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은 만년에 몹시 사랑하는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에게 별궁을 지어 주었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던 동별궁이다.
영응대군가는 민가 60여 채를 철거하여 지어 졌다고 전한다. 그 집이 매우 컸다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영응대군의 집은 세종 31년 봄부터 시작한 듯 하며 그 해 11월에는 조성되었다.
서울 안국동 로터리 근처 동별궁이 있었다. 현재의 풍문여고 자리이다.
세종은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을 매우 사랑하였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덟 째 아들이며 이름은 염이다.
1441년 영흥대군에 봉해지고 1443년 역양대군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1463년 '명황계감'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글씨와 그림에 능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세종은 말년(세종 30년)에 영응대군을 위한 집을 지어주었다. 그 곳이 바로 동별궁이다.
그는 재위 32년째인 1450년 2월 세종은 병환으로 이 동별궁으로 이어하였다.
세종은 10여 일 만에 영응대군가 동별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이 승하한 뒤 영응대군의 집을 그대로 빈소로 삼았다.
왕세자인 문종은 이곳 빈전문(殯殿門) 밖에서 장전(帳殿)을 설치하고 즉위례를 거행하였다.
그 후로도 대군가로 남아 성종은 즉위년 자을산군(者乙山君) 시절에 한명회의 딸을 맞아 친영례를 거행한 일이 있었다.
성종 때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는 이 집을 나라에 바치었다. 성종은 이 집을 연경궁(延慶宮)이라고 명명하였다.
이곳에 의경묘(懿敬廟)를 세웠다. 그 집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게 주었다.
의경묘는 세조의 세자로 요절한 성종의 망부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사당(廟)이다.
성종의 형님 월산대군 이정이 정자를 창건하여, 술과 시로써 즐겼다.
성종이 친히 와서 보고 매우 흠탄하여 ‘풍월정’이라 명명하였다.
이때 시 여섯 수를 지은 후 문신들에게 명하여 화답하게 하였다.
월산대군은 성종 19년에 별세하였다.
성종의 후년과 연산군 시대를 거쳐 중종 초년에는 안국동의 월산대군가는 빈 집이 되었다.

서울 우이동 4.19묘지 근처 메리츠화재중앙연수원으로 옮긴 동별궁 정화당이다.
중종 17년(1522)에 공가(空家)인 이 집은 중종의 첫째 딸인 혜순옹주(惠順翁主)에게 하사되었다.
인조때는 중종의 제1옹주 혜순옹주의 집으로 되었다.
그 자리에는 인목대비의 소생인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을 새로이 짓게 되었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계비 인목대비 사이의 소생으로 인조 초에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시집갔다.
정명공주의 길례(吉禮)가 있게 되면서 인조 2년에 공주의 집을 짓게 되었다.
여기에는 인경궁(仁慶宮)의 남은 자재 약 170칸분을 이용하였다.
당시 대간(臺諫)에서는 궁을 짓고자 마련한 재와(材瓦)를 공주가에 전용하는 것은
민력과 민원에서 마련된 재와가 부당하게 쓰여지는 것이라 하여 반대하였다.
공주의 집을 짓는 공사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 규모도 100여 칸을 넘는 큰 것이었다.
인조 3년경에 영건하였던 정명공주가는 그로부터 약 80년이 지난 숙종 때에도
그 자손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숙종 34년에 길지복가(吉地福家)의 명당으로 인정되어 숙종의 6남인 연령군의 집이 되었다.
숙종 34년(1708)에 숙종의 여섯째 아들 연령군의 사저로 하사된 것이다.
그 5세가 된 1703년(숙종 29)에 생모인 명빈 박씨가 죽자 연령군에 봉해졌다.
어린 시절 어미를 잃어버린 연령군을 숙종은 안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숙종은 어느 왕자보다도 연령군에 대한 사랑이 매우 깊었다.
