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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중국조선글서예발전사
청운 추천 0 조회 71 09.07.09 16: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국조선글서예발전사
서영근/ 사단법인 조선글서예가협회장
 
목 차

Ⅰ들어가면서
Ⅱ조선민족 이주사
Ⅲ연변 槪況
Ⅳ조선서예개황
Ⅴ조선글서예활동간사
Ⅵ조선글서예10년회고
Ⅶ조선글서예가론
㉮백초당 김정송
㉯단천 김호근
㉰용연 임창춘
㉱월청 서영근
㉲그 외 작가들
Ⅷ나오면서
문제점 및 해결방안
 
Ⅰ들어가면서
중국에는 현재 198만 여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대개 연변, 오상, 심양, 교하 등 동북삼성에 분포되어 있다. 1952년 9월 3일에 朱德海를 初代 州長으로 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어 연변은 조선족의 중심거주지가 되었으며 민족의 문화예술을 보급하고 발전시키는 터전이 되었다.

한글서예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144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초기에는 한문서법의 영향을 받은 서체가 출현하였고 다년간 갈고 닦은 결과 숙종 대왕 시기(1675년~1720년)에 와서 아름다운 전통서체인 《궁체》정자가 완성되어 한글서예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민간에서는 고전작품 판본 인쇄체와 필사본 서체가 대량으로 출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정책으로 인하여 한글서예는 수십 년 간 동면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는 한국미술협회의 주최로 30회에 걸친 국전을 통하여 소전 손재형 선생을 비롯하여 일중 김충현, 원곡 김기승, 갈물 이철경, 꽃뜰 이미경, 평보 서희환 등 많은 한글서예 大家를 배출하였으며, 전통서예를 계승하고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다. 그 후에도 수많은 서화단체들이 雨後竹筍처럼 창립되고 각종 서예공모전, 초대전, 교류전 등 서예관련 행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또한 곳곳에 서예학원이 세워지고 원광대학교, 계명대학교 등 대학교와 대학원에도 서예학과가 설치되어 한국의 한글서예교육은 그야말로 전 國民化가 되었다. 이는 한국에서의 한글서예가 전성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북한과의 교류는 밀접했지만 남한과의 교류는 차단되어, 북한의 革命口號體인 《청봉체》(항일전쟁시기 청봉 宿營地의 구호나무에 새겨진 서체라 하여 《청봉체》라 고도하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이어받은 천리마시대의 서체라 하여 《천리마체》라고도 한다)라는 서체는 출판물의 교류로 일찍부터 받아 들였으나 남한의 전통서체는 접할 기회가 없었다. 신해혁명으로부터 항일전쟁, 국공내전(장개석과 모택동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정권다툼), 그리고 1949년 해방이후에 대약진, 4인방 동란, 문화대혁명(10년 대 동란)을 거치는 동안 중국의 경제는 바닥이 드러났고 문화예술은 몇 십 년 퇴보되었다. 1976년에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978년에 鄧小平이 집권하면서부터 중국의 문호는 개방되고 개혁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리하여 1981년에야 비로소 中國書法家協會가 창립되었고 각 지역에 그 분회와 크고 작은 서법단체들이 雨後竹筍처럼 일어섰으며, 서예활동도 활발히 개최되어 서예는 단번에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조선글서예사를 다루기 이전에 조선족 이주사를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하여 우선, 연변의 정판룡, 최삼룡의 글을 인용하여 조선민족의 이주사와 조선민족 삶의 실태 그리고 연변개황을 밝히려 한다.

Ⅱ 조선민족 移住史
중국의 조선민족은 이민 역사가 근 2백여 년이나 된다. 그 동안 그들은 황무지를 일구어 논밭을 만들고 삶의 터전을 만들어야 했으며 일본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등과 싸워 민족생존권리를 확보해야했다. 더욱이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거주지역은 오랫동안 반일 무장투쟁의 주요한 근거지 및 전쟁터로 되고 있었으므로 중국조선민족의 역사는 말 그대로 처절한 민족의 수난사이자 생사투쟁사로 되고있다.
우리 민족이 중국으로 많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조선반도 북부지구에서 連年 재해가 들어 이재민들이 월강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던 때부터였다. 살길을 찾아 중국에 넘어온 초기 이주민들은 봉건통치자들의 민족기시정책의 유린을 당하면서 굳은 삶의 의지와 노력으로 묵은 땅을 개간하고 논을 풀어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더욱이 중국동북지역은 자고로 밭곡식을 위주로 재배하던 곳인데 조선족 초기 이민들은 동북 각지에서 온갖 신고를 들여 논을 풀고 벼를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전후로 하여 한국의 많은 우국지사들도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므로 이때부터의 이민은 단순한 《살기 위한》움직임만이 아니라 나라를 찾기 위한 정치망명 성격을 띤 이민도 적지 않았다.
당시 중국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인구집계를 보면 1907년에 7만 명이었고 한일강제합병을 선포한 1910년에는 10만 명을 초과하였고 1916년에는 20만 명, 1920년에는 45만 9천명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이때부터 중국으로의 이민은 단순히 살길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일제통치를 피해오거나 반일을 위해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0년대에 중국으로 이주한 반일지사들과 초기 이민들은 즉각적인 항일투쟁보다 우선 학교를 설립하고 후세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이상설, 이동녕 등이 먼저 용정에 서전서숙을 꾸렸으며 그 뒤에는 명동학교, 창동학교 등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으며 1919년에는 군사인재양성에 목적으로 한 신흥무관학교까지 세워졌다.

1910년대에 이렇게 반일을 목적으로 한 학교가 연변에만 해도 72개소가 되였으며 1926년에는 191개소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조선족 거주지역에서 반일운동은 새로운 고조를 이루었다.
같은 해 3월초 , 조선의 《독립선언서》가 연변에 전해지자 우선 먼저 연길, 용정 등지의 학생들이 자동적으로 거리에 나가 강연을 하거나 삐라를 뿌리는 방식으로 3.1운동의 실황의 의의를 대중들에게 선전했다. 3월9일에는 조선인반일단체 지도자들이 회의를 열고 3월13일 《조선독립선언문》발표를 경축하는 민중대회를 용정에서 거행할 것을 결정했다. 3월13일 예정대로 용정에서 2만 여명의 사람이 모인 성세 浩大한 민중대회가 조직되었으며 대회 그 후에는 수많은 반일시위와 무력전쟁이 있었다..
이처럼 중국조선족의 어제는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한 피눈물나는 민족의 개척사, 수난사이며 국내외 적들과 생사 싸움을 진행한 투쟁사였다.
Ⅲ 연변개황
1949년 10월1일 새 중국의 창건은 중국의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전통문화의 복원과 사회주의 신문화의 탄생의 징표로 된다. 중국의 조선민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가지게 되었으며 조선족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민족구역자치권리를 향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조선민족이 동북의 대지를 개척하고 지켜오고 또 새 중국의 창건을 위하여 거대한 민족적 희생을 치른 결사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1952년 9월 3일에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에 근거하여 《연변조선족자치구》(약칭-연변)가 창립(1955년 12월에 자치주로 변경)되었고 동북3성에 여러 개의 조선족자치현과 조선족자치향이 건립되었다.

