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보디아후기
변희우
1. 여정을 품고
여행의 목적이라면 견문을 넓히고 관광을 즐기려 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그리 쉽지 않은 빈민 처를 방문하는 조건을 걸어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를 체험으로 담아 보려 했다.
사지 같은 험지에서 생활하는 강덕수 목사님과 가끔씩 카카오 톡으로 연결이 되었다. 알고 보니 그것도 시내에 나와 편의점에 일부러 가서 보낸다고 했다. 한 번 오라는 치레 아닌 진정한 인사말에 작정을 했다.
여기에 가세한 얼굴도 뵌 적 없는 문인 양정숙님의 전화 한통으로 여행은 이루어졌다. 인터넷을 수없이 드나들어도 김해공항에서 씨엠립까지는 1인 편도 60만 원대를 호가하는 금액이 나와 감히 엄두를 못 내는데 두 사람 왕복이 676,000원에 예약과 송금을 마쳤다. 전자항공권을 카톡으로 받고 암튼 이런 항공권은 여행지기 수년에 처음 있는 일이라 했다.
캄보디아 하면 먼저 떠오르는 악몽 같은 킬링필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2백 만 명의 대학살이 이뤄진 참혹한 학살이 이루어진 캄보디아가 아닌가? 이해 할 수 없는 죽음 이유를 안경을 쓰고 있어서, 잘 생겨서, 학생이라서, 손에 굳은살이 없어서, 등으로 학살을 했다니 이 나라 잘난 사람들은 그때 다 죽었고 이 나라는 현재 젊은 사람들 많은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tv시청이나 말로 전해오는 것과는 너무 차이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것을 지금부터 풀어보고자 한다. 캄보디아가 우리 보다 후진국이라고 해서 배울게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 생각을 했다. 오토바이, 툭툭이, 그리고 차들, 정말 무질서 한 것같이 보였지만, 내가 실지로 운전을 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조금만 느리게 가도 빵빵거리면서 여차하면 욕바가지를 씌우고 툭하면 주먹까지 내지름은 물론, 왕발구로 나서 보복 운전이라는 것으로 상대방을 골탕을 먹이는 성깔대로 노는 우리나라 운전수들 그 곳에 가서 반성하며 배워 와야 한다. 물론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지만 이번 여행으로 깨달음이 많다. 4차선 도로에서 유턴을 해도 발발거리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히 기다려주고 경적소리 거의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씨엠립 큰 시에 가로등 한 개밖에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이번 여행에 국제면허를 내서 내가 직접 운전을 해보니 무질서한 것 같았던 이 나라의 교통이 그래도 양반이라는 것이다. 길에 차를 세우고 지나는 차와 대화를 나누어도 쓸데없이 재촉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미덕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
4월16일 봄비 잦은 것과 시어머니 손 큰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데 이날따라 오후부터 강풍을 동반한 소나기성 폭우가 우리 부부를 불안케 했다. 집에서 나설 때는 비 한 방울 없는 둘이 먹고 하나 안 주는 잔뜩 찌푸려 군데군데 먹구름을 고명으로 동동 띠우더니 저녁나절부터 시작한 빗줄기는 무섭게 후다닥거리며 창에 부딪힌다.
김해공항 불안을 가누지 못함이 시간이 넘어도 수속을 밟지 못하고 안타까운 전광판만 주시하고 있어야만 했다. 상하이로 가는 7시비행기는 결항 되었다는 좋지 못한 소식이 연신 방송으로 흘러 나왔다. 초조한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함께 갈 목사님이 오시지 않으니 이는 또 무슨 변괴랴? 이쯤에서 아내에게 안도를 주고 싶은 남자의 존심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우리 비행기 못타면 둘이 섬으로 가서 일주일 살고 오자고 했다. 아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캄보디아 가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 시간 반이나 지연이 된 비행기를 탈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비행기를 타고도 관제탑의 지시를 받기 위함 이라고 한 시간 가량을 더 기다려야 했다.
