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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한국연극 2월호
<염소소사>,<변신>,<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를 거쳐<테레즈 라캥>과 <유령>으로 이어지는 극단 동의 무대는 많은 부분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극한의 상태에 몰린 인물 군과 숨 막힐 정도로 절망에 가득 찬 상황들에 집중한다. 이런 연유로, 훈련되어 물질화된 극단 동 배우의 ‘몸’이 소설 텍스트를 무대화한 <테레즈 라캥>에 비해 쏟아지는 ‘말’ 사이에서 제대로 된 의미적 맥락을 찾지 못했던 기억이 ‘왜’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이었다. 그러니 오늘 고골의 [검찰관]을 무대화 한 극단 동의 <비밀경찰>은 최근의 이 젊은 극단의 작업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들을 풀 수 있는 기회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여기에 운 좋게도 질문하나 더해지니, 젊은 무대의 소극장 작업 습관이 갑작스럽게 대극장으로 올라섰을 때의 만성적 결핍 혹은 적자를 스스로 어떻게 메워나갈까? 하는 것까지.
연극 무대에서 음악이 마치 오페라처럼 드라마와 동일한 위치에서고, 배우가 무대 미술의 한 부분이 되기를 주저치 않는 풍경, 음악과 미술이 독립된 미술로 연극 무대에 존재하는 것이 도무지 가당치 않은 일인데, 그럼에도 솔직히 이 풍경이 불편하지 않다. 극단 동이 아르코의 대극장 무대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일러스트레이션 작가 홍시야와 한예종 전통예술원 출신들로 이루어진 퓨전국악그룹 불세출에게 제시한 영민한 ‘거래’ 얘기다.
해서 홍시야와 불세출은 스스로 연극무대의 그 어떤 보조적 역할에 만족할 의향이 추호도 없으며, 그들은 오히려 노골적으로 ‘뽐내고’ ‘도드라지며’ ‘드러난다’ 안나 안드레이예브나와 마리아 안토노브나가 비밀경찰 영접을 기다리며 부르는 아리아의 무대는 그 ‘뽐냄’과 ‘드러남’의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책 표지나 광고, 미니홈피 스킨 등에서 이미 익숙한, 아기자기한 이미지들이 떠다니는 홍시야의 팬시 드로잉의 거대한 장막 앞에 배우들이 마치 종이인형처럼 서서 불세출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하는 배우들은 알록달록한 치마를 입고, 흑백의 깨끗한 드로잉 위에 한 두 개의 컬러로 포인트를 주는 홍시야의 일러스트레이션에, 그 ‘포인트’ 되기를 자진하며 일종의 살아있는 회화를 실현시킨다. 그것은 무대미술에 함락된 배우의 ‘몸’이면서도 그 함락 자체가 예쁘고 스마트하니, 더군다나 ‘보고’ 즐겁더라하니 ‘결박당한’ 배우의 몸에 대한 우려스러운 시선을 단번에 촌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여기에 연극의 정의를 내세우며 어쭙잖은 이론으로 가르치려든다면, 그들은 오히려 침묵해달라 정중히 부탁배우들이다. 연이어 빨간 소쿠리 샹들리에와 무대 천장 가듣 걸려있는 백여 개의 은쟁반이 뮤직홀의 화려한 조명이 뿜어내는 불빛에 반짝거리자, 회화나 조각의 개성적 진열방식을 추구한 일종의 설치미술이 ‘무대’로 저벅저벅 들어온다. 이제 여기서 무대미술과 음악이 연극을 위해 일관되게 ‘부수적’이어야 하는 고전적 주종관계의 규율은 완벽히 해체되게 된다. 이 거래는 결론적으로 말해, 극단동의 대극장 데뷔에 제대로 된 떠들썩한 팀워크를 이루어 주었을 뿐 아니라, 광고와 개인 창작활동 전방위를 넘나드는 홍시야의 작업범위와 퓨전을 내세운 국악그룹의 작업영역에도 새로운 경험을 제시해주었을 것이다. 대극장의 만성적 결핍과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이 ‘공동창작’은 위험스러웠으나, 결과적으로 용감한 선택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극단 동은 고골 [검찰관]을 위한 주된 콥셉트로 꼭두각시놀음을 가지고 왔다. 무용극, 가면극, 노래극, 뮤직홀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원로들의 소집과 마지막 무언의 무대까지를 연결하는 일관된 콘셉트는 배우들의 인형적 움직임이다. 마치 무대 밑에 대잡이가 있는 것처럼, 배우들은 치밀하게 관찰한 인형의 몸집을 빼어나게 보여준다. 더군다나 이 대잡이 인형이란 것이 오늘날에 와서 자기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남에게 얽매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처럼 의미가 전이되었고, 여기에 일반적으로 고골의 [검찰관]의 관리들이 환기하는 부정적 정서가 운하사업과 같은 현시대의 정치적 문제와 결합되며 극은 고골의 풍자적 정서를 표출한다.
