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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공산주의의 역사 : 1975년-현재
정리 : 오세철
A. PT운동 경험의 교훈 : 좌익공산주의 국제대회(1976-1980)
1. 1980년 5월 4년 전 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PcInt, Battaglia Comunista)가 주도한 좌익공산주의 국제대회가 혼란 속에 마감되고 ICC가 이른바 조직문제에 대해서 “자율주의적” 입장을 지녔다는 이유로 B.C와 CWO에 의해 배제되었다.
IBRP가 ICC의 “내부분파”(IFICC)와 아르헨티나의 “Circulo des Comunistas Internacionalistas"와 유착함으로 ICC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보르디가주의 그룹들은 분파적 고립 속에서 자족하거나 IBRP와 같이 IFICC를 받아들였다.
2. 국제대회의 배경
좌익공산주의 세력의 분산은 1979년에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19세기말부터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런데 그 투쟁이 분산된 형태로 이루어졌다.
레닌이 러시아당에서 멘셰비키의 기회주의와 투쟁했을 때 룩셈부르크의 처음 반응은 멘셰비키 편이었다. 룩셈부르크가 카우츠키가 현상유지에 승복하는 진정한 의중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레닌은 그녀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모든 것은 제2인터의 당들이 한 국가의 기반을 두고 있었고 한 국가의 기반위에서 대부분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인터내셔널은 단일한 세계당이 아니라 국가당의 연합이었다. 비록 코민테른이 이러한 국가의 특수성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그 특수성이 절대적 비중으로 작용했다.
1920년대 초 코민테른의 퇴행에 대항하여 움직인 좌익공산주의 분파는 이러한 경향에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분리의 명백한 보기는 1920년대 이후 독일 좌파와 이탈리아 좌파의 분리였다. 보르디가는 독일 좌파의 노동자평의회의 강조를 그람시의 “공장평의회주의”와 동일시했으며 독일 좌파는 코민테른의 퇴행에 대항하는 동맹으로서 “레닌주의적” 이탈리아 좌파를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1920년대 말 전면화된 반혁명은 좌익세력을 더욱 분산시켰으나 이탈리아 분파는 원칙적 기반위에서 국제적 토론과 협동을 위한 기반을 닦음으로써 반혁명에 대한 줄기찬 투쟁을 했다. 이것이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과 좌익반대파 망명그룹과 논쟁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개방적 정신은 망명분파에 의해 성취된 보편적 강령의 진전과 함께 Bilan에 의해 전개되었다. 국가적 틀에 굴복한 이탈리아 분파의 다수는 이탈리아 기반의 새로운 당 건설에 급급했고 결국 이탈리아 분파를 해소하고 개인자격으로 새로운 당에 참여했다. 이질적 세력의 재구성은 이탈리아 좌파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새로운 분화를 촉진시켰다. 첫째, 1945년 프랑스분파는 이탈리아분파의 해소를 반대하고 새로운 당의 기회주의를 비판했고 결국 International Communist Left(ICP의 국제조직)로부터 축출되었고 Gauch Communiste de France(GCF)를 만들었다. 1952년까지 ICP는 당내의 두 분파의 분열로 고통을 당했는데 하나는 Battaglia Comunista 주위의 “데이먼주의자(Damenists)”였고 다른 하나는 Programma Comunista 주위의 “보르디가주의자”였다. 그런데 보르디가주의자들은 그 후에 경직된 분파주의를 위한 이론적 정당화를 하면서 스스로를 지구상의 가장 유일한 PT당으로 간주했다.(그러나 1970년대까지 여러 개의 “유일한” 국제공산당의 공존과 계속되는 분열을 막지 못했다) 이러한 분파주의는 분명히 반혁명의 대가중의 하나였다. 한편으로는 어렵게 성취한 정치적 입장 주위에 불변하는 공식의 벽을 쌓음으로써 적대적 환경 속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시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으로부터 고립되고 소그룹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혁명가들을 PT운동의 진정한 요구로부터 분리시킨 써클정신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국제혁명운동의 밑바닥을 경험한 1950년대 이후 사회적 환경이 변하지 시작했다. 1968년 5월의 파업과 함께 PT가 역사의 무대에 다시 돌아왔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으며 혁명적 일관성을 추구한 집단들은 좌익공산주의의 전통을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다. 