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통일에 관해서는 전문가 소리를 들어도 되겠구나 싶다.
공직생활 시작할 때 우연한 기회로 통일문제를 다루게 되었고 남북합의서 체결 당시 필수요원 교육도 받았다.
통일관련 책자와 자료를 모으다 보니 서재의 벽 한쪽을 차지한다.
그래서일까?
평통 상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국가행사에 초청을 받는다.
이번에는 정전협정 체결과 유엔군 참전기념행사이다.
정전협정 체결과 참전기념일을 묶어 기념한다는 발상이 대단하다.
그리고 나라 살림이 넉넉하다 보니 보훈처 주관 행사에 대한 예산지원도 넉넉해졌나 싶어 다행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이런 전시성 행사에 치중한다면 아니올시다일 밖에.
이번 행사에는 갑자기 태극무공훈장 수여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뮬러씨 등 27일 정전협정 기념식 참석
6·25전쟁에 참전했던 17개국 유엔 참전용사 130여 명이 23일부터 5박 6일간 한국을 방문한다. 국가보훈처는 ‘6·25전쟁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7월 27일)을 맞이해 유엔 참전용사를 초청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60여 년간 성장을 이뤄낸 대한민국을 소개하는 행사를 연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방한단에는 6·25전쟁 당시 공군 중위로 참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안토니오 마이클 뮬러 씨(86)도 포함됐다. F-51 무스탕(머스탱)기 조종사였던 뮬러 씨는 2개 비행 중대를 이끌고 72번이나 출격하며 북한군 및 중공(중국)군에 맞서 싸웠다. 당시 미 해병대 중령으로, 장진호전투(1950년 11월 27일∼12월 13일)에서 적에게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는 등의 활약을 한 레이먼드 데이비스 씨(2003년 별세)의 손자도 방한한다.
보훈처는 27일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에서 뮬러, 데이비스 씨 등 5명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할 계획이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일반인들이야 지나치겠지만 나도 명색 보국수훈자로서 국가유공자인데 관심이 가는게 정상이다.
내가 보국수훈자가 된 경위를 밝히자면 또 장광설이 필요하다.
군 복무시절 알게 된 사실인데 무장공비를 잡으면 잡은 병사는 무공훈장을 받고 사단장 내지 군단장 등 지휘관들은 보국훈장을 받는단다.
그리고 무공훈장 중 최상은 태극무공훈장인데 받은 사람이 극소수란다.
전투 중 장렬히 전사하지 않고서는 받기 어려운 훈장.
그런데 6.25가 언제 적 일인데 지금 와서 훈장을 주면서 그것도 태극무공훈장을 준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보훈처가 할 일이 점점 없어지는 부처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건국훈장이건 무공훈장이건 최상급 영예의 훈장을 남발하는 듯 싶어 보이게 열심히 공적발굴을 한다.
상훈업무는 정부조직법상 행정자치부의 소관이건만 건국훈장은 보훈처, 무공훈장과 보국훈장은 국방부가 사실상 주무부처 행세를 한다.
아무리 그래도 훈장을 주려거든 공적을 세운 당시에 주어야지 미루다 미루다 갑자기 생각난 듯 주거나 수여기준을 점점 낮춰서 대상을 확대한다면 받는 사람도 기분 찜찜한 일이고 정작 과거에 빛나는 공적으로 수훈을 한 분들 입장에서 보면 코메디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참고로 위키백과에 나온 태극무공훈장 수훈자의 면면.
전 두환이니 정 일권이니 김 창용이니 하는 웃기는 이름들도 등장한다.
누락된 사람으로 생각나는 것은 베티고지의 영웅 김 만술 상사(당시는 금성태극훈장)와 앙케패스전투의 이무표 대위 등이 있다.
육군]
김경진 (1954년) 중령 - 김소령(9사단 29연대 2대대장)은 백마고지전투시 선봉중대가 돈좌되자 직접 최전방으로 이동 부하들의 용전을 독려하고 적진 20미터 전방까지 접근, 돌격명령을 내려 고지를 탈환하고 적을 격멸하였으나 자신은 산화한 백마고지의 큰별. 백마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10일동안 대 혈전이 계속되었고 포탄 30만발이 작렬하면서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다. 포격으로 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 그 모양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이 백마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산화한 육군 제9사단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철원군 동송읍에 백마고지 전투전적비를 건립하였다. 백마기념관에는 당시 전투에서 사용한 바주카포, 탄약, 탄창 등이 전시되어 있다.김경진 육군중령(1920.9.8 ∼ 1952.10.11)전쟁기념관(館長 金石元)은 6.25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결정적 전공을 세우고 산화한 김경진(金慶珍) 육군중령을 2005년 10월의 호국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김경진 중령은 1920년 9월 8일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49년 5월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으며 국군 제9사단 소속으로 6.25전쟁 기간 1950년 11월 전북 대둔산과 경북 김천·상주지구 공비토벌작전, 12월 강원도 설악산·오대산지구 전투, 1952년 7월 김화지구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공을 세웠다.1952년 10월 김경진 소령(당시)은 제29연대 2대대장으로서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서북단에 위치한 396m 독립고지로서 작전상 요지 중의 요지였다. 전쟁 중 고지의 주인이 무려 스물네 번이나 바뀌고 하루 평균 5만발에 가까운 포탄이 쏟아져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치열한 고지공방전으로 불릴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던 것이다. 1950년 10월 11일, 백마고지의 정상탈환 역습명령을 받은 김경진 대대장은 고지를 확보한 중공군이 진지를 강화하기 전 신속히 역습을 감행하기 위해 5중대를 주공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정상을 100m 가량 앞둔 지점에서 적의 박격포와 직사화기 공격에 막혀 진격이 중단되자 대대장 자신이 포복으로 최전방인 5중대로 나아가 전투를 독려했다. 전투지휘에 용기백배한 중대원들은 재공격을 감행, 마침내 고지를 탈환하고 적을 격멸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김경진 대대장은 적의 박격포탄에 맞아 산화하고 말았다. 고인의 살신성인에 힘입어 10월 14일 9사단은 마침내 백마고지 일대를 완전히 탈환, 확보했으며 철의 삼각지의 좌측인 철원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10월 6일(목 14:00)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유족과 육군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김백일 중장 - 대한민국 1군단장 재직 시절인 1950년 10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명령을 받고 예하 3사단을 진격시켜 국군 최초로 38선을 돌파. 정부는 이날을 국군의 날로 제정했다. 당시 전시 작전권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있었다. 미군은 38선을 넘는데 반대했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 때 미 제10군단장인 알폰소 소장과 담판을 벌여 피난민 10만명이 안전하게 철수했다. 1951년 3월 전방지휘소 작전회의에 참석한 뒤 귀대하다가 강풍으로 항공기가 추락하여 34세에 사망. 사후 1계급 특진.
