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중권
[여래의 자성법신]
‘만약 마땅히 여래께서 상호(相好)를 원만히 갖추신 분이라고 관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면 저것은 자성(自性)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며, 이것은 법신의 자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여래의 자성법신(自性法身)은 원만하게 갖춘 상호로써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심이 생겨날 것이므로
이러한 의혹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음의 글이 생겨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마땅히 색(色)의 몸을
여래의 법신(法身)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니
저 전륜성왕(轉輪聖王)과
여래가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과보의 복으로 얻은 상호(相好)도 역시 원만하게 갖춘 상호라고 말할 수 있으니, 저 복으로 인하여 이러한 상호를 이루었기 때문임을 설명한 것이다.
‘그 복의 힘을 바탕으로 보리를 증득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여래의 원만하게 갖춘 상호로써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증득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리라’는 의심이 일어날 것이므로
이런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땅히 원만하게 갖춘 상호를 가지고”라는 등의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곧 원만하게 갖추어진 상호의 과보(果報)는
원만한 복으로 받은 것이 아니니
법신을 불러오게끔 한 것은
방편의 특이한 성품 때문이었네.
참다운 법신은 지혜의 자성이기 때문에 저 복의 체성(體性)과는 같지 않다.
이 두 가타(伽他)는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사근(邪勤)만 일으키는 사람이니
마땅히 나를 볼 수 없으리라.
마땅히 부처님의 법성(法性)인
곧 도사(導師)의 법신을 보려 하지만
법성의 인식작용은 알기 어려우니
그러므로 그것을 알기 어렵다 하네.
이 두 게송에서 설한 뜻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하리라.
오직 색으로써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알지 못하리니
이 진여(眞如)의 법신은
인식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라네.
이 글에 나타난 뜻은 마땅히 색이나 소리, 이 두 가지를 가지고서는 여래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범부[異生]로 말미암아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런 사람은 사근(邪勤)만 일으킬 뿐’이라는 것은 그러한 이생(異生)은 부질없는 사근만 일으킨다는 말로서 바른 도에 의지하지 않고 나를 찾거나 보려고 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법성이 곧 진여(眞如)임을 말한 것이다.
‘만약 복으로는 보리를 증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보살의 복업(福業)과 그 과보가 틀림없이 끊어질 것’이라는 의심이 생겨날 것이므로
이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다음의 글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복의 성품이 아무리 회복된다 하더라도 능히 깨달음의 처소를 불러낼 수 없다는 말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그 복은 망실되지 않고
과보(果報)도 끊어지지 않으며
증득한 법인(法忍)도 또한 끊어지지 않으니
번뇌 없음[無垢]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다시 복의 원인을 논(論)하며
이것 밝히기 위해 적절한 비유를 들었으니
저 복은 과보 없는 까닭에
바르게 취하는 것일 뿐 지나치게 취하려는 것이 아니네.
이것은 곧 저 지혜의 자량(資糧)이 되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복의 비유]
또 어째서 다시 그 복에 대하여 비유를 들어 말했는가?
그것 때문에 “증득한 법인(法忍)도 또한 끊어지지 않으니, 번뇌 없는 경지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 복의 원인을 논(論)하기 위해 이렇게 비유를 들어 진술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또 의심을 내어 말하기를
“이미 생멸이 없는 법인을 얻었으면 지혜도 또한 생겨나지 않아야 할 터이니, 보살의 모든 복덕도 당연히 모두 끊어질 것이다”라고 할 것이므로
“나타난 복은 끊어져 없어지지 않고 지극히 청정하여, 획득한 복이 이미 많을 것이며 과보(果報)도 뛰어나리라”는 말을 한 것이다.
“생멸이 없는 법인에서 성품 없는 것을 증득한다”고 한 것에 두 가지 성품 없는 것이 있다.
그 두 가지 성품의 본질은 생멸이 없기 때문에 경전에 이르기를
“묘생(妙生)아, 마땅히 바르게 취할 뿐이며, 지나치게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바르게 취하는 것]
어째서 바르게 취할 뿐 지나치게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가?
답하기를 저 복은 과보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르게 취할 뿐, 지나치게 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대체로 존재하는 복은 과보로 인하여 불러들인 것이므로 곧 배척해도 되는 것이니, 그것을 취하는 것은 곧 지나치게 취하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바른 길을 벗어나서 험한 길로 가는 것과 같다.
그 복은 과보를 부르지 아니하니, 그런 까닭에
“그 복은 바르게 취할 뿐, 지나치게 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
물었다.
보살의 복진(福津)이 이미 과보의 감응으로 인한 것이 아니면 획득한 과보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복은 화신의 과보[化果]를 불러
유정들의 일을 유익하게 하니
그 일은 임의대로 운행할 수 있기에
부처가 되어 모든 곳에 나타난다.
화신은 가고 오는 등의 일이 있지만
정각(正覺)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으니
저 화신은 법계의 처소에서
한결같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불세존께서 갖가지 변화를 나타내지만,
그 여래는 오고 가는 등의 일이 없으므로
“그 일은 임의로 운행되는 것이기에 부처가 되어 모든 곳에 나타난다.
화신은 가고 오는 등의 일이 있으나 정각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뜻을 밝히기 위하여 다음의 글에서 일컫기를
“일찍이 오는 것도 없고 또한 가는 것도 없다. 그런 까닭에 여래라고 이름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약 여래에게 가고 옴이 있어 달라진다고 하면 그것은 옳지 못하니, 그 항상한 성품은 여여하여 변화하거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