새로운 상황을 인식한 세력 중에 하나는 옛 GCF의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1964년 Internacialismo 그룹을 형성한 베네수엘라의 젊은 세력과 교류하고 있었다. 이 그룹이 1968년 5월 이후 유럽에 건너와서 이탈리아 좌파의 옛 그룹들을 고무시켰다. 그런데 이탈리아 좌파의 두 세력은 68년 5월(69년 이태리의 “뜨거운 가을”까지도)을 학생봉기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젊은 세력과 융합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 그룹과 새롭게 형성된 Révolution Internationale 그룹은 계급운동의 부활로 형성되는 새로운 세력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1968년에 두개의 프랑스 그룹인 Cahiers du Communisme de Conseils와 Organization Conseilliste de Clermont-Ferrand이 RI와 만나 “new series”를 형성한다. 이를 시발로 1973-4년 일련의 대회가 열리고 1975년 6개 그룹이 ICC를 창설한다. (RI, Internationalism(U.S.A), WR(Britain), Internacionalismo, Accion Prolettaria(Spain), Rivoluzione Internazionnale(Italy))
3. 제1차대회 : 1977년 Milan
이탈리아에서의 고립으로부터 벗어나서 Battaglia는 전 세계 좌익공산주의 그룹에게 국제회의 제안을 한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 Révolution Internationale, Pour Une Intervention Communiste, Union Ouvrière, Combat Communiste
영국 : CWO, W.R
스페인 : Fomento Obrero Revolucionario
미국 : Revolutionary Workers Group
일본 : 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연맹, “혁명적맑스주의분파”(Kakunaru-Ha)
스웨덴 : Forbundet Arbetamakt(Workers Power Leage)
포르투갈 : Combate
이 중에서 프랑스의 Union Ouvrière와 미국의 RWG는 해산되었고, 포르투갈의 Combate는 공산주의 원칙과 일치하지 않았으며, 일본은 답변이 없었고, 스웨덴은 다른 이유로(관심은 있으나) 불참했다. 단순히 “국제 연결망”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 혁명운동의 분화를 극복하고 집중화와 궁극적 재구성을 위한 작업을 인식한 Battaglia의 노력은 진일보한 것이었다. ICC도 이에 공감하고 1936년 그들의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정치조직의 계급적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을 토론했다.
그런데 1977년 4월-5월 밀란에서 열린 대회에 제출한 Battaglia의 제안은 중요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그 제안은 참여의 명확한 기준을 결여하고 있었다. 서유럽 주요 공산당의 일부가 채택한 “유로코뮤니즘”에 대한 태도였다. Battaglia가 표현한 공산당의 “사회적 민주화”라는 의미는 불명료했으며 자본의 좌익을 제외시키는 PT 그룹만의 국제대회여야 한다는 본질적 계급적 입장이 없었다. 이 대회에도 일본과 프랑스(CC)의 급진좌파를 포함시킨 것이 그 보기였다. ICC는 자본의 좌파를 제외시키는 최소기준을 제안하면서 대회의 목적이 새로운 세계당을 만드는 정치적 과정으로 인식돼야 한다고 보았다.
동시에 대회는 운동을 지배하게 된 분파주의에 맞서는 것이었다. 시작부터 Battaglia는 스스로 “이탈리아”좌파의 대표로 생각했고 보르디가주의 그룹의 초청에 실패했다. 이러한 접근은 ICC의 특정 지역에 국한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둘째, 참여하기로 했던 “Pour Une Intervention Communiste”그룹의 갑작스런 불참결정이 있었는데 1977년 4월 24일자 편지에 “대회가 귀머거리의 대화에 불과할 것이다”고 적혀 있었다. 셋째, 대회에서 공통적 입장을 채택하는데 실패했다. ICC는 토론 중에 부각된 의견일치와 불일치를 적시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Battaglia에게는 너무 큰 요구였다.
