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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하고 소박한 경원선의 간이역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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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애마 자전거를 저어서 경원선 철길 옆으로 나선다. 신탄리역에서 연천역까지의 지난 번 여행에 이어 이번 자전거 여행은 연천역에서 경기도 연천군에서 가장 큰 오일장이 열리는 동네 전곡역, 한탄강이 발아래 흐르는 한탄강역 위를 달려 직원이 근무하는 건널목을 품고 있는 초성리역까지 달려갔다.
수도권 전철 1호선 동두천역이나 소요산역에서 경원선으로 갈아타고 (요금 천원) 연천역에서 내렸다. 높이 치솟은 연천역의 명물 급수탑을 뒤로 하고 남쪽 방향으로 철길 옆을 내달린다. 지난 번 여행 때 자전거 라이더를 편하게 해주었던 도보 겸 자전거길(평화누리길은 없지만, 철길 옆 차도와 농로, 연천군의 논에 물을 대주며 흐르는 차탄천 둑방길을 번갈아가며 페달질을 하다보면 연천군만의 다양한 풍경들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분단 조국을 실감하게 하는 굉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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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들외에 군인들도 흔히 보이는 경원선 열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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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원선 건널목 너머로 지나가는 탱크와 장갑차들, 육중한 굉음소리가 도로를 진동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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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선 열차 안에는 부대로 복귀하는 앳된 얼굴의 군인들이 흔했는데 그런 풍경이 전혀 생경하지 않다. 필자의 군복무 시절과는 많이 달라진 '개구리복' 디자인 구경을 하다 문득 열차 내 군인들 대부분이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에게 안경을 쓰게 하는 이 나라의 씁쓸한 현실이라니... 후일 통일 조국이 오면 굳이 말투를 들어보지 않아도 안경으로 남북한 청년을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연천군의 너른 들녘마다 심어져 있는 어린모들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철길 옆 농로와 마을길을 천천히 달리는데 어디선가에서 지축을 흔드는 육중한 기계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들려온다. 점점 다가오는 기계 소리의 정체는 커다란 탱크와 장갑차들의 행렬. 도시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군부대의 훈련풍경이다. 자전거를 멈춰 서서 구경을 하다가 갑자기 탱크와 장갑차 옆을 가까이에서 스쳐지나가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 육중한 덩치로 느리게만 보였던 전차들이 생각보다 무척 빠르다. 나름 광속의 페달질을 했건만 추월은커녕 꽁무니만 쫓다가 끝났다. 장갑차 위에 타고 있었던 군인이 날 보며 살짝 웃었던 것 같다. 주행 내내 도로를 뒤흔드는 진동과 굉음은 분단 조국의 현실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통일이 될 때까지 실제 상황이 아닌 훈련으로만 끝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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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탄천변에 피어난 예쁜 금계국꽃이 간간히 부는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며 여행자를 응원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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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에는 농부, 밭에는 농모님들이 허리숙여 일하는 유월의 연천군 들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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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굉음과 장갑차 추격에 실패해 칙칙해진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차탄천변에 피어난 예쁜 노랑 금계국꽃들이 간간이 부는 바람에 온몸으로 춤을 추며 여행자를 응원한다. 이맘때면 흔하게 피어나는 금계국꽃 사진을 찍는 여행자가 신기했는지 지나가는 동네 주민 부부가 걸음을 멈추고 서서 "가을엔 코스모스 꽃이 예쁘게 피어나니 또 오라"고 알려준다.
말을 건넨 할아버지는 놀랍게도 지난 번 경원선 자전거 여행 때 연천역에서 신망리역, 대광리역, 신탄리역까지 이어진 평화누리길을 알려준 분이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런 게 인연이구나 싶었다. 가을에 차탄천변 코스모스 꽃 보러 꼭 와야겠다.
연천군의 너른 들녘에 물을 대주느라 모내기 시즌의 차탄천은 다이어트를 하는 도시 여인들처럼 홀쭉하게 흘러간다. 얼마 후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콸콸 힘차게 흐를 것이다. 장마가 오기 전 모내기와 밭일을 끝내야 하는 농부, 농모님들의 허리 굽은 손길이 분주하다.
전곡역 이정표가 보이더니 한동안 기찻길 옆 차도가 이어진다. 2차선의 도로 끝에서 차량들과 함께 달려간다. 군부대 차량은 물론 대형 트럭도 어김없이 뒤에서 지나쳐 간다. 이럴 땐 '난 이 도로 끝 흰 선을 고수하며 계속 달리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등에 표시해야 큰 트럭들이 불안한 마음에 경적을 울려대지 않는다. 오랜만에 국도변 흰색 선을 생명선삼아 스릴 넘치게 달려보았다.
소도시, 소읍 여행의 최적지 전곡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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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읍만의 정취를 지니고 있는 동네 전곡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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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풋한 시골장터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전곡읍 오일장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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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사시대의 유적지가 크게 남아있는 유명한 동네 전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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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유적지로도 유명해 큰 박물관까지 있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은 연천군에서 제일 큰 동네다. 아담한 간이역 전곡역에 도착해 화장실에서 세수도 하고 나무 그늘이 있는 마당 쉼터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주민들과 둘러앉아 잘 쉬었다. 옆에 앉아있던 할머니는 전에 가보았던 토교 저수지가 있는 철원의 민북마을(민통선 북쪽 마을) 양지리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오셨단다.
