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부흥동에는 안양에서 유일하게 장애인이나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 어려운 이웃이 모여 사는 영구임대 아파트가 있다. 그러다 보니 동사무소에서는 연례행사처럼 새마을부녀회를 중심으로 통, 반장까지 협력하여 명절 때마다 십시일반으로 쌀을 걷고 있다.
우리 동에는 동부녀회장이 공석이라서 통장인 내가 자루를 들고 가가호호 방문하게 되었다. 대다수는 잘 협조하지만 개중에는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내는 인색한 손길도 있다.
일산에서 이사온 지 얼마 안 되는 301호 이영임(43세)씨는 "관리실에서 협조를 요청하는 방송을 듣고 기다렸다"며 선뜻 현금 5만원과 10Kg 정도의 쌀을 내놓는다. "이거 중간에 유실되는 것 아니냐"고 의혹의 눈으로 보아온 이웃들에게서 받았던 시름까지 걷히는 듯 힘과 용기가 생긴다.
바구미나 벌레 득실대는 쌀을 내놓으며 겸연쩍어하던 손길을 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쌀자루를 들고 난 한동안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내 눈에 비친 그 쌀벌레들은 너무도 사랑스러웠고, 내가 그토록 염원했던 꿈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2~3년 전, 우리 가족은 죽으로 연명하며 IMF 한파로 시작된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했었다. 그때 나는 쌀벌레 나도록 쌀을 쌓아두고 살아보는 게 유일한 꿈이자, 소원이었다.
벌레가 득실거리는 쌀을 내놓는 손길을 나는 부러워하며 멍청히 서 있었다. 그리고 아련한 향수 속에 숨겨진 내 뒤안길을 돌아보았다.
보리이삭이 누릇누릇 익어가던 60년대 중반일 듯하다. 찰랑찰랑 엉덩이까지 내려온 비단결 같은 언니의 머리칼은 단숨에 싹둑 잘려져 양은장수의 손에 넘겨졌다. 막둥이 출산하고 허기져 누운 어머니를 위하여, 언니가 준비한 저녁상에는 하얀 쌀밥과 미역국이 올랐다. 나와 동생은 꼴깍꼴깍 군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아침은 시래기가 절반인 보리죽, 점심은 밀기울이나 보릿겨개떡이 아니면 칡뿌리나 찔레순으로 주린 배를 달래던 시절이었다. 거무칙칙한 얼굴에는 군데군데 버짐꽃이 피고 배만 불쑥 튀어나온 모습은 그 시절 농촌 아이들의 전형적인 표상이었으리라.
어머니는 우리 6남매에게 그 먹음직스런 상을 물려주셨다. "쌀밥아! 너 본 지 얼마만이더냐" 허겁지겁 굶주린 돼지 새끼처럼 씹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키는데, 언니 오빠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못 본 척 먹고 있을 때 언니가 곁에 앉으며 엉덩이와 허벅지를 꾹꾹 찌르다가 꼬집었다.
"하야야~ 왜 꼬집어" 소리치며 수저질이 빨라졌다. 그때, 오빠가 서울구경 시켜준다며 나와 동생을 뒤뜰로 끌고 나갔다. 서울구경은 빌미였고, 눈치 없이 퍼먹은 쌀밥에 대한 호된 질책으로 눈물까지 찔끔거려야 되었다.
미역국을 말아놓은 쌀밥은 퉁퉁 불어갔고, 어머니는 동생과 내게 더 먹으라고 눈짓을 했다. 바라만볼 뿐, 칡뿌리 씹고 물 마셔 배부르다며 6남매가 남겨둔 미역국 말아 삭아버린 쌀밥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굶주림의 터널을 지나온 나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많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장생활 중 절반은 1인 2역 또는 3역을 하며 동생들 뒤치다꺼리로 젊은 청춘을 다 소비했다.
그러다 같이 근무하던 동료 노처녀가 사직하며 "20년 벌어 30년 못 살겠니?"하는 말에 힘을 얻었다. 늦깎이 결혼으로 남매를 출산한 후 40고개를 넘어서야 아이들 양육을 핑계로 23년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전업주부로 안주할 무렵, 딸애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왕따'란 휘오리가 태풍의 눈이 되어 우리 가정에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늦게 얻은 너무도 소중했던 딸을 데리고 소아 신경정신과 병원을 전전할 때 나는 보릿고개보다도 더 처절한 좌절과 절망을 감수해야 했다.
그 터널은 생각했던 것보다 깊고 어두웠다. 노후까지도 걱정 없을 줄 알았던 가정경제는 바닥을 드러냈고, 정신력으로 지탱하던 내 육체마저도 힘을 잃어갔다.
집과 차가 유일한 재산이라서 의료보험료도 만만치 않았다. 병원마다 입원할 것을 종용했지만, IMF와 함께 시작된 남편의 실직은 진통제조차도 선뜻 살 수 없었다. 비참하다 못해 처절한 추락이었다.
그 무엇 하나 아쉬움 없이 풍요롭게 자랐던 내 아이들, 온 세상을 휘휘 젓듯 활보하던 내 오만함은 속절없는 환경 앞에서 날개 잃은 독수리 신세였다. 만성적 두통과 함께 시작된 하혈과 빈혈로 난 호흡조차 힘들었고, 간신히 숨만 할딱이는 산송장과 다르지 않았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요행이던 어느 날, 쌀 포대가 바닥을 드러냈고 사방을 둘러봐도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어서기도 힘든 몸이지만, 보릿고개를 넘어온 저력으로 무나 콩나물로 죽을 끓여 보았다. 내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이들이 먹고 남긴 멀건 국물이 유일하게 내 몫이 되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이 생활이 일주일 정도 지속되자, 속모르는 아이들은 "또 죽-밥이야. 난 안 먹을래." 데굴데굴 구르며 요동을 쳤다. 하지만, 난 슬프지도 비참하지도 않았다. 다만, 딸애가 또 언제 병원에 갈지 모르는 긴장감이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내게 삶에 대한 강한 욕구가 일어 관리실에 헌혈증서를 부탁하는 방송을 요청했다. 수혈을 받으며 소중한 피를 나눠준 이들을 생각하며 감사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던가!
손바닥부터 혈색이 돌 무렵, 조간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현기증이 나면 신문뭉치를 끌어 앉고 쪼그리고 앉았다. 9시를 넘겨서까지 배달을 하다보니 구독자의 불만에 찬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쌀 한 가마의 생계가 달린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첫 달 배달료(18만원)로 20Kg들이 쌀 3포대를 구입했다. 나는 그 쌀 포대들을 깔고 앉아도 보고 수없이 어루만져도 보았다. 갑자기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가슴 가득 알 수 없는 풍요로움이 넘쳤다. 신문배달은 가족의 생계뿐만 아니라, 내게 건강과 생활의 여유를 찾아주었다.
내게 쌀을 쌓아놓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묘한 버릇이 그때부터 생겼다. 아직도 휘황찬란한 도심의 불빛 언저리에는 한 그릇의 쌀밥을 갈급해 하는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쌀푸대를 들고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이 쌀이 정말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가 되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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