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와 최항
김민수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1. 신문자 발상과 최항의 간탁
인위적인 훈민정음의 창제가 완전히 성공한 것은 흔찮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 언어의 정확한 음운분석과 그 음운을 식별할 자형의 창조가 차착 없이 완성되어 있어야 가능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사업이 어떤 계기로 어떻게 달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명문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 언급된 것은 기이하게도 “三綱行實”의 편찬이 그 근원이었다. 이제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옛 문헌을 찾고, 색출한 자료에 따라 그 역사적 사실을 탐색해 보려고 한다.
1) 刑曹啓, 晋州人金禾, 殺其父, 律該凌遲處死, 從之. 旣而嘆曰, 婦之殺夫, 奴之殺主, 容或有之. 今乃有殺夫者, 此必予, 否德所致也. 春秋館, ‘世宗實錄’ 권 41, 10년(1428) 9월 丙子.
御經筵, 上, 嘗聞晋州人, 金禾化殺父之事, 矍然失色, 乃至自責. 遂召群臣, (중략) 判府事卞季良曰, 請廣布 ‘孝行錄’等書. 使閭巷小民, 尋常讀誦, 使之駸駸然. 入於孝悌禮義之場. 至是, 上, 謂直提學楔循曰, 今俗薄惡, 至有子不子者, 思俗刊行 ‘孝行錄’, 以曉愚民, (중략) 亦該裒集, 撰成一書, 集賢殿, 其主之, 위 권 42, 10년(1428) 10월 辛巳.
2) 集賢殿新撰 ‘三綱行實’以進序曰, (중략) 宣德辛亥夏, 我主上殿下, 命近臣若曰, (중략) 予欲使取其特異者, 作爲圖讚, 頒諸中外. 庻幾愚婦愚夫, 皆得易以觀感而興起 則亦化民成俗之一道也. 乃命集賢殿副提學臣楔循, 掌編摩之事, 於是自中國以至我東方. 古今書傳所載. 靡不蒐閱. 得孝子忠臣烈女之卓然可述者各百有十人, 圖形於前, 紀實於後, 而幷系以詩. 위 권 56, 14년(1432) 6월 丙申. ※宣德 辛亥(세종 13년 1431)
3) 上曰, (중략) 肆予命儒臣編集古今, 幷付圖形, 名曰 ‘三綱行實’, 俾鋟子榟, 廣布中外. 思欲擇其有學識者, 常加訓導. 誘掖獎勵, 使愚夫愚婦, 皆有所知識, 以盡其道何如. 위 권 64, 16년(1434) 4월 甲戌.
頒賜 ‘三綱行實’于宗親及臣僚, 又賜諸道 위 권 66, 16년(1434) 11월 戊戌. ※‘三綱行實’(‘三綱行實圖’ 한문본 3권 3책. 1434. 음 11. 25. 반사)
세종대왕은 1428년 진주 살부 사건에 충격을 받고, 卞季良 판부사의 제안에 따라 “효행록”을 엮어 널리 펴기로 했다. 대왕은 1431년에 우민을 깨우치기 위하여 중국의 예에 따라 “三綱行實”에 그림을 넣는 방안을 명하고, 1434년에는 책을 널리 펴되 문맹에게 성실히 가르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 이면에 이두나 그림보다 낫고 쉬운 신문자가 아쉬웠을 것은 분명했다. 과연 당년에 인재를 간탁하기 시작하여 궁중에서 비공개로 진행한 신문자 훈민정음이 드디어 1443년에 탄생하는 개가를 올렸다.
새국어생활 14권 3호(2004년)
10월의 문화인물 최항】
훈민정음 창제와 최항
김민수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1. 신문자 발상과 최항의 간탁
인위적인 훈민정음의 창제가 완전히 성공한 것은 흔찮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 언어의 정확한 음운분석과 그 음운을 식별할 자형의 창조가 차착 없이 완성되어 있어야 가능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사업이 어떤 계기로 어떻게 달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명문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 언급된 것은 기이하게도 “三綱行實”의 편찬이 그 근원이었다. 이제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옛 문헌을 찾고, 색출한 자료에 따라 그 역사적 사실을 탐색해 보려고 한다.
