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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九世 故國川帝紀
제9세 고국천제기
원문출처 ;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帝,諱男武,亦曰伊夷模,新大帝之苐二子也.母,穆太后,度婁女也,乙未四月夢黃竜纒身而生.身長九尺,姿表雄偉,力能扛鼎,莅事聽断,寬猛得中.帝兄玄太子徒善而無勇故,新大欲以帝爲嗣,帝以越兄爲不可而淹留提那.玄曰“從古賢者可嗣.”遂徃海山爲樂仙,不得已,至是卽位於西都之皇檀.
제는 휘가 남무男武 또는 이이모伊夷模였고, 신대제新大帝 둘째 아들이다. 모친은 목穆태후로 목도루度婁의 딸1)인데, 을미년2) 4월에 황룡이 몸을 휘감는 것을 꿈꾸고서 낳았다3). 키가 9척에다, 외모와 거동이 뛰어나고 씩씩하였으며, 힘은 능히 솥鼎4)을 들어 올렸고, 정사에 임하면 듣고서 결단함에 너그럽고 엄격함이 적절하였다. 제의 형 현玄태자가 한갓 선善하기만 하고 용기勇는 없었던 까닭에 신대제가 제를 후사로 삼고자 하매, 제는 형을 뛰어넘을 수 없다며 제나提那땅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현玄태자가 이르길 “예로부터 현명한 이가 뒤를 잇는 것을 옳게 여겼다."라 하고서 해산海山5)으로 선도를 즐기러 가버려서, 부득이 지금에 이르러 서도西都6) 황단皇檀7)에서 즉위하였다.
1) 守禮
2) 次大10年 즉 CE155년
3) 次大帝紀엔 5月이 生月이다. 꿈을 꾼 것이 4월이었나?
4) 무쇠가마솥? 帝王의 標式인 큰 청동 솥?
5) 在荇人故地
6) 汁水邊所在
7) 南堂註釋曰在鸞坮之樹王
○二年庚申,二月,以于氏爲后,以其父于素爲中畏大夫.素,恢子,仙人也. 索頭,梪眞殂,弟般立. 六月,尙太后崩,春秋七十七. 九月,如卒本,行告庙祭. 十月,穆太后生子英君,請大赦.不許曰“旣罪而又赦,無信於民而敎射倖也,非可法也.”
○2년경신(CE180), 2월, 우于씨로 황후를 삼고, 우씨의 아비 우소于素로 중외대부를 삼았다. 우소素는 우회恢의 아들로 선仙을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색두索頭에선 두진梪眞이 죽고, 동생 두반般이 즉위하였다. 6월, 상尙태후가 춘추 일흔일곱에 죽었다. 9월, 졸본卒本으로 가서 (동명)사당에 즉위했음을 고하고 제사하였다. 10월, 목穆태후가 아들 영군英君을 낳아놓고 대사면을 청하매, 허락하지 않고서 이르기를 “이미 죄罪를 주었는데 또 풀어주면, 백성들이 법을 믿지 않고 요행이나 바라도록 가르치는 것이 되어, 법이 취할 바가 아닙니다.”라 하였다.
●三年辛酉,二月,行新大帝大[祭]8)六日.
●3년신해(CE181), 2월, 신대제新大帝 큰제사를 엿새 동안 치렀다.
8) 필사본엔 帝로 되어있으나 誤寫로 보고, 祭로 고쳐서 번역한다.
○四年壬戌,三月,甲寅夜赤氣貫太微如蛇. 七月,星孛于太微. 九月,梪般殂,適立.
○4년임술(CE182), 3월, 갑인일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太微좌를 뚫고 지나감이 뱀과 같았다. 7월, 혜성이 태미좌를 범하였다. 9월, 두반梪般9)이 죽고, 두적適이 보위에 올랐다.
9) 索頭國王
○六年甲子,四月,幽州賊大舉入寇.命罽須拒之,不利.上親征戦于坐原,大破,斬首山積.是謂坐東親戦. 是年,伐休為羅主.其父仇鄒,陜父子也.母曰只珍內禮,仇道之姉也.占風雲知邪正,云.
