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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한과의 조우
Lee, Esther 1
나는 간호원이다. 그 때문에 늘 바쁜 일정에 시달리며 살아 간다. 나는 오늘도 떨어지지않는 발걸음을 옮기기에 앞서 동료들과 이별의 인사를 나누기 위해 미스 박, 미스 김, 미스 정, 나 퇴근한다. 하고 말하였더니 언니! 우리들은 버리고 혼자만 갈 거야? 언니, 우리도 같이 가면 안 되요? 하며 억지를 부린다. 너희들 맘대로 해. 입원 환자야 어찌 되든 따라 나서렴. 그럼 병원은 누가 지키지? 이 어리석은 동포들아. 너희들은 양력설에 휴가를 받아서 몇 일씩이나 잘 다녀오고서도 왜 꼭 내가 퇴근 하려면 그 야단들이냐. 언니, 밖이 어두워지고 있어요. 우리 걱정은 말고 빨리 가세요. 그리고 우리대신 맛있는 것 실컷 먹고 내일 돌아오실 때 많이 싸 갖고 오시는 것 잊지 마세요. 언니, 참 우리 심심한데 군밤이나 좀 사주고 가실래요? 그래. 누구든 빨리 따라 나와. 따끈따끈한 군 고구마와 군 밤을 사 줄께. 그런데 리어카 장사 아저씨 지금도 계실까? 언니, 오늘은 왜 이리 춥고 썰렁한 바람이 부는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드네요. 어서 더 늦기 전에 떠나도록 하세요. 그 옷 너무 멋지네요. 하지만, 언니, 새하얀 가운 속에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이 하얗고 아름다운 미모의 평소의 언니 모습보다는 조금 못한 것 같네요. 그런데 혹시 어떤 늑대가 나타나서 예쁜 우리 언닐 잡아 갈지도 모르니 늑대 주의하세요. 언니. 얘-들아, 오늘은 웬 사설이 그렇게 많으냐? 먼 길 떠나는 사람 보내듯 사설이 길구나. 너희들 7호실 환자 잊지 말고 자기 전에 꼭 처방대로 처치해 주고 하여튼 알아서 해. 정신차리고 책임감 느껴서 해. 잠이 오면 눈에다가 지게 작대기라도 버티어놓고, 알았지? 알았으니 염려는 붙들어매시고 잘 다녀 오세요. 일단 이별을 고하고 한 십분 정도 걸어서 종로 사거리에 도착하니 오늘따라 휘황찬란한 네온 사인이 검푸른 밤을 수 놓은 듯 번쩍이며 그 빛을 드러내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방이 점차 어둠 속으로 잦아들고 있는 가운데서도 떠들썩하게 붐비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춥고 어두운 이 밤, 저들은 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들의 목적지가 어딘지는 비록 잘 모르나 그들 역시 무척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길 거리에는 차갑고 거센 바람이 휘몰아쳐서 바람이 한번 불적마다 지저분한 휴지 조각들이 이리 저리 흩날리고 계속 뽀얀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하필 오늘은 외래환자가 너무 많아서 계속 환자들을 진료하고 나니 벌써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날씨는 춥고 마음조차 을씨년스럽기 까지 하여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아득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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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주는 마음은 나를 마치 집 없는 나그네인양, 고아처럼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고 싶도록 쓸쓸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어떤 석연 치 않은 불안감 속으로 나를 몰고 갔다. 내일이 음력 설날, 즉 초하루 날이니 오늘 그믐날 밤은 평소와는 달리 발걸음들이 부산스러울 수밖에------- 달리 설명을 할 필요조차 없이 기분이 들뜨고 묘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버스 정거장에 도착해 맨 뒤에 줄을 섰다. 내 앞에는 연인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팔짱을 끼고 다정히 서 있었다. 그들은 술에 만취하여 오늘은 택시를 잡기 어려우니 시간만 낭비하지말고 버스를 이용하자는 둥 조금만 기다렸으면 벌써 택시를 탔을 것인데 하며 잠시 서로의 의견이 엇갈리고는 있었으나 그들은 나름대로 야릇한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주위는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잦아들고 있었으며 그 어둠 속으로 수 많은 무리들이 소리없이 빠져들고 있었고 밤은 자꾸 어둠의 무게를 더해 갔다. 나는 길 잃은 이방인처럼 낯선 사람들 속에 홀로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고 그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초해 지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오른 손엔 핸드 백을, 왼손엔 미리 작만해 놓았던 선물 꾸러미를 들고 서서 나는 생각 했다. 이 작은 선물들이 나의 가족들의 작은 행복을 위해 더 없이 귀중한 선물임을 새삼 느끼는 순간, 더욱 소중히 부여 안고 버스 의자에 피곤한 몸을 기대고 앉으니 드디어 하루의 긴장이 조금씩 풀어지고 피곤이 물밀 듯 밀려 왔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광화문 네거리에서 버스를 갈아 타야만 서대문 밖에 있는 우리 집에 당도 할 것을 생각하니 만약, 조금만 정신을 못 차리고 한 정거장이라도 더 간다거나 미리 내린다면 이렇게 어둡고 추운 밤에 정신없이 헤맬 것을 생각하니 새삼 불안한 마음이 들어 해이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고 정거장을 마음으로 더듬어서 드디어 광화문 네거리에서 내렸다. 평소에 익히 잘 아는 길이었지만 밤인지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갈현동 가는 버스에 오르고 나니 후유, 하고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고 한결 마음이 안정 되었다. 아까 보다는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버스 내부에는 듬성듬성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날씨가 제아무리 춥고 몸이 아무리 고단해도 막차를 타야만 하는 인생들! 정거장마다 버스가 승객을 토해내고 새로운 손님들이 오를 때마다 옷자락에서 찬바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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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영하 십 오도까지 내려갔다며? 간밤은커녕 지금도 영하 십 오도 라던데, 승객 중 한 남자가 과장스레 몸을 후들후들 떨며 예쁘고 돋보이게 잘 포장된 선물 꾸러미를 겨드랑이에서 무릎으로 옮기며 하는 말이 여보게,
