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 파취착불괴가명론 상권
11. 여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에 대하여 취한 것이 없다
또다시 의심하는 자는 말한다.
“만약 예류(預流) 등이 스스로 과(果)를 얻지 못했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연등(然燈)부처님을 만나서 생멸이 없는 법인[無生忍]을 획득하셨을까?”
그러하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옛날에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에 대하여 취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 이와 같은 언급 등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옛날에 연등부처님을 만났을 때에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달아 어떤 법도 취한 것이 없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무생법인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속제(俗諦)이기 때문이니,
“보리를 증득하였다는 것은 얻은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또 경에 이르기를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말하기를
‘내가 도량(道場)에 앉아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지만 금강장(金剛場)을 일으켰다’라고 하였다”고 하였고,
경에 또 이르기를
“나는 존재하는 모든 법을 다 얻을 수 없다.
만약 성문(聲聞)과 독각(獨覺), 그리고 여래가 혹 말하기를
‘언어로는 증득한 법을 취할 수 없고 지혜가 아니면 또한 취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런 말은 경(經)에 위배된다”고 하였으니,
경에서 설한 제일의(第一義)는 지혜로운 이가 행할 바가 아니거늘 더구나 어떻게 문자로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지혜로 알 수 있는 경계는 소전경(所銓境)이라 이름한다.
이 두 가지 차별지(差別智)가 증득한 것을 초불행(初不行)이라고 말한다.
무슨 뜻으로 반드시 언어로는 취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간략한 것을 마땅히 갖추어 말한 것인 듯하다. 치아[牙齒]와 손발[手足] 등 여러 가지 몸의 일부분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경에서는 세존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생멸이 없는 지혜를 증득했으나 어떤 법에서 취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저 경전에서 말하였다.
“해혜(海慧)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초발심보살(初發心菩薩)ㆍ수행(修行)보살ㆍ불퇴전(不退轉)보살ㆍ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이다.
이 가운데 초발심보살은 색상여래(色相如來)를 나타낸 것이고,
수행보살은 공덕성취(功德成就)여래를 나타낸 것이며,
불퇴전보살은 법신(法身)여래를 나타낸 것이다.
해혜일생보처보살은 색상(色相)으로도 보지 못하고 공덕을 성취한 것으로도 보지 못하며 법신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보살은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정한 지혜에 의지하고 청정한 수행에 의지하지만, 청정한 지혜란 행하는 바도 없고 희론(戱論)도 아니기에 이것을 다시 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견(見)과 비견(非見)은 곧 두 가지 극단론인데, 이 두 가지 극단을 멀리 여의면 곧 부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를 보면 곧 자신을 보게 되어 제 몸이 청정함을 보고 부처가 청정함을 볼 수 있다.
‘부처가 청정함을 본다’는 것은 일체법이 다 청정함을 보는 것이다.
이 가운데 청정한 지혜도 또한 청정함을 보니, 이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해혜야, 내가 이와 같이 연등여래를 뵙고 얻은 생멸이 없는 법인(法忍)으로서의 증득한 법은 취할 수도 없고 얻은 진리도 없다.
그때에 다라수(多羅樹) 일곱 그루의 높이만큼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일체지지(一切智智)가 밝고 또렷하게 앞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수많은 견품(見品)을 끊었고, 여러 가지 분별인 다른 분별[異分別]과 두루 하는 분별[遍分別]을 초월하였으며, 모든 식별 있는 경계에 머물지 않아서 6만 가지 삼매를 증득하였다.
그러자 연등여래께서 곧 나에게 수기를 주시면서
‘너는 미리 세상에서 틀림없이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은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수기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고, 또한 그밖에 다른 지혜로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 나도 혼몽한 것도 아니건만 깨달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얻은 것도 없고 역시 부처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나라는 생각도 없었고, 수기도, 수기를 설하셨다는 생각도 없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다.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 것은 지혜를 증득했으나 취한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생각’이란 마음의 법은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니, 이 가운데에서 설명한 지혜의 경계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청정한 혜안(慧眼)으로써 관찰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또 ‘생멸이 없는 법인’이란 곧 마음의 법[心法]이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얻는 이도 없고 얻을 것도 없음을 증득했다’는 것은 법에는 성품도 없고 취득(取得)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또 ‘증득한 법은, 얻은 사람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는 것은 법에는 아무런 성품이 없어서 취할 수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니,
이렇게 얻을 것이 없는 이치에서 무엇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전혀 얻을 것이 없다면 어찌 지혜를 취할 수 있겠는가?
또 많은 견품(見品)을 끊고 여러 가지 분별심이 있는 견품을 초월한 분별지(分別智)의 법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일체 인식 작용의 경계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일체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계에 머물지 않음을 말로써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혜의 경계를 취할 바가 없다면 어떻게 다른 스승들이 단호히 부정(不定)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