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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4권
5. 색론[3]
5.10. 근가명품(根假名品)
[문] 눈과 여러 감관들은 네 가지 요소와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답] 업의 인연에 따라 네 가지 요소는 눈 등의 감관을 이룬다. 이 때문에 네 가지 요소와는 다르지 않다.
또 부처님은 눈을 분별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눈알 속에 있는 굳음과 굳음에 의지하는 것을 땅의 요소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알아라. 모든 감관이 곧 네 가지 요소이다. 무슨 까닭인가? 다만 굳음[堅] 따위를 분별할 뿐이어서 다시 눈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눈이 공(空)임을 알리기 위하여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렇지 아니하면, 응당 눈 속에 따로 굳음 따위가 있어야 하리라. 만일 굳음 따위 가운데 별도로 눈이 있다면, 비록 굳음 따위를 분별한다 하더라도 도움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감관은 네 가지 요소와 다르지 아니하다.
또 육종경(六種經) 중에서 말씀하기를 “여섯 가지는 곧 사람이니라”고 하셨다.
만일 모든 감관이 네 가지 요소와 다르다면 눈 따위가 사람을 이루는 인연이라고 말하지 못하리라.
물질들로 인하여 네 가지 요소를 이룬다 하면 소리 그것도 역시 사람을 이루는 인연이다.
다만 여섯 가지 가운데에는 붙인 이름으로 사람이라 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모든 감관은 네 가지 요소와 다르지 아니하다.
또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눈이옵니까?”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네 가지 요소로 인하여 물질을 이루고 볼 수 없는 대상[不可見有對]”을 눈이라 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알아라. 네 가지 요소와 다르지 아니하다.
비구는 영리한 근기로서 슬기가 있었으므로, 눈 등의 감관에서 깊이 의미(疑)을 낸 것이다.
세상 사람은 누구나 다 물질을 보는 것이 눈인 줄로 알고 내지 감촉을 아는 것이 몸인 줄 알지만,
이 비구는 눈 등의 감관 안에서 있다 없다는 의심을 낸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혹 어떤 논사는 “다섯 가지 성품[五性]을 다섯 가지 감관”이라 말하기도 하고
혹은 “하나의 성품”이라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비구는 부처님의 법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부처님께 여쭈었고,
부처님은 다섯 가지 감관이 다 네 가지 요소에 속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대답하기를
“비구야, 이 눈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물질로 인하여 볼 수 없는 대상이다”라고 하셨다.
만일 법이 실지로 있다면 인연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며, 가명의 법으로 인하여 다시 감영을 이루는 것은 마치 나무로 인하여 숲을 이루는 것과 같다.
[문]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물질로서 성취함을 눈이라 한다” 하니, 이 사실은 어떤 것인가?
[답] 성취하거나 성취하지 않거나 간에 네 가지 요소의 업의 인연으로부터 생겼으면 눈 따위의 감관이라 한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이 비구의 눈 따위의 감관에 대한 의심은 끝내 끊을 수 없었으리라.
무슨 까닭인가? 부처님은 “눈 따위의 모든 감관은 네 가지 요소로 인하여 만들어진다”고 말씀하셨으며, 이 때문에 이 비구는 진실한 눈의 법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눈 등은 네 가지 요소와 다르지 아니한 줄 알 것이다.
또 부처님은 여러 군데서 네 가지 요소를 분별하면서 눈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혜로써 실없는 소리[戱論]를 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 몸을 관찰하여 여섯 가지로 분별하여 굳음과 굳음에 의지하는 것을 땅이라 하고 이렇게 다섯 가지를 싫증내어 여의고 하나의 식(識)만이 있음은 역시 소를 죽이는 비유와 같다.
상보유경(象步喩經)에서도 “네 가지 요소를 분별하건대, 다시는 눈이 없고, 만일 따로 눈이 있다면 다시 분별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또 화차(和蹉) 등의 여러 논의사(論議師)도 이와 같은 말을 하였으니, 허물도리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문] 다섯 가지 감관은 네 가지 요소와 다르다.
무슨 까닭인가? 눈 등은 눈 등의 감관[入]에 딸리는데, 네 가지 요소는 감촉의 감관[入]에 속하기 때문이다.
또 눈 등은 안의 감관[內入]인데 비해서 네 가지 요소는 바깥의 감관[外入]이며,
눈 등은 감관(根)이지만 네 가지 요소는 감관이 아니며,
또 눈 등은 물질로써 이루어진 것이지만, 네 가지 요소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알아라. 모든 감관은 바로 네 가지 요소가 아니다.
[답] 인연에 따르기 때문에 그 일과 다르다고 말함은 마치 믿음의 뿌리[信根] 등의 다섯 가지를 또한 행음(行陰)이라고도 말함과 같다.
만일 네 가지 요소가 업으로부터 생긴다면 눈 등의 소속으로서 안의 감관이라고도 하고 또한 감관[根]이라고도 할 것이다.
또 네 가지 요소는 그것이 바로 성취한 것임은 마치 수레바퀴가 바로 수레인 것과 같으리니 이 일도 또한 그와 같다.
[문] 그렇지 않다.
마음이 청정한 것을 믿음이라 하지만 마치 믿음이 다르고 마음이 다름과 같아서 이 일도 그러하다.
[답] 그렇지 않다.
청수주(淸水珠)로 인하여 물이 곧 맑아지면 맑은 그대로가 물인 것처럼 그와 같아서
믿음의 구슬을 얻을 제 마음의 못[池]이 깨끗하여지면 이 마음의 깨끗함 그대로가 바로 마음이다.
또 우리는 이 논 중에서 마음과 다른 믿음이 있다고는 말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잘못이다. 또 감관은 붙인 이름의 인을 이루는데서 붙인 이름이니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 역시 동일하다고 말하지도 못하리라.
