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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이 글은 "만겁을 지나더라도 우리 민족이 결코 잊어서는 안될"(爲吾族萬劫不忘之紀念) 사건이자 일제시대 "일본이 저지른 무수한 잔악 행위 가운데 한 사례에 불과한" '제암리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3.1운동과 관련되어 가장 유명한 사건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이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지 78년이 지났음에도 사건의 정확한 진행 과정과 희생자들의 인적 상황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미진한 상태이다. 더욱이 기록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사건의 내용에 대한 진술들을 객관적으로 검증해 사건의 실체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는 실증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이 사건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사진:일제에 의해 짖밟힌 제암리교회]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두고 진행될 것이다.
첫째, 제암리사건의 배경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의 역사를 살펴보고 이 지역에서 이들 종교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사건 발단의 직접적 원인이 된 수원지역의 3.1운동, 특히 수촌과 화수리 지역의 만세시위 과정과 이 운동에서 제암리 주민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제암리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어떤 것인가? 자료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사건 진행 과정을 자료 분석을 통해 가능한 한 객관적 접근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29명으로 알려지고 있는 희생자들의 정확한 신분과 종교를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일본 경찰측 자료와 선교사 보고 자료, 그리고 생존자의 증언 기록을 종합해서 살펴보아야 하며 지금까지 소홀하게 취급되었던 천도교측 자료도 참고할 것이다.
셋째, 3.1운동과 한국 민족운동사에서 제암리사건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민족 '수난사'(受難史)의 의미가 강조되었다면 이 글에서는 민족 저항운동사(抵抗運動史) 성격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제암리 주민들이 '당한' 소극적인 의미에서 수난사건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제암리 주민들의 민족 저항운동의 맥을 찾는 것이 목적이다.
2. 제암리 종교 역사와 민족운동
1) 제암리 감리교회
3.1운동 당시 제암교회는 미감리회 한국연회 수원지방회 남양(南陽)구역 소속이었다. 따라서 제암교회 역사는 남양지방 기독교 선교 역사의 흐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남양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시기는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양이 지리적으로는 수원과 가까우나 복음이 전달된 경로는 수원이 아닌 인천을 통해 이루어졌다. 남양 출신으로 인천에 나가 살다가 복음을 접하고 인천 내리교회 교인이 된 홍승하(洪承河)가 고향에 복음을 전하였고 그의 동생 홍승문도 남양 근방에서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1900년 말에 이미 남양읍 외에 향갈동과 포막동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1901년에는 부평·김포·통진 등과 함께 제물포 구역에 속하게 되었다. 1902년 3월에는 남양읍·양철리·용머리·경다리·포막·덕방리·영흥도·대부도·선감도 등 아홉 교회들로 '남양계삭회'(구역회)가 조직되었다. 이처럼 남양지방에 기독교 선교가 시작된 지 불과 2년만에 독립 구역이 설립될 정도로 발전한 데는 홍승하·홍승문 형제의 수고가 컸다. 남양 선교 개척자 홍승하가 1902년 하와이 농업 이민들을 위한 선교사로 떠난 후에는 하춘택·박세창·김우권·이창회·김광식·한창섭 등이 남양구역을 담당했고 이어서 1914년부터 김교철(金敎哲), 1918년부터 동석기(董錫璣) 목사가 구역을 담임하고 있었다. 남양구역이 수원지방회에 편입된 것은 1907년부터이다. 따라서 3.1운동 당시 수원지방의 목회자들을 보면 지방 감리사에 노블(W. A. Noble), 수원읍(현 수원 종로)교회에 임응순(任應淳), 오산구역에 김광식(金光植), 남양구역에 동석기 목사가 각각 시무하고 있었고 김교철은 '본처 목회자'로 수촌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 수원지방의 한인 목회자들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 지역 만세시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군) 향남면에 위치한 제암리는 속칭 '두렁바위'로 불리는 조선 후기 전형적인 씨족 중심의 농촌 마을이었다. 3.1운동 당시 전체 33가구 가운데 2가구를 제외하고 순흥 안(安)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으며,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였다. 제암교회는 이 마을의 안종후(安鐘厚)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후 1905년 8월 5일 자기 집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린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암리의 토착 세력인 안씨 집안에서 복음을 처음 받아들여 다른 성씨 집안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1911년〈그리스도회보〉에 실린 제암교회 소식에서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남양군 장안면 수촌교회 권사 김응태 씨의 통신을 거한즉 수원군 공향면 두렁바위교회 김정헌 씨는 본래 천도교인이오 대장 일노 위업하는대 술취하기를 즐기며 허랑하더니 주압헤 도라온 후 술을 끈코 대장간 겻헤 주막이 잇서서 대장일 식히러 오는 사람들의 술 먹는 것이 유익지 못함을 깨닷고 대장간을 다른 곳으로 옴겨 짓고 다른 사람을 권하야 술을 끈토록 하며 진실히 회개하는 열매가 열녓스니 이것은 성신 감화하심이라고 이웃사람들이 칭송한다더라."
