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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듯하여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보면 한참 전에 내가 이미 들렸던 골목이다.
눈에 익었던듯 긴가민가하여 혹시나 하고 들어가보면 처음보는 골목에 반가운 풍광들이 여기저기 내다 건 빨래처럼 걸리어 있다.
거창하게 (골목 기행)이라고 까지는 못하겠지만.......
그 어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명소나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회화가 아니더라도....... 그 곳에는 사람의 흔적과 향기가 묻어난다.
나의 두 눈이 무엇인가를 감지해내면, 채 나의 생각이나 의지가 어떤 결정을 내려주기도 전에, 나의 두 발은 이미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여행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도심을 언덕을 그리고 골목길을 걷고 또 걷는다.
지극히 높은곳의 그분께서 내게 허락하신 시간까지는 나는 이대로 영원히 걷고 싶다.
시실은 (포로 로마노)를 모두 둘러보았을 때, 왼편의 언덕으로 올라가 (진실의 입)이 있는 (산타마리아 코스메딘 성당)을 거쳐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가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광장을 보았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곳은 나의 스케줄 상 내일의 계획에 있던 곳이었다. 이미 오늘의 목표였던 포로 로마노까지 너무 열심히 걸어서 죄다 둘러 보았고 아직 해가 지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순간에는 내일의 스케줄을 당길것이 아니라...... '바쁘게 다니다보면은 그냥 지나칠수도 있겠다'라고 미리 염두에 두었던 이 사람을 만나 보기로 했다. 이번 전 여행을 통해서 나는 몇 사람을 꼭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그 첫 대상자였다.
나는 내가 지나왔던 포로 로마노의 신성한 길을 되돌아 갔다. 그리고 콘스탄틴 바실리카 옆의 북문을 통해 언덕을 올라 많은 차들이 오가는 대로를 건넜다.
콜로세오에서 통일 기념관까지의 도로 양편으로 로마 역사와 관련된 여러 인물들의 동상이 길게 늘어서 있다. 유명한 사람들은 다 있다. 씨저도 있고 키케로도 있고 안토니우스도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실제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바로 앞 여행기의 마지막 사진인 옥타비아누스 였다.
아우쿠스투스 옥타비아누스.
줄리어스 시저가 로마의 초석을 다져 놓았다면, 옥타비아누스는 그 초석위에 거대한 로마제국을 완성한 인물이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진흑과 벽돌로 된 로마를 물려받아서 대리석으로 된 로마를 새로 만들었다'
나를 포함해서 셀수 없도록 많은 여행자들이 이탈리아를, 그리고 로마를 찾게끔 만든 1등 공신은 아마 옥타비아누스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위대한 황제는 손톱만큼의 어떤 대우나 특혜도 없이 다른 여타의 많은 위인들과 동등한 조건 동등한 대우속에 그냥 대로변에 방치되듯 놓여져 있다. 우리나라 광화문의 세종대왕님이나 이순신장군님에 비하면 남루한 것이 아니라 비참하게 버려진 느낌이 들 정도이다.
거기에 그 어마무시 위대한 나라를 세우시느라고 못할짓(?)을 많이 하셨음인지....... 그 많은 동상중에서 거의 가장 많은 비둘기의 배설물을 뒤집어 쓰고 계신다. 소방차 옆에 대기 시키고 아침 저녁으로 샤워를 시켜드려도 부족한, 적어도 이탈리아인에겐 한없이 소중한 분이 아니신가? 내가 바로 뒤편의 대리석 벤치에 앉아서 빵을 뜯어먹으며 요기를 하던 중에도 비둘기 한마리가 화장실을 다녀가듯이 볼 일을 보고 갔다.
내가 이곳에 직접 가야만 했던 이유는 좀 색다른데 있었다.
바로 옥타비아누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에 비견될 만큼 체구가 유난히 작고 왜소했던 옥타비아누스는 수없이 여러번 반복된 자신의 동상작업 중에서 바로 이 동상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청동상의 원본은 오른발 옆에 아기 천사가 있는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똑 같은 동상으로 바티칸 미술관에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바티칸을 갈지 안갈지 결정을 못했던 상태여서 이 청동상을 보러 온 것이다. 섬세한 갑옷의 무늬들과 감아올린 망토의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주름은 그를 근엄하고 강인한 이미지를 가진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으로 새로운 황제상을 여실히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너무나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얼굴 모습에서는 확연히 헬레니즘 영향권에서 보았던 알렉산더 조각상의 모습과 어느정도 닮아 보인다. 황제의 표정은 곧 국가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황제에 올라 41년을 통치한 옥타비아누스는 그 41년의 통치기간동안 그가 등장하는 모든 기념물이나 주화나 동상에 모두 이와 아주 흡사한 이 청년기의 모습만을 똑 같이 담았다. 신체적 컴플렉스가 남달랐던 그는 노년에 쇠락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하니......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가 보다. 그는 죽을때 까지, 그리고 죽은 후에도 이 청년기의 모습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제 슬슬 제대로 걸어다니면서 여행을 즐길 시간이 되었는데........
