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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섬김
<고린도전서 4:1-21>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집을 지었으면 집을 지킬 사람이 있어야 되고, 또 집을 다스리고 봉사할 사람이 있어야 된다. 출애굽기에 보면 성막을 건축하고 나서 제사장의 봉사가 나온다. 제사장을 위임하고 그들에게 성전의 모든 일을 맡기도록 위임한다. 제사장들은 그때 당시 율법에 따라 된 제사장들이었지만 그들이 입는 옷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모방하는 그것을 상징하고 예표하는 옷들이었다. 그런 옷을 입어야만 비로소 성전에서 봉사를 할 수 있었다. 성전 봉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다. 떡을 갈아놓고 등대에 불을 갈아놓고 물두멍에 물을 갈아놓고 하는 일인데 그것이 신약 안에 와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일 뿐 만아니라 자기가 그리스도로서 삶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것이 청지기의 직분이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종(혹은 청지기)으로서 섬김'이라는 제목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종의 신분
1.1. 비밀을 받은 자
그리스도의 종의 신분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비밀이신 교회!
여기 비밀이라는 말은 '신비'라는 뜻이 된다. 영어로 하면 'Secret(비밀)'이 아니고 'Mystery(신비)'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모른다. 그 미스테리한 그분을 볼 수 있게 하신 분이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모르는 분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30세 된 청년으로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라는 것밖에 모른다. 그분은 역시 미스테리다. 그분의 미스테리를 우리가 볼 수 있게 내놓은 것이 바로 교회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다.
오늘 그리스도를 성경에서만 보고, 예를 들어 동정녀에서 나왔다거나 물위를 걸어갔다거나 바람을 잔잔케 했다는 것을 알아보았자 크게 도움이 안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아는 것은 표면적인 것이다. 그분의 실재는 그때는 나처럼 육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젊은 청년이었으니 멋있을 것이지만 역시 촌사람이다.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인물이 그렇게 썩 잘나지는 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보면 이적을 행한 기이한 사람, 남들보다 좀 다른 사람이었고, 또 종교적으로 보면 엉뚱한 말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람이다. 그래서 천인공로할 말을 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하고, 또 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겠다고 하는 식으로 그때 당시로는 이 말들이 천인공로할 말들인데 그런 말들을 한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기인이라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이단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비밀이다. 그 사람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진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을 밝혀낸 것이 교회다. 그러니까 오늘 교회 없이는 그분을 아는 것이 피상적인 것밖에 모르는 것이다. 성경을 아무리 공부해도 천백번을 읽어도 피상적인 것밖에 알 수가 없다.
교회가 바로 그분의 비밀이다. 미스테리한 사람이다. 히랍어의 미스테리온이라는 말에서 미스테리가 나왔다. 신비로운 사람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을 신비롭다고 한다. 있기는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분명히 예수라는 사람이 있기는 있는데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있기는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다. 기이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못한 일을 한 사람이다. 그러다가 죽은 사람이라는 것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미스테리다.
이것을 알게 한 것이 교회다. 만일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로 말미암아 그분이 재현되지 않았다면 그분은 그냥 역사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할 수 있다. 그분을 좋아한 사람은 그분의 의인이었고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고, 반대한 사람들은 죽일 놈이었고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빌라도 같은 사람은 좋긴 좋은데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교회 때문에사도들로 말미암은 이 교회 때문에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우리 인생을 변화케 하는 분으로 전달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예수를 연구해보았자 별로 도움될 것이 없다. 교회를 더 깊이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비밀을 맡은 자! 오늘 우리가 비밀을 맡은 자다. 오늘 교회가 그 비밀을 맡은 자다. 그러니까 세상에 나가서 예수가 누구인가? 이렇게 물었을 때 예수가 누구인가 하고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 비밀의 제공자가 되어야 된다. 우리가 그 미스테리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성경 몇 절에는 뭐라고 되어있고 성경에 보니 동정녀로 탄생했다고 하고 물위를 걸어갔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알렉산더가 이렇게 저렇게 했다는 말과 똑같다.
오늘 우리가 그 비밀을 맡은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도 확실하게 알아야 되고 깊이 알아야 된다. 우리 교회가 지금 많은 문제가 있다. 정통이라면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해도 아무 상관이 없고 몰라도 상관이 없고 알아도 상관이 없는데 예를 들어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하면 왜 이단이라고 하는가를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된다. 그 소리를 듣고 그냥 와버리면 그 사람은 우리를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로 그들에게 드러나야 된다. 이것을 못하다 보니까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알아버리는 것이고, 자기들끼리 생각하고 넘어가 버린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다. 예수가 누구인가?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거기에 대해 누가 그분이 참으로 이런 분이라는 것을 말해 줄 사람이 있겠는가? 그것이 비밀을 맡은 자들이다. 우리가 건성으로 들으면 누가 그런 말을 해도 달팽이처럼 쏙 들어가서 둥글둥글 굴러가 버린다. 달팽이가 쭉 내밀고 있다가 누가 오면 쏙 들어가서 자기는 모르는 체하고 굴러간다. 대구교회에 왔을 때는 참 좋았는데 밖에 나가니까 누가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쏙 들어가서 나 몰라라 하고 둥글둥글 굴러가버리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그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우리가 밝혀주는 것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일이 된다. 그런 반문이 오고 질문이 온다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표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그 기회가 아니고 우리가 일부러 찾아가서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붙들고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면 일이 바빠서 듣지 못하겠으니 귀찮다고 가라고 한다. 그러니 도전하는 사람이 얼마나 좋은가! 낚시질을 하면 고기가 모른 체하고 아무 관심 없이 가버리는 고기가 많다. 낚시를 건드리는 놈을 낚을 수 있지 이런 고기는 낚을 수가 없다. 낚시를 해보면 참 이상하다. 어떤 물 때가 되면 고기들이 전혀 미끼에 관심이 없다. 그때는 아무리 던져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물이 어떻게 변하면서 고기들이 덤벼든다. 그 시기에 고기를 낚는다.