이때로부터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말과 글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자기의 풍속습관을 보존하고 자기의 민족문화를 마음껏 꽃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문화는 조선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한 세기 반이나 되는 역사의 풍운 속에서 형성된 중국조선족의 새로운 특색, 성격, 의식이 침투되었고 또 사회주의적 이념과 체제의 조명 하에서 창조된 새로운 문화였으며 복합적 문화 또는 이중적 문화였다.

그런데 1966년 5월부터 10년 간 지속된 《문화대혁명》기간에 중국의 조선족은 또 한차례의 생존위기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민족문화가 유린당하고 민족의식이 말살 당하는 역사의 비운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1978년 12월의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 전원회의는 우리에게 역사의 새 계기를 열어주었다. 이 회의 이후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이 복원되고 문화예술정책이 조절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조선족문화가 크게 발전하고 민족의식이 크게 각성되고 양상 되었으며 발전의 길에서 새로운 비약을 시도하게 되었다.

연변에서는 헌법과 민족구역자치법에 근거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조선언어문자사용조례》 등 일련의 민족사업조례들을 제정함으로써 민족사업을 법률적 궤도에 올려놓았으며 조선언어문자가 자치기관에서 공무를 집행하는 통용문자로 되게 하였으며 정부에 조선민족언어문자사업회와 번역국을 설치하고 조선언어문자사용문제를 책임지게 하였다. 교육부분에서는 일찍 1960년대에 전국에서 제일 처음 초급중학을 일반화했고 1992년의 통계에 의하면 지금 연변대학을 비롯한 보통대학 5개소(현재는 연변대학이란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합병되었음), 성인대학 7개소, 전문학교 9개소, 직업중학교 64개소, 조선민족소학교 452개소, 중학교112개소가 있다.

연변에는 예술단체가 10개소, 박물관 2개소, 신문 11종, 잡지 16종, 라디오방송국 6개소, 텔레비전방송국 5개소, 의료위생보건소 786개소가 있다. 그리고 조선족의 역사, 언어 문학, 예술, 교육, 고적을 연구할 수 있는 연구기구를 건립하고 수많은 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연변지역에 있는 유형문화재발굴사업도 큰 성과를 올렸는바 조선민족의 역사와 밀착된 수많은 유적을 발굴하였다.

연변이외에도 북경대학, 중앙민족대학의 조선언어문학부와 조선문화연구소, 북경의 민족출판사 조선문 편집부, 요녕민족출판사, 《요녕신문》, 《흑룡강신문》과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그리고 수많은 조선민족예술단체가 창립되었는바 조선족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오늘날 조선족은 56개 민족에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이라는 대륙의 하나의 민족공동체로서 자기의 문화적 품위와 체질을 굳힌 가치관을 부상시켰다.
 
Ⅳ 조선글서예개황
조선족사회에서는 흑룡강성 오상조선족사범학교에서 1982년에 서법과목을 설치하고(초기에는 한문서법) 1988년부터 북한에서 출판한 『조선글씨쓰기』(저자: 리광섭, 최원삼)를 교재로 사용함으로서 조선글 서예교육이 시작되었다. 연변에서는 연변제1사범학교에서 1987년에 최초로 서법과목을 설치하고 오상사범학교와 같은 교재를 사용하여 연변조선족사회에서도 서예를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그 후 조선글서예를 이끌어 가는 우수한 서예가를 많이 배양했다. 1989년에 길림시의 『도라지』잡지사의 주최로 중국에서 최초로 되는 중국조선족서법콩쿠르가 개최되어 신인 서예가들을 배출하였으며, 이는 조선글서예활동의 첫 시작으로 되었다. 이 대회의 최고상은 《장백폭포》를 출품한 주영일이 차지하였다. 장문선은 경필부문의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1990년에 연변조선족서화학회가 창립(회장 임창춘)되고 그 주최로 제1회연변조선족서화전이 개최되어 많은 서화애호가들의 관심을 받았다. 같은 해에 단천 김호근이 한국 대구에서 《단천 김호근 서예전》을 개최하여 조선글 서예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조선글서예애호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그 후에도 부산, 평양, 북경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펼치어 조선글서예 보급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91년에 연변조선족서화학회가 주최한 제2회연변조선족서화전이 개최되어 많은 신인서예가와 조선글서예애호가를 배출하였다. 같은 해에 연변1사 졸업생 이성호의 졸업서예전이 열렸다.
1992년에 연변조선족서화학회는 사단법인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로 개칭하고 운영진을 새롭게 선출하고 새 출발을 개시하였다. 같은 해에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의 전통서예를 접할 수 있는 기회와 조선글서예의 보급과 발전에 한 가닥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같은 해 11월에 한국에서 《오늘의 한글서예 작품 초대전》이 있었는데 연변에서 김호근, 임창춘, 주영일, 허일춘 등 10명이 출품하였다.

1993년 3월에는 연변제1사범학교 졸업생 서영근의 개인서예전이 열리었으며, 같은 해 10월에 한국 예술의 전당에서 《한글서예 큰잔치》가 열리었는데 연변에서는 역시 김호근 등 10명이 출품하였다.
1994년에는 한국서학연구회의 주최로 연길에서 《아름다운 한글서예 중한 연합전》이 개최되었는데, 이 때 꽃뜰 이미경, 평보 서희환, 산돌 조용선, 늘샘 권오실, 한곬 현병찬 등 한국의 중진 한글서예가들의 작품이 60여 점 전시되었으니, 이는 조선글서예가들의 眼界를 넓혀 주는 전시회가 되었고, 조선글서예가 한국의 전통서예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할 수 있는 전환점으로 되었다. 그 이전에는, 조선글서예가들이 전통한글서예작품을 쓴 것을 볼 수 없었으나 그 후부터는 궁체, 판본체 작품이 출품되기 시작했다.