크지 않은 비행기는 째질 듯한 굉음을 울리며 이륙을 했다. 정상고도에 오르고 부터는 용트림을 한 번씩 했지만 순조로운 비행을 했다. 기내식으로 해물 볶음밥이 나와 입맛에 맞아 한 톨까지도 다 비웠고 창문이 암흑천지로 바뀐 밤하늘을 가끔씩 내다보며 순항의 일정에 감사하는 마음의 기도를 올렸다.
씨엠립 앙코르 공항 12시 30분 도착 부지런히 짐을 챙겨들고 비자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비행기에서 나눠준 용지를 은총이 맡아서 작성을 해주었다. ‘은총이와 은별이’ 라는 동화책이 20판을 넘는 베스트셀러여서 한국에서는 은총이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 것이라 생각했고, 그 아이는 자라서 숙녀 티가 완연했다. 눈을 뜨고도 잘못 보는 영어로 우리부부 입국서류까지 다 해주는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
은총이 호주로 진출 하려 했으나 아버지를 도와야 해서 캄보디아에 산다고 했다. 여행기간동안 어디를 가나 우리는 은총에게 의지해서 다녀야 했다. 은총이 덕분에 더듬지 않는 쉬운 여행이 되었다. 캄보디아는 크메르어를 쓴다지만 유식하다 생각 되는 사람들은 거의 영어로 통했다.
여기서 나는 웃고 넘기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비자를 받는 대금이 미화 30달러인데 여권과 작성 카드를 제출하니 우리말로 “일딸라” 라고 외친다. 다 주는 것 인줄 알고 1달러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게 웃긴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그런 말도 하지 않고 꼭 한국 사람에게만 한다. 스위스에서 왔다는 내 뒤의 부부는 1달러 없이도 나와 똑 같이 통과 되어 공항을 나왔다. 이것이 무척 궁금해서 당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나오면서 목사님에게 물었다.
목사님은 그게 한국 사람들의 ‘빨리’ 문화에서 온 부정이라고 했고, 다른 나라사람들은 아예 받을 생각도 안하면서 유독 한국 사람에는 one dallor를 요구 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급행료를 지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위 기분파라는 소리로 어깨놀이에 내로라하며 네들이 무슨? 혹은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뻐기면서 주제파악 못하고 내미는 돈 자랑으로 객기를 부리는.... 그런 모습으로 빨리 해주면 기분으로 1달러를 날린다는 군중심리를 이용하다보니 유독 우리만 비자를 받는데 31달러를 내게 되고 이유 없는 돈을 지불하게 됨이 몹시도 껄끄럽다. 지불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물어 보았다. 1달러를 내지 않은 한국 사람의 여권을 따로 모아 두었다가 다른 사람들 다 하고 난 뒤에 해준다는데 굳이 우리 민족만 그런 대우를 받는다는 게 안타깝지만 앞서 이 나라를 찾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일이라 자업자득임을 깨달아야 했다.
12시 30분, 이라지만 내가 차고 있는 시계에는 2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한참을 더듬거리다 자가용차를 한 대 만나 공항을 나와 파라다이스라는 씨엠립 호텔방까지 20달러에 거래를 했다. 1실에 35달러라면 제법 중류호텔에 든다지만 역시 후진국이라 그런지 책상위에 물병3개가 전부였고 큰 목욕 수건을 가져왔는데 이건 우리 집 걸레보다 한참이나 격이 낮은 그런 묵은 때가 시커멓게 묻어나는 수건에 차마 얼굴을 닦지 못하고 발 씻고 발 닦는 수건으로만 사용 하였다.
대강 샤워를 하는데 물도 이건 아니다 싶게 끈끈했지만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생각나서 오래 살 것도 아니니 이래 살자고 자위하면서 에어컨을 켰는데도 찬바람이 나오는지 마는지 이마에 땀 흐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시달린 여독 탓인지 몸을 누이자마자 코를 골고 잠을 잤다.