[답] 네 가지 요소가 성취하는 중에서는 붙인 이름으로 감관[根]이라 하나 또한 네 가지 요소만을 감관이라 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모든 감관은 네 가지 요소와 다르지 않다.
5.11. 분별근품(分別根品)
[문] 이 모든 감관 중에서 어느 요소가 더 많은가?
[답] 더 많은 것은 없다.
[문] 만일 모든 요소가 고르게 들어 있다면 무슨 이유로 물질을 보는 것도 있고 보지 못하는 것도 있는가?
[답] 모두가 업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업에 따라 생긴 것이 눈에 속한 것이면 네 가지 요소의 힘은 능히 물질을 보게 된다. 그 밖의 감관도 역시 그러하다.
[문] 만일 업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면 무슨 이유로 한 가지 감관으로 여러 가지 경계[塵]를 두루 알지 못하는가?
[답] 이 업에는 다섯 가지 차별이 있다. 업으로서 능히 보는 원인이 되는 것은 마치 등촉(燈燭)을 보시하여 눈의 과보를 받는 일과 같다. 소리 따위도 역시 그러하여 업의 차별 때문에 감관의 힘에도 다름이 있다.
[문] 만일 이것이 업의 힘[業力]이라면 무엇 하러 여러 감관을 빌릴 것이 있는가? 다만 업력만으로 식(識)이 모든 경계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답] 그렇지 않다. 현재 보건대 감관이 없으면 식이 생기지 아니한다.
무슨 까닭인가? 마치 장님은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는 듣지 못함과 같다. 현재 보는 일 중에서는 인연이 쓸데없다면, 이것은 논란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 또 으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만일 모든 감관이 없으면 식(識)이 생기지 아니하며 바깥의 네 가지 요소들이 감관이 없이 생긴다면, 의례 이것을 빌려야 한다.
또 모든 감관은 중생의 몸을 장엄(莊嚴)하기 위하여 업으로부터 생긴다. 마치 곡식이 될 인연의 업을 얻었기 때문에 곡식이 생기며, 또한 종자를 빌려서 싹과 줄기와 가지와 잎이 차례로 생기는 것과 같아서 이것도 그와 같다.
[문] 마음은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아니한가? 안식은 눈을 감관으로 삼고 또한 차례로 사라지는 마음에도 의지하는데, 마음은 다만 차례로 사라지는 마음으로만 감관을 삼고 다시 눈들과 같이 감관[根]과 의지[處]가 있지 아니하니, 그 이유를 말하라.
[답] 일정한 다섯 가지 경계가 있으므로 일정한 다섯 가지 식이 있는 것인데, 마음은 그와 같지 아니하다. 또 마음은 의례 그렇게 되어야 한다. 다만 차례로 사라지는 마음으로만 감관을 삼을 뿐 다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법이 비록 없어도 뜻이 능히 만연하는 것처럼 마음의 법도 그와 같아서 이 일이 역시 그렇다. 또 이 일은 그대의 법과 마찬가지다. 그대의 법에서도 물질 등의 티끌 중에서 식은 감관을 기다려서 생기고, 의식(意識)은 차례로 사라지는 마음[次第滅心]을 기다려서 생기게 된다.
[문] 만일 의식(意識)으로서 다시 감관이 없다면 어느 곳에 의지할 것인가?
[답] 네 가지 요소의 몸에 의지한다.
[문] 무형 세계에서는 다시 무엇에 의지하는가?
[답] 무형 세계의 식은 의지한 데가 없다. 의례 그렇게 의지가 없이 머무른다. 무슨 까닭인가? 모양(相)의 차별 때문이다. 의식은 능히 있고 없음을 알며, 만일 형상이 있으면 의지하지마는 형상이 없어도 머무를 수는 있으므로 무형 세계에서도 의지는 없되 머무른다.
또 여러 인연이 모이기 때문에 식은 생기는 것이니, 경전 중의 말씀에 “뜻이 법을 반연함으로 인하여 곧 의식이 생긴다”고 함과 같다. 이것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마치 사람이 벽을 의지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온갖 법은 모두가 자체의 성품에 머무른 것이다.
5.12. 근등대품(根等大品)
[문] 모든 외도는 말한다. “다섯 가지 감관은 다섯 가지 요소로부터 생긴다” 하니 이것이 사실인가 어떤가?
[답] 사실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허공은 없기 때문이니, 이 일은 이미 밝혔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요소로부터 생기지 아니한다.
[문] 모든 외도는 말한다. “눈 속에는 불의 요소가 많다” 한다.
무슨 까닭인가? 업의 인연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밝은 것을 보시함으로 인하여 눈을 얻는 것이다. 경전 중의 말씀에 “옷을 보시하면 빛깔을 얻고 밥을 보시하면 힘을 얻고 탈 것을 보시하면 즐거움을 얻고 등을 보시하면 눈을 얻는다”라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눈 가운데는 불의 요소가 많다. 또 눈은 밝음을 의지해서만 능히 보고 밝음을 여의면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불의 요소가 많은 것이다.
또 불은 멀리 비춘다. 눈에도 광명이 있기 때문에 멀리 물질을 상대할 수 있다. 또 말하되 “사람이 죽으면 눈은 해에 돌아간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해가 근본성품이 되는 줄 알 것이다.
또 눈은 결정코 물질을 볼 수 있고 물질은 불에 속하기 때문에 도리어 제 성품[自性]을 보게 된다. 그와 같이 허공과 땅과 물과 바람들도 감관에 따라서 두루 많다. 사람이 죽으면 귀의 감관이 허공으로 돌아간다면 귀는 결정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소리는 허공에 속하며 그밖의 것들도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감관 가운데의 모든 요소는 많고 적음이 있어야 한다.