결국 대회에 참여한 그룹은 Battaglia와 ICC 뿐이었다. 영국의 CWO는 참여에 동의하여 그동안 ICC와의 단절된 관계(ICC의 러시아 혁명의 퇴행 분석 때문에 그를 “반혁명적”이라고 보았던)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실용적 문제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고 스페인의 Munis 주위의 그룹이나 프랑스의 FOR도 마찬 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주요 쟁점이 다루어졌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주의사회가 쇠퇴(사멸)의 시기에 들어선 것에 동의하였는데 그 원인의 분석은 달랐다. ICC가 자본주의를 사멸로 이끄는 기본모순을 실현(잉여가치)의 문제로 보는 룩셈부르크의 테제를 방어한 반면 Battaglia는 이것을 이윤율 저하 문제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둘째, 첨예한 경제위기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
셋째, 60년대 말과 70년 초의 계급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가 있었는데 ICC가 반혁명의 시기의 종말로 본 반면 Battaglia는 반혁명이 계속 지배한다고 보았다.
넷째, 공산당과 사회당의 반혁명적 역할에 대한 의견일치를 보았으나 ICC는 이러한 조직을 기회주의 또는 개량주의로 규정하는 Battaglia의 정의를 비판했는데 이러한 칭호는 부르주아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PT조직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섯째, 노동조합이 부르주아지의 조직이라는데 동의했지만 그것에 어떻게 개입하는 가에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Battaglia는 조합기반의 “공장위원회”의 선거를 대리하는 등의 조합에서의 작업을 말하고 동시에 “공산주의 공장집단” 또는 “공산주의 노조집단”이라고 부르는 “공장집단”을 형성하는 것도 말했다. 공장집단의 문제는 토론의 주요지점 이었는데 Battaglia는 이를 당과 계급 사이의 전달벨트로 보았고 ICC는 그러한 전달벨트는 사멸기에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노동조합을 대체할 어떠한 영구적인 대중조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섯째, 이러한 토론은 의식이 당에 의해, “외부로부터” 노동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레닌의 테제를 방어하는 Battaglia와 함께, 당과 계급의식의 문제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것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쟁점들은 ICC와 Battaglia(그리고 IBRP)의 차이가 대회 이후 까지도(특히 IBRP의 사멸론 폐기라는 중요한 변화)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귀머리의 대화는 결코 아니었다. 노동조합 문제에서 Battaglia는 공장집단으로부터 “노조”의 개념을 삭제하였고 ICC는 계급의식 문제에 대해 1984년 이후 “ICC의 외부분파”가 된 부분과의 논쟁에서 노골적으로 “반-레닌주의”라고 규정하였다. 요약하면 상호간의 명확화를 위한 토론이 있었고 광범위한 정치적 환경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4. 2차대회 : 1978년 파리
1차대회와 비교할 때 2차대회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명확한 정치적 기준에 근거하여 잘 조직되었고 더 많은 조직이 참여하였다. 수많은 토론문건이 출간되었다.(「좌익공산주의 그룹 2차대회(1권, 2권」) 참여 조직은 Battaglia Comunista, ICC, CWO, Nucles Comunista Internazionalista(Italy), Fur Kommunismen(Sweden), FOR(Spain)이었고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대회를 찬성한 세 개 그룹이 있었다. Arbetarmakt와 Il Leninista(Italy), Révolutionnaire Internationalise(Algérie)
2차대회 주제는 위기와 자본주의 사멸의 경제적 기초, 당의 역할이었고 보르디가주의자 전통의 많은 그룹에게 걸림돌 이었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이 논쟁은 명료화의 일반적 과정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보기를 들어 ICC와 스웨덴의 Fur Kommunismen의 공통적 틀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둘째로 혁명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준거 틀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대회는 분파주의 문제가 더욱 예민하게 부각되었다.
