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첫 돼지날(亥日), 세 번에 걸쳐 담근 술이라는 뜻
우리나라 전통주 가운데는 술 빚는 시기에 따른 이름의 주품이 몇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삼해주(三亥酒)와 청명주(淸明酒), 납주(臘酒) 등이다. 삼해주는 음력으로 ‘정월 첫 해일(亥日) 해시(亥時)에 술을 빚기 시작하여 12일 후나 한 달(36일) 간격으로 돌아오는 해일 해시에 모두 세 번에 걸쳐 술을 빚는다’ 하여 삼해주라 하였고, 청명주는 ‘음력으로 청명절(淸明節) 100일 전 또는 청명일에 술을 빚어 마신다’ 하여 청명주라 부르게 되었는데, 청명주 역시도 음력 정월 첫 해일에 술을 빚기 시작한다. 또 납주는 ‘음력 12월인 납월에 빚어 마시는 술로, 먹고 남은 식은 밥을 이용하여 빚는 까닭’에 술을 빚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 절기주에 속한다.
동양철학은 하늘과 땅의 운행은 오운(五運) 육기(六氣)의 운동이고, 오운 육기가 각기 음양(陰陽)이 있다고 본 데서, 천체의 운행궤도가 양과 음의 기운이 순차적으로 운행한다는 음양오행설을 기초하게 되었다. 즉, 양의 기운인 천간(天干)을 10(甲, 乙, 丙, 丁, 戊, 己, 庚, 申, 壬, 癸)으로 나누고, 음의 기운인 지간(支干)을 12 가지 동물(子, 丑, 寅, 猫,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로 나누었다.
결국 삼해주에서의 해(亥)는 이 12지간 중 마지막 순서인 돼지를 뜻한다. 따라서 삼해주는 정월 첫 해일(亥日), 곧 처음 맞이하는 돼지날에 세 번에 걸쳐 담근 술이라는 뜻이다. 즉, 해일은 12일 간격 또는 36일 간격으로 돌아오는데, 그 해일에 매번 술을 해 넣는 만큼 고급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처음 술을 해서 안친 지 36일 또는 96일 만에 술이 익게 되므로, 술의 맛이나 향, 색상이 뛰어난 명주이다.
삼해주는 조선시대 반가의 대중주였으나, 그 어떤 문헌이나 기록에서도 그 유래나 발생 배경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민간의 벽사풍속의 일환으로 장(醬) 담그는 길일로 말날(午日)과 술 빚는 날로 해일(亥日)을 선호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장은 색깔이 진해야 맛이 좋고 술은 그 빛깔이 맑고 밝아야 맛과 향이 좋으므로, 지간의 12지신(十二支神) 가운데 말의 피가 가장 진하다는 사실에서 말날(午日)을 장 담그는 날로, 돼지의 피가 가장 붉으면서도 밝은 색깔을 띠므로 돼지 날(亥日)을 술 빚는 날로 잡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삼해주는 여느 전통주와는 다르게 ‘분곡(粉麴)’ 또는 ‘백곡(白麴)’이라고 하여 밀기울을 제거한 흰 밀가루만을 이용한 삼해주 전용의 특수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는 만큼, 밀기울이 섞인 맥곡(麥麴)으로 빚은 술보다 맑고 밝은 색을 자랑한다. 또한 삼해주는 세 번 빚는 삼양주(三讓酒)인만큼 두 번 빚는 이양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쌀 양에 비해 누룩의 양이 적게 들어가므로 누룩에서 오는 누르스름한 빛깔이 엷어져 상대적으로 밝고 맑은색을 띠게 된다는 점에서 일반 전통주와는 차별화된다고 할 수 있다.
“춘주는 삼해에 빚으니 사흘밤 취해도 몸은 우뚝 구천에 닿았네”
삼해주라는 술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서거정(徐居正)의 작품으로, 조선조 초기(1420~1488년)에 간행된 [태평한화골지전]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고려시대 때부터 널리 성행했던 술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전통주 전성기의 대표적인 명주들을 춘주(春酒)라고 하여 호산춘, 약산춘, 여산춘, 경액춘, 동정춘, 광릉춘 등이 그 주품을 자랑하였는데, 삼해주는 맛과 향이 좋아 춘주류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 초기 문인이었던 이행(李荇, 1478~1534)의 [용재선생집]에 “관등(觀燈)”이란 제하의 시에는 삼해주가 언급된다.
