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선교사는 1761년 8월 어느날 영국의 노스햄프턴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주특기는 나무타기였으며, 공부에 대한 욕구도 강해서 독학으로 글을 깨우치고, 라틴어와 헬라어도 익혔다.
고등하교를 졸업한 캐리는 아버지의 강요로 구두수선공이 되었다. 당시는 걷는 것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구두수선은 유망직종 중 하나였다. 그는 평생 신발만 어루만지다 죽을 그에게 위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1779년 캐리가 19살 때 한 기도모임에서 히브리서 13장 13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영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해 그동안 세상과 타협하여 살던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난과 능욕을 받고자하는 분명한 결단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고 기도했다.
그 후 그는 다른 어떤 학문보다 성경공부에 전념하였다. 최고의 구두수선공이 되겠다는 그의 목표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당시 영국은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가 이끄는 영적 부흥운동이 전 영국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세계선교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하비레인 교회에서 헌신하고 있던 캐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변화가 다시 한 번 일어났다. 그것은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 라는 책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 이 책에는 당시 미지의 세계였던 태평양의 알려지지 않은 섬과 원주민들의 원시적인 삶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책에는 이런 글이 남겨져 있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명예도 유익도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있던 청년 캐리의 가슴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냐인의 끈질긴 외침을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들려 주셨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갈꼬"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그 때부터 캐리는 세계지도에 이미 알려진 나라의 인구, 종교 등을 표시하며 선교지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지도는 그의 기도 목록이었다. 그는 세계지도를 꼭 껴안고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기도의 종이 되었다.
18세기 영국교회는 캘빈주의의 영향으로 선교운동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선교는 예수님이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사명으로 국한시켰다.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 된 캐리는 교회안의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야겠다고 방향을 잡았다. ꁾ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선교사 William Carey ②
어느 날, 목사들의 모임에서 캐리는 해외선교에 대한 그의 원대한 계획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러자 한 원로목사가 일어나 그에게 말했다. ‘이보게 젊은이, 그만 열 내고 자리에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한다면 자네나 우리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걸세."
이것은 그의 선교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그러나 캐리 안에 불붙은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과 성령의 불은 더욱 크게 타올랐다. 캐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으로 믿었다.
이 믿음으로 그는 1792년 봄 "이교도 개종에 대한 크리스천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세계선교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임을 역설하였다. 이 책은 루터의 95조항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세계선교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캐리는 침례교회연합회 모임에서 이사야서 54:2~3을 주제로 ‘네 장막터를 넓히라.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는 말씀을 전하며, 간절한 기도 가운데 여러 목사들에게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통해 위대한 세계선교의 역사를 이루실 때라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시도하라고 말했다.
그의 비전이 넘치는 메시지에 감동을 받은 목사들이 당장에 그 다음날로 유명한 침례교 선교회를 만들었다. 7년 동안 아무도 그를 이해하거나 도와주지 않고 배척했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으로 현실에 절망치 않고 끈질기게 도전하였을 때 18세기의 타락한 영국을 구원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각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였다.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하였다. 그러나 그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그의 아버지는 캐리의 말을 듣고 ‘미친놈" 이라고 비아냥 거렸다. 또한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그의 아내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기 원했다. 그래서 눈물로 호소하며, 캐리의 인도 행을 가로 막았다. ꁾ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선교사 ③ William Carey
캐리의 인도 행을 막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내 뿐 아니었다. 하비레인 교회의 성도들은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으로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절대로 목사님을 보내지 않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캐리의 인도행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은 후에는 간절히 기도를 지원하게 되었다.
캐리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여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들이 인도땅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선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힌두교의 과부들은 ‘사티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시체와 함께 불에 태워 죽어야했고, 갠지스 강가에선 ‘갠지스 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나라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동인도 회사의 점령아래 있었던 인도에서는 선교가 절대 금지되고 있었다. 캐리는 추방을 면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은 말라리아 창궐한 곳이었다. 아내 도로시와 두 아이가 이질에 걸렸다. 그리고 한 아들을 잃게 되었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다. 캐리는 멋지게 선교를 하려던 이상적인 꿈이 산산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캐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내가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나의 모든 근심을 내어 맡길 수 있었다. 내가 설사 이곳에서 생명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나에게 이 고귀한 사명이 맡겨진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겠다."
캐리는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다. 그는 결코 본국의 선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디고 공장의 감독으로 취업의 길을 열어주셨다. 캐리는 충분한 선교비를 벌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선교의 기초가 되는 인도 말을 습득하는데 온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그의 위대한 시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캐리는 성경번역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고 또 여러 학교를 세웠다. 이처럼 벵갈에서 7년간 땀 흘려 선교하며 노력하였지만, 단 한 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다. 큰 아픔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동인도 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르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리쉬나 팔이라는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명이나 되는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ꁾ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선교사 ④ William Carey
윌리엄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땀의 결실이 세람포르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놀라운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난 것이다.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 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승리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세람포르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합심동역에 있었다. 캐리와 워드와 마쉬만. 그들은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불렸는데, 23년간 팀을 이루어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의 교제로 힘을 얻으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다.
한 번은 대형화재로 인해 수년간 작업하여 완역한 성경원고와 두 권의 문법책, 다국어 사전들이 소실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캐리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삼총사는 팀웍을 새로이 갖추고 다시 도전했다. 캐리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 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익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 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했다. 윌리암 캐리는 이처럼 그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은 것이다.
캐리는 1834년 73세의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던 인도의 세람포르에 묻혔다. 윌리암 캐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열정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선교적 도전으로 19세기 침체된 영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다.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학적 업적, 교육적인 공로, 목회사역뿐 아니라 과부를 죽은 남편과 함께 화형하는 일이나 유아살해 같은 인도의 나쁜 관습을 폐지하는데 기여하였고, 좋은 전통은 계승시켜 나가는데 까지 미쳤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선교적 영향력은 인도 국외적으로도 작용하여,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 공회가 창설되는 기초가 되었으며, 오늘날 세계 선교의 기틀을 형성하게 되었다.
실로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피운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다. 그의 믿음으로 근대 선교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선교 황금시대를 열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인도의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하였다. 그는 진실로 근대 선교의 문을 활짝 연 선교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