2차대회에는 보르디가주의 그룹이 초청되었지만 그들의 반응은 실질 운동에의 개입을 거부하는 고전적 표현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Florentine”PCI(1972년에 주류 보르디가 그룹인 Programma로부터 분리되어 Il Partito Conunista를 발간하는)는 어떤 “통일의 전도사”와도 관련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통일은 단기적 의미의 쟁점은 아니었다. PCI는 ICC가 “반당”입장이라고 거부했고 Spartacusbond(Holland), PIS(France)는 당에 반대하기 때문에 “Bordigo-Leninists”가 좌익사민주의에 가깝다고 참가를 거부했다. FOR(Spain)은 자본주의가 경제적 위기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방어하고 경제적 상황과 독립적인 “문명위기론”을 주장함으로써 대회에 불참했다.
위의 사태는 분파주의가 그 자체로 문제였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대회는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는 공동선언을 하자는 ICC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이유는 그룹들의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견해차이라는 이유였다. Spartacus나 PCI같은 그룹은 계급당의 필요성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회의 기준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 명백했다. 그러나 정치적 활동이 단순이 정치적 입장을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의 문제라는 생각이 틀린 것이다. 정치집단과 전투파의 태도, 궤도, 행동, 그리고 조직적 실천도 똑같이 중요하고 분파적 접근은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분파주의를 비난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대회는 그들이 모인 그 기반을 깨뜨렸고 혁명운동의 진정한 통일을 향한 작업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분파는 계급운동과 공통적 기반에 근거하지 않고 그 운동과 구별되는 특수한 구호에 그 존재이유를 찾는다는 맑스의 서한은 분파주의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1868년 10월 13일 Schweitzer에게 보낸 서한)
5. 3차대회 : 1980년 파리
참가 그룹은 ICC, Battaglia, CWO, L'Eveil Internationaliste, Nuclei Leninisti Internazionalisti(Nucleo와 Il Leninista 사이에서 재구성된) Organisation Communiste Révolutionnaire Internationaliste d' Algérie(실제 존재하지 않지만), Groupe Communiste Internationaliste(참관)이었다. 주요 의제는 위기와 전망 그리고 혁명가의 임무였다.
이 대회에서 의견일치를 본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주의는 3차대전을 향해 체제를 이끄는 심화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둘째, 이 전쟁은 제국주의적일 것이며 혁명가들은 양쪽 모두에 반대해야 한다.
셋째,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으로 향하는 행진의 유일한 대안으로 그들 계급의 혁명적 행위에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넷째. 노동계급은 “노동자”정당과 노조의 영향을 제거할 필요가 있고 다시 한 번 혁명적 소수의 활동이 관건이 된다.
동시에 역사적 과정의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의견의 불일치가 있었다. Battaglia는 전쟁과 혁명이 동시에 진행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혁명가의 임무는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반면 ICC는 1930년대 이탈리아 분파의 방법에 기초하여 전쟁으로 가는 경로가 노동계급의 약화와 패배에 근거할 수 있고, 같은 의미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적 운동으로 나가는 계급은 전쟁으로 갈수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더구나 혁명가는 그들 활동의 형식과 내용이 그들이 이끌어내는 결론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지배적 경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공장그룹의 문제는 그룹사이의 논쟁의 뼈대가 되었다. 계급에 있어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영향력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Battaglia가 제안한 이 개념은 ICC에게는 노동조합 같은 영구적 대규모 조직의 시대에 대한 향수로 보였다. 오늘날의 소규모 혁명집단이 “당과 계급사이의 전달벨트”같은 영향력 있는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이 시기의 혁명 활동의 가능성에 대한 일정한 과대망상증을 나타낸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접근 방법과 실제 운동의 이해사이의 간극은 혁명가들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작업을 과소평가 하게 만들고 78-80년 투쟁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실제적 조직형식을 향한 개입의 필요성을 파악하는데 실패하게 만든다. 보기를 들어 총회와 파업위원회(폴란드에서 괄목할만하게 보여주었지만 이미 로테르담 부두 파업에서 보여준)뿐만 아니라 투쟁 중 또는 투쟁 후 전투적 소수가 형성한 그룹이나 써클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쟁점에 대한 논쟁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가로 막았는데 이는 대회를 장악한 분파주의의 결정적 승리 때문이었다.
