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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 제방하던 봄날은 머무는 듯 마는 듯 하더니 어느새 가버리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성하의 계절로 접어들어 산천의 색깔이 짙은 녹색으로 변해져 가고 있는 6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6월25일!
평소 보다 이른 새벽 4시경에 잠이 깨어 일어난 것은 우리 나주김씨의 비조이신 계자 황왕자 범공선사의 숨결과 향기가 스며 있고 서리어 있는 경상북도 성주 가야산 법수사지 삼층석탑을 참배하러 가는 설렘 때문인 것 같다. 이는 마치 철모르는 어린 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소풍 갈 때 느꼈던 설렘 때문에 잠을 설치다 일찍 일어 난 때와 같은 기분 이상의 설렘이었다.
이번 법수사지 삼층석탑을 참배하러 가게된 것은 나주김씨중앙종친회(회장 김성숙)에서 종친들에게 숭조 정신 함양과 돈목의 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1박 2일 일정으로 연찬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본인에게 연찬회 첫날 숭조정신 함양과 정체성에 대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본인이 이틀간 출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특강은 사전에 보내준 원고로 대치하도록 하고 연찬회 2일 차 일정인 법수사지 삼층석탑 참배에는 참석하기로 하여 법수사지로 향발하게 되었다.
6시 조금 전 동편하늘에 찬란하게 아롱지는 아침노을에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하다가 내자(內子)와 함께 작은아들 성환이 운전하는 차로 집을 나서서 시원하게 뚫린 자유로에 들어서 가게 되었는데 자유로와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민족의 젖줄 한강에는 뽀얀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어서 신비감을 넘어 경이롭기 까지 하였다.
이 물안개는 강변북로를 거쳐 한남대교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방향을 바꿀 때 까지 이어져 피어오르고 있어 달리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한강 반대편의 빌딩 숲들도 희미하게 윤곽만 보일 정도이고 한강의 수면과 점점이 한강에 박혀있는 밤섬 등 섬들조차도 보일 듯 말듯 전개되고 있다,
차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려가다가 신갈 인터체인지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길을 바꾸어 한참을 달리다 여주 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진입하여가게 되었는데 분기점 가까운 도로변에 여주시가 세운 홍보판에 ‘세종인문도시명품여주’라고 써 놓은 것이 눈길을 끌고 마음에 와 닿는다. 인류사에 금자탑을 이룬 한글을 창제한 성군 세종대왕의 만년유택인 영릉이 봉안되어 있어 대왕을 숭모하고 기리고자 국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음에 착안하여 만들어 놓은 구호성 표어이지만 이렇게 만들어 만인으로 부터 공감을 받고 위대한 세종대왕을 다시 한 번 더 숭모하고 그리게 하도록 한 여주시의 기지와 안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음성과 무극, 충주와 수안보를 빗겨 지나 충북 괴산 두류봉 아래 아담하게 자리를 잡은 괴산휴게소에 8시경에 도착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기를 30여분 한 후, 조령 터널을 지나고 삼백(三白)의 고을 상주를 지나쳐 김천 선산을 스치며 성주로 향해 달려갔다.
지금부터 11년 전인 2007녀 5월15일 본인이 나주김씨중앙종친회장 재임시절 나주김씨 비조이신 충절의 표상으로 역사상 회자되고 있는 나주김씨 비조이신 계자 황 왕자 범공선사가 신라천년사직을 부왕인 경순왕께서 고려에 손양하려 할 때 이의 불가함을 형인 태자일(鎰,마의태자))과 함께 극간하다가 가납되지 않자 사작불수 기처자하고 영사 입산하여범공 스님이 되신 사찰(寺刹)이 우리가 종래까지 알고 왔던 해인사가 아니고 가야산 성주 법수사라는 것을 각종 사서와 문헌을 섭렵 끝에 처음으로 알아내고 임진왜란 때 폐사되어 지금은 삼층석탑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법수사지를 방문하기 위해 긴장과 흥분 속에 당시 중앙종친회 안웅(34세), 명희(38세) 부회장님과 우백(35세) 사무국장괴 함께 이 길을 달려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시 중부내륙고속도로는 김천아포까지만 개통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포에서 59번 국도로 길을 바꾸어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법수사지 까지 갔었는데 지금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성주를 거쳐 창원까지 연결되고 성주에서 법수사지까지 가는데도 새 길이 개통되고 기존59번 도로도 정비되어 접근하기가 한결 빨라졌다.