1) 刑曹啓, 晋州人金禾, 殺其父, 律該凌遲處死, 從之. 旣而嘆曰, 婦之殺夫, 奴之殺主, 容或有之. 今乃有殺夫者, 此必予, 否德所致也. 春秋館, ‘世宗實錄’ 권 41, 10년(1428) 9월 丙子.
御經筵, 上, 嘗聞晋州人, 金禾化殺父之事, 矍然失色, 乃至自責. 遂召群臣, (중략) 判府事卞季良曰, 請廣布 ‘孝行錄’等書. 使閭巷小民, 尋常讀誦, 使之駸駸然. 入於孝悌禮義之場. 至是, 上, 謂直提學楔循曰, 今俗薄惡, 至有子不子者, 思俗刊行 ‘孝行錄’, 以曉愚民, (중략) 亦該裒集, 撰成一書, 集賢殿, 其主之, 위 권 42, 10년(1428) 10월 辛巳.
2) 集賢殿新撰 ‘三綱行實’以進序曰, (중략) 宣德辛亥夏, 我主上殿下, 命近臣若曰, (중략) 予欲使取其特異者, 作爲圖讚, 頒諸中外. 庻幾愚婦愚夫, 皆得易以觀感而興起 則亦化民成俗之一道也. 乃命集賢殿副提學臣楔循, 掌編摩之事, 於是自中國以至我東方. 古今書傳所載. 靡不蒐閱. 得孝子忠臣烈女之卓然可述者各百有十人, 圖形於前, 紀實於後, 而幷系以詩. 위 권 56, 14년(1432) 6월 丙申. ※宣德 辛亥(세종 13년 1431)
3) 上曰, (중략) 肆予命儒臣編集古今, 幷付圖形, 名曰 ‘三綱行實’, 俾鋟子榟, 廣布中外. 思欲擇其有學識者, 常加訓導. 誘掖獎勵, 使愚夫愚婦, 皆有所知識, 以盡其道何如. 위 권 64, 16년(1434) 4월 甲戌.
頒賜 ‘三綱行實’于宗親及臣僚, 又賜諸道 위 권 66, 16년(1434) 11월 戊戌. ※‘三綱行實’(‘三綱行實圖’ 한문본 3권 3책. 1434. 음 11. 25. 반사)
세종대왕은 1428년 진주 살부 사건에 충격을 받고, 卞季良 판부사의 제안에 따라 “효행록”을 엮어 널리 펴기로 했다. 대왕은 1431년에 우민을 깨우치기 위하여 중국의 예에 따라 “三綱行實”에 그림을 넣는 방안을 명하고, 1434년에는 책을 널리 펴되 문맹에게 성실히 가르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 이면에 이두나 그림보다 낫고 쉬운 신문자가 아쉬웠을 것은 분명했다. 과연 당년에 인재를 간탁하기 시작하여 궁중에서 비공개로 진행한 신문자 훈민정음이 드디어 1443년에 탄생하는 개가를 올렸다.