1919년 제암리사건 때 희생당한 김정헌(金正憲)은 본래 대장간을 운영하던 천도교인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이 마을 금주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제암리에 기독교 외에 천도교도 이미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후에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그 외에 한말 '구한국 부대' 군인으로 있다가 1907년 군대 해산 때 충남 지역 항일 의병운동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던 홍원식(洪元植)도 1914년 인근 청북면 판교리에서 이곳 제암리로 옮겨 온 후, 제암교회 권사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제암리에서 '서재'(書齋)를 세우고 계몽 교육을 실시하면서 제암리 교회 지도자 안종후, 고주리 천도교 지도자 김성렬(金聖烈) 등과 '구국동지회'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처럼 제암리교회는 안종후·홍원식 권사와 김정헌, 안진순 속장 등을 중심한 강력한 지도세력을 구축하였고, 교회 외에 강습소까지 설립하여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글 교육까지 실시하였다. 제암(두렁바위)교회는 1911년경 초가 예배당을 마련하였으며, 1912년에는 인근 해창교회를 흡수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2) 제암리·고주리 천도교회
이미 김정헌의 경우를 보아서 알 수 있듯, 제암리에는 기독교 외에 천도교도 일찍이 들어와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암리 천도교는 수원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수원에 천도교회가 처음 전파된 것은 1884년(布德 25)이었다. 호남에서 올라온 안교선(安敎善)이란 '동학' 교인이 수원에 들러 안승관(安承寬), 김정현(金鼎鉉)에게 도를 전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1890년에 안승관은 '기호대접주'(畿湖大接主), 김정현은 '기호대접사'(畿湖大接司)가 되어 수원을 비롯한 경기도 지역 동학 전도에 주역이 되었다가 1894년 갑오동학혁명 때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가 형을 받았다. 그후에도 이종석(李鍾奭), 구낙서(具洛書), 나천강(羅天綱), 이병헌(李炳憲), 홍종각(洪鍾珏) 같은 인물들이 계속해서 교구장을 비롯한 교구 임원을 맡으며 수원뿐 아니라 경기도 지역의 천도교 세력 확산에 기여하였다.
수원이 이처럼 강력한 천도교 세력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면서 제암리에도 천도교 개종자들이 나왔다. 제암리에 천도교가 언제 들어왔는지 그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제암리 출신인 안종린(安鍾麟), 안종환(安鍾煥) 등이 1915년부터 수원교구 '전교사'(傳敎師)가 되어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제암리 천도교인들이 수원지역 천도교회 안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3.1운동 당시 수원에서 전개된 천도교측 시위에 주동적으로 참여하였고 제암리사건 때 기독교인들과 함께 희생되었다. 또한 고주리에 거주하던 김흥렬(金興烈)과 김성렬(金聖烈) 역시 서울을 왕래하며 손병희와 교류할 만큼 이 지역에서는 영향력 있는 천도교인이었고 이미 살펴본 대로 김성렬은 제암리 교인 홍원식·안종후 등과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김흥렬은 1910년에 수원교구 전교사로 임명되어 3년간 활동하였다. 이 두 사람 역시 제암리사건 때 희생되었다.