2. 새로운 시작
아침 6시 호텔 1층에 뷔페가 있다고 해서 갔다. 감자튀김, 그리고 칼국수처럼 생긴 음식과 나머지는 전부 과일로 채워진 아침 뷔페는 그리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우리 부부는 망고를 무려 네 번이나 더 들고 와서 먹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툭툭이를 15달러에 전세 내어 앙코르와트 구경에 나섰다. 처음 간곳이 매표소였다. 매표소에서 길게 널어선 길을 잘못 들어 무슨 표가 이렇게 비싼가 의아스러웠고 값이 달라서 이상해서 물어보니 3일표와 당일표가 다르다는 것이다. 3일표는 40달러이고 당일 표는 20달러였다. 20달러씩을 지불하니 매표소 앞에 줄을 서라고 했다. 한 명 한 명씩 사진을 찍어 그 사진을 표에 부착되어 왜 이러는지 궁금했지만 앙코르와트 탐방을 시작 하면서 그 뜻을 알고도 남았다. 중간 중간이 표를 보자고 해서 본인 인지 아닌지 대조를 하는 것이었다.
앙코르와트 역사나 유래에 대해서는 나보다 유명한 사람들이 기술한 책들이 많아서 굳이 나까지 소개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고로 나는 내가 접한 체험만 전하고 싶을 뿐이다. 한마디로 아~악! 소리가 절로 나는 경관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토록 관광객이 많은 줄도 몰랐다.
그러나 주위 환경들을 보면 후진국의 민낯을 그대로 들어내는 듯이 보여 군데군데 쓰레기 천국이었고 애써 치우려 한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툭툭이를 세워두고 구경을 하는데 꼭 봐야 할 곳은 말하지 않아도 세워 들어갔다가 나오라는 손짓을 해주어 고맙기도 했다. 거리에 오토바이를 세워둔 건장한 남자들이 왜 저렇게 서있는가 물었더니 택시 영업을 하기 위함이라 했다. 한 두 사람을 만나면 오토바이 택시가 된다고 했다. 복잡한 거리에는 빠져나가기 좋아 오히려 오토바이가 더 빠른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위는 기승을 부려 11시가 넘자 무려 40도의 열기를 뿜어대는 것이다. 열기 속에도 군중의 무리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한국사람 가이드의 말로는 앙코르와트에 밥벌이하고 사는 사람만 90만 명에 달한다고 해서 기염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편 어느 사원에서 한국말로 설명하는 가이드가 있어 좀 들어보겠다고 갔더니 30대 여자는 짜증을 내면서 뭐냐고 대들어 머쓱해서 돌아서면서 나 같으면 어차피 설명 하는 것 한 사람 더 들어도 무관 하겠지만 짜증까지 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같은 동포끼리 설명 좀 들었다고 그렇게 화를 내는 저 여자는 틀림없이 집구석에 가도 남자 천신도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외롭게 살 거라고 은근히 심술보가 발동을 해서 욕지거리를 퍼붓고 싶었다.
암튼 앙코르와트 하나는 충분한 세계적 유산 가치가 되고도 남는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저토록 웅장하게 만들었는지 정말 탄복할 일이다. 많은 구경을 했지만 기술되어있는 부분들과 별반 다른 게 없어서 여기서 접자.
오전을 허비하고 나니 속이 허전해서 역시 과일 배는 금방 꺼진다고 우스개를 남겼다. 점심을 북한에서 운영한다는 평양랭면집에서 먹자고 했다. 천 명 정도가 들어갈 극장식 식당은 길가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핵실험 이후 처절하게 가해진 대북제제 로 인해 관광버스가 주차할 곳이 없어 쩔쩔매던 곳에 종업원으로 보이는 초록색 옷을 입고 가슴에 빨간 인공기를 단 여자들만 간혹 눈에 띄는 정도다.