로마는 어느 길 어느 골목을 들어서던 사방으로 곳곳에 교회(성당)이 아주아주 빼곡히 들어서 있다.
수없이 많은 성당들의 건축양식까지 여기서 거론하기는 불가능하고, 아무 성당이나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 다른 모습의 성당내부가 장엄함과 엄숙함을 뽐낸다. 그런가 하면 벽면마다 온통 성화(성경 내용을 묘사한 회화)가 빼곡히 그려져 있고, 일부에는 부조나 조각이 놓여 있다. 이 대목에서 레오나드로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도나텔로를 찾고 있는 여행자는 지극히 무지몽매한 저급 수준의 여행자다. 그딴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닌자 거북이)에서나 찾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서양 미술사 전문가 수준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박물관을 구경하자면 약간의 공부는 하고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가이드? 글쎄다? 세상엔 금전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더러 있다는 진실을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한마디 더......... '박물관에 목숨 걸지 말라'.
성당을 나오면 여기저기 광장이요, 광장 한가운데 웅장한 분수대요..... 간혹은 거대한 오벨리스크나 거대한 동상들이 서있다.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노천 박물관이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가이드에 의존 말자'....... 당시에는 깜짝 정보겠지만........ 인천 공항에 내리고나면 기억에서 이미 지워져 있다.
이쯤에서 보너스..........
Tip>
유럽 여행에서 당신은 왜 박물관에 목숨을 거는가?
기껏해야 인증샷 밖에 더 찍었는가?
무한정한 시간과 경비를 가진 팔자늘어진 자유여행자가 아니라면 나는 강권하겠다. '유럽 여행에서 박물관은 다 타넘고 생략하세요' 라고.
아무리 A급의 여행사에 최고급 프로그램 이라 할 지라도....... 박물관은 무용지물. 가이드의 장기자랑 내지는 여행사의 수준을 드러내는 퍼포먼스?
1시간에서 2시간씩 줄을 서서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어떤 박물관에 들어갔다고 치자. 유럽의 박물관이 입장료는 오죽 비싼가? 그것이 바티칸 박물관이던, 대영제국 박물관이던, 루부르 박물관이던, 스페인 왕실 박물관이던, 그 어느 박물관이던 말이다. 수많은 인파가 밀고 밀치며 서로들 오로지 줄서가며 인증샷(그곳에 다녀갔다는 증표) 찍기에 여념이 없다. 그게 전부다.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이 되었건, '모나리자'가 되었건, 피카소의 '게르니카'이던, 렘브란트의 '야경꾼'이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이던, 고호의 '누런 밀밭 사이의 사이프러스 나무' 이던, 어느 작품이던 상관이 없다. 그 앞에서 벌어지는 여행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씨츄에이션은 모두가 동일하니까. 그런데 박물관에 다녀 온 여행자는 아주아주 자신있게 말한다.
'내가 모나리자를 직접 보고 왔는데 말이야...... 정말 눈썹이 없는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색채며 질감이며....... 정말 숨이 콱 막혀 죽는줄 알았어' 라고.
101% ~ 199% 거짓말이다. 비싼 패캐지 비용 들여 다녀왔다는 반대급부에 대한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는 변명이다.
어느 가을........ 가을비 주룩주룩 내리던 날, 낙옆이 나뒹굴어 스산하고 을씬년스러워 밖에 나서기가 내키지 않는 꼭 그런날........ 이름도 없는 어느 작가의 첫 전시회가 아주 한산하게 열리고 있는 인사동 한 갤러리에....... 방문객이라고는 딱 3명밖에 없는 그런 전시회에서 두 시간을 서성거리며 전시된 그림에 흠뻑 취해보는....... 그런 미술 관람을 기대하거나, 겨우 사진찍고 나온 관람을 자신이 제대로 체험 한것처럼 포장하지는 말자. 유럽에선 절대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유럽여행에서 박물관의 회화 관람은 대부분 그대로 무시하거나 통과해 버리는 습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나' 이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 못지않게 유럽의 대다수 박물관과 대다수 작품들을 아주 아주 생생하게 이미 관람을 한 사람이다.