사실, 시장(원로회장)을 비롯한 관리(원로)들의 희화화는 고골 [검찰관]의 공연사에서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다. 지금까지 고골의 이 인물들은 익살맞고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찌그러뜨리고 비틀기 좋은 유형들이었다. 포킨의 [검찰관]에서는 이 관리들의 언어를 홀레스타코프와 시장 가족들에 비해 단순화시키고, 남의 말을 ‘유아적’으로 반족하게하며 고골이 말한 인간의 저속함을 극대화했었다. [검찰관] 무대사의 연장선상에서 보았을 때, 극단 동의 꼭두각시 인형은 육체적 열등감 혹은 장애로 관리들의 인물형상을 비틀어 고골의 그로테스크를 적극적 방식으로 드러낸 공연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극단 동의 <비밀경찰>은 애초에 <메이에르홀드의 검찰관>을 의도했었다. 극단 동은 메이에르홀드가 코메디아 델 아르테와 같은 각국의 민속극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1906년 블록의 <발라간칙>, 그 발라간들이 하나의 정신이자 배경으로서 1926년 <검찰관>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연구한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이 꼭두각시를 메이에르홀드와 연결시키면 너무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 <비밀경찰>의 꼭두각시는 저속함과 아름다움, 악몽과 꿈, 그리고 눈물과 웃음을 함께 촉발시키는 고골적 그로테스크함과 똑똑한 ‘보기’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훨씬 이득일 듯싶다.
바흐친의 언급처럼, 희곡은 소설에 비해 단성적이어서 그 속에는 작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인식만이 존재한다. 물론 이 인식에 대한 해석은 시대와 연출가마다 다를 수 있다. 허나 이 하나의 인식이 찢겨질 때 ‘불완전한’ 하나가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보이지 않은 어떤 대상에 대해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공포 혹은 자아낸 근심을 조롱하며 <비밀경찰>의 각색을 맡은 연출은 홀레스타코프를 없애고 에피소드를 간소화하였는데 여기가 그 위험의 지점 즈음이다. 허나 <비밀경찰>은 배우들의 대사와 태도가 만들어 내는 공포를 통해 홀레스타코프의 ‘없음’을 ‘있음’으로 만들어 내며 이 우려심을 조롱하며 한 초반태세를 갖춘다. 그런데 ‘불완전설치미술과 불세출의 에너지 넘치는 퓨전국악에 매료되어가는 어느 순간, 홀레스타코프의 물리적 없음이 그대로 노출된다. 뇌물공여 이후, 홀레스타코프와 연계된 내러티브를 단순하고 급하게 마감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소문-혼동-밝혀짐이라는 이야기구구조의 평면화가 지금까지 무대 위에 펼쳐놓았던 수많은 볼거리들의 의미적 맥락을 단순한 비주얼 상찬으로 함몰시킬 수 있다는데 있다. 비밀경찰완전등장에 대한 원로들의 논의와 뇌물공여에 할애된 시간을 줄이고, 주변 인물들과 홀레스타코프가 끈질긴 싸움을 하도록 이야기의 결을 촘촘히 할 필요가 있다. 이 작가의 섬세한 결은 홀레스타코프가 어떻게 공포를 주고 그가 왜 공포의 대상이었는지까지 드러내야 하는 존재하지 않으나 끝까지 ‘있음’이 될 때 가능하리라. 이것은 또한 극 초반 강력한 임팩트가 야기한 비주얼의 중독에서 관객이 숨을 고르고 올바른 주제를 탐색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더불어 ‘연극’과 ‘무대미술’과 ‘음악’l라는 포지션의 동등한 입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이곳이 ‘연극무대’이므로 연출과 배우가 그 중심에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하다.
그러고 보니 1926년 메이에르홀드는 <검찰관>을 무대화함에 하나의 예술적 총체로서의 고골, 구체적인 예술적 세계로서의 ‘고골’ 되길 원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연출은 무대와 음악을 비롯한 ‘연극하기’의 총체적 제반여건을 창작하고 조율하는 연극의 작가였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