김영옥 미군 대령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전투부대를 지휘한 첫 소수인종 출신 장교. 한국전쟁에서 큰 전과를 거두고 전쟁 고아들을 보살핀 공로.
김용배 준장 - 1950년 6사단 7연대 1대대장. 춘천 북방 지내리 전선에서 T-34 전차로 침략하는 북한군 제2사단을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이 지연작전을 수행함. 압록강 초산에 가장 먼저 진출해 태극기를 꽂음. 1951년 7월 5연대장으로 양구 군량리 지구에서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 5군단을 맞아 싸우다 전사. 사후 1계급 특진.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송서규 대령 -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제7기. 월남전에 파병. 1967년 11월 6일 주월 한국군의 닌호아 2호 작전을 전개해 포병 화력을 지원받아 4개 중대로 베트콩을 포위한 후 섬멸.
심일 소령 - 육사 8기생. 한국전쟁 당시 춘천지역 6사단 7연대 대전차 중대 소대장. 육탄 특공조를 조직해 최초로 적군 자주포를 격파하여 당시 전차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국군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위관급 최초의 태극무공훈장 수훈자(사후 1계급 특진).
이명수 일등상사 - 3사단 22연대 소속 소대장. 1950년 7월 영덕·강구전투에서 육탄 특공조를 조직해 적군 전차를 격파, 작전 도중 포로로 잡힌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 부하들을 구출해 왔다.
임동춘 대위 - 1969년 갑종간부후보생의 마지막 기수인 230기. 수도사단 기갑연대 소대장으로 월남전에 파병. 안케페스 전투에서 고지 탈환작전 중 부상에도 불구하고 적 벙커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제압한 후 전사. 1972년에 대위로 1계급 특진.
임충식 대장 - 백골연대 연대장,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 후에 군사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훈장이 취소됨.
정일권 - 일본육사 55기. 만주군 헌병 대위로 활동.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던 채병덕이 맥아더로부터 자질을 의심받아 보직해임되었는데 그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조달진 소위 - 6사단 19연대 3대대에서 일등병 계급으로 복무 중 전쟁이 발발하자 6월 28일 홍천 말고개에 대전차 특공조로 투입, 적군 전차 혹은 자주포를 격파. 7월 24일 상주 유곡전투에서도 대전차 특공조를 조직해 적 전차를 제압. 2011년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홍재근 일병 -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특공조를 자원해 북한군 766 유격부대의 은거지에 수류탄을 투척, 군관 1명을 포함한 15명의 포로를 생포. 그 직후 자교리 전투에서 백병전으로 적 5명을 처치하고 전사. 사후 일병으로 1계급 특진. 이등병으로는 이례적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음.
해군
손원일 제독 -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자. 제독의 이름을 딴 손원일함도 있다.
지덕칠 중사 - 해군 위생하사관으로 참전 베트남 전쟁 추라이 전투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구하고 장렬히 산화했다.
공군
아직 없다.
해병대
김성은 -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병대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해병대가 "귀신잡는 해병"이란 애칭을 얻게 한 주역이다. 제4대 해병대사령관과 제15대 국방부 장관 역임.
이인호 소령 - 해사 11기. 1966년 해병대 청룡부대 제3대대 정보참모로 월남전에 참전. 1966년 8월 11일 베트남 밀레 마을 동굴에서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덮쳐 부하들을 구하고 전사. 사후 소령으로 1계급 특진. 1967년 해군사관학교 입구에 동상 건립.
경찰
최규식 서울 종로경찰서 서장 -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1·21 사태 발생. 최규식 서장은 청와대로 진입하던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을 가로막고 검문을 벌이다 공비들의 총격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했다. 사후 경무관으로 1계급 특진. 경찰종합학교 교정에 동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