'모나리자'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입시 공부하는 딸이나 중학생인 조카나 손녀의 공부방에 무심하게 들어가 보라. 책받침에 연습장 표지에서 어쩌면 '진짜 모나리자'를 만날 수 있을테니까. '비너스 탄생' 이나 샤갈. 혹은 달리의 그림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가까운 팬시 편의점에 나들이를 해보자. 액자 표구점도 좋고. 그곳에 가면 당신이 박물관에서 본 작품들 보다 더 선명하고 진품에 가까운 작품들과 마주하게 된다. 결코 거짓이 아니다. 이 책받침의 모나리자는 그 박물관을 통째로 전세내서 최적의 조건과 자연에 가까운 조명속에서 최고급의 기계와 최고의 기술자를 데려다 '사진'이라는 또 하나의 작품으로 베껴 온 프린트 물이다. 하지만 실제의 박물관은 작품 보존을 우선으로 조명을 인위적으로 하고, 더하여 최근에는 방탄유리까지 동원하여 작품을 보호하고 있다. 옛날에는 '직접 손으로 만지지 마세요' 였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모조품이거나 방탄 유리로 막아 놓았거나, 아에 가까이 접근을 못하게 하고 있다. 도난과 작품 훼손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를 질투한 한 정신병자가 햄머(큰 망치)를 들고 '피에타'에 올라가 두둘겨 팼다. 완벽한 보존을 거쳤지만...... 지금은 근처에 접근도 못하게 한다.
유럽의 여행에서는 가장 자유로운 건축물들에 주안점을 두고 마음껏 관람을 즐기자. 다음으로는 조각물들이다. 진품은 다 다른데 갔다놓고, 구분하기 불가능한 실제 크기와 모양의 조각품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놓여있다. 그냥 즐기자. 박물관의 그림들은 그냥 넘겨라.
집에서 다큐멘터리나 미술도감. 박물관 도감을 통해 진품을 제대로 즐기면 된다.
왜 비싼 입장료에 그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고생들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박물관의 그림들....... 나는 집에서 제대로 진품(?)을 보며 즐긴다.
H & C>
로마가 고대도시국가에서 공화정을 거쳐서 옥타비아누스 시대부터 재정로마시대로 들어서면서 부터에서야 이제 문화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였고, 문예부흥기에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하지만 건축 분야만은 초기 로마시대부터 꾸준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유일한 분야였다. 그만큼 로마의 건축은 오랜세월 무한한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스의 건축은 신전으로 대변된다.
웅장하고 장엄한 미를 추구하는 그리스의 신전건축은 신에 대한 존경과 찬양을 담고자 외형적 미를 추구하였다. 기본이 거대한 열주들을 늘어서게 하고, 그 위에 다시 거대한 대리석으로 지붕을 덮고, 사방으로 신들의 위용과 업적을 기리는 조각상을 제작해 올려 놓았다. 웅장함과 거대함을 기본으로 하다보니 실내의 면적은 지극히 협소하였다. 신전의 내부야 제사장이나 왕이나 지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었기에 공간이 필요 없었다.
로마는 그리스 건축양식을 그대로 들여오기는 했으나 사회적 기류가 다른 공화정 같은 정치제도를 거치면서 건물 안쪽에 다수의 사람이 모여서 회의나 집회를 하는 공간이 필요하였다. 오늘날의 국회의사당 같은 너른 공간의 필요에 의해 로마인이 생각해낸 건축이 바로 '바실리카양식' 이다.
기둥은 삥 둘러서 외곽의 사각형 외벽에만 세우는데 그리스식 기둥이 아닌 아치형 기둥을 도입함으로서 상층부의 무게를 혁신적으로 줄임과 동시에 무게의 배분을 적절히 분산하는 방법까지 이용하게 되었다. 거기에 당시 이슬람 건축술에서 지붕을 목재로 하여 가운데 대들보를 들이고 옆으로 석가래를 내려다는 형식을 도입하여, 무게를 줄임과 동시에 실내에 엄청난 공간확보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그리스 건축은 주춧돌에서 기둥과 천장이 모두 웅장한 대리석 돌덩이로 이루어졌지만, 로마인들은 핵심적인 기둥만 돌기둥으로 세우고, 나머지는 콘크리트로 형태를 만들고 그 외부를 구운 벽돌로 감싸거나 대리석을 붙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플래스터를 발라서 외부를 마감하는 방법을 채택하게 된다. 이제까지의 그리스 건축만큼 거대한 웅장함과는 다른 착상의 대담성에 콜로세움 같은 초대형의 규모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회화도 그리스와는 다른 시도와 발전이 미미하나마 계속 되었다.
