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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등론석 제7권
10. 관신화품(觀薪火品)
또한 앞의 품에서 이미 취착(取著)과 취착을 짓는 자[取者]를 부정하여 그 집착하는 견해를 제거하였다. 이제 다시 같지 않고[不一]다르지 않은[不異]연기법(緣起法)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 품을 짓는다.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취착과 취착하는 자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 두 법은 서로 상관(相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불과 장작과 같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음(陰) 등의 취착 및 취착을 짓는 자가 존재한다. 이유가 성립하기 때문에 나의 주장은 성립할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총체적으로 생기를 부정하므로 장작과 불 또한 부정한다. 그대는 지금 알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마치 「관음품(觀音品)」에서, ‘만약 색의 원인과 분리된다면 색을 얻을 수 없다. 원인 또한 이와 같다’고 설한 것과 같다. 비록 앞에서 이미 논파하였으나 여기에서 다시 부정하겠다. 그대는 마땅히 부정의 방편을 잘 들으시오. 불과 장작 두 가지를 존재하게 할 경우 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무슨 오류가 있는가? 장작과 불이 일체(一體)라고 말하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불이 곧 장작이라면
작업하는 자와 작업은 하나이네.
[釋] 저 지(地) 등의 비유는 없기 때문에 이것은 상응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4대(大)는 곧 장작이며 난계(煖界)는 불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저 모든 대(大) 중에 난계가 점점 일어나는 까닭으로 불이라 이름한다.”
청변 논사는 거듭 여기서 방편을 써서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장작과 불, 두 사물은 일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작업하는 자와 작업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부수는 자와 부서진 것은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불은 작업하는 자이며, 태우는 것은 작업이 된다.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은 다르기 때문이니, 장작과 불꽃은 하나가 될 수 없다.
다시 만약 불이 곧 장작이라면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은 같은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면 그대는 ‘이것은 장작이다.’ ‘저것은 불꽃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장작 밖에 불이 존재한다면 일체의 뜻이 허물어진다. 뜨겁지 않거나 타오르지 않는 불은 곧 쓸모가 없다. 법체(法體)에 차별성이 없기 때문에 주장에 오류가 존재한다. 그대가 장작과 불이 하나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다시 장작과 불이 다르다고 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도 불이 존재해야 하네.
[釋] 그것은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나머지 사물과 같다. 그러므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불과 장작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관(觀)하기 때문이다. 마치 장작의 자체(自體)와 같다. 만약 불과 장작이 별개의 사물로서 다 상관(相觀)하는데 일체에 관(觀)이 존재하므로 이유가 부정인[非一向]이 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일체 등의 관의(觀義)는 서로 비슷하여 또한 똑같이 부정하므로 오류가 없다. 반드시 불과 장작은 다르다고 한다면 과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항상 사르는 불꽃은
장작을 원인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네,
[釋] 장작을 관(觀)하지 않으므로 저것은 항상 타오르는 불꽃이어야 한다. 장작이 없을 때 불 또한 소멸하지 않는다. 가령 장작이 없을 때 불 또한 소멸하지 못한다. 그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마른 장작을 불에 던져도 불꽃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 모두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한 타오르는 불꽃의 공능(功能) 없이
불 또한 태우는 작용이 없네.
[釋] 작용의 체(體)가 없어 태울 수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린 남자아이와 어린 여자아이도 원인이 존재함을 안다. 다 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불과 장작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기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며, 업(業)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마치 장작의 자체와 같다. 자세한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장작에 관한 논의도 또한 그러하다. 장작은 불꽃을 원인으로 하여 생기하고 업이 존재한다. 불과 같다고 말한다. 이 까닭으로 원인이 아니다. 비유가 성립하지 못한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불이 막 정화되었을 때를 장작이 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불이 막 점화되었을 때
그대가 장작이라고 한다면
그 순간은 오직 불만 존재할 뿐인데
무엇이 장작을 사른단 말인가?