○6년갑자(CE184), 4월, 유주幽州의 적도10)가 대거 쳐들어왔다. 계수罽須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였더니, 불리不利하였다. 상이 친히 가서 좌원坐原11)에서 싸워서 크게 쳐부수니, 목을 벤 것이 산처럼 쌓였다. 이를 좌동친전坐東親戰이라 한다. 이해에 벌휴伐休12)가 신라羅임금이 되었다. 그 아비 구추仇鄒13)는 협보陜父14) 아들이고, 어미는 지진내례只珍內禮라는데 구도仇道15)의 누님이다. 풍운風雲으로 점을 쳐서 그른지 옳은지를 판별한다고 하였다16).
10) 三國史記曰漢遼東太守
11) 山西省 北邊의 左雲? 右玉對應地名?
12) 三國史記曰姓昔.☞그럼, 昔脫解는 鵲太子가 아니었나? 陜父의 氏가 昔이었나?
13) 三國史記曰“姓昔,脫解王子仇鄒角干之子也.母,姓金氏,只珍內禮夫人."
14) 芻牟旧臣으로 黃頭雪膚 즉 노랑머리 白人이었다. 仇鄒의 生父는 脫解인가 陜父인가?
15) 金氏?然,金仇道也.
16) ☞ 초기신라 관련한 역사기록을 심각하게 다시 살펴야 할 필요를 예시한다. ●七年乙丑,正月,于素右輔,于目中畏大夫皂衣. 伐休祀其始祖而赦,以海飡仇道一吉飡仇須兮爲左右軍主以伐召文國.
●7년을축(CE185), 정월, 우소于素를 우보로, 우목于目을 중외대부‧조의로 삼았다. 벌휴伐休가 그들의 시조에게 제사하고 사면하였으며, 해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로써 좌・우 군주軍主17)를 삼아서 소문국召文國을 쳤다.
17) 太守나 都督 쯤.
○八年丙寅,夏四月,乙卯,熒惑守心,上曰“天高,聽卑之言.豈限於宋哉.心之分野亦何宋哉.凢有星變,勿論分野,當以宋,景為心可也.” 五月,壬辰晦日食. 朱宮人生慈古. 太輔髙衡薨,尙庚代之,麻靖左輔,穆天右輔. 是年正月,伐休巡各部,観其風俗.七月,有嘉禾生于南新,云.十月,濟,無雪而雷,星又孛西北,二十日而滅.
○8년병인(CE186), 여름 4월, 을묘일, 형혹熒惑성이 심心성좌를 차지하매18), 상이 이르길 “하늘은 높아서 비천한 이들의 말을 듣는 것이 어찌 송宋19)땅에 한정되겠으며, 심수心宿가 조응調應하는 땅 역시 어찌 송宋땅 뿐이겠는가! 무릇 별자리의 변화는 특정 땅 조각分野에만 조응하는 것이 아니어서, 송宋땅이 당연하다면 경景땅도 심수에 조응할 수 있는 것이다!”라 하였다. 5월, 임진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궁인 주朱씨가 자고慈古를 낳았다. 태보 고형高衡이 죽으매, 상경尙庚이 대신하고, 마정麻靖이 좌보를 목천穆天이 우보를 맡았다. 이해, 정월에 벌휴伐休가 각 부를 돌며 풍속을 살폈고 7월엔 상서로운 벼가 남신南新20)에서 생겼다고 하며, 10월에 백제濟에선 눈은 내리지 않은 채로 우레가 일었으며 (살)별星21)이 또 서북하늘에 나타났다가 스무날이 지나서 사라졌다.
18) 전쟁이 있을 조짐?
19) 春秋戰國時之宋 20) 山東省 兗州 南辛縣? 21) 혜성?
●九年丁卯,三月,伐休禁土木以勧農.十月,羅北雪深一丈. 五月,濟都井及漢水竭.
●9년정묘(CE187), 3월에 벌휴伐休가 토목土木부역을 금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였고, 10월에 신라羅 북쪽에선 눈이 한 길이나 내렸다. 5월에 백제濟도성에선 우물들과 한수漢水22)까지 말랐다.
