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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론 하권
10. 공을 타파하는 장[破空品]
[외도] 모든 법이 존재하네. 부정[破]이 있기 때문에. 만약 부정이 없다면 다른 법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투로]
그대는 모든 법상(法相)을 부정한다.
만약 이 부정이 있다면 “모든 법은 공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정이 있기에 모든 법이 부정된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부정이 없다면 모든 법이 존재한다.
[불자] 부정은 부정되어야 할 것과 같네. [수투로]
그대는 부정에 집착하기 때문에 유와 무의 법으로써 이 부정을 부정하고자 한다. 그대는 알지 않는가? 부정이 성립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공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부정[破]이 만약 존재한다면 이미 부정되어야 할 것[可破]에 떨어지니, 공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정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대는 무엇을 부정하겠는가?
제2의 머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부정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없다”고 말할 때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정과 부정되어야 할 것도 이와 같다.
[외도] 모든 법이 존재하네. 이것과 저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수투로]
그대는 다른 법을 주장하면서 한 법의 과실을 말하고 한 법을 주장하면서 다른 법의 과실을 말한다. 이 두 주장이 성립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존재한다.
[불자] 한 법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네. 다른 법도 그러하네. [수투로]
한 법[一]과 다른 법[異]을 얻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부정했다. 앞에서 이미 부정했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 없다.
또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는 주장하는 것이 없지만 나는 한 법과 다른 법을 주장한다”고 말한다면,
만약 이 물음이 있다면 이와 같이 부정할 것이다.
[외도] 다른 법을 부정하기에 그대는 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네. [수투로]
그대는 다른 법을 부정하길 좋아하고 이유 없이[强]과실을 범하고,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파괴하는 사람[破人]이다.
[불자] 공함[空]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주장하는 것이 없다.
주장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파괴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자기의 법을 주장하고 타인의 주장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대야말로 파괴하는 사람이다.
[외도] 타인의 법을 부정하기에 자기의 법이 성립하네. [수투로]
그대가 타인의 법을 부정할 때 자기의 법이 성립한다. 왜 그러한가? 만약 타인의 법이 진다면 자기의 법이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파괴하는 사람이 아니다.
[불자] 그렇지 않네. 긍정함[成]과 부정함[破]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네. [수투로]
‘긍정함’이란 좋은 점[功德]을 칭찬하는 것이다.
‘부정함’이란 그 나쁜 점[過罪]을 배척하는 것이다.
좋은 점을 칭찬하는 것과 나쁜 점을 배척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긍정함에는 삼감[畏]이 있네. [수투로]
또 ‘삼감’이란 힘이 없는 것[無力]을 의미한다. 사람이 자기의 법은 삼가기 때문에 긍정할 수 없지만 타인의 법은 삼가지 않기 때문에 부정하길 좋아한다. 그러므로 긍정함과 부정함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만약 타인의 법을 부정하는 것이 곧 자기의 법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왜 앞에서
“공함[空]을 말하는 사람은 타인의 법을 부정하기만 할 뿐 자기가 주장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는가?
[외도] 타인의 주장의 과실을 말한다면 자기의 주장이 긍정되네. [수투로]
그대는 왜 자기의 법을 긍정하지 않고서 타인의 법을 부정하기만 하는가?
타인의 법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기의 법을 긍정하는 것이다.
[불자] 타인의 법을 부정할 때 자기의 법을 긍정하기에 모든 법이 성립하지 않네. [수투로]
타인의 법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기의 법을 긍정한다.
자기의 법을 긍정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긍정하는 것이 없다.
[외도] 그렇지 않네. 세간과 상반되기 때문에. [수투로]
만약 모든 법이 공하고 무상(無相)한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世間人]은 모두 믿고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불자] 이 법을 세상 사람들은 믿네. [수투로]
이 연기의 법[因緣法]을 세상 사람들은 믿고서 받아들인다. 왜 그러한가?
연기의 법[因緣生法]은 상이 없는 것이다.
그대는 “우유 속에 타락과 연유 등이 있고, 여자애[童女]가 이미 아이들을 회임(懷妊)하고 있고 밥 속에 똥이 있다. 또 대들보와 서까래 등 바깥에 별도로 다시 집이 있고, 실 바깥에 별도로 천이 있다”고 말한다.
혹은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고 말하고
혹은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고 말하고
혹은 “인과 연들 없이 법들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제로는 공허해서 세상의 일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을 누가 믿고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나의 법은 그렇지 않다. 세상 사람들의 것과 같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믿고서 받아들인다.
[외도] 그대에게 주장하는 바가 없다고 하는 이 법이 성립하네. [수투로]
그대가 주장이 없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주장이다.
또 나의 법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자기의 주장이다.
[불자] 주장이 없는 것을 주장이라고 하지 않네. 무(無)와 같네. [수투로]
나는 앞에서 연기[因緣生]의 법들은 상이 없는 것[無相]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주장하는 바가 없다. 주장이 없는 것을 주장이라고 하지 않는다.
무(無)를 말하는 경우와 같다. 이것은 실제로는 무이다. 무를 말한다고 해서 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장이 없는 것도 이와 같다.
[외도] 그대는 상이 없는 것[無相法]을 말하기에 법을 소멸시키는 사람이네. [수투로]
만약 모든 법이 공해서 상이 없는 것이라면 이 주장도 무(無)이다. 그렇다면 모든 법이 없다.
모든 법이 없기 때문에 법을 소멸시키는 사람이라고 한다.
