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5:2~8>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서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성중에서 행순 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사람이 자기 안식에 머무르게 되면 거기서 나오기를 원치 아니하고, 그 안식에 영원히 거하고 싶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 안식에 있는 것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안식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동산에서 많은 과일을 거두고 포도송이를 거두고 꿀을 거두고 젖을 거두었다. 자기 친구들에게 먹일 수 있도록 풍요한 동산이 되는데, 이 동산은 이제 그냥 간직하고 있으면 가치가 없어지고, 이 동산이 많이 공개되어서 많은 사람에게 이용될수록 가치가 있는 것이다. 먹을 것이 아무리 많더라도 먹을 것이 만일 곡간에 계속 쟁여져 있으면 오래되면 썩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자꾸 나눠 먹으면 요셉의 곡간처럼 그것이 나라를 부강케 하는 것이 된다. 양식은 쟁여놓는 것이 아니라 양식은 나누어 먹는 것이다. 너희는 물위에다가 밥을 던지라는 말이 있다. 밥을 던지면 고기들이 와서 먹는다. 우리가 양식을 뿌리지 않으면 양식이 썩어버리고 만다. 만나를 갖다가 저장해 갖다 놓으면 싶었다. 그런데 갖다놓으니까 썩어버리더라는 것이다. 저장해 놓을 수가 없고 이것은 영원히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모두가 다 나누어야 할 그런 은총이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전부 누구엔가 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로 말미암아 온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고여 있으며 언제든지 썩고 흘러나가면 언제든지 살게 되는 것이다. 솟아오르는 샘은 영원히 변질되지 않지만 저장되어 있는 물은 변질되기 마련이다. 흘러 들어온 물은 또 흘러나가야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더 깊은 안식으로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거친 들판을 보면 이것을 어떻게 할까, 내가 거기에 나가서 상처를 받지 않을까하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가서 내가 상처를 받는 동안 또 다시 깊은 안식에 들어간다. 결국 안식은 희생을 통해서 더 안식으로 더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 기 보호적인 안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자기를 희생해서 와 주는 그런 기쁨이고 그런 안식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냥 문을 잠그고 앉아 있으면 얼마 가지 않아서 또 침체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 전과는 다르게 내가 안식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냥 자기에게 도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들려오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그런 마음이 되어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를 들을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되어있다는 말이다. 어디를 향해서 내 귀가 지금 열려져 있어서 어디에 늘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주님의 사랑가운데 있는 동안에 나는 세상으로부터는 내 교신이 끊어지고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늘 들려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나에게 오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일이 어디 있는가를 내가 살피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는 마음이 되게 될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하고는 다르게 소리라고 말했다. 목소리라는 말은 밖에서 들려온다는 말이고, 소리라는 말은 자기 안에서 들린다는 말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린다. 잘지라도 깨었는데 자기가 자고 있는데 깨어있고 또 자기가 가만히 있는 데도 바깥에서 소리가 오지 않는데도 자기 속에서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자지만 깨어있고 소리가 없지만 소리가 들린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의식이 생긴다는 말이다. 의식의 소리다. 누가 꼭 불러서만 내가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부르는 소리를 의식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의 뜻을 분별해간다는 말이다.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뜻을 내가 알아가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의식이 생긴다. 어린아이들은 하라는 것만 하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면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의식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꼭 누가 하라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무엇이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의식이 생긴 것이다.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온갖 말을 다 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이 사람에게 완전히 주면 이 사람은 주님 자신의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에 주님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다. 자기와 동질적인 한 생명으로 간주되고 그렇게 부름을 받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인정할 때에 자기와 동질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나와 자기를 동질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나하고 동질은 아니지만 나와 동질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서게 된다. 비록 분량은 적을지라도 비록 모양은 적을지라도 질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사과 한 상자나 하나라도 사과는 사과다. 그것이 크든지 적든지 역시 생명은 같은 것이다. 멸치 새끼 한 마리나 고래 한 마리나 결국 생명체로서의 가지고 있어야 할 모든 요건은 동일하게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래는 더 크고 멸치는 더 적다는 것뿐이지 적더라도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들었다. 고래 새끼와 고래 어미 사이에도 크고 적은 차이는 있지만 생명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왜 머리에 이슬이 있고, 왜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있겠는가? 밤에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밤에는 이슬이 내리고 있기 때문에 밤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머리에 이슬이 촉촉이 젓는 것이다. 