특히 모자이크에 있어서는 그리스에서 자연적인 천연 재료들로 모자이크를 만들었었다면, 로마에서는 천연재료 외에도 타일이나 유리를 구워 만들어서 이것들을 다시 모자이크의 재료로 쓰는 등의 새로운 기법들이 계속 생겨났다.
단, 공화정까지의 로마는 조각분야에서만은 일체의 진보가 없었다. 아니 필요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창조에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지중해 대부분의 지역을 다스렸던 그리스는 그 모든 지역에 식민도시를 건설했고, 도시마다 신전과 호화로운 주택과 광장과 분수와 야외음악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곳에 빼어난 장인의 솜씨로 빚은 아름다눈 조각품들을 넘치도록 만들어 전시했다. 그리스가 지배하던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한 로마는 조각에 대해서만은 새로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냥 가져오면 그 뿐이었다. 그리스인들만큼 아름답게 새로 만들 자신도 없었다.
나쁘게 보면 강탈 내지는 약탈이 되는 것이겠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멸망한 나라의 버려진 영토에 페허더미속에 나뒹굴던 조각품들을 가져다가 최상의 조건이 수반되는 지역에 다시금 가치외 빛을 발하도록 재탄생의 기회를 부여해준 것이다.
그중에서 한가지를 짚어본다면..........
가이드를 통해 정보를 얻은 당신은 이 조각품이 어느시대 어느나라의 작품인지를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어쩌면 지금 이 글을 통해 조각품의 사진을 접하게 되는 사람 중에도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엄연한 사실이다.
로마의 바티칸 미술관에 가면 너무도 유명한 '라오콘 상'이 있다.
한국인들에게도 익히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는 작품이기에.........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작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것일까? 로마를 여행하면서 바티칸에 전시된 이 작품을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한 로마시대의 조각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아니다. 그리스 시대 작품이다. 더 정확하게는 헬레니즘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기 1506년 우연히 로마에서 발견되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라오콘 상)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굳이 가장 크게 영향 받은 사람을 둘 꼽으라면 당연히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드로 다빈치일 것이다. 숭고하면서도 비장감이 감도는 라오콘의 표정은 정말로 살아 있는 듯 하다.
이 (라오콘 상)은 그리스의 대표적 무역항이었던 로도스에서 만들어진 직품이다.
이게산드로스와 이테노도로스와 폴리도로스 세사람의 합작품이라고 하니, 이름의 성씨가 같은 것으로 보아 아쩌면 작품속의 등장 인물들 처럼, 아버지와 두 아들이 합작한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무수히 많은 그리스 조각품 중에서 이 작품을 유독 아끼고 사랑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조각상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화가 그들 민족의 탄생 유래와 밀전한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대단히 복잡한 전쟁이다.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란 한 국가간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신의 아들인 아킬레스는 물론 신들까지도 참여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신인 아테나와 포세이돈. 헤라 여신은 그리스 연합군을 지웠했고, 아폴로와 아프로디테 여신은 트로이를 지지했다.
아킬레스가 헥토르를 이기면서 전쟁은 쉽사리 끝날것 같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트로이는 여전히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며, 하나로 똘똘 뭉친 트로이는 여전히 강했다. 거기다 아킬레스가 독화살을 맞고 죽으면서 전쟁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그때 유리시즈가 (트로이 목마)라는 기발한 발상을 꺼내게 되고, 거대한 목마를 트로이 성 앞에 남겨놓고 그리스 연합함대는 일시에 철수를 한다.
승자의 전리품으로 여겨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찰라 포세이돈을 섬기는 신전의 제사장이었던 라오콘은 트로이 멸망에 대한 신탁을 받게된다. 성벽으로 달려간 라오콘은 목마속에 트로이의 존망이 걸린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외치면서 목마를 향해 활을 쏘고 횃불을 던졌으나, 이미 승리에 취해 있는 트로이의 왕과 병사들에게 무시되었고 저지당한다.
이에 시껍을 한 포세이돈이 분노를 표출하면서 두마리의 뱀을 보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물어서 죽게했다는 전설이 조각상의 배경이 되었으며, 트로이는 멸망해서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런데...... 이 라오콘의 천기누설을 유심히 살폈던 아이네아스가 극히 일부의 측근들을 거느리고 트로이의 함락직전에 빠져나오게 되는데........ 여기에서 파생된 전설이, 그들이 사라진 신비의 대륙 아틀란티스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다른 한가지 이야기로........ 이탈리아로 도망쳐서.......로마의 시조인 로물루스와 레물루스의 조상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후자의 이유를 들어 '라오콘 상'을 중요시 하고 있는 것이다.
