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평론의 발전과 변화:1980년대-2010 현재까지 개관
심정순(연극평론가.숭실대교수)
연극사 중에서도 연극평론 분야의 발전과 변화를 정리, 기록하는 작업은, 하나의 중요한 미시사이자, 또한 계보사로서 본 발제자는 본인이 경험하고 목격한 시각에서 1980년대에서 2010년에 이르는 약 30여년 간의 연극평론 발전사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연극평단 관련 중요 연극계 이슈들
우선 연극평론의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의 맥락을 대강 집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가 귀국한 1980년대 초반에서 거의 80년대 후반까지는, 군사정권 하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던 상황이었다. 매년 개최되는 ‘서울 연극제’에서 공연되는 작품은 거의 모두 정치역사극으로, 평론가 이태주는 그 특징을 “경직된 계몽성과 직설적 어법” 이라고 분석한다.(연극평론, 2010 통권 56호) 그러나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우리 사회는 점차 한국식 개방, 개혁의 물결을 타게 된다. 1986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화 선언’ 이후, 우리 연극무대는 점차 개방화로 나아 갔는데, 제일 먼저 등장한 문제가 ‘여성의 무대 위의 벗은 몸’의 문제였다. 1988년 초, 오태영의 <매춘>이 과도한 여성 몸의 노출 문제로 논란이 되자, 연극계와 평론계는 합심하여 ‘표현의 자유’ 문제를 거론 하였고, 투쟁한 결과, 1988년 군사정권 하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공연대본 사전 검열제도’가 폐지되기에 이른다.
88 올림픽 이후 가속되는 국제화의 분위기, 확장된 표현의 자유의 문제, 해외에서 수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위기적 확산, 가속되는 상업화 등등의 복합적인 사회. 문화적 상황의 변화는, 우리 연극 무대에서는 이제 과도한 ‘성의 상품화’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급기야는 저질, 벗기는 연극인 <미란다>(1994) 등 대학로 무대에 포르노적 성격이 강한 공연들이 난무하게 된다. 당시 한국연극협회, 연극 평단과 사회단체 등의 고발로 이 공연의 연출자는 법정에 섯고,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이후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문제는, 연극계가 불황일 때 마다 간간히 다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9년 전라 연극 <논쟁>으로 다시 불거진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문제는 <교수와 여제자> 공연에 이어, 2010년에는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로 이어 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도 의견을 이미 피력한 바,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정서가 90년대 초 엄숙주의 분위기와는 그동안의 세월과 글로벌화 분위기 및 대중문화의 확산 등 으로 사뭇 많이 달라져 있어서, 미디아 매체들이 그렇게 추적 보도를 하다시피, 대서특필할 사항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문화선진국들의 경우처럼, 공연의 예술성을 따져 관객이 선택하도록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술성 이전에 단순히 ‘전라’라는 사실만 가지고, 대서특필해야 할 이유가 정당화되는지 잘 모르겠다.
2010년 초부터 연극평단에 문제가 되었던 이슈는, 국립극단의 민영화 문제다. 이는 문화부가 추진하는 국립극단 재단법인화 사업의 이환으로, 문화부는 극단 체제 개선과 예술향상 도모를 목표로 외국인을 극단의 예술 감독으로 초빙한다는 계획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올해 초 예술감독이 재단 사업장으로 전보되고, 단원들은 해촉되면서 국립극단은 현재 휴면상태이다. 이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문화부가 왜 국립극단 존폐 여부와 시스템 개혁을 결정 짓는 중대 사안에 대해서 연극계, 예술계, 문화계, 학계 등 인사들의 조언과 현장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공론화라는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식의 행정을 한다는데 대한 비판이었다.
2. 제도로서 연극평론의 사회적 문화적 위상의 변화
우리나라의 전통적 감정과 정서를 고려해 볼 때, ‘비평’이나 ‘평론’은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어려운 맥락이 아닌가 싶다. 과거의 예를 돌이켜 보면, 흔히 평론가와 연극현장 작업자들은 어떤 특정된 작품에 관한 상이한 의견 때문에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하고, 평론가들을 ‘씹는다’는 뜻에서 ‘이빨’이라고 부른 시기도 있었다. 이는 물론 농담반 진실반이라고 이해한다 해도, 평론의 연극계내의 위상을 어느 정도 반영해주는 기호로도 해석할수 있다. 게다가 연극은 타장르 예술에 비해 무척이나 더 가난했다는 사실도 이에 첨언하면, 연극평론이 처한 문화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중반부터 연극계의 몇몇 지식인들이 평론기능의 중요함을 인식하여 동인제 성격의 서울극평가 그룹(이상일, 유민영, 이태주, 양혜숙, 김문환, 서연호, 김방옥은 나중에 동참) 을 시작하여, 연극 불모지에 평론 활동의 뿌리를 내린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이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양혜숙 회장 시에, 한국연극평론가협회로 확대 발전하게 된다.
중요한 의미있는 사건을 년대별로 정리해 보면, 1)1986년 한국연극평론가 협회가 정식 발족함으로서, 신진 평론가들의 평론가 협회로 제도적 진입을 개방했다는 사실. 2)1990년대에 들면서, 연극학 관련 학자들의 숫자도 서서히 증가했다.
