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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스크랩 지리산 산행기(1)-지리산의 문화적 배경
유승 박노동 추천 0 조회 69 12.12.23 21: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리산 산행기(1)-지리산의 문화적 배경 


(1)개요

  지리산은 백두대간 줄기의 남쪽 끝자락에 솟아 있으며, 주봉인 천왕봉(天王峰)은 해발 1,915m로서 남한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고, 지리산은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됐다.

 

  산자락은 경남. 전북, 전남의 3개 도,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남원시, 구례군의 5개 시?군, 15개 읍?면에 걸쳐 있으며, 영?호남 8백여 리, 320km에 광대하게 펼쳐 있어서 그 넓이가 471.8㎢이며, 여의도 면적의 52배이다.

  그리고 서쪽 노고단에서 동쪽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선 상에는 반야봉, 명선봉, 칠선봉, 촛대봉, 연하봉, 제석봉, 하여 1,500m 이상의 준봉이 10여개 이상 버티고 있으면서 그 안에 크고 작은 산줄기가 사방으로 얽혀, 수많은 계곡과 고원을 만들어 하나의 거대한 산국(山國)을 형성하고 있다. 한반도의 좁은 땅덩어리에 이처럼 넓은 산국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이다.

  이처럼 큰 덩치에다가 토심이 깊은 육산이어서 800여종의 동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드넓은 품새로 인하여 아름다운 자연미를 연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지리산 10경을 높이 사고 있다.

                                                  노고단 운해

   1)천왕봉 일출

   2)반야봉 낙조

   3)노고단 운해

   4)벽소령 명월

   5)세석 철쭉

   6)연하 선경

   7)피아골 단풍

   8)칠선계곡

   9)불일폭포

   10)섬진강

 

  이러한 지리산이기에 예로부터 우리나라 5대 명산의 하나라 했으며,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라 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중국에서도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방장산(方丈山)이라 하여 삼신산의 하나라 했으며,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는 동남동녀 500명으로 하여금 해동의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했다는데, 바로 그 삼신산의 하나가 지리산이다.

 

  그리고 신라시대에는 5악 중의 남악(南岳)으로서 국가 수호산의 역할을 담당한 흔적이 노고단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이 산에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혹은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사는 산’이란 뜻의 지리산(智異山)이란 이름이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어왔다.

  즉 신라 진성여왕 1년(887년)에 세워진 하동 쌍계사 앞뜰에 있는 국보 제47호의 진감선사대공탑의 비문에 ‘智異山’란 이름이 나온다. 이 비석의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으로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이다.

                                             진감선사대공탑

 

  헌데 불교계에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곳이 지리산인데, 문수보살이 지혜(智慧)로써 많은 이적(異蹟)을 보인다하여 ‘智異山’이란 명칭이 생겼다고 하며, 또 다르게는,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유래됐는데, 발음으로는 지리(智利), 문자로는 지이(智異)로 쓴다는 것이다 - 여기서 이(異)는 문수(文殊)의 수(殊)와 같은 뜻임.

 

  한편 지리산에는 백두산의 맥이 이곳까지 흘러왔다고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란 별칭이 있으며,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켜 ‘방장(方丈)’이라 하거늘, 지리산은 그런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 산이라 해서 방장산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지리산을 높이 사는 것은 단순히 산이 크고 넓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처럼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할 정도로 갖가지 인간사에 얽혀 있으면서도 함부로 범접치 못할 위엄이 있으면서 자연자원이 풍부하고 자연경관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큰 산치고 자연경관이 빼어나지 않거나, 많은 일화를 담고 있지 않은 산이 있으랴마는 지리산은 다른 산과는 차원이 다르다.

 

  산이 크다고 산국이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듯이 지리산의 품새는 세상사를 보듬는 포용력이 뛰어나다. 오죽하면 어머니의 산이라 했겠으며, 지리산에 들어가면 굶어죽은 일이 없다 했겠는가. 이러하기에 지리산은 자연환경을 뛰어넘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이 산국의 역사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2)지리산 문화

  이처럼 거대한 산국인 지리산이기에 문화적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그 나름의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 봐도 아래와 같이 다양하고 화려하다.


  첫째 지리산은 우리 민족 신앙의 발흥지이다.

