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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도강록 6월 28일 을해(乙亥)
아침에 안개 끼었다가 늦게 개었다.
아침 일찍이 변군과 함께 먼저 길을 떠났다. 대종이 멀리 한 군데 큰 장원을 가리키면서,
“저것은 통관(通官) 서종맹(徐宗孟)의 집입니다. 황성(皇城)에는 저보다 더 큰 건물이 있었답니다. 종맹은 본래 탐관으로서 불법적인 행위가 많고 조선 사람의 고혈을 빨아서 큰 부자가 되더니, 늘그막에 예부(禮部)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어, 황성에 있던 집은 몰수당하고, 이것만 그대로 남아 있답니다.”
하고, 또 한 군데를 가리키면서,
“저것은 쌍림(雙林)의 집이옵고, 그 맞은편 대문은 문통관(文通官)의 집이라 하옵니다.”
한다. 대종은 말 솜씨가 극히 예리하고 능숙하여, 마치 오래 익혀 둔 글을 외듯 하였다. 그는 선천(宣川)에 살고 있던 사람인데, 벌써 예닐곱 번이나 연경을 드나들었다 한다.
봉황성에 이르기까지 30리쯤 된다. 옷이 푹 젖고 길 가는 사람들의 수염에는 이슬진 것이 마치 볏모[秧針]에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다.
서쪽 하늘 가에 짙은 안개가 문득 트이며 한 조각 파아란 하늘이 살포시 나타난다. 영롱하게 구멍으로 비치는 것이 마치 작은 창에 끼어 놓은 유리알 같다. 잠시 울 안에 안개는 모두 아롱진 구름으로 화하여 그 무한한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돌이켜 동쪽을 바라보니, 이글이글 타는 듯한 한 덩이 붉은 해가 벌써 세 발을 올라왔다.
강영태(康永太)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영태의 나이는 스물셋인데, 제 말로 민가(民家) 한인(漢人)은 ‘민가’라 하고 만주족은 ‘기하(旗下)’라 한다. 라 한다. 희고 아름다운 얼굴에 서양금(西洋琴)을 잘 친다.
“글을 읽었느냐?”
고 물으니, 그는,
“벌써 사서(四書)를 외기는 하였지만 아직 강의(講義)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글 외기’와 ‘강의하는 것’과는 두 길이 있어서 우리나라에서처럼 처음부터 음과 뜻을 배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의 처음 배우는 이는 그저 사서의 장구(章句)만 배워서 입으로 욀 따름이요, 외는 것이 능숙해진 연후에 다시 스승께 그 뜻을 배우는 것을 ‘강의’라 한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강의하지 못하였더라도 입으로 익힌 장구가 곧 날로 상용하는 관화(官話)가 되므로, 세계 여러 나라 말 중에서도 중국 말이 가장 쉽다는 것이 또한 일리 있는 말이다.
영태가 살고 있는 집은 정쇄하고 화려하여 여러 가지 기구가 모두 처음 눈에 뜨이는 것이다. 구들 위에 깔아 놓은 것은 모두 용봉을 그린 담이고, 걸상이나 탁자에도 역시 비단 요를 펴 놓았다. 뜰에는 시렁을 메고 가는 삿자리로 햇볕을 가렸으며, 그 사면에는 누른 밭을 드리웠다. 앞에 석류대 여섯분이 벌여 놓였는데, 그 중에서 흰 석류꽃이 활짝 피었다. 또 이상한 나무 한 분이 있는데 잎은 동백(冬栢) 같고 열매는 탱자 비슷하다. 그 이름을 물은즉, ‘무화과(無花果)’라 한다. 열매가 모두 두 개씩 나란히 꼭지가 잇대어 달리었고, 꽃이 없이 열매가 맺는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라 한다.
서장관(書狀官)조정진(趙鼎鎭) 이 찾아와서 서로 나이를 대어 보니, 그가 나보다 다섯 해나 많았다. 이어서 부사 정원시(鄭元始) 도 찾아와서 먼 길에 괴로움을 같이한 정분을 말한다. 김자인(金子仁) 문순(文淳) 은,
“형이 이 길을 떠나신 줄 알고도 우리나라 지경에서는 몹시 분요해서 미처 찾지 못했소.”
