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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개천절이군요. 금년이 서기 2020년이니 檀紀 4353년이 되겠습니다.
本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이곳에 등장하는 어휘의 개념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천도(遷都)란 수도를 옮긴다는 뜻이고 치소(治所)란 다스리는 장소를 뜻하므로 국가의 도읍지 내지는 한 나라의 수도라고 이해하여 주시면 되겠다. 고조선의 수도로 불리는 대표적인 것이 아사달(阿斯達)이라는 지명이다. 그런데 아사달 이외에도 고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성, 왕검성(왕험성), 장당경(당장경), 험독(검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조선의 치소(治所)인 도읍지가 어디였는가의 문제는 고조선의 강역(疆域) 및 국세(國勢)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고조선의 수도가 한 곳이 아니었다면 고조선은 최소 한 번 이상 천도(遷都)를 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천도가 뜻하는 바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천도란 수도를 이전(移轉)하는 일인데 이것은 엄청난 노고가 수반되는 까닭에 국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도읍지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도읍지를 바꾸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 외침을 막기 위해 더 안전한 곳으로 후퇴(後退)하는 경우와 국력이 팽창하여 외부로 전진(前進)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고조선의 역사가 2000년 이상 존속하였으므로 최소 한 번 이상 천도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보는데 『삼국유사』에는 천도가 세 번이나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도가 한 번도 안 이루어져 도읍지가 2000여 년 내내 평양(平壤) 일대였다는 학설도 있고 도읍지가 먼 곳으로 이동하였다는 중심지 이동설이 있다.
중심지 이동설도 견해가 다양하여 수도가 평양에서 한반도를 거쳐 요동 지역이나 요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는 중심지 전진설(前進說)이 있고 반대로 요서 지역이나 요동 지역에서 평양으로 이동하였다는 중심지 후퇴설(後退說)이 있다. 그리고 고조선의 천도가 한반도 지역이 아닌 요동 지역과 요서 지역 내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견해는 한반도 특히 대동강 유역의 평양 일대가 고조선의 강역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의 강역이 한 번도 청천강(淸川江) 이남에 이르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고조선의 수도가 요동 지역에서 요서 지역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요동 지역으로 후퇴하였다고 보았다.
여기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구분하는 곳은 오늘날 요하(遼河)라고 불리는 강이다. 요동 지역이란 요하 동쪽에서 압록강(鴨綠江) 이북 지역을 뜻하는데 통상적으로 요동 반도 남단인 대련 市에서부터 북쪽의 심양 市까지의 동쪽 일대를 말한다. 한편 요서 지역이란 요하 서쪽 지역으로 오늘날 요녕성 서남쪽인 금주 市, 호로도 市와 요녕성 서북쪽인 조양 市 일대인 요녕성 서부지역을 지칭한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넓은 의미의 요서 지역이란 호로도 市 서남쪽 건너편인 하북성 진황도 市 일대인 난하(滦河) 동부 유역까지를 포함한다. 그런 까닭에 고조선의 천도가 요서 지역과 요동 지역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고조선의 수도 이전(移轉)이 난하(滦河)에서 압록강(鴨綠江) 사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조선과 관련된 사료의 내용이 많지 않다 보니 고조선의 수도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왕검성(王儉城)과 관련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나온다. 왕검성(王儉城) 또는 왕험성(王險城)은 고조선의 수도로 불리는 곳이다.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우거왕 때 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이 멸망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왕검성(王儉城)이라는 용어는 왕검을 임금이라는 말로 해석해 ‘임금의 성’이라는 뜻의 보통명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왕검성이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쓰인다는 전제하에 고조선이 몇 차례 천도를 단행하였다면 위치가 다른 왕검성이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왕검성을 특수한 지역을 가리키는 한 장소의 고유명사로 볼 경우에도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이제 고조선의 도읍지를 거론하는 우리나라의 문헌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삼국유사』에는 『위서(魏書)』를 인용해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했다고 했고 『고기(古記)』를 인용해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기록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아사달'(阿斯達) 및 '평양성'(平壤城)이 초기 수도로 기록되어 있으며 후에 백악산(白岳山, 묘향산의 별칭)으로 천도했다고 한다.
②『삼국사기』권17 동천왕 조에는 “평양성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이다. 또는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위서(魏書)』에서 전하는 아사달(阿斯達)과 『고기(古記)』에서 전하는 평양성(平壤城)이 같은 곳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어원(語源)을 분석하는 언어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사달의 아사(阿斯)는 왕(王)이나 읍(邑)을 뜻하는 것으로 아사달은 대읍(大邑) 또는 왕읍(王邑)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성의 평(平)은 대(大) 또는 장(長)을 뜻하며 양(壤)은 읍(邑) 또는 성(城)을 뜻하는 것으로 평양은 대읍 또는 장성(長城)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한문식으로 성(城)이 다시 결합 되어 평양성(平壤城)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위서(魏書)』가 전하는 아사달(阿斯達)과 『고기(古記)』가 전하는 평양성(平壤城)은 같은 곳을 가리키는 다른 호칭 즉 이칭(異稱)인 것이다. 그리고 아사달과 평양성은 특정한 어느 한 곳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도읍이 옮겨지면 자연히 아사달과 평양성이란 곳도 장소가 옮겨지는 보통명사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조선으로 대표되는 초기 고조선의 도읍지를 대동강 유역인 평양市 일대로 보았다. 고조선과 관련된 1차 문헌은 『삼국유사』 외에 다른 특별한 것이 없으니 그 근거가 되는 『삼국유사』의 원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고기(古記)』에 의하면 단군이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던 해(BC2333년을 의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했으며 또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린 것은 1500년간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던 기묘년(BC1122년을 의미)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위 내용은 BC2333년부터 BC425년까지의 1908년의 기간과 관련된 내용이다. 그러므로 위 내용은 위만조선 (BC194~BC108)과는 무관한 내용이라고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천도까지 언급하여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에서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로 이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가 이루어진 시점이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백악산을 묘향산의 별칭이라고 받아들여 백악산이 묘향산이라고 간주하는데 『삼국유사』에서 이것을 묘향산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도읍지로 거론되는 백악산 아사달이 현재 평안북도에 있는 묘향산이 아닌 다른 산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삼국유사』에서 승려 일연이 말하는 백악산이란 황해도 지역에 있는 산 이름인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산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르자면 백악산 아사달이란 곳은 단군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로 1500년 동안이나 한 나라의 수도로 군림하였으며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네 번째 도읍지이자 단군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아주 유서 깊은 장소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단군조선이 멸망하는 BC425년 (2333 – 1908)에 고조선의 치소였던 백악산 아사달이 황해도 지역에 있었다거나 아니면 평안북도 묘향산에 있었다는 근거나 단서가 현재까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삼국유사』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사서는 고조선의 도읍지가 한반도에 있었으며 천도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한반도 내에서의 위치 이동이라고 보았다. 『삼국유사』 외에 고조선의 역사를 다루는 1차 문헌으로 거론되는 것이 『삼국유사』보다 5~6년 후에 편찬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이다. 그런데 『제왕운기』 역시 고조선의 도읍지와 관련하여 영양가 있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보니 『삼국유사』가 전하는 내용은 여과 없이 후대에 계승되었고 이것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을 거쳐 오늘날 학계의 정설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왕검성은 평양이라는 평양說로 굳혀지게 된다.
