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성론 제2권
4. 변상분 ④
4) 사능품(事能品)
다시, 사능상(事能相)의 의미를 마땅히 알라.
이 청정한 성품의 사능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능히 싫어하여 떠나는 것이고,
둘째 열반에 대하여 원하고 구하고 즐거워하고 원하는 것이다.
만약에 청정한 성품에 이와 같은 두 가지 일이 없다면 성취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경(經) 가운데 설하기를,
“세존이시여, 만약에 여래장(如來藏)이 없다면 생사의 괴로움에 대하여 싫어하여 여위려는 생각이 없고, 또 즐거워하고 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때문에 부정취(不定聚)의 중생은, 이 두 가지를 일으켜 사용해야 하느니라.
첫째 생사의 괴로움에 대하여 과실(過失)을 관찰하여 의지처로 삼으니, 부정취의 중생으로서 싫어하여 여의는 마음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열반락에 대하여 공덕을 관찰하고 의지처로 삼으니, 이는 부정취의 중생으로 원하고 구하고 즐거워하고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고 구하고 즐거워하고 원하는 것에 네 가지 종류의 마음이 있으니, 어떻게 다른가?
첫째 원한다는 것은 곧 믿음이다.
믿음에 네 가지 있으니,
첫 번째는 (자신에게 불성이) 있는 것을 믿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불사의를 믿는 것이고,
세 번째는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믿는 것이고,
네 번째는 무량한 공덕이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다.
네 가지 뜻을 갖추었기 때문에 원한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 구하는 것이란,
이 법을 얻는 데에 이르기 위해 마음으로 항상 애써 구하되 물러나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구하는 것이라 한다.
셋째 즐거워 하는 것이란,
진여와 진여가 아닌 방편을 숙고하여 선택하는 것이니,
진여의 방편이란, 이른바 열반이고,
진여의 방편이 아닌 것은, 이른바 생사이다.
열반을 숙고하여 선택하되 빠르게 증득할 것을 구하지 않고, 생사를 숙고하여 선택하되, 버리거나 여의는 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즐거워하는 것이라 한다.
넷째 원하는 것이란,
지금 발원함으로써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항상 발원하여 모든 중생을 섭수하는 것으로,
아직 일찍이 버리거나 여읜 적이 없이, 그 도를 행함에 따라 함께 보리(菩提)에 들어 발원의 바다에 섭수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이로움을 위해 열반을 버리지 않고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생사를 버리지도 않는다.
때문에 두 가지 관(觀)이 있으니,
첫째 생사에 대하여 괴로움의 과실을 관하는 것이고,
둘째 열반에 대하여 즐거운 공덕을 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부분의 사람은 청정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이 관이 성취되니,
이른바 청정한 부분이란,
첫째 복덕의 부분이고,
둘째 해탈의 부분이고,
셋째 통달의 부분이다.
복덕의 부분이란, 과거세의 선근(善根)이 능히 이 몸에 감응(感應)됨으로써 모든 선근을 구족하여 법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는 것이고,
해탈의 부분이란, 이미 공덕의 종자를 심은 것이 능히 미래세 가운데 해탈의 과보를 얻는 것이고,
통달의 부분이란, 성스러운 도로 말미암아 능히 진여를 통달하는 것이니, 이를 청정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청정한 부분이 연이 되고 청정한 성품이 원인이 됨으로써 이 관을 이룩하니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이 두 가지 일로 말미암지 않고서도 관을 이룩한다면, 이는 인연이 없는 것이다.
마치 일천제가 열반성이 없이 이 관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천제들은 이러한 관이 없기 때문에 인연을 기다려 관하여야 바야흐로 이 청정한 성품이 객진(客塵)번뇌에 더럽혀지지 않음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승(三乘) 가운데 일승(一乘)에 대한 믿음과 즐거워함을 일으키지 못하고, 또 선지식(善知識)들도 친히 섬기지도 못했다.
그리고 네 가지 성스러운 바퀴(聖輪)에 이르지도 못하고 아직 상응하지도 못한다.
이른바 네 가지 바퀴란,
첫째 법다운 국토에 머무는 것이고,
둘째 선지식들에게 의지하는 것이고,
셋째 자신을 조복(調伏)하는 것이고,
넷째 과거세에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다.