해마다 음력설 때쯤 되어서는 굉장히 춥지 않았던가? 둘 중 한 남자가 종전보다 더욱 유난스레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옆에 앉은 친구인 듯싶은 사람이 “자네 웬 선물을 그렇게 많이 샀는가” 하고 물으니 여보게, 우리집은 원래 대가족이 아닌가? 부모님을 비롯해서 여우 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귀여운 자식들 몫까지 다 챙기다 보니 돈도 꽤 많이 들었네. 하며 그 신사는 양손에 선물 꾸러미를 각각 들고 일어서며 자, 나중에 또 만나세. 새해 복 많이 받게. 자네도 복 많이 받게. 하며 서로 다정스레 인사를 끝낸 후 그 신사는 은평 역에서 내려 총총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런데, 아까 종로 네거리에서 버스를 탈 때 같이 탑승 했던 총각이 아직도 내리지 않고 힐금힐금 자꾸 나를 쳐다보는 것이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내 신경을 더욱 더 자극 했다.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그의 강렬한 눈빛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주 창 밖을 주시하곤 했다. 휙휙 내달리는 차창 밖은 여전히 회오리 바람이 일고, 밖은 점차 주위를 분간키 어려울 정도의 짙은 어둠의 굴레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어쩐지 내 마음은 환한 불빛을 그리워하는 서글픈 심경으로 변하여 자꾸만 처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버스가 정거장을 하나씩 지나칠 적마다 나의 보람을 하나하나 떨구어 보낸 듯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버스는 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밤 바람을 가르며 쉼 없이 달려 어느새 또 다른 정거장에 멎어서 손님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새로운 손님을 한 두 명씩 태우고 어둠 속을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동짓달의 악착 같은 추위보다 더욱 오싹한 소름이 끼치고 또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퇴근 하여 병원문을 나설 때부터 왼지 마음은 들쑤셔 놓은 벌집처럼 뒤숭숭하고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원인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는 내 자신에 은근히 울화가 치솟아 오르며 어찌해야 나의 이 불안한 심사를 후련하게 가라앉힐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허허로운 겨울 밤 풍경 속에 나는 갇혀 있었고, 내 마음 속엔 원인 모를 근심이 태산처럼 딱 버티고 서 있으니 아! 순간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말은 지금 이 순간을 두고 누가 미리 예견하여 지어 낸 말인 듯 무거운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아까부터 나에게 강렬한 시선을 보내는 그 남자가 어쩐지 마음에 불편함을 주었다. 나는 드디어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치지 않고 내렸다. 버스 정류소 앞 현대 극장의 네온 사인이 황홀한 빛으로 밤거리의 손님들을 계속 유혹하고 있었으며, 나는 냉정하리만치 극장 입구에서 서성이는 인파를 무시한 채 발걸음을 집으로 재촉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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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부터 나를 힐금힐금 쳐다보던 그 사나이가 나의 옆으로 다가서며 저ㅡ 실례지만, 추운데 차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을 느끼며 당황한 나머지 저는 지금 시간이 없는데요. 실례하겠어요. 하고는 아예 상대방의 의견은 무시한 채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 했다. 그가 묵묵히 내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을 느끼며. 내가 문화의원 앞까지 왔을 때 그가 재빨리 내 옆으로 다가와서 하는 말이 젊은 사람끼리 차 한잔 나누는 것이 무에 그리 나쁩니까? 나는 순간, 시비조로 나오는 그를 상대하고픈 생각이 전혀 없어서,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요? 내일 낮에 만나면 어떨까요? 내일이 음력 설날이라 지금은 우리 가족들이 저를 무척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안 되요. 하고는 황급히 걸음을 재촉 했다.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이런 괘씸한 사람 같으니 지금이 밤중이 아니고 대낮이라면 그리고 내가 이 사나이보다 힘이 세다면 이런 경우에도 나는 당황치 않았을 터인데 하며 여하튼 지금의 이런 상황에서 내가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을 마음속으로 강구하고 있는데 그가 밤의 악마처럼 계속 나를 따라오면서 케이크 상자와 통닭 튀김인 듯한 봉투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 사실은 제가 이 근처에 있는 제 친구 집을 찾아 온 것인데요, 한밤중이라 찾을 수 없으니 대신 댁의 식구들이나 갖다 주세요. 