  민족 신앙을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한갓 미신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태초에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한 그 순간부터 우리의 민족 신앙은 원시 신앙 형태로 민족 정서의 기초가 돼 왔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민족 신앙이 어떻게 형성돼 왔는가 하는 그 시원의 모습을 천왕봉의 성모사와 백무동에 얽힌 일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천왕봉에는 원래 성모석상을 모시는 성모사(聖母祠)가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옥황상제(玉皇上帝)가 마야부인(摩耶夫人)을 내려 보내 지리산을 수호하라고 명했고, 지리산 산신이 된 마야부인은 신라왕에게 명하여, 자기의 모습을 닮은 석상을 경주 옥석으로 다듬어 천왕봉에 사당을 지어 모시라고 했단다. 그래서 천왕봉에 성모사를 짓고 석상을 모시게 됐다고 한다.

                                             성모상(복제품)

 

  그런데 일제 때 왜인들이 이 성모상을 두 동강 내어 어디론가 숨겨버렸다. 민족 신앙의 대상을 말살하려는 야만적인 행위에서 비롯된 짓이었다. 그런데 1990년 대 후반 천왕봉 남쪽 자락의 중산리 뒤편 천왕사라는 작은 절의 스님이 꿈에 계시를 받고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석상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중산리 주민들은 이 석상을 도로 천왕봉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을 했고, 천왕사 측은 내 놓을 수 없다고 하여, 석상 소유권을 놓고 법정 공방까지 벌이게 된 결과 천왕사 측이 승소를 하여, 현재 이 석상은 두 동간 난 몸체를 봉합하여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한편 무녀들은 이 천왕봉의 성모를 자기네의 원조로 받들어 성모상을 참배하거나 치성을 드리기 위해 항시 백무동 골짜기에 100여명의 무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백무동(百巫洞)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것인데, 또 다른 전설은 천왕봉의 성모가 남자를 끌어들여 100명의 무녀를 낳아 백무동에 내려 보냈던 바 이들 무녀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우리나라 무맥(巫脈)을 퍼뜨렸고, 따라서 천왕봉 성모가 우리나라 무맥의 근원이며, 백무동이란 지명도 그래서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백무동의 지명이 엉뚱하게도 백무동(白武洞)이란 아무 의미 없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  

                                                노마님

 

  그리고 옛날 노고단(老姑壇)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이자 이곳 지리산의 신령인 선도성모(仙挑聖母)를 모시는 남악사(南岳祠)가 있었다. 그래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마님’이란 뜻의 노고(老姑)와 신라시대 중사(中祀;제사의 등급)를 지내던 신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노고단이라 하게 됐다.

                                             남악제

 

  그리하여 지금도 노고단의 민속신앙 맥이 구례 지방에 남악사와 남악제로 전승되고 있다. 즉 1969년에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 일주문 오른편에 정면 3칸, 측면 2칸에 10여 평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인 남악사를 건립하여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됐다.

  그리고 남악제는 해마다 4월 20일 경 곡우절을 기해 구례군민의 날에 전야제와 농악을 비롯한 궁도, 씨름 등 각종 민속행사와 함께 제례를 통해 지리산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둘째 지리산을 중심으로 찬란한 불교문화가 형성됐다.

  산의 남쪽 자락엔 화엄사와 천은사가 있고, 북쪽 자락엔 실상사와 벽송사가 있으며, 동남쪽 자락엔 쌍계사, 연곡사가 있고, 동쪽 자락엔 대원사가 있다. 그리고 천왕봉 바로 동남쪽 아래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450m)에 위치한 법계사가 있다.

                                              화엄사

 

  헌데 이들 고찰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특징과 뛰어난 종교적 영역이 있고, 우리나라 불교문화 발전에 큰 몫을 담당해 왔으며, 훌륭한 문화재들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사찰들이 있어서 그에 따른 사하촌(寺下村)이 생기고, 민중불교가 번성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과 전통이 있어서 고승대덕들이 지리산 자락을 찾아들었고, 최근에는 산청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문으로 유명한 성철(性澈) 종정이 배출되기도 했으며, 성철 종정 입멸 후에는 그의 생가에 겁외사(劫外寺)라는 사찰이 들어섰다.


  셋째 지리산 자락에 확고한 이념을 지닌 사림문화(士林文化)가 형성됐다.

  조선 초기 지리산 자락의 산청지방에 김종직(金宗直)이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후진을 양성했는가 하면, 함양 출신인 그의 제자 정여창(鄭汝昌) 역시 이 지방에 사림의 뿌리를 심어놓았다.