분명히 주님은 밤에 무슨 일이 있어서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밤을 헤치기 위해서 밤을 사수하기 위해서 밤을 지키기 위해서 성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밤이 오면 문을 닫고 잠을 잘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밤이 오면 우리가 안전하도록 밖에서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머리에 이슬이 맺힐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기에게 의식이 된다는 말이다. 나의 안정과 나의 평안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알아진다는 것이다. 나의 구속은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나에게 입혀지는 모든 은총은 그가 나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것으로 의식이 된다. 내가 공연히 내 스스로 기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때문에 내게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유로 말미암아서 내가 이렇게 되어있다는 것을 의식한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일선에서 군인들이 잠을 자지 않고 이슬을 맞고 있기 때문에 눈을 맞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국민으로서의 의식이 점점 자라난다면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잘 나서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편안히 잠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자가 되면 공연히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경제정책을 쓰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으로 알아야 된다. 그런데 요즘 가만히 보니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하다거나 만족하다는 것이 세상에는 전혀 없다. 항상 불만스럽다는 것이다. 자기 때문에만 잘됐다고 생각하고 항상 남 때문에 자기가 잘됐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전혀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국가경제가 발전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부자가 되겠는가? 국가 경제가 발전했다는 징조가 피부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사업도 안 하는 사람이고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국가는 지금 경제적으로 큰 부흥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느끼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무슨 사업을 한 일도 없고 내가 노력한 일도 없는데 어째서 전체적인 공기가 옛날보다 부유해졌는가? 그것은 많은 사람이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분명히 내가 이렇게 따뜻한데서 잠을 잘 수 있는가? 그것은 밖에서 파수하는 사람이 있어서임을 의식했다 말이다. 그때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가 자기에게 어떻게 효과가 나는가를 기억하게 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예수의 십자가는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일 같았다.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것이 상관없는 일이 아니고 이런 모든 것은 희생을 통해서 자기에게 평강으로 보상되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막지 않으면 우리가 안전을 누릴 수가 없다. 주님께서 희생하신 것이 없으면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그가 구속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그가 찔림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받은 것이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유함을 얻게 됐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것을 막았다. 하나님 앞에 우리를 막았고 사탄 앞에 우리를 막아서 우리가 비로소 자유롭게 자라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이제 자기가 생각이 난다는 말이다.
<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5: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라고 했는데, 내가 이제 옷을 벗고 잠을 자려고 누웠으니까 다시 옷을 입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또 내가 발을 씻고 잤으니까 다시 내가 발에 먼지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나는 내 안식에 머무르고 싶고 내 평안에 머무르고 싶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라고 했는데. 이것은 내 마음 속에 그 들이미는 손을 보니까 내 속이 동하더라는 뜻이다. 손을 들이미니까 견딜 수가 없고 그냥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손을 보니까 무엇이 기억나는 모양이다. 그 손을 보니까 자기를 이끌어가던 손이고, 그 손을 보니까 자기 때문에 고생하던 손인 것이 발견되기 때문에 자기 마음 속이 동하게 된 것이다. 속 생명이 움직여서 이제는 그냥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옷을 벗고 편안히 잠자리에 누웠을 때 누가 와서 깨우면 아주 일어나기 싫다. 내가 발을 다 씻고 있는데 또 맨발을 벗고 나오라고 하면 싫다. 그렇지만 그 손을 보니까 내 속이 동하더라는 것이다. 내 속이 움직여서 내가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주님의 못자국난 손이 발견되었다는 말이다. 고생하는 손이 발견되었다는 말이다. 자기를 위한 희생이 이제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사람이 성장하면 부모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알게 된다. 어렸을 때는 전혀 모른다. 자기가 부모가 되어보면 그때 부모가 어떻게 고생했는가를 알게 된다. 이것은 성장한 사람의 성숙한 사람의 생각이다. 자기 때문에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내가 잘 됐다고 아는 것은 성숙한 생각이다. 청소년들이 모두 부모에게 반항을 한다. 왜냐하면 자기 때문에는 잘되지만 부모 때문에는 잘못됐다고 생각하니까 항상 반항을 한다. 그렇지만 자기가 부모가 된 후에는 자기가 자식들보고 오히려 또 그렇게 말하게 된다. 자기는 자기가 비로소 체험을 하고 난 후에야 내 부모가 고생을 했음을 알게 되지 어려서는 잘 모른다.