이처럼 3.1운동 직전 제암리에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민족의식이 강한 지도자들이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3. 제암리사건의 배경
1) 수원지방 3.1운동
서울의 경우처럼 수원지역의 3.1운동도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 모의가 이루어졌고, 여기에 학생 . 상인 . 농민 . 노동자 등 일반 시민들이 참여함으로 대중적인 시위로 발전하였다. 특히 지리적으로 서울에서 가까웠던 관계로 서울의 중앙 지도부와 밀접한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기독교측의 수원지역 만세운동은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는 김세환(金世煥)에 의해 촉진되었다. 수원읍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거쳐 수원 삼일여학교(현 매향여학교) 학감으로 봉직하고 있던 그는 1919년 2월 20일 서울로 올라가 중앙기독교청년회의 박희도(朴熙道)를 만나 이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의하였고, 이튿날 세브란스병원의 이갑성 집에서 열린 기독교측 지도자 회합에서 수원과 충청지역 '순회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의 역할은 이들 지역에서 민족대표로 참여할 기독교 지도자들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갑성으로부터 활동자금 20원을 받아 충남 홍성교회 김병제(金秉濟) 목사를 비롯하여 남양교회 동석기 목사, 이천읍교회 이강백(李康白) 목사, 오산교회 김광식(金光植) 목사, 수원읍교회 임응순(任應淳) 전도사 등의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김세환의 역할은 서울 지도층과 연결되어 경기도와 충청지역의 지지세력를 포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수원지방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거나 추진하는 일은 수원 삼일여학교 교사·학생, 그리고 현지 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한편 천도교 측에서도 수원 출신으로 서울을 왕래하던 이병헌이 연락을 맡으면서 수원교구 전교사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암리의 안정옥(安政玉)과 안종린·안종환, 고주리의 김흥렬·김성렬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제암리사건이 일어나기 전 수원·오산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월 중순부터 본격화된 만세시위는 수원읍에서 인근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점차 과격한 양상을 띄고 있으며, 4월 3일 우정면·장안면 시위를 고비로 현격히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4월 2일부터 3차에 걸쳐 진행된 일본군 헌병대의 강력한 검거 작전으로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시위가 일어난 마을들을 방화하는 폭력적 진압 작전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들 자료에 의해 밝혀지는 수원지방 만세시위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의 경우처럼 이 지역에서도 초기 만세시위 준비단계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두 종교의 연합시위가 이루어진 경우도 많았다. 수원읍의 경우와 수촌·화수리, 비봉, 마도, 그리고 발안과 제암의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다.
둘째, 3월 중순 이후 전개된 군중시위는 주로 장날을 기해 전개되었다. 이는 많은 대중을 동원할 수 있다는 이점과 장날이 지역에 따라 순차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시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시위 군중들이 면과 마을 경계를 넘어 타지역 주민들과 연합시위를 벌일 수 있었다.
셋째, 만세시위에 참여한 계층은 학생·종교인·교사 등 지식인 계층으로부터 상인·농민·노동자는 물론 기생 조직까지 다양한 계층이었다. 3.1운동 전 과정에서 확인된 일부 친일 지주계급이나 관료 계층을 제외한 '거족적인' 참여의 경우를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일제는 만세시위가 시작된 초기부터 시위 지도부를 검거하는 데 경찰·군사력을 동원하였다. 3월 16일 수원읍 장날 시위 직후, 천도교 교구 사무실과 삼일여학교를 급습하여 지도자를 검거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사강·오산·발안에서도 일제는 무리한 시위 지도부 검거에 나섰다가 군중의 거센 저항을 맞게 되었다.
다섯째, 일제의 무력적 진압과 지도부 검거 작전에 흥분한 군중들의 폭력적 시위가 잇따랐다. 3월 28일의 사강 시위에서 시위대에 권총을 발사한 일본인 순사 야마구치(野口)가 군중들에게 살해된 것을 필두로, 3월 29일 오산 시위에서는 주재소와 면사무소·우편국 등 관공서와 일본인 상점과 일본인 가옥이 습격을 받았다. 그리고 3월 31일 발안에서는 일본인 소학교와 우편국·면사무소가 습격당하였고 일본인 43명이 도주하였고 같은 날 양성면 주재소가 방화되었다. 4월 3일의 수촌리·화수리 시위에서 장안면과 우정면 면사무소가 습격받았으며, 역시 시위 군중에 발포한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흥분한 군중들의 몰매를 맞고 살해당했다. 이같은 무력 충돌은 소수 병력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하고 지도부를 검거하려는 과욕에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다.
2) 일본군의 토벌작전
이처럼 수원지방의 만세시위가 점차 지방화·폭력화되어가자 일제는 보다 강력한 진압을 위해 일본군을 동원해야 했다. 특히 군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경부선 철로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시위를 조기 진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3월 31일 발안 시위가 있은 직후 경기도 장관과 수원 군수 등이 군대 지원 요청을 하였다. 이에 경성 헌병대장 겸 경기도 경무부장 시오사와(鹽澤義天)는 자기 부하인 경기도 경무부 경시 하세가와(長谷部巖) 대위를 중심으로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시위가 일어난 지역으로 파견하여 지도자들을 검거하도록 하였다.