1995년의 한중한글서예교류 제주전에서 월청 서영근의 판본체작품이 처음으로 출품되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한글서체의 유입은 또 《연변서체》(북한서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연변 특유의 서체를 말함) 보수파들의 필사적인 반대를 받아 고난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또한 젊은 서예가들은 부지런히 전통한글서체를 배우고 연구하고 보급하였는데 그들이 힘을 모아 창립한 모임이 바로 《사단법인 조선글서예가협회》이다. 젊은 서예가들은 보수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1995년에 창립발기를 하여, 훈민정음 반포 550주년을 맞이하는 1996년 1월10일에 드디어 사단법인 조선글서예가협회 법인등록 하였는데, 이는 조선글서예활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했고 조선글서예발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조선글서가협회는 그 해 4월14일 創立展 이후, 전국성적인 조선글서예대전, 한중한글서예교류전 등 서예활동과, 중소학교와 사범학교의 서예교육을 책임지고 이끌었으며 이로 인하여 조선족사회에서의 서예배움의 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1998년에는 연변 최초의 서예학원인 《연길시서예양성센터》를 설립하고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서예교육을 실시하여 많은 서예인자를 배양하였으며, 조선글서예의 보급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Ⅴ조선글서예활동간사
중국에서 현재까지의 조선글서예활동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82년 흑룡강 오상조선족사범학교 서예과목 개설
강의내용: 한문서법, 조선글서예
1987년 연변제1사범학교 서예과목 개설
교장: 최태호, 서예교수: 백초당 김정송
교재: 북한 출판 『조선글씨쓰기』(1988년),
1989년 전국조선족서예콩쿨,
주최:『도라지』잡지사
毛筆조 1등상: 주영일, 硬筆조 1등상: 장문선
1990년 연변조선족서화학회 창립
주석: 임창춘, 상무부주석 겸 비서장: 오명남, 부비서장: 주영일
1990년 제1회 연변조선족서화전 (연변박물관)
주최: 연변조선족서화학회
1등상: 양산 오명남
1991년 제2회 연변조선족서화전(연변박물관)
주최: 연변조선족서화학회
1등상: 양산 오명남
1992년 9월 연변조선족서화학회를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로 개칭
법인대표: 임창춘
1992년 11월 오늘의 한글 서예작품 초대전(예술의 전당)
주최: 한국서학연구회
출품작가: 김호근, 임창춘, 주영일, 허일춘 등 10명
1993년 10월 한글서예 큰잔치(예술의 전당)
주최: 한국서학연구회
출품작가: 김호근, 임창춘, 주영일, 허일춘 등 10명
1994년 9월 아름다운 한글서예 중한 연합전(연변박물관)
주최: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 한국서학연구회
1995년 3월 전국조선족"신동컵"서화경연대회, 중국조선족소년보사
1995년 5월 한중서예교류 제주전(문예회관)
주최: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 제주도서예가협회
1995년 8월 연변-대전서예교류전(대전)
주최: 조선글서예가협회 준비위원회, 대전 뫼벗서회
1995년 12월 해외동포전(중국작가 출품 50점)
주최: 서울 예술의 전당
1996년 1월 사단법인 조선글서예가협회 창립(연길)
법인대표: 월청 서영근
발기인: 서영근, 서권, 장룡, 김정송
1996년 4월 조선글서예가협회 창립전(연변예술학원 미술관)
1996년 8월 한중서예교류연변전(연변박물관)
주최: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 제주도서예가협회
1996년 9월 《정음상》전국조선글서예대전
주최: 사단법인 조선글서예가협회
운영위원장: 월청 서영근 심사위원장: 단천 김호근
1996년 10월 한중한글서예교류 제주전(문예회관)
주최: 조선글서예가협회,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
1997년 4월 제2회 조선글서예가협회전(연변교육학원)
후원: 연길시문학예술계연합회
1997년 4월 제8회 동양미술대전(경기도 과천)
주최: 한국 동양서화문화교류협회
초대출품: 서영근, 서권, 동수근,
1997년 5월 국제서화가친선교류전(서울)
주최; 조선글서예가협회, 중외서화예술교류협회(성돈영), 한국서법학회(이인섭)
방한대표: 서영근, 서권, 성돈영
1997년 6월 제1회 국제서예전(전주)
주최: 한국서예협회 전북지부
협찬: 조선글서예가협회
1998년 2월 제1회 한중한글서예교류전(광주)
주최: 조선글서예가협회, 무등한글서예연구회
방한대표: 월청 서영근
1998년 3월 연길시서예양성센터 설립(연변문련 소속)
법인대표: 서권, 부원장: 장룡, 이문혁
1998년 4월 제3회 조선글서예가협회전(연변미술연구원)
후원: 연길시문학예술계연합회, 연변미술연구원.
1998년 4월 제9회 동양미술대전(과천, 중국작품 99점)
주최: 사단법인 동양서화문화교류협회
협찬: 조선글서예가협회, 중국서화예술연맹
1998년 4월 동양서예대전(부산, 중국작품 30점)
주최: 사단법인 동양서예연구회
협찬: 조선글서예가협회, 중국서화예술연맹
1998년 5월 제1회 시대광장컵 휘호대회(연길)
주최: 조선글서예가협회, 연길시문련
운영위원장: 횡도촌자 서권
1998년 5월 국제부채서화전
주최: 한국서예연구회(회장 권갑석)
초대출품: 서영근, 서권, 장룡, 이문혁
1998년 8월 연변청년5인서예전(연변미술연구원)
주관: 조선글서예가협회
주최: 연길시문련
출품: 횡도자 서권, 아산초부 장룡, 일심 이성호, 월청 서영근, 아성 이문혁
1998년 9월 한중서예초대전(서울, 서안)
주최: 한국서예작가협회, 조선글서예가협회
1999년 2월 연변서예탐색전 및 세미나(연변미술연구원)
주최: 조선글서예가협회
 