[釋] 세제에서는 아직 점화되지 않은 순간을 장작이라 하고, 막 점화된 순간을 불이라 이름 한다. 장작은 이 불을 연(緣)으로 하여 점화되는 순간에는 오직 불이라고만 하기 때문에 이 불이 일어나는 것 역시 취집밖에 없다.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태우고 익히고 비추고 밝히는 결과의 원인이 될 수 있기에 불이라고 한다. 제일의제 중에 생기(生起)는 성립할 수 없다. 먼저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그대의 의도가 “4대(大)에 국한되고 화계(火界)를 더하지 않는 것을 이름 하여 장작이라 하고, 혹은 삼대를 이름 하여 장작이라 한다. 저 3대 또는 4대는 곧 불사르는 재료이며 불 역시 그러하다. 대(大)가 모이고 화합하므로 불이라 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와 같이 말한 것을 이제 장차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불은 장작을 불사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大)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수대(水大)와 같다.
이와 같이 색(色)이기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에, 거침[麤]이기 때문에, 색음(色陰)에 섭수되기 때문에, 외계(外界)이기 때문에, 생기하기 때문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유를 증험하여 자세히 말할 것이다. 그와 같은 의도는 이른바 제일의제 중에 불이 능히 불사를 수 있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다시 앞의 게송에서 “그 순간 오로지 불만이 존재하는데 무엇이 불사르는 장작이 되는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직이란 무슨 뜻인가? 말하자면 오직 대(大)의 적취(積聚)만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관(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세제 중에 장작과 불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막 점화된 순간에 장작 등이 된다고 말하지만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문] 지(地) 등 화합 중에 불은 능히 불사를 수 있기 때문에 그대는 비유를 들지만 그 비유는 성립하지 못한다.
[답] 서로 비슷하게 성립하나 똑같이 논파한다. 지 등의 자상(自相)을 인용하여 나는 비유를 들지만 그대가 든 비유는 성립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그러한 과실이 없다. 제일의제에서는 부정되기 때문이며 세간의 이해하는 바를 허물어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불과 장작의 미진(微塵)은 아(我)의 일부분이다. 일부의 미진이 나중의 미진과 더불어 화합한다. 이 업작(業作)의 화합은 두 미진에 의지한다. 저 두 미진이 화합하여 일어나는 작용을 타랍비(陀臘脾)1)[당(唐)나라에서는 실체(實)라 말한다. ]라 한다. 이와 같이 세 미진(微塵)이 점차 일어나 빛을 만들므로 이름하여 불의 타랍비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장작의 미진은 장작의 미진과 화합하며, 장작과 불 둘은 거듭 서로 상관(相觀)한다. 상관하기 때문에 인과(因果)가 성립할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저것도 역시 앞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 불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집착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다. 여기서 마땅히 말하겠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불은 빛을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4대(大)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나머지 대(大)와 같다. 또한 저들의 생기를 부정한다. 제일의제 중에는 화대(火大)의 미진은 불의 타랍비를 일으키는 작용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진이기 때문이니, 마치 나머지 미진(微塵)과 같다.
[문] 그대가 앞에서 한 주장은 무엇인가? 나머지 미진이 일어난다는 것인가? 도무지 생기가 없다는 것인가?만약 나머지 미진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면 곧 허물어질 것이며, 도무지 생기가 없다면 비유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답] 그대의 말은 옳지 못하다. 앞의 분별과 같은 것은 내가 하려는 것이 아니다. 뒤의 분별은 비유가 성립한다. 왜냐하면 마치 불의 미진이 불을 일으킬 수 없는 것과 같다. 지(地) 등의 모든 미진 하나하나가 다 그러하다. 다시 제일의제에서는 저 불의 미진은 불을 일으킬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물과 같다. 이와 같이 작용하기 때문이며, 허물어지기 때문이며, 생기하기 때문이라는 등과 같은 모든 이유를 자세히 말해야 한다.”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내가 주장한 것처럼 저 살타(薩埵)1) [당나라에서는 명상(明相)이라 한다. ]와 갈라사(遏邏闍)2) [당나라에서는 미진(塵)이라 한다. ]와 모든 촉색(觸色)이 증가할 때를 이름 하여 불이라 하고, 다막(多慔) [당나라에서는 어둠(暗)이라 한다. ]이 증가하는 순간을 장작이라 한다. 이 까닭으로 반드시 장작은 불의 원인이 된다. 장작이 원인이 되기 때문에 장작을 관하여 불이라 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역시 오류가 존재한다. 제일의제 중에 난온성은 불의 실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대(大)이기 때문이니, 앞의 비유에서 부정한 것과 같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다르다면 도달할 수 없네.