Travel>
어디를 가나 현재의 로마는 과거 번성했던 옛 로마의 유적 위에 흙을 돋우고 새로 세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무대고 땅을 조금만 파고 내려가다 보면 나타나는게 신전이요 무덤이요 목욕탕이요 전차경기장이며 원형경기장이다. 차량이 씽씽 달리는 도로 중간의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2.0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왕궁과 신전의 터가 페허가 된채 부러진 기둥을 베개삼아 누워 있다. 대리석 계단은 지금 당장 사용해도 될만큼 보존 상태가 좋고, 바닦을 대리석으로 마감한 것이며 수놓은 문양과 모자이크가 황홀하기 까지 하다. 그 페허 위로 여전히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아우쿠스투스의 포럼'이 참으로 옛 영광스럼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또하나 놀라운 것은, 페허된 신전의 바닦으로 현대의 생활하수관이 지나가고 있는데, 놀라움게도 현대의 하수관이 1천 육백년전에 건설된 고대로마시대의 하수관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고대의 하수도 시설이 오늘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서기 4세기경의 로마는 아치와 콘크리트를 이용한 기념비적인 건축물뿐만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용성을 우선으로 설계된 하수도. 교량. 고가 수로와 함께 포장도로의 건설(로마의 포장도로는 약 8만km에 이른다)에 박차를 가했던 때문으로...... 오늘까지도 그 후손들이 그때의 덕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봄에 상수도 공사가 시내 한복판을 지나면 가을에 전기 공사내지 도시가스 공사가 또 재개 되고, 년말이면 어김없이 보도 불럭 교체가 반복되는 대한민국과......... 1.500년전 조상님이 설치하신 하수도를 여전히 사용하고, 2.000년 된 포장도로를 여전히 그대로 사용하는 로마와 유럽의 다른 수많은 도시들......
왜?
보도 블럭 만드는 사람과 하수도 공사 종사자와 가족들....... 등 등 등........ 상당수의 관계자가 한 표의 투표권을 가진 분들이시고........ 몸쓸 국회의원들이랑 여의도가............. (난 그렇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그렇게 그렇게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걷다보니 (통일 기념관)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본래 이름이 (비토리로 에마뉴엘 2세 기념관)인 통일 기념관 옆쪽으로는 아담한 정원처럼 꾸민 언덕길이 기념관 왼쪽을 휘감아 돌아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그 위가 바로 캄피돌리아 광장이다. 당연히 그리 올라갔어야만 하는건데........
보수공사 중으로 철저하게 보호막으로 둘러쌓여 있는 현장을 연실 두리번거리며 돌아가다 보니 열려진 구멍으로 보이는 수없이 늘어선 열주(기둥)들의 행렬.
바로 (도리안 포룸)이었다. 시도는 해 보았으나 사진이 제대로 찍혀지지 않았다. 대신 바로 옆에 아주 높게 서 있는 (도리안 원기둥)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원기둥' 이라는 표현이 어색하다. 그냥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이집트 처럼 사각형의 아주 높은 탑을 쌓거나 여기처럼 둥군 대리석을 쌓아 올리거나, 아니면 일반 바위를 깍아 높게 탑을 세운 뒤 그 위를 청동으로 감싸는 등의 방법이 있고, 겉표면은 상형문자나 정교한 부조를 통하여 위대한 전투나 위대한 왕의 업적을 새겨 기록으로 나타내는 기념탑이다. 실로 놀라울 만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감아 올리듯 섬세한 조각들이 나선형으로 위로 위로 이야기를 이끌고 올라간다. 정교한 조각 기술은 정말 예술이다. 사다리차라도 있었으면 끝가지 올라고 싶었다.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맞으면서 바로 옆 소나무 아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벤치에서 한참동안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로마의 민낯을 구경한다.
그러다가 소풍인지 야외수업인지 나온 초등학생 모습의 아이들이 길게 줄을 이어서 차도를 건너기에(유럽까지 가서 기사도 흉내 낸다고) 달려오는 차를 막아 서기도 하고 손짓 발짓으로 어서 건너라고도 하다보니....... 그만 쫄래쫄래 벌써 아이들을 따라 기념관 계단을 오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뭐 어때? 한국 할아버지도 용감하고 자상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는건데......... ㅎㅎ. 까짓 캄피돌리아는 내일 가면 되지 뭐.' 라고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끝내 다시는 캄피돌리아에 되돌아 갈 수가 없었다.
