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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동욱의 고향이야기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 RSS알리미 금곡마을에 가다.
찾아가는 고향마을 | 2010/04/12 15:15 빛깔 58개띠
장흥군 용산면 금곡리마을에 갔습니다.
금곡리마을에 초상이 났기때문이었습니다.
아침일찍 찾아간 금곡리마을은 광주에서 장례를 치르고 고향마을로 되돌아올 고인을 맞을 준비에 분주합니다.
장흥 곳곳에 살고 있는 친지들과 지인들도 금곡리마을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금곡리 마을은 영광김씨와 인천이씨가 많이 살고 잇는 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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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느낌표로 간직한 내 삶의 본질이며 마음속의 느티나무
김명전(용산면 금곡마을 출신. 삼정KPMG그룹 부회장 겸 성균관대법학대학원 초빙교수)
내 고향은 용산면 금곡(金谷)리다. 소쿠리테처럼 동서북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마을입구에는 선돌이 세워져 있고, 마을 앞에는 수령 3백년 이상의 귀목나무 세 그루가 서 있어 마을의 오랜 역사를 한눈에 엿보게 한다.
나는 이 귀목나무 옆에 자리한 초가집(훗날 기와로 교체)에서 아버지 김재율(86), 어머니 문영숙(83)의 5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 마을에서 용산초등학교(39회), 장흥중학교(24회)를 졸업했으며 이후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와 대학원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언론학 석사, 박사).
이후, KBS한국방송에 입사하여 프로듀서․기자로서 20여년을 보냈고, 청와대대통령비서실 언론비서관(2급)으로 임명되어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하였으며, 2002년 대통령비서실의 차관보급인 1급비서관으로 승진한 후 2003년 청와대를 떠났다. 2003년, EBS한국교육방송공사 부사장으로 취임하여 방송사의 CEO로서 경영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세계4대 회계․컨설팅그룹인 삼정KPMG그룹의 부회장을 맡아 공인회계사, 변호사, 컨설턴트 등 2천1백 여 명의 임직원들과 함께 정부 및 기업의 회계감사와 경영컨설팅 등을 맡아 일하고 있다. 또 2006년부터는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의 비교법 연구교수를 맡아 학문과 직장을 겸직해 왔으며 올 7월부터는 성균관대학교 법학대학원 초빙교수로 위촉되어 대학원 강의(언론법학)와 CEO역을 병행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고향! 아름답고 정겨운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남도의 끝이자 서울의 정남진! ‘그것은 내 자신의 본질이며 삶 그 자체이기에 항상 느낌표로 간직한 마음속의 느티나무이다.’ 고향은 먼 데 있는 것도 아니며 내 삶의 뿌리이고 내 생활의 일부분이며, 때로 내 삶의 중심부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결불가분(不可缺不可分)의 관계이다. 굳이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아니더라도, 조상 대대로 뼈를 묻은 선영이 있고,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고, 내가 태어났으며 가장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던 내 유소년과 학창시절의 그 훈훈하고 가슴 아린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삶은 서울살이이지만, 틈만 나면 고향으로 달려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장형인 정전 형님을 비롯 우리 형제들이 하나같이 추석, 설 명절을 비롯해 일가친척과 친지들의 대소사가 있을 때면 기꺼이 달려가곤 하는 이유이다.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살아생전의 조부님 모습이 선한다. 유학자요 서당 훈장이신 할아버지는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하얀 수염을 가진 인자한 얼굴이셨다. 사시사철 언제나 흰 한복에 두루마기 까지 갖추어 입고 점잖은 걸음걸이로 앞서 걸으시던 모습은 전형적인 선비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떼고 명심보감까지 익히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조부님 서당에는 장흥군 일대에서 온 100여 명의 학동들이 한문을 배웠는데, 그 중 가장 막내였던 나도 다른 형들과 똑같이 조부로부터 엄한 훈육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조부님의 상여 뒤를 따라 길게 이어진 수백 개의 만장과 슬픈 상여소리는 지금도 선연하다. 조부님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설움에 상여를 뒤따라가며 얼마나 울었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마을 입구에는 조부를 흠모했던 제자들이 세운 추모비가 남아있다).
