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영락본업경 하권
6. 인과품(因果品)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현성의 정법(正法)은 이미 충분히 설하여졌습니다.
그렇지만 인과의 두 가지 모습은 마땅히 어떠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시는 인(因)은 이른바 십반야바라밀이니 이것이 백만 아승기 공덕의 근본이니라. 부처님과 보살이 또한 그 중에 포함되어 내재해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십법(十法)을 금강지혜해장(金剛智慧海藏)이라고 하나니 일체광명공덕(一切光明功德)의 행을 출생하느니라.
불자여, 십반야바라밀이란 보시를 행하는 것에 따라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재물이고,
둘째는 법이고,
셋째는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보시하는 것이니라.
계(戒)에는 세 가지 연이 있나니,
하나는 자성계(自性戒)이고,
둘째는 수선법계(受善法戒)이고,
셋째는 이익중생계(利益衆生戒)이니라.
인(忍)에도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고행을 참고,
둘째는 외악(外惡)을 참고,
셋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참는 것이니라.
정진(精進)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큰 서원의 마음을 일으키고,
둘째는 방편으로 나아가며,
셋째는 중생을 권고하여 교화시키는 것이니라.
선정(禪定)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 선정은 어지러운 모습을 일으키지 않으며,
둘째 선정은 모든 공덕을 낳으며,
셋째 선정은 중생을 이롭게 하느니라.
지혜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유제(有諦)를 비추고,
둘째는 무제(無諦)를 비추고,
셋째는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를 비추느니라.
서원[願]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자행(自行)의 서원이고,
둘째는 신통의 서원이고,
셋째는 바깥을 교화하는 서원이니라.
방편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향과(向果)에 나아가고,
둘째는 유무를 교회(巧會)하며,
셋째는 일체법을 버리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것이니라.
신통력(神通力)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보통(報通)이고,
둘째는 수정통(修定通)이고,
셋째는 변화통(變化通)이니라.
무구혜(無垢慧)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무상지(無相智)이고,
둘째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이고,
셋째는 변화지(變化智)이니라.
불자여, 십지(十智)에서 일체의 공덕행을 낳느니라.
일곱 가지 재물[七財]은 신(信)ㆍ시(施)ㆍ계(戒)ㆍ문(聞)ㆍ혜(慧)ㆍ참(慚)ㆍ괴(愧)인데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잘 쓰면 성불할 수 있기 때문에 재물이라고 하느니라.
사섭(四攝)은 이익(利益)ㆍ유어(濡語)ㆍ시법(施法)ㆍ동사(同事)를 말하며,
사무애변(四無碍辯)은 법변(法辯)ㆍ의변(義辯)ㆍ어변(語辯)ㆍ요설변(樂說辯)인데 이 네 가지 변재의 법 가운데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기 때문에 무애(無礙)라고 이름 하느니라.
걸림이 없는 지혜[無礙智]에서 지혜를 내기 때문에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으며,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으며,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 의지하고 아는 것[識]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이름 하는 것이니라.
지혜에서 십력(十力)ㆍ사무외(四無畏)ㆍ육통(六通)ㆍ삼명(三明)의 백만 억 아승기의 공덕을 내며 순서대로 지혜를 낳느니라.
능히 여덟 가지 세제(世諦)의 일체법을 연하는데, 사제(四諦)와 이제(二諦)와 십이연(十二緣)의 제법은 인연에 의해 성립된 임시의 법[假法]이므로 아(我)가 없고 법만이 있을 뿐이니라.
상대(相待)하여도 일체상은 공허하고 상속하므로 한결같이 공하다고 이름 하느니라.
그리고 불가득이므로 인이 생기면 그것이 모여서 일어나는 즉, 법은 사실[實]을 인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이 모여서 유(有)를 생성하여 법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법은 임시로 만들어진 법이며, 수(受)는 기용(起用)이라고도 하고 취법(聚法)이라고도 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여덟 가지 유위법과 일체법은 본지(本智)가 비추는 곳[所照處]이니라.