평양설은 한국의 주류사학계가 정설로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의견으로 다양한 사료 및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를 그 근거로 한다. 그러나 왕검성이 평양 및 평안도 일대라는 것과 관련하여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다. 낙랑군의 군치(郡治)로 추정되는 낙랑토성을 왕검성으로 보는 견해와 대동강 북쪽에 있다는 견해로 나뉜다.
여기서 잠시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일연이『삼국유사』에서 인용하는『고기(古記)』는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편찬된 우리나라의 사서(史書)라고 짐작이 되는데 『고기(古記)』의 편찬자가 우리나라의 뿌리는 한반도에서 태동하였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단군왕검이 대동강 평양지역을 도읍지로 삼았다고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고기(古記)』에 기록되어 있는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였던 평양이라는 지명이 위만조선 말기의 치소였던 왕검성을 뜻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사서와는 다르게 중국의 사서(史書)는 고조선의 도읍지가 한반도가 아닌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요동설은 주로 『사기』 및 『한서』의 주석에 나타난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한다. 이 기록을 근거로 재야사학자들은 왕검성을 요녕성 해성(海城, Haicheng)市로 비정한다. 해성市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안산市에 포함되는데 지도상으로는 영구市와 안산市 사이에 있다. 단재 신채호와 함께 상고사 분야에서 석학(碩學)으로 유명한 위당 정인보가 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王儉城)을 요동군의 험독(險瀆), 즉 요녕성(遼寧城) 해성현(海城縣)으로 비정한 바 있는데 이곳이 바로 해성市이다.
한편 단재 신채호는 3조선론(三朝鮮論)에 입각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는데 중국과 접경지역에 있었던 불조선(= 번조선)의 치소인‘아리티’가 요녕성 개평현(蓋平縣) 동북 지역인 안시성 자리라고 비정하였다. 개평현(蓋平縣)은 오늘날 개주(盖州, Gaizhou)市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영구市에 속한다. 지도상으로는 영구市와 대련市 사이에 있으며 요동 반도 서쪽에 위치해 발해 동안(東岸)에 있다. 신조선(= 진조선)과 말조선(= 막조선)의 치소와 관련된 내용은 하단에서 별도로 설명하기로 하자.
북한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리지린 역시 한나라 때 요동군에 속했던 험독(險瀆)을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으로 보았으며 그곳을 요녕성 개평(蓋平)이라고 비정하였다. 이곳은 신채호가 주장한 불조선의 치소였다는 개주市와 같은 곳이다. 신용하 교수도 왕검성의 옛 자리가 개평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요동설은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의 위치가 평양 일대였다는 다른 기록이 있고 또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가 있으므로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도읍지는 평양지역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도읍지라고 보는 것이 현재 주류사학의 다수설 입장이다. 따라서 현재의 주류사학 다수설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했다고 보며 왕검성의 위치 역시 요하 동쪽에서 평양으로 옮겨졌다고 이해한다.
이하에서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비정하는 고조선의 도읍지를 살펴보자. 첫 주자는 윤내현 교수이다. 도읍지를 바꾸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 세력이 확대되어 외부로 전진하는 경우와 외침을 막기 위해 더 안전한 곳으로 후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자세히 살피면 천도가 세 번 이루어졌다고 한다. 고조선이 천도를 3번 했다는 점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하는데 그중 첫 번째 천도는 국력이 강화되어 바깥으로 확장된 경우였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천도는 반대로 국력이 위축되어 안쪽으로 후퇴하는 경우였다. 尹교수는 고조선의 천도와 관련된 근거를 『삼국유사』에서 찾으면서 천도가 이루어지는 위치를 한반도가 아닌 요동과 요서 지역에서 답을 구한다. 이하는 尹교수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단군은 기원전 2333년에 조선이란 나라를 세우면서 요동 지역인 심양(瀋陽) 인근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곳을 평양성(平壤城)이라 칭했다. 고대 사람들 표현에 의하면 평양(平壤)이나 요하(遼河) 혹은 요수(遼水)가 지명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라고 한다. 평양은 대읍 예컨대 큰 마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즘 의미로 따지면 수도와 비슷한 개념이며 요하는 중국 사람들에게 동북쪽 끝자락에 있는 중국의 경계가 되는 강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사군이 설치되기 전에는 중국의 동북방 경계가 난하(滦河)였으므로 하북성에 있는 난하가 요하를 의미했고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에는 요녕성에 있는 요하(遼河)가 오늘날의 요하로 인식되었다.
