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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 성사께서 가라사대
“사람을 쓸 때는 남녀노약(男女老弱)을 구별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진평(陳平)은 야출동문여자이천인(夜出東門女子二千人)이라” 하셨도다.
● 夜出東門女子二千人 야출동문여자이천인
진평(?∼BC 178)은 중국 한(漢)나라 때 공신으로, 처음에는 항우(項羽)의 군에서 도위(都尉;副將)를 지냈고 그 뒤 유방(劉邦)의 호군중위(護軍中尉;군의감찰관)가 되어 한나라 통일에 이바지하였다. 통일 후 장군으로 활약, 모반을 진압하여 곡역후(曲逆侯)에 봉해지기도 한 인물인데, 초한지(楚漢誌)에 ‘야출동문여자이천인(夜出東門女子二千人)’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고사(故事)가 전한다.
이 글의 뜻은 ‘밤에 여자 2,000명을 동쪽 문으로 내보내다’ 이다.
시대적 배경은 진시황이 죽은 후에 진나라가 서로 세력 다툼을 하던 시기이다. 당시에 초나라는 항우가 그리고 한나라는 유방이 왕이 되어 패권을 잡기 위해 대립하던 상황이었다.
서로 전쟁을 하던 중에 유방이 형양(滎陽)에서 항우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한왕 유방이 성을 탈출해야 될 상황에서 한나라의 장군 기신(紀信)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이 급박합니다. 청하옵건대 초나라 병사들을 속여야 몰래 사잇길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기신 자신이 한왕으로 변장해 초나라 병사들을 속이고 유방은 서쪽 문으로 몰래 도망가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진평은 먼저 여자 2,000여 명을 갑옷을 입히고 동쪽 문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기신이 식량이 다 떨어져 한왕이 초나라에 항복한다고 말하며 의 수레를 타고 왕의 깃발을 세우고 나타나니 초나라 병사들은 모두 한나라가 항복한 것으로 생각하고 ‘만세!’를 외치며 성의 동쪽으로 모인다.
이때 한왕 유방이 기마 20-30여 기와 함께 서쪽 문을 통해 탈출하였다.
즉 전쟁 중에 싸울 수 없는 나약한 여자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여자 2,000여 명을 쓰서 한왕이 무사히 탈출했던 일과 같이 사람을 쓸 때에는 남자, 여자, 늙은 사람, 그리고 약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으며 모두 쓸 곳이 있다는 교훈이다.
성인(聖人)의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나니 고대의 자사(子思)는 성인이라. 위후에게 말하기를 ‘약차불이 국무유의(若此不已 國無遺矣)’라 하였으되 위후가 그 말을 쓰지 않았으므로 위국(衛國)이 나중에 망하였느니라.
● 若此不已 國無遺矣 약차불이 국무유의
「만약 이와 같은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나라에 남김이 없다」
때는 주(周)나라 안왕(安王:재위 25년) 갑진년으로써 위후(衛侯)와 자사(子思) 사이의 대화에서 나온 말이다.
위후가 말하길 “계책이 옳지 않은 데도 여러 신하들의 대답은 한 목소리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자사가 이에 대답하기를 “제가 위나라를 살펴 보건대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합니다. 무릇 일의 옳고 그름을 세밀히 살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칭찬해 주는 것을 기뻐하니 어둡기가 막심하며, 이치가 있는 곳은 헤아려 보지도 않고 아부와 아첨이 받아들여지니 의심이 또한 막심합니다. 임금은 어둡고 신하는 의심하여 백성들의 위에 군림하니 백성들은 쫓지 않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若此不已 國無遺矣)”라고 하였다.
위의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모두 일의 시비와 이치의 소재를 잘 관찰하지 못하고 칭찬만을 바라므로 의심이 심하면 백성은 따르지 않고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자사는 위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금의 국사는 장차 날로 그릇될 것입니다. 임금께서 말을 하심에 스스로 옳다고 여기시면 경대부들은 감히 그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경대부들이 말을 꺼냄에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사서인(士庶人)들은 감히 경대부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니 임금과 신하가 이미 스스로 어질다고 생각함에 아랫 관리들이 한소리로 어질다고 합니다. 어질다고 하면 순조롭게 복이 있고 옳게 바로 잡으려 하면 거슬려 화가 있습니다. 이와 같다면 선(善)함이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군신(君臣)이 어두워서 바른 말을 듣지 못하고 자신들의 어두움은 알지 못한 채 스스로 어질다고 여기니 선(善)함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후는 자사의 말을 소홀히 여겨 결국 국사가 어지러워져 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이렇듯이 올바른 소리를 항상 수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항상 반성해보고 과부족이 없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바로보지 못하고 스스로 자만에 빠져 어질다고 여기어, 남이 자기에 대하여 바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위후의 고사처럼 스스로 무너지는 우를 범한다는 교훈이다.
