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호밀 이야기>
호밀(청밀)밭
우리 마을은 호밀(Rye)을 많이 심었는데 보리(Barley)나 일반 밀(Wheat:참밀)에 비하면 우리 동네처럼 거름기가 적은 척박한 땅에서도, 또 겨울이 춥고 긴 강원도에서도 비교적 잘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키가 엄청나게 커서 호밀밭에 들어서면 어른들도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단점이라면 키가 너무 크다 보니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꺾여 쓰러지기를 잘해서 일삼아 묶어서 세워야 했고, 키에 비하여 길쭉한 낟알(밀알)은 수확량도 신통치 않았던 것 같다.
키가 커서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때 밀밭에 숨기라도 하면 밭 가에서 구부리고 이랑을 드려다 보며 찾곤 했는데 젊은 남녀의 밀회 장소로도 심심찮게 이용되곤 했던 모양이다.
언젠가 입담이 걸찍한 옆집 아저씨는 밀밭 가에 서서,
“어떤 연놈들이 밀밭에 들어가 못된 지랄들 하느라고 밀을 다 까대놨다!”고 소리를 지른다.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곤 했는데 ‘까대놨다’는 말은 강릉말로 꺾어 눕혀 놓았다는 뜻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당시 호밀을 청밀이라고 불렀는데 색깔이 익을 때까지 일반 밀이나 보리보다 더 파란색이어서 그랬는지, 중국 청(淸)나라에서 들여온 밀이라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호밀(청밀)은 보리나 참밀에 비하면 키가 엄청나게 크고 잘 자랐다. 당시 금광평은 토질이 척박한 곳이다 보니 거름을 제법 많이 넣는데도 보리나 참밀은 키도 잘 자라지 않고 낟알이 잘 여물지도 않아 빈 쭉정이도 많았는데 호밀은 키도 클 뿐만 아니라 엄청 잘 자랐다.
그러나 이삭이 제대로 여물지 않고 소출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은 참밀과 비슷했다.
서양에서는 이 호밀을 식량으로도 사용은 했지만, 이삭이 여물기도 전에 베어서 가축의 사료로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밀이나 보리의 타작 방법은 개상(돌 받침) 위에 큼지막한 탯돌을 올려놓은 다음 보릿단이나 밀 단을 가느다란 밧줄로 단의 중간 부분을 한 바퀴 돌린 다음 끈의 나머지 부분을 두 손으로 잡고 탯돌에 내려쳐서 알곡을 떨어내는 방법이었다.
우리 집에 있던 개상은 가지가 양 갈래로 갈라진 소나무를 잘라다가 양 다리 부분에 나무를 못으로 단단히 박아 돌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고, 뒤집어 맞붙은 쪽에 큼직한 나무를 박아 땅에 뉘어 놓으면 위에 돌을 올려놓기 쉽게 만든 것이었다. 탯돌은 너무 무거워 개상에 올릴 때 어른들 두세 명이 달려들어 올리곤 했다.
그런데 호밀은 일반 밀보다 키가 훨씬 크니 키가 큰 어른들도 어깨 위에서 한 바퀴 돌려서 탯돌에 내리쳐야 되는데 돌릴 때 자꾸 어깨나 허리에 걸리곤 해서 태질하기가 거추장스럽다고 했다.
태질이 시작되면 아이들이나 아낙네들은 눈치를 보아가며 고무래로 탯돌 앞에 쌓이는 낟알을 긁어내어 한쪽에 쌓아 놓는다. 그렇게 탯돌에 태질해도 낟알이 덜 떨어지는데 나머지 알곡을 말끔히 떤다고 호밀 단을 다시 풀어 마당 바닥에 흩어 놓고 도리깨로 두드려서 한 알의 곡식도 허비하지 않도록 했다. 타작이 끝나면 한 사람은 커다란, 날개가 네 개 달린 풍차를 손으로 돌리고 아낙네들은 키(箕)에다 낟알을 퍼 담아 풍차 앞에서 주르르 땅으로 쏟아 내리는데 지푸라기는 날아가고 깨끗한 알곡만 남게 된다. 풍차가 없는 집에서는 자리를 가지고 나와 반을 접어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양손으로 끝을 잡고 펄럭거리며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방바닥에 까는 자리는 왕골(莞草)로 짠 것과 부들(香蒲)로 짠 것이 있었는데 왕골로 짠 왕고(골)자리가 훨씬 질기다.