22) 黃河 또는 長江支流인 漢水. 李氏朝鮮이 漢江으로 改名한 南川은 不可함.
●十年戊辰,四月,穆太后食豚卵而崩,春秋五十六. 濟,二月,功羅毋山城,仇道拒之.濟以是月重修宮室.
●10년무진(CE188), 4월, 목穆태후가 돈란豚卵23)을 먹고서 죽었다. 춘추 쉰여섯이었다. 백제濟가 2월에 신라羅의 무산성毋山城24)을 쳤고, 구도仇道가 이를 막았다. 백제濟는 이 달에 궁실을 중수하였다.
23) 豚魚卵=복어알
24) 혹 모산성母山城? 관산성毌山城?
●十一年己巳,十月,太輔尙庚薨,年七十二. 四月,丙午朔日食. 七月,仇道與濟戦于狗壤,殺獲五百余級. 朱宮人生女雷.
●11년기사(CE189), 10월, 태보 상경尙庚이 나이 일흔둘에 죽었다.
4월, 병오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7월, 구도仇道가 백제濟와 구양狗壤에서 싸워서, 500여 급을 죽이고 잡았다. 주朱궁인이 딸 뢰雷를 낳았다.
○十二年庚午,九月,東都雪深六尺. 是年八月,濟襲羅圓山城,不克,又圍缶谷城.仇道擊退之,追至蛙山,過其伏兵而敗故,薛支爲左軍主,仇道為缶谷城主. 中畏大夫貫那沛者箊畀留評者左可慮等以王后親戚,執國權柄,子弟恃勢驕侈掠人,子女奪人田宅,國人怨憤.上怒欲誅之,左可慮等遂矯詔發兵.将有不測,招之,不來. 是年,公孫度為遼東太守而至其鄕,殺舊嫌大姓十余家.而欲得入保,遣使来朝.却之.
○12년경오(CE190), 9월, 동도東都에 눈이 6자 깊이나 내렸다. 이해 8월, 백제濟가 신라羅의 원산성圓山城25)을 치다가 실패하더니, 또다시 부곡성缶谷城26)을 포위하매, 구도仇道가 이를 물리치고서 와산蛙山27)까지 추격하였다. 복병이 있는 곳을 지나쳐서 패하였던 까닭에, 설지薛支가 좌군주左軍主로 되고, 구도는 부곡성주缶谷城主로 되었다. 중외대부・관나패자貫那沛者 어비류箊畀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 등이 왕후王后의 친척이라 하여 나라를 틀어쥐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고, 자제들이 세력을 믿어 교만・사치하며 남들을 약탈하고, 자녀들이 남들의 집과 땅을 빼앗으매, 나라사람들이 이를 원망하고 분하게 여겼다. 상이 노하여 이들을 주살하려 하였더니, 좌가려 등이 거짓조서로 군사를 일으켰다.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서 이들을 불러들였으나, 들어오지 않았다. 이해, 공손탁公孫度이 (후한의) 요동遼東태수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더니 예전에 싫어하던 큰 성씨 열 집안을 죽였으며, (우리 땅으로) 들어와 눌러앉고 싶어서 사신을 보내와서 입조하였으나, 쫓아냈다.
25) 山東省 長白山 西南隣의 原山之境?
26) 原山 인근?
27) 山東省 巨野 嘉祥 間 臥龍山? 濟寧 北隣 伏山? 甑山? ○十三年辛未,二月,上徵諸都畿兵于西都,親征左可慮箊[畀]28)留,誅之. 命四部擧賢,四月,以乙巴素爲輔外之長,名曰國相,賜竹呂之釼以誅不道. 時,三輔,皆以宗戚尸位素餐故有此新擧以匡政.於是,宗戚寵倖之震惧. 九月,蚩尤旗見於角亢.
