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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그 에코토피아의 길 스크랩 <10> 실용과 이념 - 유무상자(有無相資)
남궁효 추천 0 조회 139 10.07.05 16: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0> 실용과 이념 - 유무상자(有無相資)

 

축구도 끝나고 이제 무슨 재미로 사나 하면서 한겨레신문을 들추니 “중국-대만 ECFA(경제협력기본협정) 체결” 이라는 기사가 확 들어온다. 61년 만에 중국과 대만이 “경제통일”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양쪽이 806개 품목의 관세를 2년 안에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하고, 서비스 분야에서도 중국은 대만에 회계.연구개발.병원.은행.보험 등 11개 업종을 개방하기로 했단다. (한겨레신문, 2010.6.30자 8면)

 

중국과 대만의 협정 체결로 중국-대만-홍콩-마카오를 잇는 중화경제권이 등장하고 인구 14억, 국내총생산 5조 3000억달러의 거대 경제권이 탄생케 되었다. “차이완 시대”의 개막이라는 문구도 보인다. 그 아래로는 ‘대만과 경쟁 치열’ IT업계 비상이라는 국내 경제에 미칠 파장을 예상하는 기사도 실려 있다. 외환 보유고가 2조 4000억 달러에 달하는 중국의 자본력과 대만의 아이티 기술력이 만나면 그간 약진해왔던 국내 반도체, 휴대전화, 엘시디 사업이 크게 위협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차이완 시대”를 읽으니 무척 부럽고 샘이 난다. 우리도 분단 65년이 되었건만 남북경제협력 관계는 지난 민주정권에 비하여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사실이지 현 정권은 중도실용주의를 내걸고 출발하였다. 중도라고 해서 이념의 작용보다는 실용적 가치 판단에 더 좌우되리라 관측도 해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역설적으로 매우 이념적인 정권이 되어가고 있다.

 

반공, 반북, 친미, 친일의 반통일적 사대 외교를 기본 골격으로 하는 대북 정책은 3년전 박왕자씨 피살사건 이후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천안함 사태에 이르러 ‘전쟁불사’론까지 중앙일간지[중앙일보 김진 칼럼-“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에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야당이 조금이라도 남북 관계를 바꿔볼라치면 바로 ‘친북, 좌경, 용공’이란 구시대의 용어를 앞세우며 이념 공세로 현실적 판단을 흐리고 있다. 지난 정권의 햇볕정책은 퍼주기로 폄하하고 이번 정권은 그냥 기다리는 정책을 취하다가 천안함 사건에 다다랐다. 금강산이 막히자 강원도 경제가 경색되었고, 천안함 대응조처로 개성공단 폐쇄론이 나오자 수 천억원을 투자한 사업가들은 울상이 되었다. 과연 어느 정권이 실용정권이고 어느 정권이 이념정권인가?

월드컵으로 지난 6월이 즐거웠지만 아쉬운 것은 8강에 진입 못한 것만이 아니다. 남북 함께 월드컵에 진출한 사건은 역사적인 뉴스이며, 남북 분단의 모순을 세계에 알리고 통일로 큰 걸음을 디딜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어느 기업에서도 발 빠르게 정대세와 박지성을 내세워 광고물을 제작하였다는, 그러나 천안함으로 TV에 올리지도 못했다는 쪽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대통령 스스로 국가CEO를 표방하면서도 이런 스포츠-외교-경제-정치상의 좋은 기회를 묵살하고, 거꾸로 반통일과 전쟁론으로 치닫는다니...

 

중국 역사와 우리 역사를 비교하면 사고의 탄력성과 유연성에서 커다란 차이가 난다. 그것이 국가 볼륨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물리적인 이유와 문화 창조의 진원지와 주변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심리적인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아마도 중국사의 1000여년이 북방족의 침략과 지배의 과정을 겪으면서 철저하게 지배 세력과 논리가 뒤집힌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현실을 주체적 시각에서 들여다보는데서 차이가 난다. 아니 대한민국에 100만의 외국계 주민들이 공존하면서 다문화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현실에서 같은 동족인 북한을 여지껏 품지 못하고 있다니, 남북 국력의 차이가 수 십배는 될터인데, 그 작고 힘들어하는 북한 하나 다루지 못해서 60 년 전 적대감을 들춰내고 전쟁을 미화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속좁은 짓이냐?

 

수운 최제우 선생은 1862년 9월 관에 체포되면서 비로서 교단조직[포접(抱接)제]을 구상하였다. 부상(負商)조직을 본떠서 접(接)장제도 만들고, 동학 초기 전도자와 수도자의 인맥에 의해서 조직하였다. 1862년 12월 29일 최초로 접주(接主)를 임명하였다(모두 16명으로, 경주부서-백사길, 강원보. 영덕 - 오명철, 영해-박하선, 대구,청도,기내-김주서, 청하-이민순, 영일-김이서, 안동-이무중, 단양-민사엽, 여양-황재민, 영천-김선달 등이다)

 

접의 규모는 40호 정도인데, 수삼 백인으로 구성된 대접(大接)도 있고, 6,70인의 소접도 있었다. 포(包)는 수 백명 이상에서 전체 도인 1천명가량을 아우른 것이다. 그리고 이때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전통이 만들어졌다. 요컨대, 같은 접의 도인들은 가족처럼 지내면서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이 서로 돕는 유무상자의 전통이 조직 내에 생긴 것이다.

 

동학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동학교도들은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이 아니다. 동학은 우리 삶의 끊임없는 실천일 뿐이고, 그런 실천의 실마리를 수운 선생이 제공한 것이다. 접제도라 하는 것도 사회적 실천을 위한 상부상조의 운동조직이었다. 요컨대 동학은 생활공동체이다. (김용옥, 『동학1』서문) 동학 포교 후 30여년 만에 수 십 만 명의 교도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동학 안에 들어서면 목숨을 부지하고 상하신분제를 극복하고 평등한 생활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없다고 아주 없는 것이 아니며, 남한이 있다고 영원히 있을 것도 아닌데, 서로 나누다면 과잉된 물질과 자본을 해소하고 두터운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예로 북한으로 건네던 쌀 40만톤이 그대로 쌓여서 재고는 늘어나고 국내쌀값은 떨어지는 문제를 초래하고 있지 않은가?

 

이념에 앞서서 우리의 삶이 있다. 허울 좋은 중도실용을 내세우면서 남북 관계를 불화시키고 전쟁불사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나 편협한 시각에서 나온 비틀린 태도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국민들이 현 정권의 전쟁모험주의를 반대하여 야권이 크게 승리한 것은 경제 발전도 좋지만 평화가 더욱 중요하다는 국민들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현 정권은 국민의 뜻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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