하며 은근히 선물로 인심을 사려는 눈치였다. 제가 왜 남의 것을 받아요? 저는 그런 것 필요 없어요. 하고는 계속 따라오는 그를 보니 화가 치밀었지만, 밤거리의 찬바람보다도 더욱 내찬 모습으로 서둘러 뛰다시피 걸어 가는데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하는 말이 “일단 사나이가 뜻을 세운 이상 그냥 물러 설 수는 없소” 하며 차 한잔 하자는데 왜 그리 도도 하십니까? 하며 내 앞을 가로 막으며 핸드백을 빼앗으려 들기에, 안돼요. 정 이러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하자 나는 도둑이 아니오. 이 밤중에 소릴 지른다고 누가 나오기나 할 줄 아시오. 하고 오히려 내 팔목을 잡아 당기는 힘이 어찌나 센지 나는 아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왜 이래요. 이 팔 놓고 말씀 하세요. 나는 순간 꾀를 내었다. 저- 오늘은 이왕에 늦었으니 내일 만나지요? 하며, 제 직장 전화번호를 적으세요? 하고는 얼른 아버지의 직장 전화 번호를 가르쳐 주었더니 하여튼 전화번호는 일단 적겠어요. 하며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수첩을 꺼내어 적는 동안에 나는 온 속력을 다 내어서 어둠침침한 골목길을 마구 달렸다. 아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만큼 빨리 달려 본적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삼십육계三十六計에 줄행랑이 제일이라더니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달렸지만 어느새 쏜 살 같이 달려 와서 내 팔을 잡아 당기며 내 속 좀 그만 태워요. 아가씨! 하면서 하는 말이 나는, 아가씨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 어떤 운명적인 사랑을 느꼈어요. 나는 아가씨를 반드시 나의 아내로 삼아 평생 아끼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려고 결심했어요. 하며 나는요 절대로 아가씨를 그냥 돌려 보내지 않을 겁니다. 이런 생떼가 또 어디 있을까? 술도 안 취한 사람이 이럴 수가---- 나는 그에게 빌다시피 말했다. 제발 저를 좀 보내 주세요. 내일 아침에 현대 극장 앞에 있는 약속다방에서 만나기로 할 터이니, 시간은 댁에서 정하세요. 하며 사정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는 나를 믿으려 하질 않았다. 내일 만나자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어요? 나는 정말 기가 막히었다. 점점 그의 거칠어지는 숨결소리를 들으며 버스를 탈 때부터 원인도 모르게 나를 휘감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을 깨달았다. 절망이 순식간에 밀물처럼 나에게 엄습해 옴을 느끼며 다급한 마음에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참지 못해 “사람 살려요” 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내 소리는 주위에 세찬 바람소리에 섞여 들어 얼어 붙은 듯 의외로 모깃소리만큼이나 적어서 이 추운 밤에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살리기 위해, 나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정녕, 춥고 어두운 밤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을 몸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렇게 머리끝이 하늘로 치솟고 몸이 오싹오싹 조여 오는 두려움은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혹여 이 사람이 강도로 변하여 나에게 예리한 칼이라도 휘두른다면----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순간, 내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지 않은가? 생각은 자꾸 부정적인 곳으로 가지를 쳐 나가고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어느새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저를 이 악마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밤 바람은 윙윙 소리치며 허공을 가르며 지나치고, 밤은 시커먼 바위처럼 우두커니 대지에 머물러 이 두려운 어둠 속에서 나는 속으로 계속 부르짖었다. 당신의 생명으로 사랑의 등불을 밝혀 주소서! 내게 씌운 멍에는 억세나 이를 끊으려 허덕이는 내 마음은 너무나 괴롭습니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이 악마의 손에서 저를 자유롭게 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주님! 저에게 지혜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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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고 날씨는 춥고 빙판길은 미끄럽고 인적마저도 끈긴 어두운 골목길에서 추위에 떨며 두려운 가슴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졸아드는데 금방 철없는 어린아이라도 된 듯이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어 버리고픈 심정이 들며 이렇게 다급한 순간에도 엄마생각이 간절히 떠 올랐다. 국민학교 때 우리 학교의 낙성식 때” 즐거운 우리집 우리학교”라는 제목의 연극에 내가 주연을 맡았던 관계로 매일 저녁을 먹고 연극 연습하러 재 넘어 담임 선생님 댁에 갈 때, 산모퉁이 행상行喪(상여 나갈 때 쓰는 도구 모아둔 곳)도구 있는데 까지 엄마가 나를 바라다 주면 나는, 엄마! “빨리 돌아가” 하고 나는 선생님 댁이 보이는 쪽을 향하여 막 쉬지 않고 뛰어 갔다. 작고 어린 내 모습이 더 이상 안 보일 때까지 찬송을 부르시며, 처량한 달빛아래 겨울 밤은 점점 더 여물어가고 어둠은 기승을 부리고 사위는 물체를 분간키 조차 어려울 지경에 다다를 즈음 어머니는 “ 혜경아 빨리 뛰어 가라” 하시고는 목청을 돋워 더욱 큰소리로 “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그 찬송을 계속 부르시며 어둠을 쫓으며 간절히 어린자식 위해 기도하시며 발길을 돌리시던 그날도 달빛조차 없는 적막한 밤이었다. 