尹교수는 『삼국유사』의 천도 관련 기록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BC2333년에 단군조선은 평양성(平壤城)이라고 불리는 요동 지역 심양(瀋陽) 인근 지역을 첫 도읍지로 삼았다. 첫 번째 천도가 언제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백악산 아사달(두 번째 도읍지)은 난하(滦河) 유역인 하북성 진황도 市 관내에 있는 창려(昌黎) 부근에 위치한다. 두 번째 천도로 이루어진 장당경(세 번째 도읍지)은 요서 지역 북진(北鎭. Beizhen, 행정구역상으로 금주 市이나 지도상으로는 금주 市와 심양 市 사이인 내륙에 있다.)에 위치하며 천도 시기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BC221년 경이다. 마지막 세 번째 천도地인 아사달(네 번째 도읍지)은 첫 번째 도읍지였던 심양(瀋陽) 인근 평양성(平壤城)이며 천도 시기는 위만조선이 고조선의 거수국 (= 제후국)이었던 기자국(箕子國)을 침탈한 BC194년 이후이다.
고조선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추진된 서진 정책으로 고조선은 요동을 넘어 요서 지역인 중국의 하북성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고조선의 서변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난하 유역 동쪽인 창려 (오늘날 진황도市 서남쪽)에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게 되었다. BC221년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고조선은 대릉하(大凌河) 동쪽 건너편인 북진(北鎭. 장당경)으로 천도하게 되고 마지막 천도는 위만이 준왕의 기자국(箕子國)을 멸망시킨 후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잠식해 들어오자 부득이 요하(遼河) 동쪽인 원래의 도읍지였던 심양 市 일대로 후퇴하게 되었다. 심양 市 일대로 후퇴한 마지막 천도의 시점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원전 194년 이후의 일인 것은 분명하다.
尹 교수는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평양성 → 백악산 아사달 → 장당경 → 아사달 순으로 도읍지가 변경되었다는 3천도론(三遷都論)의 내용을 따르되 도읍지로 추정되는 곳은 『삼국유사』와 크게 다르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세 곳 모두가 한반도(韓半島)에 소재(所在)하는 곳이라면 尹교수가 주장하는 곳은 모두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지역에 있는 곳이다. 그리고 천도 시기와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구체적인 연도와 관련된 내용을 무시하고 당시의 시대 상황과 결부시켜 결정해버린다. 예컨대 尹교수는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세 번의 천도만 받아들이고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도읍지의 위치와 도읍지의 변경 시점을 자신의 학설에 맞도록 바꾸었다. 이상이 고조선의 천도와 관련된 尹 교수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은 어디를 말하는가?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평양은 서경(西京)으로 오늘날 대동강(大同江)에 있는 평양(平壤)을 의미한다.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과 장당경(藏唐京)의 위치는 오늘날 황해도 일대라고 한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아사달의 위치를 무엽산(無葉山), 백악(白岳)산 등으로 이해하여 백주(白州,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로 비정 하는 기록과 개성 동쪽의 백악궁(白岳宮, 현재는 위치 미상)으로 비정 하는 기록을 함께 전하고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백악산 아사달을 황해도 구월산으로 보았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서는 당장경(= 장당경)이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일대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단편적이고 구체성이 떨어지고 논리적 연관성도 부족하므로 사실성이 희박하다고 본다. 설령 문화면이 고조선의 도읍지였다고 하더라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당시의 수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문헌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유추가 가능해진다. 고조선은 평양을 첫 도읍지로 삼았고 황해도 연백군이라고 비정되는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였으며 황해도 신천군 이라고 추정되는 장당경으로 또 천도하고 마지막에는 평양으로 복귀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고조선의 치소가 평양을 시작으로 남쪽 황해도 두 곳을 거쳐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내용이 이상해진다. 이런 내용을 믿는 사람들 역시 별로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문헌인 『삼국유사』를 근거로 고조선의 천도 과정을 접근할 경우 이런 해석으로 귀결된다.
천도의 장소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천도의 시기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삼국유사』의 내용 원문 중 시기와 관련된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여 아래와 같이 다시 표기해보기로 하자.
『고기(古記)』에 의하면 단군이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던 해(BC2333년을 의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했으며 또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린 것은 1500년간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던 기묘년(BC1122년을 의미)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위 내용을 원문에 맞게 충실히 해석할 경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아진다.
“단군이 BC2333년에 평양성에 도읍했다. 그 후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 불리는 백악산 아사달을 두 번째 도읍지로 삼았다. 그리고 평양성 혹은 아사달을 1500년 동안 수도로 삼았다. 기자가 BC1122년 (중국의 공식 입장은 BC1046년)에 조선에 오니 단군은 장당경을 세 번째 도읍지로 삼았고 BC425년에 두 번째 도읍지였던 아사달로 돌아와 네 번째 도읍지로 삼았으며 이때 단군조선이 망하였다.”
『삼국유사』의 원문에 나오는 숫자 중 눈여겨봐야 하는 것이 2333, 1500, 1122, 1908이라는 숫자이다. 숫자 4개를 갖고 천도의 시점이 언제였는지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이제 그 작업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만약 단군이 BC2333년에 평양성에 도읍했다가 곧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했다고 가정하면 백악산 아사달은 BC833년 (2333-1500) 혹은 BC830년대 초까지 고조선의 도읍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BC1122년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자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가 조선에 오는 시점이 평양성 혹은 아사달을 수도로 삼은 지 1500년째 되는 해인 것처럼 묘사한다.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기자가 조선에 온 시점은 BC833년 (2333-1500) 이 된다. 그런데 기자가 고조선에 온 시점이 기묘년인 BC1122년이라고 하니 계산이 안 맞게 된다. 기자가 고조선에 온 시점을 중국의 공식 입장인 BC1046년으로 간주해도 계산이 맞지 않는다. 대략 200~300년 (1046-833, 1122-833) 정도 차이가 난다. 계산을 맞게 하려면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그것은 1500년이라는 숫자를 줄이거나 아니면 고조선의 기원을 더 소급하여 적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기원을 소급 적용하는 것은 고조선의 기원을 건드리는 중대한 문제이다.