○13년신미(CE191), 2월, 상이 도성들과 도성들 인근의 모든 병력을 서도西都로 불러들여서 좌가려左可慮와 어비류箊畀留를 친히 쳐서 주살하였다. 4부四部에 현자들을 천거하라 명하여, 4월에 을파소乙巴素를 국상國相이라는 3보輔29)들을 벗어난 우두머리로 삼고 죽려지인竹呂之釼을 주어서 부도不道한 이들을 주살하게 하였다. 이 시절, 3보輔 자리는 모두 종척들이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자리였던 까닭에, 이렇게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여 국정을 바로잡은 것이었더니, 이에 종척宗戚・총신寵臣・행신倖臣들이 두려워 떨었다. 9월, 치우기蚩尤旗30)가 각항角亢좌에 나타났다.
28) 界로 筆寫한 것을 畀로 바로잡고 번역한다.
29) 太輔・左輔・右輔 30) 전쟁이 일어날 조짐?
●十四年壬申,正月,練兵于汗濱. 朱宮人生子絃. 羅,國良阿[飡]31)述明一吉飡,雪三尺. 五月,羅大水,山崩十余所.
●14년임신(CE192), 정월, 한수汗변에서 군대를 훈련하였다. 주朱궁인이 아들 현絃을 낳았다. 신라羅에선 국량을 아[찬]으로 술명述明을 일길찬으로 삼았고, 눈이 석 자나 내렸다. 5월, 신라羅에 큰물이 져서 열 곳에서 산들이 무너졌다.
31)
●十五年癸酉,正月,甲寅朔日食. 嵏公主生女金鈴. 二月,冨山則忽白等侵最彘盖馬. 四月,盖馬大加優居主簿然人等伐冨山.公孫度請助戦,不許.則忽白等走漠北.
●15년계유(CE193), 정월, 갑인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종嵏공주가 딸 금령金鈴을 낳았다. 「2월, 부산冨山의 칙홀백則忽白 등이 최체最彘32)・개마盖馬를 침략하였다. 4월, 개마대가盖馬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이 부산冨山을 토벌하였다. 공손탁公孫度33)이 싸움을 돕겠노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칙홀백 등은 막북漠北34)으로 도망하였다.」35)
32) 在河東霍太山西隣 汾西之境, 卽 堤村 혹 古永安縣쯤?
33) 故國川帝紀 12年 기록엔 當時 後漢의 遼東太守이다. 三國史記曰玄菟太守.
34) 陰山山脈 以北 고비沙漠의 北方遠地? 혹시 陝西省의 漠北?
35) ☞三國史記 新大王 五年(CE169)에는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將兵助玄菟大守公孫度,討富山賊.”라 하여,
冨山을 討伐한 主體가 다르다.
이 記事는 冨山의 位置가 山西省 西北部에 있었던 盖馬國과 漠北 間의 隣近임을 얘기하는 듯하다.
이 富山이 산서성 남부의 浮山이라면 則忽白 등이 달아난 漠北은 陝西省 渭水 北方의 漠北일 수도 있겠다.
○十六年甲戌,六月,己巳晦日食. 七月,霜穀,賑飢. 十月,田質陽,路見貧民坐哭,命置貸穀.三月七月貸,而十月還,為恒式.
○16년갑술(CE194), 6월, 기사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7월, 곡물이 서리를 맞아서, 굶는 이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10월, 질양質陽36)에서 사냥하다가, 길에서 빈한한 이들이 주저앉아서 울고 있음을 보고, 명을 내려서 곡식을 빌려주었다. 3월과 7월에 빌려주고 10월에 갚게 하여서,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하게 하였다.37)
36) 山西省 北邊 呼和浩特市之境 質山 즉 鉄山의 남쪽?
37) 所謂‘賑貸法’을 施行하였음이라.
●十七年乙亥,二月,朱宮人生女[骲]38).
●17년을해(CE195), 2월, 주朱궁인이 딸 박骲을 낳았다.
38) [左骨+右已]로 筆寫된 듯한 것을 [左骨+右包]로 보고 번역한다.
●十八年丙子,二月,宮人于術為后所逼,匿于玉陽家. 嵏公主生子竹彦. 伐休重修宮室,三月旱,四月羅宮南大樹及其東門被震擊. 五月,麻靖太輔.