바퀴에 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는 동시에 이미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는 동시에 이미 얻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둘째 능히 제도하여 여기서부터 저기에이르기까지, 남으로부터 상속해서 자기에까지 상속하고 자기로부터 상속해서는 다시 남에게 이르는 것이고,
셋째 능히 행하여 생사로부터 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첫째의 선처에 머무르는 것이란, 이곳은 바른 행을 닦는 착한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만약 이 가운데에 머문다면, 항상 이런 사람들을 보기 때문에 깨달음의 뜻을 얻으리니,
깨달음이란, 도리를 깨우치는 것이고, 뜻이란 선한 마음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선한 법 등의 일을 수지하는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설하시기를,
아는 것이 없고 선한 인식이 없는
나쁜 벗은 바른 행을 손상시키나니
거미(蜘蛛)가 우유(乳) 속에 떨어지면
이 우유는 독(毒)으로 바뀐다네
이것을 “마땅히 법다운 국토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 둘째의 이른바 선한 벗과 친근히 하는 것이란, 그 선한 벗에는 일곱 부분이 있으니, 게송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능히 보시하고 존중하고 믿을 수 있고
능히 설하고 능히 참아 수용하고
깊은 이치를 설하여 선한 벗을 위하고
제자들을 선한 곳에서 편안케 하는 것이네
일곱 부분이란,
첫째 능히 보시하는 것이니, 보시함으로 말미암아 남을 가엾이 여겨 사랑할 수 있고,
둘째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할 수 있고,
셋째 존중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고,
넷째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능히 설할 수 있고,
다섯째 능히 설하기 때문에 바깥의 환란을 참고 수용할 수 있으며,
여섯째 능히 참고 수용하기 때문에 깊은 이치를 설하여 선한 벗을 이롭게 할 수 있고,
일곱째 깊은 법을 설하기 때문에 선한 벗을 편안히 하여 선한 곳에 둘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 일곱 가지 덕을 갖춘 이가 있다면, 그는 충분히 의지할 수 있는 선지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를 전체적으로 논하면, 세 가지 뜻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첫째 가엾게 여기는 것을 좋아하고,
둘째 총명하고,
셋째 견디어 참는 것이니,
이 세 가지 뜻에 하나가 모자라더라도 곧 선한 벗이 아니다.
만약에 가엾게 여기기를 좋아할 뿐, 총명하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부모가 비록 자식의 병을 염려는 하지만 그 병을 구원하여 다스릴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총명하기만 하고 인자하거나 가엾이 여기는 것이 없다면, 이는 마치 원수의 의사가 남의 병을 치료해 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견디어 참지 못한다면, 이는 자신의 수행이 부족하여 가엾이 여기는 것도, 총명한 것도 다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비록 일곱 가지를 합쳐 말하지만, 세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능히 보시하고 존중하고 믿을 수 있는 이 세 가지는 가엾이 여기는 것에 속하고,
능히 설하고, 또 깊은 이치를 설하는 이 두 가지는 총명에 속하고,
능히 참는 것은 참는 것에 속하고, 마지막으로 선한 곳에서 편안케 하는 것은 세 가지에 다 공통되는 것이다.
한편 그 총명이란 어리석음을 여의는 것을 나타낸 것이고,
능히 견디어 참는 것이란 범부와의 차이점을 나타낸 것이고,
세 번째로 가엾이 여기는 것은 2승(乘)과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불ㆍ세존만이 이 세 가지 덕을 구비하셨기 때문에 충분히 중생들의 선지식이 되는 것이다.
셋째의 자신의 마음을 조복시키는 것이란,
바른 가르침 그대로 행하고 들을 때에는 산란심이 없고, 생각할 때에는 경솔하고 자만한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수행을 할 때에는 전도심이 없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가 조복하지 않는다면, 선한 곳의 선한 벗이란 곧 소용이 없을 것이다.
넷째의 과거세에 선근을 심은 것이란,
해탈분으로 삼기 위하여 선근을 닦는 것이다.
선근이란, 믿음과 계행과 들음과 버림과 지혜가 그것이다. 믿
음이란, 삼보(三寶)에 대한 바른 생각을 여의지 않는 것이요,
계행이란, 선한 도를 여의지 않는 것이요,
들음이란, 스스로가 듣고 남을 듣게 하고 남을 뒤바뀌게 듣지 않게 하고 남이 듣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들음으로 말미암아 금세에도 듣고 생각하고 닦아서 법 그릇(法器)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슬기를 구족할 수 있는 것이다.,
버림에는 두 가지 버림이 있다.