게다가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시점을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BC24~23세기로 보았다. (☞고조선의 기원이 BC2333년이라는 것은 『동국통감』에서 확정되었다) 기자가 조선에 온 시점을 기묘년인 BC1122년이라고 가정할 경우 고조선의 기원은 BC2622년(1122 + 1500)으로 소급적용되어야 하고 BC1046년이라고 가정하면 고조선의 기원을 BC2546년(1046 + 1500)으로 소급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더욱이 이것이 두 번째 도읍지였던 아사달에 근거를 둔 내용이라면 고조선의 기원은 더 소급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여 준 것이 『동국통감』이다. 『동국통감』에서 단군의 치세가 1500년이 아니고 1048년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삼국유사』에 대입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기점을 기자가 동래(東來)하였다는 BC1122년으로 잡아 역산(逆算)해보는 경우이다.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인 평양 시대는 BC2333년부터 BC2170년까지이며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 아사달 시대는 BC2170년부터 BC1122년(2170-1048)까지이다. 세 번째 도읍지인 장당경 시대는 BC1122년부터 BC425년까지이며 마지막 네 번째 도읍지인 아사달은 BC425년에 단명으로 끝난다.
기자의 동래 시점을 BC1046년으로 추정하여 역산해 볼 경우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인 평양 시대는 BC2333년부터 BC2094년까지이며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 아사달 시대는 BC2094년부터 BC1046년(2094-1048)까지이다. 세 번째 도읍지인 장당경 시대는 BC1046년부터 BC425년까지이며 마지막 네 번째 도읍지인 아사달은 BC425년에 단명으로 끝난다. 本 접근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단군의 치세 기간인 1048년의 시점을 평양이 아닌 백악산 아사달로 본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단군 치세 1048년의 시점을 평양에 도읍한 BC2333년으로 잡게 되면 단군의 치세가 BC1285(2333-1048)년에 끝나게 되는데 이 경우 BC1285년부터 기자가 고조선에 온다는 BC1122년 혹은 BC1046년까지의 긴 기간이 미궁에 빠져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을 근거로 위와 같은 접근도 가능하다는 점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두 번째로 소개하고자 하는 분은 북한 학계의 동향을 알려주는 박경순 역사평론가이다. 이하의 내용은 朴 평론가의 견해이다. 고조선의 기원이 BC2333년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최근 북한 학계의 동향은 BC3000년 경으로 소급하여 살펴본다고 한다.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기존 북한학계의 입장은 고조선 중심지가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재요녕성설(在遼寧省說)을 정설로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1993년 가을 평양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다고 발표한 이래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었다고 주장을 급선회하였다. 그리고 평양에서 발굴된 ‘단군릉’에서 나온 인골의 연대측정을 통해 그 기년이 BC3011년이라고 발표하였다.
한편 朴 평론가는 다른 모든 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이 멸망하는 시기는 한 무제의 위만조선 정벌이 완료되는 BC108년으로 본다. 고조선의 역사는 위만조선을 포함해 근 3000년이나 유지되었는데 정작 도읍지는 평양 일대를 한 번도 이탈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위만조선 시기에 왕검성(王儉城)이 하나만 있지는 않았다. 수도인 평양에도 왕검성이 있었고 요동 지역에도 왕검성이라는 곳이 있었다. 위만조선 시기의 副수도로 알려진 대표적인 곳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격전이 펼쳐졌던 요동지방 개주시(盖州市, Gaizhou)에 있던 왕검성이다. 개주시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영구시(營口市, Yingkou)에 속하며 그 남쪽에 위치한다. 개주시는 요동 반도가 시작하는 곳에 있으며 반도의 서쪽에 위치한다. 왕검성이 하나만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검성은 고유명사가 아닌 대읍(大邑)이란 의미의 보통명사로 봐야 할 것이다.
한 무제의 위만조선 침략과 관련해 후세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은 고한(古漢)전쟁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BC109~BC108)의 전장(戰場)이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국한되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압록강 이남 지역 예컨대 대동강 평양에서 위만조선과 한나라 간에 교전이 단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한나라가 수군(=해군)을 동원해 누선장군 양복(楊僕)의 지휘하에 산동 반도에서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 공격한 곳은 평양의 왕검성이 아니라 요동지방에 있던 왕검성이었다. 한편 육군은 좌장군 순체(荀彘)의 지휘하에 패수인 대릉하(大陵河)를 건너 요동에 소재한 왕검성을 공격 목포로 잡았다.
위만조선 내부 변절자들의 배신으로 성기(成己)가 분전한 왕검성이 함락되고 그 여파로 위만조선이 멸망하게 되었는데 성기가 분전했다는 왕검성도 평양이 아닌 요동 지역의 왕검성이었다. 이상의 내용이 朴 평론가의 견해인데 朴 평론가가 비정한 위만조선의 副수도였다는 개주시(盖州市)는 단재 신채호가 불조선(= 번조선)의 치소로 본 요녕성 개평현(蓋平縣)이란 곳과 같은 곳이다.
세 번째로 소개하고자 하는 분은 최동환 역사평론가의 견해이다. 崔 평론가는 고조선을 단군조선, 후조선, 위만조선으로 분류한다. 崔 평론가는 자신의 저서에서 단군조선의 도읍지가 어디인지 밝히지 않았으며 후조선의 치소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도읍지와 관련해서 위만조선의 치소인 왕검성이 호로도 市(葫蘆島市, Huludao) 관내에 있는 흥성시(興城市, Xingcheng)로 비정하였다. 단군조선의 강역이 요녕성 조양 市에서 심양 市를 거쳐 충청도 청주市까지라고 밝혔으며 고조선의 첫 도읍지라 할 수 있는 단군조선의 치소는 심양(瀋陽) 인근이 유력할 것이라고 보았다.