강증산 성사께서
“천지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나니 공명지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종용(子房之從容)을 본받으라” 말씀하셨다.
이는 ‘천지가 따르는 일도 나로부터 연유되고, 천지가 어지럽게 나뉘는 일도 나로부터 연유된다. 그러므로 제갈량(諸葛亮) 공명(孔明)의 읍참마속(泣斬馬謖)과 같은 정대(正大)함을 본받고, 장량(張良) 자방(子房)이 자기가 처해진 상황의 기색(氣色)을 잘 살펴 조용히 천하기운의 순리를 따라갔음과 같은 종용(從容)을 본받으라’는 뜻이다.
● 孔明之正大 공명지정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던 제갈량(諸葛亮:181~234)의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일 처리를 높이 평가한 말이다.
제갈량의 공명정대한 일처리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마속과 제갈량에 관한 일화이다.
서기 228년 제갈량이 47세 되던 해의 일이다.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기 위해 때를 기다리던 제갈량은 중원(中原)의 젖줄기라 할 수 있는 가정(佳亭)을 점령하기 위해 직접 북정(北征)의 길에 올랐다. 당시 상황은 누가 먼저 가정을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중대한 상황이었다.
이때 제갈량은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부하 마량(馬良)의 아우 마속(馬謖)을 선봉장으로 발탁하게 된다. 마속은 제갈량으로부터 그의 재주를 인정받았고, 제갈량의 남정(南征) 때 전략의 기본방침을 제의하여 제갈량이 채용했을 정도로 제갈량과는 신의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봉장 마속은 의기충천하여 산 위에다 진을 치지 말라는 공명의 말을 무시하고 산 위에다 진을 쳤다. 이를 기회로 적장 사마중달이 즉시 보급로를 차단시키자 마속은 전쟁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게 된다. 마속은 이전에 제갈량이 매우 신임했던 인물이었지만 제갈량은 눈물을 뿌리면서도 공명정대하게 마속을 베고 만다.
● 子房之從容 자방지종용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공신(功臣)이었던 장량(張良:?~BC 168)은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써 권력 앞에 함부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순리를 따라 처신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장량은 어떠한 경우에도 처해진 상황의 기색(氣色)을 잘 살펴서 그 기운의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여 막힘이 없게 하였는데, 이러한 자방지종용(子房之從容)의 대표적인 예가 ‘홍문(鴻門)의 연회(宴會)’ 사건이다.
‘홍문의 연회’란 초나라와 한나라가 천하를 두고 다툴 때 두 맹주 항우와 유방이 참석했던 연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유방이 진나라를 멸하고 함곡관(函谷關)에 병사를 주둔시켰을 때의 일이다. 항우도 40만 대군을 이끌고 홍문(鴻門)으로 진격해 왔다. 그때 항우의 진영에 유방의 부하가 찾아와 유방이 스스로를 ‘관중왕(關中王)’이라 칭하고 있다고 밀고(密告) 했다.
이를 들은 항우는 화를 내며 유방을 치기로 결정하고 전군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때 항우의 숙부로 항백(項佰)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방이 큰 그릇임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이 사실을 유방에게 알려 주고 내일 아침 일찍 항우를 찾아가 사죄하라고 일러 주었다. 항백의 충고를 들은 유방은 항우를 찾아가 그의 오해와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항우는 홍문에서 주연을 베풀어 유방을 위로해 주었다.
이때 항우의 책사인 범증(范增)도 함께 있었는데 그는 이 기회에 유방을 죽이지 않으면 후한(後恨)이 있을 것을 걱정하여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자신의 힘을 과시하던 항우는 유방과의 이야기에서 유방이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빈약한 존재라고 믿어버리고 유방을 죽일 마음이 없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마음이 초조해진 범증은 장수 항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왕은 지금 유방의 말장난에 넘어가고 있다. 그대가 검무(劍舞)를 추다 기회를 봐서 유방을 찔러 죽여라.”