[답] 그대의 말에 “업의 인연과 비슷하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혹은 과보가 업인과 같지 아니함을 볼 수 있다.
마치 “밥을 보시하면 다섯 가지 일의 과보를 얻는다”는 말과 같다.
또 만일 눈 속에 밝은 것이 많으면 응당 바깥 광명인 등촉(燈燭)과 같은 것을 빌리지 아니하여야 한다. 또 만일 눈이 바깥 광명을 빌리기 때문에 불이 많다고 하면, 귀 등의 감관 안의 허공들도 많아서 바깥 허공들을 빌리지 아니하여야 할 터인데, 사실은 바깥 것을 빌린다. 그러므로 인이 되지 않는다.
또 물이 눈을 유익하게 함은 마치 사람의 눈을 씻으면 눈이 곧 환해짐과 같으므로 응당 물도 많아야 한다.
또 불은 눈을 손해시킴은 마치 햇빛 따위와 같다. 만일 이것이 자체의 성품이라면 응당 스스로 손해시키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불이 많은 것이 아니다.
또 하늘눈[天眼]은 밝음을 여의어도 능히 물질을 본다. 그러므로 눈은 불에 속하지 아니한다. 또 달의 광명중에서도 물질을 보게 되는데, 달은 불의 성품이 아니다. 또 눈은 으레 그런 것이어서 혹 눈이 밝음을 기다려서 볼 수도 있고 밝음을 기다리지 않고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니, 마치 눈은 허공 등의 인연으로 비록 물질에 당도하지 아니하여도 능히 멀리 보게 되는 것처럼 눈의 법도 그와 같아서 생각하고 분별하여 불의 요소가 많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또 그대의 말에 “밝음을 여의면 보지 못한다”고 하니 만일 허공과 생각과 물질을 여의고도 또한 능히 볼 수 없다면 허공 등도 응당 역시 모두가 많아야 한다. 또 온갖 눈이 다 바깥 광명을 빌리는 것이 아니니, 마치 솔개와 올빼미 따위의 날짐승과 고양이와 살가지 따위의 길짐승은 바깥 광명을 빌리지 않고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불이 많은 것이 아니다.
또 불은 밝게 비치면서 항상 뜨거운 모양이 있으나 눈은 그와 같지 아니하다. 만일 그대가 “눈은 광명이 있어서 멀리 물질을 대한다”고 말하면, 이 일은 이미 깨뜨려졌으니 눈에는 광명이 없는 까닭이다.
만일 “해에 돌아간다”고 말하면 눈은 곧 항상한 것이다. 또 해는 감관이 아닌데 눈이 무엇 때문에 돌아가는 것인가?
또 만일 해로서 죽는다면 해의 감관과 해는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러므로 옳지 못하다.
또 위의 하늘[天]에서 죽을 때에는 눈은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위에는 해가 없기 때문이다.
또 허공은 조작이 없는 것이라 돌아갈 데가 없다. 또 모든 감관은 떠나감이 없다. 왜냐하면 함이 있는 법[有爲法]은 생각생각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대가 “눈은 결정코 빛깔을 보고 빛깔은 불에 속하기 때문에 도리어 제 성품을 본다”고 말하면 이 일은 옳지 못하다.
원인이 쓸데 없기 때문이니, 소리가 허공에 속하는 것들도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는 “다섯 가지 감관 중에서 모든 요소는 치우치게 많다”는 그 일은 벌써 깨어졌다.
[문] 어떤 논사의 말에 “하나의 감관은 하나의 성품이다. 땅 중에는 구나(求那)가 많기 때문에 내음이 있어서 내음의 앎[知]을 일으키며, 물과 불과 바람 가운데서는 맛과 빛과 닿임이 있기 때문에 맛과 빛과 닿임의 앎을 일으킨다” 하니 이것이 사실인가?
[답] 나는 먼저 “일정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땅 가운데는 내음도 있고 그 밖의 물질도 있다. 그러므로 일정한 원인이 아니다. 또 모든 요소가 화합하여 생기므로 땅이 물 따위를 여의는 것이라고 보지 못한다. 만일 땅이 내음이 있기 때문에 내음의 앎을 일으킨다 하면 또한 빛깔들의 앎도 일으켜야 하리니, 땅 가운데는 네 가지 구나를 갖추어 있기 때문이다.
[문] 내음은 다만 땋일 뿐이다. 코가 땅에 속하기 때문에 유독 내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답] 땅의 구나는 땅 뿐인데 코로 모두 알아야 한다면 또 물은 차가운 닿임만이 있고 불은 뜨거운 닿임만이 있으므로 혀와 눈으로 알 수 있어야 하는데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또 타라표(陀羅驃)가 없기 때문에 감관도 있지 아니하다.
또 모든 감관의 힘의 작용은 티끌[塵]과 화합하기 때문에 앎이 생긴다. 화합이 이미 깨뜨려졌으면 곧 감관의 작용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한 가지 성품이 감관으로 될 수 없다.
5.13. 근무지품(根無知品)
[문] 모든 감관은 경계[塵]에 이르기 때문에 아는가, 이르지 않고도 알 수 있는가?
[답] 감관이 능히 아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감고나이 경계를 알 수 있다면, 한꺼번에 여러 가지 경계를 두루 알아야 할 터인데, 사실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의식을 가지고서야 능히 안다.
그대의 마음에 혹시 감관은 식(識)을 기다려서 함께 아는 것이요, 식을 여의지 않고 아는 것이라면 그 일은 옳지 못하다.
한 가지 법도 그 밖의 법을 기다려서 할 인이 있음은 없다.
만일 눈이 능히 안다면 무엇 때문에 식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또 만일 감관으로 능히 안다면 분별하여야 하리니, 그것은 감관의 업인가? 식의 업인가?
[문] 비춤은 감관의 업이요, 앎은 식의 업이다.