<5: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문을 열려고 하니까 몰약의 진이 내 손에서 상처가 나오더라 하는 말이니까 몰약과 몰약의 즙은 나무를 쪼개 가지고 산 나무를 찢어서 나오는 그 진이 흘러내리는 것이니까 고통을 의미하고 고난을 의미하고 희생을 의미한다. 문을 열 때 희생이 내 손에서 듣는 것 같더라. 내가 희생 없이는 그 문을 열지 못하겠더라는 말이다. 내가 주님을 다시 들어오게 하려면 주님에게 다시 문을 개방하려면 결국 어떻게 하면 문을 개방하는 것인가? 그 전에는 내가 문을 개방하지 않아도 그가 나를 찾아왔지만 그가 나에게 가까이 왔고 그가 문을 두드려 열었지마는 이제는 내가 그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문을 열려면 나는 그 희생이 없이는 그 문을 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 때는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주게 된다. 그리고 부모가 강권해서 해 준다. 억지로라도 하게 된다. 억지로 발을 씻겨주고 억지로 손을 씻어주고 억지로 세수를 시켜준다. 그렇지만 큰 다음에도 역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가 더 높은 차원으로 가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자기가 체험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가 체험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문을 열려면 희생을 하지 않고서는 문을 열지 못하겠구나. 이제 내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는 못하겠구나. 내가 희생을 통해서만 그가 알아지는구나. 가만히 있으니 전혀 모르겠다 말이다. 더 이상 주님을 모르는 것이니까 자기는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주님을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주님은 이것뿐인 것으로 생각하면 허망해진다. 그러나 내가 희생과 희생을 더 거듭하면 나는 주님의 희생가운데서 주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께 가는 그 모든 생활이 우리 안에서도 동일하게 경험될 때 그것은 멀리서 바라봐서는 경험이 안 되고 내가 그 속에서 들어가지 않으면 경험이 안 된다는 것이다.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에서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묻는구나.” 이건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는 높은 차원으로 주님을 다시 알게 될 것이고, 주님의 이끄심이 다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더 높은 차원의 안식이라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냥 평안하다 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은 깊은 고요와 깊은 승리를 가져오는 깊은 안식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기쁘고 충만한 것도 있지만 기쁘고 충만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영원한 승리가 항상 자리를 잡고 있다. 흔들릴 수 없는 그것이 있다. 이때는 내가 괴로워도 괴로운 일을 감당한다. 쓰지만 쓴 일을 내가 감당한다. 내가 항상 단 것만 먹을 수가 없고, 쓴 것도 먹어야 되고 독한 것도 먹어야 된다. 어려운 것도 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발전이 없다. 주님께로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문을 두드리고 문빗장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5: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문을 아주 천신만고 끝에 자기가 망설이고 또 망설이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은 자기가 희생의 발걸음을 디디게 되었다. 나를 위해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결국 주님께 던져야 되겠구나. 그를 위해서 나를 바쳐야 되겠구나. 그렇게 자기 자신을 던지고 온갖 힘을 다 써서 자기 생명을 내 놓고 출발했는데, 문을 딱 열고 보니까 나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가고 없더라는 것이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이것은 분명히 자기의식이다. 바깥에서 누가 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의식 속에 주님이 지금 다가오고 있는데, 어떤 주님으로 다가 오는가? 고난의 주님으로 이렇게 다가오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는 주님으로 발견되게 되었다. 문을 열자 마자 밖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없더라는 것이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 내 혼이 나갔구나. 그의 말씀이 나의 혼을 빼갔구나. 그가 나의 혼을 빼갔구나. 그가 말할 때 내 혼이 나갔구나. 그 자신의 어떤 것이 나의 의식이 되어서 내가 문을 열었지만 그는 이미 없다. 그 자신이 나의 혼이 됐다. 주님 자신이 나의 의식이 됐다. 그가 말할 때 내 혼이 나갔다는 말은 내 혼이 뺏겼다는 말이다. 내가 자나 깨나 정신이 어디 있는가 하면 주님에게만 정신이 있다는 말이다. 주의 일에만 내가 정신이 빠져서 내 혼이 그에게 뺏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혼이,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 가는 데 얼마나 방해거리였는가를 기억할 것이다. 생각은 얼마나 복잡하고 생각은 얼마나 주님께 가는데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었고, 그것은 얼마나 세상을 떠날 수도 없게끔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이 혼은 주님께 가기에 방해되는 혼이 아니고, 주님에게 몰두해있는 혼이라는 말이다. 자나 깨나 그 혼은 다른 생각이 없고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을까? 그것밖에는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이 혼은 완전히 구원을 받은 혼이다. 주님께 돌아간 혼이다. 주님에게로 뺏겨진 혼이다. 우리가 그 전에 바랄 때 항상 내 혼이 내 생각이 어떻게 하면 완전히 주님께 뺏길까? 그것이 소원이었다. 왜냐하면 항상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싶다고는 하지만 내 혼은 내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내 혼이 주님의 것이라고 하면 내 생각이 주님의 것이라고 하면 내 감정과 내 의지와 내 생각이 모두 주님에게로 가서 그에게 완전히 조정될 수 있다면 나는 참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마음으로는 원하는데 내 혼은 내 의지와 감정과 내 지성은 전부 다 나대로 독립해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자랑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의미이고, 그것이 살아있는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의 혼이 혹시라도 어디 뺏길까봐 자기의 정신이 혹시라도 어디 뺏길까봐 걱정을 하고 있다.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 무수하고 지저분한 쓰레기통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누가 가져갈까봐 발버둥치고 있지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반대로 이 혼이 문제거리로 안다. 이것이 복종되기만 한다면 내 전체가 복종될 것이다. 결국 사람은 혼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산 혼이 되었다. 혼은 곧 사람을 말한다. 사람의 기능은 무엇인가? 지, 정, 의다. 기능이다. 그 기능이 어딘가 꼭 쓰여질 곳에 쓰여지면 만족하시는데, 쓰여지지 않을 곳에 쓰여진다. 생각이 사람에게 없으면 되겠는가? 생각이 없으면 기계같이 된다. 그런데 이 생각이 쓰여질 곳을 생각을 하지 않고, 쓰여지지 않을 곳을 생각하니까 이 생각이 괴롭다. 내 의지가 행사되어야 할 곳에 행사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 않을 곳에 행사된다. 내 감정이 나타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나타나지 않을 때 나타나니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대로 된다는 말이 전부 혼에 관한 문제이다. 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 안에서 자기 내적인 분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를 철저히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게도 자기 안에서 자기의 분열만 더 조장할 뿐이다. 