 
1999년 4월 제4회 조선글서예가협회전(연변미술연구원)
주최: 연길시문련
1999년 4월 제2회 한중한글서예교류전(광주)
주최: 무등한글서예교류전, 조선글서예가협회
방한대표: 횡도촌자 서권
1999년 5월 아름다운 한글자료 및 작품전시회
지도: 한국서예교육가 박병천
1999년 6월 제10회 동양미술대전(서울, 중국작품 88점)
주최: 사단법인동양서화문화교류협회
협찬: 조선글서예가협회, 중국서화예술연맹
1999년 7월 동양서예대전(부산, 중국작품 143점)
주최: 사단법인 동양서예연구회
협찬: 조선글서예가협회, 중국서화예술연맹
방한대표: 서영근, 로민(심양), 고경춘(할빈)
1999년 8월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 여성분과위원회 설립
위원장: 림애, 부위원장: 장지향
1999년 8월 건국50주년 기념 연변조선족서예전
주최: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
1999년 9월 제2회 시대광장컵 휘호대회
주최: 조선글서예가협회
운영위원장: 횡도촌자 서권
1999년 11월 배달민족서예대전(서울)
주최: 배달민족서예가협회, 한석봉선생숭모회
해외동포 초대작가: 서권, 서영근
2000년 7월 제11회 동양미술대전(서울 예술의 전당, 중국작품 20점)
주최: 사단법인동양서화문화교류협회
협찬: 조선글서예가협회, 중국서화예술연맹
2000년 7월 동양서예한중전(부산, 중국작품 66점)
주최: 사단법인 동양서예연구회
협찬: 조선글서예가협회, 중국서화예술연맹
2000년 8월 제3회 한중한글서예교류전(광주)
주최: 무등한글서예교류전, 조선글서예가협회
대표: 월청 서영근
2001년 5월 제12회 동양미술대전(서울 예술의 전당, 중국작품 22점)
주최: 사단법인 동양서화문화교류협회(이사장 박득순)
협찬: 조선글서예가협회, 중국서화예술연맹
방한대표: 월청 서영근
2001년 7월 아시아미술대전(부산, 중국작품 50점)
주최: 사단법인 동양서예연구회
협찬: 조선글서예가협회, 중국서화예술연맹
초대작가: 서영근, 로민 등
2001년 10월 한중학생서예전 (한국 청주-예정)
주최: 한국 해동연서회, 조선글서예가협회

중국조선글서예발전사
(앞에서 이어)

Ⅵ 조선글서예 회고
1987년 서예교육가 김정송의 노력으로 연변제1사범학교에 《서예과목》이 개설되었다. 이는 연변 서예교육의 시작을 의미하였으며, 선후하여 조선글서예의 리더들인 아산초부 장룡, 일심 이성호, 월청 서영근, 아성 이문혁, 향인 장지향 등을 배출하였다.

1989년 길림시의 『도라지』잡지사의 주최로 개최된 《전국조선족서법콩쿠르》는 중국에서의 조선글서예활동의 출발을 의미하였고, 수상자 주영일(모필 최고상), 장문선(경필 최고상), 허일춘(우수상) 등 연변의 서예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서예가들을 발굴하였다.

1990년 한국 대구에서 개최된 단천 김호근의 개인서예전은 조선글서예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그가 창작한 《단천체》는 서예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선후로 평양, 북경, 부산 등지에서 8회의 개인서예전을 개최하여 중국에서의 조선글서예보급과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990년에 임창춘, 오명남의 발기로 창립된 연변조선족서화학회에 의하여 조선족서예의 단체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해에 제1회조선족서화전을 개최하였다.
1991년에 연변조선족서화학회에서 주최한 제2회연변조선족서화전이 개최되어 서예애호가들에게 신심을 북돋아 주었다.

1992년에 연변조선족서화학회는 사단법인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로 개칭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협회는 몇 년간 임창춘, 주영일, 장문선이 이끌면서 많은 서예활동을 전개하였다.
1993년에 연변제1사범학교에서 졸업생 《서영근서예전》이 개최되고 연변TV문예특집에 방송되면서 청소년서예애호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1994년에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와 한국서학연구회에서 주최한 《아름다운 한글서예 중한 연합전》은 연변박물관에서 전시되었기에 사실상에서 중국조선글서예가들이 전통한글서예를 처음으로 접하는 시각이었다. 이곤 회장의 領率하에 박병천, 김옥순 등 한글서예가들이 연변을 방문하여 서예애호가들에게 한글궁체실기와 한글서예활동사에 대해 보급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족사회에서의 전통한글서예보급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3대 조선글신문 중의 하나인 《흑룡강신문》에서는 [서영근 서예교실]을 개설하고 1994년 4월부터 1996년10월까지 《서예와 음악》, 《한글궁체》, 《한글판본체》 등 서예이론을 30회에 걸쳐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조선글 서예애호가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1995년에는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와 제주도서예가협회의 주최로 《한중서예교류제주전》이 개최되었는데 월청 서영근의 작품 '애국시'가 중국에서 최초의 판본체작품으로 출품되어 제주도 서예계와 언론계의 관심을 받았다. 같은 해 8월에 서권, 장룡, 서영근을 위수로 한 청년서예가들이 대전에 조선글 서예작품 30여 점을 보내어 《연변-대전서예교류전》을 개최하였다. 그 해 말 서울 예술의 전당의 주최로 개최된 《해외동포전》에 조선족 작가의 50점의 작품이 출품되어 조선글 서예애호가들의 열정적인 호응을 받았다.

한편 전통한글서예를 배우고 보급하고 연구하는 젊은 서예가들과 연변서체보수파들 사이에는 논쟁이 많았다. 보수파들은 연변특유의 서체를 고집하고 젊은 서예가들은 연변서체와 북한의 청봉체를 인정하는 동시에 한글서체를 대담히 받아들이고 보급하였다.

1996년에 드디어 서영근, 서권, 장룡, 김정송의 발기로 중국 최초의 한글서예연구모임인 사단법인 조선글서예가협회가 창립되어, 중국에서의 한글서예의 보급과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회장에 서영근, 상무부회장에 장룡, 상무고문에 서권, 김정송, 사무국장에 이문혁, 사무차장에 이성호. 그 외 이사, 회원 총 6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선글서예협회에서는 창립전을 개최한 뒤를 이어, 같은 해 9월 제1회정음상중국조선글서예대전을 개최하였는데 전국 28개 성시에서 473점의 조선글서예작품을 접수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훈민정음반포 550주년을 기념하여 10월에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과 연합하여 한글서예교류전을 개최, 본격적인 서예활동을 개시하였다. 1997년에 제2회 조선글서협전 및 학술발표대회를 가졌으며, 서영근 회장의 한국유학을 계기로 한국서예단체와의 교류가 더욱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서영근은 동양서화문화교류협회의 동양미술대전에서 1995년에는 특선, 1997년에는 초대작가로 선발되는 동시에 중국총회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후의 한중서예교류활동을 개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97년 5월에 한국서법학회(이인섭)와 연합하여 국제서화친선교류전을 개최하는 것을 계기로 중외서화예술교류협회 상임부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盛敦榮 회장(중국 계림)과 서권 부회장을 방한대표로 서울에 초청하였다.