하고 사과한다. 나는,
“타국에 와서 이렇게 서로 알게 되니 가히 이역(異域)의 친구로군요.”
하니, 부사와 서장관이 모두 크게 웃으면서,
“알지 못하겠군요. 어떤 곳이 이역이 될는지요.”
한다.
부사는 나보다 두 살 위다. 우리 조부님과 부사의 조부님과는 일찍이 동창(同牕)에서 공령문(功令文 과체(科體)의 시문)을 공부하였으므로, 지금도 동연록(同硏錄 동창생끼리 기록한 문헌)이 보존되어 온다. 우리 조부께서 경조당상(京兆堂上)1)으로 계실 때에, 부사의 조부님께서 경조랑(京兆郞)으로 찾아오셔서, 통자(通刺)하고 서로 지난날 함께 공부한 일을 이야기하시던 걸 내가 그 때 여덟 살인지 아홉 살인지 되어서 옆에서 들었으므로, 세의(世誼)가 있음을 안다.
서장관이 흰 석류를 가리키면서,
“전에 이런 것을 본 일이 있소.”
하고 묻는다.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소.”
하고 답하니, 서장관은,
“내가 어렸을 때에 집에 이런 석류가 있었으나 국내 다른 곳에는 없었는데, 대체 이 석류는 꽃만 피고 열매는 맺지 않는다더군요.”
한다.
그들은 대략 이런 한담을 마치고는 일어섰다. 강을 건너던 날에 갈대 우거진 속에서 서로 낯은 알았으나 이야기를 주고받을 겨를이 없었고, 또 이틀 동안 책문 밖에서 천막을 나란히 하고 한둔하였으나,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으므로 이제 이렇게 이역이니 하고 웃음소리를 붙인 것이다.
점심은 아직도 멀었다 하기에 그냥 기다릴 수 없어서 배고픈 것을 참고 구경을 나섰다. 애초에 오른편 작은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 집이 얼마나 웅장하고 사치한가를 몰랐더니, 이제 앞문으로 나가 보니 바깥 뜰이 수백 칸이나 되고, 삼사(三使)와 그 일행들이 다 함께 이 집에 들었건만, 어디에 들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비단 우리 일행이 거처하고도 남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가는 장수나 나그네들이 끊일 사이 없고, 또 수레가 20여 대나 문이 그득하게 들어온다. 그 수레마다 말과 노새가 대여섯 마리씩이었으나 떠드는 소리라고는 조금도 없고, 깊이 간직하여 텅 빈 것처럼 조용하다.
대개 그 배치해 놓은 것이 제대로 규모가 있어서 서로 거리끼는 일이 없다. 밖으로 보아서 이러하니 속속들이 세세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천천히 문 밖으로 나섰다. 그 번화하고 부유함이 비록 연경에 이른들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생각된다. 중국이 이처럼 번영할 줄은 참으로 뜻밖이다. 길 좌우에 즐비하게 늘어선 점방들은 모두 아로새긴 들창 비단을 드리운 문, 그림 그린 기둥, 붉게 칠한 난간, 푸른 성적한 주련(柱聯), 황금 빛깔 현판들이 현란하게 눈부실 지경이다.
그 안에 펼쳐 놓은 것은 모두 그 국내의 진기한 물건들이다. 변문(邊門)의 보잘것없는 이 땅에 이처럼 정치하고 아담한 감식(鑑識)이 있을 줄은 몰랐다.