4) (전략) 年十八, 連中乙巳生員進士兩科, 中壬子文科. (중략) 宣德甲寅, 英陵臨雍策士, 攫公第一, 授宣敎郞, 集賢殿副修撰, 知製敎, 經筵司經. 與修 ‘資治綱目’, ‘通鑑訓義’. 止齋權文景公名踶深器之, 以姊子妻之. (중략) 英陵初制諺文, 神思睿智, 高出百王. 集賢諸儒, 合辭陳其不可, 至有抗疏極論者, 英陵命公及申文忠公叔舟等掌其事. 作 ‘訓民正音’, ‘東國正韻’等書. 吾東方語音始正, 雖規模措置皆禀睿旨, 而公之協贊亦多. 崔恒, ‘太虛亭文集’ 권 2, 徐居正, 崔文靖公碑銘. ※乙巳(세종 7년 1425년), 壬子(세종 14년 1432), 宣德甲寅(세종 16년 1434), 英陵(세종대왕), 姊子(徐居正 생질)
5) 대왕은 세종 16년에 인재를 뽑으려고 謁聖試를 공포하고, 시험 전날 낮잠이 들었다. 과장인 성균관 대성전 서편 잣나무에 큰 황룡이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내관을 보냈더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에 기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드디어 시험이 끝나고, 대왕이 만난 장원급제자 중에 황룡으로 현몽한 선비가 바로 崔恒이었고, 그는 집현전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이 잣나무를 壯元栢이라 하고, 과거 볼 선비가 그 밑에서 낮잠 자는 풍습이 생겼다. (요약) 柳夢寅, ‘於于野談’(1621) 권 2. 최항 ※黃龍(옛 중국 黃河 龍馬의 河圖, 洛水 神龍의 洛書가 문자의 始原인 것처럼 신문자 창조의 조짐이 됨).※崔恒(세종 14년 壬子 문과 급제, 세종 16년 甲寅 謁聖文科 급제는 박팽년 1417~56)
6) 태허정 최항(1409~74)은 일찍 1432년 문과에 급제하고, 1434년 세종대왕에 의해 집현전 부수찬으로 간탁되었다. 따라서 위 4) 그의 비명에 비추어 위 5) “황룡현몽과 1434년 알성장원” 일화는 야담에 불과하다. 근 2백년 후 유몽인(1559~1623)에 의하여 서술된 이 설화에는 황룡이 하늘에서 내린 임금의 뜻을 받들고 주관하여 완성한다는 모티브가 엿보인다. 태허정이 중추가 되어 성업을 완수한 사실을 설화화한 만큼, 이치상 첫째로 친탁된 1434년과 당년 알성급제를 합치되게 만든 것이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 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위 권 102, 세종 25년(1443), 12월 庚戌. ※親制(帝王所制), 古篆(周秦代 漢字體. 篆書)
7) (전략) 世宗創制諺文, 開局禁中, 親揀名儒, 著爲 ‘解例’, 使人而曉, 公易預選, 日賜晋接, 親授規模, 嘗囑公於文宗曰, 諺文諸儒才兼經濟者唯叔舟, 申叔舟, ‘保閒齋集’(1645) 권 1 권두, 任元濬序. ※開局禁中(1444년 議事廳, 세종조 儒臣分局 등) 經濟(經世濟民)
8) 是月, ‘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중략) 禮曹判書鄭麟趾序曰, (생략) 위 권 113, 28년(1446) 9월 甲午. ※成(脫稿完成), 御製(帝王所製) (전략)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 ‘例義’而示之, 名曰訓民正音. (중략) 遂命詳加解釋, 以喩諸人. 於是, 臣與集賢殿應敎臣崔恒, 副校理臣朴彭年, 臣申叔舟, 修撰臣成三問, 敦寧府注簿臣姜希顔, 行集賢殿副修撰臣李塏, 臣李善老等, 謹作諸解及例, 以敍其楩槪. 庻使觀者, 不師而自悟. 若其淵源精義之妙, 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 (중략) 正統十二年九月上澣, 資憲大夫禮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臣鄭麟趾拜手稽首謹書. 鄭麟趾 등, ‘訓民正音’ (1446), 鄭麟趾 ‘訓民正音(解例)’序. ※癸亥冬(세종 25년(1443) 12월), 不師而自悟(자습서), 正統十二年(세종 28년(1446) 음 9월 10일)
태허정이 간탁된 지 9년여 만에 위 6)과 같이 훈민정음 28자의 창제에 성공했는데, 주목되는 것은 간탁될 적에 임금의 학습장인 경연청의 관직 司經을 겸직했던 사실이다. 그것은 임금에게 강의하고 논평하던 직함이나, 궁중의 비공개작업을 위한 관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그 성과의 진면목은 8) 자습서 “訓民正音”에 밝혀졌는데, 이 작업은 어명의 책임자 鄭麟趾 판서 아래, 26~27세 학사를 거느린 35세의 태허정이 주관자였다. 그는 당시 나이로나 벼슬 품계로나 차석이었기 때문이다.