호밀 타작을 하다 보면 까칠까칠한 껍질 부분이 많이 날려 온몸이 먼지와 티를 뒤집어쓰게 되는데 타작이 끝나고 아무리 씻어내도 까칠까칠한 것이 피부에 박혀 따끔거림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씻어내기 전에 밭 귀퉁이에다가 황덕불(황데기/모닥불/깜부기불)을 크게 피워놓고 그 위로 겅중대고 뛰어넘으며 꺼끌거리는 깜부기를 태워버린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동네에서는 이 이삭 끝에 붙은 꺼끌거리는 것을 ‘깜부기’라고 불렀던 것 같다.
깜부기는 원래, 보리나 밀 이삭이 병에 걸려 새까맣게 가루처럼 되는 것인데......
이 호밀로는 밥도 해 먹고 국수도 만들어 먹었는데 밥을 하면 색깔이 시커멓고 식으면 돌덩이처럼 밥이 딱딱해지며 맛이 없었다. 나는 도시락에 감자가 섞인 이 호밀 밥을 싸 가지고 학교에 다녔는데 여름철이면 감자에서는 쉰내가 나고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시커먼 밀밥이 창피해서 손으로 가리고 얼른 먹어치우곤 했다. 형편이 조금 나았던지 학산 본동(本洞) 친구들은 쌀과 보리에 노란 좁쌀이 섞인 밥을 싸 왔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호밀로 국수를 해 먹을 요량으로 맷돌에 갈아서 가루로 만들면 갈색의 가루가 되는데 콩가루를 섞으면 그런대로 형체가 이루어지지만 맨 호밀 가루로만 칼국수를 만들면 시커먼 색깔에 북적북적 거품이 생기며 혓바닥으로 뭉개지는 것이 어머니 말씀을 빌리면 매카리가 전혀 없었다.
‘매카리’는 강릉 사투리로 ‘힘’ 정도의 뜻이겠다.
또 맷돌에 갈아 체로 치면 가루는 아래로 빠지고 체에 껍질이 남는데 이것을 ‘밀지울(밀기울)’이라 했고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이 밀기울로 뜨데기(수제비)를 만들거나 반죽을 하여 둥그스름하게 만든 개떡을 만들어 쪄 먹기도 했는데 정말 목구멍이 꺼끌거리고 맛이 없다.
호밀 껍질에 무슨 영양분이 있었으랴....
사람이 힘이 없어 보이면 ‘니는 우째 밀지울(밀기울) 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쌍판대기를 하고 있냐?’ 하곤 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콩가루를 섞지 않은 호밀 칼국수를 했는데 국수를 좋아하시던 우리 아버지는 쉬 끊어지며 젓가락질이 되지 않자 숟가락으로 퍼 잡수시며,
‘제기럴, 하얀 소면(素麵) 한 그릇 먹었으면.....’ 하셨으니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
지금은 건강식이라 하여 호밀 빵이며 호밀 국수는 인기가 많은 음식이다.
백화점 등 고급 식당에서 비싼 값으로 팔린다고 하니 세월이 그만큼 많이 변했다고나 할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얼마 후부터 참밀가루가 흔해 지면서 시장통에 국숫집이 생겨 기계로 뽑아낸 국수를 말리느라 쭉 걸어 놓으면 하얀 국수 가락이 바람에 일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나곤 했다.
내가 이처럼 지금까지도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어렸을 때 그 호밀 밥과 호밀 칼국수를 많이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미소를 지어본다.
아일랜드 민요 ‘밀밭 사이로 오라(Comin' thro' the Rye)’나 미국 작가 샐린저(D.J.Salinger)의 단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을 보면 서양에서도 예전에는 호밀을 많이 심었던 것 같다.
아무튼, 푸른 하늘과 파란 밀밭, 하늘 높이 떠서 지저귀는 종달새는 싱그러운 초여름 날 아름다운 전원(田園) 풍경의 트레이드 마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