우리는 그런 시기를 만났을 때 그때가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이 드러날 때인데 그만 달팽이처럼 쏙 들어가 버리면 우리도 우리대로 망하는 것이지만 그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결과가 오게 된다. 뭔가 도전을 했는데 아무 말도 못해버리면 그 사람은 그냥 예수를 아는 수준으로 끝나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2. 종된 자
종이다. 종된 자다. 청지기라는 말을 했는데 종이라는 말은 물론 잘 아시겠지만 주인 밑에 예속된 사람이다. 하인, 일을 맡은 자, 군인된 자라는 뜻이다. 원래 어원은 아랫 노를 젓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노 젓는 사람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앞도 뒤도 모르고 계속 노만 젓는다. 보통 배는 위에서 자기가 보면서 노를 젓는다. 거북선 같은 배는 속에 노를 젓기 때문에 노 젓는 사람들은 그냥 노만 젓는 것이다. 방향을 트는 것은 선장이 하는 것이고 자기는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 모르고 일본으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을 보고 종이라고 한다. 여기서 종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1.3. 청지기된 자
청지기라는 말은 '오이코노모스(Oikonomos)'라는 말인데, 이 말은 가정 총무다. 집안에서 주인의 어떤 일을 맡아서 온 집안 식구들에게 무엇인가를 분배해 주는 사람을 오이코노모스라고 한다. 오이코라는 말은 집이라는 뜻이고, 노모스는 법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분배한다는 개념이 된다. 간단한 집에서야 집사가 필요하겠는가? 집사라는 말이 가정 총무라는 뜻인데, 옛날에 큰 부잣집에는 사람이 많고 할 일도 많다보니 가정 총무가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집사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집사라는 말을 번역할 때 그 집사라는 말을 가지고 교회 집사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대신들 집이나 대감 집에는 자기들 식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수없이 많다. 이 사람들에게 밥도 주어야 되고 옷도 주어야 되고 돈도 주어야 되고 이 모든 것을 공급하는 사람이 가정 집사다.
바로 청지기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오이코노모스다. 여기서 관리자라는 말이 나왔다. 좀 더 커지니까 경영자다. 요즘 말로 하면 경영자니까 사장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할 때 경륜이라는 말은 경영이라는 말로 바로 오이코노모스라는 이 말이다. 처음에는 한 집안의 관리자를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광범위하다. 지금은 세계 경영자도 있다. 미국은 전 세계를 앞에 놓고 경영을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있지만 미국은 자기 나라만 생각할 수 없고 전 세계를 초강대국으로서 경영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해방된 후에 초등학교를 갔으니까 매일 우리나라 지도 공부하기 바쁘고 우리나라 지도와 태극기를 그렸다. 잃었던 땅을 찾았으니까 땅을 확실히 알아놓기 위해 계속 그렸다. 우리나라 지도를 하도 많이 그려서 눈 감고도 그린다. 해방되니까 태극기, 한글, 우리나라 지도를 매일 그렸다. 그런데 미국에 가니까 초등학교 학생들이 집안에 다 세계지도를 그려놓고 있다. 세계지도를 공부하는데 거기에 요점을 다 적어놓고 있다. 공부하는 방식이 아예 다르다. 세계 경영자들로서 공부를 하고 있다. 생각이 아주 다르다.
오이코노모스가 집안에서 시작하여 세계 경영까지 갔다. 우리는 우주 경영자가 되었다. 하나님 경륜의 중심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세계 경영만이 아니고 우주적 경영자가 되었다. 오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주를 관리하신다. 지금 세상은 미국을 통해 관리하고 있지만 우주는 교회를 통해서 관리하고 있다. 세상 경영은 지금 패권다툼을 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이 한참 하다가 소련이 배가 고파 후퇴했다. 요즘 유전이 발견되어 다시 일어난다고 한다. 중국이 엉망이 되었다가 경제개발이 되어 일어나고 있다. 언젠가는 세계 지배권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다. 지금은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세계를 지배하지만 어느 날 가면 초강대국 단독으로서 세계를 지배하기가 불가능할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이 가만히 있겠는가? 또 러시아가 가만히 있겠는가?
세상의 오이코노모스는 늘 바뀌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바꾸려면 많은 피를 흘려야 된다. 초강대국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돈을 들여야 된다. 다른 모든 나라들보다도 월등한 군사력과 월등한 과학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미국이 지금 자기들만 살려면 배가 터져서 못 살 것이다. 그런데 전 세계에 군대를 파견해야 되므로 전 세계 경영비용이 얼마이겠는가? 우리가 지금 북한을 경영해 보겠다고 하는데 그 비용도 엄청난데 전 세계를 경영하는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겠는가? 그것은 치열한 싸움 속에서 일어난 일인데 이 우주경영은 완전히 우리의 독점이다. 아예 도전자가 없다.
교회가 유일한 도전자다. 우리가 유일한 오이코노모스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비밀을 분배할 자들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누가 아는가? 모른다. 모르니까 분배자가 될 수 없다. 모르는데 어떻게 분배를 하겠는가? 그 사람들은 관심도 없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 오이코라는 말이 집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오이키아가 되면 재산이라는 말이다. 재산 관리자가 된다. 청지기인 가정 총무는 사실상은 재산 관리자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다. 하나님의 재산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비밀이다. 우리는 세상이 모르는 그분 안에 감추어진 그 많은 풍성한 재산의 관리자들이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든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맡긴 것이니까 그 풍부한 재산, 성품을 마음 놓고 나누어주어야 된다. 두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맡긴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를 마음 놓고 분배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마음 놓고 분배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분배하라고 준 것이다. 겁낼 것이 전혀 없다.
우리는 우주 경영자들이다. 사장이 못되어서 평생 한이 있는 사람도 그 한을 털어버리고 조그마한 집단에서 뭘 하지 못한다는 시시한 생각을 할 필요도 없고 더군다나 집에서 아내를 잘 지배하지 못하는 것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큰 우주적 경영자들이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이병철씨가 그런 것에 신경 썼으면 큰 삼성이 되었겠는가? 안된다. 절대로 될 수가 없다. 큰 사람은 큰일에 관심을 갖게 되고 작은 사람은 작은 일에 관심 갖게 된다. 작은 일에 관심 갖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는 도저히 없다.
우리는 이 우주 안에서 가장 큰 경영자다. 어떤 것도 이것을 방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는 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누구도 막을 수가 도저히 없다. 누가 막겠는가? 세상은 몰라서 못하고 천사들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으니까 못한다. 그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안다고 하더라도 분배를 하려면 육신이 있어야 분배를 할 것이다. 천사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알아도 분배할 수가 없다.
우리를 육신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한다. 그 은혜와 진리가 하나님이 보물이다. 하나님의 창고에 있는 보물이다. 그 보물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육신이 필요하다. 우리가 육신으로 태어난 것이 어쩌면 100년밖에 못살고 유신의 제한이 많다. 이것 때문에 천사를 부러워했지만 천사를 부러워할 일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천사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하나님 비밀을 분배할 자격이 없다. 천사는 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짧게 살지만 하나님의 비밀을 분배할 수가 있다. 오래 살면 무엇 하겠는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 옛날 같으면 벼락 치는 것에 천사가 나섰지만 요즘은 그런 것도 못한다. 옛날에는 벼락만 쳐도 천사들이 했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벼락 치면 천사들이 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전기가 날아다니다가 충돌했다고 생각한다. 천사들 할 일이 별로 없다. 사람 할 일만 남았다. 우주적 경영자들이 할 일만 남았다.