지손(支孫)이었던 아버지는 빈손으로 분가해 집안을 일으켜 당시 중농 수준의 가세를 일구었다. 조부의 영향 탓인지 아버지도 성격이 매우 곧으셨다. 젊은 시절에는 마을 사람들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판관노릇도 톡톡히 했다고 하는데, 마을사람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울까지도 달려가 해결하시곤 했다고 한다. 그런 성품 탓인지 19살 때 일제강제징집을 당했지만 끝가지 저항하며 불응했다고 한다.
또 일제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곳곳에서 수탈해 용산초등학교에 야적해놓았던 3만석 규모의 공출미를 친구들과 불태우는 것으로 일본의 수탈에 저항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장 순수했던 어린 시절 입버릇처럼 ‘남에게 덕을 베풀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살라’고 가르쳤던 조부님의 ‘노블리제 오블리주’ 훈육 그리고 ‘바르게 살라’ ‘불의에 굴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던 아버지의 가정교육은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조부의 훈육은 평생토록의 내 삶의 교훈이 되고 생활철학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면,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 고시반(사마헌)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군부정권이 대학캠퍼스까지 유린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직접 경험하면서 저항을 위해 고시공부를 중단하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내가 성대 총학생회장과 전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을 맡아 학생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KBS에서 재직 중이었던 1987년, 직장의 진퇴까지 내걸며 언론의 자유와 방송민주화를 목적으로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결성에 산파역(사무처장)을 담당하고, 이후 전국언론노조 사무처장, 민주노총 중앙위원, 민주노총 97년 노동법개정투쟁위 상황실장 등을 역임하며 방송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의향 장흥의 정기와 조부와 부친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새 삶을 개척할 수밖에 6.70년대 세대의 처지가 모두 비슷하였지만, 근대 산업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낙후된 남도의 시골에 태어나고 서울에 올라와 아무런 연고도 없이 홀로서기에 성공한다는 것은 피땀과 눈물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가족들의 인생역정을 돌아보아도 마찬가지다. 인쇄업으로 성공한 장형(長兄) 정전, 차형(次兄) 등 모두가 참으로 값지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싶다. 아니 출향(出鄕)하여 타지에서 터를 잡고 오늘을 일구어 낸 우리세대의 모두가 성공한 인생임을 자랑해도 좋을 것이다. 지위나 재산보다는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뿌리이고 내 삶의 증거가 되는 고향 장흥! 늘 변함없는 모습이 정겹기도 하지만 낙후된 채로 세월에 비켜 서 있는 듯 정체되어 있고, 고향 사람들의 삶의 수준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 보여 항상 가슴 아프다. 그래서 한때(2004)는, 고향의 미래를 위한 비전과 ‘정치개혁을 위한 시대적 소명'으로 정치에서 나의 열정과 경험을 꽃피워보고자 제17대 총선에 도전해보기도 했지만 기성정치인들의 정치적 야합에 희생양으로 끝나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그렇지만 지금도 어떤 형태로든 고향을 위해서 무엇인가에 봉사하겠다는 꿈은 여전히 뜨겁다. 그동안의 내 삶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들과 오랫동안 모색하고 천착해 온 고향의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내 고향을 ‘한국 속에서 장흥’이 아닌 ‘세계 속에서 장흥’으로 우뚝 서게 만들고, 대한민국의 변방이 아닌 ‘국정의 중심’에 세울 수 있는 고향을 만들 수는 없을 까 고민하고 꿈에 부풀기도 한다. 이 꿈이 어떤 방식으로든 성공해 고향 분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며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고향을 위해 남은 여생을 봉사하며 살 수 있기를 기약하면서….
===============================================================(출처: 마동욱의 고향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