“다시 오기로 미리 약속하니, 산을 내려갈 때가 지레 걱정이네. 하늘과 땅 사이에 낀 쓸모없는 이 몸, 산수에 오로지 흉금을 부쳤네. 춘주는 삼해에 빚었으니, 남은 꽃은 틀림없이 북쪽 가지일 것이네. 취중에 참으로 마음이 너그러워, 거친 말도 추리지 않고 그냥 두네. 천성이 게을러 아침저녁도 없이, 열흘도 넘게 서당에 드러누웠네. 벼슬길에 이제는 마음을 점점 여니, 산행의 흥은 늙어서도 오히려 새롭네. 글은 남이 비웃는 것 상관하지 않고, 잔과 동이를 날마다 앞에 벌여놓네. 높이 시 읊고 다시 크게 술 마시니, 나를 한가한 사람이라 이르지 말게나. 사흘 밤을 편안히 술 마시니, 우뚝 구천에 닿은 몸이네. 등불 빛은 별빛과 서로 엇갈리고, 시내와 산은 저잣거리와 몹시 가깝네. 꽃은 늙은이 머리 털 부끄러워하고, 달은 취해서 돌아가는 사람 비추네. 좋은 시구 지어도 때때로 숨기니, 시명이 날로 새로워진지 오래 되었네”
삼해주는 고려시대부터 빚어져 여러 가지 방법이 전해오는데, 조선조 중엽 이후에는 소주의 술덧으로 쓰이는 예가 많아지면서 이후 소주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삼해주처럼 세 번에 걸쳐 빚어지는 삼양주는 예로부터 사대부나 부유층이 아니면 빚어 마시기 힘들었다. 술맛이나 향취 등이 빼어나긴 하지만, 일반 가정에서 취흥을 돋우기 위해 마시는 술로는 삼해주에 사용되는 쌀의 소비가 많았기 때문이다.
삼해주는 본래 세시주 또는 계절주의 성격을 띤다. 술을 빚는 시기가 가장 추운 때인 한겨울로, 여느 술과는 다르게 술을 빚는 기간과 술을 익히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관계로, 백일주(百日酒)라고도 부를 만큼, 그 과정이 길고 까다로워 자칫 실패하기 쉽다. 따라서 삼해주의 발효방법은 저온에서 발효시키는 방법을 취하게 되는데, 완성된 술은 빛깔이 맑고 깨끗하며, 높은 알코올 함량을 자랑한다.
삼해주를 증류하여 소주를 만들면 그 양이 30%에 그쳐 고급 소주가 나온다
삼해주는 술 이름에서 보듯 ‘한겨울에 빚어 버들가지가 피어날 때쯤인 봄이면 술이 익는다’ 해서 ‘유서주(柳絮酒)’라는 낭만적인 술 이름을 얻었다. 그 제조방법에서 여러 가지 방문을 엿볼 수 있는데, 밑술과 덧술을 12일 간격으로 빚고, 덧술이 익어 2차 덧술을 해 넣을 때는 36일 간격으로 술을 빚어 땅 속에 묻고 40일 간 발효 숙성시키는 방문, 그리고 밑술과 덧술을 36일 간격으로 해 넣은 후, 마지막 덧술을 12일만에 해 넣는 방문 등 기록이나 가문마다 고유의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이러한 삼해주를 증류하여 소주를 만들게 되면, 그 양이 30%에 그쳐서 정말 고급 소주가 된다.
삼해주는 서울 등 중부지방의 사대부와 부유층에서 주로 빚어 마셨던 춘주(春酒), 곧 고급약주로, 현재 서울지방에만 세 가지 삼해주가 있으며, 이들 삼해주는 원료의 처리방법 등 각각 다른 방법으로 술을 빚고 있다. 삼해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50년경 전순의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산가요록]을 시작으로 1600년대의 [주방문], 1670년대의 [규곤시의방/음식디미방]에 4종류가, 그리고 이후의 [산림경제]에 ‘삼해주법’이, [임원십육지]에 ‘삼해주방’이, [고려대 규곤요람]을 비롯 [시의전서], [증보산림경제], [고사십이집], [양주방], [요록], [음식보], [역주방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각기 다른 방법의 삼해주가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어, 가정 형편에 따라 약식(略式)으로, 또는 재료의 가감과 처리 방법에 변화를 주는 등 술 빚는 방법의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예로, [규곤시의방]에는 “정월 첫 해일에 찹쌀 석되를 백번 씻어 가루를 만들어 죽을 쑤어 식힌 후 누룩 한 되를 섞어두었다가 두 번째 해일에 흰쌀 서말을 백 번 씻어 가루로 만들어 물송편을 만들고, 이것을 차게 식혀 먼저 만든 밑술에 섞어 넣고, 세 번째 해일에도 다시 한 번 덧술하여 빚는다.”고 하였으며, [산림경제]에서도 “정월 첫 해일에 찹쌀 한 말을 백 번 씻어 가루로 만들어 묽은 죽을 쑤어 식힌 데에다 누룩가루와 밀가루 각 한 되를 섞어서 독에 넣고, 다음 해일에 찹쌀과 멥쌀 각 한 말을 백 번 씻어 가루로 만들고 이것으로 술떡을 푹 끓여서 술밑에 섞고, 또 세 번째 해일에 백미 다섯 말을 백 번 씻어 떡으로 쪄서 식힌 것을 끓인 물 세 양푼에 풀어서 다시 덧술하여 3개월 동안 익혀낸다.”고 하였다.