2. 세종대왕 훈민정음 친제의 전말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다음 9) 서언에 밝힌 대로 상민이 쉽게 배워서 사용하라는 문자였다. 그래서 상층 양반의 한문, 중인의 이두에, 또 하나 하층 상민에게 신문자를 부여함으로써 당시 이중체계인 國字를 다양한 삼중체계로 바꾸었다. 이 체계는 개화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오늘날의 한글전용이 국자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 정신이라고 한다면, 그 사실을 왜곡한 망발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오히려 신하에게 학문의 길은 경서 한문을 기본으로 함에 있다고 10)과 같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9) (전략)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而習, 便於日用耳. 위 권 113, 28년(1443) 9월 甲午. ※御製(1443. 12)
10) 視事, 判府事卞季良啓, 上至誠事大, 獲海靑, 輒獻. 위 권42, 10년(1428) 11월 丁卯. 上謂禮曹判書申商曰, 近來使臣, 無歲不來. 中國與本朝, 合爲一家, 情親至矣. 然凡人之交, 親則必踈, 理之自然. 今待使臣, 不以相親爲恃, 蓋修禮敬待之可也. 위 권 53, 13년(1431) 7월 丁丑. ※合爲一家(불가분의 동맹국).
御製經筵, (중략) 上曰, 此吾所以爲學者患也. 四書五經百家諸史, 安得一樣精熟.. 今學者, 欲遍習四書五經, 其無所得明矣. 必欲精熟貫穿, 莫如專經之學. 위 권 59, 15년(1433) 2월 병술. ※專經之學(經學, 儒學) (전략) 上, 命集賢殿副校理李季甸, 金汶等曰, 凡爲學之道, 經學爲本, 固所當先, 然只治經學, 而不通乎史. 위 권 74, 18년(1436) 7월 壬戌. ※經學(四書)
대왕 스스로 신하에게 “至誠事大”나 “經學爲本”을 강조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에 거슬리는 신문자 제정은 국왕이라도 쉽게 결행할 사업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러한 사업을 단행한 것은 위 1) 그 원인, 2) 근인에 나타났듯 常民 敎化의 의지가 워낙 확고했기 때문이며, 궁중에 연구실을 두어 비공개로 감행한 것은 우직한 정면충돌을 우회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래서 11)과 같이 신문자가 공개되자, 4일 만에 아니나 다를까 집현전 부제학 崔萬理 등이 상소한 반대로, 한 곤욕을 치렀다.
11) 命集賢殿校理崔恒, 副校理朴彭年, 副修撰申叔舟, 李善老, 李塏, 敦寧府注簿姜希顔等, 指議事廳, 以諺文譯 ‘韻會’ . 東宮與晋陽大君瑈, 安平大君瑢, 監掌其事. 皆稟睿斷, 賞賜稠重, 供億優厚矣. 위 권 103, 26년(1444) 2월 丙申(16일). ※‘韻會’(元, 黃公紹, ‘古今韻會’(1292), 축약본 元 熊忠, ‘古今韻會擧要’(1297). 세종 16년(1434) 그 축약본 국내판. ‘東國正韻’ 저본)
12) 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臣等伏覩, 諺文制作, (중략) 一 愧於事大慕華, 一 能以諺文而施行吏事, 不知聖賢之文字, 一 古人己成之韻成, 附會無稽之諺文, 一 諺文縱曰有益, 無一利於治道. (이상 발췌)
上覽疏, 謂萬理等曰, (중략) 今之諺文亦不爲便民乎. (중략) 若非予正其韻書, 伊誰正之. (중략) 遂下副提學崔萬理, 直提學辛碩祖, (중략) 于義禁府, 翌日命釋之. 위 권 103, 26년 2월 庚子(20일). ※事大慕華(불가분 동맹), 正其韻書(표준 한자음 사정, ‘東國正韻’ 편운 간행)
그런데 그 상소에 의한 군신 간의 논쟁은 위 12)와 같이 반대파의 판정패를 면치 못했으며, 대왕의 관대한 처치는 반대파의 입지조차 잃게 만들었다. 예상된 파란을 겪고, 후속 사업으로 8) 1446년 “訓民正音(解例)”를 위시해, 다음 13) 1448년 한자음 표기, 14) 1455년 한음 표기 등이 완성되었다. 특히 15) 1447년 “龍飛御天歌”는 윤리에 앞서 국권의 초석을 다지고, 16) 1447년 “釋譜詳節”과 “月印千江之曲”은 왕후의 명복을 위한 편찬이었지만 건국 26년 만에 등극한 대왕의 왕실 보위책이었다.