[답] 이것은 분별이 아니거니 어떻게 비춘다 하겠는가?
그대의 법에서는 귀 등의 모든 감관은 불의 성질이 아니므로 응당 비추지 않아야 한다.
만일 모든 감관(根)이 식에 있어서 마치 등불과 같다면 지금 모든 감관 또한 마땅히 비춤이 있어 마치 등불처럼 비추고 또 비추어서 이와 같이 끝이 없어야 하리라.
만일 다시 비추는 것이 없이 감관만으로 비춘다면, 또한 감관은 없어야 하고 식만으로 능히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비춤은 감관의 업이 아니다.
또 감관은 능히 알지 못하는 것이 마치 등불이 비추면서도 능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반드시 식(識)을 위한 의지가 되므로 이것을 감관이 업이라 한다.
그러므로 식(識)만이 능히 알게 될 뿐 모든 감관은 아니다.
만일 식이 있으면 알게 되고, 식이 없으면 알지 못하는 것이 마치 불이 있으면 덥고, 불이 없으면 덥지 않음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불로부터 뜨거움이 있다.
[문] 경전 중의 말씀에 “눈으로 물질을 보되 그 모양을 취하지 아니해야 한다. 귀 등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알아라. 눈이 물질을 취하는 것이다.
또 “눈 등을 감관이라 한다”고 하였다.
만일 알지 못한다면 어찌 감고나이라 하겠는가?
또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나의 모든 제자는 조그마한 일에서도 잘 아는 것이 마치 눈으로 보듯한다”고 하셨다.
만일 눈이 보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모든 제자는 보는 것이 없으리니 그 일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모든 감관은 결정코 경계[塵]를 붙잡는다. 또 감관으로는 경계를 붙잡고 식으로 분별하면 이것은 곧 감관과 식에 다름이 있다.
[답]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눈은 바로 문(門)이니 물질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문이 되고 식이 그 속에서 본다. 이 때문에 눈이 본다고 말할 뿐이다.
[문] 또한 “뜻[意]도 역시 문이니, 법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리라.
뜻이 문이 될 수 있는데도 아는 것이 아닌가?
[답] 뜻도 차례차례 사라지는 마음으로 문이 되면, 이 때문에 뜻은 알지 못할 것이요, 의식이 능히 안다.
또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눈은 좋은 물질을 바란다”고 하셨다.
눈은 곧 물질의 법[色法]이어서 분별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바램을 내지 못하며, 바로 식이 바램을 낸다.
또 부처님은
“눈으로 아는 바는 바로 물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식이 물질을 아는 것이요, 눈은 실로 알지 못한다.
또 세간 사람들은 세상 습속 때문에 “눈은 보고 귀는 듣는다”고 말하므로 부처님도 역시 따라서 말씀하셨을 뿐이다. 왜냐하면 다만 물질을 볼 수 있을 뿐 다른 것은 볼 수 없으나, 부처님은 또한 탐욕 등의 허물도 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세간에서 “달이 다 되었다”고 말하면 부처님도 또한 따라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빈천(貧賤)한 사람에게 이름을 부귀(富貴)라 붙이면 부처님도 또한 그대로 따라서 부르셨으니, 부처님의 뜻은 세간과 다투려 하지 아니하심이 마치 마가라(摩伽羅)의 어미들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세상의 말을 따르기 위하여 부처님은 눈이 본다고 말씀하셧다.
[문] 세간에서는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은 말을 하는가?
[답] 안식의 의지가 되는 바에 따라 이 의지의 가운데서 본다고 한다. 마치 “저 사람이 보고 이 사람이 본다”고 말함과 같으며 사람이 죄와 복들을 지으면 모든 부처님과 하늘과 귀신이 본다”고 말함과 같다. 또 “왼쪽 눈으로 보고 오른쪽 눈으로 본다”고 말함과 같고, 또 “해의 광명으로 보고 달의 광명으로 본다. 혹은 허공에서 본다. 혹은 중간을 향해서 본다. 혹은 문 안에서 본다”고 말함과 같다.
물건을 삶[煮]는 중에서도 “이 사람이 삶는다, 저 사람이 삶는다”고 말하며, 혹은 풀과 나무의 섶으로 삶는다. 쇠똥[牛糞]으로 삶는다. 기름으로 삶는다. 타락[酥]으로 삶는다. “불도 삶는다, 햇볕으로 삶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불을 가지고 삶는 것이요, 그 밖의 것은 가정으로 얻어진 이름이다. 그와 같아서 다만 식만으로 볼 뿐인데 눈이 본다는 이름만 얻은 것이다.
또 이 말은 모두가 눈의 문으로 물질을 본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또 눈 그것은 사람이 사용하는 기구로서 사람은 바로 붙인 이름의 짓는 것이므로 기구를 사용함이 있어야 한다.
또 안식으로 인하여 보는 것을 눈이 본다고 함은 마치 평상 위에서 사람이 웃는 것을 평상이 웃는다고 말함과 같다.
또 눈은 식의 작용에 매어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식의 작용이라고 말함은 마치 손발이 사람에게 매어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사람이 작용하는 것을 손의 작용이라고 말함과 같다.
또 안식은 눈을 원인하며 그 원인 중에서 결과를 말함은 마치 아무개가 아무 부락을 불 질러 태운다고 말함과 같다.
또 금(金)을 먹었다고 말하면 금을 목숨이라 하고, 풀을 소와 염소가 도니다 함과 같아서 그것이 다 원인 중에서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눈으로부터 식을 내고 물질을 보기 때문에 눈이 본다고 한다.
또 식이 눈에 가까이 붙어서 물질을 보면 눈이 본다고 함은 마치 기르는 소[牧牛]가 물에 가까이 있으면 물에 있다고 말함과 같다. 또 눈으로 안식을 분별하면 이 때문에 눈 안에 안식의 작용이 두게 됨은 마치 지팡이 바라문[杖婆羅門]같다.