범증의 지시를 받은 항장은 연회에 참석하여 유방에게 술을 따른 후 정중하게 말했다.
“진중군부대 내이라 변변한 대접을 못해 드려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칼춤을 추어 흥을 돋우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항장은 곧바로 칼을 빼어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를 본 항백은 유방의 목숨이 위급하다고 여겨 자신도 칼을 빼어 유방을 감싸면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유방의 목숨이 풍전등화(風前燈火)임을 안 유방의 참모 장량(張良)은 얼른 밖으로 나가 장수 번쾌에게 말했다.
“사태가 위급하다. 항장의 검무는 속임수다. 속마음은 패공을 죽이려는 것이다.”
번쾌는 이 말을 듣자마자 경비병을 물리치고 술자리에 뛰어들어갔다. 그 기세에 압도된 항우가 번쾌에게 술을 따라주는 사이, 장량은 유방을 불러내어 탈출했다.
이후 범증은 항우에게 유방을 뒤쫓을 것을 간하였으나 항우는 이를 무시하였고 결국은 유방의 손에 그가 죽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외에도 장량이 행한 수많은 업적 덕분에 유방은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방은 한나라를 창업한 후 자신의 천하통일을 도운 공신들의 지략을 심히 경계하여 모두 숙청하려 하였다.
그러자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장량은 유방의 숙청이 실행되기 전에 유방에게 자기는 초야(草野)에 묻혀 조용히 도(道)나 닦으며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강증산 성사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말이 곧 약이라.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위안하기도 하며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거슬리기도 하며 말로써 병든 자를 일으키기도 하며 말로써 죄에 걸린 자를 풀어주기도 하니 이것은 나의 말이 곧 약인 까닭이니라. 충언이 역이로되 이어행(忠言逆耳利於行), 즉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하는 데는 이롭느니라. 나는 허망한 말을 아니하나니 내 말을 믿으라.”
● 忠言逆耳利於行 충언역이이어행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하는 데는 이롭다」
진(秦)을 치려고 항우와 경쟁해 온 유방은 진나라의 서울인 함양(含陽)에 항우보다 먼저 입성을 하였다. 진시황의 왕궁으로 들어간 유방은 화려한 대궐과 수많은 명마(名馬),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 그리고 아름다운 궁녀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이것을 알아 챈 장군 번괘가 유방에게 “아직 천하가 통일된 것도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 적당한 자리에 진(陣)을 치시옵소서”라고 간했으나 유방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유방의 마음을 읽은 장량이 유방에게 “진(秦)이 무도(無道)한 학정(虐政)을 하였기에 천하의 원한(怨恨)을 사서 왕께서 이렇게 왕궁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왕께서 하실 일은 진(秦)을 멸(滅)하고 천하의 인심을 편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을 받아온 백성들을 위하여 상복(喪服)을 입고 조위(弔慰)함이 옳으신데, 이제 겨우 진에 들어온 마당에 보물과 기녀에 눈이 쏠려 포악한 진왕의 일을 따르신다면 하나라 걸왕과 손발이 되어 더욱 포악함을 행하시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간언한 후 “본래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하는 데에 좋은 것이며, 좋은 약은 입에는 쓰나 병을 고치는 데 이롭습니다(忠言逆耳利於行 良藥苦口利於病). 모쪼록 번괘의 충언에 따르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이 충성스러운 간언을 듣고 깨달은 유방은 진시황의 왕궁을 떠나 패상(覇上)에 진을 쳤으며 결국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되었다.
퇴사식지(推食食之)와 탈의의지(脫衣衣之)의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蒯徹)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은 한신이 한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고 한고조가 한신을 저버린 것이니라.
● 天與不取 反受其殃 천여불취 반수기앙
「하늘이 주어도 취하지 않으면, 반대로 재앙이 이른다.」
이 고사(古事)는 전한시대(前漢時代)의 역사가였던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회음후열전(淮陰後列傳)」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趙)나라를 격파한 한신(韓信)은 곧 동쪽으로 나아가서 제(齊)나라를 평정하였다. 그런 후에 한신은 한나라 왕 유방에게 사자를 보내어 자기를 임시로 제나라의 왕이 되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의 유방은 형양(滎陽)에서 항우의 초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어서 위급한 때였기 때문에 화를 내어 사자를 꾸짖었다.