사도세자는 후궁으로부터 세명의 아들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과 한 명의 딸인 청근옹주를 낳는다.
은언군은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 등 세 아들을 두었다. 은신군 은전군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은언군의 큰아들인 상계군은 1779년 홍국영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자결하였다.
은언군의 아들인 전계군(이광)에겐 세 아들이 있었다.
전계군의 장남 이원경(회평군)은 1844년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둘째 아들인 이경응(영평군)은 오래도록 살아 1901년에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셋째 아들인 이원범(덕완군)은 강화도에서 어렵게 살다가 조정에 후사가 없자 택군이 되어 철종이 된다.
풍계군은 자식이 없었다.
정조는 이복동생 은신군을 좋아하였다.
은신군은 노론벽파세력의 역모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를 가 병으로 죽었다.
자손이 없이 죽은 은신군을 안타깝게 여긴 정조는 남연군을 은신군의 양자로 들인다.
그에게 혜경궁 홍씨의 묘소를 조석으로 참배케 하고 묘소를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남연군은 아들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군 네 형제를 두었다.
흥선군 이하응은 넷째 아들이다.
은전군은 정조 1년에 일어났던 홍상범 자객사건의 조사과정에서
홍상범의 은전군 추대설이 드러나 자진하게 된다.
정조 1년 7월과 8월에 일어났던 홍상범 자객사건은 정조의 외척 제거에 대한 홍봉한 정파의 저항이었다.
당시 홍술해의 아들 홍상범은 홍지해 홍술해가 섬에 정배되고 홍인한 정후겸이 사사되는 등
홍봉한 정파에 대한 정조의 공격이 본격화되자 두 차례에 걸쳐 국왕시해를 기도하였다.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였다.은신군은 연령군의 양자였다.
연령군의 사저가 안동별궁이었다. 이후 안동별궁의 소유는 은신군 남연군을 거쳐 흥선대원군대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남연군묘를 덕산에 이장하고 모든 가재도구를 팔아서 2만냥을 만들 당시 대원군 4형제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철종 때는 그 별궁 안에 전계대원군의 사당(廟)이 건립되었다.
전계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손자로 그의 아버지는 은언군이다.
은언군은 정조와 숙질 사이이고 후일에 입승대통(入承大統)한 철종의 생부이다.
은언군은 정조 때 역적의 죄명을 쓰고 강화에 배형되었다가 순조 때 배소(配所)에서 사사(賜死)의 형을 받았다.
그의 모친도 천주교의 셰례를 받았다 하여 사사를 받았다.
은언군의 3자인 전계대원군은 부모가 사사되고 그 형제들도 죄인으로 죽임을 당하여 고통의 일생을 보냈다.
순조 다음 헌종이 즉위하고 다시 헌종이 승하함에 따라 영조의 혈통이 전혀 없고
오직 전계대원군의 제3자만이 남아 있어 그가 즉위하니 곧 철종이었다.


조선왕실로서는 헌종 철종이 모두 후사를 두지 못한 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였다.
그런데 고종은 원자를 얻었다.매우 기뻐하였다. 경사 중에 경사였다.
고종은 원자의 세자 책봉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안동별궁의 영건을 명하였다.
고종 18년에는 세자빈으로 민태호의 딸이 간택되었으며 이듬해 2월 22일에 안동별궁에서 성대한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세자와 민빈(閔嬪)의 혼례는 왕실의 오랜만의 큰 경사였으며 역대 궁중혼례 중 가장 성대하고 호화스러운 것이었다.
이 후로도 안동별궁은 가례소(嘉禮所)로 이용되었다. 광무 8년 민빈이 황태자비로 봉해지고 얼마 후 별세한다.
윤택영(尹澤榮)의 딸 윤비가 간택되어 순종과 계비 윤씨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안동별궁은 1956년에 해체되어 한 골프장으로 이전되었다. 이제 한국전통문화학교로 복원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