법수사지에 도착한 시간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고양 일산‘을 떠난 지 4시간만인 10시 경이다. 법수사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족은 차를 신토불이 식당 앞 주차장에 주차하는 즉시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자세로 법수사지삼층석탑으로 달려가 우선 삼배의 경배를 올리고 탑돌이 3회를 한 다음 국가보물 1656호라고 명기된 법수사지 3층 석탑 안내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순간 처음으로 계자 황왕자가 입산하여 범공스님이 되신 사찰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가야산 해인사가 아니고 성주 가야산 법수사라는 사실을 알고 긴장과 흥분 속에 중앙종친회 임원 몇 분과 함께 삼층석탑에 탐방했을 때의 감격과 환희가 복받쳐 올라왔던 순간이 떠올랐으며, 아울러 안내문에《삼국유사에 신라 경순왕의 계자인 김황(金湟, 나주김씨의 비조)이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사에 머물면서 해인사에 드나들며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라는 사실의 기록을 위해 2년여 동안 문화재 당국에 관련 문헌과 사료를 수합하고 분석한 자료들을 제출하고 건의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2007년 7월7일 마침내 「나주김씨의 비조」라는 7글자가 기록되는 안내문이 작성되어 우리 나주김씨가 천년 신라김씨의 적통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를 만든 사실기록을 기념하는 동시에, 천여 년 전 신라가 종언을 고할 때 사작불수 기처자하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영사입산 하시어 전설로만 남아 있을 법한 범공선사께서 세상 밖 후손의 곁으로 모실 수 있게 된 것을 경하하고 기념하기 위한 헌공다례를 사실 기록한지 나흘 후인 7월11일 봉행했을 당시에 시일이 무척이나 촉박했음에도 전국에서 80여명의 종친들이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던 일들이 내 가슴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한없는 뿌듯함과 보람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성취는 뜻 있는 우리 나주김씨 종친들의 단합된 의지와 결집된 지혜, 그리고 용기 있는 결단의 소산으로 이루어 진 값진 것이기에 지금도 무한 감사를 드리는 바이며, 특히 영남지역 본부장 역할을 하고 있는 김성광 박사께서 중앙회와 긴밀한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유지하면서 현장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신데 대해 언제나 늘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다.
삼층석탑에 경배를 올린 후 법수사지(址)일대를 둘러보았다. 법수사지 일대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성주군(군수 김항곤)과 (재)대한문화재연구원(원장 이영철)에서 삼층석탑 기단 부분이외에는 2015년 6-11월과 2016년3-5월 2차례 걸쳐 발굴하여 기와류, 자기류, 청동합, 청동불상 등 3000여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출토 되어 수습했는데, 이중 의미 있는 자료들은 학술조사를 위해 전문기관으로 이동 분석 중에 있으며, 다량으로 발굴된 기와류 와 도기류는 사지 공터에 군데군데 무더기로 우선 쌓아놓고 있으며. 사지일대는 발굴로 파 헤졌다가 메워져 있어 어수선하고 다소 을씨년스러웠다. 문화재당국에서는 발굴된 자료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발굴을 진행해야 할지, 현 상태에서 마무리하고 사지에 대한 정비와 보존 방안을 마련하여야 할지를 강구중에 있다고 한다. 사지를 둘러보며 상황 전개에 따른 대응 방안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성광 박사와 대한민국 전통미술 대명장인 백미자’ 부부께서 도착했고, 뒤이어 11시경이 되었을 때 100명의 종친들이 승합차와 자가용을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도착하기 시작했다.
종친들이 도착하자 삼층석탑 앞에 천년을 하루 같이 묵묵히 지키고 있던 돌로 만든 연화좌에 나주김씨 종친 일동이 마련해온 꽃바구니를 놓고 종친들이 도열하고 경건하게 3배를 올리며 충절과 효경심의 표상인 범공선사 계자 황 왕자를 기리고 숭모하였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를 삼층석탑으로 향하게 하고 시계 방향으로 탑돌이 3회를 하였다. 이어서 본인이 종친들에게 인사말씀을 겸한 범공선사와 삼층석탑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이 법수사지는 우리나라 역사상 충절의 표상으로 숭앙 받고 있는 나주김씨의 비조 범공선사께서 망국한을 품고 1000여 년 전에 스님이 된 사찰인 법수사지 터이기 때문에 그분의 얼과 정신이 녹아 있는 곳이고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역사에 아이러니라는 것이 있는데 신라경순왕의 별자(9자) 덕지를 관조로 하는 울산김씨 측에서 범공선사를 자기네 관조라고 환부역조하는 망발을 하고 있어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동사강목 등 사서와 신라김씨계 각 성씨의 보책과 문헌 사료 등을 섭렵 분석하는 과정에서 계자 황 왕자가 법수사로 입산해 범공 스님이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이 사실을 문화재인 법수사지 삼층 석탑 안내문에 기록하기 위해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성취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우리 나주김문이 신라김씨의 적통 후예임을 화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드리고 우리후손들은 이 법수사지를 자주 방문하여 범공선사의 얼과 정신을 기리고 숭모하고 선양하며 소통하는 소중한 힐링의 공간으로 활용하자고 강조했다.