(비토리오 에마뉴엘 2세 기념관)을 보고 있노라면 이탈리아 사람 못지않고 나 역시도 뭇 상념들에 빠지곤 한다.
여행객들에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웅장한 대리석 건물이지만, 위대한 건축물을 이미 많이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굳이 현대에 들어서 이렇게 잔재미가 없어보이는 대리석 덩어리를 꼭 세워놓아야 했을까 하고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건축물이라 한다. 현지인들은 이 기념관을 '웨딩케이크' ' 타자기' 라고 놀려 부른단다.
'쿠스타프 에펠'이 생각난다. 오늘날에 (에펠탑)이 없는 파리를 생각할 수 있을까? 파리를 찾아가는 이유 내지는 파리에서 가장 먼저 하고픈 일을 꼽으라면 당연히 에펠탑에 올라 파리를 내려다보는 일이라고 나는 대답할것이다.
하지만 (에펠탑)이 처음 생겨났을때 모든 파리지앵들은 불쑥 솟아오른 쇳덩어리와 에펠을 맹 비난하고 나섰다. 고전미 넘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파리에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하여 종국엔 이런 조크까지 생겨났다. '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지 않는 방법은?'
'에펠탑에 올라가는 것' 이라는게 답이었단다.
여행객은 열광하고 현지인은 경멸하는 대리석 덩어리인 비토리오 에마뉴엘 2세 기념관.
놀랍다. 한 두 덩어리라면 모르겠는데..... 어디서 이렇게 뽀얗다 못해 새하얀 대리석들을 캐낼수가 있을까?
베네치아광장 가운데 공원에서 올려다보는 기념관은 정말 장관이다.
광장과 분수대와 여러 조각상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대리석 계단을 오르면 중앙부에 우뚝 기념관의 주인공이신 황제의 기마상이 서있다. 크기만도 12m에 이른다니 그냥 보기만해도 느껴지는 위엄과 중압감이 상당하다. 기마상 아래는 1차대전까지 이탈리아를 위해 순직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꺼지지 않는 불과 함께 놓였다. 멋진 근위병이 항상 그곳을 지키고 있어 여행객의 카메라 셔터가 멈출줄을 모르는 명소이다.
박물관으로 운영중인 실내 계단을 올라 본 건물 상층부의 테라스레 나서면 베네치아 광장은 물론 산 피에트로 성당 등 인근의 로마시내 풍경을 훌륭한 시선으로 바라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기념관 지붕의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엘레베이터(유료)가 있었는데 로마의 전경을 조망 할 수 있는 곳이 몇군데 더 있는 관계로 나는 엘레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건물 관람을 마치고 나와 베네치아 광장에서 기념관을 다시 올려다 보면서........ 이 기념관의 크기와 내뿜는 포스는 곧........ 에마뉴엘 2세의 업적이 그만큼 이탈리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인데......... 그가 시저나 옥타비아누스 보다 위대한 사람이었을까?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로마에는 터줏대감으로 교황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교황은 봉건국가들 사이를 중재하면서 자신의 교권 또한 하나의 정치권력으로 변형시켜 버렸다. 도시국가들은 귀족과 영주나 왕들이 통치를 하지만, 그 백성들의 정신세계는 교회가, 곧 교황이 지배한다는 잇점을 적극 활용하였다. 하면서 봉건국가 하나 하나를 야금야금 교황의 세력권 아래로 끌어들였다. (카놋사의 굴욕) 사건으로 중세의 수만은 봉건 국가는 왕이나 영주들이 다스리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교황의 신하로 전락했다. 바티칸은 봉건 국가들 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제국이 된 것이다. 암흑과 혼돈의 시대 1천년이 시작된 것이다. 교황은 무슨 일이던 다 할 수 있었다. 살인도 했고 전쟁도 시켰고 결혼도 했고 문란한 성생활도 즐겼다. 그가 행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다 하늘에서 허락해준 성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기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치 않았다.
