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碑文 1> ‘始七年十月’ 흙으로 구운 네모판 비(碑)
(‘始七年十月’銘 塑造四角板碑)
- 흙으로 구워 만든 네모판(四角板)에 새긴 글(모두 134자)
- 크기 : 가로 25㎝, 세로 26㎝, 두께 2.3㎝
- 위쪽에 벽에 거는 구멍이 2개 있는데 왼쪽 것은 깨지고, 오른쪽 것은
못이 남아있다.
正始武侵宮百殊固諫慾鎩還亡命 存其固都誠不耐城遣訖繼創邑都 護殊百位麓酋(委+台)七年十月繼明王 封护寧東國吏玄菟沸流安泰天歲 禮樂世百濟高麗殊代天府祖鄒牟 王以城民之意秋八月步騎二千戰 儉혁(赤+見)峴岭攻數千里降士數千國宮 前臣高伏儉鎩城北王盲記天地之 中銘存永世隨登愿此碑永立以 傳百世紹示百殊城民 |
正始武侵 宮百殊固諫 慾鎩
정시 연간에 (관구검의) 병란이 있었다. (병란 전 동천왕) 궁(宮)이 백수(百
殊)가 간곡히 간(諫)하였으나 죽이려한 일이 있었다.
還亡命 存其固都 誠不耐城
(그 뒤 殊는)망명에서 돌아와 옛 수도를 보존하고 불내성을 튼튼하게 하였으며,
遣訖繼 創邑都 護殊百位麓酋
흘계(訖繼)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수(殊) 백위(百位) 녹추(麓酋)를 통솔하였다.
委+台(始?)七年 十月 繼明王 封护寧東國 吏玄菟沸流
正始 7년(서기 246년) 10월 명철한 왕을 이어 영동국을 봉해 개척하고, 현토와 비
류를 다스리니,
安泰天歲禮樂世百濟高麗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百濟와 高麗에 이어졌다.
※ 安泰天歲禮樂世百 濟高麗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百世를 이어 高麗를 다스렸다.
殊代天府祖鄒牟王 以城民之意
수(殊)는 천부와 조상인 추모왕과 성민(城民)의 뜻을 대신하였다.
秋八月 步騎二千 戰儉 혁(赤+見)峴岭 攻數千里 降士數千
가을 8월 보병과 기병 2000으로 혁현령에서 (관구)검과 맞붙어 싸웠다. 수 천리
를 쳐서 수 천명의 적병을 굴복시켰다.
國宮前臣高伏 儉鎩(?)城北 王盲
(그러나) 國宮 前臣 고(高)가 굴복하자 (관구)검이 성 북쪽을 뚫었고(잘라냈다),
왕이 눈이 멀었다. (????)
記天地之中 銘存永世隨登
(이 사실을) 천지간에 기록하고 영세토록 새겨 보존하니 隨登(?),
愿此碑永立 以傳百世 紹示百殊城民
이 비는 영원히 백세에 전해 백수(百殊) 성민(城民)에게 이어지기 바라노라.
Ⅲ. <碑文 2> ‘正始七年’ 흙으로 구운 네모판 비(碑)
(‘正始七年’銘 塑造四角板碑)
- 흙으로 구워 만든 네모판(四角板)에 새긴 글(모두 50자)
- 크기 : 가로 17㎝, 세로 24.8㎝, 두께 2㎝
- 벽에 거는 구멍이 위쪽에 2개 있다.
正始武止宮不從固諫食蒿而 死殊還亡命慾鎩存其固都將 誠不耐城往丸都遣訖繼造邑 都護位殊麓酋魏正始七年 百殊宣 |
正始武止 宮不從固諫 食蒿而死
정시 연간의 병란이 끝났다. (동천왕)궁이 간곡히 간하는 것을 듣지 않자 쑥만 먹
고 죽은 일이 있었다.
殊還亡命 慾鎩 存其固都 將誠不耐城
수가 망명에서 돌아와 (慾鎩?) 옛 수도를 보존하고 불내성을 튼튼히 하고자 하였
으며,
往丸都 遣訖繼 造邑都 護位殊麓酋
환도(丸都)에 가서 흘계(訖繼)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위(位) 수(殊) 녹추(麓酋)를
통솔하였다.