이들의 검거작전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검거반은 하세가와 대위를 비롯하여 헌병과 순사 11명으로 편성되었다. 4월 2일부터 나흘간 실시된 검거활동을 일본 헌병대 자료를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차 검거반의 목적은 3월 31일에 일어난 양성과 발안의 무력시위에 대한 응징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주재소와 일본인 상점을 불사른 이 날 시위로 일본인들의 생명이 위협받자 서둘러 이 두 곳을 진압하려 한 것이다. 특히 검거작전을 수행 중이던 4월 3일에 화수리에서 두 번째로 일본인 순사가 살해당하자 토벌 작전은 더욱 거칠어졌다. 그 날 시위를 주도했던 수촌리 기독교 지도자 김교철과 천도교 지도자 백낙열을 체포하기 위해 야간에 수촌리를 급습하여 김교철 이하 차인범·정순영·이순모 등이 체포되었는데 진압과정에서 한국인 가옥들을 방화함으로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를 내게 되었다.
수촌리를 토벌한 것으로 1차 검거 작전은 끝났다. 그러나 토벌대가 철수한 후 발안을 중심으로 또다시 시위를 벌이고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정보를 접수한 경무부는 2차 검거반을 편성해 파견하였다. 즉 4월 9일 경성 헌병부대 부관이었던 헌병특무조장 츠무라(津村勇) 이하 헌병 6명과 보병 15명, 수원경찰서장 후루야(古屋) 이하 순사 11명 등 모두 32명으로 이루어진 진압부대는 3개 반으로 편성되어 오산 → 화수 → 사강 순서로 파견되었다. 이들 지역은 주재소와 면사무소 및 일본인 가옥이 습격 받았거나 일본인 순사가 살해된 곳이었다. 따라서 2차 검거 작전은 처음부터 보복·응징의 성격이 강했다. 2차 토벌 작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2차 검거 작전은 1차 때보다 훨씬 강력한 진압 작전으로 진행되었다. 체포·검거된 시위 지도자 숫자도 8백 명이 넘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사 작전을 하듯 마을을 포위 공격하여 방화와 살인을 자행했다. 축소 보고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다음의 일본 헌병측 자료를 보더라도 4월 2일부터 14일까지 수원·안성 2개 군의 11개 면, 64개 마을에서 검거 작전이 진행되어 모두 803명이 체포되었으며 1,202명이 훈방되었다. 작전 중에 입은 피해는 민간인 사망자 10명, 부상자 19명에 소실된 가옥이 276호에 이른다. 특히 만세시위 과정에서 과격 양상을 띄었던 사강리·봉가리·삼존리·기린리·수촌리·조암리·화수리 마을에서는 거의 모든 가옥이 방화되었다.[지도 참조]
바로 이같이 폭압적인 토벌 진압 작전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 제암리사건이다.
4. 제암리사건의 내용
1) 제암리 주민들의 만세시위
이미 살펴본 대로 제암리의 기독교와 천도교인들은 3.1운동 이전부터 민족운동에 나름대로 참여하고 있었다. 제암교회의 홍원식 권사와 안종후 권사는 교회 안에 한글 강습소(서재)를 설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남양구역 담임자로 제암교회를 맡아보았던 김교철이나 동석기 등도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안종린·안종환·안정옥·김성렬 등 제암리와 고주리에 거주하던 천도교인들도 수원교구 '전교사'로 활약할 만큼 수원지방 천도교의 지도급 인물이었으며, 안종환과 안종린은 3월 16일 수원 장날 시위에 참가했다가 교구 사무실에서 일경의 습격을 받고 부상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3월 31일(월요일) 발안에서 장날을 기해 수천 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날 시위에 제암리 주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동례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한 날은 장에 가유. 장엘 가더니 저녁에 다 저물어서 오더니 만셀 불렀다구 다 끌어다가 창으루다 옆구리가 찔려서 왔다구들 그러는데 그이는 무사히 왔더구만유. 우리 당숙 어른이 서울을 오르내리시구 그러는데 안방엘 안 가구 그렇게 우리 방에 잘 찾어오시구 그래. 나는 부엌에서 밥을 허는데 그 방에서 그래는거유. 그이가 당숙 어른한테. '아저씨, 이거 우리 일을 잘못 꾸몄어유.' '뭐?' 허니께 '만세를 지레 불르게시리 됐어유' 그래. '그럼 어떡허나? 이렇게라두 하지 않으믄…' 그러니께 '만세는 더 있다가 불르구유…이거 일이 이렇게 일찍 왔어유. 우리 조선 사람만 어디서 죽는지 모르게시리 다 죽구 어떡해유. 어디서 사람이 뭉청 죽어서 외국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걸 말리기 전에는 이거 큰일났는데유. 피 값도 못허구 우리 조선 사람 씨만 내삐리는 모양인데유' 그래유. '얘가 왜 이런 소릴 해' 허시니께 '허면 어때유. 내 죽는 건 무섭지 않어유' 그래유. 그리구 났는데, 그 아저씨는 물 떠놓구 '시천주' 허는 천도교를 했어유. 그 천도교 하는 데서 만세 부르는 일을 꾸몄든 모양입디다. 당숙 어른은 서울서 이렇게 앉아서 회의를 하는데 순사들이 유리창으루다 내려서는데 여기를, 어깨를 맞으셨다지 뭐야. 들어오셔서두 어깨 아프다는 소리는 우리 집 와서는 안 허셔."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인들은 발안 장날 시위에 참가한 후 지속적인 시위 방법으로 야간 횃불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4월 2일 수요일 저녁 예배를 마친 후 '남포등'을 들고 지네산으로 올라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발안 장날 시위와 그후 전개된 야간 횃불시위에 적극 참여했던 제암리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는 3.1운동 당시 제암리에 살다가 발안으로 이사한 순사보(巡査補) 조희창(趙熙彰)에 의해 일본 경찰 조직에 그대로 보고되고 있었다. 이들도 일제의 검거를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의 검거과정에서 빚어진 것이 제암리사건이다.