지금도 문제가 있지만 앞으로 이 세상이 점점점점 어떻게 되어서 언젠가는 문제가 생긴다. 그렇게 될 때 결국은 참으로 일을 맡은 사람들은 교회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일을 하다가 다 망하고 다 피폐되고 다 못쓰게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 직업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분배하는 사역은 하나님의 비밀이니까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 세상 것은 주다가 보면 없어진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라도 계속 주면 없어진다. 얼핏 잘못하면 다 망한다. 아버지가 벌어서 아들에게 주면 아들이 단숨에 말아먹을 수도 있다. 다 지킨 아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다 지키지 못하고 말아먹기 마련이다. 대부분 우리나라 경영자들은 자기가 돈을 열심히 번다. 자식들은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다. 그러니까 막상 물려주면 경험이 전혀 없으니까 망하기 마련이다. 진짜로 물려주려면 어려서부터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고생을 시켜서 바닥을 기어야 되는 것인데 부잣집 사장 아들로 태어나서 기업 회장 아들로 태어나서 매일 놀기만 하다가 큰돈을 맡기면 관리가 되겠는가? 안된다. 세상은 어차피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되었다가 가난해졌다 하는 것이다.
우리 재산은 없어지지 않는 재산이다. 마르지 않는 샘이다. 칠십 종려나무와 열두 샘물을 만났다고 하는데 오아시스에서도 마르지 않는 샘물을 만났다. 우리는 그 오아시스에서도 마르지 않는 샘물을 퍼주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 온천이 큰 문제라고 한다. 왜냐하면 온천이 저절로 솟아나게 놔두면 천년이고 만년이고 나온다고 하는데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나오는데 우리는 온천을 뚫고 뚫고 또 뚫어서 100m 뚫어서 안되면 또 200m를 뚫고 또 안되면 300m를 뚫고 계속 뚫어서 더 깊은 곳에서 더 깊은 곳에서 물을 뽑아 올리고 있다. 이렇게 되면 온천수가 다시 차려면 몇 천년이 지나야지 될지 모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온천 바닥이 났다. 지금 온천이라는 것은 25도 정도가 되면 온천이라고 승인해준다고 한다. 그러니 온천 좋다고 갈 일이 없다. 미지근한 물을 갖다가 끓여서 온천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짜 온천은 거의 없어졌다. 처음에는 90도라고 했는데 지금은 데우지 않으면 안된다. 온천에 가서 피부병 낫게 하려다가 오히려 피부병 걸려서 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온천에는 전부 피부병 있는 사람이 온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온천에 가지 않는다.
세상 것은 다 바닥나기 마련이다. 언제 바닥이 나도 다 바닥이 난다. 그런데 하늘의 보물은 바닥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은혜와 진리는 영원히 바닥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경영권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경영권은 쇠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하나님의 비밀을 분배한다면 영원토록 혹은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 보물을 분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청지기다. 기독교에서 청지기라는 말을 많이 쓴다. 청지기 사역이나 청지기 직분이라는 말을 교회를 다녀 본 사람들은 많이 알 것인데 이것을 단지 교회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일도 필요하다. 청소도 필요하고 다 필요하고 교회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일이 없는데 이런 일에다만 집중을 하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다. 청지기 직분이 그렇다. 육신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청지기 직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청지기 직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보물을 분배하는 사람들이 참된 청지기다.
2. 종의 본분
종의 본분은 무엇인가? 신실성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는데, 이 충성이라는 말도 대단히 곡해되어 충성이라고 하면 대부분 군대 간 사람들이 충성이라고 한다. 그것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참 충성스러운 사람이 많다.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정말로 헌신적인 사람이 많다. 우리 교회부터 오신 분들은 잘 모르지만 일반 교회를 다니다가 오신 분들은 잘 안다. 정말 충성스러운 장로님, 정말 충성스러운 집사님들이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 그 충성이라는 개념이 왜곡되었기 때문에 어떤 일만 생각한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주신 재산을 분배하는데 성실해야 된다는 것을 모른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
신실하다는 말은 성실하다는 뜻인데, 믿을 만하다는 것이 나왔다. 충실하다. 진실하다. 확실하다. 모두 이런 뜻이다. 그러면 세상에서는 누가 과연 정말 신실하고 정말 진실한 사람일까?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사람도 여러 가지다. 거짓말 잘하는 사람도 있고,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다. 신실한 사람이 세상에도 많이 있고, 저 사람은 믿을 만 하다는 사람도 많이 있다. 아까 김형제가 소개한 대로 일을 시켜놓으면 자기 일처럼 한다. 믿을 만하니까 확실하다. 확실하니까 충성스럽다. 예를 들면 이런 사람은 많이 있다. 반대로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주인만 없으면 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9시 5분쯤 와서 이것저것 챙기다 보면 9시 30분이 될 것이고, 12시 되면 점심 먹어야 되고 점심 먹고 왔다갔다 하다보면 2시가 된다. 2시부터 시작해서 5시 5분 전에 끝나니까 일하는 시간이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게 눈속임을 하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이틀 하려면 사흘 나흘에 하니까 임금도 많이 올라가게 할 수 있다. 못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사람이 많다. 성공한 사람은 그래도 신실한 사람이다. 성공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불량하게 성공한 사람이 별로 없다. 신실한 사람이 성공을 한다. 권모술수를 통한 것은 일시적으로 어떻게 되어도 오래가지 못한다. 또 그런 사람은 오래 지키지를 못한다. 그리고 또 사람들의 신용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일을 할 수가 없다.
신실한 사람이 결국은 성공한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이런 신실함 보다 더 완전한 신실함이 있다. 진실이 있다. 이것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났다. 진짜 신실한 사람은 이 사람이구나.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적 신실이다. 세상에서 말한 것은 행위적 신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은 존재적 신실이다.
그리고 오늘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을 때 물론 그런 신실한 마음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또 그 위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이 되어서 내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뭔가 가능성이 있으니까 거짓말을 한다. 전혀 가능성이 없으면 거짓말을 못한다. 내가 지금 숨이 코에 붙어 다 죽어간다면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형수가 하는 말은 다 진실하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다음에 뭔가를 생각하니까 거짓말을 하는 것인데 다음을 생각할 수 없으니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죽어버릴 것인데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자기에게 이득이 오겠는가? 손해가 오겠는가? 그래서 사형수의 마지막 말은 진실하다는 말이 있다.