“내가 괴로운 처지에 빠져있을 때 도와주러 오지는 않고서 왕이 되겠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그러자 유방의 신하였던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유방의 귀에 입을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한나라는 지금 몹시 불리한 상황에 있습니다. 이때에 한신이 왕이 되겠다는 것을 금하면 자다가 뒤침을 맞게 되어 큰일 납니다. 지금은 도리어 기분 좋게 왕으로 삼아주어 그 자신에게 제나라를 지키게 하는 것이 한나라를 위하는 길입니다.”
이 말을 듣자 유방은 과연 그럴듯한 계책이라고 생각하여 또다시 꾸짖듯이 말했다.
“사나이가 한 나라를 평정하였다면 진짜 왕이 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어찌 임시의 왕이라 하는가!”
이렇게 되자 한신이 지키고 있는 제나라는 북쪽에서 초나라를 압박하게 되는 형국이 되었으며, 이 일은 항우에게 있어서 큰 위협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항우는 사람을 보내어 한신에게 한나라와 초나라의 싸움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설득했다. 그러나 한신은 유방을 배척하기까지 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항우의 사자가 돌아간 뒤에 제나라 사람인 괴철이 한신의 앞에 나타났다. 그도 역시 현재의 천하 형세를 잡고 있는 사람은 한신이라고 간파했다. 그러나 정면에서 그 일을 설득해도 한신은 우쭐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괴철은 말했다.
“저는 사람의 운명을 보는 재주를 배운 일이 있습니다.”
괴철의 말에 한신이 물었다.
“어떻게 보는가?”
괴철이 대답했다.
“귀천(貴賤)은 골상(骨相)에 있고 기쁨과 근심은 얼굴빛에 있고 성공과 실패는 결단에 있습니다. 이에 의하여 판단하면 만에 하나라도 실패하는 일은 없습니다.”
괴철의 말을 듣고 난 한신이 무릎을 쳤다.
“과연 그렇군!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괴철의 말이 이어졌다.
“얼굴을 보면 기껏해야 제후에 봉할 만한데 거기에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등을 보면 입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상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괴철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나라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영웅과 호걸들이 떼지어 일어나 천하는 삼밭과 같이 혼란하였지만 그것이 지금에는 한나라와 초나라와 쟁패(爭覇)하는 형태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쌍방이 이기고 지고 하는 바는 어느 쪽도 결정적인 우위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우와 유방의 운명의 귀추는 폐하의 거취에 달려 있습니다. 폐하께서 한나라에 가담하면 한나라가 이기고 초나라를 도우면 초나라가 이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취할 최상의 길은 쌍방 그 어느 쪽에도 편들지 않고서 양쪽 모두 존속하게 하여 천하를 삼분하여 솥의 발과 같이 셋으로 할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나라와 초나라 두 진영을 향하여 평화를 요구하면 그것은 백성들의 소망이기도 하고 아무도 거기에 반대할 사람이 없어 천하는 바람과 같이 달리고 폐하의 운명은 순풍에 돛을 단 배와 같이 순탄할 것이옵니다. 이것은 하늘이 준 좋은 기회입니다.”
괴철은 이렇게 설명하고 다음과 같은 말로 결말을 지었다.
“대개 듣건대,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아니하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고,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행하지 아니하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天與不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고 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신은 결심이 서지 않았다.
“한왕(漢王)은 나를 더할 나위 없이 소중히 받들어 주신다. 자신의 수레에 나를 태워주시고 그의 옷을 나에게 입혀주시고 그의 식사를 나에게 먹게 해주신다(推食食之 脫衣衣之). 그 의리를 배반하고 이익으로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신은 유방을 배반할 결심이 서지 않아 괴철의 진언(進言)을 물리쳤다.
그후 이윽고 한나라에 의한 천하통일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유방은 천하통일에 큰 공이 있던 무장들을 점차로 숙청시켜나갔다. 한신은 유방의 숙청 대상의 첫머리에 있었다. 유방은 제나라왕의 지위에 봉해졌던 한신을 회음후(淮陰侯)로 좌천시키더니 결국은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씌워 참형에 처하였다.