흥성 市로 비정한 왕검성이 언제부터 고조선의 도읍지가 되었는지에 대해 崔 평론가는 말을 아끼고 있으나 위만조선이 후조선을 찬탈한 후에도 왕검성이 위만조선의 치소로 계속 남은 점으로 보아 후조선 시기에도 흥성 市가 도읍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 같다. 다만 후조선 어느 시기에서부터 흥성 市로 추정되는 왕검성이 고조선의 도읍지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점은 호로도 市가 단군조선의 강역은 아니었으므로 후조선 시대에 이르러 최소 한 번 정도의 천도가 이루어졌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예컨대 단군조선 시대에는 수도가 요동 지역인 심양(瀋陽) 市 일대에 위치하였는데 후조선 시대에 이르러 영역이 서쪽으로 크게 확장되면서 수도가 요서 지역인 호로도(葫蘆島) 市로 이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네 번째는 『환단고기』 편찬자가 보는 고조선의 천도 과정이다. 고조선과 관련된 이야기는 「단군세기」와 「북부여기」에 수록되어 있는데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는 BC239년을 기점으로 그 前 이야기는 「단군세기」에 수록되어 있고 그 後의 이야기는 「북부여기」에서 전한다. 「단군세기」와 「북부여기」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조선은 단군왕검 시절부터 나라를 3등 분하여 만주 일대인 진조선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막조선인 한반도 지역과 번조선인 지금의 요녕성과 하북성 일대는 副단군을 두어 관리토록 하였다. 이것을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라고 한다. 진조선의 단군 입장에서 보면 막조선과 번조선은 진조선의 커다란 연방을 구성하는 제후국이자 거수국인 셈이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BC2333년에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하면서 나라를 진한, 마한, 번한으로 3등분 하였는데 진한 지역의 치소는 아사달 왕검성 (= 하얼빈 市)에 두었고 마한 지역의 치소는 달지국 대동강 (= 평양 市)에, 번한 지역의 치소는 안덕향 [安德鄕 = 하북성 당산 市에 있는 개평(蓋平)의 동북 70리로 고구려의 옛 안시성(安市城) 자리라고 함]에 두었다. 이것을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진한, 마한, 번한은 제2왕조가 시작되는 BC1285년에 명칭이 진조선, 막조선, 번조선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한(= 막조선)과 번한(= 번조선)은 진한(= 진조선)의 제후국이니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진조선의 천도 과정만 살펴보기로 하자.
BC2333년에 단군이 치소로 삼은 진조선의 첫 도읍지는 아사달 왕검성 (하얼빈 市)이었다. 이것을 송화강 아사달 시대 (BC2333 ~ BC1286 / 하얼빈)라고 한다. BC1285년에 색불루 단군에 의해 제2왕조가 성립하면서 진조선의 수도는 백악산 아사달 (장춘 市)로 이동한다. 이것을 백악산 아사달 시대 (BC1285 ~ BC426 / 장춘)라고 한다. BC425년에 구물 단군이 등장해 국명을 조선에서 대부여로 개칭하면서 진조선(= 대부여)의 수도는 구월산 장당경 (개원)으로 이동한다. 이것을 장당경 시대 (BC425 ~ BC238 / 개원)라고 한다. 개원(開原)은 행정구역상으로 철령(鉄嶺, Tieling) 市에 속하는데 철령 市는 심양 市 북쪽 30km 지점에 있다.
BC239년에 해모수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길림 市 북쪽 50km 지점인 웅심산 서란[(舒蘭, Shulan)市, 난빈(蘭濱)이라고도 함, BC239 ~ BC86]에 북부여라는 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1년 후인 BC238년에 대부여 왕조를 흡수한다. 대부여가 망한 후 6년간의 짧은 공화정이 실시 되고 BC232년에 해모수가 대부여 영토 전역을 장악한다. 수도는 장당경으로 유지하되 난빈에 거주하였다. BC108년에 고두막(일명 두막루)이 등장하여 졸본을 치소로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동명부여이다. BC86년에 북부여가 성읍을 바쳐 항복하니 동명왕인 고두막이 이를 접수하면서 나라 이름을 계속 북부여라고 칭하였다. 한편 동명왕은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해부루를 가섭원(일명 차릉)으로 이주시키니 이것이 동부여이다.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고조선의 천도 과정을 진조선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시기 (BC) | 국명 | 왕조 | 시조 | 도읍지 | 도읍지 (당시) | 시대명 | |
| 1 | 2333~1286 | 진한 | 제1왕조 | 단군 왕검 | 하얼빈 | 아사달 왕검성 | 송화강 아사달 시대 |
| 2 | 1285~426 | 진조선 | 제2왕조 | 색불루 | 장춘 | 백악산 아사달 | 백악산 아사달 시대 |
| 3 | 425~238 | 대부여 | 제3왕조 | 구물 | 개원 | 구월산 장당경 | 장당경 시대 |
| 4 | 239~86 | 북부여 | 제4왕조 | 해모수 | 서란 | 난빈 | 웅심산 서란 시대 |
| 5 | 108~58 | 동명부여 / 북부여 | 제4왕조 | 고두막 | 환인 | 졸본 | 졸본 시대 |
| 6 | 57~37 | 졸본부여 / 북부여 | 제4왕조 | 고주몽 | 환인 | 졸본 | 졸본 시대 |
『환단고기』 의 핵심 내용은 단군조선의 적통이 진한(= 진조선)에서 대부여와 북부여를 거쳐 고주몽의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것이다.
위 내용을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다섯 번째로 소개하고자 하는 분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견해이다. 신채호의 견해를 『환단고기』와 함께 다루는 이유는 내용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의 실체가 정확히 규명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환단고기』가 신채호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면 신채호가 『환단고기』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환단고기』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와 신채호의 삼조선론(三朝鮮論)은 내용이 무척 유사하다.
신채호 역시 『환단고기』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을 3등 분하여 다음과 같은 3조선론(三朝鮮論)을 펼친다. 신조선(= 진조선, 진한, 신한), 말조선(= 막조선, 마한, 말한), 불조선(= 번조선, 변한, 불한) 3 연합체가 고조선을 구성한다고 본다.
종주국인 신조선(= 진조선)의 수도인 ‘아스라’(= 아사달)는 오늘날 하얼빈이고 제후국인 말조선(= 막조선)의 치소인 ‘펴라’는 오늘날 한반도 평양지역이다. 그런데 말조선의 치소는 평양에 있다가 충청도 공주 지역으로 남천(南遷)했다. 마지막으로 불조선(= 번조선)의 치소인 ‘아리티’는 요녕성 개평현 동북 지역인 고구려의 옛 안시성(安市城) 자리이다. 개평현은 오늘날 개주(盖州, Gaizhou)市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영구市에 속한다. 지도상으로는 영구市와 대련市 사이에 있으며 요동 반도 서쪽에 위치해 발해 동안(東岸)에 있다.
