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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1881년 <모던 빌리아드>에서 제작한 목판화. 클레오파트라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유산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어떤 사실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 역사적 개요
이 장에서는 당구 역사에 관한 압축된 아우트라인을 제시해 보겠다. 여기에서는 게임의 연대기와 그 발달에 관해 상세히 기록해 본다. 이 작업은 전에도 시도해 본 일이 있다. 우리의 목적은 당구 역사가들이 무엇을 연구하며 그들이 예술 작품을 주요 도구로 사용하여 어떻게 그 역사를 연구하는지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당구 역사를 주요 범주로 나누어 보면 : 기원, 장비. 게임, 기술, 플레이어 및 사회적 연관 등이다. 기원 분야에서는 게임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발달하였고 전세계적으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에 관하여 살펴본다. 장비 분야에서는 테이블, 볼, 큐대, 의상, 초크, 조명 등에 관하여 살펴보겠다. 최선의 재료와 최상의 색깔, 규격, 무게는 무엇인가. 장비의 개선이 어떻게 플레이어에게 영향을 미쳤는가. 왜 사람들은 초크를 필요로 하지 않은 팁을 발명하지 않았을까. 게임에 관한 분야에서는 당구 게임의 색다른 유형과 그 규칙, 그리고 그 게임들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 등에 관해 다루게 된다. 무엇이 플레이어들에게 그리고 관중들에게 게임이 인기가 있도록 하였는가. 게임에서 공격과 방어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장비와 게임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어떤 장비를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거나 금지하기 위해 룰이 제정되었으며 게임의 스타일은 사용되는 장비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기술 분야에서는 게임 스킬의 발달 과정에 대해 추적하고자 한다. 드로샷(끌어치기)은 누가 개발하였으며, 포지션 플레이는 어떻게 진화하였고, 누가 다이어몬드 시스템을 창시하였는지에 관해 다루게 된다. 테크닉과 게임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테크닉은 특정 게임의 룰과 연관하여 다양하게 발달해 왔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에 관한 항에서는 유명 선수들의 생활과 그들의 업적, 기록, 토너먼트 게임, 타이틀 등에 관하여 다루게 된다. 물론 테크닉이 개개인의 플레이어들에 의해 완성되어 왔기 때문에 한 개인에 대한 연구는 다른 개개인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밍고드는 트릭샷과 연관되어 있고, 제이콥 세이퍼1세는 마세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의 아들은 보크라인으로 유명하고 윌리 호프는 3쿠션과 모아치기에 관련되어 있으며, 모스코니는 포켓 빌리아드의 포지션 플레이와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다. 사회 분야에서는 게임을 커다란 문맥에서 관찰하여 이 게임이 어떻게 다양한 문화와 연결되는지를 살펴본다. 당구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누구인가. 당구는 왜 사이클을 갖고 번창하며 쇠퇴하는가. 게임의 이미지가 일반 사람들에게 어떻게 변화되면서 평가되어 왔는가. 당구 게임을 규제하고 제한하였던 이유와 그 규제 방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림2> 프랑스인이 1470년에 제작한 땅바닥에서의 당구 게임 |
⊙ 기 원
당구의 초기 유산은 미스터리로 가득차 있으며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구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만 단순한 추측이나 희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영국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도래하였다고 주장하고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 사람들이 이를 창시하였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몇몇 사람들은 영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소련의 백과사전에는 인도 또는 중국에서 개발되었다고 쓰여 있다.
몇몇 사람들은 당구가 예수 탄생 전에 이집트에서 시행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의 근거는 세익스피어가 1607년에 쓴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 나오는 한 줄의 문장을 근거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클레오파트라가 “당구장으로 가실까요?”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세익스피어 시대에 당구라는 게임이 있었으며 관중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무심코 쓰여진 이 한마디가 당구의 고대시대 기원에 관한 무수한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고대 이집트에서 시행된 경기를 표현하는 모조 예술품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림1은 1881년에 발간된 <모던 빌리아드>에 게재된 작품이다. 특정한 관념의 정확성을 믿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당구 게임이 크로케나 바치와 같은 방식으로 공을 치는 야외에서 하는 경기였다는 사실이다. 이 경기는 1300년대에 유럽에서 인기 있는 오락 경기였다. 그림2는 1400년대 후반에 성행했던 그라운드 당구 경기이다. 필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펜스와 기구의 모양을 자세히 관찰하면 흥미롭다. 이 시기에는 게임이 실내에서도 시행된다. 1469년에 본질적으로 현대적 구조와 같은 당구 테이블이 프랑스의 루이 4세에게 헌납된다. 그 테이블은 레일과 돌로 이루어진 베드가 있었으며 천으로 덮여 있었다. 풀의 모양과 유사하게 닮게 하기 위해 초록색 천이 사용되었다.
빌리아드라는 단어는 1500년도에 영어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1580년에 감금되었을 때 당구 테이블을 빼앗긴 일을 불평하였다고 한다. 그림3은 1639년의 영국의 당구 테이블을 그린 목판화이다. 테이블은 거의 정사각형이며 6개의 포켓이 있고 아크라 불리는 반원형의 위켓으로 경기한다. 두 명의 캐루빔 천사가 경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원형으로 된 화환은 어떤 목적으로 쓰인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두 개의 대형 볼은 막대에 의해, 치기보다는 밀어서 플레이한다. 이 일반적인 설비는 그림4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그림은 1674년에 제작된 찰스 커튼의 목판화이다. 이 그림에서는 스틱이 굴곡을 이루고 있으며 킹이라고 불리는 뾰족한 타게트가 사용되고 있다. 샷을 할 때에는 스틱을 어깨에 걸치고 하도록 되어 있다. 찰스 커튼이 그린 그림은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그 시대에 사용된 테이블이 설명되어 있으며 시행된 규칙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후반에 다시 이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 장 비
당구 장비가 다양하게 진보함에 따라 플레이어의 경기 방식도 함께 진보하게 되었다. 당구에 있어서 대부분의 진보는 19세기 초반 50년 동안에 영국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불과 수십년 동안에 당구 게임은 원시적인 상태에서 고도로 진보된 게임으로 변하게 된다. 진보된 예를 들어보면 1818년에 가죽팁이 사용되었고 1834년에 테이블 베드로 석판이 사용되었으며 1839년에는 고무를 경화시키는 방법을 발명하여 1845년에 튼튼한 고무 쿠션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양질의 테이블과 레일 및 볼이 구비되었기 때문에 기술 또한 커다란 진보를 이룩하게 된다.