1992년 10월 젊은 연극학자 6인(김창화, 오세곤, 이재명, 김형기, 서명수, 박철완)이 모여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이라는 연극평론 모임을 만듦으로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 모임은 2010년 현재까지 계속되면서, 연극평론의 대중화를 이끌어 내는데 나름대로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다. 이 모임은, 한국연극평론가 협회의 공식적인 제도권 내에서의 활동과 비교해 볼 때, 프린지 성격의 축제나 공연 등으로 평론 활동을 넓히면서, 나름대로 활발한 기여를 해왔다.
이 두 연극 평론가 그룹은, 각각 ‘연극평론’(2000년 겨울부터 복간)과 ‘공연과 이론’(2000년부터)을 정기적으로 발간함으로서, 전문 평론문을 안정적으로 계재할 지면을 확보하게 된다. 실제로 90년대 중반 이후로 들면서, 그동안 연극 평론의 지면을 제공했던 일간지들이 전문기자들의 저널리즘적 평으로 대체하기 시작했고, 기타 다른 프린트 매체들에서도 그러한 경향은 확산되어 갔다. ‘한국연극’지와 ‘객석’ 정도가 연극리뷰를 고정적으로 계재하는 전문 잡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1997 IMF 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글로벌 시장권으로 편입이 가속화 되면서, 대중문화의 확산을 타고, 연극문화 용량도 급속도로 팽창한다. 한 예로 80년대 중반 10여개에 불가하던 대학로의 소극장 숫자가 2010년 전후해서 약 100여개로 확산된다. 2008년 연극공연 편수는 535편(서울 연극협회 조사)에 이른다. 동시에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엔드의 히트작은 몇 달의 차이를 두고 우리나라 무대에 소개된다. 동시공연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2000년 들어서면서, 괄목할 성장을 보인 대중적 상업공연 장르가 뮤지칼이다. 매년 25% 씩 급속 성장을 거듭하던 우리나라 뮤지컬은, 2009년에는 195편이 공연되었고, 로얄티 문제때문인지 창작 뮤지컬이 라이센스 뮤지칼의 숫자를 능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연 시장 구조의 변화로, 연극평론은 이제, 뮤지칼 평론, 대중문화 평론이라는 새로운 평론 장르의 대두를 보게되고, 연극평론가들이 담당했던 뮤지컬 평론은 전문 뮤지컬 평론가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2000년대 들면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연극계 현상중의 하나는, 전문 연극 현장 작업자로서 여성들의 대거 등장이다. 극작에서 1980년대 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공연됬던 작가는 아마도 정복근이 유일하고, 강성희, 박현숙 등 몇 다른 여성 극작가들은 가끔 한번씩 공연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90년대에 들면서, 김명화, 장성희, 고연옥 등의 여성 극작가를 필두로 많은 젊은 세대 여성 극작가들이 뒤를 잇고 있다. 여성 연출 분야에서도,
여인극장의 강유정 연출은 80년대 중반까지 거의 유일한 여성 연출가 였는데, 80년대 후반에 김아라의 등장, 90년대 중반에 한태숙, 90년대 후반 이후 이지나, 권은아, 추민주, 문삼화 등 수없이 많은 신세대 여성 연출가들이 등단했다. 이들 젊은 세대 여성 연출가들은, 매년 <여성연출가 전>을 기획 공연하여 2010년 6회째 공연을 한바 있다.
여성 연극평론가들도, 1990년 전후로 양혜숙을 위시하여, 구히서(일간지 기자), 김방옥, 심정순이 등단 활동했으나, 90년대 이후 김성희, 장혜전, 장은수, 김미도, 김명화, 장성희, 이은경, 김유미, 김소은, 최영주 등을 위시하여, 현재는 수없이 많은 젊은 세대 여성 평론가가 등단하여 이루 이름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전문 여성 연극인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해외 여성연극인들과의 국제적 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심정순은 1994년 호주 아들레이드에서 열린, 제3회 국제여성극작가 회의(IWPC)에 참여할 한국 여성 연극인 대표 팀을 구성하기 위하여, '여성연극인회‘를 만들 것을 촉구하게 되고, 이에 호응한 강성희, 박현숙, 양혜숙, 강유정, 백성희, 윤석화 등 17명이 1994년 예총회관에 모여, 여성연극인회 발기 대회를 열고, 발족 시킨다. 이후, 2010년 지금까지, 힘들게 나마, 명맥을 이어왔고, 그 명칭을 ‘한국여성 연극인 협의회’로 개칭하고, 그 아래 극작, 연출, 무대미술, 평론, 기획의 분과를 구성하게 된다.
현재 연극평론가 협회의 주소록을 보면, 여성 평론가의 숫자가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고, 평론가 협회의 활동과 한국연극학회의 활동에도 여성회원들이 눈에 띄게 활동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연극평론 분야의 여성주류화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관망된다.
결론적으로, 지난 20여 년간은 연극분야의 용량 팽창으로 그와 관련된 분야의 양적, 팽창 확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연극 평론의 대중적 확산은, 일면으로, 20년전 시대의 투철한 사회의식에 기초한 평론가들의 사회적 책임이나, 평론의 질적인 향상을 보장하는데 기여했다고 보기 힘든 점도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