신채호와 『환단고기』 모두 단군조선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신조선(= 진조선)의 치소를 하얼빈 일대라고 보았으며 제후국인 말조선(= 막조선)의 치소를 평양으로 보았다. 다르다면 다른 나머지 제후국인 불조선(= 번조선)의 치소인데 신채호는 이곳을 요녕성 개평현으로 본 데 반하여 『환단고기』에서는 하북성 당산市 개평 인근에 있는 안덕향이라고 비정하였다. 위치는 다르지만 두 곳 모두 고구려의 옛 안시성 자리였다고 하니 개평(蓋平)이라는 지명의 위치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였던 것 같다.
고조선의 도읍지가 어디였는지 그리고 천도하였을 경우 어디에서 어디로 옮겼는지를 살펴보았는데 현재까지 단 하나도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미궁(迷宮)에 빠져있는 미지의 영역이다 보니 추측을 통해 소문만 무성한 예측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단지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어서 접근 자체가 힘들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 시대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거나 중국에서 이를 은폐(隱蔽)하여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 시대를 조명할 마땅한 기록이 없어서 그러한 것인가? 모두가 다 맞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된 이유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문헌고증(文獻考證) 부문에서 미궁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고조선의 기원과 관련한 1차 문헌이자 사료는 『삼국유사』인데 『삼국유사』가 전하는 내용은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지 중 하나였으며 이것이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쳐 확고부동한 평양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박은식을 필두로 신채호, 정인보 등의 민족사학(民族史學)이 등장하면서 고조선의 강역을 넓혀서 보기에 이르렀고 그 연장선에서 고조선의 도읍지가 한반도가 아닌 요동과 요서 지역에 세워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의 고대 사서(史書)에서 찾아 나갔다.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고학적 발굴이 되겠으나 이것이 시대 여건상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역사학자들은 문헌을 고증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과거에 접속할 수밖에 없었다. 고조선과 관련된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1차 사료는 사실상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두 개가 전부인데 이곳에서 인용되는 『고기(古記)』와『본기(本紀)』는 현존하지 않는다.
단재 신채호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중국 못지않게 후세에 널리 알릴만한 역사서를 편찬하여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나라의 관구검(244년)과 전연(前燕) 모용황(342년)의 고구려 침략으로 『유기(留記)』 100권이 도난당하거나 소실되었으며 고구려가 668년에 망하면서 고구려에서 편찬한 역사서는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를 면치 못하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600년경에 이문진이 편찬한 『신집(新集)』 5권이라는 역사서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편찬을 마치고 『삼국사기』의 지존무상(至尊無上)이라는 독보적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기존에 참조하였던 역사서를 모두 없앴으며 조선 시대 초기와 중기에는 조정(朝廷)에서 정책적으로 역사서를 폐기처분 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3세기의 40년에 이르는 몽골의 침략과 7년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으로 서고가 불타 없어지는 화마(火魔)마저 겪었으니 우리나라의 역사서가 온전히 보존되기가 무척 힘들었을 거라고 보았다.
반면 중국의 역대 왕조는 고대 시대부터 왕조사(王朝史)의 편찬을 왕실 주도의 관찬(官撰) 사업으로 삼았고 그 결실인 24 정사(正史)를 잘 보존하였다. 24 정사(正史)는 이십사사(二十四史)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역사서 24종의 통칭으로 다음 왕조에서 정사로 인정받은 것만을 모은 것이다. 『사기』를 필두로 『한서』, 『후한서』, 『삼국지』,『남사』, 『북사』, 『진서』, 『수서』,『구당서』, 『신당서』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상의 내용은 모두가 관(官) 주도의 편찬물이고 왕명(王命)이 아닌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 서적도 중국에 무수히 많으며 이중 상당수가 위서(僞書)로 지목받는다고 한다.
글의 내용이 핵심을 이탈하였는데 필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20세기 전반기의 민족사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참고할만한 우리나라 역사서가 마땅치가 않아서 부득이 보존이 잘 되어있는 중국의 역사서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중국의 역사서 내용을 과연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느냐? 라는 점이다. 공신력이 높은 정사(正史) 24사(二十四史)의 경우에도 역사 왜곡으로 얼룩진 사서(史書)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서진(265~316)과 동진(317~420)의 역사를 담은 진서(晉書) 130권이다. 당 태종 이세민이 사서(史書) 편찬에 직접 관여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난도질한 바 있다.
진서(晉書)의 경우에서 보듯이 관찬서(官撰書)의 내용도 신뢰할 수 없는 게 현금의 상황인데 정사(正史)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일반 개인의 사찬서(私撰書)의 내용을 어떻게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것도 교차 검증이 안 되는 내용이라면 그것을 연구하는 독자(讀者, 이하에서는 독자를‘고조선을 연구하는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라고 이해하자) 역시 본의 아니게 역사 왜곡이라는 수렁에 빠져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고고학에 근거한 유적과 유물의 답사 및 출토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고대 문헌 고증을 통해 우리나라의 과거를 규명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학자들은 위서(僞書)라는 암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위서(僞書)란 저자(著者)가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여 저술한 책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왜곡하려는 악의(惡意)가 없어도 저자(著者) 본인의 무지나 착각 혹은 최소한의 주관적인 선입견이 작용하여 글의 내용이 실제의 역사와 거리를 두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넓게 보자면 이런 것도 위서(僞書)의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역사적 진실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저자(著者)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지면(紙面)에 다양한 형태로 표기되겠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讀者)가 이를 여과 없이 수용한다면 독자(讀者)는 저자(著者)가 퍼트린 허위(虛僞)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경우 하나의 사실을 기록하는 저자(著者)가 한두 명이 아니다 보니 그것과 관련한 서적도 한 둘이 아니겠고 내용 또한 각양각색일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각양각색의 서적들마저 내용이 후세에 이르러 훼손되어갔다는 점이다. 후대의 사가들이 주석을 달면서 책의 내용을 변질시키는 것이다. 이런 ‘지식의 미로’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탐구하고자 하는 독자(讀者)들은 혼란스러워지게 된다. 이런 결과가 우리가 알아보고자 하는 내용이 계속 미궁 속에 갇혀 일 수밖에 없는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또 하나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모든 문헌이 그것이 우리나라의 사료이든 중국의 사료이든 간에 모두 한자(漢字)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인 까닭에 뜻이 다의(多義)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러므로 독자(讀者)들이 한자로 표기된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해석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처럼 한자(漢字)로 된 중국의 고대 문헌을 연구하는 독자(讀者)들은 그 내용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가 많으며 이로 인해 주장하는 내용 또한 달라질 수 있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가 어디였는가를 다루는 패수(沛水) 논쟁이다.
