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 이기억 선생의 1주기 추도식이 지난 7월 7일에 있었다. 백암 선생은 대전대신중·고등학교의 설립자이시다. 추도예배를 드리는 동안 고인을 생각해보니 좀처럼 보기 드문 훌륭한 분이셨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오늘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치니 지면 하단에 커다란 <교사채용 공고>가 눈에 띈다. 사립학교 가운데 재단이 열악한 학교들이 많이 있다. 그런 곳에서 학교를 운영하며 재정을 축내거나 공금을 유용하는 사례도 있다. 간혹 교직원을 채용할 때에 부정한 방법으로 선발하여 여론의 질타를 당하기도 한다. 육영사업에 이바지하려는 사람들은 학교를 개인의 사업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근무하던 대전대신중·고등학교에서는 교사를 채용하기 위한 공고를 해도 설립자가 이력서 한 통 내려 보낸 일이 없었다. 면접이 끝나도 재단 이사진으로부터 부탁하는 전화를 한 통도 받은 일이 없다. 학교는 교장 교감선생님이 경영하는 것이라는 설립자의 확고한 교육관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분명했기 때문이다.
백암선생의 손자인 이사장의 장남 혼례식 때 있었던 일이다. 결혼식 청첩장을 받고서 축하한다는 전화를 드렸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당일 먼 길이지만 참석해 달라는 당부의 말씀도 덧붙이셨다. 행정실장의 이야기로는 대전에선 중·고등학교 교장, 교감선생님 네 사람에게만 초대장을 보냈단다. 축의금은 받지 않기로 했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지금까지 많은 청첩장을 받았지만 축의금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또한 축의금이 없는 결혼식에는 지금까지 참석해 본 일도 없었다.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오는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결혼식 날 서울 양재동에 있는 엘 타워(L-Tower) 예식장을 찾아갔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하얀 봉투 속에 축의금을 준비해서 주머니 깊숙이 찔러 두었다. 이미 예고해서인지 접수대는 찾아볼 수 없었고, 식장 입구에는 호위병처럼 늘어선 화환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자의 인도를 따라 식장으로 들어서니 테이블 위에는 또렷한 글씨의 이름표가 우리를 맞이했다. 신랑·신부 양가의 하객 이백 명씩 사백 명만 초대했단다. 하객들은 모두 사회자가 인도하는 대로 신랑입장부터 신랑·신부의 행진까지 참관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뜨거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고, 상상도 하지 못하던 결혼식에 참석했다. 예식이 끝난 뒤에 관현악단의 연주가 이어지면서 하객들이 앉은 자리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식사는 양식으로 샐러드와 스테이크, 포도주 그리고 후식과 차까지 식사시간을 고려하면서 천천히 테이블 위로 음식을 올려놓았다. 정말 뜻 깊고 멋진 결혼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아마도 이런 예식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평소에 우리들의 관·혼·상·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막상 자신 앞에 일이 닥치면 어쩌지 못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관례를 따르게 마련이었다. 두 아이를 결혼시키면서 나도 여러 날 책상 앞에서 마음을 졸였다. 청첩장을 보내야 할까 아니면 그만둘까, 혹시 나중에 섭섭하다고 이야기 하거나 욕을 하지는 않을까? 망설이다가 이름 석 자를 적지 못하고 건너뛰거나 그래도 보내야지 하면서 주소를 써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결혼식장에 찾아가면 접수대에 축의금 봉투를 내밀면서 혼주와 인사를 나눈 뒤에 식당으로 건너가 아는 얼굴을 찾아 어울린다. 그런 곳에서라야 오랫동안 보지 못한 선·후배나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예식에 참석해서 신랑과 신부의 행진을 축하하고 식이 끝날 때까지 가족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는다. 대부분 식장에 들어가지도 않고 낯익은 얼굴들과 자리를 같이 한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도 빈소에 들러 조문을 마친 뒤에는 지인들과 만나 근황을 물으면서 소식을 교환하고 담소를 나눈다. 고인의 명복을 빌거나 유가족들과 슬픔을 함께 나누기 보다는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과 합석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우선이다. 때로는 예를 갖추는 것이 너무 형식적인 것 같아서 고인에게 송구하기도 하고,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지난 해 대전대신중·고등학교 설립자이신 백암선생께서 구순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장례식 때에도 예전에 살아계실 때와 같은 분위기였다. 조화와 조의금도 모두 사절한 채 고인을 애도하는 경건한 분위기가 식장을 뒤덮었다. 평소에 고인을 존경하던 많은 분들이 장지까지 따라나섰다. 문상으로 예를 마친 것이 아니라 하관 예배를 마치고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면서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나오면서 우리들은 몇몇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구동성으로 백암선생께서도 훌륭하시고 그 자녀들도 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드는 분들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바르고 올곧게 살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신 분들 곁에서 학교경영을 맡았던 나 자신도 한없이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있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백암선생과 그 분의 자녀들이 학교경영과 관·혼·상·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무언의 교훈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더 크고 무겁게 자리 잡았다.
그린에세이 제 23호(2017년 9.10월호) 수록
첫댓글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될만한 훌륭한 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사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것이 말은 쉬워도 실천이 어려운 게 현실인데, 백암 선생님은 올곧은 교육자 정신으로 몸소 실천하신 분이군요. 평범한 소시민도 배울 점이 많습니다.
백암 이기억 선생님, 존경받을 만한 어른이셨군요. 박영진 선생님의 인품이 남다른 이유를 조금은 알듯 합니다^^* 좋은 씨앗을 뿌리고 가신 그 분의 유업을 이어 대신고교가 더욱 빛나리라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훌륭한 분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겪은 분 가운데는 백암 이기억 선생이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우리 고장에 백암 이기억선생님 같으신 훌륭하신 분이 게시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암 선생님 같으신 분이 계셔서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