조선글서협에서는 1998년 2월에 한국 광주의 무등한글서예연구회와 연합하여 제1회 한중한글서예교류전을 개최하여 조선족 작가들의 30점의 조선글서예작품을 출품시켰는데 이때 광주의 저명 서예가 학정 이돈흥선생은 "중국조선글서예가 한문서법의 필체와 결합되어 자유분방하고 구성과 墨法이 다양하니 한국 한글서예가들이 따라 배울 점이 많다"고 말하였다. 3월에는 연변 최초의 서예학원인 《연길시서예양성센터》를 설립하고(법인대표 서권) 한글서예를 위주로 가르쳤으며, 조선글서협회원을 제공하고 연볍조선글서예의 후학을 배양하는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조선글서협과 서예양성센터에서 연합 주최한 제1회시대광장컵서예휘호대회는 많은 청소년서예애호가들의 호응을 얻었다. 4월에는 동양서화교류협회를 협찬하여 제9회 동양미술전을 개최하였는데 중국의 한문, 한글서예작품 도합 99점을 출품시켰다. 또한 사단법인 동양서예연구회를 협찬하여 제2회 동양서예대전(부산)을 개최하였는데 중국의 한글서예작품 30점을 출품하였다, 동시에 서영근은 동양서예연구회 중국총회장에 임명되었다. 조선글서예가협회에서는 젊은 서예가들에게 신심을 북돋아 주고 조선글서예를 더 깊이 보급하기 위하여, 1998년 8월에 조선글서예를 이끌어가고 있는 서권, 장룡, 이성호, 서영근, 이문혁 등의 55점의 작품을 전시하여 《연변청년5인서예전》을 개최하였다. 또 같은 해 5월에 전주(권갑석)에서 개최된 《국제부채서화전》(한, 중, 일, 대만)에 서영근, 서권, 장룡, 이문혁이 초대출품되었다.

1999년 2월에 조선글서예가협회에서 《연변서예탐색전》및 《서예탐색세미나》가 개최하여 조선글서예의 새로운 방향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4월에는 제4회조선글서협전이 개최되었고, 조선글서협회 주최로 제2회한글서예교류전(광주)이 개최되어 31점의 조선글서예작품이 출품되었고 많은 신인서예가들을 배출하였다. 6월에는 동양서화문화교류협회와 조선글서예가협회가 연합 주최한 제10회동양미술대전이 경기도 과천에서 개최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조선글서예작품을 포함하여 88점이 출품되었다. 7월에 조선글서협에서 후원한 제3회동양서예한중전에는 중국작품이 143점 출품되었는데 그 중에 조선글서예작품이 46점 전시되었다. 2000년에도 동양미술대전과 동양서예대전을 협찬하여 조선글서예가들의 작품을 출품시켰고, 8월에는 광주에서 제3회 한중한글서예교류전을 개최하였다.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에서는 1999년에 5월15일에 박병천교수의 지도 밑에 《아름다운 한글자료 및 작품전시회》를 개최하여 연변에서 보기 힘든 한글서예자료와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40여명의 한글서예작품을 전시하였다.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한글 고전 자료를 전시한 것은 연변 조선글 서예애호가들에게 眼界를 넓혀 주었고 힘을 더해주었다. 같은 해에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에서는 연변 최초의 여성서예모임인 여성분과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연변조선글서예의 밝은 앞날을 예견해 볼 수 있겠다.

한편 연변교육학회미술위원회(최광수)에서는 1989년부터 《전주(연변)중소학학생교원서법미술대회》를 해마다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학생들과 교원사이에서 서예열풍을 불러일으켰으며 조선족사회에서 서예교육에 대한 중시를 가지게 하였다.

동북교육출판사 미술교과서편집위원회(박명준)에서는 『조선글서예』, 『조선글씨쓰기』, 『중소학교원학생서예작품집』등 서예관련 책자를 편집 출판하여 조선글서예 기초자료를 제공하였다.
연변제1사범학교에서는 서예과목 외에 서예 選修班을 개설하여 체계적인 서예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91년 일심 이성호의 개인서예전을 시작으로, 1993년 월청 서영근 서예전 등 졸업생 서예전을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1993년 10월에 서권이 연변1사 서예교사로 부임되면서부터 더욱 많은 서예인재를 양성하였다.
용정시조선족서화가협회, 왕청현서예애호가협회, 연변노인서화연구회 등 각 현, 시의 서예단체들에서 각종 서예활동을 진행하였다.

오명남, 주영일, 이철 등은 미술사를 운영하면서 각종 간판글을 써왔는데 연길시의 대부분의 붓글씨간판은 이들의 필체이다.
또한 임창춘은 《주덕해기념비》등 각종 비문을 남겼고, 전청송은 《연변일보사》 미술편집으로 있으면서 신문과 잡지의 표지 글과 제목을 써왔다. 허일춘도 《연변TV》광고설계로 재직하는 동안에 조선글자막을 주로 써왔다.
 
Ⅶ 조선글서예발전에 공헌한 사람들
중국 조선글서예 10여 년, 이 시기에 활동한 서예가들은, 연령상으로는 20대에서 60대까지, 직업상으로는 대학생, 중소학교 교사, 교수, 직장인, 상업인, 공무원 등 다양하였다. 또한 전문적인 서예교육을 받은 서예가, 독학하여 성공한 서예가, 부모의 영향을 받은 서예가, 문화대혁명시기에 활약했던 서예가 등으로 분류된다. 이 시기에 활약한 서예가는 많으나 조선글서예의 보급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서예가들로는 백초당 김정송, 단천 김호근, 용연 임창춘, 월청 서영근을 들 수 있겠다.
 
㉮백초당 김정송
1940년 왕청현 백초구 출생.
연변제1사범학교 부교수(정년 퇴임)
공적: 연변 최초로 《서예과목》개설하여 서예교육에 기여함.
그는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를 졸업하고 多年간 연변사범학교의 조선어문법교수로 재임하던 중 1987년에 서예과목을 개설을 추진하고 서예교사로 변신하였다. 그는 북한서체인 《청봉체》에 능하다. 처음에는 교재가 없었기에 북한의 화보나 잡지의 글씨를 본떠서 교재로 삼았다.

백초당은 연변의 조선글서예 교육의 선두자일뿐만 아니라 서예보급과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한 분이다. 그가 배양한 학생들은 졸업 후 연변의 조선족중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서예서클을 조직하고 서예과목을 설치하여 수없이 많은 서예 후계자를 배양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은 연변 조선글 서단에서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1989년에 졸업한 봄샘 김화는 연길시 중앙소학교에서 10여 년 간 미술 서예교사로 재직하면서 많은 초등학생서예애호가를 배양하였으며, 조선글서예협회의 창립 초기에는 상무이사, 현재는 사무국장으로 재임중이며 연변의 첫 여성서예가로 주목을 받고 있다.

