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 전 어느 날, 중국인 한 사람이 나를 찾아 왔다. 우리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나를 찾기에 가 보았더니 자기 아들이 한국 유학을 해서 자기도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주 친절하게도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 놀러오라고 했다. 그런 후에도 아주 자주 그 먼 곳에서 몇 시간씩 기차를 타고 찾아 왔다. 이미 그 사람은 내게 그물을 어떻게 쳐야 할지를 계산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의 표적이 된 것이었다. 그 사람은 올 때마다 작은 선물을 하나씩 들고 오기도 하고, 자기 친구들도 데리고 와서 매상을 올려주기도 했다. 중국인 특유의 접근이 시작된 것이었다.
낚시를 하려면 일정한 양의 밑밥을 뿌려야 한다. 그 사람은 약 6개월에 걸쳐서 나에게 떡 밥을 뿌렸고 나는 그 떡밥에 야금야금 중독이 되어 갔다. 어쩔 방법이 없었다. 내 식당에 찾아와서 음식을 많이 팔아 주는 사람을 어떻게 함부로 대한단 말인가? 거기다가 선물까지 들고 오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귀빈이 아닌가? 그리고 이제 우리의 사이가 아주 친한(?) 사이가 되어 갈 즈음에 그 친구는 내게 정말로 애원하듯이 부탁을 했다. 제발 자기가 사는 도시에 놀러 오라고. 그래서 나는 동네 아는 한국 분들 가족과 아내를 힘차게(?) 대동하고 마치 멀리 살고 있는 친척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기분 좋게 그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그가 친 그물에 이미 반은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중국인들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접대는 가히 세계 최고의 수준급이다. 기차역에 마중을 나와 정중하게 맞이해 주고, 바로 고급 식당으로 안내하여 비싸고 정성스런 음식을 시키고, 자기 친구들도 함께 초청하여 자기가 못 하는 술자리 분위기를 활기차고 유쾌하게 유도하고(자기는 술 한 잔 안하고), 식사가 끝난 후에는 미리 예약한 그 지역 최고의 호텔에 여장을 풀게 했다. 이튿날에 관광을 하는데, 정말로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전부 사전 준비를 한 듯이 완벽하게 우리를 감동시키고, 돌아오는 날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찌나 그렇게 마무리를 잘 하던지. 중국에 살다보니 이런 훌륭한 친구를 알게 되다니! 이런 찬사가 절로 나왔다. 하늘이 내린 복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감사와 감동이 귀가하는 기차에서 얼마나 달콤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역시 중국 사람들은 통이 크고 배포가 있다는 등, 나는 원래 인복이 있다는 등, 쉽게 말해서 나는 그가 친 그물에 이미 반은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이지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더구나 중국 사람들의 의식 세계에는 이 원리가 아주 철저하게 박혀 있다. 중국인에게 무언가를 공짜로 얻길 원한다면 그 건 불행의 시작이고 착각도 아주 심한 착각이다. 아무튼, 그 친구는 자기가 친 그물에 내가 반은 걸려들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나는 그 때부터 그 사람이 조종하는 그물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물론, 중국에 온지 그래도 몇 년은 된 상태라, 뭔가 느낌상으로는 “내가 혹시 그물에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 느낌이 그 사람의 그물을 벗어나게 할 정도로 당시의 내 경험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강한 의심도 들지 않았다. 결국 이런 무지한 믿음과 우정(?)을 믿어 준 덕분에 나는 그가 만들어 놓은 그물에 더 깊게 빠져야 했다.
그 사람의 본래의 목적은 자기가 사는 도시에 한국 식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는 식당에 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고, 더구나 한국 음식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기에 철저하게 나를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우리 식당의 주방장과 아줌마까지 다시 그물을 쳐서 모두 빼내가고 나도 모르는 순간에 나 자신도 자기가 차리고 준비하는 식당에 동참을 시켜 버렸다. 어느 날 그 사람이 계약해 놓은 아파트 숙소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그물에 걸려서 옴짝 달 싹을 못하는 지경이 된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나를 그렇게 극진하게 대접해주던 사람이 나를 이제 자기의 그물 안에 집어넣고 마음 놓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내 식당은 졸지에 문을 닫고, 나는 내가 주인으로서 거느렸던 주방장과 주방 아줌마를 데리고 중국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 와서 머슴살이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결국은 이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그 좋은 방법이란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치며 머리를 써 봐도 이미 걸려든 그물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없더란 이야기다.
내가 사는 도시에 어느 중소기업이 진출했었다. 아마도 청운의 꿈을 안고 왔을 것이다. 막강한 관시(인맥)를 동원해서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했었다. 그리고 지방 정부에서 소개한 국영 회사를 파트너로 삼았으니 이 보다 더 안전하고 확실한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회사는 100억 가량의 자금을 투자하여 공장을 짓고, 향후 3년 이내에 연간 천 억 이상의 야심찬 매출 계획도 세웠다.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한 숫자도 아니었다.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본사의 회장은 올 때마다 정부 관계자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자기도 선물을 주며 향후 갑방이 될 회사의 책임자들과 관시를 맺어 갔다. 출장길은 즐거운 상상과 꿈의 시간이었고 중국의 상대방을 만나는 순간은 그 꿈이 하나씩 익어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공장만 완성되면 우리나라보다 면적이 더 큰, 인구가 8천만에 가까운 지방의 관급(官給) 오더(Order)를 95%이상 보장해 준다는 정부의 든든한 계약서도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상대 국영 회사는 그 계약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미 40억 원의 투자를 우리 측에서 받아갔다. 몇 천 억의 매출이 예상되는 마당에 그까짓 40억 투자가 대수가 아니었다. 당연히 투자해야 했고, 그 투자를 권유하는 지방 정부가 오히려 고맙기도 했다. 그 정도를 투자해 주는 것은 어쩌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 했다.
