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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청바지 통기타 양희은(3) |
결혼과 함께 사라진 양희은은 남편 따라 미국에 살다 1994년 다시 한국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외국 사는 가수들이 돈이 궁하면 “한국 가서 노래나 부르고 올까” 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늙어서는 한국서 살고 싶다는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와보니 다시 노래를 시작한 것일 뿐이다. 김민기를 비롯해 방의경, 서유석, 신중현, 이주원, 김광희, 김정호, 하덕규 등 많은 작곡가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노래를 부른 양희은, 그녀는 지금까지 21장의 앨범을 냈다. 찬송가까지 포함하면 28장, 약 400곡의 노래를 한 셈인데 그 중 마음에 드는 노래로 김민기 작곡의 ‘백구’ ‘금관의 예수’ ‘늙은 군인의 노래’ 김의철 작곡의 ‘나 떠난 후에라도’를 꼽았다. 데뷰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아침이슬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곡은 ‘앞으로 부를 곡’이라고 하는 그녀는 과거의 히트곡 보다 앞으로 부를 노래에 강한 집념을 보인다. 어쩌면 아침이슬을 능가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10,000번 이상 불렀다는 아침이슬에 대해서는 양희은도 김민기도 부정적이다. 김민기는 연습을 하다 노래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악보를 찢어버렸고 양희은은 양희은대로 “노래 한 곡으로 그 가수의 성격이 규정된다면 그걸 좋아할 가수가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며 아침이슬에 회의적 반응을 보인다. 아침이슬이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가 되고 가요사에 남을 명곡이 된 것은 금지곡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건전가요로 선정 되 잠시 부르다 기억에서 사라질 노래였는데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고 특히 그 당시에는 더욱 그렇다. 짧은 머리 좋아하던 나도 장발단속 시작한 후 한 때 장발을 하고 다녔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금지곡으로 묶인 노래에 더 관심이 간다. ‘아침이슬’도 그런 경우다. 더욱이 70년대 중반까지는 민중가요라는 것이 없었다. 구전되어 오던 노래들, ‘해방가’ ‘정의가’ 바람이 분다’ 등등, 그리고 외국 반전가요들이나 교회 복음성가 ‘우리는 승리하리라’ ‘오 자유’ ‘흔들리지 않게’ 등이 시위현장에서 불리었고 자생적 민중가요는 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금지곡으로 묶인 김민기 작곡 ‘친구’ ‘아침이슬’이 운동권 학생들의 고난과 결단으로 재해석 된 것이 그때이다. 김민기가 동일방직 사건을 토대로 작곡한 ‘공장의 불빛’은 민중가요의 시금석이 될만한 좋은 곡이다. 유신 전에는 아무나 시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여자친구에게 바람 맞고 기분도 껄적지근한데 때맞춰 교련반대 시위를 한다.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시위대에 합세해 경찰을 향해 짱돌 몇 개 던지고 나면 팔도 아프고 최루가스에 눈도 따끔거리고 목도 컬컬해진다. 친구들과 막걸리집에 가서 컬컬한 목을 추기고 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기분전환도 된다. 그러나 유신 후에 상황이 달라졌다. 시위에 참여하려면 신세 조질 각오를 해야 했다. 빵에 가서 몇 년 썩다 나와 평생 검정장부에 이름이 오른 채 살아야 할 각오 해야 시위에 참여했다. 그나마 시국에 관련된 서클들은 해체 되고 지도부는 와해 되 시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학생운동은 지하에 잠적한 채 스산한 정적이 흘렀다. 서클룸에 모여 복사된 포이에르 바하의 테제를 학습하다 잔디밭에 나와 앉는다. 처연한 생각에 애궂은 담배만 축내다 누군가 침울한 음성으로 금지곡을 선창한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맻힌’ 어느새 정보과 형사가 다가 온다. “얌마 시끄러, 조용하자. “노래도 맘대로 못 불러요?” “니들 심정 잘 안다. 그런데 니들이나 나나 시끄러워 좋을 게 뭐 있나? ‘긴 밤 지새우고’ 긴 밤이란 언제 끝날지 모를 독재였다. 암울하다 못해 캄캄한 시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환갑 때까지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독재자들은 대개 장수하는 경향이 있으니 20대 중반 새파란 나이에 환갑 때까지 운운하며 절망 하는 것이 전혀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연예인 끼고 양주 마시다 독재자는 죽었지만 환갑을 내일 모레 앞둔 지금의 한국 상황이 20대 중반 보다 별반 나아진 것이 없고 그나마 조금 나아지려다 다시 그 시절로 회귀하고 있으니 그 때의 그 불길한 예감이 맞아 들어가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우여곡절을 겪는다. 순탄하게 아무런 풍파 겪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 풍파를 겪으며 살아간다. 양희은도 그랬다. 10대에는 부모의 이혼과 경제적 곤란을 겪었고 30대 초반에는 암으로 투병생활을 했다. 결혼 후 97년, 남편이 ‘다발성 급성 류머티즘 관절염’이란 희귀병으로 고생을 했다. 수저 하나 들 수 없이 온몸에 힘이 빠지고 혼절할 정도로 통증이 심한 병,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수소문하다 미국에 있는 통증의학의 대가 김문호 박사와 연락이 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손가락 한 개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던 사람을 완치해 놓고 김문호 박사는 치료비 한 푼 안 받았다 한다.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은혜에 양희은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따뜻한 밥과 된장찌개 대접하는 일뿐 이었다 한다. 그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다. 30년을 노래 부른 고참가수지만 그녀는 소규모 라이브 무대를 선호한다. 그 정도 이력이 붙었으면 고액의 출연료 받는 대형무대에 서고 싶은 욕심도 생기련만. 거기에 대해 그녀는 “돈 대신 가수로서 긴 생명력을 택했다.”고 말한다. “돈이 벌리는 순간 가수로서 생명은 끝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20대 초반 명동에서 몇 번 부딪친 인연으로 지금도 그녀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 하덕규 작곡의 ‘한계령’ 고종환 작곡 박세영 작사의 ‘임진강’ 김민기 작곡 ‘상록수’ 등이 기억에 남는 노래다. 돈 대신 긴 생명력을 택한 가수답게 양희은은 ‘죽을 때까지 노래할 것”이라 한다. 상록수처럼 긴 생명력을 가진 가수 양희은의 노래를 나 역시 죽을 때까지 즐겨 들을 것이다. (오충근 기자) |
신문발행일:2009-09-24/최종수정일:2009-09-27 07:2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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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관절병 앓고있으면 약간 무게 나가는 수저 조차 들기 힘듭니다
모친이 그러하거든요~
기적같은 병고침 계속되길 희망합니다
김박사님 대단하신분이시네요!!
박사님도 대단하시고 아피톡신도 대단한 약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