[釋]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다르기 때문에 도달할 수 없다. 비유하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불과 장작과 같다. 작업을 짓는 자를 불에 비유하기 때문에 작업을 장작에 비유한다. 둘이 화합한 것을 작용의 상(相)라고 한다. 뜻이 곧 이와 같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도달하지 못하므로 타지 않네.
타지 않으므로 소멸하지 않네.
소멸하지 않으므로 스스로의 상(相)에 머무네.
[釋] 이 불은 원인이 없이 장작을 떠나 성립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상(相)에 머문다. 자상에 머무는 것이다. 스스로의 상에 머문다. 자상에 머무는 것을 이를 하여 상주[常]라 이름 한다. 이미 뜻이 없기 때문에 불과 장작이 다르지 않음을 안다. 만약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앞서 이미 부정한 것도 같다. 이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겠다. 나중에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 사물과 저 사물이
다르다면 옳지 못하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달라서 도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오류가 생긴다. 앞의 게송에서 ‘다르면 도달하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하므로 타지 못하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다름으로 인해 도달함이 있으므로 앞에서와 같은 오류는 없다.
무엇을 증험하는가?
마치 여인과 장부가 달라도 모습에 도달하여 세간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을 논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는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불은 연료와 달라도
이 둘은 능히 서로 도달하네.
마치 여자가 장부에 도달하고
장부가 여자에 도달하는 것과 같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불과 장작이 달라도
이 둘이 서로 도달할 수 있다면.
[釋] 그대의 의도는 다름에 관한 비유를 세우는 것이다. 저 남녀가 따라서 이와 같다면 서로 상관(相觀)하지 못한다. 장작과 불이 있는 곳에서 동시에 일어남으로써 서로 도달하고 다시 다르기 때문에 상관하지 못한다면 나는 부정인[因非一向]을 얻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불과 장작이 이미 다르다면
서로 상관하지 못하네.
[釋] 서로 상관하지 못한다는 이 뜻은 무엇인가? 이른바 작업하는 자와 작업이 화합하면 곧 공하다. 마치 장작과 불이 다른 것과 같다. 뜻이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저 둘은 도달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작업하는 자와 작업이 화합하여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법의 차별성에 집착한 것이기 때문에 주장에 오류가 존재한다. 무슨 오류인가? 그대가 다르기 때문에 상(相)에 도달할 수 있다. 남녀와 같이라고 말한다면, 둘은 성립할 수 없다. 이문(異門)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인의 오류는 없다. 단지 외도 스스로 뜻에 미혹하고 지혜가 경박하여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품의 첫머리에 장작과 불의 동일성과 차별성을 성립시키는 비유가 없기 때문에 둘 다 성립하지 못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장작과 불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서로 상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저 둘의 상관은 존재할 수 없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장작과 불이 존재하여 다시 서로 상관하므로 ‘이것은 불의 장작, 저것은 장작의 불’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뜻으로 인하여 비유가 성립한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불이 장작과 상관하고
장작이 불과 상관한다면
어떤 실체가 먼저 성립하여
상관한단 말인가?
[釋] 만약 상관한다면 장작이 먼저 성립하는가, 불이 먼저 성립하는가? 그대는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이와 같이 둘이 일체로서 먼저 성립하고 별개로 상관하는 것은 없다. 제일의제 중에 관(觀)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가 성립하지 못하고 또한 비유도 오류가 된다. 만약 그대가 세제 중에 이유를 설정해도 주장과 서로 위배되고, 또한 비유도 없어 오류가 성립된다. 만약그대의 의도가 장작이 먼저 성립된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장작이 먼저 성립하므로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불이 장작을 관한다면
불은 성립하고도 다시 성립하는 것이 되네.