법수사지 삼층석탑에 대한 참배와 설명이 끝난 후 종친들께서는 삼삼오오 무리지어 석탑을 돌기도 하고, 안내문을 찬찬히 다시 살피는가 하면, 어떤 이는 기념사진을 촬영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일부는 발굴한 흔적들을 살피기도 하고, 어떤 종친은 법수사지 뒤편에 병풍처럼 서있는 가야산 바래봉을 비롯한 이어진 봉우리들을 조망하기도 하고 법수사지 앞쪽에 전개된 마을 아래 논밭 넘어 옅은 안개 속에 쌓여 있는 유장한 산들을 보고 살피면서 법수사가 해인사보다도 더 큰 사찰로 있었을 때와 범공선사께서 주석하면서 목탁을 두드리고 화엄경을 독경하며 가없는 경천순민의 대의에 따라 천년사직을 고려에 손국할 당시의 부왕의 침통하고 초췌한 용안을 떠올리고 이해하며 앞으로의 강녕을 축수하고, 상악으로 떠난 죽방모후와 형인 마의 태자 일행의 무사 안녕을 빌고, 범공이 입산할 때 옷자락을 잡으며 부왕과 같은 행보를 하면 안 되겠느냐고 울며 만류하던 빈 옥저 하씨와 운발 우발 두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인생의 덧없음을 되뇌이면서 모든 중생이 번뇌와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처님께 열심히 기구하시던 범공 선조의 천 년 전 모습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으며 숙연해 하기도 했다.
점심식사는 법수사지와 이어져 자리 잡은 신토불이(사장 강희천)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했다. 종친들은 연찬회 일정이 잘 계획이 되어 보람이 있었고 존조 숭선 정신을 함양하고 종친의 화합과 돈목에 크게 기여한 유익한 연찬회가 되었다고 대체적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은 일신상 사정 때문에 연찬회 특강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번 법수사지 참배는 후손 100여명이 참여했기 때문에 규모 면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충절의 표상인 범공선사의 충효정신을 숭모 선양함은 물론 관련 사적을 답사 연구하고 기록보전사업을 수행하여 후손들의 위상을 향상시키고 널리 알리는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뜻 있는 종친들의 중의를 모아 범공선사숭선연구회를 사단법인으로 문화재 당국의 설립허가를 받고 법원에 등기를 마치는 등 행정 절차를 모두 마무리 한(6월21일) 시점에서 범공선사의 얼과 정신이 깃들고 서리어 있는 법수사지삼층석탑을 참배하게 되어 더없이 기쁘고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중앙종친회 기획 하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2017 연찬회는 천년을 면면히 신라김씨 적통으로 이어온 우리나주김씨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고 다지며, 존조 숭선 정신의 함양, 종친간의 단합과 일체감 조성, 그리고 구심체적 역할을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감안하여 매년 계속 사업으로 추진하여 종친회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나주김씨조경단 설단시 바친 비문을 발췌하여 적어 본다
“천년을 향기롭고 튼실히 이어온 문중의 면면하고 빛남이여
황(湟)왕자와 나주군의 가없이 은근하고 고귀한 음덕과 은택이여
크나큰 입지와 교훈이여 감복하고 숭앙할 따름이다
일족의 번창에 보은하고 즈믄 해를 이어온 정통성과 정체성을 다지며
문중의 기운이 대하장강, 장대한 산맥과 같이 천추만대에 이어지기를 염원하고
영원하여야 할 후세의 존조숭선과 세수돈목을 다짐하면서 이글을 정리한다.“
2017,7.1
지상 김 근 학 (중앙종친회 고문,
사단법인 범공선사숭선연구회회장) 근서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