또 눈은 안식을 이룩하면 이 때문에 그 중에서 안식의 작용을 말하는 것을 마치 재물이 줄어든 것을 사람이 줄어들었다 하고 재물이 늘어난 것을 사람이 늘어났다고 말함과 같다.
또 안식이 눈과 화합하기 때문에 보는 것을 눈이 본다고 말함은 마치 나무가 사람과 합하려 때리는 것을 나무 사람[木人]이 때린다고 말함과 같고, 검정 물감이 옷에 물들었기 때문에 검정 옷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또 모든 법으로 서로 엇바꾸어서 말함은 마치 지혜의 업[慧業]을 느낌[受]의 가운데서 설명함과 같다 하면, 또 안식으로 물질을 본다 해야 할 것을 중간의 말을 줄였기 때문에 다만 눈이 보는 것이라고만 말한다.
또 약석(藥石)이 어느 하나로 이름이 붙여짐과 같다. 그대의 말에 “만일 볼 수 없다면 어떻게 감관이라 할 수 있는가”라고 하나, 지금 대답해야겠다. 이 눈 등의 다섯 가지 법은 그 밖의 물질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감관(根)이라 한다.
[문] 눈 등의 다섯 가지 법과 그 밖의 물질[色] 등의 이 열 가지 법은 다 같이 경계[塵]를 알지 못함은 마치 눈 등을 여의면 식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만일 물질들을 여의면 식이 또한 생기지 않을 터인데 무엇이 뛰어난다고 말하는가?
[답] 모든 경관 때문에 식은 차별을 얻고 안식ㆍ이식(耳識) 등이라 한다. 마치 북과 북채가 합하여 소리가 나되 북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북 소리라 하는 것과 같다.
또는 땅이 곡식들과 합하여 싹을 내되 곡식이 더 낫기 때문에 곡식의 싹이라 하는 것처럼, 모든 식도 역시 그렇다. 의지할 곳에 따라서 차별되는 이름을 얻는 것이요 인연 때문이 아니다. 만일 물질의 식[色識]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안식인가, 이것은 물질을 반연하는 의식인가” 하고 바로 의심을 낼 수 있다.
또 감관 가운데는 식이 있지만 티끌 가운데는 식이 없다. 또 눈 등의 중에서 나에 대한 어리석은 마음을 낸다. 또 식의 의지할 바 곳[所依處]은 바로 감관이요 티끌이 아니다. 또 자기의 몸 안에 있는 것이면 감관이라 하고 티끌은 아니다. 또 그것이 사람의 사용하는 기구이므로 감관이라 할지언정 티끌은 아니다. 또 감관은 중생 안에 있으며 티끌이 아니다. 또 감관이 트이거나 날카롭지 못하면 식도 밝지 못하다. 만일 감고나이 청정하면 알음도 명료(明了)하다.
또 모든 감관은 상과 중과 하가 있기 때문에 식도 따라서 차별이 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뛰어난다고 한다.
또 감관은 공용(共用)이 아니다 하나의 티끌은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게 된다. 또 감관과 식은 똑같은 업의 과보이지만 티끌은 그와 같지 않다.
또 감관은 인(因)이요 티끌은 연(緣)이다. 무슨 까닭인가? 감관이 다르기 때문에 식이 차별이 있지만 티끌 때문은 아니다. 마치 씨앗은 인이요, 땅들은 연이라 씨앗의 다름에 따라서 서로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인은 연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감관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대의 말에 “나의 제자는 비록 적은 일이라도 눈으로 보는 것같이 한다”고 하나, 이것은 세속의 말을 따른 것이다. 세간 사람이 눈으로 본다고 말하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한다”고 말씀한 것이다.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밝게 통달하여 지혜에 가까움은
마치 혀로 맛을 아는 것과 같고
비록 혀가 아무리 모른다손 치더라도
바가지나 구기[杓]와는 같지 아니하다.
뜻은 혀에 의지하여 설식(舌識)을 내기 때문에 혀는 맛을 안다고 말하며, 눈에 의지하여 식을 낸다면 눈이 본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제자는 눈으로 보듯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대의 말에 “감관으로 경계를 붙잡아 식으로써 분멸한다”고 함은 이미 대답하였다. 감관은 앎이 없기 때문이다.
또 그대들도 감관이 생각[思惟]하며 나에 차별의 모양이 있다고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감관은 경계를 붙잡을 수 없다. 또 그대들의 모든 알음[知]도 감관을 기다리지 않고 생긴다. 무슨 까닭인가? 요소와 나라는 것들이 감관보다 먼저 생겼기 때문이다.
또 그대의 요소 등의 모든 법은 본성(本性)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다 없어야 한다. 그대의 법에서는 본성이 변하여 요소 따위가 되지만 본성의 법은 없다. 이 일은 이미 설명하였다. 이야말로 감관은 없다.
5.14. 근진합리품(根塵合離品)
[문] 그대가 “식이 아는 것이요, 감관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말한 그 일은 이미 성립(成立)되었거니와지금 다시 감관과 티끌이 합하기 때문에 식이 생기는 것인가, 떨어지기 때문에 식이 생기는 것인가?
[답] 안식은 이름[到]을 기다려서 경계를 아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달과 같은 먼 데 있는 물질이라도 역시 보게 될 수 있고 달빛은 응당 달을 떠나서 오지 아니해야 한다.
또 허공과 광명을 빌리기 때문에 물질을 볼 수 있으며 만일 눈이 물질에 닿는다면 그 사이에는 공간과 광명이 없게 된다. 마치 눈과 대칼[篦]이 한데 닿으면 눈은 볼 수 없음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안식은 도달하지 아니 하고도 안다.