글을 마치며
고조선의 도읍지가 어디였는지 그리고 천도하였을 경우 어디에서 어디로 옮겼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는데 시원스러운 해답이 도출되지 못하였다. 도읍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천도를 거론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다. 우리나라의 사료인 『삼국유사』에 근거할 경우 고조선의 도읍지는 대동강 평양 市 일대가 된다. 그리고 천도를 하게 되었다면 황해도 두 곳을 거쳐 다시 평양으로 복귀하였다가 결론이 된다.
중국의 문헌에 접근해서 고찰하는 경우 고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은 요서와 요동 지역에 위치하게 된다. 극단적인 견해는 산서성 어딘가에 고조선의 도읍지가 있었다는 성헌식 평론가의 주장이다. 민족사학 진영의 대다수 입장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요서와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본다. 이는 오늘날 하북성과 요녕성 지역을 말한다. 이것을 ①고조선의 도읍지가 요서 지역에 있었다는 견해와 ②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견해 그리고 ③요서와 요동 지역에서 천도가 이루어졌다는 견해 ④ 마지막으로 한반도와 요서/요동 지역에서 천도가 이루어졌다는 견해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하의 내용은 필자의 상상력이 동원된 추측이니 부디 가볍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고조선이 도읍지를 한 번 이상 바꾸었다면 천도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마도 BC280~270년대에 일어난 ‘진개의 침략’사건과 진(秦)나라의 중국 통일 (BC221)이 가장 유력하다고 본다. 진개의 침략 전에는 고조선의 도읍지가 하북성 중부 어딘가에 있었다가 진개의 침략으로 하북성 북부나 요녕성 서부로 옮겨졌을 것이고 더 후퇴하여 요녕성 동부인 요동 반도나 심지어 한반도로 이전(移轉)하게 되었다고 예상해볼 수 있다.
이를 오늘날 지명으로 거론하면 고조선의 도읍지가 하북성 천진市나 당산市 혹은 진황도市 서남부 일대인 창려현 일대에 있다가 진개의 침략으로 진황도市 동북부나 요녕성 서부인 호로도市, 금주市 혹은 대릉하 너머 반금市 일대로 옮겨졌을 수 있으며 요하 너머 영구市, 안산市, 심양市 심지어 한반도에 있는 평양市 일대로 후퇴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尹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진개의 침략이 고조선에 의해 바로 격퇴되었으므로 고조선의 도읍지는 계속 창려현 일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은 BC300년 이후의 상황을 묘사하는 내용이다. 그 전 2000년 동안의 고조선 도읍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말은 고조선의 기원이라고 보는 BC24세기부터 BC4세기까지의 20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고조선의 도읍지가 하북성 일대였다고 추정된다면 특별한 문제가 없겠으나 대다수 학계의 견해는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진개의 침략 이전에 고조선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하북성 중부 어딘가가 고조선의 첫 도읍지는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의 기원을 천진市나 당산市 일대인 하북성 중부지역으로 본다면 이곳을 초기 도읍지로 규정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민족사학 계열의 대체적인 시각은 단군조선의 원류로 지목되는 곳을 하북성이 아닌 만주지역에서 찾고 있다. 그런 까닭에 천진市와 당산市 일대인 하북성 중부지역을 고조선의 첫 도읍지로 보면 안 될 것 같다. 이 말은 하북성 중부지역은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가 된다는 뜻이며 진개의 침략과 진(秦)나라의 중국 통일(BC221)로 고조선이 동천(東遷)하여 도읍지로 삼게 되는 곳은 고조선의 세 번째 도읍지가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도읍지와 세 번째 도읍지는 어디인가?
우선 두 번째 도읍지라는 하북성 중부지역을 살펴보자. 북경市 남쪽 내륙에 있는 하북성 보정(保定, Baoding)市가 왕검성 자리였다는 김봉렬 평론가의 견해가 있으나 이는 재야사학 내에서 소수설의 입장에 속한다. 재야사학의 다수설 입장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난하 유역에 있었다고 본다. 尹교수는 난하 북쪽인 하북성 창려현 일대에 고조선의 도읍지가 있다고 보았다. 창려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진황도市이나 그 서남쪽 끝에 위치해 당산市와 지척(咫尺)이다. 창려현 일대에 갈석산이 있으며 바로 남쪽에 난하가 흐른다. 난하를 건너면 당산市 이다. 『환단고기』에서는 번조선의 도읍지가 안덕향이라고 한다. 안덕향은 당산市 개평구 동북 70리 지점에 있는 곳으로 고구려의 안시성 자리라고 한다. 그곳은 오늘날 당산市 관내 지역인 천안(遷安)市 남쪽으로 난하 남쪽에 있다. 안덕향은 창려 서북 30~40km 지점에 있다.