기껏 손님이라고 해야 우리뿐이어서 한 구석진 자리에 들어가 앉아 먹는데 예쁜 아기씨들이 우리 자리에 와서 평양김치를 시키라고 자꾸 권하는 것이었다. 목사님이 언제 이곳에 왔느냐니까 2년 됐다는 아가씨가 김치를 시키고 냉면을 시켜 먹는 동안 우리 자리에 와서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혹 무슨 지령이라도 받고 온 사람처럼 보여 기분이 꿀꿀했지만 어차피 구경 온 참이니 점심이나 먹고 가자고 해서 점심을 먹는 동안에 대형 스크린에는 공연하는 모습을 녹화방영하고 있었다. 라이브공연은 언제부터냐고 묻자 ‘오늘은 쉽니다.’로 간단히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김치 1/4 포기에 9달러를 해서 전부 39달러를 내고 우리는 그 집을 나서기 전에 물 한 잔 요청을 하자 ‘캄보디아는 물이 안 좋아서...’하며 공짜로는 물 한잔의 인심도 나누지 않으려 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목사님이 계시는 시즈폰 시티에 있는 은총교회를 향해 출발 했다. 택시로 나섰는데 4차선 도로가 일직선으로 그어진 평야지대를 달려도 끝이 없다. 약 한시간정도 가니 비포장도로가 나왔지만 먼지만 펄럭일 뿐, 포장도로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직선도로 양쪽에는 정사각형의 잘 짜인 바둑판이 좍 깔려 있었고 논두렁이라기보다 경계를 표시 하는 듯 한 코코넛 나무가 즐비하게 서있고 가끔은 호주에서 지겹도록 보아온 유카리튜스도 보였고, 더러는 너무 단단해서 썩을 줄 모르는 나무라는 이앵나무도 보였다. 아득한 벌판이란 어휘가 실감을 불러왔다.
거의 두 시간이 걸려서 도착 되었고 택시비는 20달러를 지불했다. 시즈폰 은총교회의 간판이 정말 정겹게도 나를 반기는 듯했고 목사님 귀국하고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집이라 안에 먼지가 가득했지만 곧 깨끗이 치워졌다.
잠시 후 시장 구경을 가기로 했다. 시장이라고 지어 놓긴 했지만 마치 50년대 우리 시골 시장과 흡사해서 좌판이라고 생선 궤짝 몇 개를 포개놓고 달랑 몇 개 정도 올려놓은 게 전부였다. 돼지고기나 생선가게 앞에는 사람보다는 파리들이 먼저 줄을 섰고 사람들이 그냥 앉아서 팔자는 의욕조차 없는 듯 보였다.
안남미 쌀에다 안남미 찹쌀을 섞어 잠시 맡겨 두고 다른 물건을 사오니 돈을 받지 않았다고 돈을 내라고 부득부득 우겨서 다시 돈을 주고 왔다. 험악한 세상이라 그랬는지 시장 사람들이 한통속이 되어 봉으로 보이는 외국인이라고 꼭 받은 일이 없다고 해서 그러면 다음부터는 이곳에 절대로 안 온다는 경고를 보내고 돈을 주고 나왔다.
만약 말썽이 일어나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설명에 왜 그래야만 하는지 화가 났다. 미국인 같은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고 만만한 홍어x이라고 꼭 한국 사람을 얕잡아 보고 그런다고 했다.
시장에서 돌아와 처음 먹은 것은 망고다. 필리핀에서도 망고를 먹어 봤지만 이토록 이렇게 달고 맛있는 망고가 아니었다. 입에 살살 녹는 망고를 먹성 좋은 아내와 내가 실컷 먹었다. 이어 저녁은 안남미로 밥을 지었는데 찹쌀이 들어가서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차지고 맛을 나쁘다고 평가 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 근처의 사는 모습들을 구경하기 위해 나섰다. 한마디로 표현이 어렵다. 집집마다 현관 앞에는 금색으로 된 한문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와 조금은 다른 게 立春大吉 이 아니라 立春多慶 이라 쓰여 있고 다른 글씨도 많았지만 별로 중하게 여기지 않았고 특별히 생각나지 않는다.