다시 이 지(智)에서 능히 오개(五蓋)인 탐(貪)ㆍ진(瞋)ㆍ수(睡)ㆍ도(掉)ㆍ의(疑)와 사식(四食)인 촉(觸)ㆍ식(識)ㆍ사(思)ㆍ단식(段食)과 사생(四生)인 난생ㆍ태생ㆍ습생ㆍ화생과 십악(十惡)ㆍ오역(五逆)ㆍ팔도(八倒)ㆍ삼장(三障)ㆍ팔난(八難)ㆍ십삼번뇌(十三煩惱)ㆍ육도(六道)ㆍ삼계(三界)ㆍ육십이견(六十二見)ㆍ사류(四流)ㆍ사박(四縛)ㆍ사취(四取)ㆍ구번뇌(九煩惱)ㆍ칠식주(七識住)ㆍ사결(四結)을 모두 없애는데, 제거되는 모든 것을 다 불선(不善)이라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십지경(十智境)이 없어지게 되는 일체 공덕을 다 불인(佛因)이라고 이름 하나니, 그대는 마땅히 받고 마땅히 행하여야 하느니라.
불자여, 그대가 앞에서 말한 과(果)라고 하는 것은, 오현(五賢)의 보살이 모든 도법을 수행하여 일대과(一大果)를 증득하므로 법성체(法性體)라고도 하느니라.
그 법성체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대(大)도 아니고 소(小)도 아니며, 신(身)도 아니고 심(心)도 아니며,
상(相)도 아니고 삼세(三世)도 아니며,
하늘[天]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 이름[名字]도 아니고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도 아니며,
육도(六道)도 아니고 육식(六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라.
수량(數量)의 법도 아니고 일체의 법상(法相)을 지나며,
복전(福田)도 아니고 귀신(鬼神)도 아니며,
동정(動靜)도 아니고 생멸(生滅)도 아니며,
제일(第一)도 아니고 오색(五色)도 아니며,
육대(六大)도 아니고 토전(土田)도 아니며, 법계도 아니고 삼계도 아니며,
박해(縛解)도 아니고 명암(明暗)도 아니며,
득법(得法)도 아니어서 적연(寂然)하여 무위(無爲)이니라.
일체 법의 밖이라서 마음으로 헤아릴 길이 없으므로 이곳을 측량하기 어려우니라.
유제(有諦) 중에 있어서는 겁량(劫量)의 행을 수행함에 또한 과보가 있느니라.
불자여, 두 가지 법신이 있나니,
하나는 과극(果極) 법신이고,
다른 하나는 응화(應化) 법신이니라.
그 응화 법신은 그림자가 형상을 따름과 같이 과신(果身)이 항상 하므로 응신도 또한 항상 그러하니라.
불자여, 옛날의 모든 부처님은 두 가지 몸의 길[道]이 하나였느니라.
불자여, 일체 보살에게는 두 가지 몸이 다 무상(無常)한 몸이니라.
불자여, 일체 범부들에게도 또한 두 가지 몸이 있나니,
첫째는 보신(報身)이고,
둘째는 방편신(方便身)이니라.
보신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방편신은 함께 일체 중생에게 있는 것이니라.
불자여, 일체 보살과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두 가지 몸이 있다고 모든 여래께서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시므로 결정요의(決定了義)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부처님의 의공덕신(義功德身)은 모든 부처님의 길이 같아서 과법(果法)도 다르지 않나니, 이른바 십호(十號)이니라.
첫째는 여래(如來), 둘째는 응공(應供), 셋째는 정변지(正遍知), 넷째는 명행족(明行足), 다섯째는 선서(善逝), 여섯째는 세간해(世間解), 일곱째는 무상사(無上士), 여덟째는 조어장부(調御丈夫), 아홉째는 천인사(天人師), 열째는 불타(佛陀)인데 함께 십덕(十德)을 향하므로 일체 중생이 공양하는 바가 되느니라.