나는 그때 엄마가 다리 난간에서 내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계셨던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떤 추억이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 손가! 어느덧 앙가슴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오스스 오한을 일으킨다. 이렇게 삭풍이 휘몰아치는 겨울 밤, 그냥 순조롭게 집에 가기도 힘 드는데 얼토당토않게 저런 악마 같은 인간이 나에게 따라 붙다니! 아유! 끔찍해. 생각하면 집에 당도할 일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당장 내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저 원수 놈을 무슨 수로 따 돌리고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당장 이 고단한 삶의 보따리를, 내게 부여된 삶의 짐을 내 팽개치고픈 생각이 들었다. 평소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어도 워낙 상황이 다급해지니 더욱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고, 엄마를 찾게 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연약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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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가로등조차 꼭 필요한 골목길에는 하나도 없었고 눈이 쌓여 녹지 않고 딱딱하게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은 사정없이 미끄럽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협소한 골목길에서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살아 남을 수 있을는지! 갑자기 싸늘한 바람이 불더니 희끗희끗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 했다. 이런 날 내리는 눈은 별로 달갑지 않은 눈인 듯싶다. 오늘 이 순간까지 고이 간직해 온 내 소중한 정조를 그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지켜야 할 터인데------ 나는 겨우 힘을 내어, “댁의 전화 번호를 적어주세요”. 이젠 시간이 너무 늦어서 다방 문도 닫았을 텐데 제가 내일 꼭 전화를 드리겠어요. 하니 그가 양복 윗도리의 속 주머니에서 명함을 찾느라고 뒤적거리는 사이에 나는 하이힐을 벗어 들고 다시 있는 힘을 다하여 어두운 골목길을 마구 달렸다. 나는 도망가다 죽게 되면 죽을 각오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엄마, 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나님! 저를 살려주세요. 나는 너무 숨이 가빠서 이대로 뛰면 얼마 더 못 가서 자연사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붙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데, 저만치 몇 발자국 앞에 어떤 키가 큰 사람이 다가오고 있질 않은가! 나는 엉겁결에 아저씨! 저좀 살려 주세요? 저기 저 남자가 버스에서부터 계속 저를 쫓아 오면서 괴롭히고 있어요. 저 사람을 붙들고 시간을 오래 끌면서 훈계를 해 주세요.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그렇게 부탁하고는 전속력을 다하여 골목길을 달렸다. 한참 달리다가 이젠 안 따라 오겠지. 하고 뒤를 돌아 본 나는 기절할 번 했으나 우리 집이 얼마 안 남았으니 사력을 다해 달리는 수 밖에 없지-- 하면서 달리다가 생각하니 조금만 더 올라가면 길 옆에 홀로 사시는 어머니의 친구 분 댁으로 들어 가면 될 것을, 하고 생각하니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지 하며 쫓기는 와중에서도 마음이 한결 후련해 짐을 느꼈다. 채 녹질 않은 눈 위에 계속 쌓인 눈을 밟으면서 약간 비탈진 골목길을 오르는데 아마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 발걸음이 오늘만큼 민첩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음지에는 눈이 녹질 않아 빙판이라 잘못 헛디디면 나는 끝장이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도 없는 캄캄한 오지에서 내 인생은 끝장을 보게 되리라. 나는 조심조심 그러나 전 속력을 경주하여 비탈지고 후미진 길을 오르면서 이세상에는 인간의 너울을 쓰고 짐승만도, 해충만도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으로 꼴불견 인간들, 나를 쫓는 이 불량배도 해충이라면, 그가 만약에 똥파리라면 파리채로 단번에 때려 잡을 수 있으련만-----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가식으로 너울을 쓴 인간 군상들이 억지로 점잖을 빼며 체면을 차리면서 군자인척하며 살아가는 꼴을 지켜보며 그런 것들의 얼굴에 침을 뱉어 주고 싶지만---- 오로지 단 한가지 힘이 부족해서, 무슨 힘이 부족 하냐고요? 권력, 재력, 돈, 모든 것이 다 부족하지요. 지금이야 우선 붙들리면 내 몸뚱이가 거덜이 날 판이니 그저 평소에 무술을 익혀 놓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 억울하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말로는 못해도 속으로야 쳐 ( )이고 싶지만 힘이 부족하니 강자 앞에 약자는 아무 죄도 없으면서 이 어두운 밤길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리는 수밖에. 아니 이 어둔 밤에 “ 사람 살려요” 해도 누구 하나 나와 보기나 하냐 구요? 나는 이러한 상상을 하며 어느새 어머니 친구분 댁 앞에 당도 했다. 저만치서 검은 물체가 이쪽을 향해서 마구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드디어 그 댁의 대문을 마구 두들겼다. 