                                               덕천서원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조선 최고의 처사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산청군 단성면에서 의(義)를 주제로 한 사림문화를 키웠다. 이에 따라 인근지역에는 의를 지키는 지조 높은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어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한 남명의 제자들이 의병의 주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남원에서는 정유재란 당시 병사와 주민이 하나가 돼 끝까지 왜군에 항전하다가 순절한 무덤(만인의총)이 있으며, 한말에는 매천야록(梅泉野錄)를 썼고, 양심의 붓으로 알려진 구례의 황현(黃玹)은 한일합방에 통분한 나머지 자결을 했다.

 

  한편 이들 사림을 중심으로 남계서원, 덕천서원, 도천서원, 배산서원, 옥산서원 등 많은 서원이 세워져 권학분위기가 조성됐고, 또 이들에 의해 정자(亭子) 문화가 번성하여, 산청의 거연정, 동호정, 농월정, 함양의 사운정 하동의 섬호정, 구례의 운흥정 등 많은 정자가 지어졌으며, 따라서 선비들의 풍류문화가 꽃 피기도 했다.


  넷째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도가문화가 형성됐다.

  오늘날에도 지리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청학동(靑鶴洞)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돼 있듯이 예로부터 지리산에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많은 도인들이 찾아 들어와서 지리산이 도학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 맥이 오늘에까지 이어져서 함양 출신의 명리학(命理學) 대가 제산 박재현(霽山 朴宰顯)이 세운 도학 도량 덕운정사(德雲精舍)가 함양에 있어서, 하동의 청학동과 더불어 도학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비단 도학자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자기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은자나 구도자들이 넓고 깊은 지리산 품속에 숨어 들어와서 저마다 자기 길을 개척하고 있으니 지리산 주변엔 지금도 2,000여명의 낭인들이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역시 지리산 낭인의 한 사람인 시인 이원규는 그의 <지리산 편지>에서 “행여 지리산에 오시거든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길 바랍니다. 다만 등산(登山)은 말고 입산(入山)하러 오시길…”이라 했다. 

 

  등산은 인간의 정복욕과 교만의 길이지만 입산은 자연과 한 몸이 되는 상생(相生)의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 또한 도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명산론(明山論)에 이르기를 ‘산이 비옥하면 사람이 살이 찌고, 산이 척박하면 사람이 굶주리고, 산이 맑으면 사람이 깨끗하고, 산이 부서지면 사람들에게 불행이 생기고, 산이 멈추어 기가 모이면 사람들이 모인다.’라고 했다.

  아마 그래서 숱한 사람들이 지리산에 모여들었던 것이고, 깨끗한 기가 모이는 곳이니 뜻이 깊고 지조가 높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을 것이며, 그래서 지금도 가슴속에 나름의 뜻을 숨긴 많은 도학 지망생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는 것일 것이다.

 

  다섯째 지리산은 우리나라 소리문화의 발원지로 꼽히고 있다.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許黃玉)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시집 올 때 그의 오빠 보옥선사(寶玉禪師; 일명 長遊和尙)가 허 황후를 따라와서 지금의 화개골 법왕리 칠불사의 전신인 운상원(雲上院)에서 허황후의 일곱 아들을 성불시켰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것보다 남방불교가 먼저 김해(가야국) 지방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칠불사

 

  그건 그렇고 그 보옥선사가 아유타국에서 건너올 때 피리를 가져와서 운상원에서 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리산 자락의 운상원이 우리나라 국악의 발상지라는 주장이 있다. 

  반야봉 자락 토끼봉(1,534m) 아래 해발 800미터 지점에 위치한 칠불사는 가야국의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신라시대 만든 아(亞)자 방의 이중온돌집이 유명하다.

                                                   아자방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때 담공(曇空) 선사가 이 곳 칠불사 벽안당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그 방 모양이 아(亞)자와 같아 아자방이라 불렀다. 이 아자방은 한번 불을 넣으면 상하 온돌과 벽면까지 49일 동안 따뜻했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사람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거문고 배우기 50년에 새로 30곡을 지어서 명득(命得)에게 전하고, 명득은 다시 귀금(貴金)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귀금 또한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아니하므로 신라왕은 윤흥(允興)을 남원태수로 임명하여 당시 지리산 주변에 흥행했던 거문고와 그 곡을 전수 받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쌍계사에 남아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의 주인공인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는 우리나라 범패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범패를 가르쳤던 팔영루(八詠樓)가 지금도 쌍계사 경내에 보존돼 있다. 그리하여 진감선사에 의해 이룩된 불교음악은 이후 발전을 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가곡, 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의 3대 성악곡이 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으므로 해서 오늘날 남원지방이 동편제의 고향이 돼 있고, 남원에는 남원국립예술고등학교와 남원국립민속국악원이 있어 판소리와 국악의 보급기지가 돼 있다.