다시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 있나니,
이른바 몸에 잘못이 없고,
생각에 잘못이 없고,
입에 잘못이 없고,
다른 생각이 없고,
정함 없는[不定] 마음이 없고,
다 알고서 버리지 않음이 없으며,
심념(心念)이 줄어듦이 없고,
의욕[欲]이 줄어듦이 없고,
정진이 줄어듦이 없고,
지혜가 줄어듦이 없고,
해탈이 줄어듦이 없고,
해탈지견이 줄어듦이 없느니라.
신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고,
구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고,
의업이 지혜를 따라서 행하고,
지혜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아는 데에 걸림이 없느니라.
다시 십력(十力)이 있나니,
이른바 처비처력(處非處力)ㆍ업력(業力)ㆍ정력(定力)ㆍ근력(根力)ㆍ욕력(欲力)ㆍ성력(性力)ㆍ과력(果力)ㆍ천안력(天眼力)ㆍ숙명력(宿命力)ㆍ결진력(結盡力)이니라.
그리고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가 있으며,
나는 일체지인(一切智人)이며,
나는 이미 번뇌가 다하여 무루(無漏)이며,
번뇌도(煩惱道)와 번뇌장도(煩惱障道)를 벗어났으며,
천신(天身)ㆍ천안(天眼)ㆍ천이(天耳)ㆍ누진(漏盡)ㆍ숙명(宿命)ㆍ타심(他心)의 여섯 가지 신통력이 있느니라.
오안(五眼)ㆍ오분법신(五分法身)ㆍ무죄삼업(無罪三業)ㆍ불보법승(佛寶法僧)ㆍ멸제해탈(滅諦解脫)ㆍ영지일승(靈智一乘)ㆍ금강보장(金剛寶藏)ㆍ법신장(法身藏)ㆍ자성청묘장(自性淸妙藏)ㆍ삼달(三達)ㆍ삼무위(三無爲)ㆍ삼명(三明)ㆍ일제(一諦)ㆍ일도(一道)ㆍ독법(獨法)ㆍ대락무위(大樂無爲)이니라.
불자여, 모든 성과무량공덕장(聖果無量功德藏) 가운데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의 과(果)가 있나니 이 과는 하나의 길[一道]이니라.
불자여, 과의 체성[果體]이 원만하여 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고,
이치가 두루 머물지 않음이 없으며,
중도제일의제의 청정국토에 있어 다함이 없고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느니라.
일체 법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체(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체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 그것은 일조상(一照相)ㆍ일합상(一合相)ㆍ일체상(一體相)ㆍ일각상(一覺相)이며 밝고 청정하여 둘이 없느니라.
불자여, 이 과(果)는 독법원만(獨法圓滿)하여 항상 머무나니, 일과(一果)의 체상에 헤아릴 수 없는 뜻이 있고, 그 낱낱의 뜻에 헤아릴 수 없는 덕이 있으며, 그 낱낱의 덕에 헤아릴 수 없는 이름이 있느니라.
의과(義果)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멸제(滅諦)의 상ㆍ락ㆍ아ㆍ정과 열여덟 가지 함께 하지 않는 일체 공덕을 모두 의과라고 이름 하기 때문에 과과(果果)라 하기도 하느니라.
불자여, 뜻과 덕과 이름의 세 가지는 모두 교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세 구(句)의 뜻이 있느니라.
만약 현인과 일체 중생이 이 세 구를 명료히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은 이미 삼세제불에게 부처님의 직위(職位)를 받은 것이니라.
불자여, 그 과는 말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나, 이름과 형상[名相]의 법 가운데에서 이름과 형상의 법으로 설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일과(一果)를 체(體)라 이름하고 의(義)를 과과(果果)라 이름 하는데, 이 의과(義果)는 원과(圓果)를 출생하므로 과과라 하느니라.
불자여, 내가 이러한 인과를 백천 겁 동안 설한다 하더라도 다할 수 없나니, 너희들 모든 대중은 스스로 잘 수지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