2) 제암리사건의 진행 과정
3월 31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 3일의 화수리·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발안은 주요 경계 대상이었다. 헌병을 중심으로 편성된 1차 검거반은 4월 5∼6일 발안에 주둔하며 수촌리를 습격하여 마을을 방화하였고, 2차 검거반도 4월 10일부터 11일까지 발안을 중심으로 수촌·화수리 지역을 수색하여 204명을 검거하였다. 이들 검거반이 남양 방면으로 이동한 후 발안지역 치안을 맡기 위해 지원나온 부대는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이었다.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한 것은 4월 13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아리타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그리고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던 사사카(佐坂)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아리타는 순사 1명에 보병 2명을 붙여 주력 부대 반대편으로 먼저 보내 주민들의 퇴각로를 차단함으로 치밀하게 세운 토벌 작전이었음을 보여 준다. 마을에 도착한 후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성들을 교회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엄청난 살육이 저질러졌다. 교회 안에 갇힌 주민들과 마을 주민들에게 자행된 만행의 진상은 자료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여기서는 사건의 실체에 보다 근접할 수 있었던 증언 자료 중에서 사건 주범인 일본군측 보고를 살펴보고,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접근할 수 있었던 선교사들과 외국인 중에서 언더우드, 테일러, 스코필드, 노블, 로이즈 등의 증언을 살펴보고 끝으로 사건 희생자 안진순의 아내 전동례 등의 증언을 중심으로 사건의 진상을 정리하기로 한다. 일본측 자료는 진술과 평가에서 왜곡 가능성이 가장 농후하며, 외국인들의 자료는 현장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생생한 측면이 있지만 통역이나 기록과정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전동례의 구술 증언도 사건이 일어난지 60년 후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시간과 이름 등 세밀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정당한 군사 작전 중 부득이하게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식의 일본 헌병대 자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증언 자료들이 일본군의 만행이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러한 증언 자료들을 종합하여 사건의 진행과정을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조기채)을 내세워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②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③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안종후 권사로 추정)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④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하였다.
⑤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⑥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⑦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그리고 '조경태'(노블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조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았다.
⑧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⑨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다.
⑩ '홍씨'(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⑪ 군인들이 마을 건너편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여섯 명을 나무에 묶고 총살했다.
⑫ 이날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29명으로 제암리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이 살해되었다.