●18년병자(CE196), 2월, 궁인 우술于術이 황후에게 핍박당하여 옥양玉陽의 집으로 숨었다. 종嵏공주가 아들 죽언竹彦을 낳았다. 「벌휴伐休가 궁실39)을 고쳐지었는데, 3월엔 가뭄이 들고, 4월엔 신라羅궁궐 남쪽의 큰 나무와 궁궐의 동문東門이 벼락을 맞았다.」40) 5월, 마정麻靖이 태보가 되었다.
39) 月城의 궁실일 것.
40) 三國史記엔 “十三年,春二月,重修宮室. 三月,旱. 夏四月,震宮南大樹又震金城東門,王薨."이라 하였다.
○十九年丁丑,三月,漢人来投者日增.命置官,勞之授職. 五月,上崩於金川宮,春秋四十三,葬于故國川.帝以英勇之姿,不樂爲政,沈酒聲色,不能令終.惜哉.
○19년정축(CE197), 3월, 찾아와서 의탁하는 한漢인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나서, 관리를 두어서 그들을 위로하고 직책을 주었다. 5월, 상이 금천궁金川宮42)에서 춘추 마흔셋에 죽어서, 고국천故國川41)에 장사하였다. 제는 외모가 뛰어나고 용감하였으나, 국정을 돌보기를 즐기지 않고, 술酒과 성색聲色에 빠져서, 좋게 끝을 맺을 수 없었으니, 슬픈 일이었다.
41) 在西都
42) 나라의 옛터 또는 옛 나라의 터전에 흐르는 냇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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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정할 곳]
(1) 十二年庚午, ... 是年, 八月, ... 又圍岳谷城 -> 又圍缶谷城, 악곡성岳谷城을 포위하매 ->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하매
(2) ... 仇道為岳谷城主 -> 仇道為缶谷城主, 구도는 악곡성주岳谷城主로 되었다. -> 구도는 부곡성주로 되었다.
(3) 十三年辛未, ... 四月, ... 賜竹呂之釼而誅不道-> 賜竹呂之釼以誅不道
(4)十四年壬申, ... 羅,國良阿述明一吉飡 -> 羅, 國良阿[湌]述明一吉飡, 신라羅에선 나라의 량재良才 아술명阿述明이 일길찬으로 되었고 -> 신라羅에선 국량國良이 아찬阿湌으로 술명述明이 일길찬으로 되었고 {삼국사기 벌휴이사금 기사에 “九年 春正月 拜國良爲阿飡 述明爲一吉飡”으로 되어 있음.}
그저 고맙습니다...!!
19년정축(CE197) 후한말이어서 전쟁을 피해 피난온 한漢인들 인듯....
196년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낙양출병.
예!
후한 말에 싸움이 낙양 인근에서 있는데, 지금 요녕성 쯤의 漢人들이 피난할 이유는 정작 없었을 것입니다.
고구리가 이 싸움터의 인근에 있을 때나 가능한 기록일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졸본이 동명성왕이 개국한곳 일까요? 글을 읽다보니 궁금해 지네요.
이 곳에 올려져 있는 추모경 전부를 읽어보시면 저절로 답이 나올 것으로 봅니다.
앞쪽을 찾아보니 용산에 동명성왕의 사당을 지었던데 그곳이 졸본이면 졸본부여는 고구려를 뜻하는 것일까요.
졸본국은 북부여 또는 고구리의 일부이고, 졸본부여는 비류부여 황룡부여 개마부여 비리부여 순노부여 구다부여 행인부여 등과 같이 부여의 어느 일부분을 호칭한 것이고,
서토의 기록에 나오는 부여는 그들이 접촉한 북부여나 고구리의 일부를 부여로 적은 것으로 봅니다.
얼켜있고 복잡하던 부여의 구도가 쉽게 정리가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史穿: 어제는 광명대제편을보고 오늘은 추모대제편을 봤는데... 질문이 바보같은 질문을 했네요....
우양이 졸본의 도성이라고 주석이 달렸있네요.