누가 진실한가? 죽음 앞에 있는 그 사람이 신실한 사람이다. 자기를 비운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자기를 비운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죽음 앞에 있어야 비워진다. 죽음 앞에 있지 않고서는 사람이 비울 수가 없다. 아무리 비우고 싶어도 사람이라는 것이 또 생각을 해야 된다. 내일도 생각해야 되고 모레도 생각해야 된다. 자기 몫도 생각해야 된다. 손익 계산도 해야 되지 전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짜 신실할 수가 없다. 세상에서도 신실한 사람은 그것이 자기에게 편하고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만일 불리하다면 못한다. 그래도 그것이 유익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있는 사람은 유익하냐 무익하냐는 것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유익하냐 무익하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창조자 앞에 서 있는 우리 인생이 어느 쪽이 더 유익한가가 될 수가 없다. 우리는 어차피 그분 앞에서 피조물이다. 하나님 앞에 대면하고 있는 사람! 어디에서 대면하는 것이 진실한가? 십자가에서 대면하는 것만 진실하다. 거기에 있는 사람만 신실하다. 내가 절대로 누구를 때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나는 지킬 수가 있다. 왜 지킬 수 있는가? 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로 주먹으로 사람을 치지 않는다고 여러분 앞에서 맹세하면 나는 지킬 수가 있다. 왜? 나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진짜로 주먹 있는 사람이 절대로 사람을 때리지 않는다고 맹세해도 안된다. 어떤 경우에는 다 되지만 정말 손볼 사람이 생기면 안된다. 그런데 나는 정말 손볼 사람이 생겨도 안된다. 누구를 믿어야 되겠는가? 나를 믿어야 된다. 주먹 센 사람이 때리지 않겠다는 말을 믿어야 되겠는가? 아니면 주먹이 없는 사람이 때리지 않겠다는 말을 믿어야 되겠는가?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는가?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믿는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어쩔 수 없는 사람만 약속을 지킬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약속을 해도 정말 어떤 절대 절명의 순간에 가서 자기가 어렵게 되면 불리하게 되면 그것을 지킬 수가 없다. 그러나 그때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켜지는 것이다.
신실함!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 잡힌바 되어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뜻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실한 사람이 되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사도 바울의 예
여기서 사도 바울의 예가 나왔다.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판단 받을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판단 받을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의롭다가 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판단을 주께 맡김>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은 판단을 주께 맡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 감정을 가지고 판단한다. 감정이 강한 사람의 판단일수록 오류가 많다. 왜냐하면 감정이라는 것이 확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그래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그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이성은 그렇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판단하는 것이니까 어차피 자기라는 것을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옳은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나도 옛날에 지금도 그것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감정적인 사람이기 보다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감정의 동요가 안된다. 여간해서는 눈물도 잘 나지 않고 여간해서는 누가 나를 감동시키기가 참 어렵다. 엄청나게 방언을 하고 신유은사가 있는 사람이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방언을 못했다. 내가 감동이 되었으면 방언을 했을 것인데 감동이 안된 것이다. 그렇게 냉랭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내 판단이 정확하다고 생각해 왔다. 내 감정이 확 일어나서 한 것이 아니니까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한 것이니까 틀림없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내가 맞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틀어지려고 하니까 완전히 다 틀어졌다.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그 어떤 우주적인 경영 안에서 나의 판단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었다. 내 생각대로 되었는가하면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내 이성적인 생각으로 생각하고 계획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나 같은 사람에게 네가 계획한 것은 무엇이든 안된다는 것을 알라고 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이성을 너무 믿기 때문에 항상 나는 내 이성을 믿기 때문에 나는 내 이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마다 내가 생각한 것은 안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막지 않으면 누가 막겠는가? 이 명석한 이성을 갖고 판단해놓은 것을 분명 세상은 막을 수가 없고 하나님이 막은 것이다. 내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 같으면 다른 사람이 막을 수도 있는 것인데 내가 수정같이 맑은 정신으로 판단하여 해놓은 것을 누가 막겠는가? 하나님밖에 막을 수가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더 강하게 막은 것 같다. 내 일생을 돌아보면 내가 생각해서 계획한 대로 된 일이 한 가지도 없다. 그리고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전혀 내가 모르던 세계로 왔다. 매일 가는 길이 항상 모르는 길이고 항상 새로운 길이다.
내가 대구에 30년 이상 살 것이라는 것은 생각도 해본 일이 없다. 항상 보따리 싸놓고 사는 사람이었다. 내가 C.C.C.에서 나와서 대구에 머무를 때도 재승형제와 같이 사는데 재승형제는 나 때문에 쫓겨나게 되었는데 나만 제천으로 올라가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우선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은 언제일지 모르고 어떻게 해결될지 모르지만 재승형제가 떠난다면 나도 갈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30년이 되었다. 아무 결정도 아니다. 어찌될지 모르니까 그냥 있어보자. 형제들이 또 왔다 갔다 한다. C.C.C.에 남지 않고 매일 찾아오는데 매일 찾아오는 사람들을 놔두고 나 혼자 훌쩍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매일 찾아오니까 있었다. 그때 아마 매일 찾아오지 않았으면 나는 갔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데 내가 무엇하러 있겠는가? 8자 방 두 칸이었는데 그 좁은 집으로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집인데 거기에 매일 같이 사람이 북새통이었다. 그런 것을 놔두고 내가 모르겠다하고 가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이라도 하나 얻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돈이 없어 얻지 못했다. 처음에 넓은 집을 얻으려고 생각했다. 넓은 집을 얻으면 사람들이 와도 괜찮치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그 집은 마루도 없고 대청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냥 신발 벗으면 방이다. 그런 집에 매일 학생들 30명이 우글우글하니까 어찌 되었겠는가. 그래서 산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전셋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제주의 박형제가 하는 말이 집을 얻으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조그마한 사무실을 얻는 것이 싸다는 것이다. 사무실은 월세를 주면 얻으니까 월세의 반은 자기가 부담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희망이 생겨 영대 앞에서 황제양화점 2층에 10평도 안되는 30명이 의자 놓고 앉으니 딱 맞는 곳을 하나 얻었다. 이 정도면 반 부담을 해 준다고 하니 감당하지 않겠는가하여 월세로 얻은 것이 이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그때도 장기적으로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고 우선 해보자고 한 것이다. 그때도 장기적으로 할 생각이 아니라 우선 해보자는 생각으로 사람이 30명밖에 안되었으니까 옛날 식당 테이블을 하나 갖다 놓고 그 시대의 식당의자 30개를 샀다. 그런데 30년을 살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30년을 살 줄은 한번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러다가 떨어져 나가면 갈 것이고 사람이 붙으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떨어져 나가지 붙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붙잡히게 된 것이다. 붙잡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큰일 났을 것이다. 알고 보면 우리 형제들이 나를 붙잡은 셈이다. 형제들이 가버렸다면 나도 갔을 것인데 형제들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붙잡힌 것이다. 나는 형제들이 없는 곳에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내가 판단해서 된 일은 아무 일도 없다. 내가 남을 판단하다가도 문득 생각이 들기를 내가 판단한다고 맞겠는가?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지 한다. 일을 하다가도 좀 안되면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지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다가 안되면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물어본다. 