참형에 처해질 때 한신은 말했다.
“괴철의 계략을 쓰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이야말로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강증산 성사께서 원일과 덕겸에게
“너희 두 사람이 덕겸의 작은 방에서 이레를 한 도수로 삼고 문밖에 나오지 말고 중국 일을 가장 공평하게 재판하라. 너희의 처결로써 중국 일을 결정하리라” 이르시니 두 사람이 명하신 곳에서 성심성의를 다하여 생각하였도다.
이렛날에 원일이 불리워서 상제[강증산 성사]께 “청국은 정치를 그릇되게 하므로 열국의 침략을 면치 못하며 백성이 의지할 곳을 잃었나이다. 고서(古書)에 천여불취 반수기앙(天與不取 反受其殃)이라 하였으니 상제의 무소불능하신 권능으로 중국의 제위에 오르셔서 백성을 건지소서. 지금이 기회인 줄 아나이다”고 여쭈어도 상제께서 대답이 없었도다.
덕겸은 이렛동안 아무런 요령조차 얻지 못하였도다. 상제께서 “너는 어떠하뇨” 하고 물으시는 말씀에 별안간 생각이 떠올라 여쭈는지라.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와 예락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의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 오랑캐의 칭호를 받는 청(淸)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상제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 하시니라.
원일은 중국의 해원공사에만 치중하시는가 하여 불평을 품기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하므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報恩神)은 우리에게 좇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 일러주셨도다.
● 脣亡則齒寒 순망즉치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이 말은 중국 춘추시대의 진ㆍ우ㆍ괵의 세나라 사이에서 있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진나라가 괵나라를 정복하려고 우나라에 통과할 길을 요구하였다. 이때 우나라의 궁지기(宮之奇)가 왕에게 다음과 같이 충간(忠諫)을 올렸다.
“괵나라는 우리나라의 외곽에 해당됩니다. 괵나라가 망하면 우리나라도 반드시 괵나라를 따라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나라의 요구를 들어 주셔서는 안되십니다. 속담에 이르길 ‘수레위의 짐이 떨어지지 않도록 양편에 세운 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해야 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륜차상의 순망치한(輪車相依 脣亡齒寒)]’라고 한 것은 우나라[이]와 괵나라[입술]의 관계를 두고 이르는 것입니다. 우나라와 괵나라가 연합하여 공을 세웠던 일을 진나라는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궁지기의 충간을 우나라 왕은 새겨듣지 않고 진나라가 우나라의 종친이라는 점과 신명들이 도와 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궁지기의 계속적인 충언을 무시한 채 진나라에 길을 열어 준다.
그 후 “우나라는 엽제사를 지내기 전에 멸망할 것이다”라는 궁지기의 말대로 망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고사를 통해 우나라왕이 우․괵 두나라가 ‘이와 입술의 관계’임을 무시함으로써 우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증산 성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천(先天)에는 모사(謀事)가 재인(在人)하고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되 이제는 모사(謀事)는 재천(在人)하고 성사(成事)는 재인(在人)이니라.”
● 謀事在人 成事在天 모사재인 성사재천
과거 제갈량이 호로곡(葫蘆谷)에서 화공작전(火攻作戰)을 펼쳐 사마의(司馬懿) 삼부자(三父子)를 꼼짝없이 죽게끔 만들었으나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 사마의 부자가 살아날 수 있었다. 이때 제갈량이 하늘을 우러러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로다!” 하고 한탄하였다.
이와 같이 과거에는 사람이 일을 꾸미면 그것을 이루어주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상제께서는 ‘이제는 모사재천(謀事在人)이요, 성사재인(成事在人)이니라.” 하셨으니, 지금은 하늘은 이미 일을 다 꾸며 놓고 이것을 이루어내느냐 못하느냐는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하(現下)의 세상에서는 일에 임하여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모두가 저 하기 나름이니, 이 말씀을 깊이 새겨 열심에 열심을 더하여 노력하라.
상제께서 이 땅에 강림(降臨)하여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노랑닭 한 마리를 상제께 올렸는데, 상제께서는 밤중에 그 닭을 잡아 삶게 하고 여러 사람들과 나눠 잡수시고 운장주(雲長呪)를 지으셔서 그들에게 단번에 외우게 하셨도다.
