다소 크지만 우리 것과 똑같은 소나무가 많고 지금도 유물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이 백제신사는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던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왕자(善光王子)를 받드는 사당이다. 망명 당시 일본조정은 선광왕자에게 백제왕의 칭호와 함께 교토 인근의 단바(丹波)지역을 주어 백제인들이 모여 살도록 했는데 이것이 일본 백제왕씨 탄생의 기원이 되었다. 그 후 백제왕씨는 일본조정의 고관이 된 경우도 많았다. -도야마의 한 신사 일본 안에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망명왕족 들을 받드는 신사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천황도 찾아가는 규모가 큰 곳은 1년에 수 십만 명의 참배객이 모이지만 대부분은 인근지역주민들만 때에 따라 가끔 들르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궁핍한 편이다. 심지어 어떤 신사는 외진 곳에 단칸집이나 원두막 만한 크기로 있어 초라하기 짝이 없다. 택시기사가 회사와 10여 차례나 장소를 물어가며 어렵사리 찾아간 도야마(富山)시 교외의 초라한 한 신사는 참배객이 도무지 찾을 것 같지 않은 철길 옆 외진 진흙논 같은 곳에 있어 안타까운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래도 모든 신사가 자리를 지키는 걸 보면 일본인들이 섬기는 신이 팔백만이나 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후기 지금까지 일본에 산재해 있는 우리민족의 흔적과 유적촬영을 위해 대여섯 번을 왕래했다. 일본의 관련서적과 인터넷으로 자료를 뒤지고, 때로는 일본친구에게 자료발굴을 부탁도 하면서 뛰어다녀 보았지만 대개는 천년을 넘어서는 시대성 때문에 신사 자체나 당시의 인명, 지명, 제도 등의 이해가 우선 난제였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긴 했으나 나로서는 공부도 되었고 무엇보다도 천 여 년 전 우리와 일본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수많은 역사적 관계의 편린(片鱗)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이 흥미로웠다. 비슷한 듯 하면서도 조금만 깊이 들어다 보면 우리와 판이하게 다른 일본. 그래서 만나면 만날수록, 보면 볼수록 더 헷갈리는 나라 일본.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연구가 필요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싶다. 지난 날에 관한 연구기록은 일본이 우리 보다 훨씬 넓고 깊은 듯 하다. 40년 전 특파원으로 처음 일본 갔을 때 기막히게 맛있던 쌀밥 맛과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던 어느 이른 새벽, 사람도 차도 없는 네거리에서 정지신호를 끝까지 지키고 섰던 자동차를 보고 받은 느낌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지금도 일본엘 갈 때 마다 그 때 경험한 쌀밥 맛과 신호를 기다리던 차를 본 느낌을 다른 분야에서 발견할 때가 많다. 여행은 우리에게 새로움을 더해 준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에서 얻는 즐거움 외에도 뭔가를 배워오는 것이 여행에서 얻는 소득이리라. 역이나 공항, 오가면서 마주치는 모르는 사람 들과 나누는 짧은 대화, 온갖 모습의 자연, 맛 있는 현지음식, 몇 천 년을 넘어서는 인류 유산과의 대면,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런저런 모습 등등. 여행은 시간으로도 돈으로도 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이따금은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그리고 언제 가도 다른 시간과 공간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쌓여 온 세월의 찌든 때를 떨어내 버리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2007. 5. 13. 권 태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