魏正始七年 百殊宣
위(魏) 정시(正始) 7년(246년) 백수(百殊)가 선포하노라
Ⅳ. <碑文 3> ‘遂成王10年’ 흙으로 구운 여덟모기둥 비(碑)
(‘遂成王10年’銘 塑造八角柱碑)
- 흙으로 구워 만든 여덟모기둥(八角柱)에 새긴 글(86자)
- 밑바닥 지름 13×12.5㎝, 윗면 지름 9×8㎝, 높이 20.5㎝
始祖之孫日月之子承故夫余 故邑遂成王十年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护寧東百殊 司吏玄菟定邑都沸流安 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 麗殊代天府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百殊心意□□ 年功建國都玄菟郡紒継 |
始祖之孫 日月之子 承故夫餘 故邑
시조의 후손, 해와 달의 아들이 옛 부여와 옛 땅을 이어받았다.
遂成王十年 東西南北殊 繼明帝 逐多拓寧東
수성왕 10년(155년) 동서남북의 수(殊)가 명제(明帝)를 이어 영동(寧東)을 몰아내고 개척하였다.
百殊司吏玄菟 定邑都沸流
백수가 현토를 다스리고 비류에 도읍을 정하니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
평안과 태평세월, 예악이 백제와 고구려에 미쳤다.
殊代天府 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
수(殊)가 천부를 대신하고 시조 추모왕의 뜻을 이어 백성을 태평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켰고.
百殊心意□ 年功 建國都 玄菟郡紒継
백수가 마음과 뜻□□ 년 공을 들여 국도를 건설하고 현토군을 넘겨 받았다.
Ⅴ. 맺는말
1. <비문 1>과 <비문 2>에 정시 7년(246년)이란 명문이 나와 있어 제작연대가 분명하다. <비문 3>에는 ‘수성왕 10년’(155년)이란 명문이 있으나 내용을 살펴볼 때 문장이 계속되는 명문이 더 있을 것으로 보여 정확한 연대를 확정할 수 없다. 다만 3점의 내용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거의 같은 시대가 아닌가 추정한다.
2. <비문 1>에 愿此碑永立 以傳百世 紹示百殊城民(이 비는 영원히 백세에 전해 백수(百殊) 성민(城民)에게 이어지기 바라노라)라는 글이 있어 주인공을 기리는 비(碑)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무덤 안에서 나온 글을 묘지(墓誌)라고 하고, 무덤 앞에 세운 것을 비(碑)라고 하는데 3세기 고구려에서는 흙 판에 글을 쓰고 구워서 만든 것도 비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3개의 명문에 모두 나오는 주인공은 ‘수(殊)’ ‘(百殊)’라는 직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사서에 나온 고구려의 관직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라서 앞으로 밝혀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내용상으로는 백수는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고 수는 그 다음 단계의 위계로 보인다.
4.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쳐들어왔을 때의 상황과 그 뒤 재건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사료만 인용해 고구려의 전과가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부나마 ‘혁현령 전투’의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5. ‘하늘을 대신한다(代天府)’, ‘해와 달의 아들(日月之子)’, ‘명제(明帝)’ 같은 천손사상이 엿보이고 있어 고구려는 위나라와 싸우면서 이미 이러한 천하관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시조의 이름을 광개토태왕비와 마찬가지로 추모라고 하고 있고 흘계(訖繼) 같은 새로운 이름이 나왔고, 불내성, 환도, 비류, 현토, 영동국, 혁현령 같은 지명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7. 국명을 고려와 고구려 두 가지를 함께 쓰고 있다는 것도 특이한 사실이다.
8.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표시되고, 고구려보다 백제를 먼저 표기하고 있어 3세기 중엽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짧은 기간 내에 발표 준비가 진행되어 충분한 해석이 되지 않았지만 한국사, 특히 고구려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리라고 보며, 앞으로 학계에서 많은 논의과정을 거쳐 좀더 많은 연구성과가 나오기를 바란다.
첫댓글 바이러스 백신을 돌렸는데도 왜 win8 에서는 내용이 깨져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win7에서는 안그러던데... 최선생하고 한선생님꺼만 그래요...컴퓨터 백신 돌려보세요.
잘 알겠습니다. win7 쓰고 있으며, v3에서 바이러스 점검 정상 그리고 청담한치과 xp에서 이상하게 작동되는 것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