또 한 집에 들어가니 그 굉려(宏麗)함이 아까 강씨(康氏)의 집보다도 더 지나치나, 그 제도는 거의 한가지다. 대개 집을 세움에는 반드시 수백 보의 자리를 마련하여 길이나 넓이를 알맞게 하고 사면을 반듯하게 깎아서 측량기로 높고 낮음을 재고, 나침반(羅針盤)으로 방위를 잡은 다음에 대(臺)를 쌓되, 바닥에는 돌을 깔고 그 위에 한 층 또는 두세 층 벽돌을 놓으며, 다시 돌을 다듬어서 대를 장식한다. 그 위에 집을 세우되, 모두 한일 자로 하여 꾸부러지게 하거나 잇달아 붙여 짓지 않는다. 첫째가 내실(內室)이요, 그 다음이 중당(中堂), 셋째는 전당(前堂), 넷째는 외실(外室)이다. 외실 밖은 한길이라 점방으로나 또는 시전(市廛)으로도 쓴다. 당(堂)마다 좌우의 곁채가 있으니, 이것이 곧 행랑과 재방(齋房)이다. 대개 집 한 채의 길이는 6영(六楹)ㆍ8영ㆍ10영ㆍ12영으로 되어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매우 넓어서 거의 우리나라의 보통 집 두 칸짜리만하다. 그리고 재목에 따라 길고 짧음을 마련하지 않고 또한 마음대로 넓히고 좁히는 것도 아니요, 꼭 자로 재어서 간살을 정한다. 집은 다 들보를 다섯 혹은 일곱으로 하여 땅바닥에서 용마루까지 그 높이를 따지면, 처마는 한가운데쯤 있게 되므로 물매가 매우 싸서 병을 거꾸로 세운 것처럼 가파르다. 집 좌우와 후면은 부연(婦椽)이 없이 벽돌로 담을 쌓아 올려서 집 높이와 가지런히 하니, 서까래가 아주 보이지 않을 정도다. 동서의 양쪽 담벽에는 각기 둥근 창구멍을 뚫고, 남쪽에는 모두 문을 내고, 그 중 한가운데 한 칸을 드나드는 문으로 쓰되, 반드시 앞뒤가 꼭 맞서게 하였으므로 집이 서너 겹이라면 문은 여섯이나 또는 여덟 겹이나 되어도, 활짝 열어젖히면 안채로부터 바깥채에 이르기까지 문이 똑바로 화살같이 곧다. 그들이 이른바,
“저 겹문을 활짝 여니, 내 마음 통하게 하는구나.”
함은, 그 곧고 바름을 이에 견준 말이다.
길에서 동지(同知) 이혜적(李惠迪)역관인데 정3품 당상관이다. 을 만났다. 이군이 웃으면서,
“궁벽한 시골 구석에 무어 볼 만한 게 있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연경인들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어요.”
하였더니, 이군은,
“그렇습니다. 비록 크고 작으며 사치하고 검박한 구별은 있겠지만, 그 규모는 거의 한가집니다.”
한다.
대개 집을 짓는 데 있어 온통 벽돌만을 사용한다. 벽돌의 길이는 한 자, 넓이는 다섯 치여서 둘을 가지런히 놓으면 이가 꼭 맞고 두께는 두 치이다. 한 개의 네모진 벽돌박이에서 찍어 낸 벽돌이건마는 귀가 떨어진 것도 못 쓰고, 모가 이지러진 것도 못 쓰며, 바탕이 뒤틀린 것도 못 쓴다. 만일 벽돌 한 개라도 이를 어기면 그 집 전체가 틀리고 만다. 그러므로 같은 기계로 찍어냈건마는 오히려 어긋난 놈이 있을까 염려하여, 반드시 곡척(曲尺)으로 재고 자귀로 깎고 돌로 갈아서, 힘써 가지런히 하여 그 개수가 아무리 많아도 한 금으로 그은 듯싶다. 그 쌓는 법은 한 개는 세로, 한 개는 가로로 놓아서 저절로 감(坎 ☵)ㆍ이(离 ☲) 괘(卦)가 이룩된다. 그 틈서리에는 석회를 이기어 붙이되 초지장처럼 엷으니 이는 겨우 돌 사이가 붙을 정도여서 그 흔적이 실밥 같아 보인다. 회를 이기는 법은 굵은 모래도 섞지 않고 진흙과 기(忌)한다. 모래가 굵으면 어울리지 않고 흙이 진하면 터지기 쉬우므로, 반드시 검고도 부드러운 흙을 회와 섞어 이기어 그 빛깔이 거무스름하여 마치 새로 구워 놓은 기와와 같다. 대체 그 특성은 진흙도 쓰지 않고 모래도 쓰지 않으며, 또 그 빛깔이 순수함을 취할 뿐 아니라, 거기다가 어저귀(삼(麻)의 일종) 따위를 터럭처럼 가늘게 썰어서 섞는다. 이는 우리나라 초벽하는 흙에 말똥을 섞는 것과 같으니 질겨서 터지지 않도록 함이요, 또 동백기름을 타서 젖처럼 번드럽고 미끄럽게 하여 떨어지고 터지는 탈을 막는다.