자기 속 생명과 자기 자신이 서로 다르고, 자기의 기능과 소원이 서로 달라서 그 혼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든 것은 혼이 만신창이가 된 현상이다.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쓰레기 더미에서 나온 것 같은 것이 나오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두 혼합된 것이고, 한 가지가 없는 것이니까 그것이 더러울 수밖에 없고 추한 것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랑도 추하고 겸손도 추하고 모든 것이 다 추하다. 어떤 사람이 지극히 겸손한 것을 보아도 아주 추하다. 지극히 깨끗한 것을 보이려고 애쓰는데 그때 보면 더 추하다. 사람이 자기의 것을 가지고 자기가 그것을 바르게 만들려고 하면 그처럼 혼란스럽고 그처럼 추한 것이 없다. 그냥 되는대로 살아버리는 사람은 차라리 순수성이라도 있다. 악마는 악마대로 완전한 악마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런데 이놈을 다듬고 다듬어서 아주 좋게 내보이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쓰는 것만큼 추하게 보인다. 더럽게 보이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사람들의 모든 의지와 사람들의 모든 감정은 모두 오염되어서 더러운 것으로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의 구원은 마지막에 혼에 있다. 우리의 혼이 완전히 구원되면 생각으로부터 벗어난다. ‘우리’라고 하는, ‘나’, ‘내 것’이라는 것에서 벗어난다. 왜냐하면 이 혼이 자기 자신이니까 ‘나’라는 의식에서 벗어난다. 나라는 의식에서 벗어난 것이 완전한 자유이고, 거기서 벗어난 것이 해탈이고, 거기서 벗어난 것이 도를 통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매여 있으니까 거기서 벗어나려고 9년 동안을 벽을 들여다보고 앉아서 자기를 벗어나려고 애쓴 것이다. 자기를 벗어나지 않으면 자유를 얻을 수가 없다. 그런데 불교는 자기를 잊어버리고 혼을 없애버렸다. 혼이 없는 인간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혼이 없으면 사람이 안 된다. 돌부처가 될 수 있지만 사람은 안 된다. 이 혼이 구원을 받아야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놓았지 불필요한 것을 만들어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생각을 저주하고 원망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 만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쓰여지기를 잘못 쓰여지고 있다. 주인을 잘못 만났기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고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혼도 나의 주인으로 말미암아서 고생한다. 내 생명으로 말미암아서 내 기능은 완전하게 만들어 놓은 한 기능은 고생을 당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혼이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했겠느냐는 것이다. 나의 혼은 얼마나 나로부터 저주와 학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했겠는가! 밤에 말할 때 내 혼이 나갔다. 내 혼이 그에게 뺏겨져 있다, 내 생각이 그에게 뺏겨져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미친 것도 혼 때문에 미친 것이고, 정신이 추한 것도 혼 때문이다. 혼이 건전한 사람은 귀신에게 홀려가지 않는다. 혼이 건전치 못하면 귀신에게 홀려간다.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들리기 이전에 혼이 먼저 건전치를 못하다. 무수한 망상에 빠져 있다든지 자기도취에 빠져 있다든지 어떤 큰 충격을 받아 가지고 낙심하고 있다. 혼의 상처를 받았을 때 사탄이 귀신이 그 혼을 지배해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 된다. 이 혼이 건전치 못하면 아무 것도 되지 못한다. 혼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나님 자신만 생각한다면 하나님 자신에게로만 열려있다면 이 혼은 아주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내가 만일 혼이 없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유령처럼 여러분에게 돌아다닐 수 있겠지만 내가 혼이 없다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다. 내가 혼이 없다면 여러분을 사랑할 수가 없다. 나의 혼이 없다면 나는 어떤 결단을 내릴 수가 없다. 나는 내 혼이 없다면 나의 사랑의 감정을 여러분에게 나타낼 수가 없다. 내 혼이 없다면 나는 죽은 것이다. 혼이 없다면 사람 자체가 없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산 혼이 되었다. 혼이 되었다. 그것은 한 기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혼이 되었다는 것을 인간 자체로 생각하고, 이것 이상이 없는 것으로 생가하고, 이것을 그릇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것이 바로 인간 전체로 생각한다. 이 혼은 한 기구다. 하나님의 생명을 담아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는 한 혼이다. 혼이 기구니까 이 기구는 그 안에 무엇을 담든지 담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으니. 분명히 바울은 자기 자신을 질그릇으로 여기고 있고, 주님을 보배로 여기고 있다. 분명히 이것이 둘이면서도 하나인 한 세계를 가지고 있지 원래부터 하나로, 자기 자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둘이 합해서 하나가 된 숙명으로 태어났다. 나는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기, 자기 했던 것이 결국 별것이 아니고, 그것은 어떤 때 쓰여지기 위해서 준비되어진 한 그릇에 불과하다. “그가 말 할 때 내 혼이 나갔구나.” 나는 그에게 혼을 뺏겼구나. 나는 혼 나갔다고 말한다. 혼이 나가버렸다는 것은 그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귀신에게 혼 나간 사람은 미친 사람이 된다. 바울을 보고 아그립바 왕이 참 많은 학문이 너로 하여금 미치게 하였다고 했는데, 네 혼이 나갔구나 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미친 것이 아니고, 정신이 총총한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아주 똑똑한 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때 바울의 혼은 아주 똑똑했다. 바울의 생각은 아주 정확했다. 바울의 모든 뜻은 아주 완전했다. 그러니까 내가 미친 것이 아니고, 내가 총총한 정신 차린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손과 발이 묶여진 것을 제외하고는 여기 있는 당신까지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고, 내 혼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그것은 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내 영이 구원을 받아서 내 속에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내 생명을 가져오게끔 되었다. 우리의 영이 주님의 부름을 받고서 주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속에서 주님을 열망하게 된다. 주님을 갈망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혼과 영 사이에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그 영에 비쳐진 빛이 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갈망하는 것이다. 