물어본다고 해서 꼭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판단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모르기 때문에 물어 보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그렇게 할 줄로 착각하면 안된다. 그러면 다음에 나에게 오해를 하는 것이다. 실컷 물어보고 그렇게 할 줄 알았더니 안한다고 한다. 앞으로도 늘 물어보지만 내가 그렇게 하려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내 판단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모르니까 내 판단을 신뢰하지 못할 때 남에게 물어본다. 그 중에서 합리적인 판단이 오면 내가 받아들이게 된다. 하여간 내가 판단하지 않게 되니까 편하다. 내가 판단할 때는 괴롭다. 나는 이렇게 판단해놓았는데 안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런데 조금 하다가 안되면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기 전에 여러 형제들에게 맡긴다. 그것도 안되면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면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도 물론 그렇지만 일은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도 특수한 경우이니까 이렇게 일해도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세상에서 경영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는 안될 수도 있다.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교회이니까 이런 것이지 내가 기업체를 경영한다거나 구멍가게를 경영한다면 소신 있고 남이 무엇이라고 해도 내 고집대로 하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혹시 구멍가게라도 하시는 분들이 내 말을 듣고 이럴까 저럴까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런 분들은 소신 있게 밀어붙여야 된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판단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사람에 대해 내가 판단하면 안된다. 내 눈에 판단스럽게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내가 판단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알아서 판단하실 것인데 내가 왜 판단하는가. 내가 판단해서 될 일도 아니지만 내가 판단할 자격이 없다. 그런 자격까지 나에게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아도 모른 체해야 된다. 나도 아는 것이 많지만 모른 체한다. 모르니까 저럴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알 것은 다 아는데 내가 판단할 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른 체해버린다. 뒤로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하신다. 옛날에는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줄로 생각했다. 내가 해결하니까 부작용이 생겨서 이것을 해놓으면 이쪽이 불거지고 저쪽을 해결하면 또 이쪽이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하나님께 맡기고 놔두니까 어떻게 된 것인지 저절로 다 잘된다. 아무 일도 없이 잘된 것을 가지고 내가 스스로 이렇게 하면 안되겠구나 저렇게 하면 안되겠구나 했을 때는 얼마나 일이 엉망이 되는지 모른다. 아주 합리적인 사람이 비합리적일 때가 있다. 맡길 때는 나의 합리성이 없어지고 합리성을 포기해 버린다.
판단을 주께 맡긴다. 특별히 형제들을 볼 때 판단할 일이 있으면 주께 맡긴다. 이것이 사도들의 일이고, 청지기의 직분이다. 특별히 교회를 인도하는 형제들이나 그룹을 인도하는 형제들은 판단을 주께 맡긴다. 가만히 보면 우리 형제들이 특별히는 정형제가 나보다 훨씬 낫다. 그래도 나는 알고 포기하는데 우리 형제들은 모르는 것 같다. 가끔 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정말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른다. 알고 포기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일부러 모른 체하여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보다는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아는 것이 많아서 상당히 괴롭다. 우리 형제들은 모르니까 전혀 문제가 안된다. 그것이 복인 것 같다. 나도 옛날에 주님을 확실히 알았다면 우리 형제들처럼 되었을지 모르는데 40세가 다 되어서 알았기 때문에 그전에 굳어진 것이 있어 알기는 다 알지만 포기를 한다. 우리 형제들은 아예 20대 때부터 그렇게 컸기 때문에 아예 남의 허물을 모르니까 쉬운 것이다. 모르는 생각도 않는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별로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판단을 주께 맡긴다. 우리 형제들은 나를 믿는 곳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목사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 것 같기는 하다. 그것이 주께 맡긴다는 의미다. 그래보았자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하면 판단이 없는 교회다. 다른 교회는 판단이 너무너무 많다. 기독교인이 더 판단이 강하다. 직장생활을 한 분을 알겠지만 일반 사회생활을 해도 기독교인이 들어있으면 판단을 한다. 왜냐하면 설교할 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매번 듣기 때문에 직장에 나가면 그들은 전부 칼날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조금 잘못하면 용납을 못한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는 얼마나 더 하겠는가? 그러니 매일 판단을 한다. 판단을 하다보니까 싸움이 난다. 우리 교회는 좀 멍청하기 때문에 평화롭다. 차라리 좀 멍청한 것이 낫다. 수정같이 투명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다. 세상일을 하려면 밝아야 된다. 세상일을 하려면 직원들이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속여먹는다. 훤히 알아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 판단을 주께 맡긴다.
<모든 좋은 것은 주께 받은 것으로 여김>
모든 좋은 것은 주께 받은 것으로 여긴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거나 은사를 받았다거나 축복을 받았다거나 이것을 주님이 주신 것이구나. 나로 말미암지 않은 것으로 아는 것처럼 복된 것이 없다. 사람이 왜 불의한가? 자기 공로보다 자기에게 온 것이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일한 것보다 받은 것이 적다는 생각 때문에 불행하다. 내가 아는 것보다 내가 노력한 것보다 내가 잘한 것보다 내가 잘난 것보다 내게 돌아온 것은 작다고 생각한다. 나는 상당히 잘났다고 생각하는데 남은 나를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상당히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남은 나를 별로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모두 불행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무리 가도 행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이니까 감사할 일이 없다. 저절로 받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 노력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 나가서 직장에 나가서 우리 교회에서처럼 은혜를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노력한 만큼 받는다. 내가 그 주인에게 노력한 것만큼만 대가를 받게 되지 결코 그 주인이 내에게 그냥 은혜를 베풀지는 않는다. 그것을 알면 직장생활을 확실히 해야 된다. 교회에 있다가 잘못 알고 왜 상사가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고 하고 있으면 물에 사는 고기인지 산에 사는 동물인지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교회와 은혜는 다르다. 세상은 이해관계가 중심이 된다. 그러므로 자기 주인에게 무슨 이익을 주어야 나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지 이익을 주지 않는데 무엇을 주겠는가? 월급 작다고 투정할 것이 아니고 주인에게 월급보다 더 많은 일을 해주면 주인은 저절로 주게 되어있다. 다 감원시켜도 그 사람은 감원시키지 않는다. 자기에게 돈 벌어다 주는 사람을 왜 감원시키겠는가? 감원된 사람은 주인이 볼 때 돈벌이가 시원치 않으니까 나가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행이다. 나는 똑똑한데 주인이 나를 몰라준다고 생각하니까 불행하다. 주인이 몰라주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더 잘 알고 있다. 훨씬 잘 아는 사람이 주인이다. 돈 많이 번 사람이 그냥 번 것이 아니라 다 나보다 잘나서 나보다 똑똑해서 번 것이다. 멍청한 사람은 돈 벌지 못한다.
내가 받은 것이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아는 것처럼 행복한 것이 없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만일 받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고린도교회 사람들처럼 교만해진다. 자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교만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교만해질 수 없다. 하나님 주신 것으로 어떻게 교만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보면 말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신다. 교만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절대로 교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주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높이지 않으심을 앎>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를 높이지 않으셨다고 사도바울이 말했다. 사도바울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 같이 여겼다.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높여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높여줄 이유가 없다. 세상에서 우리가 높임을 받으려면 세상이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높임을 받는다. 그런데 세상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높임을 받겠는가? 안된다.