기와를 이는 법은 더구나 본받을 만한 것이 많다. 모양은 마치 동그란 통대를 네 쪽으로 쪼개 놓은 것과 같고 그 크기는 두 손바닥만 하다. 보통 민가에는 원앙와(鴛鴦瓦 짝기와)를 쓰지 않으며, 서까래 위에는 산자를 엮지 않고 삿자리를 몇 잎씩 펼 뿐이요, 진흙을 두지 않고 곧장 기와를 인다. 한 장은 엎치고 한 장은 젖히어 자웅으로 서로 맞추어 틈사이는 한층한층 비늘진 데까지 온통 회로 발라 붙여 때운다. 이러니까 쥐나 새가 뚫거나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한 폐단이 저절로 없게 된다.
우리나라의 기와 이는 법은 이와는 아주 달라 지붕에는 진흙을 잔뜩 올리고 보니 위가 무겁고, 바람벽은 벽돌로 쌓아 회로 때우지 않고 보니, 네 기둥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아래가 허하게 된다. 기왓장은 너무 크고 지나치게 굽기 때문에, 저절로 빈 데가 많게 되니 진흙으로 메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흙이 내리 누르니 기둥이 휘어지는 병폐가 생기고, 젖은 것이 마르면 기와 밑이 저절로 떠서 비늘진 곳이 물러나며 틈서리가 생기게 된다.
이리하여 바람이 들며, 비가 새고, 새가 뚫으며, 쥐가 숨으며, 뱀이 서리고, 고양이가 뒤적이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집을 세움에는 벽돌의 공이 가장 크다. 비단 높은 담 쌓기만이 아니라 집 안팎을 헤아리지 않고 벽돌을 쓰지 않는 것이 없다. 저 넓고 넓은 뜰에도 눈가는 곳마다 반듯반듯 바둑판을 그린 것처럼 쌓았다.
집이 벽을 의지하여 위는 가볍고 아래는 튼튼하여 기둥은 벽 속에 들어 있어서 비바람을 겪지 않는다. 이러므로 불이 번질 염려도 없고 도둑이 뚫을 위험도 없으려니와, 더구나 새ㆍ쥐ㆍ뱀ㆍ고양이 같은 놈들의 걱정이야 있을 수 없다. 가운데는 문 하나만 닫으면 저절로 굳은 성벽이 이룩되어 집 안의 모든 물건은 궤 속에 간직한 셈이 된다. 이로 보면, 많은 흙과 나무도 들지 않고 못질과 흙손질을 할 필요도 없이,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은 벌써 이룩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ㆍ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唐太宗)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연경에 가는 그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에게 보낸 시(詩)에,
천추에 크신 담략 우리의 양만춘님 / 千秋大膽楊萬春
용 수염 범 눈동자 한 살에 떨어졌네 / 箭射虬髯落眸子
라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는,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것이 없다더니 / 爲是囊中一物爾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 어이 알랴 / 那知玄花落白羽
라 하였으니, ‘검은 꽃’은 눈을 말함이요, ‘흰 날개’는 화살을 말함이다. 이 두 노인이 읊은 시는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대개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 한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 함은 그 사실에 의심되는 바 없지 않거늘, 김부식(金富軾)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다. 대개 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사서에서 한번 골라 베껴 내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 당의 학자요 서예가)의 소설(小說)을 끌어 와서 당 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을 입증까지 했다. 그러나 《당서(唐書)》2)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ㆍ예(穢)ㆍ맥(貊) 등 동이(東彝)3)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ㆍ영고탑(寧古塔)ㆍ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 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分排)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4)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한 소제(漢昭帝)의 시원(始元) 5년(B.C. 82)에 사군을 합하여 2부(府)로 하고,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ㆍ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扶餘)ㆍ읍루(挹婁)ㆍ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 변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혹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을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ㆍ위씨(衛氏)ㆍ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은(殷)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명(明)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5)와 《문헌통고(文獻通考)》6)에는,