내 혼을 원망하기도 하고 내 혼을 꾸짖기도 한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내 혼을 생각하던 것과 반대로 혼이 어찌하여 말을 안 듣는가, 이 혼이 어찌하여 뜻을 잘 따라주지 않는가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내 영에 한 소원이 생겼기 때문에 그렇다. 내 생명 속에 이미 한 빛이 비쳐서 생명의 소원이 일어났기 때문에 내 혼이 그 생명에게 마쳐지기를 소원하게 되었는데, 어느 때 가서 내 혼이 완전히 그에게 뺏겨버리면 그때 비로소 자기 혼은 큰 폭풍 속에서 회오리바람 속에서 구원을 받아서 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혼이 안정되면 그 사람 자체가 완전히 안정되게 된다. 차분해지고 그 속에 깊은 힘이 있지만 그러나 그 힘은 나타낼 때만 나타나지 항상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그 속에 깊은 기쁨이 있지만 꼭 그것은 나타날 때만 나타나지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의지는 아주 강렬하지만 그의 의지는 무섭지만 그 의지는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꼭 나타나야 될 때 나타난다. 주님을 향해서 밖에는 동하지 않는다. 봉한 샘이요 덮인 우물이다. 주님을 향해서 밖에는 자기의 혼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외에는 그 혼이 별로 움직이지 않는다. 요동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것도 관심이 없는 사람 같고, 마치 아무 것에도 정열이 없는 사람 같고, 마치 아무 일에도 그는 결단력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을 향해서만 결단력이 무섭다. 주님을 향해서만 그는 감정이 억세다. 이것이 혼의 구원이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볼 때 깊이 가라앉아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아주 잠잠해서 전혀 동요가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아주 착 가라앉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전부 붕 떠 있다. 전부 몇 미터 이상 공중에 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 사람을 만나보면 이상하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차분한가, 저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가, 저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는 어디에 있었는가? 혼에 있었다. 사건이 복잡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이 아주 복잡하고 문제가 많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일 자체가 문제가 많은 것이 아니고, 내 혼이 복잡한 것이다. 내 생각이 복잡한 것이다. 일은 조그마한데 생각 속에서 엄청나게 커서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자기가 애를 쓰고 있다. 우리가 꿈을 꿔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꿈속에서는 큰 것으로 보인다. 꿈속에서는 이것이 큰 몽둥이를 든 것처럼 생각이 든다. 그와 꼭 마찬가지다. 내 혼 속에 문제가 있어서 사람이 복잡하고 일이 복잡하고 겉으로 일이 많고 문제가 많은 것이 전부 혼이다.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는 별로 없다. 그런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도 다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이 아니다. 자기 생각이 문제를 크게 만들고 있다. 조그마한 것인데 무지무지하게 커져 있다. 이럴 때는 이 생각이 죽어버려야만 구원을 얻을 것 같다. 생각이 없어야만 살 것 같고, 생각만 아니라면 평안을 누릴 것 같다. 이 생각 때문에 평안이 결국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문제는 생각에 달려있지 크지 않다. 그 일만은 나는 도저히 감당 못할 것이다. 그런데 딴 사람도 다 감당을 한다. 일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고 생각이 그렇다. 짐승들은 생각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큰일을 당해도 당할 때뿐이다. 그것이 계속해서 있는 법이 없다. 사람은 조그만 일을 당해도 그 일이 계속 남아있다. 어디에 남아 있겠는가? 혼에 남아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에 커다란 사건이 지나간다. 그런데 남아있기는 내 속에서 몇 십 년도 남아있을 수 있고 100년도 남아있을 수 있다. 혼 속에 영원히 문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참 귀중한 것이지만 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나는 괴로운지 모른다. 차라리 짐승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가.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할 때 왜 그런가? 혼 때문이다. 자기 영안에서는 자기 속 생명 안에서는 깊은 주님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자기 겉에서는 응하여지지 않는다. 생각은 다른 곳으로 돌아가 버린다. 얼마나 이것이 괴로운 것인가. 모든 세력을 통한 강력한 힘을 요구하게 되고, 그때 우리는 세상 기독교인들도 그런 것이 많은데 기도를 하면서 자기도취에 빠지기를 원하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푹 빠져서 신적인 세계에 날아가고 싶은 생각 때문에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가만가만 기도해도 되는데, 왜 소리를 지르겠는가? 그 이유는 자기 생각이 복잡하니까 소리를 질러서 생각을 쫓아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막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혼이 조용한 사람은 혼이 안정된 사람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소리를 지르면 더 시끄럽기만 하고 오히려 조용한 것이 더 좋다. 혼의 구원이다. 그것이 사람의 구원이다. 우리가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문제는 혼에 있지 다른 곳에는 문제가 없다 혼이 문제가 없으면 다른 데는 모두 문제가 없다.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 혼이 고난을 당했구나. 주님에게 내 혼을 뺏겨버렸구나. 이제는 내가 내 혼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혼을 움직이는구나. 내 정신을 그가 빼 가지고 갔는가보다. 아무도 없는데 누가 나를 불렀는가? 자기 혼속에 지금 주님이 와 있다는 것이다. 바깥에 가보니 아무도 없다. 그런데 누가 자기를 부른 것 같았다. 그것은 곧 자기의 혼이다. 자기 생각이 그렇게 되었다. 자기 생각 속에 주님이 나타났다. 자기 생각에 주님이 고난 받는 주님으로 나타났으니까 자기 혼이 주님에게 뺏긴 것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불러도 찾아도 있을 수가 없다. 자기 혼에서 그런 음성이 들려왔는데 바깥에서 부르면 나오겠는가? 바깥에서 불러도 안 나온다.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5: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성중에서 행순 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이것은 부끄러움을 주었다는 말이다. 성중에서 행순 하는 자들은 밤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파수하는 사람들, 망대를 지키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을 만나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쳐서 상하게 하고 내 웃옷을 벗기더라. 그것은 부끄럽게 하더라는 것이다. 옷을 벗겼다는 것은 창피를 준다, 부끄럽게 했다는 것이다. 왜 부끄러움을 당했겠는가? 