장작도 또한 이와 같은데
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
[釋] 그대가 반드시 이와 같이 분별해야 할 경우, 불이 이미 먼저 성립하고 나중에 장작을 관(觀)하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장작이 불을 관하지 못하는 것은 장작이 먼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말뜻은 이와 같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주에 장작이 불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이와 같은 뜻은 없다. 왜냐하면 관하기 때문이다. 마치 불의 자체와 같다. 앞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장작과 불이 먼저 일체로 성립하지 않고 지금 장작과 불이 상관하여 한 순간에 존재한다면, 마치 소의 좌우의 뿔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성립한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이것과 상대하여 성립하고
저것도 역시 이와 같이 상대한다면
지금 어떤 사물이 상대하지 않고
두 실체로서 성립하겠는가?
[釋] 이것이란 이른바 불의 체상(體相)이고, 저것이란 장작의 체상이다. 외도의 의도는 장작과 불이 함께 성립한다는 것이다. 하나하나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저것은 자기 원인을 가지고 다시 서로 상관하여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뜻은 이와 같다. 다시 소의 뿔에 관한 비유를 또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저 두 뿔 가운데 어느 것이 왼쪽이고 어느 것이 오른쪽인가? 세간이 이해하는 것은 상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두 번째가 성립할 수 있다는 이와 같은 뜻은 없다. 다시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실체가 상대하여 성립한다면
성립하지 않은 것이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성립하지 못하면서 상대가 존재한다면
이 상대는 옳지 못하네.
[釋] 이른바 저 사물의 성립 없이 상대하는 것도 없다. 말뜻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장작이 불을 관(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불의 실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지(地)ㆍ수(水) 등과 같다. 다시 게송에서 “성립하지 않으나 상대가 존재 한다”고 말하는 것은, 외도가 이와 같이 말한 것에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과실인가? 게송에서 “상대는 옳지 못하네”라고 말한 것은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다시 이 상대는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장작의 실체는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사물과 같다. 불에 관한 논의도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다시 저것을 관찰한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불은 장작을 관할 수 없고,
장작은 불을 관하지 않는 것이 아니네.
[釋] 장작이 불을 관하지 못하면 장작의 실체는 성립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도리(道理)는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또한 이체(異體)를 부정한다. 그 별상속(別相續)의 차별성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장작은 불을 관할 수 없고,
불은 장작을 관하지 않는 것이 아니네.
[釋] 상대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체를 부정함을 마땅히 알아라.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불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으며
장작 중에도 불은 없네.
[釋] 이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며, 또한 가는 작용의 실체와 더불어 장작과 불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장작 없이 불이 있는 경우, 상대가 있다고 하거나 상대가 없다.”고 하는 두 경우는 다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장작이 실체로서 없다면 불은 의지하는 것이 없다. 의지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는 작용은 성립하지 않는다. 장작 중에 또한 불이 없다는 이 뜻은 무엇인가? 생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식(識)과 같다. 다시 이미 장작과 불을 논파하였고 나머지도 똑같이 부정한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장작처럼 나머지도 부정하니
거래품[去來]에서 이미 말하였네.
[釋] 마치 제일의제에서 이미 간 작용, 아직 가지 않은 작용, 지금 가는 작용에 가서 작용이 없는 것과 같다. 이미 불사른 것, 아직 불사르지 않은 것, 지금 불사르는 것에는 불사름이 없다. 뜻은 이와 같다. 왜냐하면 불사름이기 때문이니, 마치 불의 자체와 같다. 이러한 것들을 여기서 장차 말하겠다. 다시 가는 자에는 가는 작용이 없으며, 아직 가지 않은 자[未去者]에도 가는 작용이 없다. 이 둘을 떠나서도 가는 작용은 없다. 지금 또한 제일의제 중에 불사르는 자에도 불사름은 없다. 아직 불사르지 않은 자에도 불사름은 없다. 이 둘을 떠나서도 불사름은 없다. 이와 같은 증험은 앞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다. 왜냐하면 두 작용은 공하기 때문이며, 불사르는 자가 없기 때문이며, 둘 다 오류가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지신[土塊]과 같다.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다시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장작과 상즉해도 불이 아니고
장작과 달라도 불이 없네.
[釋] 일체(一體)를 부정하기 때문이며 이체(異體)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 차례로 앞에서 이미 풀이하였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불에도 장작이 없고
불 중에도 장작이 없으며
장작 중에도 불이 없네.
