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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체로 이러한 식민반도사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세력의 정체는, 일제에 신사참배를 하던 친일파와 친일종교에서 친미종교로 변신해, 민족과 국가의 안위는 배제한 채 무슨 권력이던지 종교에 똬리를 틀고 권력에 기생하며 권력자들의 배설물이나 받아 먹는 민족박역자들 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의 만행으로 인해 우리 역사의 방향은 식민반도사관이 주를 이루고 독재를 미화하고, 반성은 축소하여 나아가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역사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인식 자체가 전혀 없다. 아울러 미래에 대한 전망과 희망을 제시하지 못한다. 역사와 뿌리에 대한 책임과 인식이 문중 족보 수준도 넘지 못하고 있다.
▲ 친일파 종교인들의 신사참배
역사문제에 대한 국가정책으로써 대책이 전혀 없다는 것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뿌리도 모른 나머지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친족간에도 살상을 자행하는 등 ‘헬(Hell)조선’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직후에서 정부수립 이전까지 3ㆍ1운동의 되새김은 민족주의적 의제와 긴밀히 연결된다. 당대 지도자와 각종 사회ㆍ정치세력은 자신의 민족적 정통성을 표출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하여 자기중심적으로 3ㆍ1운동을 표상하고 전유하였다. 특히 이른바 ‘우익’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정당화하는 가운데, 3ㆍ1운동을 국선도ㆍ동학ㆍ천도교로 이어지는 ‘민족정신’과, 개화파ㆍ독립협회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의 결합물로 표상하여 민족저항사의 정점으로 보는 가운데 프랑스를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조작된 잔다르크처럼, 이 땅에서도 자신들의 민족반역행위를 숨기기 위해 한국적 잔다르크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었고, 소매치기 유관순이 감옥살이를 했던 것 알고, 3ㆍ1운동의 영웅으로 묘사하여 마치 친일종교가 독립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을 도운 것처럼 조작하고 꾸며냈어야 하는 절박감을 표출해야만 했다.
유관순이 부각된 것은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에 이른바 우익과 친일파 종교인으로 지칭되는 세력에 의한 것으로, 이는 자신들의 과거인 ‘친일민족반역자’라는 과오를 면죄 받는 동시에 정치적ㆍ도덕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박인덕 (인덕대학교 설립자)
정부도 조직되지 않은 해방 직후 식민시대 친일파들은 민족반역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군 자금을 댔다는 등 갖가지 조작질을 해야만 했었다. 그 가운데서 친일종교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1947년 감리교도 박인덕(朴仁德)과 신봉조(申鳳祚)는 유관순을 조작해 이 땅에 처음 내놓는다.
박인덕은 친일단체인 녹기연맹(綠旗聯盟)의 지원으로 1941년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하면서 1945년 광복 시점까지 전쟁지원을 독려하는 연설, 논설 등으로 친일행적을 보였고, 미국으로 건너가 서구종교 선교에 힘쓴 여인이다.
신봉조 역시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국민 정신 총 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참사(參事)를 맡고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와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에도 참여하는 등 일본제국의 전쟁수행에 협력한 친일파였다.
▲신봉조(전 이화여고 교장)
친일파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러한 과거를 변명하며 해방이라는 새로운 시공간에 참여할 ‘요건’을 충족시켜야만 했으며, 박인덕과 신봉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이러한 ‘요건’, 즉 자신들의 친일을 덮고 새로운 도덕적 권위를 부여해 줄 표상으로서 유관순을 영웅으로 만들고 조작한 것이다.
1947년 8월 신봉조를 비롯 정인보(鄭寅普), 최현배(崔鉉培), 설의식(薛義植), 장지영(張志淵), 서명학(徐明學) 등 여러 인사들에 의해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가 발기되어 동년 9월 1일 조병옥(趙炳玉)과 오천석(吳天錫)을 명예회장으로, 이시영(李始榮), 오세창(吳世昌), 조소앙(趙素昻), 이청천(李靑天) 등을 고문으로 하여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이후 11월말 유관순의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竝川面)에 있던 사무소를 서울로 이전하면서 명예회장 조병옥, 회장 오천석, 고문에는 서재필, 이승만, 김구, 오세창, 이시영, 김규식을 위원에는 정인보, 최현배, 장지연 등으로 하여 조직을 재편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직구성원을 보면 미군정의 관료를 비롯하여 해방 직후 이른바 ‘우익’ 계열의 주요 인사들과 학계의 인사들, 특히 서구종교를 믿는 상해임시정부 요원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관순이 어떻게 대중들 시야에 들어왔는가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일제하 조선인에 의한 기록물들 가운데 유관순에 관한 것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국내기록은 없으니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해방운동세력들이 발행한 기록물을 보자. 1919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한민보’ 기사 중에는 1919년 4월 1일 천안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을 전하고 김구응(金球應: 1887년~1919년)과 박종만의 주도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 박은식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
3ㆍ1운동의 결과물이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은식(朴殷植)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도 유관순과 관련된 기록은 전혀없다.