1991년에 졸업한 아산초부 장룡은 조선글서예가협회의 발기인으로서 상무부회장, 연길시서예양성센터 부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연변조선글서단의 한 축을 이루었다. 동기인 일심 이성호는 조선글서예가협회 초창기에는 사무차장, 현재는 상무부회장으로 재임중이며 동시에 연길시태평소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1991년 졸업생 문호는 왕청현서예애호가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여러 가지 서예관련활동을 벌리고 있다.
1993년에 졸업한 월청 서영근은 1996년에 중국 최초의 조선글 서예단체인 사단법인 조선글서예가협회를 창립하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회장직을 맡고 여러 가지 서예활동을 활발히 벌리었으며, 한글판본체의 보급에 선두로 나섰다. 현재 한글서예를 더욱 깊이 연구하고 한국과의 서예교류를 더 밀접히 진행하는데 유대가 되고자 한국 유학의 길을 택하여 현재 석사연구생을로 재학중이며 계속하여 한중성화교류에 힘 다하고 있다.

1995년에 졸업한 아성 이문혁은 조선글서예가협회 초창기에 사무차장, 연길시서예양성센터 부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조선글서단의 신인으로 등장했다. 이문혁도 자신의 실기제고와 안견을 넓히기 위하여 한국 유학의 길을 택했다.

1999년에 졸업한 향인 장지향은 연변서법가협회 여성분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는 한편, 연변제1사범학교의 서예교사로 추천 받았다. 그는 조선글서단에서 여성서예가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궁체를 전문 연구하여 궁체가 없던 조선글서단의 공백을 메웠다.
이 밖에도 많은 졸업생들이 연변서단의 구성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백초당의 아호는 그의 고향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백초당 김정송은 연변조선글서예교육의 선두자이며, 10여 년 사이에 조선글서단의 주요구성원들을 양성해낸 훌륭한 서예교육가이다.
 
㉯단천 김호근
1948년 길림성 화룡현 출생.
《천지》부총편 역임, 현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공적: 최초의 개인전 개최, 《단천체》창작하여 조선글서예 보급에 앞장.
김호근은 연변작가협회 개간지인 《천지》잡지사의 편집이었다. 그는 잡지사 편집으로 있는 동안(1970년대부터 1999년까지) 잡지에 수 백 편의 소설제목을 직접 붓글씨로 써왔다. 그러면서 익힌 글씨가 《단천체》인데, 한국의 한 인사의 추천으로 1990년에 한국 대구에서 처음으로 《단천김호근서예전》을 갖게 되었다. 그로서 그는 문학가로부터 서예가로 변신하였으며 그의 개인전은 연변서예가중에서 최초로 개최한 조선글 개인서예전이였다. 그 후로 단천은 족자가 들어 있는 가방을 메고 서울, 부산, 평양, 북경, 심양 등지를 돌아다니며 8회의 개인서예전을 개최하였다. 그의 《단천체》는 많은 서예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조선글서예의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였다. 즉 《기둥선》을 맞추던 한글을 한문처럼 중심선을 맞출 수 있도록 시도한 것이 《단천체》의 성과이다. 단천은 연변조선족서화학회 창립 당시 이사로 선출되었으며, 1996년에는 사무차장으로, 1998년에는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글서예가협회에서는 예술고문을 맡고 있으며, 그 외 중국현대청년서화가협회 부회장 등 직을 맡고 있다. 그의 작품은 《한원비림》에 刻石되으며, 해외동포서예전, 한중한글서예교류전 등 많은 국제전에도 출품되었다.
아호 《단천》은 그의 본관에서 따 온 것이다. 그는 현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으로 재직중이다.
 
㉰용연 임창춘
1944년생,
현재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 회장
공적: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를 창립, 연변 서예의 발전과 한중서예교류에 기여.
그는 1969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변박물관 부관장을 역임하였다. "書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는 인품이 좋을 뿐만 아니라 글씨도 아주 편안한 감을 준다. 그는 1990년 연변조선족서법가협회를 창립하고 1990년과 1991년에 걸쳐 두 차례의 연변조선족서화전람을 개최하였다. 1992년에는 한국서학연구회의 이곤회장과 연락이 되어 그 해 서울에서 있은 《오늘의 한글서예작품초대전》과 1993년에 있은 《한글서예큰잔치에》 연변의 10명 작가의 작품을 출품시켜 연변조선글서예의 한국 진출의 문호를 열었다. 1994년에는 한국서학회와 연합으로 《아름다운 한글서예 중한 연합전》을 개최하여 연변서예애호가들이 처음으로 한국의 한글서예를 접하게 하여 그들의 안견을 넓혀 주었다. 그 때 박병천씨는 연벼서예가들에게 보기 힘든 한글서예자료를 보여주었고, 김옥순씨는 한글궁체 실기를 보여주어 연변에서의 한글서예의 씨앗이 싹트게 하였다. 1995년에는 《한글서예교류제주전》과 《해외동포서예전》을 개최하여 연변조선글서예가들의 열정적인 호응을 얻었다. 1996년에도 《한중서예교류 연변전》을 개최하여 연변조선글서예가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현장에서 한국작품을 관람할 기회를 마련하였다.
이처럼 용연 임창춘씨는 연변에서의 조선글서예발전과 보급, 그리고 한중서예교류에 부정할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월청 서영근
1972년 길림성 도문시 월청향 출생.
현재 제주대학교 대학원 석사연구생.
공적: 중국 최초의 《조선글서예가협회》창립, 한글서예 보급. 한중한글서예교류 유대.
서영근은 어릴 때부터 소설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문학과 서예에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었다. 1989년에 연변제일사범학교 중사전업에 입학한 서영근은 서예에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그는 1991년 제2회 연변조선족서예전람에 입선하면서 서단에 데뷔하였다. 1993년에 졸업을 앞두고 개인서예전을 개최하였는데 그 사적이 연변텔레비젼방송국의 문예특집프로인 《진달래》에 방송되었다. 1994년부터는 《흑룡강신문》에서 《서영근 서예교실》을 특설하고 30회에 걸쳐 그의 서예이론을 기재하였는데 이는 중국 조선글서예 보급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월청은 1996년에 백초당, 아산, 횡도자 등과 같이 중국 최초의 조선글서예가협회를 창립하여 조선글 서예보급과 발전에 또 한차례의 부정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1997년에는 한국의 문학과 서예를 더 깊이 연구하고자 한국 유학을 결심하여 현재는 제주대학교 학부과정을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이다. 유학하는 동안에도 그는 3회의 《한중한글서예교류전》, 《국제서화가친선교류전》, 《동양미술대전》등을 주관, 협찬하여 조선글서예발전과 한중문화교류에 끊임없이 기여하고 있다.
 
