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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3권
10. 보리품(菩提品)[1]
[일체종지를 얻음]
[釋] 이미 보살이 중생들을 성숙하게 함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일체의 어려움을 이미 행하였고
일체의 착함을 이미 모았으며
일체의 때[時]를 이미 지났고
일체의 장애를 이미 끊었네.
[釋] 이 게송은 일체종지의 인(因)이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일체의 어려움을 이미 행하였다’고 함은 구족(具足)한 행으로 말미암아 한량없는 백천 가지의 어려운 행을 행하여도 일찍이 피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의 착함을 이미 모았다’고 함은 구족하게 여러 바라밀의 자기 성품과 선근을 모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체의 때를 이미 지났다’고 함은 구족하게 기나긴 시간과 큰 겁(劫)인 아승기(阿僧祇)를 지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체의 장애를 이미 끊었다’고 함은 구족하게 모든 대승의 장애를 끊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러 지(地)가 있는 것의 미세한 장애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일체의 종지를 성취하였으니
이는 곧 부처님의 몸이 된다.
비유하면 큰 상자를 여니
여러 가지 보배가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釋] 이 게송은 일체종지의 과(果)가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의 뜻으로 분별함이 있으니,
첫째는 얻음에 이름이요, 둘째는 자기의 성품이요, 셋째는 비유이다.
‘일체의 종지를 성취한다’고 함은 이른바 얻음에 이른 분별이니 이로부터 뒤에는 일체종지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부처님의 몸이 된다’고 함은 이른바 자기 성품의 분별이니 곧 일체종지가 부처님 몸의 체가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큰 상자를 여니 여러 가지의 보배가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함은 말하자면 비유의 분별이니 가히 사의(思議)할 수 없는 보리분(菩提分)의 보배가 다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몸에 차이 나는 모습이 없음]
이미 일체종지가 부처님의 몸이 됨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이 몸에 차이 나는 모습이 없음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선법[白法]이 부처님의 몸이 되어서
없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있는 것도 아니니,
부처님은 법보(法寶)의 인이 되고
법은 곧 선근의 인이다.
[釋] ‘백법이 부처님의 몸이 된다’고 함은 여섯 가지 바라밀 등의 일체의 선법을 굴려서 부처님의 몸이 되기 때문이다.
‘없음도 아니고 또한 있음도 아니다’라고 함은
이 체는 없음이 아니니, 어찌하여 그런가? 진여(眞如)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있음도 아니니, 어찌하여 그런가? 자기의 성품을 성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차이나는 모습이 없다고 이른다.
‘부처님을 법보의 인이다’라고 함은 부처님께서 일체의 법을 설하셨기 때문이요, 신통의 힘을 쓰기 때문이다.
‘법은 곧 선근의 인이다’라고 함은 중생은 밭이 되고 선근은 곡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서 법보는 교화되는 중생의 밭에서 선근의 곡식이 나고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법을 구족하였고 또한 법을 벗어나며
창고와 같고 또한 구름과 같아서
법을 내는 것은 법의 비를 내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와 같은 비유를 이룬다.
[釋] 이 게송은 앞의 뜻을 거듭 나타낸 것이다.
‘법을 구족하였고 또한 법을 벗어났다’고 함은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선법을 구족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일체의 불선법을 멀리 벗어난 것이다.
‘창고와 같고 또한 구름과 같다’고 함은 불보(佛寶)가 창고와 같고 법보가 구름과 같다는 것이다.
[문] 이것은 어떠한 뜻으로 씁니까?
[답] 법을 낸다고 함은, 법의 비를 내리는 것이기에 이와 같은 비유를 이루었으니,
불보는 능히 법보를 출생하는 것이 큰 창고와 서로 비슷하고,
법보는 능히 일체 중생들의 선근을 출생하는 것이 큰 구름과 서로 비슷한 것이다.
[위없는 귀의]
이미 부처님의 몸에 두 가지의 차이가 없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이것이 위없는 귀의(歸依)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부처님은 항상
중생들의 세 가지 염오(染汚)됨을 구호하시니
이른바 모든 의혹과 모든 악한 행동과
나고 늙고 죽음이다.
[釋] 이 게송은 구호(救護)의 뜻을 간략하게 나타낸 것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구하신다고 함은, 필경 구호하기 때문이다.
[문] 어떤 법을 구호합니까?
[답] 중생들의 세 가지 염오이다. 말하자면 번뇌에 염오되고 업에 염오되고 생(生)에 염오되는 것이다.
여러 의혹이라고 함은 곧 번뇌에 염오되는 것이요,
여러 악한 행동이라고 함은 곧 업에 염오되는 것이요,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고 함은 곧 생의 염오이다.
[문] 어떻게 그를 구호합니까?
