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문수사리현보장경 하권
[자리를 피한 2백 비구들]
이 말을 설할 적에 2백 비구는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어 번뇌가 다하고 뜻을 깨달았으며,
2백 비구는 자리로부터 일어나서 4선(禪)을 얻었으므로 다른 곳으로 피하여 가면서 ‘최후에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체 세간이 다 어지러움은 이러한 법을 강설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야말로 본래 부드러워서 강하는 것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설한 법은 율행(律行)에 들어가지 않고 또 세존께서 교화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에 빈누문타니자가 문수사리에게 말했습니다.
‘이 2백 비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피하면서 말하기를,
≺이 법을 강설함은 일체 세간을 어지럽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합니다.’
문수사리는 대답했습니다.
‘빈누여, 이 법을 강설하는 것이 일체 세간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런 까닭이 있으니,
왜냐하면 빈누여, 세간의 근본이란 이른바 몸의 5온[陰]과 4대(大)와 6입(入)에 집착하는지라,
생사를 두려워하여 원을 세워 무위를 구하지만 생사 때문에 수취(受取)하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무위에 유순하지 못해서 근심하듯 하므로 생사 가운데 즐거울 것이 없고 열반도 없습니다.
그 두려워하지 않는 지혜라야 어지러울 것이 없고 4제(諦)에 머묾이 없을 것이니,
만약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곧 미혹하고 어지럽기 마련이며,
또 공의 진리에 머묾이 없어야 네 가지 일에도 머묾이 없어 도(道)에 대한 쟁란(諍亂)이 없을 것이니
만약 경전에 집착하여 도를 얻고자 한다면 곧 두 가지가 되고, 두 가지가 있으면 어지럽기 마련이다.
여기에 평등이란 것이 일체 법의 바른 것인 만큼
가령 두 가지가 없으면 두 가지가 없음으로 해서 쟁란이 없고 행이 있으며,
내 것을 구한다면 훌륭한 체하는 교만이 있고, 이미 교만이 있으면 쟁란하게 된다.
가령 집착하는 것이 없으면 조작하는 것이 없어서
바른 조작도 없고 삿된 조작도 없고,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조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제도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제도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닐 것이니,
이것이 바로 쟁란이 없음이고, 쟁란이 없음으로 해서 두 가지가 없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간과 쟁란하지 않는데, 세간이 나와 쟁란하는구나’라고 하셨으니,
왜냐하면 여래는 쟁란의 근본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쟁란의 근본이란 어느 것이 진실하고 믿음직한 것이고 어느 것이 사기(詐欺)냐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하고 믿음직한 말인들 무슨 말이 있겠으며, 사기의 말인들 무슨 말이 있겠느냐?
그 있고 없음이 평등하면 치우침과 삿됨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 ‘무슨 말이 있겠느냐’라고 하심은 곧 청정함이 있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때 문수사리가 도망가는 2백 비구 앞에서 중도에 큰 불을 조화로 일으켜 저 불토를 두루 가득하게 하니,
여러 비구들이 길을 건너가려다가 모두 가득한 불을 보고 불을 뛰어넘을 수 없었으며,
신족(神足)으로 허공을 날아 지나가려 해도 공중에는 두루 덮인 쇠그물[鐵網]이 있었고, 또 큰물이 시방에 두루한 것을 보았으므로 두려워 옷과 털이 꼿꼿이 설 정도였다.
마침 기수숲[祇樹] 길가에 두루 깔린 푸른 연꽃ㆍ흰 연꽃ㆍ누런 연꽃ㆍ붉은 연꽃을 멀리서 보고, 거기에 또 뭇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서
곧 스스로 발걸음을 돌려 부처님 처소에 이르러 법을 받아 듣기 위해 기수숲에 들어가 가리라(迦梨羅) 강당에 나아가서 부처님께 엎드려 예배한 다음 한쪽에 물러나 섰습니다.
[번뇌를 모두 끊는 자리]
빈누가 물었습니다.
‘이 여러 비구 뭇 어진 이들은 어느 곳을 가다가 어디에서 여기에 왔는가?’
비구들은 대답했습니다.
‘어진이여, 우리들은 아라한(阿羅漢)을 얻기 위해 모든 번뇌를 다 끊고 할 일을 이미 끝내 선정을 얻고 신족바라밀을 체득했는지라, 이 문수사리를 따라 법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법이 세간을 어지럽게 하는 법이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고 가는데,
마침 가는 도중에 이 불국토에 온통 불이 가득 찬 것을 보고 큰 불을 건너갈 수 없어서 일부러 되돌아와,
세존께 아라한으로서 번뇌를 모두 끊는 자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빈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자유로이 못하고 불을 받들어 섬겨서 불을 건너려는 자라면 이는 건너갈 수 없고,
소견의 그물[見網]에 떨어져 있는 자라면 쇠그물을 넘으려 해도 넘어갈 수 없고,
애욕의 물에 빠져 헤매는 자라면 큰물을 건너려 해도 이 또한 건너갈 수 없다.