안에서 어머니의 친구 분은 영문도 모른 채 아니 왜 이렇게 늦었어? 하고 물으시기에 예. 어쩌다 보니 하며, 하도 기가 막혀 그냥 서 있는데 아니, 너 무슨 일이 있었구나. 혜경아. 너 숨기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봐. 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내 몰골을 보니 나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힐을 벗어 들고 마구 달리며 빙판길에 미끄러져 여러 차레 넘어진 관계로 스타킹은 다 찢어지어 도르르 말려 거의 무릎 바로 밑에까지 올라와 있었고, 비좁은 타이트 스커트는 이음 새 부분이 약간 찢어지어 있었고, 넘어질 때 길에서 묻은 눈과 더러운 얼룩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서 차마 눈을 뜨고 보기에 민망할 정도이었으며, 나는 아직도 마음의 평정을 되 찾지 못하여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아서 나의 심장은 미처 진정 되질 못하여 내 숨결은 거칠게 작동하고 있었으니 단박에 알아보는 것은 당연지사 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내가 지금까지 겪은 수모와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피할래야 피할 수 없었던, 현재까지의 자초지종을 겪은 그대로를 솔직히 다 말씀 드리고 이런 경우에 나도 호신술을 익혀 두었더라면 이렇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하며, 앞으로는 틈틈이 시간이 허락하는 한 호신술을 익혀야 되겠다고 말씀 드렸다. 내 말을 다 들은 아주머니는 그래서 여자들은 밤늦게는 되도록 외출을 삼가야 하는 것이란다. 하시며 그렇지만 이번 일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치곤 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보이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글쎄요. 저는 난생 처음 보는 남성이 그렇게 집요하게 나를 따라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세상이 두려워지고 앞으로 퇴근할 때는 정말 일찌감치 서둘러야 되겠다는 생각이 절실해 지네요. 나는 그 동안 너무 당황하고 긴급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생각 때문에 긴장감에 휩싸였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눈물샘이 터지려는 듯 아려와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일단 따듯한 아랫목에서 몸을 녹이고 나니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에 평정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자 아줌마. 저 이제 집에 갈래요. 하니 그럼 어두운데 잘 살펴가. 하시면서 대문 밖까지 나와서 주위를 한번 휙 둘러 보시고 나서, 잘 가. 하고 그래도 미심쩍은 듯 대문을 금새 닫지 못하시고 반쯤 열고 어둠 속에 내가 어디만큼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 보신 후 문을 닫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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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 사나이가 아직도 그 춥고 어두운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진 않겠지. 악마 같은 인간, 파렴치 한, 악한, 괘씸한 인간, 제 딴에는 이 집이 우리 집인 줄 알고 쾌재를 불렀겠지만, 천만의 말씀, 나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실컷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며, 마음 한 편에선 내가 오늘 밤에 아무 일도 안 당하고 이 집에 피신하게 된 것은 정말로 잘 된 일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혹여 그 철면피 한이 아직도 어디 멘가 숨어 있기라도 하면 다시 들어 올 태세로 한참을 관망하다가 아무도 시야에 없음을 확인하고는, 마음 속으로 아마 계속 기다린다 하여도 헛수고임을 통감하고 돌아 갔겠지. 이 강추위에 계속 밖에서 떨다간 얼어 죽는 수밖에 더 있겠어. 제 까짓 인간이, 하며 홀로 중얼거렸다. 나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 보았다. 고요한 주위엔 정녕 아무도 없었다. 오늘 같이 사는 게 두렵고 지칠 땐 외로운 길손 같은 달이라도 두둥실 떠올라 나와 같이 길동무해 어두운 골목길을 등불 되어 밝혀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믐 밤에 홍두깨 내민다더니” 원 별꼴을 다보고 살겠네. 하며 또다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우리집까지 한걸음에 당도 했으나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릴 것 같아 얼른 옷을 갈아 입고, 저녁은 먹었어요. 하며 피곤하다는 것을 핑계로 물러나와 잠자리에 누우니 잠은 천리만리 어디로 달아 났는지 좀 전에 당했던 모든 일 들이 순서대로 눈 앞에 등장하여 영화의 자막처럼 계속 나의 뇌리에 떠 올라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올빼미처럼 눈을 뜬 채로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일어나니 입맛은 소태처럼 쓰고 몸은 기진맥진하여 도저히 기운을 차리기 어려웠으나 억지로 설 차림을 먹고 주섬주섬 몇 가지를 싸서 들고 출근하는데 길에서 엊저녁에 나를 구해주신 그 분을 만났다. 참으로 우연한 일치였다. 그분도 출근하기 위해 지금 나오는 길이라며 어젯밤에는 그 남자와 시간을 오래 끌어야만 아가씨에게 유리할 것 같아 우선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아가씨를 괴롭히시오”? 하고 호통을 친 후 상의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 나는 시경에 근무하는 형사요” 하며 근처 경찰서로 같이 갑시다. 