오일장 날이 열릴 때마다 먹거리도 살 겸 이렇게 마실 나들이를 나오신다고. 할아버지는 막걸리 한잔 불콰하게 걸치셨는지 눈꼬리가 내려가고 얼굴 표정이 흐물흐물하다. 전에 철원 양지리에 가보았다고 하자 반가워하시며 6·25 전쟁 때 참전했던 이야기를 구연동화마냥 생생하게 얘기해 주신다.
전곡읍은 소도시 혹은 소읍 여행을 좋아하는 나 같은 여행자에겐 최적의 동네다. 기차 간이역은 물론 간이역만큼 작은 시외버스터미널도 있고, 도서관과 우체국, 낮은 단층의 집들과 상가들 사이로 이어진 시장 주변에선 매 4일과 9일마다 오일장이 선다. 시골 장터의 수수하고도 풋풋한 분위기가 남아있는 오일장은 연천군에서 제일 큰 장날이다(경원선 대광리역 앞, 연천역 앞에서도 오일장이 열린다). 철원군 양지리에 사는 할머니 부부가 나들이 삼아 나올 만하다.
천 원짜리 시장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오일장 구경에 나섰다. 할머니가 집에서 키우다 장날에 팔러 데리고 온 귀여운 토끼며 오리, 닭들 구경도 재미있고 온갖 생활용품을 작은 트럭에 빈틈없이 실어놓은 장돌뱅이 아저씨의 기술도 놀랍다. '내가 뜯어온 나물'이라고 써 붙여 놓은 나물가게 아주머니의 유머도 더운 초여름 날씨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풍경이 마음에 스미는 기분이 나게 하는 동네다.
경원선 간이역의 동생, 초성리 건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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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쓸한 무인 간이역이지만 발치에 한탄강이 흐르고 있어 덜 적적한 한탄강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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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원선 열차가 오면 분주해지는 초성리의 기차 건널목, 직원이 상근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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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유적지와 박물관이 있는 전곡읍 전곡리를 지나면 소담한 차탄천은 어느새 보기만 해도 뛰어들고 싶은 한탄강으로 바뀐다. 강가엔 무인 간이역 한탄강역이 따로 건물도 없이 서있다. 경원선 간이역 중 가장 쓸쓸해 보이는 역이지만 야외 대합실 의자에 앉아 3량짜리 작은 열차를 기다리며 조용히 앉아 있다 보면 간이역 여행의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기분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발치에 캠핑장과 유원지가 있는 한탄강이 흐르고 있어 덜 적적해 보인다. 한 여름엔 한탄강 유원지에 놀러온 사람들로 북적북적하겠지. 언제 봐도 장쾌한 한탄강을 눈에 꼭꼭 눌러 담아두며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인 경원선 간이역 초성리역으로 향한다.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는 작은 마을이지만 기찻길 건널목, 그것도 직원이 3교대로 상근하는 건널목이 세 군데나 있는 교통 요지다. 건널목은 경원선 철길에 흔하지만 이렇게 직원이 지키고 있는 곳은 초성리가 유일하다. 맨 먼저 만나는 건널목은 초성 초등학교가 뒤로 보이는 학답 건널목. '땡땡땡' 경보소리가 나면 간이역만큼이나 작은 건널목 사무실에서 초로의 아저씨가 빨간 깃발을 들고 나오신다.
그와 함께 빨간 줄무늬가 그려진 서 너 개의 차단봉이 일사불란하게 내려오는 풍경이 무슨 작전 수행을 하는 것 같아 절로 눈길과 발길을 머물게 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유인 건널목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무실 안으로 살짝 고개를 들이 밀어 보았다. 내 인상이 좋아서인지 아님 애마 자전거 덕택인지 건널목지기 아저씨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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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건널목 사무소안, 라디오 소리에 실려 직원 아저씨의 말이 아득하게 들려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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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한 간이역만큼이나 작은 유인 건널목 사무소, 초성리역 주변에 3군데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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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좁은 사무실에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다. 탁자와 창문 곳곳엔 업무와 관련된 공지사항과 메모가 놓여있다. 경원선 이야기며 동네 이야기, 주간·야간·새벽교대 근무를 하는 아저씨의 일 이야기가 켜놓은 라디오 방송 소리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실려 아늑하게 들려온다. 어릴 적 집에 있었던 포근한 다락방에 들어온 것 같고 한쪽 구석에 기대어 낮잠 한 숨 자고 싶었다.
주야간 외에 새벽까지 3교대로 근무하는 건 수송열차, 군용열차, 관광열차 등이 새벽에도 지나가서란다. 경원선이 1914년 개통되었으니 참 오랜 시간 기차는 달렸고 철마 사고가 없도록 사람들이 돌봐왔다. 초성리는 옛 부터 교통요지라 이런 유인 건널목이 철길 따라 세 곳이나 있어서 초성리역 가는 길에 연이어 만나게 된다.
아담한 동네와 어울리는 초성리 간이역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어느 덧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고 조용한 동네 한가운데서 때 아닌 닭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1시간 마다 오는 경원선 기차,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간격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간이역 여행을 하기에 적당한 간격이지 싶다.
운이 좋으면 조금 기다리다 기차를 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일부러 열차의 출발시간을 미리 알아 두지 않은 건 기다림마저 즐거운 간이역 여행의 여유를 좀 더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주요 자전거 여행 길 ; 경원선 연천역 - 전곡역 - 전곡읍 오일장터 - 한탄강역 - 한탄강 유원지 - 학답 건널목 - 초성리역
o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