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다이제스트> 보고 맛 들여라 - 연중 제32주일 복음묵상
그날은 온다
송용민 신부,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국장
독일 유학 시절, 내 생활은 지극히 단순했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논문을 쓰다가 잠들고,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서 종일 공부하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어김없이 자전거로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시장에 들러 사람 냄새를 맡고, 과일이라도 하나 집어 들고 들어오면 늦은 오후였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다보면 어느덧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그러면 옷을 갈아입고 라인강변을 뛰었다. 문득 강물에 걸린 달빛을 보며 ‘언젠가 저 달을 한국에서 맘 편하게 볼 날이 오겠지’ 학업을 마치고 내가 원했던 자리로 되돌아가 있는 모습을 갈망하던 순간들이었다.
군 생활 초기에도 그랬다. 고된 야간행군 중 잠시 쉬는 시간에 밤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유난히 밝은 별들 가운데 오리온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군 생활을 마치면 밖에서 저 오리온자리를 행복하게 볼 날이 오겠지’ 긴 시간이 지났지만 그 다짐은 여전히 생생하다.
토요일이면 대학로에서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비춰오는 현란한 불빛을 신학원 기숙사에서 바라보면서도 ‘방학하면 저 대학로 밤거리를 걸어보리라’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지만 그래도 갈망하고 다짐했던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기다림은 언제나 지루하고 힘들지만, 기다림이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은 미래를 꿈꾸게 한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로운 처녀들이 밤늦게 온 신랑을 만날 수 있었던 비결은 등잔에 넣을 기름을 미리 준비한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내게 닥칠 ‘그 날과 그 시간’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 하신 말씀은 내게 닥칠 일을 모르니 불안에 떨며 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매 순간에서 기쁨과 행복을 일으켜주는 사랑, 인내, 온유, 절제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등잔을 채워가며 살라는 말씀으로 알아듣는다.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과거에 현재를 꿈꾸고 갈망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과거에 지녔던 나의 갈망을 잊었거나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후회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가끔 10년 전, 20년 전의 젊었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난 지금이 좋다. 신학생 시절 사제가 되고 싶던 갈망과 힘든 군 생활과 유학 시절 외로운 나와의 싸움을 견디며 내가 원했던 자리로 돌아가고 싶던 날들, 그 시간을 채웠던 수많은 인내, 온유, 사랑의 기름 덕분에 훌쩍 커버린 지금의 내 모습을 더 사랑하고 싶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주저 없이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달려갈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후회나 불평 없는 지금의 나를 가꾸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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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지금이 좋답니다! ^^*
금메달 따는 선수들 중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기필코 금메달을 따고야 말겠다는 생각보다는 이 경기가 끝나면 집에 돌아가서 무엇을 하리라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신부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신부님을 부르실때 등잔에 기름을 가득 담고 달려가실거라 믿습니다.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가 참 아름답게 여겨지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