13) 是月, ‘東國正韻’成, 凡六卷. 命刊行. 集賢殿應敎申叔舟奉敎序曰, (중략) 乃因古人編韻定母, 可倂者倂之, 可分者分之. 一倂一分, 一聲一韻, 皆稟宸斷, 而亦各有考據. 於是調以四聲. 定爲九十韻, 二十三母. 以御製訓民正音, 定其音. 위 권 117, 29년(1447) 9월 戊午.
14) 譴集賢殿副修撰申叔舟, 成均注簿成三問, 行司勇孫壽山于遼東. 質問韻書. 위 권 107, 27년(1445) 정월 辛巳.
(전략) 首命譯 ‘洪武正韻’ , (중략) 凡謄十餘藁, 辛勤反覆, 竟八載之久.而向之正無缺者. 似益無疑. (중략) 且以世宗所定 ‘四聲通攷’, 別附之頭面, 復著凡例, 爲之指南. (중략) 景泰六年仲春旣望. 申叔舟, ‘保閒齋集’ 권 15. ‘洪武正韻譯訓’序. ※景泰六年(단종 3년(1455) 음 2월 16일)
15) (전략) 我殿下覽而嘉之. 賜名曰 ‘龍飛御天歌’. 惟慮所述事蹟, 雖載在史編, 而人難遍閱. 遂命臣及守集賢殿校理臣朴彭年, 守敦寧府判官臣姜希顔, 集賢殿副校理臣申叔舟, 守副校理臣李賢老, 修撰臣成三問, 臣李塏, 吏曹佐郞臣辛永孫等, 就加註解. 於是粗述其用事之本末, 復爲音訓, 以便觀覽共一十卷. (중략) 正統十二年二月日. ‘龍飛御天歌’(1447) 권말, 崔恒跋.
16) (전략) 近間애 追薦 因 이저긔 여러 經에 여내야 各別히 그를 라 일훔지허 로 ‘釋譜詳節’이라 고 (중략) 正音으로 곧 因야 더 飜譯야 사기노니 사마다 수 아라 三寶애 나가 븓긧고 라노라 正統十二年七月二十五日에 首陽君 諱 序노라. ‘月印釋譜’(1459) 권두 ‘釋譜詳節’序, 首陽君(1417~68, 재위 1455~68. 세조)
(전략) 녯 丙寅年에 이셔 昭憲王后ㅣ 榮養 리 리시 셜 슬매 이셔 바아디 몯다니 世宗이 날려 니샤 追薦이 轉經 니 업스니 네 釋譜 라 翻譯미 맛당니라 야시 (중략) 進上 주오시고 곧 讚頌 지샤 일후믈 月印千江이라 시니 (중략) 天順三年己卯七月七日序. 위 권두 御製月印釋譜序. ※丙寅 (세종 28년 1446) 昭憲王后(世宗王妃 沈氏 1395~1446), 月印千江(世宗,‘月印千江之曲’ 3권), 天順三年(세조 5년 1459)
신문자 정착을 향한 시책도 소홀치 않았다. 이미 언급한 “龍歌”, 창작, “釋譜” 표현에 이어 다음과 같이 죄상 기록, 시험 부과 등 갖가지 방안으로 시행했다. 특히 의무적인 과거에 부과한 것은 상하층 소통책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인위적인 신문자가 이런 적극적 시책 없이 쉽게 정착하리라고 생각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대왕은 진상한 “龍歌”를 보고 기뻐했는데, 그 기사를 읽으며, 신문자의 신기한 효용, 국초의 국권 정착, 얼마나 황홀했겠는지, 그 모습 상상되고도 남는다.