바깥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니까 이 사람들이 나를 부끄럽게 하더라는 것이다. 이미 자기 생각이다. 자기 속에 들어온 한 의식인데 주님 자신의 의식이 자기의식이 되어서 자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내 혼이 주님에게 뺏겼으면 내 혼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내 혼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면 나는 아무 데 가서도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다. 내 혼이 헛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내 혼이 망령된 혼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내 혼이 만일 정상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오고 주님께 내가 뺏긴바가 되었으면 이 혼이 생각한 것처럼 이렇게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누이, 나의 완전한 자여, 이렇게 자기 속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나는 지금 머리털에서 이슬이 맺혔다,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맺혔다고 하는 음성이 자기 혼속에 들어온다면, 그 혼은 바로 주님 자신의 의식이다. 그래서 그것은 자기 뜻인 동시에 곧 주님의 뜻이다. 그때는 자기가 자기 뜻을 행해야 된다. 자기가 나가야 할 길을 나가야 하고, 자기 정해진 길을 가야된다. 그러면 곧 주님께로 가는 길이다. 주님은 항상 거기 있다. 내가 항상 일하는 자리에 거기 있고, 내가 가서 꽃을 꺾는 자리에 주님이 거기 계시고, 내가 거기 가서 양을 먹이는 자리에 주님이 계시고, 항상 생각이 내 생각이 머무르는 곳에 내 생각이 나타나는 곳에 주님도 함께 나타난다. 그러니까 사람의 구원이다. 사람의 구원은 혼의 구원이다. 문제에 싸여서 나는 언제 이 문제를 다 해결할까하는 사람은 죽도록 해결해도 해결을 못한다. 왜냐하면 문제라는 것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 아닌 것을 문제로 알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내 힘만 다 없어지고 만다. 도깨비 홀린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밤에 도깨비와 씨름을 했는가? 다음 날 아침에 가니까 빗자루를 가지고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혼이 나가서 빗자루를 귀신으로 알고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것은 모두 다 그런 것이다. 빗자루 같이 생긴 그런 것인데 그놈을 붙잡고 나는 이 문제 해결 못하면 못 가겠다거나 이 문제 해결 못하면 죽어도 한발작도 못 가겠다고 앉았으면 그 사람은 거기서 자기 힘이 다 빠져버리고 만다. 적이 아닌 것을 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모두 절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모두 가능한 일들이 일어난다. 절대 안 될 일이 어째서 일어났는가? 나는 어째서 꼭 다른 사람한테 없는 문제가 있는가? 그런 것이 아니고 내게 있다면 그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다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내가 교통사고를 만났다면 교통사고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나한테만 교통사고가 일어났는가? 그렇지 않고 교통사고라는 것은 달려가다 보면 생길 수가 있는 것이다. 절대 안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병이 들었다면 어찌 나만 병이 들었는가? 그럴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살다보면 병이 들 수 있다. 이것이 절대 없는 일이 아니고 있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일이 아니다.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내 생각 속에서는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이 든다. 절대 남에게는 없는 일인데 나한테만 있는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거기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서 문제를 자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문제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크게 확대시키고 만다. 현미경으로 보면 지극히 조그마한 것이 벌레지만 아주 크게 보인다. 우리가 만일 눈에 돋보기를 쓰고 다닌다면 개미를 보고도 질겁할 것이다. 저놈이 날 뜯어먹을 것이라고 할 것이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성할 것이고,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내 혼이 정상적이면 내 생활이 정상적이고, 내 혼이 정상이 아니면 내 생활이 정상이 안 된다. 내 혼이 현미경처럼 생긴 혼이면 모든 것을 볼 때 너무 크게 보인다. 항상 무섭기만 하고 두렵기만 하다. 현미경은 멀리는 못 보는 것이므로 가까운 것밖에는 못 보니까 원시안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것이 되어서 항상 코앞에서만 싸우게 된다. 멀리 못 보니까 확대되어 버려 다른 것은 안 보이는 것이다. 일 하나가 커 보이면 다른 것은 전혀 안 보인다. 바깥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그것이 안 보인다. 그러니까 이것이 자기 세계에 깊이깊이 갇혀서 일에 뭉쳐서 일 때문에 죽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만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우리 스스로 확대시켜 버리면 혼 안에서 확대시키는 것이다. 일 자체는 항상 똑 같다. 옛날 사람도 그런 일이 있고 지금 사람도 그런 일이 있고, 흑인에게도 그런 일이 있고 백인에게도 그런 일이 있고, 유식한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고 무식한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생각은 다르다. 흑인에게 다르고 백인에게 다르고, 유식한 사람에게 다르고 무식한 사람에게 다르고, 일은 똑같지만 생각은 전부 다르다. 문제는 결국 내 혼에 있다. 문제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문제가 아니고 혼이다. 생각이지 결코 문제 자체가 크지 않다. 문제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주 지극히 적은 것이다. 내 생명에 비한다면 내 생명보다 큰 문제는 하나도 없다.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하나도 없다. 아무 것도 더 큰 것도 없고 더 중요한 것도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생명보다 어떤 것을 더 크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돈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다. 사실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생명보다 귀하지 않는 것이지만 돈을 확대경으로 봐 버렸기 때문에 자기 생명보다 더 크게 봐버렸기 때문에 돈 때문에 죽어버린다. 연애를 하다가 자살을 하는데, 자기를 위해서 연애를 해놓고 왜 연애하다가 자살을 하겠는가? 그 사건만을 확대해서 봐버리면 자기는 없고 그 사건만 남아버리니까 자살해버린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볼 때 무지하게 크게 보인다.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내가 저걸 어떻게 이길까 한다. 세상은 그냥 세상이지 아무 것도 아닌데 내 눈에 비치기는 크게 비친다. 왜냐하면 혼이 세상을 볼 때 두려운 혼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크게 비쳐서 세상이 두려워 꼼짝을 못한다. 