  여섯째 지리산 자락은 우리나라 다(茶) 문화의 발상지이다.

  신라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던 김대렴(金大廉)이 흥덕왕 3년(828년)에 차 씨앗을 가져와서 쌍계사 부근의 화개동천에 시배했다고 하며, 그 이후 쌍계사의 진감선사가 그 일대에 차밭을 조성하여 널리 퍼지게 했다고 한다.

                                                 칠불사 차밭

 

  그리고 칠불사도 차 문화 보급에 힘을 써서 지리산 발효차의 산실이 돼 선승들이 차를 만들어 마셨으며, 현재에도 칠불사 부근에 차밭이 조성돼 있다. 조선 후기에는 다승으로 유명한 초의(艸衣) 선사가 칠불사에 머물며 차를 만들었고, 1828년 아자방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차 문화에 대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했다. 그리하여 그 10여년 후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 이를 토대로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했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 현재 칠불사 일주문 전방 50여m 지점에 초의선사 다신탑비가 조성돼 있다. 이런 배경이 있어서 이 지방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차와 다기 등 차 문화가 발전하게 됐고, 지리산 자락엔 오늘날에도 야생 차 나무가 흔하게 퍼져 있으며, 차 시배지 부근에는 천년이 넘는 야생 차나무가 있어서 아직도 차 잎 새순을 딴다고 한다.

 

  이리하여 하동에서는 해마다 ‘하동 야생차 문화축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이때를 기하여 쌍계사에서는 <진감 초의선사 다맥 전수 및 108헌다례 법회>가 열리고 있다. 이처럼 지리산 자락은 우리나라 차 문화의 발상지인 것이다.


  일곱째 지리산 동쪽 자락은 목화의 시배지(始培地)이다.

  고려 말 문익점(文益漸)이 원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통에 숨겨온 목화씨를 처음 시배한 곳이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이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鄭天翼)과 더불어 3년 동안 고생 끝에 목화 재배에 성공을 하여 이를 전국에 퍼뜨리는 한편 목화에서 실을 빼는 데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구를 제작 보급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지리산 자락에서 시작된 목화 재배가 우리나라 복식문화에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게 됐으며, 지금의 ‘면화 시배 사적비’는 문익점 선생의 면화 시배를 기리기 위하여 1965년 제막했다.


  여덟째 지리산 주변에서 우리나라 한의학이 정립됐다.

  산청 땅에서 의성 허준(許浚)이 나타나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저술함으로써 우리나라 한의학이 정립됐고, 그 이후 명의 유의태(柳義泰) 등이 나와 한의학을 더욱 발전시켜 지리산이 한의학 발전의 모태가 됐다. 이것 역시 지리산이라는 넓은 품속에 많은 약초가 채취되거나 재배됨으로써 한의학 발전을 뒷받침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허준에 관한 TV 연속극에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으로 나왔었는데, 이것은 이름이 비슷한 한의사 유이태(柳以泰)가 유의태로 잘못 등장한 것이거나 가공의 인물로 보인다. 산청 출신의 명의 유의태는 분명 허준 이후에 나타난 인물이다.


  아홉째 지리산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생산적 기여를 했다. 

 

  지리산 자락에서는 지리산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밑천으로 하여 여러 종류의 목제품들이 생산됐고, 특히 남원지방의 목기 제작과 목공예의 발전이 두드러져서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여 전국 제일의 목공예 제작지가 돼 있다. 그 외에도 숯과 영농 분야, 그리고 목축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리산은 생산적 기여를 해왔다.


  열째 지리산 주변은 군사전략 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고소산성

 

  삼한시대에는 마한과 진한,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가야, 혹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국경 싸움의 대상지가 됐기에 지리산 주변에는 삼국시대의 성터가 산재해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퇴치하는 데에 중요한 요충이 됐기에 운봉에는 ‘황산대첩비’가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도 지리산은 이들을 퇴치하는 데에 중요한 거점이 됐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있어서 지금도 남원의 교룡산성, 함양의 사근산성, 하동 악양의 고소산성(姑蘇山城) 등 여러 유적이 남아있다.