이식은 두 가지로서 혹은 도달하기 때문에 알기도 하고 혹은 도달하지 아니하고도 안다. 귀가 울리는 것은 도달하였기 때문에 아는 것이요, 우레 소리는 도달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그 밖의 세 가지 식은 모두 감관에 이르러야 알게 된다. 무슨 까닭인가? 현재 이 세 가지를 보건대 감관과 티끌이 화합하기 때문에 알게 되기 때문이다. 뜻 감관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이른다거나 이르지 않는다 함이 없다.
[문] 그대의 말에 “눈은 물질에 도달하지 않고도 안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눈 속에는 광명이 가서 물질을 보게 되고 광명은 바로 불에 속한 물질이며 눈은 불로부터 생기고 불에는 광명이 있기 때문이다.
또 만일 도달하지 않고도 본다면 어찌하여 온갖 물질을 다 보지 못하는가?
눈의 광명이 가는 데는 장애하는 것이 있어서 두루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것을 보지 못한다.
또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세 가지 일이 화합하기 때문에 닿임[觸]이라 한다”고 하셨다. 만일 도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화합하겠는가? 또 다섯 가지 감관은 모두 이는 대상이 있는 것[有對]이며, 티끌 중의 장애 때문에 대상이 있다고 한다. 코는 내음 중에 혀는 맛 중에 몸은 닿임 중에 눈은 물질 중에 귀는 소리 중에 만일 도달하지 않으면 장애가 없겠으나, 또 현재의 다섯 가지 티끌 중에서 앎이 생긴지라 이 때문에 다섯 가지 식은 이르게 되므로 능히 안[知]다. 만일 이르지 아니하고도 알 수 있다면 또한 과거와 미래의 물질도 알아야 할 터인데, 실은 알지 못한다.
또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앎이 생긴지라 그러므로 눈의 광명이 가서 티끌과 화합하며 광명이 물질에 도달하므로 화합이라 한다.
소리도 또한 귀에 도달하기 때문에 들린다. 무슨 까닭인가? 사람이 먼 데 있으면서 말을 작게 하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소리도 빛깔과 같이 당도하지 아니하여도 아는 것이라면,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도 사실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아라. 도달하기 때문에 들리게 된다.
또 소리는 멀리 들릴 수 있다. 만일 도달하지 않고도 들리는 것이라면 멀고 가까운 데가 없으리라. 또 소리는 벽을 가지고 막으면 들을 수 없다. 만일 도달하지 않고도 들을 수 있다면 아무리 막혔을지라도 또한 듣게 되리라. 또 소리는 멀리서 들으면 분명하지 못하나 가까이서 들으면 분명하다. 만일 당도하지 않고도 들린다면 곧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알아라. 음성이 도달하기 때문에 들을 수 있다.
또 소리가 바람을 따르면 분명하고 바람을 거스르면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알아라. 귀에 이르기 때문에 들을 수 있다. 또 소리는 다 들을 수 있다. 만일 당도하지 않고도 듣는다면 응당 다 듣지 않아야 한다. 마치 물질이 당도하지 않는데도 보이기 때문에 모두는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소리는 물질과는 같지 아니하다.
만일 당도하지 아니하여도 들을 수 있다면 물질과 마찬가지임은 마치 물질이 한 부분만 보이고 그 나머지는 역시 밝기를 기다려서야 보이는 것과 같아서 소리도 또한 그러하여야 되는데도 실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도달하지 아니하면 들리지 아니한다.
그대는 “귀 등의 감관은 티끌이 당도하지 아니하여도 안다”고 말하지만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소리와 내음과 맛과 닿임이 와서 감관에 당도하게 되어야 한다.
만일 감관이 가도록 한다면 그 일은 옳지 못하다.
귀 등의 감관은 광명이 없기 때문이며, 다만 불의 요소 한 가지에만 광명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가지 못한다.
또 소리는 만일 두텁고 흐린 물질이거나 물 등의 장애가 있어도 또한 들을 수 있으나 만일 광명이 있는 감관이라면 그와 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귀감관은 광명이 없다.
또 귀는 어둠 속에서도 또한 경계를 아는데 만일 광명이 있는 감관이라면 어두우면 알지 못한다. 또 광명이 있는 감관이라면 방향을 따라서 알게 되므로 한쪽 방면은 볼 수 있으나 일시에 두루 여러 방면을 알지는 못한다. 마치 사람이 동쪽으로 향하면 동쪽의 물질은 보아도 다른 쪽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말하겠다. 뜻은 능히 가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경계[塵]에 당도하여 알게 된다. 경전 중의 말씀에 “이 마음은 혼자 다니고 멀리 가서 잠자코 숨어서 형체가 없다”고 하였고, 또 “이 마음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님은 햇빛이 비추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고, 또 “이 마음이 항상 움직임은 마치 고기가 물을 잃은 것과 같다”고 하였고 “이 마음은 본래부터 뜻 가는대로 따른다”고 말함과 같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 티끌이 다 당도하기 때문에 알게 된다.
[답] 그대는 “광명이 도달한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마치 사람이 먼 데서 등치만 서 있는 나무를 보고는 “그것이 사람인가” 하고 의심하는 것과 같이 만일 광명이 당도한다면 무엇 때문에 의심을 내는다.
또 아주 눈에 가까우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 눈에다가 약이나 대칼을 대면 볼수 없음과 같다. 그러므로 광명이 비록 간다 하더라도 너무나 가깝기 때문에 역시 보지 못하여야 한다.
또 눈은 광명을 여의면 볼 수 없고, 너무 가까우면 밝음이 없어진다. 또 만일 광명이 저 곳에 도달한다면 무엇 때문에 굵은 것은 보면서도 세밀히 가려내지 못하는가?