왜냐하면 빈누여, 이 여러 비구들은 아직 음욕과 분노와 우치의 불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어찌 큰 불을 건너겠으며,
소견의 그물에 떨어져 있는데 어찌 쇠 그물을 넘어가겠으며,
은애(恩愛)의 물속에 빠져 있는데, 어찌 큰물을 건널 수 있겠느냐?’
부처님께서는 빈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물이나 불이나 쇠그물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없고 어디로 가는 것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문수사리가 나타낸 변화이다.
이와 같이 빈누여, 그 음욕ㆍ분노ㆍ우치와 모든 소견의 그물과 은애도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 없고 어디로 가는 것도 없어
모두 생각을 따라 잡된 생각이나 삿된 행이 근본이 되어서 나와 남이라는 그러한 색상(色像)을 일으키니,
나도 없고 느끼는 것도 없이 저 홀로 행하는 그러한 행이라야 어지러운 뜻을 물리치고 선정의 고요함을 이룩해 많은 공덕의 행을 쌓는다.
그리고 전일한 뜻은 얻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어 선정에 들어간 그대로 경전의 법에 염(念)을 일으켜
어떤 것이 법사(法事)이고 어떤 것이 법연(法緣)인가를 염할 것이다.
[12인연법]
그리고 이와 같이 자세히 관하되 이미 어리석음의 인연이 있으면 곧 지어감[行]을 일으키고,
이미 지어감의 인연이 있으면 곧 의식의 인연을 일으키고,
이미 의식의 인연이 있으면 곧 이름과 물질을 일으키고,
이미 이름과 물질의 인연이 있으면 곧 6입(入)을 일으키고,
이미 6입의 인연이 있으면 곧 습기[習]를 일으키고,
이미 습기의 인연이 있으면 곧 느낌[痛痒]을 일으키고,
이미 느낌의 인연이 있으면 곧 은애[恩愛]를 일으키고,
은애의 인연이 있으면 곧 잡음[受]을 일으키고,
이미 잡음의 인연이 있으면 곧 존재[有]를 일으키고,
이미 존재의 인연이 있으면 곧 나는 것을 일으키고,
이미 나는 것의 인연이 있으면 곧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근심이 있음을 관해야 한다.
그 고뇌와 뜻에 맞지 않는 것이 날마다 나는 것이라 하고,
이러한 큰 고뇌가 함께 뭉친 것을 일러 어리석음을 따라 길러낸 몸이라 하는지라,
어리석음이 이미 다 되면 그 지어감이 곧 사라지고,
그 지어감이 이미 다 되면 곧 모든 의식이 사라지고,
모든 의식이 이미 다 되면 이름과 물질이 곧 사라지고,
이름과 물질이 이미 다 되면 6입이 곧 사라지고
6입이 다 되면 그 습기가 곧 사라지고,
습기가 이미 다 되면 모든 느낌이 곧 사라지고,
느낌이 이미 다 되면 은애가 곧 사라지고,
은애가 이미 다 되면 잡음[受]이 곧 사라지고,
그 잡음이 이미 다 되면 모든 존재가 곧 사라지고,
그 존재가 이미 다 되면 나는 것이 곧 사라지는 동시에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슬퍼하는 뜻에 맞지 않는 것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그 큰 고뇌가 곧 제거됨으로 해서 평등을 얻고 무위를 체득하고 회합이 없어 적막함을 얻을 것이다.
저 과거가 역시 사라지지 않아서 과거의 무명[無點]도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무명도 다하지 않고 현재의 무명이 그 생각을 쓰기 때문에 청정함과 적막함이 없으면 곧 무명이 성립되며,
그 생각함이 고요하고 밝으면 무명은 성립하지 않으니, 이미 성립함이 없으면 아주 고요한지라, 이것을 무명의 다함이라고 한다.
저 고요하고 밝은 생각으로써 4대의 몸을 관한다면 이야말로 어리석은 몸이라,
마치 초목(草木)과 같아서 가령 뜻이 있고 마음이 있고 의식이 있다 할지라도 빛이 없어 볼 수도 없고 소리가 없어 말할 수도 없다.
또 마치 허수아비 옷 같아서 안도 없고 바깥도 없고 중간도 없고 얻을 것도 없을 것이니, 비구가 고요한 생각을 갖는다면 일체 법에 아무것도 일으킴이 없고 그는 곧 참된 공의 이치를 얻을 것이다.’
이 법을 설하실 때에 그 2백 비구들은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어서 번뇌를 다 끊고 해탈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