한편,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 약주 삼해주 방문(方文)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음력 정월 첫 해일 하루 전날 멥쌀 1되(大升)를 깨끗이 씻은 뒤, 한나절(10시간)가량 물에 담갔다 건져서 고운 가루로 빻아 둔다. 다음 날(亥日) 해시(亥時)가 되면 준비해 두었던 쌀가루와 팔팔 끓인 물(4~5대접)로 익반죽하고, 여기에 누룩을 고운 가루로 만들어 1되를 섞고, 술독에다 메주를 뭉치듯 하여 안친다. 술독은 깨끗한 베보자기나 한지로 두세 겹을 씌우고 뚜껑을 덮어 밖이나 서늘한 곳에 보관한다.
덧술은 음력 2월 해일 하루 전날 그 재료를 준비하였다가, 다음 날 해시에 멥쌀 1말(大斗)을 밑술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하여 가루로 빻고, 여기에 밀가루 2되(大升)를 섞어 끓는 물로 익반죽을 하는데, 반죽 덩어리를 양을 같게 하여 두 개로 나눈다. 끓는 물에 반죽덩어리를 넣어 한 개는 익히고, 다른 한 개는 설익은 상태로 꺼내서 전량 송편 크기로 잘게 끊거나, 수제비를 만들 때와 같이 잘게 떼어서 발효가 끝난 밑술과 고루 섞어 새 술독에 안친다. 덧술을 안친 술독은 밑술에서와 같이 밀봉하여 보관하는데, 따뜻한 기가 남지 않도록 차게 식힌 뒤, 깨끗이 씻어 물기가 없는 술독에 안치고 서늘한 장소에 내놓아, 3월 첫 해일까지 밀봉해 놓는다.
2차 덧술은 3월 첫 해일 하루 전날 멥쌀 3말을 깨끗이 씻어 물에 12시간 담갔다가 건져서 고두밥을 지어 차게 식히고, 물도 35대접 정도를 팔팔 끓여 차게 식혀 둔다. 다음 날 해시가 되면, 발효가 끝난 덧술과 고두밥과 물을 잘 풀어서 섞고, 미리 준비해 둔 술독에 한 켜씩 켜켜로 안친 다음, 서늘한 곳에서 20여일 발효시키면 삼해주(약주)가 완성된다.
양곡 낭비 방지를 위해 삼해주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 빗발쳐
삼해주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방보다 서울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귀하게 여겼던 쌀을 3차까지 덧술을 하여 만든, 값이 비싼 고급주여서 권력과 상권의 중심지였던 서울의 사대부와 반가에서 애음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후에는 일반인들에게까지 애음되었는데, 그 폐해가 막심하였던지 ‘삼해주로 인한 양곡의 소비가 심하니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上訴)가 빗발쳤다고 한다.
실례로 영조 5년인 1781년 박일원이 편찬한 [추관지]에 형조판서 김동필(金東弼:1678~1737)이 올린 상소문에 “세수(歲首)에 매주가(賣酒家)에서 삼해주를 많이 만들어 내니 서울에 들어오는 미곡이 죄다 이리로 쓸려 들어가니 미곡 정책상 이를 금함이 옳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서울에서 일반인들의 삼해주 수요가 어떠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정월에 빚어야 하는 계절적인 제한으로 삼해주의 공급이 한정되자, 서울 근교의 마포 ‘옹막이’를 삼해주의 대량 제조공장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겨울에는 옹기를 굽지 않는 까닭에 옹기 굽는 가마를 이용하면 대량의 삼해주를 빚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동국세시기] [3월령(三月令)]에, “燒酒則孔甕幕之間三亥酒甕釀千百最有名稱……”라고 하여, 지금의 마포구 공덕동 소재 옹기 굽는 옹막에서 삼해주를 소주로 고아 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조 헌종 7년의 [일성록(日省錄)]을 보면, “정월에만 담그던 삼해주가 아무 해일에나 담그던 술이 되었고, 또 이것을 청주보다 소주의 원료로 쓰게 되고, 그리하여 전년에 가을, 겨울부터 담는 소주의 밑술까지도 삼해주라 일컫는 풍이 생겨서, 근래에는 삼해주 하면 도리어 소주의 밑술 이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당시 삼해주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삼해주 빚는 과정
[규곤시의방] 방문을 바탕으로 빚는 삼해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