[메이스와 큐(메이스 : 옛날 쿠대 대신 썼던 머리가 납작한 막대)]
오래 전에 개발되었던 큐대 막대 또한 이 시기에 진보되었다. 원래 당구는 메이스라 불리는 막대로 하는 경기였다. 메이스는 하키 스틱을 닮은 것이었는데 땅바닥이나 테이블에서 공을 밀어 치는 데 사용되었다. 볼을 항상 중심으로 쳤기 때문에 메이스는 비틀기를 하는 데 사용될 수 없었다. 또한 볼이 쿠션에 붙어 있을 경우 볼의 뒤에서 메이스가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볼을 칠 수 없었다.
이 메이스의 문제는 붙어 있는 볼을 칠 때에 메이스를 거꾸로 하여 가는 핸들로써 볼을 침으로써 해결되었다. 메이스는 큐대로 점차적으로 대체되었다. 그렇지만 거의 1900년까지 메이스는 남아 있게 된다. 1893년에 브룬스윅 핸드북에는 아직도 당구실을 완벽하게 꾸미기 위해서 메이스의 구입을 권장하고 있다. 메이스가 남아 있게 되는 원인의 하나는 그것이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스를 사용하면 몸을 구부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속스커트를 보일 염려가 없었다.
<그림3> 1639년도 작품. 정사각형의 테이블과 6개의 포켓, 2개의 볼, 메이스 등이 보인다. |
<그림4> 1674년 작품. 뾰족한 기구는 킹이라고 불리었던 타게트이다. |
그림5는 1740년대의 전형적인 장면이다. 남자는 큐대를 갖고 있고 여자는 메이스를 들고 있다. 큐대는 천을 찢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상당한 기간 동안 능숙한 플레이어가 아니면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림6은 1850년에 그려진 프랑스 그림인데, 이러한 천을 찢을 두려움이 1세기 이상 동안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메이스는 또한 초보자에게 안전한 것이었다. 1818년에 가죽으로 된 팁이 발명되었다. 1818년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해에 발행된 E.화이트의 방대한 당구에 관한 논문에 가죽팁에 대해서 언급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에 가죽팁이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그 발명에 대한 상세한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런던의 당구 제조업자인 서스튼의 판매 기록에 1818년에 가죽팁이 처음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림7은 1823년에 가죽팁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무관심’인데, 표제에 신사들에게 침착하게 돈을 잃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충고는 그 어조가 매우 현대적이다 : “태연자약하게 돈을 잃어야 한다. 즉 아직도 돈이 많은 것처럼 행세하여야 한다. 당신은 돈이 바닥났을 때 수치심을 억제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 감정의 마스크를 벗어 버리고 감정을 풀 돌파구를 찾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왼쪽에 있는 플레이어는 하얀 초크로 문대는 것을 볼 수 있다. 조명과 득점 기록장치 또한 흥미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한다.
결합식으로 된 큐는 1829년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 이전에는 이러한 장치가 필요 없었다. 게임을 할 사람은 특별한 경우에만 자신의 큐댈르 가지고 가면 그만이었다. 팁이 발명되어 비틀기를 사용할 수 있기 이전에는 큐대 자제가 플레이어의 게임에 별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용으로 큐대를 휴대할 필요가 없었다. J. R. 미첼은 <빌리아드와 스누커>라는 책에서 1833년에 납을 사용하여 큐대에 중량감을 주었다는 사실을 추적하고 있다.
[테이블]
초기의 테이블은 매우 약한 것이었다. 따라서 볼을 칠 때에 플레이어의 발이 적어도 하나는 바닥에 닿아야 하는 룰이 제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테이블 베드가 얇은 나무판으로 제작되어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올라 앉으면 부서지기 십상이었다. 또한 처음에는 테이블의 치수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커튼은 테이블의 폭이 좁으며 길이가 길다고만 서술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매우 견고한 테이블이 제작되었으며 길이와 폭이 2대 1로 정착되었다. 판화를 연구해서 살펴보면 테이블의 큐격과 제작 방식을 알 수 있다. 1730년경에 그려진 그림8은 15개의 발이 있는 테이블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피트와 인치로써 치수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테이블의 규격은 당시의 표준인 5½피트와 11피트이며 테이블 바닥은 밑바닥으로부터 30인티 위로 떨어져 있다. 큐대와 메이스는 각각 49인치인데 이 길이는 현재 규격인 54∼57인치보다 약간 작은 것이다. 6개의 포켓은 원통형이며 테이블의 베드에 구멍이 뚫려 있다. 쿠션 쪽으로 구멍을 뚫지 않은 이유는 쿠션이 평평한 수직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레일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긴 볼트를 사용하여 조였다.
<그림8> 15개의 다리가 있는 5½×11피트의 테이블 그림. 1730년도에 그려진 그림에 큐대와 메이스 그리고 테이블에 레일을 부착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