“광녕ㆍ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ㆍ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 원(元)의 탁극탁이 씀)》에,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ㆍ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晉)ㆍ송(宋)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역시 이와 같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ㆍ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당(唐)의 의봉(儀鳳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2년(677)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을 요동주(遼東州)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성의 둘레는 3리에 지나지 않으나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았다. 그 제도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네 모서리가 반듯하여 네모 말[斗]을 놓아둔 것처럼 보인다. 지금 겨우 반쯤밖에 쌓지 않아서 그 높낮이는 비록 예측할 수 없으나, 성문 위 다락 세울 곳에 구름다리를 놓아 허공에 높이 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공사는 비록 거창스러운 듯하나 여러 가지 기계가 편리하여 벽돌을 나르고 흙을 실어 오고 하는 것이 모두 기계가 움직이고 수레바퀴가 굴러 혹은 위로부터 끌어올리기도 하며 혹은 저절로 가기도 하여 그 법이 일정하지 않으나, 모두 일은 간단하되 공로는 배나 되는 기술이다. 그 어느 하나 본받지 않을 것이 없으나, 다만 길이 바빠서 골고루 구경할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설사 진종일 두고 자세히 본다 하더라도 갑자기 배울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식후에 변계함과 정 진사와 함께 먼저 떠났다. 강영태(康永泰)가 문 밖에까지 나와서 읍(揖)하며 전송하는데 자못 석별(惜別)의 뜻이 보이며, 또 돌아올 때는 겨울이 될 터인즉 책력 한 벌을 사다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청심환(淸心丸) 한 개를 내어 주었다.
한 점포 앞을 지나다 보니, 한쪽에 금으로 ‘당(當)’ 자를 쓴 패(牌)가 걸려 있는데, 그 곁줄에는 ‘유군기부당(惟軍器不當 군기만은 전당잡지 않는다는 뜻)’이란 다섯 글자가 씌었으니, 이것은 전당포(典當舖)다.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 두셋이 그 안에서 뛰어 나와서 길을 막아 서며, 잠깐만 땀을 들이고 가라 한다. 이에 모두들 말에서 내려 따라 들어가 본즉, 그 모든 시설이 아까 강씨의 집보다도 더 훌륭하다. 뜰 가운데 큰 분(盆)이 두 개 놓여 있고, 그 속에는 서너 대의 연(蓮)이 심어져 있으며, 오색 붕어를 기르고 있다. 한 청년이 손바닥만 한 작은 비단그물을 가져와서 작은 항아리 쪽으로 가더니, 빨간 벌레 몇 마리를 떠다가 분 속에 띄운다. 그 벌레는 게알[蟹卵]같이 작으며, 모두 꼬물꼬물 움직인다. 청년이 다시 부채로 분의 가장자리[盆部]를 두들기면서 고기를 부르니, 고기가 모두 물 위로 나와서 물을 머금고 거품을 뿜는다.
마침 때가 한낮이라 불볕이 내리쬐어서 숨이 막혀 더 오래 머물 수 없으므로, 드디어 길을 떠났다. 정 진사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다가, 나는 정 진사에게 물었다.
“그 성 쌓은 방식이 어떠한가.”
“벽돌이 돌만 못한 것 같애.”
하고 답한다. 나는 또,
“자네가 모르는 말일세. 우리나라의 성곽제도[城制]는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 것은 잘못일세. 대저 벽돌로 말하면, 한 개의 네모진 틀에서 박아 내면 만 개의 벽돌이 똑 같을지니, 다시 깎고 다듬는 공력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요, 아궁이 하나만 구워 놓으면 만 개의 벽돌을 제 자리에서 얻을 수 있으니, 일부러 사람을 모아서 나르고 어쩌고 할 수고도 없을 게 아닌가. 다들 고르고 반듯하여 힘을 덜고도 공이 배나 되며, 나르기 가볍고 쌓기 쉬운 것이 벽돌만한 게 없네.