유관순을 발굴해낸 이들이 서술한 최초의 《유관순전》은 처음부터 유관순을 ‘조선의 잔다르크’라고 부르며 시작된다. 이후 반복적으로 유관순을 ‘조선의 잔다르크’라고 호칭하고 유관순이 잔다르크의 전기를 탐독하는 모습이 등장하며, 또 잔다르크가 성령에 의해 구국의 길로 접어든 것과 유사한 과정이 유관순에게도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유관순으로 묘사하고 세뇌시키려는 '유관순 기념사업회'의 사업 가운데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유관순에 관한 도서출판과 영화제작일 것이다. 《순국처녀 유관순전》 간행에서도 신봉조는 상당한 활동을 했으며 이는 ‘미군정의 후원 하’에 진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유관순전》은 1948년 5월에 발표된 것으로 이를 집필한 자가 목사이자 소설가이며 해방 이후 문교부 편수국 편수관을 지내기도 한 전영택(田榮澤)이었다. 이 책의 서문은 미군정청 문교부장이자 유관순 기념사업회의 회장이던 오천석(吳天錫)이 썼다.
▲ 전영택 (1894~1968년)
전영택은 머리말에서 책의 서술 목적을 “해방 후에야 비로소 유관순을 발견한 우리는 하루바삐 우리 삼천만 동포에 알리고 싶고, 유관순의 빛나는 생애를 아는 데까지 전하며 건국정신을 힘 있게 일으키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교과서에 서술된 유관순은 서구종교의 색채가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 책 내용은 ‘조선의 잔다르크’이며, 밤에 몰래 나와 조국을 위해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유관순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특히 일제의 압제가 심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술, 노름에 빠져드는 가운데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곳은 교인들이 모이는 장소밖에 없었다.”고 서술한다. 즉 민족해방운동에서 교회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가운데 유관순은 “신의 선택을 입은 인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1948년 작 ‘유관순’은 박인덕과 유관순의 관계를 부각하며 이화를 연결고리로 사용한다. 영화각본에서의 박인덕은 유관순이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이화학당의 다른 선생에게 전하며 유관순의 변호사 선임을 도모하기도 하며, 유관순이 옥중에서 계속해 투쟁할 수 있던 원동력을 이화학당 재학시절 박인덕에게 받았던 교육을 회상하는 것으로 처리하고 있다.
▲ 영화 유관순 포스터
영화 유관순의 시나리오
①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결구도를 설정해 민족 동질성 부여
② 유관순과 잔다르크의 동일시
③ 유관순에게 서구종교의 기독교적 순교의 의미를 부여
이러한 특징은 순교적 죽음이 다가올 영광의 밑거름으로 작용해 패배주의를 넘어서며, 민족주의와 서구종교의 기독정신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미군정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협조하고 참여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 및 자본을 필요로 하는 대중적 영향력이 큰 영화제작과 같은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작품에서의 유관순은 애국심과 서구종교의 기독정신이 혼연 일체 된 표상으로 그려지게 된 것이다.
1947년 10월 기념사업회는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 각 학교에 유관순의 사진을 안치하도록 준비하는 등 유관순을 학교교육에 접목하기 위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노력했다. 1947년 11월말의 신문기사는 유관순의 업적이 교과서에 오를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또한 동아일보가 유관순기념사업회 기관지처럼 한국동란 중에도 간간히 유관순을 3.1만세운동으로 영웅화 하기 위해 보도했었다.
교과서에 직접적으로 유관순이 등장하는 것은 한국전쟁 이후 교육과정이 마련되었을 때인데, 1차 교육과정기(1954년-1963년)의 초등교육용 교과서에는 ‘삼일절’(2학년), ‘유관순’(3학년), ‘삼일정신’(6학년)이라는 단원을 통하여 유관순을 언급하고 있다.
해방 직후 유관순이 3.1운동영웅으로 발굴되는 데에는 박인덕, 신봉조와 같은 ‘이화’ 관련 인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이화’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유관순을 발굴하고 자신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새로운 도덕적 권위를 획득하고자 했다. 이들에 의해 유관순이 알려지고,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 기념사업회는 이른바 ‘우익’의 주요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기념비 건립과 전기 발행, 영화 제작 등 대중적 영향력이 큰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한편 이를 소설화 하고 영화화했던 전영택, 윤봉춘, 미군정청과 대한민국정수립에 깊숙히 관여했던 이승만과 친일파 등은 철저한 서구종교인들 이었으며, 그들이 그려낸 유관순의 삶과 항일 투쟁도 철저히 서구종교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윤관순은 가짜다- 3편에서는 유관순을 3.1운동 영웅으로 어떻게 조작했는지를 본격적으로 살핍니다.
▲ 유관순 수형자기료표 사진과 서울복식법원 판결문
-유관순은 수형자기록표에 1903년 12월 11일 출생으로 기록돼 있음.
氏名
柳寬順
年齡
光武6年 12月 11日,明治35年 12月 11日
指紋番號
87767|78768
身長
5尺 ■ 寸 ■分
1921년 유관순 수형자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는 기록표
出獄年月日及其事由
大正10年 1月 3日 滿期
歸住地 天安郡 東面 龍頭里 418 從兄 柳京錫方
#유관순은 가짜다. 이어서 3편 유관순의 영웅조작의 실태를 밝힙니다.
#대조선역사학회 특별모임 밴드에 올려진 글입니다.
(https://band.us/@greatjoseon)
본 모임은 아메리카에 대조선이 있었다는 걸 주장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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