중국 사람들이 치는 그물에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물에 걸려든 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쳐 놓은 그물에 아주 심하게 걸려든 것이었다. 공장은 완성되었지만 오더는 차일 피 되어 갔다. 투자한 자금은 중방 측에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한 후에 국가 정책상 법규에 위반되는 사항이라는 핑계를 대고 돌려주었다. 무슨 뜻일까? 이미 볼일이 다 끝났다는 뜻이다. 왜 우리가 무수한 관시(關係)를 동원해서 먹고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중국의 회사를 제쳐두고 한국 회사에게 오더의 95%를 주나! 애당초 말이 안 되는 계약이고 약속이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치는 그물에는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이런 그물의 존재를 분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고수들도 쉽게 당하는 게 중국인들이 치는 그물이다. 마침내 회사는 4년간 단 한 번의 물량 같은 물량을 오더로 받아보지도 못하고 정리해야 했다. 더도 덜도 말고, 정말이지 한 달만이라도 공장 가동이라도 해 보고 문을 닫았다면 차라리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공장 책임자의 한 숨 섞인 한탄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렇다. 중국 사람들은 그물을 치는데 아주 능숙하다. 특히 우리 같은 외국인이나 외국 기업을 상대로 할 때는 너 나 없이 이 “그물 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리고 1년이 되던 3년이 되던, 가장 적당한 시기에 그물을 거둔다. 성급하게 치지도 않는다. 아주 서서히 치밀하면서도 인간적(?)으로 친다. 의리와 우정을 가장한 오랜 친구 같은 감정으로 다가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그물을 엮어 나간다. 우리는 자칫 방심하다가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그물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무서운 그물이고 여간해서는 잘 파악이 안 되는 그물이다.
중국인을 욕해서도 안 된다. 중국인이 나빠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그물을 어떻게 피 할 수 있을까? 이 또한 명확한 답은 없다. 중국 시장을 진출하려는 사람은 어떤 형태가 되었건 마주 해야 하는 그물이고 상황이다. 그물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어차피 그 들과 합작을 하던, 거래를 하던, 체결해야 하는 계약이고 누가 걸리던 서로가 쳐야 하는 그물이다. 다만, 우리는 그물에 맹탕 걸려들거나 그 들이 파 놓은 함정에 아무 생각 없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다. 중국인을 욕해서도 안 된다. 중국인이 나빠서도 아니다. 그들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어겨서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을 한 것이다. 남의 나라 땅에서 돈을 버는 일이 쉬운 일인가? 중국 사람들이 외국인 돈 벌어 주려고 발 벗고 나서지 않는다고 욕을 하면 이치에 맞는 말인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차피 그물과 대면하려면 철저하게 준비하고, 그 들보다 더 치밀하게 우리의 그물을 들고 나가야 한다. 일방적으로 치는 그물에는 전부 걸려들게 되어 있다. 그렇다. 우리도 같이 그물을 쳐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그물은 어떤 그물인가? 상생의 그물이다. 우리는 상생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중국인들은 의외로 상생하는 면에서는 아주 강하고 관대하고 통이 큰 사람들이다. 인구가 많은 나라이기에 서로 나눠 먹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아주 철저할 정도로 중국 사람들은 정확한 분배를 좋아한다. 문제는 우리가 과도하게 욕심을 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그물에 걸려든다는 점이다. 역시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잉태한다는 성경 구절은 아직도 유효한 말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 보기에는 최고의 하수다. 아주 다루기가 쉽고 편한 하수들이다. 최소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한 하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만디(慢慢的)의 진짜 깊은 뜻은 단순히 느리다는 의미가 아니다
두 번째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절대로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는 느긋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백기 투항하는 모습을 본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의 조급함과 덤비는 성격은 중국 시장에서 하나도 유용하게 써 먹을 게 없다. 앞서 언급 했듯이, 중국은 사람이 많은 나라다. 중국의 정치 제도도 집단 지도체제다. 그 들은 하나의 문제를 놓고 여러 사람들이 밤낮으로 의논하고 협의하고 검토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도 그들의 사고방식은 다르다. 그 문제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이 묵시적으로 모두 동의 할 때까지 시간을 갖고 충분히 검토하고 조사하고 검증 절차를 거친다. 중국인의 성격을 우리는 흔히 만만디(慢慢的)라고 표현한다. 물론, 만만디는 느리다는 의미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느리다는 의미와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느리다는 의미는 다르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만디의 진짜 깊은 뜻은 단순히 느리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만디는 철저하고 깊이 생각하고 검토한다는 뜻이다. 중국인들의 만만디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다듬고 또 다듬은 튼튼하고 빈틈없는 그물이고 투망일 수가 있다. 만만디를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디 중국 시장에서 건승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