㉲기타 작가들
그 외 조선글서예 보급과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한 작가들은 많다. 다음에 3가지 부류로 분류하여 주요한 작가들의 서예활동을 서술하고자 한다.
 
㉠서예교육에 공헌한 작가들
서예교육에 공헌한 작가 중에는 김정송 외에도 최광수, 박명준, 서권이 있다.
수원 최광수는 연변교육학회 미술교육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1989년부터 매년 연변중소학교 사생서법, 미술대회를 개최하여 학교에서의 서예교육열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로 인하여 각 학교들에는 서예서클 뿐만 아니라 서예과목이 개설되는 학교도 나타났으며 미술교원들의 서예실기도 제고 시켰다. 1996년에 창립된 조선글서예가협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조선글서예보급에 앞장섰다.
박명준은 동북조선족교육출판사 미술교과서 편집실에 재직하면서 『조선글서예』, 『조선글씨쓰기』, 『중소학교원학생서예작품집』등 서예관련 책자를 편집 출판하여 조선글서예 기초자료를 제공하였다. 다른 한글서예자료를 구할 수 없는 중국의 현실에서 그 책들은 소중한 참고자료로 되었다.
횡도자 서권은 1993년부터 연변제1사범학교 서예교사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서예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996년에는 조선글서예가협회의 발기인 중의 한사람으로 활약하면서 조선글서예 보급에 앞장섰다. 1998년에는 연변 최초의 서예학원인 연길시서예양성센타를 설립하여 원장을 맡아 더욱 많은 서예인재를 육성하였다.
 
㉡조선족서예가협회 운영위원회
조선족서예가협회에는 임창춘 외에 오명남, 주영일, 장문선, 전청송, 허일춘 등의 운영위원이 있다.
양산 오명남은 조선족서예가협회 발기인의 한사람으로서 임창춘과 함께 협회를 이끌어갔다. 그는 한문서예이론과 실기에 능하며, 조선글 서예에도 조예가 깊다. 그는 양산서화사를 운영하는 동안 수많은 간판글을 써왔으며 후대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용천 주영일은 협회 초창기의 사무차장으로서 협회를 이끌어가는 한편 독특한 한글서체로 인기를 끌었으며 보상 없는 후대양성으로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인품이 좋고 박식하였으며 후배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장문선은 1994년에 협회 사무국장으로 발탁되어 임창춘과 함께 《아름다운 한글서예 중한 연합전》,《한중서예교류전》,《해외동포전》등을 개최하여 한중서예교류와 중국 한글서예보급과 발전에 하였다. 현재는 협회 부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백산 전청송은 협회 이사로 재임중이다. 그는 연변일보사 미술편집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신문 題字를 비롯하여 각종 제목글을 써왔는데 그것은 후학들의 좋은 학습자료로 되었다. 그는 서예가기전에 화가로 유명하다.
허일춘은 협회 이사로 재임중이며 연변TV 미술편집, 광고편집으로 재직하면서 조선글자막을 써왔다. 그는 북한의 청봉체와 한문서예를 접목시켜 연변 특유의 서체를 창출해낸 작가이다. 그는 수강료를 받지 않고 장룡, 이성호, 문호 등 후학들에게 조선글서예를 가르쳐 연변의 조선글서예 보급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조선글서예가협회 운영위원회
조선글서예가협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가운데는 서영근과 서권을 제외하고도 장룡, 이성호, 이문혁 등이 있다.
아산초부 장룡은 연변제1사범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김정송에게서 청봉체를 배웠고 동시에 허일춘과 주영일에게서 연변의 서체를 배웠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협회 창립이후에는 기타 운영위원들과 같이 합심하여 조선글서예보급에 앞장섰다. 그는 조선글서예가협회 상무부회장, 연길시서예양성센타 원장, 연길시정협위원으로 재직하였다.
일심 이성호는 장룡과 같이 연변제1사범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김정송에게서 청봉체를 배웠고 동시에 허일춘과 주영일에게서 연변의 서체를 배웠다. 그는 조선글서예가협회가 주최한 《정음상》조선글서예대전에서 영광의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협회 사무차장으로 추대되었다. 현재는 장룡의 후임으로 상무부회장을 맡고 있다.
아성 이문혁은 서권의 수제자이다. 그 역시 연변제1사범학교 졸업생인데 재학시절에 수학을 전공하다가 졸업시점에 와서 서권을 스승으로 모시고 서예를 배웠는데 그 소질이 뛰어나 그야말로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협회 창립 직후 사무차장으로 추천되어 다른 운영위원들과 같이 협회를 이끌어갔다. 현재 그는 한국의 문화와 서예를 익히기 위하여 한국에 유학중이다.
조선글서예 발전에 공헌한 사람은 많지만 두루 다 거론할 수 없으니 이쯤에서 줄인다.

Ⅷ 나오면서
문제점 및 해결방안
중국조선글서예 活動史는 10여 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1945년 이후 30회 개최해온 國展을 통하여 광대한 한글서예 대오를 형성하였고, 전 국민적인 한글서예열기를 일으켰으며 휘황찬란한 발전을 가져 왔다. 또한 현재는 미술협회, 서예협회, 서가협회가 주관하는 3대국전과 그 지부에서 주관하는 지역 서예대전 그리고 우후죽순처럼 일어서는 공모전을 통하여 수많은 서예인들이 배출되고 있다. 원광대학교를 시작으로 대학교와 대학원에 서예학과가 개설되었고, 서예학원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 문화예술은 건국이후부터 1978년까지는 외부와의 문화교류가 차단되어 외국의 문화를 접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동란으로 수1십 년 퇴보되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으로 경제는 발전되기 시작하였고 문화도 외부의 빛을 보게 되었다. 조선글서예활동은 1989년으로부터 시작되어 10여 년이란 짧은 기간사이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으며 한국에는 비할 바 못되지만 비교적 많은 서예인 대오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서예사 10년이란 결국 짧은 것이다. 수십 년의 서예인생을 살아온 서예가들도 많은데 조선글서예사 10년은 결국에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조선글서예의 보급과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으며, 문제점도 많다. 아래에 조선글서예계의 문제점과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전통한글서예 지도자가 없다.
중국에는 아직까지 전통 한글서예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서예가가 없다. 전통한글서예를 접한 지가 불과 7,8년이 되고, 한글서예를 배우는 것도 전문적인 지도를 받지 못하고 독학위주이다. 연변제1사범학교를 비롯한 서예과목이 설치되어 있는 학교의 서예교사들도 전문적인 전통한글서예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하여 성공한 서예가의 지도를 받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전문서예교육자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그 해결방안으로는 젊은 서예가들을 한국에 유학 보내어 전문적인 한글서예지식을 배워오게 하거나, 한국의 유명 서예가, 서예대학 교수 등을 초청하여 전통한글서예를 전수 받아야 한다. 한중한글서예교류전도 교류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세미나, 특별강좌 등을 조직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조선글서예가 보편화되지 못했다.
조선족사회에서 서예는 아직 보편화되지 못했다. 예술의 보편화는 경제가 발전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집집마다 액자나 족자가 걸려 있지만, 연변에는 서예를 하는 사람의 집을 제외하고는 서예작품이 걸려 있는 집을 찾기 힘들다. 그러니 일반인들은 서예에 대해 이해가 깊지 못하고 흥취도 없다.
중국의 경제는 10여 년 사이에 승승장구로 성장하였으며, 2050년에 가서는 세계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세계경제학자들은 예견하고 있다. 따라서 반백년간 침체되었던 중국서법은 역사이래 최고봉에 도달할 것이며, 조선글서예의 보급과 발전도 급속히 전개될 것으로 생각된다.
 