17) 上, 數臺諫之罪, 以諺文書之, 命宦官金得祥, 示諸義禁府承政院. 위 권 114, 세종 28년(1446) 10월 甲辰.
18) 傳旨吏曹, 今後吏科及吏典取才時, 訓民正音, 竝令試取. 雖不通義理, 能合字者, 取之. 위 권 114, 28년(1446) 12월 己未.
傳旨吏曹, (중략) 始先試訓民正音, 入格者許試他才. 各司吏典取才者, 竝試訓民正音. 위 권 116, 29년(1447) 4월 辛亥.
19) (전략) 今降‘龍飛御天歌’ 乃爲歌咏祖宗盛德神功而作, 所宜上下通用. 以極稱楊之意, 不可止爲宗廟之用. 與民樂· 致和平·醉豊享等樂, 於公私燕享, 幷許通用, 朝參及拜表箋. 위 권 116, 29년 6월 乙丑.
20) 禮曹啓, 進士試取條件, (중략) 一 ‘東國正韻’, 旣己參酌古今韻書定之. 於用韻, 無所防礙, 乞如 ‘禮部韻’略出注解, 令擧子, 用以押韻. (중략) 從之. ‘文宗實錄’ 권 13, 2년(1452) 4월 戊辰.
議政府據禮曹呈啓, 曾奉敎旨, 於科擧, 用‘東國正韻’ , 然時未印頒, 請依舊用 ‘禮部韻’ . (중략) 皆用之. ‘端宗實錄’ 권4, 원년(1452) 12월 壬子.
21) 禮曹啓, ‘訓民正音’, 先王御製之書, ‘東國正韻’‘洪武正韻’ , 皆先王撰定之書. 吏文又切於事大. 請自今, 文科初場, 試講三書, 依四書五經例給分. (중략) 從之. ‘世祖實錄’ 권 20, 6년(1460) 6월 癸卯. 권 21, 세조 6년(1460) 9월 庚寅.
禮曹啓, 在先科擧時, 只用‘禮部韻’ , 請自今兼用‘洪武正韻’ . 譯科, 並試‘童子習’ . 從之. 위 권 28, 세조8년(1462) 6월 癸酉.
요컨대, 세종대왕이 친제한 신문자 훈민정음은 하층 상민에게 부여한 쉬운 문자였다. 문맹이어서 그림으로 교화하려다 착상한 신문자는 당시 한자의 보조적 표음문자였고, 오늘날 생각과 달리 내밀하게 창안하여 9년 만에 성공했다. 신문자에 착상했을 1434년에 첫째로 간탁된 26세의 崔恒을 위시한 선비의 협찬으로 완성되어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즉 1443년 훈민정음 창제와 1446년 “訓民正音” 편찬, 1447년 “龍歌” 창작과 “東國正韻” 편운 등에 중추가 되어서 어명을 완수해 낸 분은 崔恒이었다.