이것이 그 때의 운장주이다.
天下英雄關雲長 依幕處 近聽天地八位諸將
천하영웅관운장 의막처 근청천지팔의제장
六丁六甲六丙六乙 所率諸將 一別屛營
육정육갑육병육을 소솔제장 일반병영
邪鬼唵唵口急口急如律令娑婆啊
사귀음음 급 급 여률령사바하
관운장(關雲長)은 중국 촉한시대 때,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했던 의리(義理)의 장군이었다가 죽은 후 신명계(神明界)에서 원진천존관성제군(遠趁天尊關聖帝君)이 되었다. 관운장은 한번 맺은 약속은 절대로 어기지 않았는데, 그가 평생 동안 지킨 약속의 밑바탕은 ‘도원결의(桃園結義)’였다.
● 桃園結義 도원결의
원(元)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말이다. 후한(後漢) 말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어지럽자 생할고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새로운 살길을 찾게 되었다. 신흥 종교인 태평도(太平道)의 교주 장각(張角)은 이러한 틈을 이용해 세력을 넓히고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후한을 멸망시킨 황건적의 난이다. 조정에서는 하진을 대장군으로 삼아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하자 각 지방에 병사를 모집하는 방을 붙이게 되었다. 유주(幽州) 탁현(縣)에 살던 유비(劉備)는 이 방문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그는 평소에 큰일을 하고 싶어했으며, 일찍이 뤄양에 차를 사러 갔다가 황건적 무리의 횡포를 직접 체험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욕만 앞설 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거한이 유비 곁으로 다가와 한숨만 쉬는 것을 꾸짖었다. 장비(張飛)였다. 둘은 뜻이 같음을 알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가까운 주막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또 범상치 않은 얼굴의 거한이 있어 서로 마음이 통하였다. 그가 관우(關羽)였다. 서로 의기가 투합하자, 장비의 제안으로 다음날 장비의 집 후원 복숭아밭에서 의형제 결의를 맺고 피를 나누었다.
‘유비와 관우, 장비는 비록 성은 다르다 할지라도 이미 의형제가 되었으니, 곧 마음을 한 가지로 하고 힘을 합쳐 곤란함을 구원하고 위태로움을 도와,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만민을 편안케 할 것이다.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한 해 한 달 한 날에 죽기를 원하니 하늘과 땅의 신령께서는 이 뜻을 굽어 살피소서. 만일 우리들 중에 의리를 배반하고 은혜를 잊는 자가 있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죽여주소서.’
나관중이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책 첫머리에 삽입한 것은 정당하고 큰 의리를 부각하려는 것이었는데, 오늘날에는 목적과는 상관없이 의리를 맺는 데 이 말이 자주 쓰이고 있다.
강증산 성사께서는 정미년(1907년) 四월 전주 동곡(銅谷)에 약방을 차리시고 약장과 모든 기구를 비치하셨는데 약장은 종삼 횡오 도합 십오 칸으로 하고 가운데에 큰 칸이 둘 아래로 큰 칸이 하나이니라. 상제께서는 그 위 십오칸 중의 가운데 칸에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쓰고 그 속에 목단피를 넣고 그 아래에 ‘열풍뇌우불미(烈風雷雨不迷)’라고 횡서하고 또 칠성경을 백지에 종서하고 그 끝에 ‘우보상최등양명(禹步相催登陽明)’이라 횡서하고 약장 위로부터 뒤로 밑판까지 따라서 내려붙이고 그 위에 ‘양정 유월 이십일 음정 유월 이십일(陽丁 六月 卄日 陰丁 六月 卄日)’이라 쓰시니라.
● 烈風雷雨不迷 열풍뇌우불미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의 하나인 『서경(書經)』에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제위를 선양하는 것에 대해 나오고 있다.
요임금은 어질기가 하늘과 같고 지혜가 신과 같아 그 큰 덕을 밝히어 백성을 다스리니 온 나라가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되니 바야흐로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어느덧 요임금은 나이가 들어 몸도 노쇠해졌고 더구나 유례없는 대홍수가 일어나 온 세상을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요임금은 자신의 뒤를 이어 능히 홍수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후계자를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여러 신하를 불러 모으고 각기 천하를 다스릴만한 덕(德) 있는 선비를 추천하기를 명하였다. 방제라는 신하가 요임금의 큰 아들인 단주(丹朱)를 추천하였으나 불초하다하여 요임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두라는 신하가 공공이란 인물을 거론하였으나 그 역시 적합하지가 않았다. 사악이란 신하가 곤이란 사람을 등용할 것을 간하기에 요임금이 시험 삼아 홍수를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역시 감당을 하지 못하였다.