첫째,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따르는 주요 쟁점이었던 전쟁 위협에 대해서 공동선언을 하자는 ICC의 제안이 거부되었다. PcInt는 서명을 거부했고 CWO와 L'Eveil Internaliste도 이를 따랐다. 결국 대회는 이 문제에 침묵을 지켰다. [그 후 1999년과 2003년 발칸전쟁과 이라크 침공에 대한 ICC의 공동성명 제안도 성사되지 않았다.]
둘째, 당에 대한 논쟁은 대회가 끝날 무렵 Battaglia와 CWO가 새로운 기준을 제안하면서 갑자기 불거져 나왔는데 ICC 입장이 혁명에서 당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기 때문에 ICC를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혁명적 계급운동과 혁명적 권력의 전체 지도력이 필수불가결한 조직으로서의 PT당”이라는 기준이었다. 그것은 논쟁이 시작되기 전에 논쟁을 끝내자는 것이었다. Battaglia에 따르면 혁명당 건설에 관심이 있는 세력만 남겨놓고 “자율주의자들”을 제거하자는 선택 과정이었다. 사실 대회에 참여한 모든 그룹들은 장기적 목표로 당을 건설하는데 헌신하고 있었다. 혁명가의 실질적 실천과 연결된 토론만이 당이 구조와 가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의견의 불일치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Battaglia/CWO의 기준은 이들 그룹이 당의 역할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당을 계급의 “수장”으로 표현하는 문구가 쏟아졌지만 대회에서 B는 당이 국가와 구별되게 남아있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당 독재를 주장하는 “솔직한”보르디가주의의 견해를 거부했다. 2차대회에서 CWO는 볼셰비키의 “대체주의적” 오류에 대한 ICC의 비판에 대한 반대 논쟁을 벌였고 소비에트를 “통하여” 권력을 잡지만 당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기준 없이 대회를 시작한 Battaglia가 “선행적” 기준을 강조한 것은 명확화의 시도보다는 극복될 경쟁자인 ICC를 제외시키기는 정치적 의도로 해석된다. 이는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IBRP가 당을 건설한 유일한 세력으로 선언하고 PT진영의 주요개념(사멸론)을 포기한데서 알 수 있다.
제4차대회는 1982년 런던에서 열렸는데 IBRP를 구성한 Battaglia와 CWO만이 참여하였고 토론 내용이 출간되지도 않았다. 이 대회에는 쿠르드 민족주의와 관련되어있고 이란의 노동자공산주의당(헤크마트주의자로 알려진)과 관련을 맺은 Suppoters of the Unity of Communist Militants(SUCM)가 참여했는데 이는 민족주의에 대한 기회주의적 태도를 증명하고 있다.