이번에 우리 땅을 일반 주거지역으로 바꾸어주었음하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곳은 해주고 우리는 안해주는가 하고 생각하니 이럴 수가 있느냐 처음에는 분노가 좀 났다. 교회라고 무시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지난번에 서명도 하여 한번 들이대어 보아야지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줄 이유가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포기가 되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높여줄 이유가 없다. 그 사람들이 높게 볼 일을 우리가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만 찬양했지 대구시장을 찬양했는가? 안했다. 그러니 대구시장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겠는가? 우리가 대구시장에게 뭔가를 받으려면 대구시장을 매일 찬양해야 된다. 우리 주님을 찬양하듯이 매일 했으면 우리가 해달라고 하지 않아도 해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몫이구나. 우리 분수라고 생각한다. 세상 같으면 비참한 일이다. 우리 분수인데, 이 분수 뒤에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비참하다.
바울이 말했다. 만일 이생뿐이라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이생뿐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금생과 내생으로 나누는데 '세상에서'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같으면 비참한 일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를 높이지 않았다. 구약성경을 읽으면 요셉을 높여서 총리대신을 만든 것 때문에 기독교인들도 세상에서 높임 받으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구약시대일 뿐만 아니고 요셉이 높임 받은 것은 하나님이 그냥 높여준 것이 아니다. 바로도 요셉을 인정했다. 우리가 인정을 받으려면 세상이 인정할 일을 해야 되는 것이고 인정할 위치에 있어야 된다. 처음에는 우리 교회에 사람이 이렇게 없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 하나 처리할 사람이 없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만 왔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왔겠나하는 생각이 드니까 내 분수가 알아진다. 세상에서 높임 받는 사람이라면 무엇하러 여기에 왔겠는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같이 여겼다.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니까 다행으로 생각해야 된다.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를 보면 다 풀렸는데 거기만 풀리지 않았지 않느냐고 할 것 같다. 우리는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시에서 말하는 것은 그 큰 땅을 그냥 풀어주겠냐는 것이다. 그 말도 시로서는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적이 변경되면 지가가 상승할 것이므로 개인에게 이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고 당연한 말이다. 우리도 그만큼의 대가를 내놓아야 되는 것이다. 세상이 그런 것이구나. Give and Take라고 하더니 주고받는 것이구나. 한쪽을 주고 협상을 해볼까 생각도 해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는 기다려볼 수밖에 없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같이 여겨졌다. 옛날 시대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될 것인데 그래도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우리는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원리는 같다.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었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현명한데, 세상에서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었다는 뜻이다. 세상에서도 지혜롭게 되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현명하면 된다. 약하고 천대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의 본질이 그런 것 같다. 세상의 쓰레기 같이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핍박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핍박하면 견디고 거부하면 권유하였다. 그래서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낳았다. 우리가 이런 고통 속에서 사람을 낚는 것 같다. 우리가 세상에서 높임을 받아서 사람을 낚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저주하는 사람 앞에서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게 되고 핍박하는 사람 속에서 내가 사람을 구원하게 되고 말 듣지 않는 사람 안에서 구원하게 되는 것 같다.
축복하고 견디고 권유하고 복음으로써 사람들을 낳았다. 우리가 사람을 낳으려면 제왕절개 하듯이 낳은 것이 아니고 진통을 겪어야 낳는다고 한다. 아이들도 어쩔 수 없이 하기는 하지만 제왕절개 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아이들이 고통 중에 나와야 좋다고 한다. 그래야 투쟁력도 생긴다고 한다. 나올 때부터 세상과 싸움을 하면서 나오는 것인데, 제왕절개를 하면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고 나오니까 그래서인지 요즘 아이들은 아무 어려움이 없는 것 같다. 옛날에는 하루 이틀씩 죽느니 사느니 하고 낳았으니까 엄마도 괴로운데 아이는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런 속에서 나왔으니까 어찌하든지 잘살아보자 하고 나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잘살아보자는 생각도 없다. 그냥 밥 먹고 살면 되지 한다. 우리 2세들은 특별히 더 그렇다. 밥 먹고 살면 되고 없으면 교회 오면 되지 한다. 심지어 우리 교회 아이들은 아무개 친구가 공부 잘하니까 그 친구가 성공하면 그 밑에서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존심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아이들이 무사태평하다. 한편으로는 좋은 일인데 세상 살려면 좀 힘들 것 같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그렇게 떡 먹듯이 쉬운 것은 아니다. 결국은 우리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같이 여겨지는 그런 속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그런 환경 속에서 약하고 천대받는 속에서 세상의 쓰레기 같이 된 그 속에서 우리가 축복하고 견디고 권유하고 그래서 우리가 복음으로 사람들을 낳게 된다.
4. 사도를 본받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4:16)고 말했다. 본받는다는 말은 어떤 성경에서는 'Imitation'이라고 번역했다. 이미테이션이라는 말이 맞기는 맞겠지만 이미테이션이라는 말이 세상에서는 모조품이라는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된다. 가짜를 보고 짜가, 짝퉁이라고 한다. 이미테이션이 그런 말이 되어 버렸다. 내가 영어를 잘 몰라 확실히는 잘 모르겠으나 'Resemble(닮는다)'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비슷한 말이겠지만 '모방'이라고 하면 모조품이 된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모조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닮아야 된다. Resemble이라는 단어가 더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십시요"(고전11:1,빌3:17,살후3:7)라고 했다. 이것이 꼭 이미테이션, 모조품이라는 말이 아니다. 또 'Followers'라는 말을 썼는데, 영어로 'Follow me, as I also am of Christ.'라고 번역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번역한 곳도 있고, 나를 이미테이션 하십시오라고 번역한 곳도 있다. 'Imitation of me, as I also Christ.'라고 번역한 곳도 있다. 영어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어느 것이 맞는지 알 텐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십시요"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이미테이션하라는 말이 아니고,나를 따르라, 나를 닮으라는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여러분은~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살전1:6)는 말이 나온다. 바울의 생각이 많이 현실화된 것 같다. 본받는다, 닮는다, Imitation하면 모방자, Followers하면 추종자, 닮는다고 하면 Resemble이라는 뜻이다. '흉내내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흉내낸다는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쁜 말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광대, 연극배우들은 흉내내는 사람들이다. 속은 따로 있는데 겉만 따라 하는 것이다. 광대가 발달된 이유가 우리나라가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속은 감추어 놓고 바깥에 표현하는 것이다. 옛날 양반들을 비웃고 싶은데 겉으로 비웃다가는 죽으니까 속은 감추어놓고 껍데기에 비웃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람들은 볼 때 광대가 비웃는다고 생각하지 사람이 비웃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광대 문화가 발달했다.