미용실이라는 델 가봤다. 사방이 쓰레기 천지인데 창문이라고 없이 그냥 맨바닥에 간판도 없고 그렇다고 유행의 첨단을 걷는 다는 기계 하나 없이 뚱뚱한 아주머니가 중요 부분을 수건 한 장으로 가리고, 위는 거머틔틔한 살결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내어 놓고, 혹시 손님이라도 왔는가? 활짝 갠 얼굴로 반긴다. 목사님이 어설픈 통역으로 아내를 코리아 미용실 원장이라고 하자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우리가 앉을 의자도 하나 없어 자신도 서있는 게 전부였다.
미용실 앞집은 빵공장이라고 해서 무슨 시설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식구 수는 몇인지 몰라도 평상 하나가 전부였지만 씽크대 하나 없는 허허 벌판 같은 곳에 달랑 책상으로 보이는 선반 하나가 전부였다. 밀가루가 아닌 식물에서 얻는 재료가 있다는데 그걸 대강 들어 잘 몰라 이름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하여간 빵이 담겨있는 그릇에 파리님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었는데 야구 방망이 같은 빵이 맛이 전혀 없다고 해서 먹어보니 그렇게 탓할 정도로 맛이 없진 않았다. 그저 거짓말 하고 뺨맞기보다는 나은 정도지 입에 달라붙는 맛이 아니라 억지로 아니라도 먹을 만 하다는 것이다.
동네 한 바퀴 돌아오는데 큰길에서 난리가 터졌다. 오토바이가 지나가면 사정없이 물을 뿌리고 물총을 쏘아대고 젊은 사람들이 춤을 추며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난리 법석을 떤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물 축제(water party) 기간 중이라고 했다. 물이 얼마나 귀하면 물 축제라는 것을 열어 온통 40도의 열기를 이렇게라도 식혀보려 한다는 생각이 들어 측은하기도 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벼락을 안겨도 화를 내거나 싸우려 대어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밝은 얼굴로 반겨 주는데 또 한 번 그들의 민족성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악을 고성으로 틀어놓고 모두들 즐기는 듯 했고 밤에는 불꽃이 메마른 캄보디아의 하늘을 밝혀 주었다. 가관인 것이 멀쩡한 차 지붕을 잘라 픽업을 만들어서 사람을 잔뜩 실고 물을 맞으러 다니는 진풍경도 보았고, 여자들만 타고 오는 오토바이에 양동이 물을 퍼 씌워도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마냥 즐기는 태도라고 느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그랬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 구경을 하고 돌아와 여독이 쌓였는지 자리에 눕자마자 그냥 골아 떨어졌다. 캄보디아의 2일차가 그렇게 끝이 났다.
3. 캄보디아의 민낯
아침 6시 아내를 깨워 우리가 밥을 하자고 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한 손으로 하는 것이 꽤 불편해 보여서 아내와 같이 된장국 끓여서 멋진 아침식사를 장만 했지만 먹을 사람이 우리 둘밖에 없어 둘이서 맛있게 먹었다. 목사님이 대화를 사왔는데 별로 맛이 없었다.
아침을 먹고 시내 구경을 나갔다. 여기에서는 휴대폰도 안 터져서 시내를 나가야만 했다. 목사님이 얼마나 불편한 삶을 사는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여러 곳을 두루 돌면서 목사님이 지은 학교 교실도 보았다.