6. 혁명가를 위한 진실의 시기
1970년대는 1960년대 말 노동자 투쟁의 고양의 성과가 남아있어 혁명운동이 성장한 시기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부터 정치적 환경은 암울해지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과 미국의 공격적 대응은 세계전쟁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제국주의 간의 첨예한 갈등을 보여주었고 부르주아지는 밝은 미래보다는 영국의 대처 같은 유형의 현실주의의 잔인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환상의 시기가 지나가고 진실의 시기가 온 것이다. 위기의 심화와 전쟁준비의 가속화에 직면하여 노동계급은 더 높은 수준으로 투쟁을 끌어올려야 했으며 그 다음 십년은 자본주의사회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할 결정적 시기임이 들어났다. 1980년 8월 폴란드에서는 고전적 대중파업을 통하여 노동계급이 스스로 조직화하는 능력을 보였다. 이러한 운동이 고립되고 잔인한 억압으로 무너졌지만 벨지움에서의 1983년에 시작된 투쟁의 파고는 서유럽 주요 국가의 노동자들이 위가가 가져다준 삶의 표준에 대한 새로운 공격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증명하였다. 계속되는 운동에 개입할 중요한 기회를 혁명가들은 가졌지만 공산주의 전투파에게는 쉬운 시기는 아니었다. 1960년대의 행복한 시절로부터 유래된 소부르주아 환상으로 운동이 작동되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목적에 헌신해 온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이 시기에 노동자 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했음에도 정치화의 충분한 수준에까지 노동자가 도달하지 못했다. 영국 광부, 이태리 교육노동자, 프랑스 철도노동자, 덴마크 총파업 등은 패배하지 않는 계급의 공개적 도전이었고 전쟁을 향한 부르주아지의 추동을 제지했지만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고 미래의 혁명세력으로서의 PT의 자격을 확립하지 못했다. 그 결과 PT집단과 전투파의 새로운 세대를 만들지 못했다.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의 결과 때문에 역사적 계급인 PT가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대안을 제기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해체의 시기에 들어서게 했다. 혁명적 환경에서 보면 이러한 “진실의 시기”는 약점을 드러내게 했다. PCI(Progamma)는 1980년대 초 민족해방 문제에 대해 강령의 무기의 결함을 보여 공개적으로 민족주의적이고 자본의 좌파적인 요소를 드러냈으며 ICC도 1981년 내부적 위기를 겪고 1985년에 “외부분파”와의 파열은 초기의 평의회주의적 잔여물이 남아있음을 보여주었다. 1985년 Battaglia와 CWO가 만나 IBRP를 구성한다.
그 이후 좌익공산주의 세력의 대회가 없었다는 것은 PT환경이 다시 분산된 형태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회가 폴란드에서의 대중파업이 일어난 날 막을 내리고 전쟁 문제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은 이들 운동의 실패의 단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T 그룹과 요소들의 새로운 세대가 조직적 틀을 통하여 미래를 열어나갈 것이다.
7. 언급된 그룹에 대한 간단한 설명
Spartacusbond - 네덜란드 좌익공산주의의 마지막 잔존 세력의 하나였지만 1970년대까지 1930년대의 평의회공산주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2차대전 후 PT당의 필요성을 선언한다.
Forbundet Arbetarmakt - 평의회주의와 좌파의 혼합을 보인 스웨덴 그룹. 소련을 “생산의 국가관료적 양식”으로 규정하고 민족해방 지지 및 노조내의 작업을 찬성함. 그러나 내부의 다양한 견해가 존대했고 일부 회원은 1970년대 말 ICC에 가입함.
Pour Une Intervention Communiste - ICC의 불충분한 개입을 비판하고 1974년 프랑스에서 ICC로부터 분리함. 그 후 반(半)평의회주의로 기울다 사라짐.
Nucleo Comunista Internazionalista - 1970년대 후반 이태리 PCI(Programma)로 분리된 그룹으로 Bilan의 전통과 기존하는 PT환경에 공개적 태도를 보임. 3차대회 까지 Il Leninista와 통합하여 Nucle Lenenista Internazionalista를 결성. 그리고 결국 좌파주의(자본)로 몰락한 Organizzazione Comunista Inintenazionalista(OCI)를 결성. NCI의 원초적 약점은 민족문제였는데 1999년에 세르비아를 지지하고 걸프전 때 이라크를 지지함.
Fomento Obrero Revolucionario - 1950년대 Grandizo Munis가 창립. Munis는 소련의 방어에 대해서 트로츠키와 갈라지고 좌익공산주의로 바뀜. 위기 문제에 대한 혼란, Munis의 죽음으로 1990년대 중반 소멸됨.
L'Evil Internationalista - 마오주의로부터 분리되어 70년대 말 프랑스에서 건설됨. 3차대회에서 다른 그룹이 이론과 개입 모두 불충분하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후 추적 불가능함.
Oraganization Communiste Révolutionnaire Internationaliste d'Algériè - 그의 기관지 Travailleur Immigrés on Lutle로 TIL로 알려짐. 대회를 지지했으나 안전문제로 참가가 불가능하다 했음. 혁명적 환경과의 대면을 회피하는 것은 문제 중의 하나이다. 80년대 까지 생존하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