천로역경을 보면, 천성문을 향해 가는데 맨 마지막에 가서 보니까 문이 하나있다. 그 문 앞에 사자 두 마리가 서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는 통과할 수 없을 것 같다. 멀리서보니까 사자가 으르렁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안에서는 자꾸 오라고 한다. 저기를 가면 사자한테 죽을 것인데 내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문빗장을 열 것인가 말 건인가 하고 망설이게 된다. 내가 옷을 입을 것인가 안 입을 것인가, 다시 입으면 될 일이고 다시 벗으면 될 일인데 한 번 벗고 나서는 다시 옷 안 입을 줄 알고 입을까 말까를 한다. 또 입고 나갔을지라도 벗어놓으면 될 것이고, 발을 한번 씻었으니까 두 번도 씻을 수 있을 건데 씻을까 말까, 더럽히면 다시는 못 씻을까 하고 망설인다는 것이다. 호랑이처럼 사자처럼 보여서 멀리서보니까 겁이 난다. 주님이 오라고 부르시는 세계는 겁나는 세계가 아닌데도 자기가 스스로 생각할 때 겁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을 두렵게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을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두렵게 생각되고, 세상나라는 편안할 것 같고 방안에 앉으면 편할 것 같고, 밖에 나가는 것은 불안할 것 같아 망설이게 된다. 그런데 막상 거기를 가보니까 그 사자는 매여져 있는 사자였다. 사람 하나가 가운데로 딱 들어가면 그 사자가 양쪽에서 입이 안 닿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묘하게 표현해 놓았다. 목을 매어 딱 한가운데로 가면 정 중앙으로 가기만 가면 사자의 입이 닿지 않는다. 물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려놓은 호랑이를 보고 놀란 사람과 마찬가지다. 너무 호랑이를 잘 그려놓았으니까 진짜 호랑인 줄 알고 겁낸 것과 마찬가지다. 내 혼이 주님에게로 뺏겨지면 주님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내 혼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내 혼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내가 세상을 두려워 할 사람밖에 안되니까 결국 나는 세상에서 항상 두려운 존재가 돼버리고 만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문제 자체의 산더미에 싸여서 살게 마련이다. 손오공같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손바닥에서 움직이지만 그것이 온 세상이 될 수가 있다. 여러 손가락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그것은 온 천지가 될 수가 있다. 확대경으로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돋보기로 보니까 넓은 세계가 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혼을 사탄에게 뺏기고 있으면 우리는 어딜 가도 죽음밖에 없고, 어딜 가도 나를 삼키려고 하는 것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내 혼이 주님께로 뺏겼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지 알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내 영만 구원이 아니고, 내 혼이 완전히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 혼의 구원은 인간의 중심적 구원이다. 영도 우리에게 잠시 있는 것이고 육도 우리에게 잠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혼은 영원한 것이다. 땅에 있을 동안에는 이 혼이 제일 중요하다. 내가 천당이라는 어떤 세계에 갈 때는 내 영이 중요하지만 땅에 사는 동안에는 혼이 중심이다. 혼이 중심이니까 혼이 잘못되면 육도 자연히 잘못되어 버린다. 정신병자들이 보면 자기 육을 자기가 학대해버린다. 밥도 안 먹고 돌아다닌다든지 추운 맨 바닥에 뒹군다든지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한다는데 그것은 자기 몸이 혼으로 말미암아서 관리가 안 되니까 몸이 곤두박질을 한다. 아무데서나 뒹굴고 아무데 가서 살기 마련이니까 자기 몸이 구원이 안 된다. 내 혼이 구원이 되어야 내 몸도 구원이 된다. 사람들은 몸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생각한다. 꼭 만물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건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또 사람은 자기 혼은 자기 몸에 죄가 있다고 항상 핑계를 한다. 우리가 몸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혼에게 문제가 있다. 혼에게 문제가 있으니까 혼으로 말미암아서 몸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지 몸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 다 생각하기를 내가 육신으로 태어나지 않고 천사로 태어났으면 좋을 것인데 왜 육신으로 태어나서 고생을 하느냐고 생각한다. 육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고생이 아니고, 혼이 잘못돼 가지고 내 육신이 고생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안해야 될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못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못 갈 데를 가는 것이다. 내 몸은 가고 싶지 않지만 내 혼의 명령에 의해서 가는 것이다. 내 몸은 혼에게 직속되어 있다. 영에게 직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혼에게 직속되어있다. 혼으로 말미암아서 내 몸은 병신이 되어서 이리도 가고 저리도 간다.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사로잡으신 것은 우리의 혼을 결국 사로잡으신 것이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이제 거기서 자기의식이 점점 더 분명해진 것이다. 그 사람들을 보니까 자기는 부끄러워진다. 자기대로 걸어가고 있는데, 자기대로 살고 있는데 완전하게 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자기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돌아오게 된 것이다.
<5: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그는 지금 주님을 분명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 주님이 이미 해 놓으신 일을 자기가 확보하면 될 것인데, 해 놓으신 일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만나거든 내가 병났다고 전해주고 나를 찾아오라고 이야기해 달라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얼른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 주님은 이미 자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님에게로 가야되지 주님이 내게로 오지 않는다. “만나거든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하며무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문병을 오는가? 안 온다. 그 전 같으면 오지만 지금은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에게로 가야된다.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해라. 아직 지금 주님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해매이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자기의식이 뺏겨있는데 자기가 곧 주님의 것인데,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지금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주님께서 이미 그렇게 조성해 놓았는데 자기는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타까운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내가 병이 들어 병원에 가보니까 나 혼자 아픈 줄 알았는데 똑같이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위로가 되었다. 