한밤중에 여자한테 이 무슨 행패요? 조사를 좀 해 보아야겠으니 같이 갑시다. 했더니 그 사나이가 하는 말이 “ 저 아가씨는 내 약혼녀인데 요즘 마음이 변했어요” 그래서 따라가서 오해를 풀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기 위해 아가씨를 만나려 했으나 굳이 아가씨가 만나 주지를 않고 도망만 가니 이런 일이 벌어질 수 밖에 없지요. 하면서 젊은 사람의 심정을 잘 아실 터인데 왜 이러십니까? 같은 남자 입장에서 저를 좀 살려 주세요 하며 통사정을 하여서 웬만큼 시간도 끌었으니 피했으리라고 생각하고 훈계한 후 돌려 보내었다는 말씀을 듣고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자초지종을 대강 얘기한 후,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엊저녁에 하나님께서 저의 간구를 들으시고 보내신 천사였어요. 선생님! 명함 한 장 주시겠습니까? 그 분은 해외공사에 근무 하시는 김석진 씨였다. 그분은 언제 시간이 나면 한번 오라고 하시면서 나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 채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이런 일이 젊은 날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으니 어제 밤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명랑하게 사세요.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이만 실례하겠어요. 하시며 가시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분께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아무리 인생살이가 문제의 연속이요, 갈등의 연속이라지만, 신나게 달리는 버스 속에서 엊저녁에 받았던 엄청난 문제로 인하여 내 마음에 겪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갈등과 끔찍한 충격을 되새기며, 이런 경험은 평생에 단 한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하며 병원에 도착하니, 찬연한 태양이 병실 창가에서 환히 미소 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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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분 전환도 할 겸 가장 흰 가운을 갈아 입고 신환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 전화요. 하길래 나는 누가 아침부터 전화를 걸었을까 하며 전화를 받았다. 아니! 이럴 수가, 나는 한동안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엊저녁에 죽일 듯이 괴롭혔던 치한이었다. 나는 아주 냉정한 말투로 단호하게 저는요, 댁 같은 사람은 아-얘 상대하기도 싫어요. 비굴하게 남의 뒤를 밟아서 내 정체를 알아 내었군요. 다시 전화 하지 마세요.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이런 늑대만도 못한 인간! 하며 돌아서는데 원장님이 허허 웃으시며 서양은 제법 냉정한 것 같지만 이미 발목이 잡힌 것 같아. 하시며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시며 입원실로 향하셨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지만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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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연세가 지긋하시고 점잖아 보이는 남자분이 진찰을 받으러 오셨는데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 혹시 간호원 댁이 갈현동이 아닌가요? 하고 물으시기에 그런데요. 하였더니 그 녀석이 사람은 제대로 보았구먼. 하시고는 돌아 가셨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여러 차레 병원을 다녀 가셨는데, 그 분은 유명한 무역 회사인 세기산업 회장님이신데 원장님과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고 언젠가 말씀하셨었다. 그분 말씀이 내가 현석이를 결혼 시켜서 미국의 지점장으로 내어 보내려고 양가 집 처녀를 택해서 수없이 맞선을 보였으나 번번히 퇴짜를 놓더니만 서 양에게는 완전히 반하였다니 이것도 보통 일은 아닌 게야. 물론 결혼은 본인들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만 양가의 부모가 서로 만나서 결정을 보는 것이 급선무이며 좋은 일은 서두르는 것이 좋아요. 하시며 돌아 가셨다. 나는 어쩐 일인지 무겁고 둔중한 물체에 머리를 한데 얻어 맞은 듯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으며 “늑대를 주의 하라” 던 그 날의 농담이 이렇게 들어 맞을 줄은 정말 몰랐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우리들은 모이기만 하면 현석 씨를 늑대라는 별명으로 부르고는 배꼽을 잡고 웃곤 하였다. 언니! 늑대 씨 안녕하시대요? 아니 너희들 정말 심심하니? 나를 자꾸 가지고 놀릴 꺼야! 너희들 나가지고 계속 장난치면 나 이제부터 너희들하고 절교 할 꺼야. 알았지! 나 화나면 무섭다는 걸 모르니? 그로부터 얼마 후 현석씨와 나는 양가의 부모님들을 모신 가운데 맞선을 보았다. 선을 보는 도중에도 지난 날 그에게 쫓기던 일이 떠 올라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했지만, 연상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르는 그의 모습을 대하다 보니 어느새 마음에 끼었던 먹구름이 점차로 가시는 것을 느꼈다. 얼마 후 나는 결코 늑대에게 먹힐 내가 아님을 과시할 수가 있었다. 나는 호랑이 띠를 두르고 태어 났는데 감히 늑대가 나를 어쩌겠는가? 결혼은 인륜지 대사라고 했는데------- 나는 틈만 있으면 현석씨와 데이트 할 때도 토라지는 일로 맞서서 그를 유도하여 승리를 하곤 했었다. 