3. 친제의 경위 및 태허정의 공적
훈민정음 창제는 이상에서 4단계를 거쳐 정착되었다고 보았다. 우선 1428년 “효행록” 편찬이 그 遠因이며, 1431년 ‘三綱行實’ 그림 표현이 그 近因이었다. 그래서 신문자 창조는 불과 28자라도 1434년 崔恒의 친탁을 시발로 오랜 시간 남모를 고뇌 끝에 성취되었다. 거기에서 태허정을 위시한 유신의 협찬은 궁중에서 남모르게 이루어져서 실증키 어려울 뿐이며, 1444년 이후 각종 시책은 이 사업을 정착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러한 훈민정음 창제의 경위를 표로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22) 훈민정음 창제의 전말(※번호1) 2) 인용문 표시)
제1기 文字發想期(1428~34)
1428(세종10). 9. 1) 金禾 살부사건
1428(세종10). 10. 1) 孝行錄 편찬(遠因)
1431(세종13). .2) 圖形 표현 채택(近因)
1432(세종14). 6. 2) ‘三綱行實’ 편찬
1434(세종16). 11. 3) 위 간행
제2기 禁中親製期(1434~43)
1434(세종 16). 4)擢公(崔恒) 第一
1438(세종 20)~ 4) 7) 親揀名儒
1443(세종 25). 12. 6) 9) 훈민정음 친제
제3기 公開確定期(1443~55)
1443(세종 25)~1446(세종 28). 9. 8) ‘解例’(자습서) 편찬
1444(세종 26)~1448(세종 30). 10. 11) 13) ‘東國正韻’(한자음 표기) 편운, 간행
1445(세종 27)~1455(단종 3). 2. 14) ‘譯訓’(漢語 표기) 편찬, 간행
제4기 文字定着期(1446~62)
1446(세종 28). 10. 17) 臺諫의 죄를 신문자로 표기
1446(세종 28). 12. 18) 吏科, 아전시험에 訓民正音 부과
1447(세종 29). 2. 15) ‘龍歌’신문자로 창작, 간행
1447(세종 29). . 16) 찬불서 신문자로 창시, 간행
1447(세종 29). 6. 19) ‘龍歌’ 아악 가사로 연주
1452(문종 2). 4. 20) ‘東國正韻’ 진사 시험에 부과
1452(문종 2). 12. 20) 과거에 ‘東國正韻’부과
1460(세조 6). 6. 21) 文科 초장에 ‘訓正’, ‘東國正韻’, ‘洪武正韻’ 試講
1462(세조 8). 6. 21) 과거에 ‘洪武正韻’겸용, 譯科 ‘童子翟’ 시험
이번에 위에서 새로운 사실을 규명해 보았다고 할 것은 (1) 신문자 창제의 원인 및 근인 규명, (2) 비공개 9년간의 신문자 친제와 선비의 내밀한 협찬, (3) 훈민정음 창제의 후속 사업 ‘訓民正音’, ‘東國正韻’, ‘洪武正韻譯訓’ 편찬, (4) 신문자 정착을 위한 적극적 공용화 시책 병행 등으로 집약된다. 또한 신문자의 실질적 창제자는 협찬한 유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기록상 4) 睿智, 睿旨, 6) 親制, 7) 親揀, 8) 御製, 11) 睿斷, 13) 宸斷 등 친제라는 당대의 명증이 선명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23) 특정 언어의 인식: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위 9)),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중략)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解例 鄭麟趾序) ※聲氣(발음 소통)
24) 음운 설정의 정확성: 終聲復用初聲. (訓正 例義), 全淸次淸全濁之字, 其聲爲厲, 故用於終則宜於入. (解例 終聲解), 無所用而不備, 無所往而不達. 雖風聲鶴唳, 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 (解例 鄭麟趾序) ※於入(入聲. 내파음. 말음 규칙)
25) 형태 표기의 난해성: 所以ㆁ ㄴ ㅁ ㅇ ㄹ ㅿ 六字爲平上去聲之終, 而餘皆爲入聲之終也. 如곶爲梨花, 의갗爲狐皮, 而ㅅ字可而通用, 故只用ㅅ字.(解例 終聲解). ※곶, 의갗(형태 표기), 곳, 엿의갓, 八終聲可足用(음소 표기)
끝으로 한글의 칭송은 인공 문자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는 점이다. 그것은 언어가 요구하는 음운에 충족되는 문자가 구비된 까닭이기 때문에, 그 칭송은 그 창제에 종사한 수준 높은 언어학자의 몫이다. 그런데 만능처럼 漢語, 日本語, 英語 등 온갖 언어에 다 충족된다고 자랑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그 논리적 구조도 인공 문자의 장점인 반면에 字素 불확실(를/틀, 괴/피 등), 表義 標識 미비(mail/male, knight/night 등), 무리한 합자(뀄, 뺍, 쐤 등)가 빚는 판독 불편 등은 보완해야 할 약점이다.
※ 본 사이트의 가을호 "훈민정음 창제와 최항"은 2004년 겨울호에서 첨부한 정오표의 내용을 반영하여 수정된 것입니다.
훈민정음과 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