또 물질 가운데는 방소의 차별이 있음을 볼 수가 있으니 동쪽과 서쪽의 물질이다. 또는 멀고 가까운 차별도 있다. 만일 눈이 도달하기 때문에 안다하면 차별이 없으리라. 무슨 까닭인가? 내음과 맛과 닿임의 가운데는 이런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의 광명은 당도하지 않고도 안다.
또 눈의 광명이 먼저 보았다면 다시 갈 필요가 무엇이며, 만일 먼저 보지 못하였다면 간들 어디로 가겠는가? 또 가까운 물질과 먼 물질을 한꺼번에 다 본다면 법이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눈의 광명은 가지 아니한다.
또 만일 눈의 광명이 간다 하면 중도에서도 응당 여러 가지 물질을 보아야 할 터인데, 실은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가지 않는다. 또 광명이 간다 하면 광명은 몸을 떠났으므로 감관이라 하지 못한다. 마치 손가락이 끊기어서 몸을 떠났으면 몸의 깨달음[身覺]은 없어짐과 같다.
또 눈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면 자신의 의지[依]를 놓아 버리는 것이며, 비슷한 종류가 없으므로 그릇된 인[非因]이 된다. 또 이 눈의 광명이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 된다.
[문] 이 눈의 광명은 있으나 햇빛이 비치기 때문에 보이지 아니함은 마치 햇빛 안에서 뭇 별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답] 만일 그렇다면 밤에는 응당 보여야 한다.
[문] 물질의 법은 반드시 바깥 광명을 빌려야만 볼 수 있게 된다. 밤에는 바깥 광명이 없으므로 보이지 않는다.
[답] 만일 이 광명이 낮에나 밤에나 다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마침내 볼 수가 없으리라.
[문] 고양이와 살가지와 쥐 따위와 밤에 다니는 벌레들의 안광(眼光)은 볼 수 있다.
[답] 이 볼 수 있는 물질은 고양이 따위의 눈 속에 머무르는 것은 마치 개똥벌레의 밝은 물질이 몸에 있는 것과 같아서 이는 광명이 아니다. 또 밤에 다니는 벌레는 어둠 속에서도 잘 보지만 사람은 잘 보지 못함과 같다. 그렇다면 다만 그들에게만 광명이 있고 다른 물질에는 없는 것이니, 으레 그러해야 된다. 또 그대의 말에 “만일 당도하지 않고도 본다면 온갖 물질을 다 보아야 한다”고 하나, 만일 물질이 알 만한 자리에 있으면 그것은 볼 수 있다. 경전 중의 말씀에 “만일 눈이 결단나지 않고 물질이 알 만한 자리에 있는 이와 같은 것이면 볼 수 있다”고 함과 같다.
[문] 무엇을 알만한 자리에 있다 하는가?
[답] 어디거나 물질과 눈이 화합하여지는 때면 알 만한 자리에 있다고 한다.
[문] 만일 눈이 당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할 때가 있겠는가?
[답] 이 일도 역시 마찬가지로 만일 그대의 눈이 가서 물질에 당도한다 하더라도 혹 볼 수 있는 것도 있고, 혹 볼 수 없는 것도 있다. 마치 눈이 해에 도달하면 해의 바퀴는 볼 수 있으나 해의 작용은 볼 수 없음과 같다. 나 역시 그와 같다. 눈은 비록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일 물질이 알 만한 곳에 있으면 그것은 볼 수가 있겠지마는 만일 알 만한 곳에 있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문] 안광(眼光)이 멀리 가더라도 세력이 다하기 때문에 해의 작용은 보지 못한다.
[답] 만일 세력이 다하여 세밀한 작용을 보지 못한다면 해의 바퀴의 부피는 큰데 어찌하여 보지 못하는가?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또 만일 안광이 그 곳에 도달하여 능히 본다면 무엇 때문에 먼 해의 바퀴는 보면서 파련불(巴連弗) 등의 가까운 나라의 도시는 보지 못하는가?
만일에 그대의 뜻에 파련불 등은 알 만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라 하면, 나도 눈이 당도하지 아니하며 또한 물질이 알 만한 자리에 있지 아니하므로 볼 수 없다 하겠다.
[문] 이미 모든 물질은 알 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줄 알았거니와 이제 어떻게 하면 볼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볼 수가 없는가?
[답] 세상의 장애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과거와 미래의 물질과 같다. 비침이 뛰어나기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햇빛이 모든 별들과 구슬의 불빛을 가리는 것과 같다.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밤중의 불을 볼 수 있으나 그 밖의 것은 볼 수 없음과 같다. 땅이 수승하기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초선(初禪)의 눈으로는 2선(二禪)의 물질을 보지 못함과 같다. 어둠이 가리기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어둠 속에 있는 병(甁)과 같다.
신통의 힘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귀신들의 몸과 같다. 두텁고 흐린 것이 막기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산 밖에 있는 물질과 같다. 멀기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다른 세계와 같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자기 눈의 속눈썹과 같다. 차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광선 안에 있는 티끌을 볼 수 있으나 광선 밖의 것은 보지 못함과 같다. 아주 작기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나무둥치[杌木]가 사람과 비슷해서 분간할 수 없음과 같다. 많은 것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보지 못함은 마치 한톨의 쌀을 큰 무더기 속에 던져 놓음과 같고 또는 한 마리의 까마귀가 까마귀 떼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위의 여러 가지와 서로 엇갈리는 것을 알만한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눈이 결단 났다 하는가?
