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그대 눈물
초아(안희재)
1.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에서 순교까지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십시오(순교직전 최후 증언 중에서)
1821년 (순조 21년)~1846년 (헌종14년)
증조부 김진후가 10년여의 옥고 끝에 해미 옥중에서 순교하자, 할아버지 김택현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 함에 따라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천주교 신자였는데 1839년 가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 하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집안에서 사제의 길이란 미리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모방신부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최방제,최양업과 함께
15세때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로 가게 되고, 그곳 책임자인 리브아신부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뒤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인수 하였다.
그뒤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여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코자 하였으나,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 갔다.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여
1844년 마침내 부제가 되었다.
그해 말에 서북 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1월 10년 만에 귀국 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박해의 타격을 받는 천주교회를 재 수숩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
'진자샹'(김가항)성당에서 1845년8월17일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해8월 주교 페레올,다블뤼와 서울로 들어와서 활발한 전교 활동을 폈다.
1846년5월 서양성직자 잠입 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된뒤
문초를 통해 국금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임이
밝혀졌다.
이에 조선정부는 '염사지죄반국지율'을 적용,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고 9월16일
새남터에서 처형 되셨다
그때가 그의 나이 25 세셨다.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성직자의 자질과 사목 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삼고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시복 되셨고,
1984년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시성을 선포하였다.
옥중에서도 정부의 요청을 받아.세계지리의 계략을 편술 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색도화해서 정부에 제출 하였다.
2. 한국의 베들레헴 솔 뫼 성지
솔 뫼 는 솔 (소나무) 뫼 (산)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솔 뫼 성지로 들어가는 정문이 있다
다른 성지와는 다르게 내포지역은 예로부터 땅이 거름지고 물이 마르지 않아 쌀 생산이 많은
지역적인 특성으로 평야지대 많다
성지 또 한 어린아이부터 노약자까지 누구나 순례가 가능하여 많은 이들이 찿고 있다.
정문을 들어오면 왼쪽으로 아레나 원형극장과 12제자의 하얀 동상이 마치 이국적인 느낌이 난다,
아레나는'모래' 혹은 '모래사장'이라는 의미로, 현대적 의미로는 원형경기장 또는 원형공연장을 뜻한다
이곳에서의 아레나의 뜻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동료 밀사들이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순교하신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레나를 끼고 걷다보면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생가지 대건당이 보인다
4대에 걸쳐 순교자가 살던 곳,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과 삶의 지표가 싹튼 장소로써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려 지는 곳이다.
생가를 자나 그 위쪽으로는
신부님과 4대의 순교자들을 대변해 주는 노송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그곳에는 김대건 안드레아신부님상과 기념탑, 시성기념비, 순교 100주년기념비가 모셔져 있으며,
1946년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함께 성지가 조성되고 성역화 되었다.
솔 뫼의 중앙은 솔 뫼의 상징인 십자가 높게 지키고 있는데 그곳에 꿇어 앉아 돌무덤위 십자가 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게 하여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십자가상을 시작으로 십자가의길이 새로 조성 되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난의 모습이 처절하다. 그 길은 고난의길, 고통의 길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길은 브론즈로 인체 크기와 같게 설치한 환조 형태의 조각(김종필작가 2012년 설치)작품 으로
순례자들로 하여금 마음 속으로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고
구원 하시려 이 땅에 다시 오심을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오른쪽 베네딕도 수녀원이 보이는 나지막한 양지쪽으로 예수님의 손을 주제로 한 모자이크화
십자가의 길이 있다. 그것은 옛 십자가의 길이라고 한다.
이길은 김대건 안드레아상과 시복 시성비,100주년 기념비와 함께 솔 뫼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앞으로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성당과 기념관이 있는데, 성당은 라파엘호를 모티브로 지어졌다고 한다
(라파엘호는 1845년4월30일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갈때 타고 갔다가 8월1일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주교,다블뤼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입국할때 타고 왔던 배이다.)
2014년 성모승천 대축일에 아시아 청년대회가 열렸으며 라마스떼, 라마스떼를 외치며 아시아의 젊은이들과
함께 솔 뫼에 울려 퍼진 교황님의 목소리, 그리고 환호성, 영원히 우리가슴에 살아 숨 쉴 것이다.
성당 입구에는 교황님 방문을 기념 하고자 족흔과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성당 안에는 강경 황산포의 해도를 표현한 양편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아름답게 데우고 있다.
기념관 안에는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생애와 한국교회의 박해상황, 신부님의 원문편지 ,박해 보고서, 서적
등등이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영상관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성당과 기념관을 나오면 그 앞쪽으로 성모경당이 있는데, 이곳은 솔 뫼 성지 관장이신 이용호신부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2017년 8월 14일 대전교구 교구장(유흥식 라자로) 주교님께서 축성 미사를 하신 아름다운 경당이다.
외장 돌을 쌓으며 사이사이에는 사암으로 조각된 조각품을 넣었는데 세월의 흔적과 함께 성모경당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솔 뫼 성지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성지로서 비신자들도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찾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교황님께서 다녀가신지 3년
솔 뫼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교황님 방한 전 준비부터 주교님과 교황청 대사님 식사 준비를 하며,
떨림으로 기다렸던 아시아 청년대회, 이 모든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지금 이곳 솔 뫼는
봄에는 유채꽃, 가을에는 코스모스축제 등으로
지역과 함께 하는 성지,
신자와 비신자가 함께하는 성지,
주차장에서 부터 성지 전체가 계단이 없는 성지로써, 어린아이와 장애인과 노인이 더불어 함께하는 아름다운 성지이다.
첫댓글 잘읽고 가면서......
부탁이 있습니다.
저 김윤태 메일이 damas4773@hanmail.net
합덕성당 주일학교(메거진 교지 2호) 상의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늦게 보았네요
모바일: (010 9116ㅡ7319) 입니다
에메일은 요
ㅎㅎㅎ
heejae7319뒤에는 형제님하고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