학교 교실이라는데 열 받기 딱 좋은 양철지붕아래 맨땅에다 나무로 만든 책상이 있는데 유심히 보지 않아도 웃음이 절로 났다. 한 줄에 두 명씩 10명이 앉게 되어 있으나 다섯 개의 책상이 양쪽으로 대못을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았다. 한 개씩 두니 훔쳐가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게 했다고 했다.
더 특이한 것은 교실에 유리창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곳에 와 느낀 것은 교실만 그런 게 아니라 집들이 유리창이 없다는 점이다. 유리 전체를 수입해오는 처지라 유리 값이 너무 비싸서 유리창을 끼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집집이 창문틀을 벽돌로 막고 그 틈새를 방충망으로 막고 산다는 것이다. 물론 방안이 캄캄하지만 습관이 되면 이것도 면역이 생겨 괜찮다고 했다. 유리문을 단 집은 그래도 부자 축에 든다고 했다.
학교도 목사님이 지어준 곳만 유리창으로 되어 있을 뿐, 다른 곳은 캄캄했고 운동장이라기보다 쓰레기장이 맞다 싶을 정도로 어수선해 보이는 곳에 메마른 건기에 비쩍 마른 소들이 무엇 먹을게 없나하고 기웃댄다.
이어 면사무소도 가보고 파출소라는 곳도 가보았다. 면사무소라고 덜렁한 집에 방 두 칸에 사람 몇이 보였고 그 뒤 공터 같은 마치 창고 건물 같은 데가 파출소라고 했다. 티셔츠바람의 경찰이 짙은 색안경을 쓰고 목사님을 반긴다. 여기도 천정은 양철인데 비라도 오면 줄줄 샐 것만 같은 구멍이 덤성덤성 뚫렸고 달랑 책상하나에 의자 하나 이게 전부였는데 무슨 민원이 그리도 많은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 두 사람이 보기엔 벅찬 것 같았다. 마당에 두리안 나무가 서있고 두리안은 아래서 열리는 듯 내 머리만한 크기의 몇 개의 과일이 주렁주렁 달렸다.
파출소에서 나와 어제의 그 시장보다는 좀 큰 곳으로 갔다. 비릿한 생선 비린내가 왕등을 했고 펄쩍펄쩍 뛰는 생선들이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망고를 사고 옥수수를 샀다. 그리고 먹어보지 않고는 열대 과일을 먹었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두리안을 일일이 까서 담는 청년에게 1달러를 내밀었더니 한손에 겨우 들 만큼의 양을 주는 것이다. 그것도 애써 뿔을 제거하지 않아도 좋게 잘 장만한 그대로를 주는 게 아닌가? 필리핀에서 두리안을 먹고 썩은 냄새 때문에 뱉고 말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여기라고 별다를까 생각하면서 한 개를 입안에 넣었다. 무슨 하수구 썩은 냄새가 후각을 예민하게 자극했지만 참고 두 개를 먹었다. 속이 굉장히 거북하다. 자꾸만 토할 것만 같아 사이다를 한 캔 사서 먹고 나니 겨우 갈아 앉는 듯 했다.
캄보디아 최고의 막바지 더위는 연일 40도를 넘었다. 5월이면 우기에 들어 1월 15일 비가오고 한 번도 오지 않았다니 얼마나 심각한 건기인지 모른다. 해마다 1월15일에는 비가 온다는데 이 비가 망고의 꽃을 수정하는 비라고 해서 신의 섭리에 다시금 감사를 올려야 했다. 더위가 솥단지를 다 데우기 전에 우리는 바탐방시티 외각에 있는 뱀부 트레인 이라는 대나무 열차를 타러갔다. 바탐방 시티는 캄보디아 3대 도시 안에 든다고 했다. 제법 큰 빌딩들의 사열을 받았고 외각으로 나가면 그 나물에 그 밥 타령을 버리지 못했다.
당도 한 곳은 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는 철길을 오랜 세월 방치해 두다보니 엿가락처럼 휘어서 못쓰게 되었다. 태국 국경 가까운 쪽으로는 철로를 다시 깔아서 열차가 다닌다고 했다.