내 생각 밑바닥에는 “수 틀리면 헤어지면 그만이지” 늑대 아니면 사람이 없나 하는 대담한 생각이 가끔 고개를 들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날밤 악착 같이 물귀신처럼 나를 쫓던 일을 빼고는 그에게서 악한 성정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만나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그의 남성다운 용기는 악 하 다기 보다는 오히려 신선한 충격으로 나를 압도 해 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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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꽃샘 바람이 심술궂게 불어서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봄을 묵살 시키려는 듯 한차례의 세찬 폭풍우가 휩쓸고 간 후에 새싹들이 파릇파릇 새로운 모습으로 소생하던 어느 봄 날, 우리는 등산을 가기로 약속을 하였다. 우이동은 그다지 산이 험악하지 않은 편이니 등산화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가면 된다는 현석씨의 권고를 따라서 우이동 도선사로 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우이동 도선사는 육영수 여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묵직한 등산화에 날렵한 등산복을 입고 등산모에 선글라스를 쓰고 등산 가방을 멘 그의 모습은 아주 당당한 산 사나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승용차를 타고 도선사까지 가는 도중에 털보 기사 아저씨는 우리를
보고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칭찬 해 주셨는데 그 말이 과히 듣기 싫지는 않았다. 그는 즐겁게 지내어요. 하며 유유히 사라져 갔다. 사철 푸른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 갈수록 신비하고 오묘한 대 자연의 신비에 할말을 잃고 탄성을 지르게 할 뿐이었다. 아름다운 계곡과 기암괴석! 아름드리 나무들! 키가 훤출하게 곧게 자란 나무들이 잔가지들을 펼치고 하늘을 향하여 솟아 있다.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 크고 작은 나무들은 어깨동무 하듯 나란히 서서 싱그러움을 펼쳐 보이며 새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는 울창한 숲 속! 모두가 신의 무궁무진한 조화로 이루어 졌음을 다시 한번 확신하며 아울러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등산이라고는 별로 가 본일이 없었으니 처음부터 이리비틀 저리비틀 실수투성이였다. 발을 헛디뎌 자주 넘어지려 할 때마다 부끄럽고 공연히 따라왔다고 후회가 되었지만, 그래도 역시 등산을 오니 울적 했던 기분이 한결 가벼워 지는 것을 느꼈다. 사위는 너무나 고즈넉 했다. 현석씨는 얼마동안 나의 손을 잡고 가다가 갑자기 주위를 살피더니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러 별안간 등산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걸치더니, 강제로 나를 업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어서 내려 주세요. 남들이 보아요. 빨리요. 하면서 몸부림 쳤지만 혹시 잘못 떨어지면 둘 다 다칠 까봐 내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현석씨의 양 어깨를 더욱 힘있게 붙들다 보니 난생 처음 느껴 보는 이상 야릇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순간 여성의 나약한 성정과 남성의 씩씩한 모습을 재 조명 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석씨, 이제 그만 힘자랑 하시고 내려 주세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부끄러워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서 그것 봐요. 남들이 보고 웃잖아요. 하자 자신도 웃으며 어때요, 나 힘 세지요? 만약에 산에서 급한 일이 생기면 내가 혜경씨를 업고도 충분히 내려 갈 수 있는지 한번 시험 삼아 업어 본 것뿐 이어요. 혜경씨! 단둘이 등산하는 것 어때요? 행복해요? 하며 그는 내 손을 놓칠 새라 꼭 잡고 정상을 향하여 열심히 걸었다. 나는 어떤 것이 행복인지, 또한 사랑인지 잘 모르나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 그리고 누구나 진실한 사랑을 받을 때 행복감에 젖어 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그 동안 아리아리 하였던 내 마음이 조금씩 조금 씩 현석씨에게 호감으로 다가서는 내 모습에 나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석씨는 차츰 등산광 인 것처럼 내 눈에 비쳐졌다. 어쩌다가 산 이야기가 나오면 국내의 유명한 곳은 거의 안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다녀온 것을 자랑 삼아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진정 산을 사랑하는 산 사나이처럼 느껴 졌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내가 힘들어서 매번 바위에 앉아 쉬는 동안 포켓용 스케치 북을 꺼내 들고 열심히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그려대는 모습들을 목격하게 됐다. 전혀 그림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그 솜씨가 아마추어의 경지를 벗어난 유니크한 것으로 보였다. 저렇게 미련하고 무지막지해 보이는 사람이 취미 생활에 매우 적극적이고 부지런하기 짝이 없으며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은 경건 하기까지 하다. 그림은 스케치 풍이지만 섬세하고 우화적이며 그로테스크(Gro-tesque) 하다 고나 할까? 나는 그와 동행 하면서 스케치에 정열을 쏟는 모습을 보아 왔었지만 그저 어깨너머로 그리는 것이려니 생각 했었다. 