세상에 나만 아픈 줄 알았더니 나보다 더 심한 사람도 많고, 이것이 나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가능한 일이고, 나만 특별하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 나에게 있으니까 내가 특별하게 이상할 일은 없다. 병원에 가면 환자들이 집에 있을 때보다는 편안한 것을 느끼게 된다. 집에 있으면 전부 건강한 사람들 틈에 있다가 환자들 틈에 끼어들게 되면 비로소 거기서 공통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요양원에 오래 있던 사람들은 요양원을 잘 떠나려고 하지 않고 거기 있고 싶어진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다른 사람들이 다 당한 일이다. 세상에 있는 일은 전에도 있는 일이지 전혀 없는 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일은 없다. 이것은 일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데, 이런 산도 넘어가고 저런 산도 넘어간다. 경주를 많이 하여 관록을 올린 사람은 빨리 달려갈 것이고 관록이 없는 사람은 빨리 못 달려갈 것이다. 전적을 우리가 계산할 때 얼마나 많이 싸웠는가를 계산한다. 어느 군대가 강한 군대인가? 전쟁을 많이 한 군대가 강한 군대다. 운동선수는 연습을 많이 한 운동선수가 강한 선수이고 유능한 운동선수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들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 내가 거기서 이길 것으로 여기면 내가 그 문제 하나하나 때문에 강한 자가 된다. 바람이 불면 불어올수록 더 향기가 난다 그 말이다. 사건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아름다워지고 더 깨끗해진다. 우리가 결국 내 놓을 것은 그것밖에는 없다. 나 자신을 주님께 내 놓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을 내 놓겠는가? 나는 그 사건 속에서 어떻게 나온 사람인가를 내놓게 된다. 야곱은 무수한 사건을 경험해 갔다. 많은 사건을 지나가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그가 섰을 때 왜 부유한 자로 설 수 있는가? 많은 사건을 그가 통과해왔다는 것이다. 자기가 마지막에 나타낼 것은 거기서 연단되어져 나온 자기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내놓을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빈손으로 주 앞에 가게 될 것이다. 그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은 소용이 없다. 내가 귀신을 쫓아냈거나 예언을 했거나 방언을 했거나 아무 소용이 없고 그냥 나 자신이 누구인지 내 이름이 누구인지를 말해야 되지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을 갖고는 소용이 없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가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은 우리가 단련을 받아서 연단된 생활 가운데 얻어진 것은 이름 하나가 얻어진다. 내 이름 하나를 얻고 다른 것은 모두 다 지나가게 된다. 내가 인생의 한 여정을 지나가는 동안에 결국 나는 이름 얻고 가는 것이다. 훌륭한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높은 정치가가 되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고 많은 고비를 이겨 와서 그렇게 되었다. 고비를 이기는 동안에 자기의 이름이 생겼다. 국무총리라고 하면 그냥 국무총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고비를 겪는 동안에 국무총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자기 이름을 얻으려고 가는 것이다. 내가 주님 앞에 갔을 때 그 이름만 가지고 가는 것이다. 이름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그 속에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다 들어있다. 야곱이라고 하는 이름 속에 야곱의 모든 것이 다 들었다. 예를 들어 지금 최규하 대통령이라고 하면 최규하 대통령이라는 그 이름 하나를 지금까지 얻은 것이다. 그 이름 속에 그 사람의 모든 역사가 다 들었다. 그냥 하늘에 뚝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지나가는 것은 이름 얻으려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국무총리라는 이름은 소용이 없으니까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지고 가려고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이름은 천국에 소용없으니까 주님 앞에 소용없으니까 우리는 다른 이름을 내 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인정하는 이름을 내 놓으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이 다 동원되고 그것을 위해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지 그 이외의 것은 한 번 지나가면 다 없어지고 만다. 배가 바다를 가르고 지나간다. 그런데 배가 바다를 지나가는 것이 재미있어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 배는 어떤 항구라고 하는 목적지를 지나가는데 바다를 가르고 가는 것이다. 갈라지면 이미 끝나버리고 없다. 물 가르고 가면 끝나버리고 없고 항구에 도착했느냐 안 했느냐만 남아있다. 그 배가 얼마나 빠른 속력으로 항구에 왔느냐만 남아있게 마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 나셨지만 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었다. 낳은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인정된 이름을 가졌다. 그 인정된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인가? 많은 산을 넘어온 결과이다. 그가 낳은 대로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러나 낳은 대로 이름과 인정된 이름은 다르다. 모세라는 이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그러나 또 모세라는 이름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다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아야 된다. 인정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헤쳐 가는 것이다. 내가 그 헤쳐 가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혼이다. 그런데 내 혼이 어떻게 내 심지가 굳게 하고 내 심지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겠는가? 자기의 주님밖에 없지 않으면 자기의 심지가 굳어질 수가 없다. “주님밖에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할 때만 나의 심지가 굳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나의 심지가 굳어지지 않는다. 내 혼을 안정시키는 방법은 내가 스스로 내 혼을 안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을 사모하는 것이 내 혼의 안정이 되게 된다. 혼을 굳건히 하는 사람은 결국 세상을 승리할 것이고 혼을 굳건히 못하는 결국 패배할 것이다. 예수는 영으로도 하나님의 아들로 나신 것이고, 혼으로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된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