진행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토벌 작전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일본측 주장대로 "조선에 주둔한지 얼마 안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치 못한 일부 군인들이 일본인들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척후병을 미리 보내 제암리 주민들의 퇴각로를 차단한 것이라든가, 순사보를 통해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들을 파악해 살해한 것 등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언더우드 일행이 사건 다음 날 제암리에 들렀을 때 피해를 입지 않은 남자를 만나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 데서도 일본군은 목표를 정해놓고 벌인 작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암리사건이 일어난 4월 15일은 경기도 경무부가 주도한 헌병 중심의 검거작전이 일단 끝난 시점이었다. 아리타 부대도 이들 검거반을 지원하기 위해 치안 유지 차원에서 발안에 투입된 부대였다. 그럼에도 아리타 부대가 헌병 검거반보다 더 잔인한 토벌 작전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추측컨대 아리타는 발안에 주둔한 후 현지 일본인들로부터 제암리 토벌에 대한 강력한 주문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3월 31일 발안 장날 시위 때 생명의 위협을 받은 일본인 43명이 삼계리로 피신했던 적이 있었고, 그날 시위로 일본인 학교와 주재소, 일본인 상점 등이 불에 탔으므로 이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말이다. 사건 현장에서 일본인 사사카가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독자적인 작전권을 위임받고 있던 아리타는 발안에 세력을 구축하려는 일본인들의 보복 요청으로 만행을 저질렀다. 제암리사건을 한 . 일 두 민족간의 갈등과 충돌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제암리사건의 희생자
제암리사건의 희생자 29명의 명단이 처음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된 후 1959년 정부에서 순국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사건 직후 현장을 방문한 선교사들이 기독교인 '희생자 11명'의 명단을 확인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천도교측 자료에서 그 희생자들의 이름이 먼저 밝혀지고 있다. 사건이 있은 후 7년이 지난 1926년 11월에 발행된〈천도교회월보〉에 실린 "천도교 수원교구 약사"에서 비로소 천도교측 희생자 17명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仝年 四月 十五日에 本區 管內 鄕南面 堤岩里 傳敎師 安鍾煥外 金興烈, 金基勳, 金基榮, 安慶淳, 金聖烈, 洪淳鎭, 安鍾麟, 金基世, 安應淳, 安相容, 安政玉, 安鍾亨, 安鍾嬅, 金世烈, 安子淳, 安好淳 諸氏는 그곳 卽 耶蘇敎堂에서 無故히 敎의 嫌疑로 燒殺을 當하고 곳곳마다 甚한 苦楚에 잇섯다."
이들 가운데 김흥렬·김기훈·김기영·김성렬·김기세·김세열 등 김씨 6인은 고주리에서 희생된 천도교인들로 보이며 나머지 안종환·안경순·홍순진·안종린·안응순·안상용·안정옥·안종형·안종화·안자순·안호순등 11명은 제암리에 거주하던 천도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건 당시 고주리에서 희생당한 천도교인 6명을 제외하고 제암리에서 희생당한 23명 중에 기독교인은 12명이란 계산이 나온다.
제암리사건 희생자 29인의 명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천도교회월보〉명단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이 명단을 앞서 살펴본 사건 진상과 연결지어 살펴보면 희생자들의 출신 배경과 성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희생자의 성씨(姓氏)를 살펴보면, 제암리 안씨 집안에서 15명으로 가장 많았고 고주리 김씨 집안에서 6명이 나왔다. 이는 제암리가 순흥 안씨 찬성공파(贊成公派), 고주리가 경주 김씨 계림군파(桂林君派) 후손들의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이들 희생자들은 가족이거나 가까운 친척관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선 제암리의 안씨 집안 희생자들의 계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밑줄 친 사람은 희생자)
제암리의 안씨 집안 희생자들의 계보
安時達
|
安明立
|
安峻善
+---------------------+--------------------------+
安永相 安準相
| +----------+-----------------+
安德輝 安德興 安德起
+--------+-----------------+ +-------+--+---------+ |
安肅彬 安學彬 安希彬 安重彬 安宗彬 安尙彬
+--+-----------+ | | | | |
安思煜 安思杰 安思炯 安思燁 安思煥 安思極 安思恒
| +-----+---+ | | | | |
安元玉 安尙玉 安政玉 安道玉 安宜玉 安駿玉 安敬玉 安箕玉
| | +---+--+ | | | | |
安鍾勳 安鍾樂 安鍾燁 安鍾煥 安鍾修 安鍾甫 安鍾麟 安鍾亨 安鍾厚
| +----+----+ | | | |
安鳳淳 安命淳 安官淳 安慶淳 安珍淳 安武淳 安有淳 安弼淳
| 安相溶
족보가 밝혀지는 안씨 희생자 14명은 멀어도 14촌인 집안 친척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희생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집안은 제암리 천도교 지도자였던 안정옥의 집안으로 3대에 걸쳐 모두 6명이 희생되었다. 그외에 안경순·안상용, 안종린·안무순 등 부자도 함께 희생되었다. 이로써 제암리의 강력한 토착 세력인 안씨 집안 중에 상당수 가족이 '절손'(絶孫)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나머지 희생자 중에는 강태성 부부, 홍원식 부부 등도 포함되어 있다.
고주리에서 희생된 김씨 집안 6명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가족관계는 다음과 같다.
