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으라 하신 자리에
허형만(본회 객원 시인)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
잠시라고 하시면서 있으라시기에
다시 만나올 그 머언 시간을 위해
흔들리는 바람결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티끌보다 연약한 삶 하나
떠나시온 그 순간부터
이어진 끈으로 지탱하고 서서
애오라지 견고한 만남을 위하여
젖어드는 비바람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깨어 일어나 기도하는 새벽부터
감사 찬송으로 끝맺는 밤중까지
때로는 고달프고 때로는 서러우나
오신 날짜 그 순간 기다리면서
휘날리는 흙먼지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있사옵니다.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
잠시라고 하시면서 있으라시기에
다시 만나올 그 머언 시간을 위해
흔들리는 바람결 속에서도 있사옵니다.
상처
상처는 결코 응고되지 않는다
상처에 딱지가 앉을 때
그것은 검은 띠를 두른 혁명과 다름없을 터
그래서 상처는 언제나 되살아날 불씨다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때 귀한 줄 알라
스승은 그리 가르쳤건만
사람은 상처를 낳고
상처는 옹이로 박혀 기름을 품으므로
마침내 불길이 되어 타오른다
낙타의 등이 상처이듯
터져 마침내 벌건 심장을 토해 낸 꽃도 상처다
아는가, 너와 나 사이에
장맛비에 덜 마른 빨래처럼 축축한 상처가
뼛속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한 생애가 그렇게 상처 속에 웅크려 숨죽이고 있음을
가장 아름다운 꿈
이태규(본회 객원 시인)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당신의 41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정말 곱고 청아한 아가씨의 음성입니다
소박하고 아무 티 없는 가장 행복한 음성입니다
얼마나 부드럽고 곱던지 뼛속까지 파고듭니다
“촛불을 끄세요”라는 말에
후~우 우
깜짝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75세 새 아침에 꾼 꿈이었습니다
인생은 꿈속에서도 행복한 꿈을 꾸는 존재인가 봅니다
아내와 소박한 아침 식탁에 앉았습니다
부부가 함께 아침을 맞는 것도 꿈같은 꿈입니다
중년의 사랑
아내의 어깨에 팔을 얹고 싶어도
잠이 깰까 봐 싫어할까 봐
아내의 잠든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그대로 바라보다가 잠듭니다
아내의 허벅지에 다리를 올려놓고 싶어도
무거워 할까 봐 아파할까 봐
아내의 잠든 모습이 귀여워서 무심히 바라보다가 잠이 듭니다
아내가 이불을 끌어다가 돌돌 말고 자더라도 이불을 끌어오고 싶어도
추울까 봐 놀랠까 봐
아내의 늙어가는 주름살이 안쓰러워서 얼굴만 쳐다보다가 잠이 듭니다
몸을 바짝 웅크리고 빈 이불로 잠들었더니 감기가 잔뜩 온 것 같습니다
에∼에에취!
하지만 아내는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면서
오늘도 투정입니다
낙엽1
― 최순향(崔順香‧19**∼ )
가을 숲 빈 의자에 내려앉은 소식 하나
형용사 하나 없이 느낌표와 말없음표
하늘이 그리 곱던 날 내가 받은 옆서 한 장
낙엽2
눈부시게 차려 입고 춤추듯 떠나가네
이승을 하직하는 가뿐한 저 발걸음
언젠가 나 떠나는 날도 저랬으면 좋겠네
도토리들
― 이봉환(‧19**∼ )
어디 가을이 얼만큼 왔나 궁금해 산에 갔더니
키 작은 졸참나무 도토리들 바위틈에 수월찮이 나앉나서
꼭 포경수술한 동무지간들
목욕탕에서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운동 나온 아낙이 흘끔 보거나 말거나
큰놈 작은놈들 거시기가 밖으로
볼똑하니 나오도록 앉아서
가을볕 따글따글하니 쬐고들 있습니다요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金基澤‧1957∼ )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하략)
자위
― 함민복(咸敏復‧1962∼ )
성기는 족보 쓰는 신성한 필기구다
낙서하지 말자, 다시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 이승하(李昇夏‧1960∼ )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몽당연필
― 이해인(李海仁‧1945∼ )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욕심 없으면
바보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댓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새는 자기 길을 안다
― 김종해(金鍾海‧1941∼ )
하늘에 길이 있다는 것을
새들이 먼저 안다
하늘에 길을 내며 날던 새는
길을 또한 지운다
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
그 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