[釋] 마치 소가 존재하는 것과 같고, 물속의 꽃과 같고, 그릇 속의 과일과 같다. 저것은 이와 같기 때문에 불과 장작은 성립하지 못한다. 비유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품의 머리 부분에서 “취착[取]과 취착을 짓는 자[取者]가 존재하는 것은 서로 상관하기 때문이다. 불과 장작처럼”이라고 주장한 것은 비유가 없기 때문에 과실을 모면하지 못한다. 장작과 불의 동일성과 차별성을 부정하는 것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못한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미 불과 장작을 부정하였고
자아[自]와 취착[取]도 차례로 같네.
일체는 청정하여 남김 없으니
병과 옷 등도 그러하네.
[釋] 무슨 방편으로 자아와 취착을 부정하는가?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자아 취착 둘은 일체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이기 때문이니, 마치 베는 자와 베는 물건과 같다. 저 자아와 취착도 이체(異體)가 아니다. 왜냐하면 관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밖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마치 취착의 자체와 같다. 취착에 관한 논의도 마땅히 이와 같이 자세히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무엇인가? 제일의제 중에 취착과 자아는 이체(異體)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관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 밖의 사물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자아와 같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제바달다의 취착이 성립하든 성립하지 않든 조달의자아가 취착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관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아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조달의 자아[我]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조달의 자아가 취착(取著)을 취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취착이기 때문이니, 마치 야야달다의 취착과 같다. 이와 같이 조달의 취착이 성립하든 성립하지 않든 조달의 자아를 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취착이기 때문이니, 야야달다의 취착과 같다. 그와 같이 불과 장작,자아 취착을 순서대로 이미 말하였다.
“일체는 청정하여 남김 없으니”란 말에 대한 법의 비유는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병과 옷 등”이란 이 병 등의 사물이 결과인 경우와 원인인 경우의 총체적인 실체와 개별적 실체를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무엇을 증험하는가?
마치 병과 흙처럼 제일의제 중에 일체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작업하는 자 및 작업이기 때문이다. 마치 베는 자와 베는 물건과 같다. 또한 이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관하기 때문이며, 또한 결과이기 때문이니, 마치 흙의 자체와 같다. 장작과 불을 부정하는 것과 같이 색(色)과 비색(非色)의 법도 또한 똑같이 부정해야 한다. 이 또한 똑같이 부정해야 한다.
이 또한 무엇인가? 마치 거타라(佉陀羅)나무의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은 거타라나무와 일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갖 하나를 자른 순간 일체가 잘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대추나무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거타라나무는 거타라의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과 이체(異體)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관하기 때문이다. 뿌리 등이 허물어질 때 나무 역시 허물어지기 때문이니, 마치 뿌리 등의 자체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날과 실 등이 명주의 실체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상관하기 때문에 이것이 허물어지는 순간 저것도 허물어지기 때문이니, 마치 날실의 자체와 같다. 일체처럼 이체 및 일체면서 이체인 경우도 다 앞과 같은 오류가 있다. 이를 마땅히 자세히 말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으므로 제일의제 중에 이치대로 잘 관찰하면 일체이든 이체이든 실체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세제 중에 자재(自在)한다고 말하면 세간에서 이해되는 바와 다르지 않다. 계(戒)ㆍ정(定)ㆍ혜(慧)에 수순(隨順)하여 세제 중에서 말하나 세상 사람들은 제일의제에 집착하여 이를 부정한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자아[我]의 진실과
제법(諸法)이 각각 다르다고 헤아려 분별하면
말한 사람은 성스런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아야 하네.
[釋] 어째서 성스런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가?현견(現見) 및 논험의 뜻[驗義]이 다 성립하지 못하지만, 실체에 집착하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뜻은 다음과 같다. 이 뜻으로 인하여 이품에서 같지 않고 다르지 않은 특별한 연기의 뜻을 밝히어 작용하는 자를 개시(開示)하였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성립한다. 마치 『범천왕문경(梵天王問經)』의 게송에서 이르는 것과 같다.
몸을 떠나 법을 볼 수 없고
법을 떠나 몸을 볼 수 없네.
같지도 않고 또한 다르지도 않음을
장차 이와 같이 보아야 하네.
[釋] “이와 같이 보아야 하네”란 이른바 저 견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경 중에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