金東植
+---------------------+-----------------------+ 金興烈 金聖烈 金世烈
+----------+--------+ 金興福 金周男 金周業
고주리 희생자들은 수원교구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흥렬 삼형제와 이들의 아들들이었다. 특히 김세열 가족은 삼부자가 모두 희생되는 참상을 겪었다.
이처럼 제암리와 고주리 희생자들이 부자·형제 등 가까운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이 마을들이 조선 말기 전통적인 씨족마을이었던 데 1차적인 원인이 있다. 또한 이 지역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종교·사회적 지도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일본측의 의도적인 응징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희생자들의 사체가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희생 장소를 살펴보자.
고주리에서 희생된 6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교회 안에서 희생되었다. 탈출에 성공한 조경태('노')와 탈출하다 사살된 홍순진·안상용을 포함하면 교회 안에 들어갔던 사람은 모두 22명인 셈이다. 제암리 희생자 23명과 고주리 희생자 6명은 일본측의 감시를 피해 각각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해방 후에야 유해발굴이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희생자들의 종교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 미상인 6명 중에는 기독교인 2명이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는 천도교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고주리에서 희생된 천도교인 6명을 제외한 제암리 희생자 23명은 천도교인 11명, 감리교인 12명으로 나눌 수 있다. 결국 제암리 희생자들은 천도교와 기독교인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희생된 종교인들 가운데는 천도교 수원교구 '전교사'를 역임했던 안종환·안종린·안정옥·김흥렬 등과 제암교회의 권사 직책을 갖고 있던 안종후·홍원식, 속장직을 갖고 있던 안진순 등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이 선교사들이 지적했던 대로 '종교 박해 사건'의 성격을 지닌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으로 희생자들의 연령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0대가 8명으로 가장 많고 20세 미만도 5명이나 된다. 연령 미상으로 분류된 강태성·김주남·김주업·김흥복과 안무순·안필순 등도 20대 초반이거나 그 미만일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 중에는 16세였던 안관순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처음부터 '16세 이상 성인 남자'를 소집 대상으로 삼았던 일본군측 의도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제암리의 청·장년층이 대부분 희생당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직업에서는 대장간을 운영했던 김정헌과 향남면 서기로 근무하던 안상용, 포목상을 했던 안경순 정도만이 구체적으로 직업이 밝혀질 뿐이다. 홍원식은 구한국 부대 출신으로 의병운동에 가담했던 전력이 있었고 고주리 김성렬과 안종후 등은 서재 혹은 강습소를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벌이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을 제외하면 희생자 대부분은 전통적인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제암리의 안씨 집안 희생자 가운데 안정옥·안종락·안종엽·안종환·안종후 등이 '자'(字)를 갖고 있었다는 점은 이들이 천도교나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전통적인 유교 선비(양반) 계층 출신이었음을 암시한다. 결국 희생자들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이 지역에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던 토착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토착 농민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발안 장날 시위에서 일본인 학교와 정미소를 하던 일본인의 집이 불살라진 것도 토착농민 저항운동적 성격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4) 사건의 뒷마무리
사건이 일어난 후 제암리를 비롯한 고주리·수촌리·발안 등지는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수원지역의 만세시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일본측의 진압 의도는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건 직후 현장을 방문한 외교관과 외신기자, 선교사들을 통해 사건 진상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일본측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사건 직후 제암리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다음과 같다.
4월 6일에 일어난 수촌리 마을 방화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4월 16일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중 의외로 제암리사건 현장을 처음 목격하게 된 커티스·테일러·언더우드 등에 의해 사건 소식이 서울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개인적인 차원에서 스코필드가 여러 차례 방문하여 부상자 치료와 난민 구호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4월 19일에는 영국 대리영사와 노블을 비롯한 감리교 선교사들이 현장을 답사하였다. 이후에도 노블을 비롯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제암리와 수촌리 등지를 자주 방문하여 부상자 치료와 난민구호에 나섰다.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선교비 2천 원을 긴급 지원하여 교회와 교인 집 복구비로 사용케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현장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들어가는 벡크를 통해 미국 교회에 진상을 알렸다. 또한 외교 경로를 통해 총독부에 제암리 만행을 항의하며 구호대책 마련을 촉구하였다. 이미 평남 강서, 평북 정주·곽산 등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나 선교사들로부터 항의를 받고 있던 총독부로서도 더이상 묵과할 수만은 없어 총독 자신이 4월 20일 제암리 현장을 방문하였으며 복구비로 '1천 5백 원'을 내놓았다.