  열한째 지리산은 민중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이 여러 분야에 걸쳐 생산적 기여를 하여 산국의 문화 발전의 모태가 됐지마는 다른 일면에는 쫓기거나 상처 입은 민초들이 숨어드는 마지막 은신처이기도 했고, 민중이 마지막 저항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골이 깊은 산이기에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 무서운 박해와 학살이 은밀히 자행된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지구 전적비(뱀사골 입구)

 

  즉 한말 진주농민운동이나 동학혁명을 일으킨 민중의 마지막 항전지가 지리산이었고, 일제 때는 일제의 징병이나 만행을 피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리산에 숨어들었으며, 해방 후 빨치산의 마지막 거점 역시 지리산이었다. 이러한 은신이나 저항이 가능했던 것도 지리산에 의지하여 삶을 지탱하고, 전략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창 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거창군 신원면)

 

  그런가 하면 원통하게도 지리산 깊숙한 골짜기에서 군경에 의해 죄 없는 양민이 학살당하는 만행이 저질러지기도 했다. 즉 1951년 2월 산청군 시천면 외공마을에 군용 트럭을 앞세운 버스 11대(혹은 14대)에 가득 양민을 싣고 와서 외공마을 뒤 소정골에서 모두 학살했다. 정원 40명만 잡아도 400명, 최대 700-800명을 추산할 수 있는 인원이다.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이유로 살해 됐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라는 것만 전할 뿐이다.

 

                                 함양 산청 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산청군 금서면)

 

  그런데 위의 사건은 외지인을 지리산 자락에 데리고 와서 학살한 사건이지마는 같은 시기 함양, 산청, 거창 지역에서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공비들과 내통한 통비분자라고 덮어씌워 수많은 현지 주민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소위 ‘거창 산청 함양 양민학살사건’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어린이, 노약자, 부녀자를 불문하고 주민을 몰살시킨 만행이 우리 국군에 의해 저질러졌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통탄스런 사건이었다.

 

  열두째 지리산을 중심으로 지리산 문학이라는 영역이 있게 됐다.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소재가 되고 테마가 돼, 우리 현대문학사에 시 소설 등 ‘지리산 문학’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형성됐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혹은 지리산을 주제로 한 명작들이 생산됐다.

 

  예를 들면, 우리 현대문학사에 불휴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하여,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병주의 ‘지리산’, 김주영의 ‘천둥소리’, 최명희의 ‘혼불’, 문순태의 ‘피아골’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창작물이 쏟아졌는가 하면, 지리산을 주제로 한 많은 시들이 씌어졌으며, 실화 수기로 유명한 이태의 ‘남부군’이 남겨지기도 했다.

  그러했기에 지금도 경남, 전북, 전남 등 지리산 주변의 문인들이 지리산을 무대로 작품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으며, 이들에 의한 ‘지리산 섬진강 문학연대’ 혹은  ‘지리산 문학회’에서는 오래도록 동인지를 발간해 오고 있다.  

                                           박경리 문학관

 

  그런가 하면, ‘지리산 문학기행’이라는 이벤트가 있어서 해마다 많은 문인 혹은 문학 지망생들이 지리산 주변을 찾아든다.

  이처럼 지리산은 현대문학의 큰 소재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창작의 산실이 되기도 하고, 창작의욕을 북돋우기도 하는 문학 예술 발전의 획기적 동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하므로 지리산, 이 산국 속에는 높은 봉우리의 빼어난 기상과 유현한 계곡의 한없는 포용력이 있는가 하면, 넓은 품새에서 나오는 가없는 사랑과 용기가 있어서 종교적으로,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그리고 실제 삶과 생활상에 있어서 다양한 자양을 제공하고 발전해 왔다.

                                             섬진강

 

  말하자면 지리산은 5천년을 이어온 한민족의 역사 발전과 함께 해왔고, 목말랐던 민초들의 아픔과 한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이며, 온갖 상처 입은 지식인과 민초들을 포근히 감싸준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흔히 어머니의 산, 민족의 영산이라 일컬어지며, 김지하 시인도 아마 이런 지리산의 의미를 전제로 하여 그의 시 ‘지리산’을 읊었을 것이다.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전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짓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짖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지리산이 이러하기에 설문조사를 하면, 학생들이 제일 가보고 싶은 산의 제1순위가 지리산이라고 한다. 그것은 여러 문학작품을 통하여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마는 지리산에는 민족정기가 흐르고, 신비로움과 민족의 한이 스며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지리산은 단순한 산행의 대상만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체험을 할 수 있는 문화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글쓴이 - 둘 산악회    아미산(이 덕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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