㉢서예교육기관이 부족하다.
한국에는 대학교에도 서예학과가 설치되어 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에도 서예과목이 설치되어 있으며, 서예학원도 수없이 많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연변제1사범학교에 서예과목이 있기는 하지만 서예학과의 설치는 되지 않았으며, 일부 소학교에서는 서예과목을 설치하였지만 대부분의 학교들에서 서예과목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서예학원도 2, 3개정도 밖에 없다.
조선글서예를 보급하려면 전문서예교육가도 있어야 하지만 전문서예교육기관도 있어야 한다. 대학교에서부터 서예학과를 설치하고, 고등학교, 중학교, 소학교에서도 차례로 서예과목을 설치하여야 한다. 서예가들도 서예학원을 설립하여 후대배양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한글서예관련자료가 부족하다.
중국에는 한글고전 서예자료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글서예교본, 한글서예圖錄 등 모든 것이 부족하다. 서예관련 책자가 몇 권 출판되긴 하였지만 전통한글서예이론을 싣지 못하였으며, 서체가 규범화되지 못하였다. 자체적으로 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서예가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규범화되지 못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글서예관련자료가 부족한 현실이다.
한글서예관련자료를 많이 수집하고, 한국에서 출판한 전통서예교본을 중국에서도 출판하고, 한국서예가들의 작품집, 국전 도록 등을 조선족서예가들에게 보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래지 않아 중소학교, 대학에 서예학과나 서예과목이 설치될 수도 있는데 서예교육수준에 맞춰 학교용 서예교재를 편찬하는 것도 시급한 상황이다.
 
㉤젊은 서예가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서예가》하면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흰머리의 나이 지긋한 사람이다. 그러나 서예는 예술인 것만큼, 배우는 시간이 길어야 서예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천재적 예술소질이 있어야 서예가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천재적 기질이 없는 사람은 몇 십 년을 하여도 서예가로 될 수 없는 것이고, 천재적 기질이 있는 사람은 몇 년만 배워도 서예가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서법가협회에서 주최하는 書壇新人展, 中靑年書法展 등 國展에는 2, 30대의 청년서예가들이 대다수 入選하고 있다. 필자가 1995년부터 알고 지내는 于明泉은 1963년 生인데 中靑年書法展에서 연속 3회 최고상을 수여 받았다. 꼭 나이가 많아야 서예를 잘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현재 젊은 조선글서예가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나 원로서예가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다만 나이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성장을 막고 있다. 젊은이들은 우리의 한글서예를 이끌어갈 기둥이다. 늙은 세대들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젊은 세대들은 감히 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원로서예가들 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이 나가는 길을 막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글서예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글서예는 글씨가 아니라고 한문서예만 고집하는 이들이 있다.
서예의 기원은 한문에서 비롯된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갑골문의 출현으로부터 기원한다면 한문서법의 역사는 몇 천년이 된다. 그에 비하면 한글서예의 역사는 짧다. 그러나 한문서예만 우월하다고 보는 경향은 틀린 것이다. 한글서예는 그 역사가 짧기에 발전 전망이 크며 그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 특유의 예술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 하겠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순수 한글서예 연구단체인 조선글서예가협회가 중국에 창립되었다는 것은 실로 축하할 만한 일이다. 조선글서협은 전에도 그랬지만 금후에도 계속 중국에서의 한글서예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할 것이다.
 
㉧여유가 없다.
조선족에게는 경제적 여유, 시간적 여유, 마음의 여유 모두가 없다.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우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창작할 수 있다. 중국의 국민 경제수준은 아직도 낙후하다. 먹고 쓰고 남는 것이 있어야 예술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인 여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살기도 바쁜 세월에 예술작품을 감상할 시간이 있는 이는 적다. 따라서 마음의 여유도 생기지 않는다. 즉 시기적으로 아직은 이르다. 일부 여유가 있는 이들과 전업서예가 외에는 서예를 깊이 연구할 사람이 없다. 지금은 초기이기에 10년, 20년의 세월이 흐르면 중국의 경제도 좋아 질 것이니 한국 못지 않게 서예고조가 일 것이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북한과 인접해 있고, 한국과도 문화교류가 밀접하다. 때문에 중국조선글서단에는 남북한의 서체가 공존할 수 있으며 중국서법의 영향도 함께 받아 연변 특유의 서체(아직까지 서체명은 정해지지 않았음)도 생성되었다. 또한 전통서체의 구속을 받지 않고 각 자의 풍격을 나타내는 서체(예를 들면 《단천체》)도 다수 출현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우월한 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연변의 노래방에서 남한노래, 북한노래, 중국노래, 연변노래, 일본노래 등 여러 나라의 각양각색의 노래를 거의 모두 들을 수 있듯이 조선글서단도 풍요로운 것이다. 중국조선민족은 한 세기동안 異민족의 국가에서 살면서도 자기의 전통문화는 고수라니 지켜왔듯이 조선글서예도 그 속에서 전통을 이어가는 한편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협회 홈페이지: http://seoyega.gg.ro
협회 E-mail: laoxu@freechal.com

참고문헌:
정판룡, 중국조선족의 어제, 오늘, 내일, 조선족유학생회
최삼룡, 중국조선족의 전통문화와 삶의 현상, 조선족유학생회
서영근, 중국에서의 한글서예발전사, 한글서예학술발표회, 1996.10
서영근, 정음상조선글서예콩쿨개황 및 작품경향에 대한 분석고찰, 월간서예, 1996.11
월간서예, 길림성 연변지구와 한국의 서예술 현황을 비교한다. 199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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