영주들 간에 마찰과 분란이 계속되자 교황은 '십자가를 앞세운 허가된 마적떼'를 구성해서 '예루살렘 탈환' 이라는 파렴치한 전쟁을 벌인다. '성지 탈환' '성지 수호'는 허울뿐인 거짓말이었다. (면죄부)를 전면에 내세워 봉건영주들의 항복을 받아냈고, 항복한 영주들의 재산으로 전쟁 비용을 충당했다. 거기에 온갖 추잡한 범죄자들을 성스러운 군대라는 이름으로 끌어모아 장거리 원정대를 꾸렸다. 뿐만아니라 상당수의 영주와 불량배들에게 각기 다른 또다른 별도의 업무를 밀명을 통해 하달했다. '너는 조거를 너는 이거를 또 너는 나중에 업무를 가르쳐 줄께. 단 모두가 극비라는걸 명심해.' 라고 일단 보낸 후에 소상한 작전명은 카카오 톡(전서구)를 통해 하달했다.
성스러운 전쟁은 없었다. 살인과 방화와 강간과 약탈과....... 또 다른........ 깊은 종교적인 내막만이 존재했다.
돈이 딸리자...... 교황은 면죄부를 마구 팔아 댔다. 이미 내가 지은 죄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지을지도 모르는 죄와 내 조상이 지은 죄와 먼훗날 하늘나라에 가서 지을지도 모르는 죄에까지 값을 매겨서 팔았다. 수돗물을 퍼다가 성수(만병통치약)이라고 속여서 마구 팔았다.
여기저기서 심하게 부작용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 루터와 캘빈이 들고 일어났다. 종교 개혁과 함께 교황의 위신은 나락까지 떨어졌다.
덕분에 이젠 로마가 아닌 이탈리아의 운명이 교황과 함께 파산에 직면하게 되었다.
주변의 많은 민족들이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점령 지배를 하기 시작했다. 옛 위대한 제국의 기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피지배국으로 전락했다.
외세의 지배에서 겨우 살아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 들은 또다시 자신들 끼리 전쟁을 벌이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는 여전히 부활을 꿈꾸는 교황(바티칸)이 있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영원한 앙숙의 선두주자가 되었으며 이어서 씨에나와 피렌체가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이들의 암투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거의 19세기까지 이어진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대혁명을 게기로 유럽은 새로운 시대정신에 눈을 뜨게 되고, 마침내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뉴엘 2세가 나타나 북부 이탈리아를 통일하면서 '하나의 이탈리아'를 외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또 하나의 영웅인 '가라발디'가 시칠리아에서 통일 운동을 시작해 전 남부 이탈리아를 통일한 뒤, 이 영토들을 에마뉴엘 2세의 이탈리아 왕국에 바침으로서 이탈리아는 오늘날과 같은 통일을 비로서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씨에나와 피렌체,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이 순간에도 스포츠나 모든 분야에서 서로 경쟁을 넘어 현대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 와중에 교황(바티칸)도 기적적으로 부활에 성공한다.
파시스트였던 뭇솔리니와의 협약에서 바티칸을 이탈리아 로마 안의 또 다른 하나의 국가 (바티칸 공국)으로 승인 받으므로써 엄연한 하나의 국가로 존립하게 되었다.
뭇솔리니는 왜 바티칸을 떼어서 완전한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 주었을까? 왜?
예수님의 친필 싸인이 든 면죄부라도 샀을까?
뭇솔리니의 군대는 총탄에 맞아도 죽지 않는 불멸의 용사로 만들어 준다는 약속이라도 받았을까?
아님 교황과 의형제라도 맺었을까?
Roma.
거꾸로 쓰면 Amor.
'사랑' 이라는 말이 된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 로마라는 신기한 도시에는 이미 사랑이라는 마법이 걸려져 있는것만 같다.
누구라도 로마에 가게되면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고 사랑하게 될것만 같다.
옛날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4세는 로마를 찾아오는 여행자가 3주를 채우지 못하고 작별인사를 오면 '안녕히' 라고 했고, 석 달 이상을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에게는 '우리 로마에서 다시 만납시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로마는 며칠 머문 여행자는 쉽게 떠나지만,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로마를 떠나기가 어렵고, 혹 떠나게 되어도 꼭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의미였단다.
그럴까봐....... 그럴까봐서 나는 꼭 3박4일만 머물기로 이미 작정을 했었는데......
불과 하룻만에......... 난 이미 로마와 사랑에빠져 버렸다.
자. 이제부터 무작정 발길 닿는대로의 로마의 골목길을 들어가 볼까?
낯선곳,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걷는 즐거움이야말로 여행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무엇인가 미리 준비를 하지않아도 헤아릴수 없는 만남과 기쁨과 즐거움이 예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곁을 지나면서 반갑게 인사하면 어느새 내 손을 잡아 이끌어 의자를 내어주고 커피를 건네온다.