[답] 이 세 가지의 중생을 어떠한 경우라도 구호하여 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곧 필경의 뜻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재앙과 악취(惡趣)와
신견(身見)과 또한 소승(小乘)
이와 같은 모든 중생의
일체를 다 구호한다.
[釋] 이 게송은 구호의 뜻을 자세히 나타낸 것이다.
‘모든 재앙’이라고 함은 말하자면 벙어리와 눈멀고 귀먹고 미치고 어지러운 자와 형잔(形殘) 등의 중생들이, 부처님의 힘으로 말미암아 벙어리가 능히 말하고, 눈먼 자는 보게 되고, 귀먹은 자가 듣게 되며, 미친 자가 바로됨을 얻고, 어지러운 자가 정(定)함을 얻으며, 형잔인 자가 구족함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호함을 구족하게 된다.
‘악취’라고 함은 지옥 등의 중생에게 광명을 놓아 빛에 이르게 하고 고통을 벗어나게 하여 다시 그곳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호한다.
‘신견’이라고 함은 말하자면 자신에게 집착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인무아(人無我)를 알게 하여 2승(乘)의 열반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호한다.
‘소승’이라 함은 말하자면 2승의 성품과 정하지 않은 중생을 방편으로 대승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니, 이와 같이 구호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님은 뛰어난 귀의할 곳이 되어
비길 데가 없다. 그러기에 위가 없는 것이니
앞과 같은 가지가지의 두려움에 대해
해탈하지 않는 자가 없게 한다.
[釋] 이 게송은 귀의의 뛰어남을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은 비유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위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염오된 중생과 그밖의 재앙 등의 중생들 일체를 다 능히 구호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부처님의 착함으로 가득한 몸은
일체 세간에서 가장 뛰어나서
미묘한 법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자비의 바다를 건너게 한다.
[釋] 이 게송은 귀의의 뛰어남이 모든 부처님의 착함이 가득한 몸으로 인하기 때문임을 나타낸 것이다.
‘일체 세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함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 10력(力)과 4무외(無畏) 등 여러 착한 공덕으로 자기 성품을 가득 채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미묘한 법으로 중생들을 교화한다’고 함과 자비의 바다를 건너기 때문이라고 함은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을 잘 알고 자비 바다의 언덕을 구경까지 건너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미래의 끝[未來際]이 다하도록
일체의 중생들에게 널리 미쳐서
항상 그들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이를 귀의함이 크다고 말한다.
[釋] 이 게송은 대승에 귀의가 큼을 나타낸 것이다.
크다고 함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시간이 큰 것이니, 일체 중생들의 나고 죽고 함을 다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계가 큰 것이니, 일체의 중생을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셋째는 일이 큰 것이니, 항상 이익됨을 지어서 그들의 괴로움을 구하여 해탈시켜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여래의 전의의 모습]
이미 위가 없는 귀의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여래의 전의(轉依)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두 가지의 장애가 항상 따르지만
그것을 멸하는 데 지극히 넓게 끊어서
선법[白法]이 원만해지기 때문에
전의(轉依)의 두 가지 도(道)를 이룬다.
[釋] 이 게송은 전의(轉依)가 벗어남이 있고 얻음이 있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두 가지의 장애가 항상 따르지만 그것들을 따라 멸하는 데 지극히 넓게 끊는다’고 함은 소치(所治)가 멀리 벗어남을 밝힌 것이니, 말하자면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의 두 가지 종자는 무시(無始) 이래로 항상 따라다닌다.
이제 길이 멸함을 얻은 것이란 일체의 지(知)가 두루 한 자는 일체의 종 모두를 끊기 때문이다.
‘백법이 원만해지기 때문에 전의(轉依)의 두 가지 도를 이룬다’고 함은 능치(能治)의 성취를 밝힌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체가 가장 위의 원만한 백법으로 서로 응한다.
그때 전의의 두 가지 도가 성취됨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나는 극히 청정한 출세간(出世間)의 지혜의 길을 얻음이요,
또 하나는 식(識)의 경계가 끝없는 지혜의 길을 얻는 것이니,
이를 전의라고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그 곳은 여래께서 머물러
움직이지 않기가 산왕(山王)과 같다.
적멸을 즐기는 사람도 연민하는데
하물며 여러 유(有)에 집착한 자이겠는가?
[釋] 이 게송은 여래의 전의(轉依)가 여러 전의 가운데 가장 뛰어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의 전의는 무루계(無漏界)에 머무는 것이 마치 산왕(山王)이 땅을 진압(鎭壓)하여 편히 머물러서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의하였으니 성문과 연각들처럼 적멸을 즐기는 사람을 보아도 오히려 연민(憐愍)을 내거늘 하물며 원변(遠邊)의 하천한 이로서 유(有)에 집착하여 고뇌하는 중생들이겠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남에게 이익됨과 위가 없음과
전의하지 아니함과 태어나지 아니함과
넓고 큼과 차이가 없는 것과
머물러 집착함이 없음과 또한 평등함과
뛰어남과 널리 수기하는 것
이를 여래의 전의라고 말하니,
열 가지의 공덕을 나타내 보인
차별의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 이 두 게송은 여래의 전의에 열 가지 공덕의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떤 것들을 열 가지 공덕이라 하는가?