대포 껍데기로 만들었다는 두 개의 심부에 대나무 평상을 걸쳐놓고 예초기 엔진을 연결해서 막대기를 당기면 전진이고 멈추면 스톱이 되는데 이게 여간 스릴 있는 게 아니다. 두당 5달러씩 내라는걸 15달러에 합의를 보고 지불했다.
처음엔 조금 가다 말겠지 했다. 속력이 거의 시속 40km가 달렸다. 40km x 20분이면 8km를 달린다 생각하면 된다. 지루할 정도로 끝없이 달렸지만 비교적 안전했고 다리를 통과할 때나 많이 휘어진 철로에는 간을 읊조리는 스릴도 있었다. 그렇지만 별반 위험을 느낄 정도의 안전을 해하지는 않았다.
가다가 다른 팀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열차를 해체를 해서 지나갔다. 나름대로의 철칙이 정해져 있어서 사람 수가 적은 쪽이 해체를 했다. 킬링필드 이후에 다시 재건 할 만큼의 여유가 없어서 철로를 그대로 방치한데서 고안해 새로운 돈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직접 타본 소감은 불안전 하지도 않았고 재미가 없지도 않았다.
종점에서 냉장된 코코넛 한 개를 마시고 되돌아오는데도 세월의 흔적에 뒤틀리고 휘어진 철가치가 저절로 비틀려서 이음새를 지날 때마다 탈칵거리는 것이 여간 스릴 있는 게 아니다. 아내는 무척 재미있다고 즐겁게 웃었고 덩달아 나도 서진이 처럼 보조개를 피워 행복의 지수를 높였다.
4. 아픈 가슴으로 체험
4월19일 아침 일찍 우리는 국경의 환자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물을 4통이나 받아놓고 시장에 가서 쌀과 라면, 그리고 닭을 사서 국경근처의 AIDS 환자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여기를 가기 위해서 나는 국제면허를 내서 왔다. 남편죽고 40대의 나이에 자식이 아홉이라니 과연 어떻게 살수 있을까가 궁금했다. 비포장도로를 벌건 먼지를 일으키며 장장 몇 시간을 달렸지 아마? 저런 곳에 사람이 산다고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곳에 사진에서 본 키 큰 여자와 아이들이 해먹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아주 젊은 소녀 같은 사람이 아기를 안고 있어 이집의 큰딸인가 했더니 이웃집에서 놀러온 아줌마라고 하는데 아무리 잘 봐 주려해도 15세를 넘진 않을 것 같았다. 정말 아이가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가관을 본 것이다.
짧은 혀를 굴려서 영어로 몇 살이냐? 물었더니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물통을 봤다. 큰 항아리가 여섯 개나 되는데 물은 한 방울도 보이지 않고 한곳에는 파리들이 밑바닥을 채우고 있어 대체 이들이 무엇을 먹고 산단 말인가? 어디를 봐도 쌀 한 톨 보이지 않고, 물 한 방울 감춰둘 곳도 없는데 큰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고 했다.
어린 아이들만 오부라기 남아서 있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먹을 것 하나 보이지 않았다. 큰 냄비를 열어봐도 밥 해먹은 흔적조차 없었다. 마루위에 사료포대로 보이는 자루 3개가 있는데 열 식구의 옷들이 가득 들어있다. 이것이 옷장인 것이다. 목사님이 돈을 주어 벽을 벽돌로 칸을 질러놓은 게 전부이고 여전히 바닥은 맨바닥인데 목사님이 갔다 논 타일들이 한 쪽 벽면에 쌓여 있다.
과연 여기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무얼 먹고 무얼 어떻게 산단 말인가? 그래도 어디서 나왔는지 주전자에 물을 담아서 내오긴 했지만 그게 먹고 싶겠냐구?