실의에 빠져 있는 요임금에게 뭇 신하들이 어떤 현인(賢人)을 추천하였는데 그가 바로 우순(虞舜)이었다. 요임금은 과연 순이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인가 알아보기 위해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하였다. 먼저 아황과 여영이라는 두 딸을 시집보내 그가 능히 두 부인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순은 능히 가정을 화목하게 다스렸을 뿐 아니라 벼슬자리에 오른 뒤 요임금의 명을 받아 백성들로 하여금 오륜의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하였으며 문무백관의 질서를 바로잡으니 그 덕이 천하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요임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천자가 되려면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의지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요임금은 대록이란 밀림에 순을 보내 홍수피해상황을 알아오게 하였다. 대록은 지금의 하북성 거록현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온갖 맹수와 독충들이 우글거렸으며 기상이변이 심해 그 누구도 가기를 꺼려했던 곳이었다.
순은 기꺼이 명을 받들어 대록으로 떠났다. 독충과 맹수들이 가득한 밀림속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기겁하였으나 순은 의연하게 길을 나아갔다. 갑자기 후끈후끈한 광풍이 몰아닥쳤다. 일행이 모두 혼비백산하였지만 순은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순은 강인한 정신과 의지력으로 요임금의 명을 완수하여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일을 『서경』에서는 “납우대록(納于大麓)하신대 열풍뇌우(烈風雷雨)에 불미(不迷)하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사업을 해나가는데 있어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사업의 과정이 순탄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비바람이 앞길을 막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순임금이 열풍뇌우가 몰아치는 순간에도 정신을 잃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 것처럼 우리도 어떤 난관과 고초가 닥쳐도 정심(正心)을 유지하여 나아갈 때 원하는바 목적이 달성될 것이다.
● 禹步相催登陽明 우보상최 등양명
우보(禹步)는 우보(牛步)라고도 하며 소걸음처럼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즉, 대개 두발이 서로 만나지 않고 서로 따르며 걷는 보법을 일러 우보법이라 한다. 이것을 우보상최(禹步相催)라 한다. 상최(相催)는 서로 따르며 재촉한다는 의미이다.
도가의 저서 중 『포박자』에는 우보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바로 서서 오른발을 앞에 두고 왼발을 뒤에 둔다. 다음 다시 오른발을 앞에 놓고, 왼발로써 오른발을 따르게 한다. 이것이 일보(一步)이다. 다음에 다시 오른발을 앞에, 다음 왼발을 앞에 두고 오른발로써 왼발을 따르게 한다. 이것이 이보(二步)이다. 다음 다시 오른발을 앞에 두고, 왼발로써 오른발을 따르게 한다. 이것이 삼보(三步)이다. 이와 같은 것이 우보(禹步)의 도화(道華)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신팔제원변법(洞神八帝元變法)』에 보면 “우보(禹步)란 하우(夏禹)가 부린 술(術)이며 귀신을 불러서 부리는 행보(行步)로서 만술(萬術)의 근원이며 현기(玄機)의 요지(要旨)로 여겨진다.
옛날 우가 치수를 할 때 높이와 깊이를 예측할 수 없어서 해약(海若 : 해신-북해신)과 지기(地祇 : 토지신)를 불러 판별하였다. 항상 그 보(步)를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입술(入術)하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우보법은 우임금이 치수사업을 할 때에 사용했던 행보법으로, 그 걸음걸이가 마치 칠성의 7개별을 따라서 걷는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상제께서 칠성경을 백지에 종서하고 그 끝에‘우보 상최 등양명(禹步相催登陽明)’이라 횡서하신 것이나 ‘천회지전보칠성 우보상최등양명(天回地轉步七星 禹步相催登陽明)’-하늘이 돌고 땅이 도는 것은 칠성의 걸음걸이 때문이다. 서로 재촉하는 우의 걸음[우보상최]은 세상을 밝게 비치게 만들었다-이라고 하신 것도 우보법이 칠성의 행보와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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