첫째는 타의전(他義轉)이니, 말하자면 전의가 이미 남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상전(無上轉)이니, 말하자면 전의가 이미 일체의 법 가운데 자재함을 얻은 것이 2승(乘)들의 전의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부전전(不轉轉)이니, 말하자면 전의가 이미 여러 인을 염오하여서 이를 능히 전하지 못하고 의(依)를 의지하여 전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불생전(不生轉)이니, 말하자면 전의를 마쳤기에 일체 염오의 법이 결국에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광대전(廣大轉)이니, 말하자면 전의가 이미 큰 보리와 열반에 들어감을 보여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무이전(無二轉)이니, 말하자면 전의가 이미 생사와 열반에 차이나는 것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부주전(不住轉)이니, 말하자면 전의가 이미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에 함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평등전(平等轉)이니, 말하자면 전의가 이미 성문과 연각들과 더불어 한가지로 번뇌장에서 해탈하였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수승전(殊勝轉)이니, 말하자면 전의가 이미 10력과 4무외 등 일체 불법과 비교해도 비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열째는 변수전(遍授轉)이니, 말하자면 전의가 이미 항상 일체의 승(乘)으로써 가르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허공이 일체에 두루 가득하듯이
부처님도 또한 일체에 두루 가득하며
허공이 모든 존재[色]에 두루 가득하듯이
여러 부처님도 중생에 두루 가득하다.
[釋] 이 게송은 부처님의 몸이 일체에 두루 가득한 것이 허공과 서로 같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처음의 두 구절은 바로 말한 것이요, 뒤의 두 구절은 풀어서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일체의 존재 무더기에 두루 가득하듯이 부처님의 몸도 또한 일체 중생들의 무더기에 두루 가득하다.
만일 중생들이 현재 부처님의 몸이 아니라 하여 부처님의 몸이 두루 가득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 뜻이 그러하지 않으니, 그 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물 담은 그릇이 깨지면
달의 모양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허물로서
부처님의 형상이 또한 나타나지 않는다.
[釋] 이 게송은 부처님의 몸이 비록 두루 가득하지만 중생들이 보지 못함을 나타낸 것이다.
비유하면 물 담은 그릇이 깨지면 달의 형상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중생들의 허물로서 부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한다는 이 뜻이 성립된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불무더기의 성품이
혹은 불타고 혹은 꺼지듯이
이와 같아서 모든 부처님의 교화도
혹은 세상에 나오고 혹은 열반에 든다.
[釋] 이 게송은 모든 부처님의 교화가 어떤 때는 세상에 나오고 어떤 때는 세상에 나오지 않음을 나타낸다.
비유하면 불의 성품이 어느 때는 성하게 불타고 어느 때는 꺼지듯이
모든 부처님의 교화도 또한 이와 같아서 어느 때는 세상에 나옴을 보이고 어느 때에는 열반을 나타내 보인다.
[여래의 사업이 항상 공용이 없음]
이미 여래의 전의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여래의 사업(事業)이 항상 공용(功用)이 없음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여의주(如意珠)와 하늘의 북이
자연스레 자기의 일을 이루듯이
부처님의 교화와 부처님의 말씀이
고의가 없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釋] 이 게송은 부처님의 일이 공용(功用)이 없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유하면 여의보주는 비록 무심(無心)하지만 자연히 가지가지의 변현(變現)을 짓는 것과 같이
부처님도 또한 그러하여서 비록 공용이 없는 마음이지만 자연히 가지가지의 변화를 능히 일으키신다.
비유하면 하늘의 북이 비록 마음이 없지만 자연히 가지가지의 음성을 능히 내는 것과 같이
여래도 또한 그러하여서 비록 다시 공용이 없는 마음이지만 자연히 가지가지의 미묘한 법을 말씀하신다.
게송으로 말한다.
공(空)을 의지하면 업이 무간(無間)인데
그러나 업에는 늘고 줄어듦이 있고
경계를 의지하면 일이 끊이지 않는데
그러나 일에는 생(生)과 멸(滅)이 있다.
[釋] 이 게송은 부처님의 일이 사이가 없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유하면 세간에서 공(空)을 의지하여 지은 것은 때에 단절됨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러하여서 무루계(無漏界)를 의지하여 부처님의 일을 짓는 것도 또한 단절됨이 없다.
비유하면 세간에서 공을 의지하여 짓는 것은 증(增)이 있고 감(減)이 있듯이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러하여서 무루계를 의지하여 부처님의 일을 짓는 것에도 또한 생과 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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