제암리사건으로 한국내 선교사뿐 아니라 외국 여론까지 악화되자 조선군사령부에서는 사건 주범인 아리타 중위를 7월에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그리고 제암리사건의 원인이 된 수촌리와 화수리 토벌작전을 수행했던 지휘관들도 문책하는 형식을 취함으로 악화된 여론을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악화된 여론을 돌려보기 위한 기만책에 불과하였다.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이 된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선교사들의 사후 대책도 부상자를 치료하고 불탄 교회와 교인들의 집을 복구하고 위로하는 수준에서 더 나가지 못했다. 다만 선교사들의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이 해외에 알려지고 미국 국회에서도 청문회를 열어 일본의 야만적 행위가 폭로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론 환기도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의 근본적 자세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5. 맺음글 : 제암리사건의 '저항운동사적' 의미
제암리사건은 3.1운동 기간 중 일어난 일본 경찰 및 군인들의 폭력적 만행과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이 받아야 했던 수난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순한 '수난사건'으로 보기보다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항일 '저항운동'으로 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첫째, 이 사건은 우리 민족의 저항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빚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일제측 주장대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아리타 부대는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제암리에 접근하였다. 이미 정보를 통해 검거 대상까지 파악한 상황에서 제암리에 들어왔다. 이들이 이러한 작전을 세운 데는 가깝게는 3월 31일의 발안 시위와 멀리는 3월 16일의 수원 시위에서 제암리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상황 판단때문이었다. 결국 제암리 주민들이 수원지방 3.1운동 전개과정에서 보여준 적극적인 참여활동이 사건의 근본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사건은 제암리를 비롯한 수원지방 민중들의 항일 저항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의 실상을 보여 주었다.
둘째, 사건의 희생자들이 보여준 꾸준한 민족 저항의식이다. 제암리의 홍원식·안종후·안종린·안종환, 고주리의 김성렬·김흥렬 등은 일찍이 기독교와 천도교를 통해 개화사상과 민족주의 의식을 지녀온 인물들이었다. 특히 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홍원식은 제암리교회 권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천도교인들과 함께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3.1운동 이전부터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들 지도자들은 적극적인 자세로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하였고, 그 결과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던 중 사건의 희생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 농민 중심의 민중 저항운동이다. 사건 희생자들은 전형적인 농촌의 씨족공동체 일원들이었다. 농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제암리 주민들은 한말 이후 일제의 농지 수탈·경제 침탈의 희생자들이었다. 제암리사건을 촉발시켰던 주범의 하나인 일본인 사사카는 발안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던 자였는데 이 지역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 상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발안 시위 중에 일본인 학교와 주재소·상가가 공격받았다는 것은 일본의 침투에 대한 저항의식의 발로였다. 따라서 제암리 주민들의 발안 시위는 일본의 경제·정치·문화적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넷째,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저항운동이다. 제암리사건 희생자들은 기독교와 천도교인들이었다. 이는 서울 중앙에서 3.1운동 지휘부가 결성될 때 이 두 종교 지도자들로 결성된 것과 맥이 같다. 유교나 불교 같은 전통종교가 아닌 '신흥종교' 수준의 두 종교가 이처럼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종교들의 신앙 원리가 민족의 수난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한말 선교를 시작한 이후 민족의 수난 현실에 적극 참여함으로 '민족주의 신앙' 의식을 갖추게 된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와 그로 인한 희생의 대표적인 경우가 제암리사건이었다. 이는 불의한 세력에 대한 신앙적 저항을 촉구하는 종교 저항운동의 좋은 예라 하겠다. 그리고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독교와 천도교가 종파를 초월하여 연합 저항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제암리사건은 종교를 바탕으로 한 민족 저항운동으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의식이야말로 일제시대를 견디어 낸 민족 생존의 저력이라고 할 수 있다. 노블 선교사가 1919년 11월 미감리회 연회에서 내놓은 보고서 속에 나오는 제암리 교인들의 진술에서 그러한 저항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堤岩區域에 잇는 敎人들은 如此한 不測之事를 當?며 惡刑과 銃劍에 危險을 보앗스되 信心이 더욱 篤實하여가며 하 님을 더욱 依支?면서 말?기를 죽엄은 何時던지 올터인즉 爲我代死?신 主예수 盡忠?겟다 ? 不信者들은 恒常 勸?기를 禮拜堂에 가지말나 日兵이 올가 두렵다 으로 이거시 어렵슴 다."*
> 참고 : 삼일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