이제 돌로 말하자면, 산에서 쪼개어 낼 때에 몇 명의 석수(石手)가 들어야 하며, 수레로 운반할 때에 몇 명의 인부를 써야 하고, 이미 날라다 놓은 뒤에 또 몇 명의 손이 가야 깎고 다듬을 수 있으며, 다듬어내는 데까지 또 며칠을 허비해야 할 것이요, 쌓을 때도 돌 하나하나를 놓기에 몇 명의 인부가 들어야 하며, 이리하여 언덕을 깎아내고 돌을 입히니, 이야말로 흙의 살에 돌옷을 입혀 놓은 것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뻔질하나 속은 실로 고르지 못한 법일세. 돌은 워낙 들쭉날쭉하여 고르지 못한 것이기에, 조약돌로 그 궁둥이와 발등을 괴며, 언덕과 성과의 사이는 자갈에 진흙을 섞어서 채우므로, 장마를 한 번 치르고 나면 속이 텅 비고 배가 불러져서, 돌 한 개가 튀어나 빠질 경우 그 나머지는 모두 저절로 무너질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요, 또 석회의 성질이 벽돌에는 잘 붙지만 돌에는 붙지 않는 것일세.
내가 일찍이 차수(次修)7)와 더불어 성제를 논할 때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벽돌이 굳다 한들 어찌 돌을 당할까보냐’ 하자, 차수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벽돌이 돌보다 낫다는 게 어찌 벽돌 하나와 돌 하나를 두고 한 말이오’ 하더군 그래. 이는 가위 움직일 수 없는 철칙일세. 대개 석회는 돌에 잘 붙지 않으므로 석회를 많이 쓰면 쓸수록 더 터져 버리며, 돌을 배치하고 들떠 일어나는 까닭에 돌은 항상 외톨로 돌아서 겨우 흙과 겨루고 있을 따름이네. 벽돌은 석회로 이어 놓으면, 마치 어교(魚膠)가 나무에 합하는 것과 붕사(鵬砂)가 쇠에 닿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벽돌이라도 한 뭉치로 엉켜져 굳은 성을 이룩하므로, 벽돌 한 장의 단단함이야 돌에다 비할 수 없겠지마는, 돌 한 개의 단단함이 또한 벽돌 만 개의 단단함을 당하지 못할 것이니, 이로써 본다면 벽돌과 돌 중 어느 것이 이롭고 해로우며 편리하고 불편한가를 쉽사리 알 수 있겠지.”
하였다. 정 진사는 방금 말등에서 꼬부라져 거의 떨어질 것 같다. 그는 잠든 지 오래된 모양이다. 내가 부채로 그의 옆구리를 꾹 지르며,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웬 잠을 자고 듣지 않아.”
하고 큰 소리로 꾸짖으니, 정 진사가 웃으며,
“내 벌써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느니.”
한다. 나는 화가 나서 때리는 시늉을 하고,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시냇가에 이르러 버드나무 그늘에서 땀을 들이다. 오도하(五渡河)까지 5리만큼씩 돈대가 하나씩 있다. 이른바 두대자(頭臺子)ㆍ이대자(二臺子)ㆍ삼대자(三臺子)라는 것은 모두 봉대(烽臺 봉화를 놓는 곳)의 이름이다. 벽돌을 성처럼 쌓아 높이가 대여섯 길이나 되며, 마치 필통(筆筒)같이 동그랗다. 대 위에는 성첩(城堞)이 시설되었는데, 형편없이 헐어진 대로 내버려 두었음은 무슨 까닭일까. 길가에 간혹 널을 돌 무더기로 눌러 둔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그냥 내버려 두어서 나무 모서리가 썩어 버린 것도 있다. 대개 뼈가 마르기를 기다려서 불사른다 한다.
흔히 길 옆에 무덤이 있는데, 위가 뾰족하고 떼를 입히지 아니하였으며, 백양(白楊)을 많이 줄지어 심었다.