첫째 옛날에 물자를 버려 남에게 보시했기 때문에 지금 곧 탐욕과 애착을 덜게 되는 것이고,
둘째 옛날에 법을 버려 사람들에게 보시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곧 무명(無明)을 가볍게 하고 없앨 수 있게 된 것이니,
이렇게 버렸기 때문에 탐욕과 애착과 무명이 다 점차로 가볍고 희박하게 되어 이 인연으로 해탈의 과(果)를 얻는 것이다.
지혜란, 이 사람이 과거세에 이미 세 가지 보배(三寶)와 네 가지 진리(四諦)를 숙고하여 선택하였기 때문에 금생에서 세간의 바른 견해와 또한 모든 지혜(盡知)와 생사 없는 지혜(無生智)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비록 삼륜(三輪)를 갖추었더라도, 만약에 과거세의 선근이 없으면, 금생에 다섯 가지 감관(五根)이 구족하지 못하여 곧 여덟 가지 환란(八難) 등이 있는 곳에 태어날 것이니, 그러므로 만약에 과거세의 선근이 없으면, 앞의 삼륜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라.
이 네 가지 뜻을 통틀어서 바퀴에 비유하면, 만약 네 바퀴에 한 바퀴라도 부족하면 곧 해탈의 이름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법이 화합됨으로 말미암아 능히 해탈의 길을 얻는 것은,
마치 바퀴가 움직이고 구름으로써 해탈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시 이 바퀴가 움직이고 구르지 않는 것 같이,
마치 전륜성왕의 바퀴는 속바퀴ㆍ덧바퀴ㆍ바퀴통ㆍ바퀴살의 네 가지를 갖춘 것과 같다.
만약 이 네 가지가 없다면, 바퀴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만약 네 바퀴와 상응하지 않는다면, 이 때에는 생사 싫어하는 견해와 열반의 공덕관(功德觀)을 다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경에서 설하기를,
“일천제(一闡提)인으로 사정취(邪定聚)에 떨어진 자에게 두 가지 몸이 있다.
첫째는 본성 법신이고,
두 번째는 뜻을 따르는 몸이다.
부처님의 태양과 같은 지혜 광명이 이 두 가지 몸을 비추신다”고 하였다.
법신이란, 바로 진여의 이치이고,
뜻을 따르는 몸이란, 곧 진여의 이치를 따라 일어나는 몸이다.
부처님의 광명이 이 일천제의 두 가지 몸을 가엾이 여기심은,
첫째 법신이 생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수행을 더하여 길이 보리(菩提)의 행을 닦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관(觀)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경에서 설하기를,
“일천제 중생은 결코 반열반(般涅槃)의 성품이 없다”고 하였으니,
만약에 그렇다면 두 경이 스스로 상충된다.
이 두 말씀을 풀이하건대,
하나는 요의로써 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요의로써 설한 것이니,
이 때문에 상위되지 않는 것이다.
성품이 있다고 말한 것은 분명하게 설한 것이고,
성품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게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만약에 대승(大乘)을 믿고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을 일천제라 한다”고 하셨으니,
그들로 하여금 일천제의 마음을 버리게 하고자 ‘일천제일 때에는 결코 해탈할 수 없다’고 설하신 것이다.
만약에 중생으로서 자성(自性)의 청정한 성품이 있는데도 영원히 해탈할 수 없다면, 이럴 이치가 있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은 다 자성이 있기 때문에 뒤에 반드시 청정한 법신을 얻을 것이라고 관하셨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설하기를,
총명한 사람은 차례차례로
자주자주 자세히 자세히 닦아서
자신의 때를 제거하고 없애기를
마치 금세공인이 금을 다루듯이 하네
‘총명한 사람은 차례로’란 이 사람은 이해가 있어 전도되지 않게 닦고 차례대로 배우는 것을 말한다.
‘자주 자주’라는 것은 잠시도 버리는 때가 없이 항상 스스로가 연마하고 구하는 것이다.
‘자세히 자세히’란, 세세한 것으로부터 현저한 것에 이르기까지 듣고 생각하고 닦는 지혜와 같이 자세히 자세히 익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번뇌를 제거해 없애는 것이란, 그 무명의 무겁고 가벼운 모든 의혹을 점차로 제거하여 청정한 본성이 길이길이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금세공인이 다루듯이 하는 것이란, 모든 찌꺼기와 티끌을 완전히 제거하여 금이 청정한 광명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