눈물을 머금고 돌아오면서 아내는 내손을 꽉 잡아 우리는 그래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했다. 빈 수레에 빈 통을 달고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오는데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수레의 바퀴가 두 개다 달아나고 없었다. 바퀴를 찾으려 되돌아가 봤지만 바퀴는 없었다. 우리는 다시 그 집으로 가서 그 여자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오라고 했더니 바퀴 바람이 없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 수레를 경운기 불러서 집에다 갔다놓으라 하고 우리는 돌아오고 말았다.
시즈폰 시내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 한잠 푹 쉰 다음 저녁나절에 씨엠립으로 돌아 왔다.
대박이라는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앙코리안 게이트 하우스란 간판이 붙은 한국 사람이 경영하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 주인이 친절하게 나의 스승이신 표 선생님에 대한 말들을 많이 했다. 안의에 이철수라는 문인을 잘 안다고 했고 나는 그분을 모른다고 해서 대화가 끊어지기도 했다.
씨엠립 야경이 최고라는데 노는 문화는 여기도 대단한 듯 보였고, 아직 이른 초저녁부터 무언가 대단한, 터질 듯한 행사의 풍경을 드러내고 있다. 거리를 활보 하다가 곧 지쳐서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20일 6시 30분, 된장국으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일찌감치 톤래샵을 향해 차를 몰았다. 톤래샵은 동남아에서 제일 큰 호수로 매콩강이 범람 시에는 호수로 물이 넘어 온다고 하며 수상 가옥 등이 매스컴을 통해 너무 많이 알려져 있기에 생략하고 내가 본 특이한 것만 나열하고 싶다. 우리가 잔 호텔 앙코리안에서 톤래샵 일몰을 구경하며 삼겹살 파티를 한다고 했다. 톤래샵 가는 길에 밥퍼 간판이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한국의 밥퍼 최일도 목사가 여기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단다. 그 옆에는 국민은행 방과 후 학교가 있어 바라만 봐도 정겹게 했지만 실지로 수상가옥들을 구경하고 돌아오면 알만하다고 생각했다.
톤래샵을 이리저리 구경을 마치고 시내로 들어와 대박에 와서 점심을 먹고 3시 넘게 기다려 다시 톤래샵으로 갔다. 오전에 갔던 길을 다시 가게 되어 조금은 씁쓸했지만 배를 전세 내어 망망대해 같은 호수의 중앙에 들어가 일몰을 바라보며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걸치는 것이 또 다른 운치를 감돌게 했다.
다시 돌아와 씨엠립의 대박에 가서 캄보디아의 마지막 저녁을 먹었다. 그 후 지루하게 기다리다 공항으로 돌아와 목사님과 은총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워낙 여비를 짜게 가지고 나선 탓이라 좀 쑥스럽긴 했지만 아내가 집에 갈 차비만 남기고 남은 돈 다 드리고 가자고 해서 봉투까지 준비한 아내가 한없이 고마웠다.
씨엠립 공항은 별로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공항치고 이만큼 한산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고 우리가 탄 비행기는 21일 12시 5분에 출발하여 7시 30분에 김해공항에 도착을 했다. 캄보디아의 2시간이 여기에 포함되어 캄보디아의 시간으론 5시30분이 된다.
비행기 작은 창을 통해 내다본 바깥은 굵은 빗방울 내린다. 동대구 리무진을 급히 타고 서부정류장 옆 관문시장에서 돼지국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독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는 생각이 들어 온천탕에 몸을 푹 담가 비로소 내 집에 돌아온 느낌을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AIDS환자인 그 가족들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쯤은 우기라서 세수라도 제대로 할 수나 있을 런지? 그 해맑은 동공의 천진한 아이들이 뇌리에 떠나지 않는데 그 가족들을 돌보며 험지에 가서 어렵게 생활을 하는 목사님께 건강하심을 조용히 기원을 드린다. 나는 이분들을 위하 밥 먹을 때마다 기도를 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