'흉내내다'에서 유래했는데 흉내낸다는 말이 좋은 의미에서 보면 인간의 특기이기도 하다. 모든 동물 가운데 사람만큼 흉내를 잘 내는 동물이 없다. 흉내를 잘 내다보니까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이다. 말도 흉내다. 흉내 못내는 사람은 말도 잘 못한다. 흉내 잘 내는 사람이 말도 잘한다. 행동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은 거의 배워서 습득한 것이다. 배우려면 흉내낼 수가 있어야 된다. 흉내 못내는 사람은 배우지를 못한다. 나는 왜 춤을 잘 추지 못하는가? 춤추는 사람 흉내를 잘 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춤을 잘 추는데 흉내를 잘 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보면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 있고, 무엇이든지 들으면 음성을 흉내내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다. 이 특기가 잘 살려지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본받는 사람이 된다.
흉내를 잘 내다보면 같아지게 된다. 광대는 아니지만 우리가 꼭 그렇게 닮으려고 흉내를 내다보면 우리가 그분 같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사도들을 잘 흉내 내야 한다. 말씀도 잘 흉내내다 보면 된다. 자기 혼자 독특한 것을 개발하려고 하면 잘 안된다. 우리는 먼저는 모방이다. 모든 학습의 기초는 모방이다. 그리고 모방 위에 자기가 창작을 하는 것이다. 모방을 하지 않고 창작을 하려는 사람은 잘 안된다. 그림을 보면 선만 하나 그어놓아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것이 있다. 나도 붓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된다. 왜냐하면 수없는 모방을 해서 줄 하나를 그어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사람들이 귀신 같이 아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그어놓은 선과 수십년 모방하던 사람이 그어놓은 선을 귀신처럼 알아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다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림을 보면 우습고 누구는 그리지 못하겠는가 싶은 그림이 많은데 우리는 안된다. 모방을 안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과 사도들은 잘 모방해야 된다. 잘 흉내내야 된다. 닮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따르는 사람, Followers가 되어야 된다. 또 그렇게 흉내를 내려면 좋아해야 흉내를 내지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흉내를 내겠는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계속 흉내내는 것은 연극배우에 불과하다. 연극배우들은 나쁜 역할도 해야 된다. 좋아하지 않지만 해야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닮는 일은 그것이 아니다. 내가 좋아서 해야 된다. 내 인격이 그렇게 되려면 좋아야 그렇게 되지 광대처럼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 문제가 이것이다. 그것을 순수하게 모방 Imitation해서 설교를 하는데 흉내를 내는데 잘못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가짜가 돼버리게 되고 짜가(짝퉁)가 돼버리고 만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잘 흉내내기 위해서는 닮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그분을 알아야 된다. 확실히 모르면 내가 아무리 흉내내려고 해도 안된다.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다. 확실히 알지도 못하고 주장만 한다. 그래서는 닮아질 수가 없다. 물위로 걸으셨다. 알지도 못하는 소리다. 물위를 걸은 것을 아는가? 모른다. 어떤 사람이 우리 앞에서 물위를 걸어도 우리는 무엇인지 모른다. 알면 내가 그렇게 된다. 물위를 걷는 사람을 보고 저건 이렇게 걷는 것이구나 하고 알면 나도 걸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물위를 못 걷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셨다. 성경에 써있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렸다고 한다. 참으로 알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모른다. 예수님은 물위를 걸었지만 나는 못 걸어간다. 그분은 죽은 자를 살리지만 나는 못 살린다. 왜? 몰라서다. 알기만 확실히 알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십자가로 가시는 분도 우리가 모른다. 교리적으로 구속을 위한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도식적인 행위로 알고 있으니까 자기에게 아무 필요가 없게 된다. 확실히 알아야 닮을 수 있다. 우리가 연습을 계속하는 이유는 확실히 알아가는 것이다. 태극권도 그렇고 수영도 그렇고 남이 하는 것을 보면 할 것 같다. 그런데 하면 안된다. 왜 안되는가? 확실히 모르기 때문이다. 늘 하다보면 뭔가 하나씩 알아간다. 이거구나 하고 알 때는 된다. 수영도 처음에는 물위에 뜨지 않는다. 뜨기만 뜨면 간단한데 남을 보면 물에 떠있는데 나는 물에 가라앉는다. 왜 그런가? 몰라서다. 알기만 하면 간단하게 뜬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리 말로 해도 안된다. 짠물도 좀 먹고 소독물도 마셔야 뜨게 된다. 딱 뜨면 이래서 뜨는구나가 딱 알아진다. 신기하다. 내가 아는 순간에 뜬다. 나는 왜 춤을 추지 못하는가? 춤을 모르는 것이다. 보기는 보지만 확실히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면 그분을 확실히 알아야 된다. 확실하게 흉내내는 사람은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보면 안다는 뜻이다. 말도 아이들이 계속 들으면서 흉내를 낸다. 잘 듣는 아이는 빨리 하게 되고, 잘 듣지 못하는 아이는 늦게 하게 된다. 잘 들었다는 말은 알았다는 말이다. 아니까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알면 하게 된다. 아무리 어려운 것도 알기만 하면 쉬워진다. 어려운 것이 따로 없다. 모르니까 어려운 것이다. 잘 흉내내어서 잘 닮기 위해서는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야 된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점은 예수를 확실하게 안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므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이단이라는 것밖에 모른다.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물위로 걸으신 분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사람이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 있느냐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보고는 현대주의자들이라고 해버린다. 자기도 모르면서 자기는 그것을 믿는 사람이고, 저쪽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기독교도 두 파다. 한 파는 물위를 걸어간 것을 믿는다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 파는 물위를 걸어간 것을 있을 수가 있다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말하면 이단인데 우리나라 큰 교단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 장로교나 감신교는 믿지 않는다. 그 사람들보고는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단이라고 하면 자기들이 손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이단이라고 한다. 자기들은 아는가? 사실은 모른다. 지금의 형편이 이렇다.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고 하면 믿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부정하는 데가 있다. 큰 교단(교파)이다. 그런데 성경에 그렇게 되어있으니 믿어야 된다는 사람도 있다. 다 모르면서 크게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로 갈라져있다.
차라리 모른다는 말이 더 진실하다.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더 진실하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만나보면 사람들이 훨씬 더 진실하다. 그런데 성경에 있으니까 그렇게 믿어야 된다는 사람을 만나보면 진실하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기가 모르면서도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이니까 진실할 수 없다.