이제 세 번째 도읍지를 살펴보자. 진개의 침략과 진(秦)나라의 중국 통일(BC221)로 고조선이 동천(東遷)하여 도읍지로 삼게 되는 고조선의 세 번째 도읍지는 난하 동쪽에 있을 터인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황도市에서 평양市에 이르는 긴 지역 중 한 곳일 것이다. 尹교수는 진개의 침략이 바로 격퇴되어 하북성 진황도市 창려현이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로 계속 유지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진(秦)나라의 중국 통일(BC221)로 위협을 느껴 대릉하 유역에 있는 북진市(北鎭. Beizhen, 행정구역상으로 금주市)로 천도한다고 보았다. 최동환 평론가는 천도와 관련한 언급은 없었으나 이 시기에 고조선의 도읍지를 호로도市 관내에 있는 흥경市로 비정하였다. 흥경市는 북진市 서남 120km 지점에 있다. 이상이 요서 지역에 관한 내용이다.
고조선의 도읍지가 요동 지역이었다는 주장은 신채호, 정인보 그리고 리지린에서 나타난다. 신채호와 리지린은 오늘날 개주市라고 불리는 곳이 고조선의 도읍지라고 보았으며 정인보는 그것이 해성市라고 보았다. 다만 이들에게서 이곳이 고조선의 몇 번째 도읍지였는지는 확인이 안 되고 있다. 한편 신채호의 경우 개주市가 고조선을 구성하는 3조선의 하나인 불조선의 치소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고조선의 기원과 관련이 있는 첫 도읍지는 어디였을까? 여기서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천도를 단행하였다고 하더라도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멀리 천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두 번째 도읍지가 재야사학의 입장대로 하북성 중부지방에 있었다고 추정할 경우 첫 도읍지는 평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첫 번째 도읍지는 평양보다 한참 서쪽에서 찾아야 한다. 요동 지역도 하북성에서는 먼 곳이다. 거리를 기준으로 볼 때 첫 도읍지로 추정하기에 적당한 곳은 대릉하 유역인 금주市 나 조양市 일대라고 본다. 그러나 거리만 가지고 천도의 과정을 추적해 나가는 것은 독단적인 접근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필자의 생각은 천도의 과정을 추적해 나가는 데 있어서 ‘거리’라는 개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상식을 벗어날 정도이면 후보군에서 배제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여 주셨으면 한다.
민족사학 진영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취합하여 퍼즐을 맞추어 보자면 고조선의 첫 도읍지는 요동 반도 내륙인 심양市 일대가 유력한 후보지가 된다. 첫 번째 천도로 이루어지는 두 번째 도읍지는 하북성 중부지역이다. 상당수 재야사학의 견해가 이러하니 하북성 중부지역에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가 있었다고 가정하자. 그곳은 오늘날 천진市, 북경市, 당산市 그리고 진황도市가 있는 영정하에서 난하 유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두 번째 천도로 이루어지는 세 번째 도읍지는 원래의 도읍지로 추정한 요동 반도 내륙인 심양市나 요동 반도 서안에 있는 개주市 혹은 해성市가 유력하다고 본다. 첫 번째 천도가 국력의 강화에 기인한 중심지 전진설(前進說)의 내용이라면 두 번째 천도는 국력의 약화에 기인한 중심지 후퇴설(後退說)의 내용이라 하겠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받아들여 고조선이 천도를 세 번 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한다면 하북성 중부지방에서 대릉하 유역을 중간 기착지(?)로 삼은 후 다시 요동 반도로 동천(東遷) 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것이 尹교수의 주장인데 필자는 이런 견해에 동감한다.
그런데 문헌고증보다 우선시되는 고고학적 발굴을 기준으로 고조선의 수도와 천도 과정을 살펴 볼 경우 문헌고증에 근거한 위 내용이 사실을 제대로 반영한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된다. 고조선의 모든 시대에 걸쳐 고고학적 유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속단할 수는 없으나 북한 학계는 평양 일대가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유력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유적 발굴의 결과물을 제시하였다.
이와 아울러 평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내몽골 동남부 적봉시(赤峯市) 일대에서 출토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BC2400~BC1500)의 유적과 유물을 근거로 이것을 고조선과 연계하여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요녕성 서북부 일대가 유력할 수 있다는 견해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이 지역을 고조선과 연계하여 접근하는 근거는 내몽골 동남부 적봉시(赤峯市)와 요녕성 서북부 조양시(朝陽市) 일대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 고조선 계열의 유물이라 할 수 있는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양시(朝陽市) 일대의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라는 무덤에서는 비파형 동검 외에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청동거울)도 함께 출토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을 기준으로 고찰할 경우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대동강 평양이 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내몽골 동남부 적봉시(赤峯市)나 요녕성 서북부 조양시(朝陽市)도 될 수 있다. 위에서 ‘거리’라는 기준을 제시하면서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가 하북성 중부지역에 위치하였다고 전제할 경우 첫 번째 도읍지는 평양이 될 수 없다는 필자의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이를 근거로 고조선의 첫 도읍지를 요동과 요서 지역에서 찾아보아야 하는데 요서 지역에서 고조선의 초기 시대와 연계할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고조선의 첫 도읍지를 요동 지역인 심양市 일대가 아닌 요서 지역인 적봉시(赤峯市)나 조양시(朝陽市) 일대로 추정해 볼 여지가 생긴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尹교수의 3 천도론에 접목시킬 경우 고조선의 첫 도읍지는 적봉시(赤峯市)나 조양시(朝陽市) 일대가 될 수 있으며 첫 번째 천도로 이루어지는 두 번째 도읍지는 영정하에서 난하 일대인 하북성 중부지역이 되며 두 번째 천도로 이루어지는 세 번째 도읍지는 대릉하 유역인 금주市나 반금市가 유력하며 세 번째 천도로 이루어지는 마지막 네 번째 도읍지는 요동 반도 서안에 있는 개주市나 해성市가 유력하다고 본다. 만약 천도가 두 번만 이루어졌다면 대릉하 유역을 skip하고 하북성 중부에서 요동 반도로 후퇴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박경순 평론가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만조선이 멸망하는 시점에 고조선의 수도는 평양이었다는 내용을 수용하되 개주市에 있었다는 副수도인 왕검성을 부각시켜 이 지역이 중국과의 실질적인 항쟁지였다고 결말을 낼 수도 있다.
천도의 과정을 지도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붉은 색은 윤내현 교수의 주장이고 밤색은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천도 과정을 표시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