꽃파는 할머니 옆을 지나면 인사를 하면 장미 한송이를 건네준다.
어느 골목에 서서 턱을 괴고 벽면에 타일로 만든 모자이크를 유심히 보다보면 자나가려는 할아버지 길목을 가로막고 선 나를 깨닫는다. "아임 쏘리' 하고 비켜나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지나가신다. 다시 턱을 괴고 모자이크를 보노라니..... 방금 지나가신 할아버지가 다시 되돌아 오면서 라틴어로 뭐라 연실 떠들어 대신다. 당황해하는 내 손을 잡아 이끌며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니, 할아버지 가르키는 손끝에 방금 보았던 모자이크를 만든 사람의 솜씨가 분명한 또 다른 모자이크가 벽면에 붙어있다. 내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동안 옆에서 계시던 할아버지가 또 내 손을 잡아 끈다. 연실 혼자 떠드시면서....... 결국 동네 골목을 한바퀴 돌았다. 동네에 살던 한 예술가가 동네 골목 여기저기에 마치 장난하듯이 작품을 만들어 숨겨놓듯이 전시해 놓았다.
여행이란게 뭐 대수겠어?
이런게 여행이지. 이게 내가 바라고 허구헌날 하고 다니는 여행 모습이다.
해질 무렵. 하루 여행을 마치기 전에 테르미니 역으로 갔다.
온 종일 걸으면서 고심을 했던 (피렌체 여행)을 당일치기로 모레 가는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는 시칠리아행 야간열차를 미리 예약하기 위해서다.
Tip>
유럽여행을 하면서 이탈리아를 거쳐가는 정도의 일정이라면 (유레일 패스)에 목숨걸지 말라.
이탈리아는 프랑스나 독일. 스의스에 비해서 기차요금이 제법 저렴한 편이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유레일 패스 소지자라도 사전 예약시에 제법 큰 금액의 예약비를 별도로 징수하기에 유레일 패스라 해도 별로 이득이 되지 못한다.
그때 그때 역 구내에서 자동판매기를 통해 표를 사는 보편적 방법이 가장 이득이라고 생각된다.
단 야간열차를 이용하는 먼 구간이나 이웃나라로 이동할 시는 예약을 빨리하면 빨리 할 수록 커다란 이득이 된다. 장거리 야간열차의 경우는 항공권 구입시와 동일하게 일찍 사전 예약을 할 수록 훨씬 요금이 싸다. 출발 24시간 전 정도는 많이 많이 비싸진다.
이럴 경우 철도회사 부스가 길게 늘어진 창구를 찾아가면 외부 테이블에서 대기 순번 번호표를 뽑아주면서 내가 필요한 서비스에 맞는 창구 번호를 알려준다. 기다렸다가 부스로 가서 매니저에게 상황을 설명하면 컴퓨터 검색을 통해 즉석에서 티켓을 발행해 준다. 별도의 수수료 없다.
혹시나 상담시 언어적 장애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미리 백지에 메모를 하라. (2018. May. 21. 16:00 ~ 21:00. Amsterdam) 정도는 적을 수 있지 않겠는가. 부스의 매니저는 즉각 알아본다. 5월 21일날 16시에서 21시 사이에 암스텔담으로 가는 표를 찾는구나 라고......... (당신은 이미 자유여행자가 된다)
두 장의 티켓을 받아드는 순간...... 나는 이번 로마에서의 여행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마친것이다.
실컷 여행을 즐기다 기차에 오르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의 아무런 준비도 필요가 없다.
다음의 고민은 아마도........ 기차가 이탈리아 남부의 메시나 해협을 건너서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도착하고난 후 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 내일 여행 스케줄을 살펴보아야만 하겠다.
조크 한마디 더.
이탈리아 기차여행에서는 좌석 배정이 없는 기차는 상관이 없겠으나, 차량과 좌석 배정이 있는 기차는 꼭 좌석을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시칠리아를 가는 기차에 올랐는데 친해진 사람이 있어서 차량을 건너가서 노닥거리다 보면 영원히 목적지에 못가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여덟량의 객차를 달고 기차가 출발했다고 치자. 메시나 해협을 건너면 메시나 역에 정차를 하는데 여기는 분기점이다. 오른쪽으론 카타니아를, 왼쪽으로는 팔레르모를 가는 철로다. 기차를 갈아타는게 아니라..... 잠깐 사이에 새로운 기관차 하나가 더 와서는 객차를 앞과 뒤로 뚝 반 짤라서는 각기 매달고 다른곳으로 간다.
다음 이야기에서...........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