십자가로 가신 분, 겟세마네에서, 골고다에서, 부활에서, 다 모르는 것이다. 모르면서도 아는 체한다. 모르면 확실하게 몰라야 어느 날 아는 것이 생길 수 있는데 다 아는 체해버렸으니까 언제 알겠는가? 그래서 무엇을 이야기해보면 자기가 다 아는 체하는 사람은 절대로 발전이 안된다.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발전한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굉장한 수준이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다.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남의 말은 마이동풍으로 지나가고 전혀 듣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지식이 발전할 수 없다. 자꾸 물어보고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지식이 발전한다. 우리 영관이를 보면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무슨 뜻이냐고 꼭 물어본다. 이것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관심이 없다. 이 말을 하나 저 말을 하나 이 말이 그 말이고 그 말이 이 말이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나 다 똑같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는 수준이 높지만 내가 노래하는 것을 들으나 파파로치가 노래하는 것을 들으나 그게 그거네 하는 사람이 있고, 십만원짜리 오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천만원짜리 오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아는 사람이 있다. 우리 같이 모르는 사람은 십만원짜리에서 나오는 소리나 백만원짜리에서 나오는 소리나 천만원짜리 소리에서 나오는 소리가 똑같다. 왜 저런 것을 십만원이면 되는데 천만원을 주고 사는지 하고 오히려 그 사람들을 판단하게 된다. 무식한 사람은 이렇게 된다. 무식한 사람이 자기 무식한 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무식한데 남을 판단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생활하는데 문제가 많다. 문제가 많은 것이 전혀 모르는 것을 믿고 있으니까 좋은 것 같지만 좋은 것이 아니고 사람 자체가 그렇게 돼버린다. 오랫동안 일생을 그렇게 살다보면 사람 자체가 이상한 사람이 된다.
우리는 모르면 확실히 몰라야 된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모르면 몰라야 된다. 물위를 걸어간 것을 모르면 몰라야 된다. 그래야 물위로 걸어간 것이 무엇이냐고 묻게 될 것이다. 모른 줄을 모르면 물어보지를 않는다. 관심이 전혀 없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된다. 자꾸 물어보는 학생이 공부를 잘한다. 질문을 제대로 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한다. 엉뚱한 질문을 하는 학생은 공부를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콩 이야기를 하는데 쌀 질문을 한다거나 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콩 질문을 하는 사람은 공부해도 잘 되지 않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공부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더 낫다. 괜히 공부하느라 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쌀 이야기를 할 때는 쌀이 무엇인가를 알아들어야 되고, 콩 이야기를 할 때는 콩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된다. 콩 이야기를 하나 쌀 이야기를 하나 그것이 그거지 하면 아무것도 안된다.
잘 흉내내고 잘 닮으면 우리는 그분과 같이 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분을 확실히 알아야 된다. 바울은 그런 말을 않고,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했으니까 그냥 본받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지만 확실히 모르고 모방을 하게 되면 가짜가 된다. 가짜라도 가짜 만드는 수준도 상당한 수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짜 만드는 수준을 보면 정품과 별로 차이가 없다. 상표만 다를 뿐이지 별로 차이가 없는데 그만큼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표들이 로열티를 받고 우리나라에서 만든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만들지만 상표는 입셍로랑이나 나이키가 붙어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지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은 모방 기술이 실제 기술과 같아졌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모방해놓으면 엉성했다. 누가 보아도 가짜인 줄 다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 수준에서 모방하면 잘 모른다. 아주 전문가 아니면 잘 모른다. 이것은 기술 수준이 그만큼 올라갔다는 뜻이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잘 모방하여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정도로 모방한다면 성공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라"고 했다. 'as I also am of Christ'. 'of Christ'했으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말이 껍데기만 한다는 말이 아니고 'of'라는 전치사가 보통 거기서 나온다는 말로 본질적인 말이니까 말로는 할 수 없이 본받는다, 닮는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우리가 짝퉁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짜를 만들듯이 그렇게 이미테이션 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좋아하다 보면 예수를 좋아하다 보면 우리는 그를 본받는 자가 되게 될 것이고, 우리가 그를 확실히 알면 그분을 본받는 자가 되게 될 것이다. 확실히 수영하는 것을 알면 수영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에 뜨는 것을 알고서 물에 뜨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난 눈을 감고도 물위에 둥둥 뜬다. 뜨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뜬다. 내 몸이 그것을 알고 있다. 몸 자체가 뜨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알고 있다. 이론적으로 아무리 가르쳐도 안된다. 가만히 드러누우면 뜬다고 말해도 아무리해도 안된다. 우리는 물위에 가만히 드러눕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말로 물위에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해도 안된다. 침대에도 잘 눕지 못하는데 물위에 누워 있으라고 하면 잘 되겠는가? 안된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모방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몸으로 그것을 받아서 아는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 바닷가에 살았기 때문에 여름이면 매일 바다에 간다. 널빤지 하나를 가지고 바다를 밀고 다니다보면 어떤 놈들이 와서 뒤에서 목을 눌러버린다. 그러면 물을 먹는 것이다. 아주 고약한 놈들이 있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물에 뜨는 것을 알게 된다. 수영장처럼 가르쳐서 된 것이 아니고 물에서 놀다가 보니까 뜬다. 그러면 널빤지를 집어 던진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놀다 보면 뜨지 않겠는가.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수영강습을 받아보지 않았는데 물에 뜨는 것은 선수다. 수영장에서 수영한 사람보다 뜨는 것은 우리가 선수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체질로 배웠기 때문에 그냥 던져도 뜬다.
그리스도 안에서 놀다보면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고, 어느 날 그것이 내 몸으로 알아지는 날에 우리는 그분을 본받는 사람이 되게 되고 우리는 그분을 닮는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분의 풍성한 것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게 된다. 그때는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주기만 하면 풍성한 것이 나온다. 물건처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비워있는 것 같은데 줄 때 보면 한없이 나온다. 아무 것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는데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만나면 부어주는 것이다. 쌀밥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쌀밥이 주어지고, 보리밥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보리밥이 주어지고, 물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물이 주어진다. 자기에게 쌀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리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잘 놀아서 그분이 체질화된 것뿐이다. 그런데 나가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유시다. 이 말은 그리스도는 쌀밥도 되고 보리밥도 되고 물도 되고 땅콩도 되고 심지어는 아이들에게 껌도 된다. 예수는 만유시다는 말이 그런 뜻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다. 이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의 청지기로 우리가 부름 받았다. 이 청지기는 우주적인 경영자들이다. 이제 기업체를 못해서 평생 한이 되신 분, 오너가 못되어서 평생 한이 되신 분들은 오늘부터 그 한을 다 푸시고 이 우주적 경영에 참여하시기를 바란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을 어찌 이렇게 축복된 노선 안에 두셨는지 사람이 무엇이간대 이렇게 존귀히 여기시고 인자가 누구길래 이렇게 긍휼히 여기시는지 진토에서 나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이 미천한 인생을 당신의 우주적 경영에 참여케 하시고 당신의 무궁한 풍성을 공급하는 청지기로 우리를 임명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당신의 그 은혜와 진리를 그 풍성하신 은총을 우리가 만유에게 온전하게 공급하는 분배하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혹은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혹은 믿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분명하게 그분들에게 청지기로서 양식을 공급하는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