여하튼 나는 물끄러미 처다만 볼 뿐 그 어떤 평가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잘 그린다는 말 이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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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현석씨에게로 향한 내 마음에 엷은 막이 드리워져 있던 것이,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봄 볕의 안개처럼 서서히 걷히고, 봄의 양광이 밀려 들어 오듯이 내 마음 속에 따스하게 자리잡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미련하고 무지막지하게 보이는 남성에게서 느끼는 결코 세련되지 못한 그의 투박한 모습에서 조금씩, 서서히 내 마음에 자리 잡는 정열어린 사랑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비록 내가 먼저 그를 선택하거나 사랑하지 않았을지라도 상대방의 나를 향한 그 진솔하고도 열렬한 사랑에 도취되어 그 사랑 속에서 오히려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 그리고 이미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생각으로부터 벗어 남으로서 새롭게 이전보다 더욱 굳게 다져지는 결속 감을 정직하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쪼그리고 앉아서 눈부신 봄볕을 흠뻑 쪼이며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순간, 현석씨가 나에게 다가와 다정히 내 손을 잡더니 그의 입술을 나의 입술에 포개었다. 그는 말없이 한동안 나의 상체를 포옹하며 혜경씨! 나는 이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었는지 몰라요. 사실 혜경씨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였어요. 혜경씨! 사랑해요. 나를 믿어 주세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배고프지요? 혜경씨! 내가 이제부터 점심밥을 지을게요. 하더니 미리 준비해온 코헤르(독kocher)에 밥을 앉히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놓고, 미리 준비한 재료를 섞어서 찌게도 맛있게 보글보글 끓여놓은 후 혜경씨, 등산 자주 가 보셨나요? 아뇨. 우리는 시장하던 차에 맛있게 점심을 먹은 후 같이 봄 노래를 불렀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마음도 펴요-----건너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 가---주. 나는 이렇게 단순해 보이면서도 우직한 이 사나이로부터 나에게 전해지는 미묘한 사랑이 나의 가슴 깊은 내면 속으로 서서히 점령해 들어 오는 것을 느끼면서, 연이어 고요한 희열과 사랑이 잔잔한 감동으로 일렁이는 것을 감지하면서, 나에게로 향한 현석씨의 진정한 사랑의 음성이 산울림처럼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나의 내면 깊은 곳에 격한 파장을 일으키고, 다시 메아리 쳐 오는 것을 느끼며 일찍이 맛보지 못하였던 행복감에 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주위엔 오직 단 둘이 있었을 뿐, 우리의 사랑을 감시하거나 지켜보는 이도, 박수 갈채를 보내는 이도 없었으나 오직 대 자연의 향연 속에서 산새들만이 우리들의 행복을 노래해 주었고, 봄바람은 경쾌한 왈츠의 리듬으로 연주 하였고, 그 향연은 그 어떤 아름다움과도 비교될 수 없는 풍요롭고 감미로운 마치 섬세한 무늬를 아로새긴 듯한, 예술 그 자체를 표현 하는 듯 싶었다. 티없이 베풀어 주는 대 자연의 환대 속에서, 마치 순간과 영원이 함께 어우러진 듯한 가슴 뿌듯한 “사랑의 밀어”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젊은 그들의 장래의 열망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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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닮은 한 쌍의 아름다운 남, 여의 모습! 분열을 상상 할 수 없는, 영- 불변하는 사랑의 극치는?------드디어 우리는 따스한 봄날, 수많은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며 웨딩마치를 올리었다. 우리나라 전체와 미국의 한 주의 면적이 같다는 광활한 대륙! 드디어 그곳에 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은 설레고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한달 후 태평양을 건너 LA 공항에 도착 하기 전, 미국에 오는 비행기 내에서 LA상공에서 구름사이로 보이는 따스한 봄 햇살은 우리들의 희망처럼 눈부셨으며, 바둑판처럼 반듯한 대지에 성냥갑만한 집들과 셀 수도 없이 많은 조그만 차들을 내려다 보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레임과 감동과 새로운 소망으로 가슴은 벅차 올랐다.
(부족한 제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소설부문 심사 평
<치한과의 조우> 필자는 등단한 시인이다. 시인이 소설에 손대면 기성
소설가들이 굶어 죽는다는 얘기도 있다. 소설로는 처녀작인데도 별로 나무
랄 데가 없을 정도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감이 자연스럽고 대화는 재치가
있으며 사건을 서술함에 있어서도 시적 표현이, 기독교적인 감동이, 순진
하고 매력적인 소녀의 여리고 사랑스런 마음의 동요가 잘 묘사되어 있다.
치한에게 쫓기는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과거회상 장면과 상황 설명
이 차분하여 빠트리거나 불필요한 덧붙임이 별로 없다. 긴박감을 주어 눈
을 뗄 여유를 주지 않는다. 사건 전개와 무리 없는 반전은 필자의 문학적
설득력과 문장력의 강함을 잘 설명하고 있다.단지 문단을 죄 붙여 씀으로
서 읽기에 다소 불편하였는데 이런 방식이 요즘 유행하는 추세라 뭐라고
따질 수가 없다.
이춘혜 씨의 이 작품을 기꺼이 당선작으로 추천한다.
( 심사위원: 문금숙. 박봉진. 한만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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