도보(徒步)로 길 다니는 사람들이 극히 적다. 걷는 이는 반드시 어깨에 포개(鋪盖) 침구를 포개라 한다 를 짊어졌다. 포개가 없으면 여점에서 재우지 않으니, 이는 도둑이 아닌가 의심하기 때문이다. 안경을 쓰고 길가는 자는 눈의 정력을 기르고자 함이다. 말을 탄 이는 모두 검은 비단신을 신고, 걷는 이는 대체로 푸른 베신을 신었는데, 신바닥에는 모두 베를 수십 겹이나 받혀 댄 것이다. 미투리나 짚신은 보지를 못했다.
송참(松站)에서 묵다. 이 곳은 설리참(雪裏站)이라고도 하고, 또 설유참(雪劉站)이라고도 부른다. 이 날 70리를 갔다. 누가 말했다.
“이곳은 옛날 진동보(鎭東堡)이다.”
[주1]경조당상(京兆堂上) : 경조는 한성부의 별칭. 한성부의 당상관을 말함.
[주2]당서(唐書) : 유후(劉煦)의 《구당서(舊唐書)》, 구양수(歐陽修)의 《신당서(新唐書)》가 있다.
[주3]동이(東彝) : 어떤 본에는 동이(東夷)로 되었으나 그릇되었다. 연암은 이(夷)는 야만족이라 하여 이(彝)를 썼다.
[주4]한서(漢書) : 동한(東漢, 後漢) 반고(班固)가 지은 전한(前漢)의 역사서.
[주5]금사(金史) : 원(元)의 탁극탁(托克托) 등이 순제(順帝)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
[주6]문헌통고(文獻通考) : 원의 마단림(馬端臨)이 지었다.
[주7]차수(次修) : 박제가(朴齊家)의 자. 또는 재선(在先)ㆍ수기(修其)라고도 하였다. 연암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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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도강록
初八日甲申晴.與正使同轎.渡三流河.朝飯於冷井.行十餘里.轉出一派山脚.泰卜忽鞠躬趨過馬首.伏地高聲曰.白塔現身.謁矣.泰卜者.鄭進士馬頭也.山脚猶遮.不見白塔.趣鞭行不數十步.纔脫山脚.眼光勒勒.忽有一團黑毬.七升八落.吾今日始知.人生本無依附.只得頂天踏地而行矣.
초팔일갑신청.여정사동교.도삼류하.조반어랭정.행십여리.전출일파산각.태복홀국궁추과마수.복지고성왈.백탑현신.알의.태복자.정진사마두야.산각유차.불견백탑.취편행불수십보.재탈산각.안광륵륵.홀유일단흑구.칠승팔락.오금일시지.인생본무의부.지득정천답지이행의.
轎가마교 渡건널도 鞠躬 몸을굽히다 趨 달릴추 猶 오히려(여전히)유 遮 막을차
趣달릴취 纔겨우재 勒굴레륵 毬공구 升되승 依의지할의 附붙을부 頂정수리정
초파일(7월8일) 맑음. 정사와 가마를 함께 타고 삼류하를 건너, 냉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십여리를 가서, 한줄기 산기슭을 돌아 나가는데 태복이 갑자기 몸을 굽히고 말머리로 달려와서 땅에 엎드려 큰소리로 말하길 "백탑이 나타났다고 아뢰옵니다."
태복은 정진사의 말을 모는 하인이다. 산기슭은 여전히 막혀있어, 백탑은 보이지 않았다.
채찍질을 재촉하여 수십 걸음을 채 가기 전에 산기슭은 겨우 벗어나자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홀연히 한무리의 검은공이 일곱 번 오르고 여덟 번 떨어졌다. 내가 오늘 비로소 알았다.
인생은 본래 누군가에 붙거나 의지하는 것 없이 다만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고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立馬四顧.不覺擧手加額曰.好哭場.可以哭矣.鄭進士曰.遇此天地間大眼界.忽復思哭.何也.
립마사고.불각거수가액왈.호곡장.가이곡의.정진사왈.우차천지간대안계.홀부사곡.하야.
顧돌아볼고 遇만날우 眼눈안 復돌아올복
말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고, 손을 들어 이마에 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말하길
"울기 좋은 장소이니 통곡할만 하다." 정진사왈 "천지간의 큰 펼쳐진 곳을 만났는데 갑자기 우는 것을 생각하니 무슨 까닭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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