[답] 풍(風)과 열(熱)과 냉(冷) 등의 여러 가지 병으로 결단나게 된다. 만일 풍병이 눈을 망그러뜨리면 푸르고 검으면서 빙빙도는 등의 빛깔을 보며, 만일 열병이 눈을 망그러뜨리면 누르고 붉은 불꽃같은 등의 빛깔을 보며 만일 냉병으로 눈이 망그러지면 하얀 못물[池水] 등의 빛깔을 보며, 만일 고생으로 눈이 망그러지면 나무가 움직이는 등의 빛깔을 보며 피곤으로 눈이 망그러지면 물질을 보아도 뚜렷하지 못하며, 한쪽 눈만 꼭 누르면 달이 두 개로 보이며, 귀신들이 붙으면 괴상한 것을 보게 되며, 죄업(罪業)의 힘 때문이라면 사나운 빛깔을 보며 복업(福業)의 힘 때문이라면 깨끗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보게 되며, 열기(熱氣)가 눈을 망그러뜨리면 불꽃 등의 빛깔을 보게 된다.
또 중생은 눈을 얻는다 해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 충분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 눈에 백태가 생기면 가려졌기 때문에 보이지 아니하며, 만일 눈 감관이 결단나면 그 때문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눈이 결단났다고 한다. 위와 서로 엇갈리는 것을 결단나지 아니한 눈이라 한다. 귀 등의 여러 가지 감관도 또한 이런 이치에 따라서 분별하여야 한다.
[문] 이미 다섯 가지 티끌은 알 만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는 것을 알았거니와 어찌 법의 티글[法塵]을 알 만한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하는가?
[답] 높은 곳[上地]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이니 마치 초선(初禪)의 마음이 2선(禪) 이상의 법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근기가 스승하기 때문에 알지 못함은 우둔한 근기의 마음이 영리한 근기의 마음 안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수승하기 때문에 알지 못함은 마치 수다원이 사다함의 마음 안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힘의 차이 때문에 알지 못함은 의식(意識)은 있으나 이 법에서는 힘이 없어서 그러한 것과 같다.
이 의식으로서 이 법을 알지 못함은 마치 심ㆍ의ㆍ식(心意識)을 껴잡으면 알 수 있는 법이지만 심ㆍ의ㆍ식을 어지럽혔으므로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같고, 벽지불(辟支佛)의 뜻의 힘으로는 알 수 있는 법이지만 성문의 뜻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바요, 부처님의 뜻의 힘으로는 알 수 있는 법이지만 성문과 벽지불의 뜻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것과 같으며, 상품(上品)의 법은 하무의 의식으로는 알 수 없는 바와 같다.
또 미세한 법의 티끌은 알 수도 없다. 아비담 중의 말씀에 “어떠한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분명하고 분명한 것이다. 먼저 경험했던 것은 생각할 수 있고 경험하지 못한 것은 생각할 수 없음과 같다. 나고 죽는 사람들이 먼저 경험한 법은 생각할 수 있되, 아직 경험하지 아니한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성인이면 경험한 것이거나 경험하지 아니한 것이거나 간에 거룩한 지혜의 힘으로 모두 다 잘 안다”고 함과 같다.
또 뛰어난 경계이기 때문에 아는 것은 마치 형상 세계의 마음으로써 욕심 세계의 법을 아는 것과 같다. 또 번뇌[顚倒]의 장애 때문에 알지 못함은 마치 몸에 대한 고집의 마음이 다섯 가지 쌓임을 반연하여 나없음을 보지 못함과 같으며, 무상과 괴로움도 또한 그와 같다. 또 힘의 장애 때문에 알지 못함은 마치 미련한 근기는 영리한 근기의 장애 때문에 마음이 알 수 없음과 같다.위와 엇갈리는 것을 앎의 경계에 있다고 말한다.
[문] 무엇을 뜻이 무너진다고 하는가?
[답] 미쳐서 뒤바뀌거나 귀신이 붙거나 교만 방탕하여 정신을 잃은 것과 혹은 술에 취하고 혹은 약에 혼미되어 마음이 산란하고 혹은 탐심과 진심 등의 번뇌가 왕성하며 방일하는 따위가 마음을 결단내는 것이니, 마치 미바가(迷婆伽)라는 고기잡이들과 같다. 혹은 삭야파(刪若婆=인간을 쇠퇴하게 하는 雜病)란 병으로 능히 마음을 결단내기도 하고 또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마음을 결단낸다. 만일 마음이 착한 법이거나 무부 무기법[無覆無記法] 가운데 있으면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인연 때문에 비록 모든 티끌이 있다 하더라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만일 당도하지 않고도 본다면 무엇 때문에 온갖 물질을 다보지 못하느냐” 하는 말은 옳지 못하다.
또 그대의 말에 “세 가지 일이 화합하기 때문에 닿임이라 한다”고 하나, 어느 감관이 티끌을 아는 때를 닿임이라 하며 반드시 서로가 닿는 것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뜻 감관에도 역시 세 가지 일의 화합을 말하지마는 이 가운데서는 서로 닿기 때문에 닿임이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대의 말에 “서로 도달하기 때문에 대상이 있다”고 하나 이 일도 옳지 못하다.
대상이 아닌 모양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 그대의 말에 “현재에 앎이 생긴다”고 하나 제육식(第六識)도 현재만을 알 뿐이니, 마치 남의 속아는 지혜[第六識]도 현재만을 알 뿐이니, 마치 남의 속아는 지혜[他心智]와 같다.
또 그대의 말에 “여러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앎이 생긴다”고 하나, 제6의 뜻 감관 중에서 이미 대답하였으니, 그대로 알게 되는 때를 화합이라 한다. 또 “뜻이 법을 반연함으로 인하여 의식이 생긴다”고 하나 이 말은 공이라 온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결정함[決定] 때문에 화합이라 한다. 안식은 다만 눈을 의지할 뿐 다른 것은 의지하지 않지만 역시 의지함이 없지도 않다. 다만 물질을 반연할 뿐 그 밖의 것을 반연하지 않지만 역시 반연이 없지도 아니하며, 내지 의식도 그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