[불자] 법을 소멸시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법을 소멸시키는 사람이네. [수투로]
나 자신에게는 법이 존재하지 않기에 부정하는 것이 없다. 그대가 내가 법을 소멸시킨다고 말하면서 부정하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법을 소멸시키는 사람이다.
[외도] 법이 존재하네.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수투로]
만약 긴 것이 있다면 반드시 짧은 것이 있다.
만약 올라가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내려가는 것이 있다.
공허[空]가 있다면 반드시 충실[實]이 있다.
[불자] 어떻게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나를 부정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만약 하나가 없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만약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면 공한 것이 없다. 어떻게 서로 의존하겠는가?
[외도] 그대가 무(無)를 긍정한다면 이것이 긍정함[成]이네. [수투로]
건물이 공해서 말[馬]이 없다고 말한다면 말의 없음[無]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그대가
“모든 법이 공해서 상이 없는 것이다”고 말한다 해도
여러 마음[心]이 일어나기 때문에 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무를 긍정하는 것이니, 이것이 긍정함[成]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유와 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네. [수투로]
나의 실상[實相]에는 유와 무가 모두 공하다는 것을 여러 법문에서 말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만약 유가 없다면 무도 없다. 그러므로 유와 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부정은 그렇지 않네.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모든 법은 자성이 공해서 지음[作]이 있는 일이 없다면 지음이 없기 때문에 부정이 없다.
가령 어리석은 사람들은 허공을 부정하고자 해서 부질없이 스스로 고달프게 한다.
[불자] 자성이 공한데 상(相)을 취해서 계박되네. [수투로]
모든 법이 자성이 공한데 그릇된 상(想)을 분별해서 계박된다. 이 전도(顚倒)됨을 부정하기 위해 말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부정되는 것이 없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뜨겁게 타오를 때의 불을 보고서 허망되게 물의 상(想)을 내고 그것을 좇아서 고달파지는 것과 같다.
지혜가 있는 자가 “이것은 물이 아니다”고 올바르게 말해 주는 것은 그의 상(想)을 끊기 위해서이지 물을 부정하고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모든 법은 자성이 공한데 중생은 상(相)을 취해서 집착한다.
이 전도됨을 부정하기 위해 부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부정되는 것이 없다.
[외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이 큰 경전에는 없기 때문에. [수투로]
그대는 유를 부정하고 무를 부정하고 유이면서 무인 것을 부정하기에 이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에 떨어진다. 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유와 무의 상(相)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이라고 한다.
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은 『위세사경[衛世師經]』ㆍ『승거경[僧佉經]』ㆍ『니건법(尼乾法)』 등의 경전에서는 모두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불자] 제4구가 있네. [수투로]
그대의 큰 경전에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이 있다.
가령 『위세사경』의
“말[聲]은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다” 하는 것,
『승거경』의
“진흙덩어리는 물단지도 아니고 물단지 아닌 것도 아니다” 하는 것,
『니건법』의
“빛은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고 하는 것이 그렇다.
그와 같이 모든 경전에는 제4구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이 있다. 그대는 어찌 없다고 말하는가?
[외도] 만약 공하다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네. [수투로]
만약 완전히 공해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이 이렇다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선법과 악법을 언어로 표현해서 교화할 수 있겠는가?
[불자] 세속의 언설을 따르기에 과실이 없네. [수투로]
부처님들의 설법은 항상 속제와 제일의제에 의지한다. 이 둘은 모두 진실(眞實)이기에 허위의 말이 아니다.
가령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이 상이 없다[無相]는 것을 아시지만 아난에게
“사위성에 들어가서 걸식하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만약 흙과 나무 등을 제외하면 성(城)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세속의 언설에 따르기에 허위의 말에 떨어지지 않는다.
나도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
[외도] 속제는 없네.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수투로]
만약 속제(俗諦)가 진실이라면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간다. 만약 진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제(諦)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불자] 그렇지 않네.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큰 것과 작은 것이 그러하듯이. [수투로]
속제는 세상 사람들[世人]에 있어서 진실이고 성인에 있어서는 진실이 아니다.
한 개의 능금은 대추보다는 크지만 오이보다는 작은 것과 같다. 이 둘은 모두 진실이다.
만약 대추보다 작다고 말하고 오이보다 크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허위의 말이다.
그와 같이 세속의 언어 따르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
[외도] 이 과실을 안다면 무슨 이익을 얻는가? [수투로]
최초의 죄와 복을 버리는 것에서 공함[空]을 부정하는 것에 이르듯이
그렇듯이 법들은 모두 과실이 있다고 본다면 어떤 이익들을 얻는가?
[불자] 그와 같이 나[我]를 버리는 것을 해탈을 얻는다고 말하네. [수투로]
그와 같이 세 가지로 법들을 부정한다. 최초에 죄와 복을 버리고, 중간에 나를 부정하고, 최후로 모든 법을 부정한다.
이것을 ‘나 없음[無我]’, ‘나의 것 없음[無我所]’이라고 한다.
또 법들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있다고 들어도 기뻐하지 않으며 없다고 들어도 근심하지 않으니,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외도]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고 말하면서 왜 실제로는 해탈을 얻지 못하는가?
[불자] 영원히 청정하기 때문에. [수투로]
‘나[神]’를 부정하기에 사람[人]이 없고 열반을 부정하기에 해탈이 없다.
어떻게 “사람이 해탈을 얻는다”고 말하겠는가?
속제에 있어서이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